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몽촌토성과 悲運의 군주 蓋鹵王(개로왕)

鄭淳台   |   2010-02-17 | hit 6429

<한강가에 둑을 쌓았던 것은 治績(치적)>

서울 松坡區 芳荑洞(방이동)에 위치한 夢村土城(몽촌토성)에 오르면 悲運(비운)의 군주 蓋鹵王(개로왕)이 생각난다. 이곳에서 개로왕은 사로잡혀 참수당했다. 다음은 漢城백제의 패망 원인을 설명한 <삼국사기> 개로왕 21년 條(475)의 기사이다.
“고구려 長壽王(장수왕)은 백제를 치기 위해 백제에 가서 첩자 노릇을 할 만한 자를 구하였다. 이때 승려 道琳(도림)이 응해 말하였다. (中略) 장수왕이 기뻐하여 그를 백제에 密派(밀파)했다. 이에 도림은 죄를 지어 도망하는 체하며 백제로 들어왔다”
그러면 도림은 어떻게 개로왕에게 어떻게 접근했을까. 이어지는 <삼국사기>의 기록이다.



“당시 개로왕은 바둑을 좋아했다. 도림이 대궐문에 이르러 ‘제가 어려서부터 바둑을 배워 妙手(묘수)를 터득하고 있으니 대왕께 전해 드리려고 합니다’ 하였다. 개로왕이 그를 불러 對局(대국)을 하여 보니 과연 國手였다. 묘수에 탄복한 개로왕은 도림을 上客(상객)으로 대우하고 매우 친하게 느껴 서로 늦게 만난 것을 아쉬워했다”
위의 대목은 개로왕이 간첩의 공작에 넘어가 바둑에 몰입, 나랏일에 소홀해졌음을 나타내는 내용이다. 어느 날 도림이 조용한 틈을 타서 개로왕을 꼬드겼다.
“대왕의 나라는 사방이 산과 강, 그리고 바다로 둘러싸여 있는데, 이것은 하늘이 베푼 잇점이지, 사람의 힘으로 이루어진 것은 아닙니다. 그러므로 이웃 나라들이 감히 이 나라를 엿볼 생각은 감히 갖지 못하고, 다만 받들어 섬기고 싶어 할 따름입니다” 도림은 이렇게 漢城을 ‘天賦(천부)의 땅’으로 극구 찬양하면서 성곽과 제방의 보강, 先王의 호화 능묘 축조 등을 권유했다.



“개로왕은 백성을 모조리 징발해 흙을 쪄서 성을 쌓고, 그 안에 궁궐·누각·射臺(사대)를 지었는데, 모두 장대하고 화려했다. 그리고 郁里河(욱리하:한강)에서 큰 돌을 캐다가 관을 만들어 아버지(비유왕)의 뼈를 옮겨 묻고 蛇城(사성:지금의 서울 송파구 풍납동 토성) 동쪽으로부터 崇山(숭산:경기도 광주시 검단산) 북쪽 기슭까지 강을 따라 둑을 쌓았다. 이런 대규모 토목공사 때문에 나라의 창고가 텅 비고, 백성들이 곤궁하여져 나라는 累卵(누란)의 危機를 맞았다”



