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웅진 遷都(천도)는 文周王의 苦肉之策(고육지책)

鄭淳台   |   2010-02-18 | hit 6438

<음모와 弑害(시해)로 얼룩진 熊津(웅진)시대의 백제>



한편 개로왕의 아들 文周는 漢城 함락 직전에 木&#21158滿致(목협만치)와 祖彌傑致(조미걸치)를 데리고 남쪽으로 피난했다. 다음은 <삼국사기> 文周王 즉위년도의 기사이다.
<개로왕 재위 21년 고구려가 침입하여 한성을 포위하였다. 개로왕이 城 안에서 굳게 버티면서 文周를 新羅로 보내 구원을 요청하도록 하였다. 그는 신라에서 구원병 1만 명을 데리고 돌아왔다. 그러나 한성은 함락되고, 父王은 전사했기 때문에 문주가 왕위에 올랐다>



이때 문주가 신라의 구원병과 함께 漢城까지 북상했는지는 의문이다. 왜냐하면 漢城 지역은 553년 羅濟 연합군이 한강유역을 탈환할 때까지 고구려의 영토였고, 몽촌토성 안에서 고구려의 토기 등이 발견되었기 때문이다. 어떻든 문주는 熊津(웅진:지금의 공주)으로 남하하여 웅진백제 시대를 개막시킨다. 웅진 遷都(천도)는 고구려의 强勢 하에서 국가 방어를 위한 苦肉之策(고육지책)이었다. 專守防禦(전수방어: 공격을 하지 않고 오로지 방어만을 한다는 뜻)의 군사적 요충이었지 백제 국가의 미래를 설계한 遷都는 아니었다.
문주는 우유부단한 성품이었으나, 백성들을 사랑하였으므로 백성들도 그를 사랑했다. 그러나 권력투쟁에 실패, 왕권을 지키지 못했다. 재위 3년(477) 가을, 兵官佐平(병관좌평:국방장관에 해당)이던 解仇(해구)에게 사냥터에서 시해당했다. 해구는 권력을 마음대로 휘두르고, 법을 어지럽히며 임금을 무시하고 있었으나 문주왕은 그를 제어하지 못했다.
웅진백제 시대엔 政情(정정)이 늘 불안했다. 문주왕에 이어 13세의 나이로 즉위한 그의 맏아들 三斤王(삼근왕)은 나랏일을 父王(부왕)의 원수인 解仇(해구)에게 맡겼다. 燕(연)씨의 반란에 시달린 그는 재위 3년 만에 사망했다. 왕권의 향방은 예측하기 어려웠다. 결국 請兵(청병:援兵을 청함) 외교를 위해 왜국에 갔던 昆支(곤지)의 아들이 귀국해 즉위했다. 그가 東城王(동성왕)이다. 동성왕은 담력이 뛰어나고 활을 잘 쏘았다.
웅진은 일국의 수도로서 너무 협소했다. 금강 南岸(남안)의 웅진은 주위의 산과 구릉으로 에워싸여 있기 때문에 경제적 발전을 기할 수 있는 평야가 절대 부족했다. 여름철 금강의 잦은 범람도 골칫거리였다. <삼국사기> 동성왕 13년 여름 6월 條에는 “熊川(웅천:금강)의 물이 불어 王都(왕도)가 잠기고 200여 집이 떠내려 갔다”고 되어 있다. 이어 “가을 7월에는 백성들이 굶주려 新羅로 도망간 자가 600여 戶나 되었다”고 기록되어 있다.
동성왕대 백제는 國威(국위)를 회복했다. 491년에 신라와 結婚(결혼) 동맹을 맺고(동성왕 15년), 494년 신라군이 고구려군의 침략으로 犬牙城(대아성:경북 문경 서쪽)에서 포위당하자 백제군 3000명을 급파해 구원해 주기도 했다(동성왕 16년).
그러나 동성왕은 재위 말기에 갈수록 失政(실정)을 자주 범했다. 다음은 <삼국사기> 동성왕 21년(499) 條의 기사이다.
<여름, 큰 가뭄이 들어 백성들이 굶주려서 서로 잡아먹고, 도적이 많이 생기자 신하들이 창고를 풀어 구제하자고 하였으나 왕이 듣지 않았다. 漢山(한산:지금의 서울 지역) 사람들 중에 고구려로 도망한 자가 2000명이나 되었다. 어떻든 웅진시대의 백제는 자연재해에 의한 흉년으로 백성들의 삶이 어려웠다.>

