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前秦(전진)의 왕 符堅(부견)의 오판

鄭淳台   |   2010-02-20 | hit 6257

敵前(적전) 후퇴는 패망으로 직결

지금 서울 100리 밖에는 100만 대군의 主敵(주적)이 포진하고 있다. 이른바 ‘强盛大國(강성대국)’을 지향하는 金正日 정권이 기회 있을 때마다 “서울을 불바다로 만들겠다”는 등의 공갈을 되풀이한다. 그런 엄포가 나올 때마다 외국의 전문가들은 “한국이 위험하다”는 따위의 견해를 발표하고 있지만, 그때마다 서울의 거리는 여보란 듯 평온하고, 사재기 같은 것도 없다. 이것은 한국의 民心과 軍心이 서울을 지키겠다는 의연한 의지의 발로이다.
지금 수도권에는 대한민국 국민의 절반이 살고 있다. 한 발짝이라도 물러나면 국민정신과 사기는 消磨(소마:닳아서 없어짐)될 수밖에 없다. 이것이 역사의 교훈이다.
敵前 후퇴는 패망으로 직결된다는 사례로 가장 저명한 역사적 사례가 ‘&#28125水(비수)의 싸움’이다. 前秦의 왕 符堅(부견)은 거의 중국대륙을 통일할 뻔했다. 그는 漢族 왕조 東晋을 먹기 위해 수도 長安을 출발했다. 그가 거느린 병력은 보병 60여만 명과 기병 20만 명이었다.
前秦의 부견이라면 우리나라 초등학교 아이들도 달달 외는 이름이다. 그가 고구려 소수림왕 2년(372)에 불교를 전했기 때문이다. 이것이 우리나라 최초의 불교 전래이다. 백제는 그보다 10년 후인 382년 東晋으로부터 불교를 들여왔다.
전진이 남침하자 東晋은 재상 謝安(사안)의 동생 謝石(사석)을 최고사령관, 조카 謝玄(사현)을 前衛軍사령관으로 하는 8만의 병력으로 맞섰다. 이것은 집권자 謝씨 一家가 솔선수범하여 조국방위 전쟁에 나섰다는 얘기다.
전진군은 비수 西岸에 陣을 쳤다. 이로 인해 동진군은 渡河(도하)가 불가능해졌다. 용기 없는 者에게는 승리도 없다. 전위군사령관 謝玄은 사자를 파견, 前秦軍에게 이렇게 제의했다.
“貴軍(귀군)의 陣을 조금 후퇴시켜 우리 軍이 도하할 수 있도록 해 달라. 그런 후에 정정당당하게 決戰을 벌이고 싶은데, 어떤가?”
농경지역인 南朝의 전력은 기마민족이 주력인 北朝에 비해 전통적으로 약세였다. 더욱이 병력이 10분의 1밖에 안 되는 동진의 도전이었다. 부견은 이 제의를 받아들였다. 사실은 東晋軍이 渡河 도중에 일제히 공격을 가할 속셈이었다. 그러나 병사의 士氣는 그런 게 아니다.
前秦의 병사들은 갑자기 침착성을 잃고 허둥대다가 지휘관의 ‘정지’ 명령도 들으려 하지 않았다. 이때 포로가 되어 前秦의 軍中에 있던 東晋의 梁州長官 朱序(주서)가 亂軍(난군) 속에서 큰 소리로 부르짖었다.
“싸움은 졌다!”
前秦軍은 일순에 붕괴되어 도주했다. 동진군은 勝勢(승세)를 타고 추격전을 벌였다. 史書에 따르면 前秦軍은 ‘四分五裂(사분오열)’되어 ‘風聲鶴&#21811(풍성학려: 바람 소리와 학의 울음소리)’에도 깜짝 놀라 갈팡질팡했다. 歷戰(역전)의 君主인 符堅(부견)도 손을 쓸 틈이 없었다. 그는 80만 대군을 잃고 長安으로 돌아왔다.
패전 후 符堅 휘하의 부하들이 잇달아 배반했다. 그 중 하나인 선비족 慕容沖(모용충)은 平陽(山西省 大同)에서 自立하여 西燕(서연)의 황제를 자칭하고, 군사를 일으켜 長安을 포위했다. 부견은 都城을 버리고 도망쳤지만, 역시 그의 옛 부하였던 後秦王 姚&#33799(요장)에 붙잡혀 살해당했다.