위의 기사를 음미하면 개로왕은 폭정의 군주가 아니었다. 지금의 서울 송파구 풍납동 土城으로부터 경기도 광주시 검단산 북쪽 기슭까지 성곽을 쌓아 都城(도성)의 방어체제를 보강했던 것이다. 또한 民家가 홍수에 떠내려가지 않게 한강가에 둑을 쌓았던 것은 오히려 治績(치적)이라고 할 만했다. 선왕의 능묘와 궁궐을 수축한 것은 개로왕의 왕권 확립 차원에서 이해할 수 있는 대목이다.
그러나 국책사업에도 우선순위와 시기가 있다. 오랫동안 고구려와 끊임없이 국지전을 벌이던 상황에서 강행된 대규모 토목공사가 失政(실정)인 것만은 부인할 수 없다.
백제의 경제를 파탄에 빠트린 도림은 고구려로 도망쳐 장수왕에게 백제의 형편을 낱낱이 보고했다. 즉각, 장수왕은 몸소 3만 군사를 이끌고 백제 침공에 나섰다. 남침의 급보를 전해들은 개로왕은 그제서야 도림에게 속은 것을 알고 그의 아들 文周(문주)에게 이렇게 후회했다.
“내가 어리석고 총명하지 못해 간사한 사람의 말을 믿다가 이 지경에 이르렀다. 백성들은 쇠잔하고 군대는 허약하니 누가 기꺼이 나를 위해 힘써 싸우려 하겠는가? 나는 나라를 위해 당연히 죽어도 되겠지만, 네가 여기에서 함께 죽는 것은 유익할 것이 없다. 너는 난리를 피해 다른 곳으로 가서 國系(국계)를 잇게 하라”
이러한 개로왕의 후회는 후세 사람들의 가슴을 저미게 한다. 敵前逃走(적전도주)를 거부하고 수도를 지키겠다는 비장한 의지가 엿보인다. 사실, 개로왕은 解(해)씨&#8228 眞(진)씨 등 귀족세력의 발호에 의해 先代의 久&#23570辛王(구이신왕)·비유왕이 잇달아 암살당한 국가 위기에 즉위한 이래 강력한 왕권을 확립하려고 비상하게 노력했던 君主였다.
개로왕의 왕권 확립에 최대의 저해 요인은 고구려의 부단한 남침 압박이었다. 장수왕 15년(427) 국내성으로부터 평양으로 도읍을 옮긴 고구려는 당시 동아시아 세계의 최강국이었던 서쪽의 北魏(북위)와 친선관계를 유지하고 한반도 남부를 먹으려 했던 이른바 ‘西守南進(서수남진)’의 정책을 구사했다. 北魏는 중국대륙의 절반을 정복한 鮮卑族(선비족)의 기마민족국가였다.
개로왕은 全方位 外交(전방위 외교)로 고구려의 西守南進 정책에 맞섰다. 羅濟同盟(나제동맹)을 심화시키고, 동생 곤지를 왜국에 파견하여 군사동맹을 추진하는 한편, 472년 北魏에 개로왕 자신의 사위를 사신으로 파견해 군사원조를 요청했다. 이 시기, 고구려는 매년 세 번씩 北魏에 조공함으로써 백제의 北方외교를 봉쇄했다.


<阿且山(아차산)의 ‘바람’으로 ‘꿈마을’을 정복>



475년 가을 9월(음력), 長壽王의 고구려군은 그들의 전통적 機動路(기동로)인 중랑천변을 따라 江北에 진출, 지금 쉐라톤 워커힐 호텔이 들어선 阿且山(아차산)에 本陣(본진)을 치고, 백제의 수도 漢城을 포위했다. 아차성에 올라 남쪽을 바라보면 漢江 너머로 백제의 都城이었던 바람들이(風納)土城과 백제의 王城인 꿈마을(夢村)土城이 또렷하게 보인다. 아차산의 홍련봉에 아직도 남아 있는 堡壘(보루)에서 연꽃 무늬가 화려한 고구려製 宮室用級(궁실용급) 기와가 발굴되어 이곳이 바로 장수왕의 戰線사령부였던 것으로 짐작되고 있다.
고구려군은 네 방면으로 나누어 백제의 도성을 협공했다. 개로왕은 성문을 굳게 닫고 방어 했다. 고구려군은 강한 北風을 이용한 火攻(화공)으로 성문을 불태웠다. 공포에 휩싸인 都城의 군민들 중에는 항복하려는 자가 속출했다. 이제 최후라고 판단한 개로왕은 騎兵(기병) 수십 기를 데리고 성문을 빠져나와 서쪽으로 도주했다. <삼국사기>의 다음 기록은 당시 백제의 都城體制(도성체제)에 대한 중요한 시사를 하고 있다.
<이때 고구려의 對盧(대로:12품계 중 제4위)인 齊于(제우)·再曾傑婁(재증걸루)&#8228古&#23570萬年(고이만년) 등은 군사를 거느리고 北城을 공격한 지 7일 만에 함락시키고, 南城으로 옮겨 공격하자 성 안이 위험에 빠지고, 개로왕은 도주했다>
위의 대목에서 멸망 당시 漢城 백제의 도성체제는 2원화되어 있었다는 사실을 알 수 있다. 개로왕은 7晝夜(주야)에 걸친 공방전 끝에 北城이 무너지는 모습을 南城에서 목격하고 남성을 탈출했다. 북성은 풍납토성, 남성은 그 700m 동남쪽의 몽촌토성으로 여겨진다. 개로왕은 도주하다가 적군에게 사로잡히고 말았다. 다음은 이어지는 <삼국사기>의 기록.
<고구려 장수 傑婁(걸루) 등이 말에서 내려 절하고, 얼마 후에 왕의 낯을 향해 세 번 침을 뱉고서 罪目(죄목)을 따진 다음 阿且城(아차성) 밑으로 묶어 보내 목을 치게 했다. 桀婁와 萬年(만년)은 원래 백제 사람으로 죄를 짓고 고구려로 도망했었다.>
위의 기사에서 고구려 장수 걸루와 만년은 개로왕에게 깊은 원한을 품은 백제 출신자임을 알 수 있다. 그들 둘은 개로왕의 王權 강화 추진과 그에 따른 백제 왕족&#8228 귀족계급 내부의 권력투쟁에 패배해 고구려로 망명했던 것으로 보인다.


