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韓國人 최초의 현장답사-新羅金氏의 始祖 김일제의 고향(1)

鄭淳台 작가   |   2010-05-19 | hit 7994




鄭淳台 작가 &ltst-jung@hotmail.com&g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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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lt&lt사진-가목관에서 본 기련산맥&gt&g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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祁連山脈을 넘어 감숙성으로 들어간 까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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삼국통일로 민족통일국가를 만든 주체세력 新羅金氏(신라김씨)는 匈奴族(흉노족)이었다는 주장이 학계에서 제기된 지 이미 오래 되었다. 백제·고구려 멸망 후의 羅·唐전쟁에서 승리한 민족사의 영웅 文武王(문무왕)의 陵碑(능비)에는 그가 흉노 休屠王(휴도왕)의 태자인 ‘&#31226侯’(투후)라고 새겨져 있다. 문무왕의 능비는 조선왕조 正祖(정조) 때인 慶州(경주) 지방 사람에 의해 발견되었고, 그 拓本(탁본) 네 장이 淸(청)의 문인 柳喜海(유희해)의 손에 들어가 &lt海東金石苑&gt(해동금석원)에 실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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능비는 그 후 행방이 묘연했는데, 두 동강이 난 비편이 1961년과 2009년 경주에서 차례로 다시 발견되어 현재 국립경주박물관에 보존되어 있다. 비문의 전체 내용은 자체에 破失(파실)된 부분이 많아 완전 해독이 어렵지만, 대체로 앞면에서는 신라에 대한 찬미, 신라김씨의 내력, 太宗武烈王(태종무열왕)과 문무왕의 사적, 百濟(백제) 평정 사실 등이 적혀 있고, 뒷면에는 문무왕의 유언, 문무왕의 장례 사실, 碑銘(비명) 등이 새겨져 있다. 특히 신라김씨의 내력에 대해서는 비문의 제6행에 다음과 같이 새겨져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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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lt&#31226侯(투후)의 祭天之胤(제천지윤)이 7代를 전하여…하였다. 15代祖 星漢王(성한왕)은 그 바탕이 하늘에서 내리고 그 靈(영)이 仙岳(선악)에서 나와 OO을 개창하여… &g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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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의 인용문에서 ‘&#31226侯’(투후)는 漢武帝(한무제)의 託孤之臣(탁고지신:어린 후계 황제를 보필하라고 先帝로부터 특명을 받은 신하) 중 1인인 金日石+單(김일제)를 말한다. 김일제(BC 134-86)는 흉노 休屠王(휴도왕)의 태자였으나 BC 121년 漢의 표기장군 &#38669去病(곽거병)의 흉노 정벌시 14세의 나이로 포로가 되었다. 처음엔 養馬奴(양마노:말 기르느 노예)가 되었으나 말을 능숙하게 양육하는 능력이 馬마니아인 무제의 마음을 사로잡아 그 뒤 馬監(마감), 侍中(시중), 駙馬都尉(부마도위) 등으로 승진하고, 莽何羅(망하라)의 난 때 무제의 목숨을 구한 공으로 &#31226侯(투후)가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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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에서 나온 ‘祭天之胤 傳七葉 ’(제천지윤 전칠엽)은 휴도왕이 金人(금인)을 만들어 祭天(제천:하늘에 제사지냄)했다는 사실을 알고, 漢무제가 휴도왕의 아들 일제에게 金씨 姓을 하사하고, 이를 그의 후손 7代가 그의 &#31226侯(투후)를 계승했다는 의미이다. 투후는 산동성 지역의 &#31226縣(투현)을 食邑(식읍)으로 보유한 제후를 의미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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또 ‘成漢王’(성환왕)은 김씨로서 신라에 처음 등장한 金閼智(김알지)로 보는 견해, 김알지의 아들인 勢漢(세한)으로 보는 견해, 김씨 중 최초로 왕위에 오른 신라 味鄒王(미추왕)으로 보는 견해 등으로 엇갈리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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필자 일행은 신라김씨의 본거지인 甘肅省(감숙성)을 답사하기로 했다. 