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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살찐 돼지'가 '늑대'한테 먹힌 경우

鄭淳台   |   2010-04-13 | hit 6450

인구수가 많고 경제력이 강하다고 해서 군사력도 그와 비례해서 강해지는 것은 결코 아니다. 인류역사를 보면 오히려 배고픈 군대가 배부른 군대를 이긴 경우가 더 많다. 北宋은 文臣 優位, 武臣을 천시한 나쁜 풍토를 만들어 멸망을 자초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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鄭淳台st-jung@hotmail.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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돈으로 산 평화 ‘&#28598淵(전연)의 盟’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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中國 역사상 경제적으로 가장 번영했지만, 국방력은 가장 허약해 민족적 굴욕을 감수해야 했던 漢族의 나라가 宋나라였다. 宋은 북방에서 흥기한 기마민족들인 거란&#65381西夏(서하)&#65381金(금)&#65381몽골 등에 대해 돈과 비단을 주고 평화를 구걸하는 정책을 구사하다가 결국 비참한 종말을 맞고 말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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宋나라의 굴욕외교를 오늘의 한국인은 비웃을 자격이 없다. 좌파정권의 집권 당시, 이런저런 명목으로 북한의 金正日에게 수십억 달러의 현금을 제공, 그것이 北核이란 부메랑이 되었기 때문이다. 이런 利敵(이적)행위를 국법으로 처벌하지 못하고, 아직도 일각에서 ‘행동하는 良心(양심)’ 운운한다면 한국의 미래는 아직 어둡다. 남한 사회 내부에 親北 좌파의 국가반역행위를 보장&#65381고무하는 짓이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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宋의 3代 황제 眞宗(진종) 때, 거란족의 나라 遼(요)의 成宗이 20만 대군을 이끌고 침략해 왔다. 이에 겁을 먹은 眞宗은 매년 銀 10만 량과 비단 20만 필을 바치기로 하고 遼와 화해했다. 이것이 바로 ‘&#28598淵(전연)의 盟’(1004년)이다. 전연은 황하 북안의 군사도시 &#28598州(전주)에 위치한 호수의 이름으로, 이 호반에서 전연의 盟이 성립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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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나, 이런 굴욕을 당하고도 일단 평화가 회복되어 宋의 국가경제는 다시 호전되었다. 眞宗은 굴욕외교를 호도하고 추락한 황제의 위엄을 회복하기 위해 秦始皇(진시황)과 漢武帝(한무제)처럼 山東의 泰山(태산)에서 封禪(봉선)의 제례를 올리느라고 막대한 국고를 낭비했다. 그래도 宋의 財政이 아직은 여유가 있었다. 封禪은 오랑캐를 물리치고 國泰民安을 이룩한 황제만이 하늘과 땅의 신에게 제사를 지내는 漢族왕조의 국가적 이벤트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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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나 眞宗 다음 仁宗 때 지금의 甘肅省(감숙성), 陜西省(섬서성) 일대에서 西夏(서하)가 흥기하여 宋의 서북 변경을 침략했다(1038년). 이후 수년간 막대한 戰費(전비)를 투입한 탓에 宋의 경제는 악화되기 시작했다. 西夏는 티베트系 탕구트族이 세운 나라이다. 西夏의 영걸 李元昊(이원호)는 자국산 淸白鹽(청백염)의 수출이 宋의 소금 專賣制(전매제)에 의해 막히게 되자, 그 자신을 宋의 황제와 대등한 大夏皇帝(대하황제)라 일컬으며 宋에 도전했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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西夏&#8228宋의 전쟁은 一進一退(일진일퇴)를 하며 수년간 지속되었다. 이런 틈을 타 遼는 宋에 대해 關南(10개 縣)을 할양하고 宋의 公主를 妃(비)로 보내라고 협박했다(1042년). 2正面 전쟁이 불가능했던 宋은 또 다시 遼의 武裝干涉(무장간섭)에 굴복했다. 협상 결과, 宋이 종래의 歲幣(세폐:중국 역대왕조가 북방의 유목국가에 일정액의 물자를 수여하기로 한 외교적 和親政策)에다 비단 10만 필과 銀 10만 량을 증액하여 遼에 지급하기로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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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44년, 宋-西夏의 강화도 성립되었다. 