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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0년을 군림한 武則天의 우먼 파워

鄭淳台 작가   |   2010-05-17 | hit 1426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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鄭淳台 작가 st-jung@hotmail.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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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역사상 유일한 女帝(여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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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83년 12월, 武后(무후)의 꼭두각시에 불과했던 唐 고종이 죽고 中宗 李哲(이철)이 즉위했다. 中宗은 실질적인 통치자인 무후와 상의하지도 않고 자신의 장인을 侍中(시중)으로 임명하려 했다. 이에 격노한 무후는 684년 中宗을 폐위시키고, 中宗의 동생 李旦(이단)을 즉위시켰다. 그가 睿宗(예종)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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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lt&lt사진-측천무후&gt&gt



원래, 고종은 미천한 첩이 낳은 아들 忠(충)을 태자로 세웠다. 그러나 武后는 황후가 된 후 忠을 廢嫡(폐적:嫡子 신분을 없앰)하고, 그녀가 낳은 아들 弘(홍)을 태자로 세웠다. 弘은 동정심 깊은 인물이었지만, 무후의 심기를 거슬러 독살되었다. 그 과정은 다음과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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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2세의 나이로 昭儀(소의)에서 황후가 된 무후는 폐위된 王황후와 蕭妃(소비)의 팔다리를 자르고 눈과 코를 벤 후 술독에 담가 죽였다. 蕭妃는 생전에 두 공주를 낳았다. 태자 弘은 이 자매의 婚期(혼기)가 이미 찼으므로 시집을 보내도록 高宗에게 진언했다. 이것을 무후는 자신에 대한 반항으로 받아들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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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종과 무후 사이엔 弘·賢·哲·旦(홍·현·철·단) 등 모두 네 아들을 두었는데, 弘의 독살 후 賢을 태자로 세웠지만, 또 폐적하고, 다음 아들 哲을 태자로 삼았다. 태자 賢을 폐한 이유는 무후 측근의 方士가 누군가에 의해 살해되었는데, 그것이 태자 賢의 사주에 의한 범행이라고 의심했기 때문이다. 살해당한 方士는 태자 賢의 비행을 무후에게 자주 고자질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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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90년, 武后(무후)는 국호를 大周(대주)로 고치고, 중국사상 유일한 女帝(여제)가 되었다. 武則天(무측천)은 폐위당한 아들 예종을 태자로 삼고, 그의 姓도 武씨로 고쳤다. 荊州(형주)의 도독 武士&#24416(무사확)의 딸인 무측천은 원래 문장에 재능이 있고 역사에 밝은 데다 太宗의 말기부터 庶務(서무)를 대신 처리하며 政務(정무)의 능력을 쌓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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女帝 무측천은 처음엔 懷義(회의)라는 승려를 궁중에 끌어들여 총애했지만, 그가 거들먹거리자 무후의 密命(밀명)을 받은 힘센 궁녀가 그를 때려죽였다. 이후 무측천은 張易之(장역지)·張昌宗(장창종)이라는 美소년을 곁에 두고 총애했다.