필자의 寡聞(과문)이겠지만, 아직 흉노 흉도왕과 그의 태자 김일제의 본거지에 관한 답사 기록을 발견한 일이 없다. 이것이 우리 일행이 준험한 祁連山脈(기련산맥)을 넘어 甘肅省(감숙성)을 답사한 까닭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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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발 4000m 고갯길에서 만난 눈보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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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월11일 오전 8시30분, 중국 靑海省(청해성)의 省都인 西寧(서녕)을 출발해 大通山(대통산)과 達坂山(달판산) 사이의 협곡을 뚫고 기련산맥을 넘어 흉노 休屠王(휴도왕)과 渾耶王(혼야왕)의 본거지를 찾는 답사에 나섰다. 흉노 右翼의 핵심거점 중 하나인 기련산맥은 ‘청해성과 甘肅省(감숙성)의 분수령’ 혹은 ‘河西走廊(하서주랑)의 등뼈’ 등으로 불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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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련산맥의 최고봉은 5547m에 달한다. 서녕-張掖(장액) 간을 연결하는 국도 227호 구간에는 3000~4000m짜리 고개가 수두룩하다. 청해성의 峨堡鎭(아보진)과 감숙성의 民樂(민락) 구간 74km가 가장 험한 코스였다. 그 중도의 峨博鎭(아박진)에서 점심을 해결하려고 길가 식당들의 문을 두드렸지만, 모두 문을 잠그고 영업을 하지 않았다. 우리 일행은 건빵·과일 등 비상식량을 지니고 있었기 때문에 굶을 염려는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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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lt&lt사진-청해성의 峨堡鎭(아보진)&gt&g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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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련산맥 속의 마을 王道班(왕도반)과 南豊을 잇는 구간의 험한 고갯길에서 심한 눈보라를 만났다. 눈보라가 휘날리는 해발 4000m 전후의 고갯길은 대낮인데도 3~4m 前方이 보이지 않았다. 곳곳에 대형 트럭 등이 사고를 일으켜 길가에 널부러져 있었다. 우리 일행을 실은 지프 운전사는 前照燈(전조등)을 켜고 도로의 노란색 중앙선을 따라 거북이 걸음으로 조심조심 운전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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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lt&lt사진-눈보라가 휘날리는 해발 4000m 전후의&nbsp고갯길은 대낮인데도 3~4m 전방이 보이지 않았고 전복사고로 화물트럭이 널브러져 있었다.&gt&g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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民樂(민락)에 다가갈 무렵에야 눈발이 약해지고 시계도 훨씬 밝아졌다. 우리 일행은 오후 3시가 넘어 민락현의 什里稻香村(십리도향촌)에 들러 늦은 점심을 먹었다. 民樂현 주변에는 大馬營(대마영)·軍馬八隊(군마팔대) 등 말과 관련한 지명이 많다. 흉노로부터 淸朝(청조)까지 이곳은 대규모 軍馬 사육장이 있었기 때문이다. 민락현 출신인 중국인 운전사는“나도 얼마 전까지 목장에서 일했지만, 이곳 목장에 말은 하나도 없고, 羊과 야크만 있다”고 말했다. 자동차와 탱크 등의 등장으로 이제 말의 용도가 옛날보다 훨씬 줄어들었는데, 말의 성격이 또 워낙 까다로워 사육하기가 어렵기 때문이라고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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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lt&lt사진 民樂縣의 목장&gt&g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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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 일행은 민락에서 국도를 버리고 지방도로를 타고 靑南縣(청남현)의 馬蹄寺(마제사) 千彿洞(천불동)을 찾아갔다. 천불동은 돈황의 莫高窟(막고굴)에 비할 바는 아니었지만, 눈 내리는 마제사 입구는 절경이었다.