<下水道(하수도) 시설을 완비하고 품위 있게 살았던 漢城백제 사람들>



일제 강점기에 촬영된 풍납토성 北壁(북벽:서울지하철 5호선 천호역 바로 옆)을 보면 현재의 모습보다 훨씬 웅장하다. 북벽 앞의 방어용 垓字(해자)인 폭 40~50m의 샛강은 1970년대에 매립되어 현재 천호동 중심가를 관통하는 43번 국도로 변했고, 도로변에는 백화점 등 고층건물이 즐비하다. 풍납토성은 한강변에 쌓은 平地城으로 둘레가 4km, 높이가 7~9m 정도였다. 현재 풍납토성 내부의 주민은 약 5만 명, 초등학교만 해도 두 개나 있다.
이곳에서 발굴된 漢城백제의 유물은 국보&#8228 보물급이 수두룩하다. 흙을 구워 만든 礎石(초석), 下水管(하수관)으로 사용되었던 土管, 바닥에 까는 벽돌, 얇고 큰 기와 등 당시 최고 계급만 쓸 수 있는 유물이 많이 발굴되었다. 풍납토성의 20분의 1 정도만 발굴 조사한 현재, 이곳에서 나온 유물만 수만 점이다. 漢城백제박물관이 건립 중에 있지만, 이곳을 빛낼 문화유산은 너무 많아 아직도 분류도 다 하지 못하고 있다.
최고의 유물은 하수도用 土管이다. 필자의 어린 시절의 한국의 시골에서도 풍납토성 내부처럼 하수시설이 완비된 집에서 살지 못했다. 풍납토성과 바깥에서도 목재로 짠 漢城백제시대의 우물이 발견되었다. 상당히 유족한 사람이 살았던 것을 의미한다.
몽촌토성은 88서울올림픽의 主무대로서 그때까지 존속했던 유럽 공산주의 국가들에게 그들의 국가운영이 얼마나 非합리적인가를 깨닫게 했다. 자유주의 시장경제의 우월성이 드러난 것이었다. 몽촌토성 안에서도 유물 7000여 점이 발굴되었다. 높이 54cm의 그릇 받침 토기, 金銅(금동) 버클, 뼈로 만든 갑옷 등 다양하다.



전철 5호선 방이역 인근에는 백제의 橫穴式(횡혈식:주검을 묻기 위해 지면과 수평으로 판 널길을 통해 널방으로 들어가는 장례법) 고분 등 6기, 전철 8호선 석촌역 근처에는 백제의 전성시대를 열었던, 近肖古王의 무덤으로 추정되는 거대한 積石塚(적석총:지상에 일정한 높이로 돌기단을 쌓아서 주검을 안치하는 널방을 만들고 그 상부를 돌로 쌓는 무덤 형식)이 있다. 1960~70년대까지만 해도, 이곳 주민들이 주택을 지을 때 멋모르고 여러 적석총의 돌을 옮겨서 방구들을 깔았다고 한다. 동네 이름이 ‘石村洞(석촌동)’이라고 명명된 까닭이다. 아직도 송파구&#8228강동구의 전철역 가까운 곳에서 漢城백제의 숨결을 느낄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