강화 조건은 宋이 西夏에 대해 매년 비단 15만3000필, 銀 7만2000량, 茶 3만 斤(근)을 歲幣(세폐)로 지급하기로 한 것이었다. 國初 이래 매우 풍부했던 宋의 국가재정이 仁宗 중반 이후 기울기 시작해 말년에는 거의 바닥을 드러냈다. 그 원인 다음 세 가지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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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째, 군사비의 증대였다. 國初에 40만이었던 병력이 仁宗代에는 120만 이상으로 늘어났다. 遼와 西夏에 침략에 대비하기 위한 것이었지만, 병사에 대한 급여가 급증하여 국가재정을 압박하기 시작했다. 당시 宋은 돈이 많이 드는 傭兵制(용병제)를 채택하고 있었다. 둘째, 관료에 대한 인건비도 급증했다. 매년 관료의 수가 늘어난 데다 관료에 대한 대우가 중국 역대 왕조 중 최고 수준이었기 때문이다. 셋째, 遼와 西夏에 대한 歲幣 지급도 재정 압박의 요인이 되었다.



&lt&lt北宋 仁宗 때(1044년)에 편찬된 &lt武經總攬&gt에 수록된 宋代의 갑옷 圖解(도해). 왼쪽은 重裝騎兵用(중장기병용) 馬甲, 위쪽은 强弩(강궁)도 파괴하지 못했다는 步兵 갑옷.&gt&g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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王安石(왕안석)의 개혁新法 시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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仁宗에 이은 英宗 때(1063-67)가 되면 국가재정은 완전 적자로 전락했다. 재정적자를 어떻게 극복할 것인가, 이것이 宋 왕조의 국가적 과제가 되었다. 英宗을 승계한 神宗(신종)은 王安石을 재상으로 기용하여 일대 개혁을 시도했다. 王安石의 개혁정치인 新法의 골자는 다음과 같다.



&lt&lt北宋의 富國强兵策을 추진한 王安石&gt&g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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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靑苗法(청묘법)-당시의 빈농은 端境期(단경기)가 되면 식량은 물론&nbsp볍씨까지 소비해버려 地主로부터 돈을 빌렸는데, 그 이자가 6개월에 70-100%에 달해 소작인 혹은 農奴로 전락하는 자가 속출했다. 이와 같은 빈농을 구제하기 위해 정부가 저리의 영농자금을 융통해 주는 빈농보호법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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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保甲法(보갑법)-國民皆兵制(국민개병제)의 民兵조직을 만드는 법이었다. 宋代는 원래 傭兵制(용병제)를 채택했는데, 요&#8228서하의 침략에 대비한 병력의 증가에 따라 국가재정이 압박을 받게 되었다. 그래서 농촌에 10家의 保, 50家의 大保, 500家를 都保로 하는 자치조직을 만들어 농한기에 군사훈련을 실시, 兵農一致(병농일치)의 민병조직으로써 국방력을 증강시키려 했다. 王安石의 계산에 의하면 保甲制가 완성되면 용병제의 10분의 1 정도로 국방 관련 인건비가 삭감될 수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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王安石의 新法에는 중소 상공업자를 보호하기 위한 市易法(시역법), 戰馬를 확보하기 위한 保馬法 등도 포함되어 있었다. 신법은 宋의 富國强兵策이었다. 新法은 王安石의 재임 중에 상당한 성과를 올려 국가재정이 적자에서 흑자로 전환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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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나 이 新法은 지주&#65381관료&#65381豪商(호상)&#65381皇族(황족) 등 기득권 계급의 이익을 심대하게 침해하여 이들의 맹렬한 반대에 봉착했다. 이로써 新法黨과 舊法黨의 정쟁이 첨예하게 전개되는 가운데 王安石은 재상직에서 사임했다(107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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神宗이 38세의 젊은 나이에 사망했다(1085년). 개혁 君主의 퇴장은 宋왕조의 불행이었다. 그의 장남 哲宗이 승계했지만 겨우 10세의 소년. 哲宗의 조모 宣仁太后(선인태후)가 攝政(섭정)이 되었다. 태후는 진작부터 아들 神宗이 추진하던 개혁에 대해 불만을 품고 있었다.


