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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래머 文成公主와 大非川 전투의 현장

鄭淳台 작가   |   2010-05-14 | hit 15132

&nbsp 鄭淳台 작가st-jung@hotmail.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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티베트의 英雄(영웅) 송첸 칸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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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월10일 아침 8시, 대형 지프를 타고 西寧(서녕)의 호텔을 출발해 청해호와 대비천 답사에 나섰다. 日月山(최고봉 4617m)의 고개에 이르렀다. 일월고개에는 日月亭이 있다. 641년 唐의 文成公主(문성공주)가 吐藩(토번)의 송첸 칸포에 시집가다가 쉬어가던 곳이라 한다. 칸포는 토번 君主(군주)에 대한 호칭이다. 당시, 唐과 토번의 국경선은 日月고개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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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lt&lt◀ 사진-토번의 君主 송첸 칸포&gt&g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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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월고개 옆 唐藩古道(당번고도)에는 文成公主의 石像(석상)이 세워져 있다. 문성공주는 唐-토번 역사에서 매우 중요한 존재이다. 唐三彩(당삼채:중국 唐代에 발달한 도자기로 녹색과 백색 그리고 갈색의 삼채 유약을 사용한 것) 등을 보면 唐代엔 살찐 글래머를 미인으로 쳤는데, 석상의 모습도 바로 그러하다. 문성공주가 송첸 칸포에게 시집을 간 배경은 이렇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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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lt&lt사진-日月山에서 방목하는 양떼&gt&g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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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40년 티베트의 英雄(영웅) 송첸 칸포는 唐 태종에게 공주를 달라고 요청했다. 唐 태종은 처음엔 거부했다. 이에 송첸 칸포는 당시 청해호 남안에 위치한 土谷渾(토욕혼)의 왕에게 唐의 공주를 시집보낸 前例(전례)까지 들먹이며 唐에 재차 압력을 가했다. 唐태종으로서도 송첸 칸포의 요구를 끝내 무시할 수 없었다. 고구려 정복을 기도하고 있었던 만큼 토번의 환심을 사 西邊(서변)의 안정이 필요했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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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lt&lt사진-茶馬古道의 日月고개에 세워진 문성공주의 석상&gt&g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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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성공주를 시집보낸 바로 그 해인 641년, 唐태종은 고구려에 職方郎中(직방낭중) 陳大德을 사신으로 파견하여 고구려 관리들에게 거액의 뇌물을 뿌리며 고구려의 지형과 軍備(군비) 등을 정탐케 했다. 職方은 兵部 산하 정보기관이고, 郎中은 그 책임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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唐으로서 641년은 매우 의미 있는 한 해였다. 당시 서북방의 遊牧(유목)강국 薛延打(설연타)가 唐의 장수 李勣(이적)에게 격파당했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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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성공주는 唐 태종의 4촌인 李道宗(이도종)의 딸이다. 李道宗은 그로부터 4년 후인 645년 唐 태종의 고구려 원정에 참가한 인물이다. 安始城(안시성) 공격 때 城 앞에다 공격용 土山을 쌓은 敵將(적장)이 바로 그다. 그러나 힘들여 축조한 土山(토산)이 갑자기 무너져 성벽에 와닿자 고구려군이 재빨리 土山을 점령해 唐軍을 공격하는 바람에 唐 태종은 되려 패전하여 찬 바람과 궂은 비 속에서 퇴각할 수밖에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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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성공주의 출가로 唐-토번 우호관계가 시작된 지 3년 후인 644년, 송첸 칸포는 티베트 高原 서부에 웅거한 라이벌 羊同(양동)을 병합하여 티베트 高原 전체를 통일했다. 송첸 칸포는 자신의 여동생을 羊同의 王 리그미에게 시집보내 간첩으로 활용했다. 여동생을 통해 羊同 왕의 지방순시 일정과 動線(동선)을 탐지한 송첸 칸포는 매복 작전으로 羊同 王 리그미를 격살했다. 토번&#8228 唐의 화해로 得을 본 것은 송첸 칸포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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靑海湖 안에 설치된 중국의 魚雷發射(어뢰발사) 실험기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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日月고개를 넘어 109번 국도에 접어들어 조금 西進(서진)하면 짙푸른 청해호가 보인다. 湖面(호면)은 해발 3106m, 면적 4456평방킬로미터, 평균 수심은 25m이다. 서녕으로부터 300km 서쪽에 위치해 있다. 청해성 共和縣(공화현)에 속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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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lt&lt사진-靑海湖 표석 앞에서 가이드 劉양과 기념촬영&gt&g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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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선, 청해호반의 마을 江西溝(강서구)에서 점심부터 해결했다. 특별히 黃魚(황어)찜 한 접시를 따로 주문했다. 청해호의 黃魚는 소문이 자자한 물고기이다. 毛澤東의 大躍進運動(대약진운동)의 실패와 文化大革命(문화대혁명) 때 좌파 紅衛兵(홍위병)의 난동 때문에 굶주린 청해 주민들이 황어로 연명했기 때문에 이제는 그 씨가 마를 정도로 휘귀 어종이 되어버렸다고 한다. 15cm 크기의 황어 세 마리를 올린 요리 한 접시의 값으로 300위안(韓貨 5만1000원 상당)을 따로 받았지만, 맛은 민물고기인 붕어찜과 비슷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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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lt&lt사진-청해의 황어 요리&gt&g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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靑海湖는 중국 최대의 鹽水湖(염수호)이다. 