자료실

管山城 전투와 백제 中興의 군주 聖王의 죽음

鄭淳台   |   2019-11-06 | hit 2567

管山城 전투와 백제 中興의 군주 聖王의 죽음

551년, 백제 聖王과 신라 眞興王은 연합군을 형성하여 漢江 유역으로부터 고구려 세력을 축출했다. 이때 신라는 南漢江(한강의 源流) 유역의 고구려 영토 10개 郡을 획득했다. 백제는 왕조 발상지인 한강 下流(한강의 本流) 유역의 6개 郡을 회복했다. 개로왕의 敗死 이래 처음으로 고구려에 대해 雪辱했던 것이다.

그렇다면 백제와 신라의 한강 유역 회복과 진출이 어떻게 가능했을까? 그것은 고구려의 內憂外患을 이용한 결과였다. 551년 가을 7월, 고구려는 新城(지금의 요령성 撫順) 방면으로 침략해온 돌궐 軍을 방어하기 위해 漢江 유역의 主力軍을 南만주 지역으로 돌려놓은 상황이었다. 뿐만 아니라 陽原王(재위 545∼559) 시대의 고구려는 왕위 계승문제 등과 관련하여 심각한 내분까지 빚어지고 있었다.

어떠한 군사강국도 국내 政情이 불안한 가운데 2正面 혹은 3正面 작전은 무리이다. 이때 고구려도 이렇다 할 방어전 한번 제대로 치르지 못하고 長壽王 이래로 징악해온 한반도 중부 지역에 대한 覇權을 상실하고 말았다.

고구려가 臨津江 이북으로 쫓겨간 뒤 한강 유역은 백제와 신라가 兩分했다. 한강유역이라면 한반도 면적의 12%에 달하는 2만6천여 ㎢이다. 그러나 江 하나의 유역을 나누어 가진다는 것은 신라나 백제라는 두 古代 영토국가가 지닌 屬性과는 전혀 어울리지 않은 개념이었다. 더구나 백제가 탈환한 한강 하류 유역은 신라가 차지한 남한강 유역보다 전략적• 경제적 가치가 월등한 지역이었다.  

원래, 古代국가는 처음에 사방 수십 리도 되지 않는 조그마한 城邑國家에서 출발하여 주변의 고만고만한 라이벌 국가들을 하나하나 제압하면서 영토를 넓혀온 정복국가인 것이다. 고구려, 백제, 신라의 발전 과정이 모두 그러했다.  

서기 433년 이래 120년간 계속되어오던 백제-신라 동맹관계를 먼저 결정적으로 破棄한 쪽은 신라였다. 진흥왕 14년(553) 가을 7월, 신라군은 백제로부터 한강 하류 6개 군을 橫奪하여 新州를 설치했다. 이때 新州의 軍主에는 金武力이 기용되었다. 김무력은 532년 신라에게 병합된 金官伽倻(경남 김해)의 마지막 왕 仇衡의 막내아들이며, 훗날 삼국통일의 제1공신이 되는 金庾信의 조부이다. 김유신이 신라의 邊方이던 지금의 충북 鎭川에서 태어났다는 얘기는 유명하다.   

힘들게 수복한 한강 하류 유역을 횡탈당한 백제의 聖王은 반격을 결심했다. 백제를 지원하기 위한 倭의 원병과 전쟁물자가 속속 내도했다. 신라에게 합병의 위협을 받고 있던 大伽倻(경북 高靈) 중심의 後期 가야연맹 국가들도 백제 진영에 가담했다. 성왕은 백제-가야-왜 연합군이 결성되자, 왕자 餘昌을 장수로 삼아 會心의 신라 정벌전을 개시했다.

『三國遺事』에 따르면 554년 가을 9월, 신라의 서부 국경을 침입하여 남녀 3만9000명을 포로로 잡고, 말 8000필을 획득했다. 백성은 농업 생산과 병력 자원의 根源이었던 만큼 緖戰의 눈부신 승리였다.

그러나 백제로서는 불운했다. 원정군 최고사령관인 餘昌이 陣中에서 병을 얻었던 것이다. 백제의 불행은 여기서 그치지 않았다. 아들 여창의 急病에 놀란 성왕이 불과 50騎만 거느리고 3국 연합군의 戰線司令部가 설치되어 있던 管山城(충북 옥천군)으로 달려가던 중 大田 동남부에 위치한 食藏山(598m) 기슭의 ‘구진베루’에서 金武力 휘하의 伏兵에 걸려 斬首당했다. 백제 中興의 군주로서는 너무나 허망한 죽음이었다. 신라는 聖王의 首級을 자기들의 왕궁인 月城의 계단 밑에 묻었다. 

이어 벌어진 관산성(충북옥천) 전투에서 金武力의 戰功은 발군이었다. 신라의 중앙군단은 모두 패퇴했지만, 新州 군단은 백제-가야-왜 연합군 2만9600 명을 참살했다. 이때 백제군의 최고 사령관인 여창은 한 가닥 血路를 뚫고 겨우 전장에서 이탈할 수 있었다. 그가 바로 백제 25대 威德王이다.  

여기서 승세를 탄 신라군은 다시 西進하여 지금의 금산, 무주, 그리고 全州 동부 지역까지 攻取하여 完山州를 설치했다. 진흥왕 23년(562)에 이르러서는 大伽倻를 멸망시키고, 가야연맹의 거의 全영토를 차지했다. 이로써 신라는 한강 유역과 낙동강 유역의 비옥한 토지를 모두 차지했을 뿐만 아니라 당시 선진 문화의 중심부였던 중국의 山東半島와 바로 연결되는 黃海직선항로의 요충인 黨項城(경기도 화성시 西新面 尙安里의 唐城)을 획득했다. 唐城은 당진시 石門面 해안에서 빤히 보이는 곳에 위치해 있다.  

그러나 그로 인해 신라가 치뤄야 했던 代價도 국가의 存立을 위협받을 만큼 혹독했다. 이후 100여 년간 신라는 백제와 고구려의 宿敵이 되어 끊임없은 挾攻을 받아 일방적인 守勢에 몰리고 만다.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