1086년 舊法黨의 司馬光이 재상으로 등용되자 新法은 완전히 廢棄(폐기)되고, 仁宗시대의 舊法으로 되돌아갔다.



&lt&lt北宋의 개혁을 반대한 사마광&gt&g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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司馬光은 대중의 환호를 받았던 표퓰리즘의 정치인이었다. 그는 &lt資治通鑑(자치통감)&gt을 저술한 超일류 학자이기는 했지만, 정치가로서는 失格(실격)이었다. 그는 재상 재임기간중에 아무런 代案조차 제시하지 못했고, 反動정치로써 사회 혼란만 유발시켰다. 정치가로서의 인기가 實績과 일치하지 않은 것은 그때나 지금이나 마찬가지인 듯하다.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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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희대의 플레이 보이’ 徽宗(휘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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밤만 되면 휘종은 微服(미복)으로 변장 후 妄臣(망신)들을 거느리고 룸살롱을 순례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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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nbsp&lt탐관오리는 축재, 백성은 도탄에 빠지다&g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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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nbsp1100년, 哲宗이 친정 7년 만에 죽고, 그의 동생 徽宗(휘종)이 즉위했다. 휘종은 新法黨의 蔡京(채경)을 재상으로 기용해 정치를 맡겼다. 蔡京은 新法黨 출신이긴 했지만, &lt宋史&gt의 奸臣列傳(간신열전)에 오른 인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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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nbsp정쟁에도 불구하고 新法의 시행의 결과로 인해 宋의 경제는 다소 호전되었다. 특히, 大運河를 통해 江南의 물자가 집결되는 수도 開封(개봉)은 세계 최대의 도시로 번영했다. 開封의 환락가는 不夜城(불야성)을 이룰 만큼 흥청거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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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nbsp채경은 “滿朝(만조) 모두가 그 父子의 黨”이라는 악평을 들을 만큼 정부 요로를 자파 세력으로 굳히고 부정축재에 혈안이 되었을 뿐만 아니라 휘종에게 사치생활을 마음껏 즐겨야 한다고 권유했다. 그는 다음과 같은 饒舌(요설)을 주청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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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nbsp“지금은 易(역)에서 말하는 豊亨豫大(풍형예대)의 運勢(운세)에 해당하는 시기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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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nbsp쉽게 말하면 흥청망청 소비를 해도 좋은 豊饒&#8228(풍요) 亨通(형통)의 太平盛代에 진입하고 있다는 뜻이다. 이에 고무된 휘종은 대규모 토목공사를 일삼았다. 都城의 확장, 궁전의 신축, 御苑(어원)의 조성, 九鼎(9정)의 주조 등이 그것이다. 이로써 延福宮(연복궁), 保和殿(보화전), 그리고 萬歲山(만세산)이란 이름의 인공산을 축조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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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nbsp이때 휘종은 벼락출세한 朱&#21204(주면)에게 악명 높은 花石綱(화석강)을 맡겼다. 화석강이란 江南지방으로부터 奇花, 異木, 怪石(괴석), 奇獸(기수) 등을 수집해 開封으로 옮기는 일이었다. 백성들은 진귀한 것이라면 一木一草(일목일초)까지 헌상해야만 했다. 꽃 한 포기 운반하는 데 수천 량, 돌 하나 운반하는 데 수만 량의 비용이 들었다. 거대한 괴석을 옮기는 데 방해물이 된다고 사정없이 민가를 허물어버리기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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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nbsp그리한 지 20년. 만세산은 수목이 무성하고, 크고 작은 사슴들이 무리를 지어 노닐게 되었다. 중국 역사의 손꼽히는 화가이기도 했던 휘종의 사치는 독특했다. 