대한민국 국민들은 ‘재미’의 人質이 될 수 없다

盧武鉉 후보는 대통령선거에서 충청도 표를 얻기 위해 수도 이전을 公約을 했고, 그의 표현대로라면 “재미를 보았다”. 그리고 ‘대못질을 해놓고’ 퇴임한 후 그를 포함한 一族의 부패를 은폐하기 위해 자살을 감행했다. 그렇다고 대한민국 국민들은 단지 ‘재미’의 人質이 될 수 없다.
사랑하는 여인과의 약속장소인 다리 밑에서 홍수로 물이 불어나도 붙박이처럼 기다리다가 익사한 ‘尾生(미생)’이라는 古代 중국사람의 행위가 미련한 것이 아니고, 과연 찬양할 만한 일인가. 그러면 여자를 남자로 바꾸는 것을 빼고는 다 할 수 있다는 英國의 의회는 도대체 무엇인가. 국가 이익과 국민의 삶을 높이는 쪽으로 개혁해 갈 줄 모르는 집단이야말로 頑迷守舊(완미수구:고집이 세고 사리에 어두운 자)이다. 법을 고치지 못하는 의회야말로 직무유기의 집단이다.
지금이 어느 때인데, 국민 과반수가 거주하는 수도권을 버리고 수백 조를 투입해서 생산성 낮은 행정수도를 만들어야 하는가. 한국은 公企業에 떠넘긴 빚을 포함할 때 국가부채가 600조 원에 달하고 있어 세계적 경제 위기를 벗어나기 위한 出口戰略(출구전략)도 아직 마련하지 못하고 있다. 首都를 일단 옮겼다가 통일이 되면 다시 서울로 다시 돌아오면 되지 않느냐는 어깃장이 지금 어떻게 가능한 것인가. 155마일 전선을 지키는 국군과 全국민의 절반에 달하는 수도권 주민에게 매우 부끄러운 일이다.
公州는 금강 북쪽의 편입으로 이제 금강이 시가지를 관류하게 되었지만, 골짜기가 좁아 耕地率(경지율)이 매우 낮다. 조선왕조 宣祖 31년(1598)에는 충청도 監營(감영)이 설치되었지만, 근대적 교통기관인 京釜線과 湖南線이 멀리 비켜나가는 바람에 1932년 신흥도시였던 大田에 도청을 내주고 말았다. 경부선이 부설될 때 이 지역 선비들이 “양반의 고을에 절대로 鐵馬(철마)가 지나갈 수 없다”고 완강하게 반대해 한반도의 교통 중심축에서 제외됨으로써 오랫동안 침체상태에 놓이게 된 것이다.
지금 표류하고 있는 世宗市는 公州에서 大田으로 가는 도로변의 금강 건너편에 위치해 있다. 土質이 척박해 논농사보다 고추·참깨&#8231들깨&#8231표고버섯 등을 특용작물을 심었던 公州圈(공주권)에 생산적인 世宗市가 건설된다면 熊津백제 이래 도약의 好機(호기)를 맞게 된다. 그러나 정쟁에 휘둘린 世宗市가 어떤 모습이 될 것인지, 아직은 속단할 수 없다.
서울은 ‘漢江의 기적’을 이룩한 민족사의 福地(복지)이다. ‘集中’에 따른 여러 문제점에도 불구하고 서울은 효율의 극대화로 최강의 국제경쟁력을 갖춘 한 ‘메트로폴리탄이자 그랜드 캐피털’이다. 금년 11월엔 서울에서 G20 頂上회의가 열린다.
우리는 슬픈 역사를 가슴에 새기고 있기 때문에 G20 정상회의 주최국은 더욱 의미가 크다. 100년 전, 日帝가 강요한 乙巳保護條約(1905)의 부당성을 호소하기 위해 高宗이 파견한 3인의 大韓帝國(대한제국) 密使는 현재의 G20정상회의보다 훨씬 格이 떨어지는 헤이그 萬國平和會議(1907년)에 참석하지도 못하고 문전박대를 당했다.
좀 우스운 얘기지만, 요즘 자정을 넘긴 시각에도 주문 전화 한 통이면 돼지족발을 소주 한 병까지 곁들여 부리나케 배달해 주는 곳이 서울 말고 地球村 어디에 있겠는가. 따지고 보면 이것도 서울의 경쟁력이다. 서울은 古代&#8228 近代를 합쳐 1000년의 王都(왕도), 더욱이 민족사상 가장 반짝이는 대한민국의 건국 이후 63년의 수도이다. 당파적 판단이야 어떠하든, 수도분할은 대한민국 국민도 갈라놓을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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