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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한은 朝鮮朝보다 더 전제적인 체제"

鄭淳台   |   2010-02-21 | hit 6554

韓國史 연구의 권위자였던 '韓國史新論'의 著者 故 李基白 선생은 2001년 11월호 월간조선 鄭淳台 편집위원과 가진 인터뷰에서 왜 북한정권이 민족사의 異端세력인지를 정확하게 규정하였다.


* 金日成-金正日의 북한은 朝鮮王朝보다 후퇴한 체제


―6·25를 전후하여 적지 않은 남쪽의 역사학자들이 사회주의 국가 건설에 참여하겠다고 월북했는데, 당시로는 사회주의의 虛像이 드러나지 않았던 만큼 결국은 줄을 잘못 선 것 아닙니까.

『金日成·金正日의 북한은 민족사 차원에서 보면 크게 퇴보한 체제입니다. 북한의 근·현대사는 金日成·金正日 개인 집안의 역사입니다. 「朝鮮王朝實錄」이나 「承政院日記」를 보면 임금에 대한 신하의 言路가 놀랄 정도로 트여 있었습니다.

東獨이 붕괴되기 전의 일입니다만, 韓國史를 전공하는 괴텔 교수가 한국에 온 적이 있습니다. 한림대학에서 만났는데, 그의 말로는 북한은 사회주의국가가 아니라고 하더군요. 북한은 조선왕조보다도 더 전제적이라고 해야겠지요.

金日成·金正日이 교시한 「주체적 입장과 방법론」을 역사연구에서 일관되게 견지하여야 할 유일한 지침으로 삼는 이른바 「주체사관」은 이미 학문의 세계가 아니라 정치적 도구입니다』

―북한의 「朝鮮全史」를 보면 金日成의 증조부 金膺禹(김응우)가 대동강을 침범한 미국의 무장상선을 「불배 공격」으로 침몰시켰고, 3·1 독립운동의 중심은 평양이고, 그 주역이 金日成의 아버지 김형직으로 되어 있습니다. 이렇게 조작한 것을 역사책이라고 할 수 있습니까.

『사실의 참 모습을 밝히는 작업은 다른 말로 바꾸어 표현하면 진리의 탐구입니다. 그러므로 학문의 목표는 진리의 탐구에 있다고 할 수 있습니다. 진리는, 당연한 일이지만, 거짓이 아닌 것입니다』


*"독재는 정통성 없다"


―黃長燁씨는 「南北대결의 핵심은 민족사에 있어서의 正統性을 놓고 벌이는 타협 불가능한 권력투쟁」이라고 말한 바 있습니다. 그러면 누가 민족사의 正統이고, 누가 민족사의 異端입니까.

『독재국가는 韓國史에서의 正統性을 주장할 자격이 없습니다. 그리고 그 독재를 뒷받침해 주고 있는 이른바 「주체사학」은 韓國史學을 타락시키고 있습니다』

―北韓의 「朝鮮全史」나 「朝鮮通史」에서는 고구려가 우리 역사상 中世 봉건시대를 열고 이끌어간 나라, 즉 삼국시대의 主役으로 기술되어 있습니다. 또한 4세기에 들어서면서 본격화하는 고구려의 남진정책은 삼국통일을 위한 통일의지의 표현이라 되어 있는 반면, 백제나 신라의 북진정책은 反통일적인 것으로 기술되어 있습니다.

『고구려, 백제, 신라의 3國 중에서 고구려가 선진국임은 분명합니다. 그러나 이 사실이 고구려가 당연히 3國을 통일할 자격이 있는 나라요, 백제와 신라는 당연히 고구려에 병합되어야 할 나라로 규정하는 것은 잘못입니다. 메소포타미아나 이집트가 선진국가였다고 해서, 세계가 당연히 그들에 의해서 통일되어야 한다고 규정하는 것이 잘못인 거나 마찬가지입니다.

고구려는 독재정치에 의해서 국가가 분열되었기 때문에 패망할 수밖에 없는 처지에 있었습니다. 백제 또한 그러했습니다. 이에 반해 신라는 약간의 시련이 있기는 했지만, 국내의 단결이 굳건해서 통일의 기반이 어느 나라보다도 강했습니다』


*"통일은 민족의 理想을 실현할 수 있는 것이어야만 의미"


―우리 사회 일각에서도 新羅가 唐과 동맹한 것을 反민족적 事大主義라고 비난하는 데 대해선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그건 문제가 있는 시각입니다. 3·1운동을 事大主義라고 규정한 日帝 어용학자의 억지 주장과 마찬가지인 겁니다. 신라는 고구려와 동맹하기를 원했지만, 고구려가 거절했기 때문에 생존을 위해 唐과 동맹을 했던 것입니다.

설마 新羅더러 비록 망하더라도 가만 있어야 하는 게 옳다고 주장할 사람은 없겠지요. 더욱이 백제와 고구려가 멸망한 뒤에 신라는 唐과 치열한 전쟁을 하여 唐을 축출하는 데 성공했습니다. 신라는 독립정신이 강한 나라였습니다』

―民族史에 있어서 삼국통일의 의미는 무엇입니까.

『우리나라 역사의 시초부터 이미 민족이 형성되어 있었고, 또 그것이 하나의 국가로 형상화되고 있었다는 낡은 사고방식이 아직도 잔존해 있습니다. 그러나 이것은 객관적인 역사적 진실과는 너무나 거리가 멉니다.

처음에는 滿洲와 한반도에 걸쳐서 수없이 많은 씨족공동체가 산재해 있었고, 靑銅器시대에는 각기 독립된 수백 개의 城邑國家 혹은 部族國家들이 형성되어 있었습니다. 그것이 정복과 동맹의 과정을 거치면서 고구려, 백제, 신라로 통합 정리되어 삼국시대가 된 것입니다. 그러다 신라의 통일에 의해 민족의 틀이 거의 완성된 것입니다』

―그런데 金大中 대통령이 지난 10월1일 국군의 날 기념사에서 金日成의 6·25 남침을 신라의 삼국통일, 고려의 후삼국통일에 이은 세 번째의 「통일 시도」라고 발언한 바 있습니다. 이런 역사관에 대해서는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통일은 민족의 理想을 실현할 수 있는 것이어야 의미가 있는 게 아니겠습니까. 민족의 理想은 자유와 평등의 실현입니다. 북한에서는 6·25 전쟁을 「조국해방전쟁」이라고 부르며 그것이 무력 통일의 시도임을 공공연히 드러내고 있습니다.

그런데 실제에 있어서 그것은 대한민국에 대한 침략전쟁이었습니다. 우리 민족사의 최대 비극이었던 6·25 전쟁의 책임을 묻는 것이 대한민국 대통령에게 부과된 임무라고 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