만세산에 茶店(다점), 酒店(주점)을 만들어 놓고, 청색 깃발의 간판을 나부끼게 했다. 밤에는 등불을 휘영하게 밝히고 돈 많은 일반인까지 입장시켜 술판과 도박판을 벌이게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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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nbsp휘종은 중국 역사상 제1의 風流天子(풍류천자), 쉽게 말하면 ‘플레이 보이’였다. 開封은 이런 풍류천자에겐 지상낙원이었다. 당시 대운하 연변에는 호화주점, 즉 北宋式 룸살롱이 즐비했다. 밤만 되면 휘종은 微服(미복)으로 변장한 후 妄臣(망신)들을 거느리고 룸살롱들을 순례했다. 룸살롱의 미녀들과 밤을 새워 노닥거린다고 다음날 정무를 작파하기 일쑤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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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nbsp이런 가운데 정부재정은 악화일로를 걸었고, 蔡京(채경)을 비롯한 탐관오리들은 법과 권력을 남용하여 축재에 혈안이 되었으며, 백성들은 塗炭(도탄)에 허덕였다. 그때의 宋나라의 부패상이 중국의 4大 奇書 중 하나인 &lt水滸傳(수호전)&gt에 잘 묘사되어 있다. 떼강도 소굴 梁山泊(양산박)의 두령 宋江은 실존인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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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nbsp&lt新羅金氏의 후예 阿骨打(아골타)가 세운 征服왕조 金&g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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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nbsp휘종이 방탕생활에 푹 빠져 있는 동안 遼(요)의 북쪽 만주 땅에서는 여진족이 흥기했다. 여진족은 북방의 산림지대에서 半농경 半수렵에 종사했는데, 우리 삼국시대엔 고구려에 복속되었던 靺鞨族(말갈족)의 後身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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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nbsp여진족의 한 갈래인 完顔部(완안부)에 阿骨打(아골타)라는 영걸이 등장했다. 그는 1115년 金나라를 세우고, 황제의 位에 올랐다. &lt金史(금사)&gt 世紀에 따르면 아골타는 新羅 왕족 출신으로 羅末麗初(나말여초) 만주로 넘어가서 여진 추장의 과부 딸과 결혼한 金函普(김함보)의 7代 孫이다. 金의 건국에는 다음의 사연이 배경을 이루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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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nbsp遼의 최후의 황제 天祚(천조)는 유달리 사냥과 여색을 밝히는 군주였다. 그 무렵, 遼 지배층의 사냥에서는 海東靑(해동청)이라는 매(鷹)가 필수장비였다. 천조제는 매년 海東靑의 헌상을 女眞에 강요했다. 그런데 해동청은 여진의 땅에서 서식하지 않아 그것을 입수하기 위해서는 松花江(송화강) 방면에 거주하던 五國이라는 부족과 전투를 벌이지 않을 수 없었다. 완안부의 추장 아골타는 이런 압박을 견딜 수 없어 반기를 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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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nbsp이에 遼는 4路軍을 동원하여 아골타를 토벌하러 오지 깊숙이 진군했지만, 아골타의 各個擊破(각개격파) 전술에 걸려 오히려 대패하고 말았다. 기세가 오른 여진은 遼의 동부 국경을 돌파해 그곳에 거주하던 熟女眞(숙여진)을 지배 하에 편입시켰다. 熟女眞은 遼에 복속해 문명의 세례를 받은 여진족을 말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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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nbsp이에 발끈한 天祚帝는 스스로 총지휘관이 되어 여진 평정에 나섰지만, 또 다시 패전했다. 여진은 승세를 타고 渤海(발해)&#8228遼陽(요양) 등 54州를 병합하고, 다시 遼西 5州를 공략했다. 그리고 황제 즉위 다음해(1116)에 遼의 수도 上京(지금의 내몽골 赤峰市 시라무렌江 북안 左林巴旗)을 포위 공격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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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nbsp신흥국 金이 遼를 혼내고 있다는 뉴스를 접한 宋의 휘종은 짜릿한 흥분을 느꼈다. 송&#8228요 관계는 ‘전연의 盟’ 이후 대체로 평화관계를 유지해 왔지만, 宋으로서는 遼에 빼앗긴 燕雲(연운) 16州(지금의 北京과 河北省 북부 지역)의 탈환이 太祖 이래의 숙원이었다. 