&lt&lt사진-당나라의 채색을 한 文官像(좌), 武官像(우)&gt&g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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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측천은 자기에 대한 世人의 비난이 들끓을 것을 두려워했다. 밀고가 장려되어 자기에게 비판적인 신하들을 붙들어 혹독하게 처벌했다. 설사 밀고자의 말이 사실이 아니어도 처벌하지 않는다고 장려했기 때문에 밀고가 난무했다. 더욱이 索元禮(색원래)·周興(주흥)&#8228來俊臣(내준신)이라는 酷吏(혹리:혹독하고 못된 관리)들이 고문을 가해 죄상을 마음대로 날조했다. 투옥된 사람은 대부분 반역자라는 죄명을 뒤집어쓰고 주살되었다. 이때 백제 출신 명장 黑齒常之(흑치상지)가 모반죄로 처형된 것도 이들 혹리들의 조작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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女帝는 파워게임엔 능숙했지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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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측천이 여제로 등극한 大周 시대에 고구려의 유민 大祚榮(대조영)이 渤海國(발해국)을 창건했다. 668년 羅&#8228 唐 연합군에 의해 고구려가 멸망된 후 끝까지 항거한 다수의 고구려인들과 말갈족은 당군에 의해 營州(영주:지금의 요녕성 朝陽)에 강제로 옮겨진 바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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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후 696년에 이르러 營州에서는 무측천 정권의 지배에 불평을 품고 있던 거란(契丹)의 추장 李盡忠(이진충)이 반란을 일으켜 걷잡을 수 없는 혼란에 빠지자 대조영은 말갈 추장 乞四比羽(걸사비우)와 함께 무리를 이끌고 그들의 옛 땅으로 돌아오게 되었다. 이들을 추격하던 大周의 軍에 의해 말갈족의 추장 걸사비우가 죽자 대조영은 말갈의 무리까지 합쳐 옛 고구려 영토였던 東牟山(동모산:지금의 길림성 敦化縣 敖東城)에서 자립하여 698년 震國王(진국왕)이 되었다. 대조영의 세력은 성장을 거듭하여 지금의 요동산 동쪽과 압록강 남부까지 영토를 넓히자 唐의 玄宗도 이를 무시할 수 없어 712년 渤海郡王(발해군왕)으로 봉했다. 이후 大祚榮은 발해국왕을 칭하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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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중국에서 唯一無二(유일무이)한 女帝로서 무측천의 인재 등용 등 治績(치적)이 상당한 평가를 받고 있다. 그러나 그녀가 權謀術數(권모술수)와 파워게임에 능했던 것은 사실이지만, 男尊女卑(남존여비)의 시대에 女帝로서의 국정 장악에는 장애와 한계가 있었고, 따라서 國威(국위)의 저하를 막기엔 力不足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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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워 우먼’ 무측천도 나이는 이길 수 없었다. 나이 80을 넘긴 후에는 왕년의 기력&#8228체력은 쇠잔해졌다. 名臣(명신) 狄仁傑(적인걸)의 천거로 張柬之(장간지)가 재상으로 기용되었고, 그 후 바로 무측천은 병상에 눕게 되었다. 장간지는 근위대장 李多祚(이다조:거란족) 등을 포섭하여 반란을 감행했다. 그는 태자를 동궁으로부터 맞아들이고, 내란을 진압한다는 명목으로 반란군을 이끌고 玄武門(현무문)의 빗장을 때려 부수고, 궁중으로 돌입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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먼저 무측천의 男妾(남첩)인 장역지&#8228장창종 형제를 궁중의 복도에서 베어 죽이고 병상의 무측천에 몰려가 退位(퇴위)를 강요했다. 무측천도 늙고 병들어 승낙할 수밖에 없었다. 쿠데타 주체는 그녀를 궁중으로부터 別宮(별궁)으로 옮기고, 체면치레로 則天大聖皇帝(측천대성황제)라는 尊號(존호)를 올렸다. 어떻든 그녀는 새 황제인 中宗의 친모였기 때문이다. 大周는 15년 만에 종말을 고했다. 705년 겨울, 무후는 죽었다. 나이 82세였다. 그녀는 거의 50년간 절대 권력자로 군림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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中宗은 복위 후 國號(국호)를 大唐(대당)으로 복원시켰다. 그러나 무측천처럼 女帝가 되려는 여성이 또다시 등장했다. 바로 中宗의 처인 韋(위)황후였다. 韋황후는 사돈관계인 武三思(무삼사:무측천의 조카)의 헌책에 의해 張柬之 등 쿠데타로 中宗을 복위시킨 功臣(공신) 5명을 일단 지방관으로 좌천시킨 후 모두 주살했다. 710년 中宗이 韋황후와 武三思의 불륜관계를 눈치채자 韋황후는 남편 中宗을 독살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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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lt&lt사진-당삼채 여인상&gt&g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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韋황후의 딸 安樂公主(안락공주)는 武三思(무삼사)의 아들 武崇訓(무숭훈)에 시집가 있었다. 그녀는 皇太女(황태녀)가 되어 언젠가 女帝가 될 어머니 위황후로부터 황위를 물려받을 것을 꿈꾼 여인이다. 무삼사는 궁중에 자주 출입하여 韋황후와 정을 통했는데, 눈치가 둔한 中宗은 韋황후와 武三思가 노름을 할 때 곁에서 계산해주는 역할까지 자청하기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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中宗을 독살한 후 韋황후는 中宗의 제4자 重茂(중무)를 황제로 세우고, 그녀 자신은 攝政(섭정)이 되었다. 그러나 무측천에 의해 폐위되었던 睿宗(예종:李旦)의 아들 李隆基(이융기)가 擧兵(거병)하여 玄武門으로부터 궁중에 돌입하여 韋황후와 安樂공주를 참살하고, 그 일당도 모두 주살했다. 이융기는 자신의 아버지 睿宗(예종)을 복위시켰다. 그러나 예종은 즉위 2년 만인 712년 帝位를 아들 이융기에 물려주고 上皇(상황)이 되었다. 이융기가 바로 唐의 6대 황제 玄宗(현종)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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唐 玄宗의 권태 속에 傾國之色 양귀비의 등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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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lt&lt기록화-唐 玄宗&gt&g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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玄宗은 재위기간이 45년으로 唐 왕조 중 가장 길었다. 그의 즉위 초기에는 姚崇(요숭)·宋璟(송경) 등 賢臣(현신)을 재상으로 등용해 좋은 정치를 하고, 또한 문학&#8228예술에 관심을 가져 현란한 盛唐(성당)의 문화를 開花(개화)시켰다. 이 시대는 ‘開元(개원)의 治’라 하여 太宗 시대의 ‘貞觀(정관)의 治’와 더불어 당의 最盛期(최성기)였다. 726년 唐의 인구는 706만 戶(호) 4142만 명에 달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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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나 현종은 재위 절반을 지나고부터 정무에 권태를 느끼고, 楊貴妃(양귀비)를 얻은 이래 정치가 어지러워지고 唐제국은 붕괴되어 갔다. 楊貴妃는 원래 현종의 아들 壽王(수왕)의 妃였다. 현종은 楊玉環(양옥환:양귀비의 本名)을 한번 보고 미모와 춤에 매료되고 말았다. 그래서 그녀의 뜻으로 가장해서 壽王과 이혼시킨 뒤 여승 楊太眞(양태진)으로 만들어 속세와 인연을 끊은 것으로 조작하고, 그후 그녀를 후궁에 넣어 총애했다. 그때 그녀의 나이 23세, 현종은 56세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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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lt&lt기록화-楊貴妃&gt&gt