含鹽量(함염량)이 약 50억 톤으로 추산된다고 한다. 방파제로 나가 사납게 飛散(비산)하는 파도와 마주섰다. 영하의 기온과 거센 바람 때문에 遊船(유선)들은 호변에 묶여 있었다. 바다 같은 호수 위로 물새가 떼를 지어 난다. 청해호의 물맛을 보았더니 보통 바닷물만큼은 짜지 않은 소금물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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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lt&lt사진-바다 같은 청해호&gt&g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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방파제 앞 500m 湖上(호상)에 中國魚雷發射實驗基地(중국어뢰발사실험기지)의 구조물이 보인다. 마침 우리 해군 천안함의 격침 이후 북한 해군이 보유한 어뢰의 도입처가 심각하게 거론되는 상황에서 청해호의 어뢰기지는 우리에게 주목의 대상일 수밖에 없었다. 북한에 현금을 퍼줘 金正日 好戰(호전)집단이 제3국으로부터 어뢰를 도입하게 조장했던 한국 좌파정권의 利敵(이적)행위는 두고두고 통탄할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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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lt&lt사진-청해호의 중국어뢰발사실험기지&gt&g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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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해호의 남서단 黑馬河鎭(흑마하진)에서 남진하여 109번 국도를 100여 리를 달려 해발고도 3817m인 &#35152皮山(상피산) 고개를 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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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lt&lt사진- 고도 3817m인 상피산 고갯길&gt&g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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흑마하에서 지방도로를 따라 50리쯤 북상하면 吐谷渾(토욕혼)의 수도였던 伏俟城(복사성) 폐허가 있지만, 이날 중에 大非川 전투현장을 찾아야 하는 일정이었던 만큼 시간이 촉박해 복사성 답사는 다음 기회로 미루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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상피산 고개를 넘어 大水僑鄕(대수교향)라는 마을에서 좌회전하여 좁은 지방도로를 따라 東進(동진)했다. 한동안 취락은 물론 인적조차 보이지 않았다. 길 옆으로 전신주가 길게 가설된 초원길을 따라 100여 리쯤 달렸다. 전봇대가 이어져 있는 만큼 그 너머 어딘가에 마을이 있을 것으로 믿었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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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인에겐 치욕의 현장인 大非川은 이제는 沙珠玉河(사주옥하)란 아름다운 이름으로 바뀌어 있다. 대비천 지역은 靑海南山(청해남산)이란 산맥에 의해 청해호 지역과 隔絶(격절)되어 있는 초원지대이다. 상피산 등에서 흘러내리는 눈 녹은 물이 흘러와 이곳 초원을 적신다고 하지만, 금년 들어 3개월 이상 계속된 가뭄으로 강바닥은 바싹 말라 있었다. 목이 따가웠다. 황사를 한 바가지쯤 마셨던 듯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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切吉(절길)이란 마을에 들렀다. 그곳 20리쯤 북쪽에서 沙珠玉河, 즉 大非川의 제법 세찬 물줄기를 발견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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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lt&lt사진-大非川의 물길&gt&g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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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비천 일대는 수십만 병력이 전투를 벌일 만한 넓은 초원지대였지만, 이제는 사막화가 진행되고 있다. 필자 일행은 지도상으로 沙珠玉河가 마을 한복판을 가로지르며 흐르는 浪&#23247(낭랑)을 찾아 나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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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의 奧地(오지)에는 도로안내판이 없다. 중국인 현지 가이드인 미스 劉(유)는 낭랑에서 千卜&#24404寺(천복록사)를 거쳐 共和(공화)의 縣소재지에 이르는 지름길이 있다고 자신만만했다. 지도상에 표시되어 있지 않은 지름길을 찾지 못하고 길을 헤매다 강 바닥이 바짝 말라버린 사주옥하의 下流(하류)에 이르렀다. 이름 모를 삼거리에서 길을 잘못 들었다. 우리 일행은 낭랑 가는 길로 접어들었다고 생각했지만, 끝내 낭랑에 이르지 못했다. 필자가 낭랑에 대해 집착했던 것은 用水 확보에 유리한 그곳이 설인귀의 本陣(본진)이 설치되었던 곳이 아닌가 하고 억측했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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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lt&lt사진-말라버린 사주옥하&gt&g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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좁은 길을 통해 塘格木(당격목)이라는 마을을 지나 操什達(조십달) 마을에 이르러 티베트 서부지역과 西寧(서녕)을 연결하는 213번 국도를 만났다. 여기서 共和縣(공화현)까지가 51km. 이미 해가 기울어 낭랑을 찾아 되돌아갈 시간은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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필자는 가이드 미스 劉에게 “낭랑도 찾지 못하고 200여리나 길을 헤맸다”고 은근슬쩍 찔러 보았다. 그러나 그녀는 “大非川(대비천)이란 오지에 가자는 고객은 선생들 이외엔 이제껏 아무도 없었다”면서 “그래서 大非川 일대에서 길을 좀 헤맸긴 했지만, 우리가 헤맨 靑海南山 남쪽 草原과 모래땅 일대가 바로 대비천 전투현장이 아니냐”고 당당하게 받았다. 사실, 우리는 그녀의 말처럼 대비천 전투의 현장을 본의 아니게 구석구석 둘러본 셈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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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13번 국도의 共和-湟源(황원) 구간은 도로 보수공사 중이었다. 이 때문에 우리 일행을 태운 지프는 대체도로인 일월산의 험한 고갯길을 굽이굽이를 오르고 내려야 했다. 西寧의 숙소로 돌아온 시각은 날이 바뀌어 새벽 0시30분이었다.(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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