金과의 동맹하면 遼를 협격하여 失地(실지)를 회복할지도 모른다는 희망에 부풀었던 것이다.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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용기 없었던 국가지도자의 末路(말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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궁중에는 아직 병력 1만 명, 戰馬(전마) 1000두가 남아 있었지만, 흠종은 대책 없이 통곡만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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禍를 자초한 漢族왕조의 국책 以夷制夷(이이제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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中國의 전통적 대외정책은 오랑캐로 오랑캐를 제압한다는 以夷制夷(이이제이)이다. 주변국들끼리 서로 물고 뜯으면 자신은 漁父之利(어부지리)를 누릴 수 있다는 계산인 것이다. 그러나 휘종의 외교는 오히려 망국을 재촉하고 말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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宋과 金 사이엔 海路를 통해 사절이 비밀리에 왕래했다. 1120년, 드디어 宋-金 군사동맹이 성립되었다. 그 조건은 (1)宋이 종래 遼에게 바쳤던 세폐의 동액을 金에 지급하고, (2)金은 長城 이북, 宋은 長城 이남을 평정한다는 것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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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맹이 성립하자 金은 바로 대군을 동원하여 破竹之勢(파죽지세)로 長城 이북을 점령했다. 한편 宋은 마침 江南지방에서 봉기한 方臘(방랍)의 농민반란을 진압하는 데 시일이 걸려 원정군을 되돌려 북상시켰을 때는 遼의 영토 대분이 金軍에 의해 점령되고, 遼의 영토는 燕京(연경: 지금의 北京) 일대의 몇 개 州만 남아 있는 상황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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金軍은 宋과의 맹약에 따라 燕京 공략을 宋軍에게 양보했다. 그러나 宋軍은 약체였다. 20만 병력으로 燕京을 공격했지만, 곧 遼軍의 반격을 받아 무참하게 패퇴했다. 宋軍의 총지휘관인 童貫(동관)은 패전에 따른 문책이 두려워 가만히 金軍에 사자를 보내 원군을 요청했다.


金軍은 기다렸다는 듯이 居庸關(거용관)을 돌파, 燕京의 遼軍을 궤멸시켰다(1120년). 金은 즉각 宋에 사자를 파견하여 다음과 같이 통고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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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燕京은 우리 金軍이 함락했지만, 땅은 宋에 반환한다. 그 대신에 燕京 지구의 조세는 전액 金 측이 차지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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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에 宋은 사자를 보내 다음과 같은 협상안을 제시했다. (1)宋은 종래 遼에 지급했던 세폐(銀 30만 량과 비단 30만 필)를 金에 지급한다. (2)이밖에 燕京의 조세분으로서 매년 錢 100만 緡(민)을 지급한다. (3)그 대신에 金은 燕雲 16州를 宋에 반환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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협상 결과, 宋은 燕京을 포함한 6개 州를 반환받았다. 이에 따라 宋軍은 燕京에 입성했는데, 완전히 空城(공성) 상태였다. 金軍은 연경의 財寶는 물론 여자와 아이까지 깡그리 데리고 北上해 버렸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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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편 遼의 天祚帝는 金軍이 남하하자 일찌감치 陰山山脈(음산산맥: 지금의 내몽골의 省都인 呼和浩特 市 북방)으로 도피했다. 그는 주변 부족의 힘을 빌려 보복전을 꾀했지만, 결국 金軍의 추격을 받아 포로가 되고 말았다. 遼는 태조 耶律阿保機(야율아보기) 이래 9代 200년 만에 멸망한 것이다(1125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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宋의 背信(배신) 외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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宋은 金의 힘을 빌려 숙적 遼를 물리치고, 燕京 등 6州를 회복했다. 