양귀비는 현종의 총애를 독점했다. 양귀비의 일족은 부귀와 권세를 잡았다. 양귀비의 세 언니는 모두 황녀와 동등한 대우를 받았다. 6촌 오빠 楊釗(양쇠)는 원래 술과 도박으로 세월을 보내는 파락호였지만, 현종으로부터 國忠(국충)이라는 이름을 하사받고 벼락 출세의 길에 올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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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32년 渤海(발해)의 장수 張文休(장문휴)가 함대를 이끌고 산동반도의 登州(등주:지금의 烟臺市)에 상륙하여 자사(州의 장관) 韋俊(위준)을 잡아 죽였다. 唐 현종은 左領軍(좌령군)을 급파했으나 登州에 도착했을 때 발해군이 이미 철수한 뒤였다.


이때는 발해국의 2대 武王 大武藝(대무예)의 시기였다. 무인적 기질이 강렬했던 그는 영토 확장을 위해 변경을 정복했다. 특히 北만주 삼림지대의 肅愼(숙신)&#8228勿吉(물길)系의 말갈 諸族(제족)에 대한 지배를 굳혀 갔고, 720년대 전반에는 그들을 제압하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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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런데 726년, 武王의 강권지배에 반발한 黑水部(흑수부:松花江 남&#8228북안 유역)가 唐朝에 조공을 바치며 唐의 관리 파견을 요청했다. 이에 따라 동년, 唐은 黑水部를 黑水州로 삼고, 黑水도독부를 설치했다. 발해에 대해서는 남북으로 끼고 치는 형세를 취했던 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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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에 격노한 발해 武王은 黑水(흑수) 공략과 對唐 개전을 결심했다. 그의 동생 大文藝(대문예)에게 원정군을 지휘하도록 했지만, 大文藝는 唐과의 개전에 반대, 오히려 唐에 망명했다. 唐 현종은 대문예를 비호하면서 무왕과 대립시켰다. 이에 무왕이 선제공격을 가하여 등주를 습격했던 것이다. 드디어 唐과 발해는 본격적인 전쟁상태에 들어갔다. 唐 현종은 신라에 請兵(청병)을 하여 남북으로부터 발해를 협공하자고 제의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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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나 734년, 발해의 남쪽 국경까지 북진한 신라군은 마침 큰 눈이 내리는 바람에 많은 사상자를 낸 채 아무 전과 없이 회군했다. 그러나 이를 계기로 唐 玄宗은 羅唐전쟁 시기(670-676)에 신라가 쟁취한 대동강 以南의 땅을 신라의 영토를 인정했다. 무려 60년 만에 김춘추-이세민(당태종)의 ‘648년 협약’이 실현되어 국교가 완전히 정상화되었다.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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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lt&lt사진-비단치마를 입은 여인상&gt&g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