<백제의 國威(국위)를 떨친 무령왕>

그러나 동성왕은 백성들의 삶에는 무심하여 유흥에 빠지고 말았다. 扶餘씨 왕가의 DNA에는 風流因子(풍류인자)가 깃들어 있는 듯하다. <삼국사기> 동성왕 22년(500) 봄 條에는 다음과 같이 쓰여 있다. 동성왕 22년이라면 백성들이 굶주려서 서로 잡아먹던 참상을 겪은 바로 다음해이다.
<궁궐 동쪽에 임류각이라는 정자를 세웠는데, 높이가 다섯 길이었다. 또 연못을 파고 진기한 짐승들을 길렀다. 諫官(간관:임금의 잘못을 諫하고 百官의 비행을 규탄하던 벼슬아치)들이 이를 항의하여 上疏(상소)했으나 듣지 않고 다시 諫(간)하는 신하가 있을까 염려하여 대궐문을 닫아버렸다>
이해 음력 5월에도 가물었지만, 동성왕은 측근들과 함께 임류각에서 잔치를 베풀며 밤새도록 실컷 즐겼다. 연간 1600mm 이상의 강우량을 기록해 영농의 조건이 매우 좋은 일본에서 성장한 동성왕은 연간 강우량 1000mm 정도의 금강 유역의 농업엔 생소했을지 모른다.
웅진시대의 백제는 解씨&#8231 眞씨 등 漢城시대 귀족들이 쇠퇴하고, 沙(사)씨&#8231 燕(연)씨&#8231 &#33513(백)씨 등 금강 유역의 신흥 토착세력이 등장해 주도권을 잡아 갔다. 동성왕은 沙씨와 木씨와 결탁하여 眞씨와 &#33513씨를 타도함으로써 왕권을 강화하기 위해 사비 遷都를 계획했다. 그러나 그는 그 과정에서 불의의 반격을 받아 피살되었다. 다음은 그의 최후를 전하는 <삼국사기> 동성왕 23년(501) 조의 요지이다.
<가을, 가림성(충남 부여군 임천면)을 쌓고, 衛士좌평(경호실장) &#33513加(백가)가 가서 지키게 했으나 백가는 병을 핑계대고 가지 않았다. 그래도 왕이 백가더러 가라고 하자, 그는 왕을 몹시 원망스럽게 여겼다. 이해 겨울 들어 백가는 자객을 보내 왕을 칼로 찌르게 했다>
웅진시대 63년간에 5명의 임금 가운데 문주&#8228 삼근&#8231 동성 등 세 王이 신하에게 피살되는 등 비정상적으로 죽었다
동성왕에 이어 昆支(곤지:개로왕의 동생)의 장남이며 동성왕의 異母兄인 武寧王(무령왕)이 나이 42세로 즉위했다. 그의 이름은 斯摩(사마)이다. 사마는 아버지 곤지가 개로왕의 명으로 請兵외교를 위해 왜국으로 항해하던 도중에 태어났다. 그의 어머니는 산달이 임박했음에도 불구하고 왜국에서 장기체류할 남편 곤지를 따라갔는데, 배가 큐슈(九州) 근해를 지날 무렵 産氣(산기)를 느끼고 가카라시마(各羅島)에 상륙해 461년 6월1일 출산했다. 출생지가 섬(島)이라 해서 ‘斯摩(사마)’라는 이름을 얻었던 것 같다. 斯摩와 島를 日本語로 읽으면 둘 모두 ‘시마’이다.



무령왕의 출생과 관련한 기사는 <日本書紀>가 가장 상세하다. 그것은 1971년 충남 公州에서 무령왕릉이 발견되고, 그의 墓碑(묘비)가 출토되어 武寧王 관련 <日本書紀> 기록의 정확함이 입증되었다. <삼국사기>에는 武寧王에 대해 “키가 8척(당시 1척은 23cm로서 신장 184cm임)이며, 얼굴은 그림같이 곱고 인자하고, 또한 관대하여 백성들이 순종하였다”고 적혀 있다.







수년 전 필자는 무령왕의 출생지 가카라시마를 답사한 일이 있는데. 그곳은 임진왜란 때 히데요시(豊臣秀吉)가 침략기지로 삼았던 나고야(名護屋)城에서 10노트의 여객선으로 20분쯤 걸리는 바다 위에 떠 있는 섬이다. 이곳 큰 바위굴이 斯摩의 産室(산실)이었다. 바위굴 바로 앞에는 파도가 밀려오는 자갈해안이 있는데, 한반도 남해 연안에서 구로시오(黑潮)를 타고 떠밀려 온 한글 상표의 라면 봉지, 플라스틱병 등이 나뒹굴고 있었다.


무령왕은 백제의 국위를 떨친 王이었다. 묘비명에는 황제의 죽음에 사용했던 ‘崩(붕)’ 자를 새겨 넣었다. 무령왕은 加林城을 공격하여 호족 출신 백가의 목을 베고 그의 시신은 白江(백강:금강)에 던져버렸다. 王權 도전에 대한 결연한 경고였다. 또한 고구려에 대해 ‘軌敵句麗(궤적구려)’라고 낮춰 부르면서 고구려·말갈과의 전투에서 잇달아 승리하여 失地(실지)의 일부를 탈환했다.
무령왕은 농업경제적 기반도 꾸준히 넓혀 나갔다. <日本書紀> 등은 그가 백제왕으로 재위하는 23년 동안 왜국에서는 백제로부터 最선진문물을 도입했는데, 그로 인해 “畿內(기나이: 수도권)가 새로워졌다”고 표현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