그러나 宋은 재정 악화를 이유로 金에 대한 세폐의 지급을 미루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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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때 金에서는 太祖 아골타가 죽고, 그의 동생 吳乞買(오걸매: 太宗)가 즉위했다. 이러한 가운데 金에 대한 宋의 외교적 배신행위가 드러나고 말았다. 그것은 陰山산맥 지구로 도피해 있던 遼의 天祚帝에게 보낸 宋의 비밀 詔書(조서)를 입수했기 때문이다. 이 조서에는 宋-遼가 동맹을 회복시켜 공동의 적인 金을 공격하자는 내용이 적혀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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宋에 대한 金의 응징이 시작되었다. 1125년 겨울, 금군은 남진해 燕京을 점령했다. 宋軍의 총사령관 童貫은 太原(현재 山西省 省都)에 포진해 있었으나 燕京 함락 소식을 접하자마자 부하에게 방어의 책임을 떠넘겨 놓고, 자신은 수도 開封으로 도망쳐버렸다. 太原도 함락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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金軍이 수도 開封으로 진격해 오자 휘종은 자신의 失政을 사죄하는 조서의 발표와 함께 太子에게 양위하고 자신은 上皇(상황)으로 물러났다. 휘종의 후계자가 欽宗(흠종)이다. 흠종은 방위군사령관 李綱(이강) 등 主戰派(주전파)를 해임하고, 재상 李邦彦의 건의를 받아들여 金에 대해 화의를 요청했다. 金軍은 다음과 같은 화의 조건을 제시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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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배상금으로서 金 500만 량, 銀 5000만 량, 牛馬 1만 두, 비단 1백만 필 지급. (2)中山&#8228河間&#8228太原 등 3鎭(진)의 할양. (3)재상&#8228親王을 인질로 바칠 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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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혹한 조건이었지만, 宋 조정으로서는 수락할 수밖에 없었다. 화의 협상이 진행되는 상황에서 주전파 장군이 金軍 진영에 야습을 감행했으나 결과는 무참한 패퇴였다. 흠종은 군사령부를 해산하고, 李綱(이강)을 해임함으로써 금군에게 陳謝(진사)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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金은 화의 조건의 이행을 촉구했다. 宋은 3鎭의 할양을 보증하는 흠종의 조서를 金軍 진영에 보냈다. 이때 宋의 정부 금고에는 金 20만 량, 銀 400만 량밖에 남아 있지 않아 배상금 지급은 어려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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금군은 개봉을 포위한 지 33일째, 宋의 배상금 지급을 기다리지 않고 철군했다. 금군이 철수하자 都民 수만 명이 들고 일어나 주전파 李綱의 복직을 탄원했다. 이강은 다시 방위군사령관으로 복귀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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靖康(정강)의 變金軍, 휘종&#8228흠종 一家를 납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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宋은 3鎭의 할양을 약속했음에도 불구하고 금군이 철수하자 그 인도를 거부했다. 주전파&#8228주화파의 싸움 때문에 宋 조정은 아무 결정도 내지 못하고 표류했다. 격노한 金은 수개월 후 대시 대군을 남하시켰다. 宋의 廟議(묘의)는 다시 和議로 기울어, 주전파인 李綱을 파면했다. 그러나 金의 태도는 초강경이었다. 이번에는 河北(北중국) 전역을 넘기라는 것이었다. 비록 약소국이긴 했지만, 宋은 그 조건만은 삼킬 수 없었다. 어쩔 수 없이 開封城에 농성하면서 金의 대군을 迎擊(注·공격하는 적을 나아가 맞받아 침)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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농성 40일, 드디어 개봉 落城(낙성)의 날을 맞았다(1126년). 흠종은 대책 없이 통곡만 했다. 궁중에는 아직 병력 1만 명, 戰馬 1000두가 남아 있었지만, 최후의 일전을 벌여 성돌을 베개로 삼겠다는 용기는 없었다. 휘종은 음독자살을 하려 했지만, 신하에게 독약을 빼앗겨 미수에 그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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흠종&#65381휘종&#65381황후&#65381황태자&#65381친왕&#65381공주&#65381황족 등 3000여 명이 金軍 진영에 연행되었다. 금군은 개봉성의 子女, 金銀綾綿(금은능면), 차량, 일용잡화, 서적 등 갖가지 재물을 깡그리 약탈했다. 