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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비성 遷都(천도)와 백제의 中興(중흥)

鄭淳台   |   2010-02-19 | hit 6769

<‘백제 中興의 군주’ 聖王(성왕)>



백제 26대 임금이 聖王(성왕:재위 523~554)인데, 무령왕의 아들이다. 지혜와 식견이 뛰어나고 일에 과단성이 있고 治績(치적)도 많아 ‘백제 中興의 군주’로 불린다. 聖王은 무령왕이 마련한 경제적 토대 위에서 재위 16년(538) 봄에 지금의 충남 扶餘인 泗&#27800(사비)로 천도했다. 동시에 국호를 南夫餘로 고쳐 같은 夫餘系인 고구려와 正統性(정통성) 경쟁도 불사했다. 사비 천도는 음모와 모략, 그리고 반란으로 얼룩진 熊津 땅을 벗어나 참신한 수도를 경영할 필요를 느꼈기 때문으로, 東城王 이후 백제의 宿願(숙원)사업이었다. 그렇다면 천도지로서 사비를 택한 이유는 무엇일까. 다음은 李道學(이도학) 교수의 견해이다.



“첫째는 지리적 여건이다. 사비는 백마강이 북으로부터 서쪽까지 반달처럼 휘감겨 흐르고 있다. 동쪽으로는 계룡산&#8231 대둔산으로 이어지는 산맥이 자연적인 성벽을 이루고 있다. 또한 서쪽으로는 서해를 향해 흐르고 있는 금강을 통해 中國이나 일본을 왕래할 수 있는 水路(수로) 교통의 요지였다. 남으로는 곡창인 湖南평야를 두고 있어 왕권 강화와 대외전쟁을 수행하는 데 필요한 경제적 기반을 확보할 수 있었다. 둘째, 부여지방은 청동기 시대 이래로 오랜 문화적 전통과 역사성을 가진 곳이었다.
사비는 웅진에 비해 백강의 100여리 하류에 위치해 있다. 사비의 우월성에 대해 조선시대의 지리서 <擇里志(택리지)>에는 다음과 같이 지적하고 있다.
<公州 동쪽은 강물이 얕고 여울이 많아서 배가 잘 다니지 못한다. 그러나 부여·은진부터는 바다의 潮水(조수)가 통하게 되므로 白馬江 이하 鎭江(진강) 일대까지는 모두 배가 통행할 수 있는 이점이 있다>



리아시스 해안을 끼고 있는 해양왕국 백제는 그 지리적 특성상 서해안에서 금강으로 이어지는 漕運路(조운로:조세로 징수한 곡물 등을 선박으로 운송하던 뱃길)의 비중이 클 수밖에 없었다. 사비 遷都는 조운로를 단축시킨다는 경제적 효용성과 지방에 대한 통제력의 강화라는 측면도 함께 고려한 것으로 보인다. 더구나 사방이 산으로 둘러싸여 꽉 막힌 웅진과는 달리 넓고 비옥한 토지를 발 아래 두고 있었다.