성내는 빈 집들만 남았다. 이것을 중국사에서는 ‘靖康(정강)의 變(변)’이라고 부른다. 靖康은 패망 당시의 年號(연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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金의 황제는 조서를 통해 宋왕조의 소멸을 선포했다(1127년). 금군은 휘종&#65381흠종 一家를 납치해 북상했다. 이들의 억류된 곳은 하얼빈(현재의 흑룡강성 省都) 동북쪽 五國城이었다. 五國城이라면 海東靑의 명산지임은 앞에서 거론했다. 휘종&#8228흠종은 이곳에서 병사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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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족 중에서 납치를 모면한 남자는 흠종의 동생인 康王뿐이었다. 康王은 멀리 江南으로 도피하여 臨安(임안·지금의 절강성 성도 항주)에다 수도로 삼고 황제로 즉위했다(1127년). 그가 南宋을 세운 高宗이다. 역사에서는 흠종 때 망한 나라를 北宋, 高宗이 세운 나라를 南宋이라고 부른다. 南宋 역시 경제적으로 번영했으나 군사력과 외교력이 허약해 北宋 시대의 처럼 북방의 기마민족 국가에게 민족적 굴욕을 겪었다. 南宋의 성립, 성격, 그리고 패망에 이르는 과정은 다음 기회에 쓸 예정이다.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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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의 한국과 北宋의 유사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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군대 안 간 대통령이 군대 안 간 학자를 국무총리로 뽑는 나라는 北宋式 문관 優位 체제와 하등 다를 바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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잘못된 국가 시스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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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nbsp北宋은 경제적으로는 번영해 가던 과정에서 갑자기 패망했다. 北宋의 경제 번영은 그 인구 증가추세만 보아도 대강 짐작할 수 있다. &lt宋會要(송회요)&gt에 따르면 건국한 지 43년 만인 3대 황제 眞宗 당시(1003년) 인구가 1400여만 명이었는데, 멸망 17년 전인 휘종 때(1110년)에는 4600여만 명으로 급증했다. 불과 100년 만에 인구가 3배 이상 증가했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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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nbsp반면, 北宋의 富를 뜯어먹으며 漢族에게 민족적 수모를 가했던 거란족&#65381탕구트族&#65381여진족은 건국 당시 모두 100만 이하의 인구 소국들이었다. 사회발전 단계의 측면에서도 北宋은 주변 기마민족 국가들과는 차원을 달리하여 이미 近代(근대)를 호흡하고 있었다. 역사학자들은 중국의 近代 진입시기를 北宋의 건국(서기 960년)과 전국 통일(979년) 무렵으로 인정하고 있다. 당시 北宋은 이슬람 세계를 제외하면 가장 선진국이었다. 유럽의 近代 진입은 이탈리아 반도의 도시국가에서 르네상스가 개화한 1330년 무렵으로 평가되고 있다. 유럽에는 그때서야 1세기 중국에서 발명된 종이 제조법이 이슬람 세계를 통해 전래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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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nbsp그러나 인구수가 많고 경제력이 강하다고 해서 군사력도 그와 비례해서 강해지는 것은 결코 아니다. 인류역사를 보면 오히려 배고픈 군대가 배부른 군대를 이긴 경우가 더 많다. 원래 야전군의 능력은 그 출신 지역이 열악하면 열악할수록 더욱 강해지게 마련이다. 이 점은 분단상황 한국이 유의해야 할 대목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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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nbsp그렇다면 北宋의 패망 원인은 무엇인가. 그것은 국방체계를 잘못 깔았기 때문이다. 태조 趙匡胤(조광윤)은 건국 초부터 쿠데타 방지를 위해 强幹弱枝(강간약지) 정책을 추진했다. 이것은 황제 친위대, 즉 수도방위사령부만 강화하고(强幹), 국경 주둔의 야전군을 의도적으로 약체화(弱枝)시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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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nbsp그 자신이 유력한 군벌 출신으로 어느 날 갑자기 부하들에 의해 황제로 옹립된 太祖 조광윤은 절도사들의 발호와 쿠데타의 위험성을 그 누구보다 꿰뚫어 보고 있었다. 그는 北宋을 창업한 뒤 밤잠을 이룰 수 없어 미복 차림으로 자주 황궁을 빠져나와 옛 쿠데타 동지인 장군들의 동정을 감시하고 다닐 정도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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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nbsp北宋의 황제들은 환관을 야전군의 감독관으로 파견하여 사령관들을 감시하고 작전에도 간여하게 했는데, 심지어는 신임하는 환관을 총사령관으로 임명하기도 했다. 바로 휘종대의 총사령관 童貫이 바로 환관이었다. 그는 재물을 탐하고 국가위기 때는 평소의 큰소리와는 정반대로 일선에서 제일 먼저 도망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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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nbsp北宋은 文臣 優位의 나라였다. 科擧(과거) 제도를 사실상 최초로 정착시켜 시빌리언 컨트럴을 확립했다고는 하지만, 武臣을 천시한 나쁜 풍토가 정착되어 국가의 위기를 관리할 만한 將帥(장수)를 양성하지 못했다. 文武 조화를 이루지 못하는 국가는 생존의 위험에 빠질 수밖에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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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nbsp황제가 직접 관리한 과거제도를 통해 등장한 北宋의 문신들은 최고 수준의 지식인들이었다. 그러나 당파싸움은 잘 했지만. 국가경영에는 무능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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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nbsp北宋의 풍토에서는 거의 독보적 경세가였던 王安石이 재상으로 발탁되어 개혁정치를 시도했지만, 당시 문화 권력을 장악하고 있던 舊法黨 등의 반발로 실패하고 말았다. 구법당의 영수급은 &lt자치통감&gt의 저자 司馬光, 그리고 唐宋八大家로 文名이 높은 蘇洵(소순)&#65381蘇軾(소식)&#65381蘇轍(소철) 3父子 등이었다. 이들은 모두 과거에 급제한 문신관료들이었다. 宋代 문학의 대표작 ‘赤壁賦(적벽부)’를 지은 蘇東坡(소동파)의 본명이 바로 蘇軾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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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nbsp반면 王安石은 지지기반이 약했다. 그의 新法黨에 가담한 인물들도 대부분 新法의 필요성을 제대로 이해하지 못했고, 勢가 불리하면 그들의 스승 王安石까지 매도하는 기회주의자들이었다. 이것이 바로 시대를 앞서간 王安石의 비극이었고, 그의 개혁정치가 실패한 이유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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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nbsp*北宋 멸망사는 한국인의 反面敎師(반면교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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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nbsp오늘의 한국도 文化권력이 좌파 지식인들에 의해 장악되고 있다는 점에서 北宋과 별반 다를 바 없는 나라다. 우리 학계&#65381예술계&#65381언론계의 현실이 바로 그러하여 바른 소리를 하는 사람이 오히려 좌파의 포위 공격을 당하고 있다. 아직도 우리 사회에서는 金日成-金正日 주의를 비호&#65381동조하는 깽판 세력이 ‘進步(진보)’의 이름으로 횡행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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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nbsp제2차 세계대전 이후에 독립한 150여개 나라 가운데 경제적 성공으로 G20에 진입한 나라는 대한민국이 유일하다. 이런 한국의 해방 以後史(이후사)를 실패한 역사로 경멸하고, 그 민족사적 정통성에 흠집을 내는 것을 마치 지식인의 사명인 것처럼 인식하는 풍토가 시정되지 않는 한 우리 사회의 건전성은 담보될 수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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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nbsp군대 안 간 대통령이 군대 안 간 학자를 국무총리로 뽑는 나라의 행태는 北宋式 문관 優位 체제와 하등 다를 바 없다. 그 어떤 이유에서든 국민의 의무를 이행하지 못한 사람이 국가지도자가 된다면 국군의 사기와 국방력은 저하될 수밖에 없다. 北宋의 亡國史에서 교훈을 얻지 못한다면 대한민국은 위험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