<백제의 불운&#8212管山城(관산성) 전투>

고구려에 의해 한성백제가 종말을 고한 이래 羅濟 동맹은 고구려의 남진을 저지하는 기본 틀이 되었다. 당시 삼국은 1强(강)2弱(약)의 형세를 이루고 있었다. 강한 고구려에 각개격파를 당하지 않기 위해서는 나머지 2弱은 同盟을 하지 않을 수 없었다.
삼국이 제각기 영토를 확장하여 서로의 국경이 ‘개 이빨처럼 맞물린’ 이후 신라는 고구려에 억눌려 오기만 했다. 이런 신라가 처음으로 소백산맥의 鳥嶺(조령)&#8228竹嶺(죽령)을 넘어 공세로 나선 것은 진흥왕 때였다.
553년, 백제의 聖王은 신라와의 동맹관계를 적절히 이용하여 고구려가 차지하고 漢江 하류지역을 탈환했다. 개로왕의 敗死(패사) 이래 76년 만의 국토회복이었다. 이때 신라도 漢江 상류 고구려 땅 10개 郡을 탈취했다. 그러나 강 하나의 유역, 그것도 한반도의 대동맥인 漢江을 사이좋게 나누어가진다는 것은 신라&#8231 백제라는 두 古代국가가 지닌 속성과는 별로 어울리지 않는 개념이었다. 더구나 백제가 탈환한 한강 하류 지역은 신라가 탈취한 한강 상류 지역보다 전략적·경제적 가치가 월등한 지역이었다.
古代 領土國家(영토국가)는 처음에는 사방 10리 정도에 불과한 城邑國家(성읍국가)로부터 출발하여 주변의 고만고만한 라이벌을 하나하나 제압하면서 덩치를 불려 온 征服(정복)국가였다. 고구려·백제·신라의 발전 과정이 모두 그러했다. 한강 유역을 둘러싼 백제·신라의 격돌은 예정된 수순이었다. 이와 같은 대결을 예상한 聖王(성왕)은 왜국에 불교를 전하는 등의 비상한 외교적 노력으로 백제·왜국 동맹을 더욱 강화하려 했다.
이런 국제정세 아래 413년 이후 120년간 지속되어오던 신라·백제의 군사동맹을 먼저 배신한 쪽은 신라였다. 眞興王 14년(553) 가을 7월, 신라군은 백제로부터 한강 하류를 탈취하여 新州(신주)를 설치했다. 이때 신주의 軍主(군주:지방장관을 겸한 군관구사령관)에는 金武力이 기용되었다. 김무력은 532년 신라에 병합당한 金官伽倻(금관가야:경남 김해)의 마지막 왕 金仇衡(김구형)의 아들이며 金庾信(김유신)의 조부이다.
힘들게 수복한 故土(고토)를 횡탈당한 백제로서는 반드시 신라에 복수전을 전개해야만 했다. 그러나 聖王의 책략도 녹녹치 않았다. <삼국사기> 聖王 31년(553년) 겨울 10월, 聖王의 공주를 진흥왕의 小妃(소비)로 시집을 보냈다. 이것은 성왕의 僞裝(위장) 평화공세였다.
평화공세가 진행되고 있는 동안에도 백제를 지원하기 위한 왜군의 원병과 전쟁 물자가 속속 내도했다. 신라로부터 병합의 압박을 받고 있던 大伽倻(대가야:경북 고령)도 백제 진영에 가담했다.
성왕의 왕자 扶餘昌(부여창)은 백제·대가야·왜 연합군 3만을 거느리고 신라의 서부 국경을 침입, 남녀 3만9000명을 포획하고, 말 8000필을 탈취한 뒤, 管山城(관산성:충북 옥천)에 전선사령부를 설치했다.
그러나 백제로서는 불운했다. 전선사령관 부여창이 陣中(진중)에서 병을 얻었다. 군사의 사기가 떨칠 수 없었다. 백제의 불운은 여기서 그치지 않았다. <삼국사기>에 의하면 이때 聖王은 아들 부여창을 위로하기 위해 몸소 50기를 이끌고 관산성 바로 서쪽 구천을 통과하다가 신라군의 매복작전에 걸려 전몰했다. 그러나 日本 宮內省本(궁내성본) <삼국사기>에는 이때 성왕의 구원병력을 ‘50騎(기)’가 아니라 ‘步騎(보기:보병과 기병) 五千(오천)’이라 기록하고 있다. 전쟁의 규모와 상황으로 미루어 後者의 기록이 타당한 것으로 보인다.
이어 벌어진 결전에서 백제군은 좌평(백제의 16官等 중 제1위) 4인을 포함 백제&#8231 대가야&#8231 왜 연합군 2만9600명이 전사했다. 백제군의 사령관 扶餘昌만 單騎(단기)로 한 가닥의 血路(혈로)를 뚫고 탈출했다. 다음은 <日本書紀>의 관련 기록이다.
<부여창은 포위를 당하여 탈출할 도리가 없었다. 筑紫國造(축자국조)가 활을 쏘아 신라 기병 중 최강자를 떨어뜨리고, 이어 비 오듯 連射(연사)하여 포위군을 물리쳐, 부여창이 사잇길로 빠져 도주했다>
築紫(츠쿠시)는 지금의 큐슈(九州)이며, 國造(구니노얏코)는 지방장관을 말한다. 관산성 전투에 참전한 왜병은 1000여 명이었다. 관산성에서 죽을 목숨을 건진 부여창이 戰死한 聖王을 승계했다. 그가 백제 25대 威德王(위덕왕)이다.
관산성 전투는 신라&#8231 백제의 국운을 판가름한 분수령이었다. 신라는 한강유역과 낙동강 서쪽 유역(가야諸國)을 비옥한 토지를 판도에 넣어 경제력이 급성장했을 뿐만 아니라 당시 東아시아 세계의 문화중심이었던 중국대륙과 직접 연결하는 서해 항로의 요충인 黨項城(당항성:경기도 화성시 南陽灣)을 장악했다. 이것이 바로 신라가 삼국통일의 길로 갈 수 있었던 도약대가 되었다.
한강 하류유역의 주인은 백제(BC 18년)→고구려(475년)→백제(553년)→신라(553년 7월)로 바뀌었다. 이렇게 한강유역은 3국이 영토 화장을 위해 피터지게 싸웠던 流血의 현장이다. 서울에서는 백제·고구려·신라의 유물이 모두 발굴되었다. 쟁탈의 요지였기 때문이다. 우리 역사를 보면 漢江 유역을 차지한 세력이 한반도 역사의 主流임을 다시 한번 확인할 수 있다.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