&lt&lt사진-눈 속의 마제사의 천불동&gt&g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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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 일행이 굳이 이곳을 찾은 것은 기련산맥의 눈 녹은 물이 이 근처에서 黑河(흑하)란 큰 흐름을 이룬 후 오아시스 도시 장액으로 흘러가기 때문이다. 장액을 감싸고 도는 흑하는 다시 서북진하다가 감숙성을 벗어나 사막을 뚫고 북상하여 내몽골에서 居延澤(거연택)이라는 거대한 호수를 이룬다. 거연택은 마르코 폴로의 &lt東方見聞錄&gt(동방견문록)에도 소개되는 유목민의 젖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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흑하의 흐름과 同行하여 장액에 도착했다. 우리 일행을 실은 지프가 이날 하루 달린 거리는 600여Km에 달했다. 운전사에 대한 감사의 의미에서 모두 큰 박수를 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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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액의 옛 이름은 甘州(감주)이다. 甘肅省이라는 명칭은 甘州와 肅州(숙주:지금의 酒泉)의 첫 글자에서 따왔다. 우리는 藏族(티베트족) 식당에 들어가 저녁을 해결하고 西大街(서대가)에 있는 3성급 호텔 張掖電力大厦(장액전력대하)에 들었다. 호텔 이름에 ‘電力’이 들어가 있지만, 조명은 흐릿하고 바깥의 찬 바람이 창문의 틈새를 통해 들어와 객실 안이 썰렁했다. 샤워를 하려고 했지만, 미지근한 물만 나오는 바람에 감기에 걸릴 뻔했다. 워낙 생활용수가 귀한 곳이어서 물을 절약하느라고 일부러 이런 수법을 쓴 것이라고 이해했다. 장액은 연간 강우량 300mm 정도의 오아시스 도시다. 더욱이 간밤에 내린 눈을 제외하면 지난 3개월 동안 강우량 제로(0)였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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河西走廊(하서주랑)은 求道(구도)의 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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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월12일 날씨는 쾌청이었다. 오전 8시30분, 우리는 지프를 타고 장액을 출발하여 G30 고속도로에 올라 長城(장성)의 서쪽 끝 嘉&#23786關(가욕관)을 향해 달렸다. 기련산맥의 連峰(연봉)들은 간밤에 내린 눈으로 온통 하얗고, 황사의 진원지인 大사막 쪽의 하늘은 쪽빛처럼 새파랗다. 모래가 풀풀 흩날리고 온 천지가 누렇다는 河西走廊(하서주랑)을 천리마를 탄 것처럼 하루에 왕복할 수 있다는 것은 뜻밖의 행운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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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lt&lt사진-기련산&gt&g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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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서주랑은 張騫(장건:실크로드의 개척자)·&#38669去病(곽거병:감숙성의 정복자)·&#8228高仙芝(고선지:西域을 제압한 고구려 유민 출신의 唐將)·李元昊(이원호:西夏제국의 창업 황제)·칭기즈칸이 말을 타고 달린 野望(야망)의 길이었고, 玄&#22872(현장:大唐西域記를 저술한 唐代의 고승)·惠超(혜초:往五天竺國傳을 저술한 신라의 고승)이 발자국을 남긴 求道(구도)의 길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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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욕관은 明代 장성의 서쪽 끝이다. 가욕관에 와서 새삼 고맙게 느낀 일이지만, 중국에서는 60세 이상에게는 명승지나 박물관 등의 입장료가 면제된다. 우리 일행 5명은 조선족 통역 金부장을 제외하면 모두 60세 이상이다. 거센 바람을 맞받으며 가욕관의 문루에 올라 바라본 大사막과 기련산맥은 참으로 환상적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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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lt&lt사진-가욕관 문루에서 바라본 기련산맥&gt&g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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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욕관 內城의 光化門(광화문) 좌측에 乾隆(건륭) 15년(1792)에 설치된 戱臺(희대:작은 무대)라는 건물이 있다. 이곳에서 수비군의 장병과 성내 주민들이 함께 연극을 즐겼다고 한다. 이 건물 천정에는 태극기와 비슷한 문양이 그려져 있다. 다른 점은 태극기에는 太極(태극) 주위 사방에 周易(주역)의 4卦(괘)를 배치하고 있는 데 비해 戱臺 천정의 문양은 태극 주위에 8卦로 빽빽하게 채워져 있다는 점이다. 태극기는 조선 高宗 19년(1882)8월 朴泳孝가 修信使(수신사)로 일본으로 갈 때 처음 만들어 게양했는데, 다음 해 그것이 정식으로 국기로 채택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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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lt&lt사진-가욕관 戱臺 천정의 태극 문양&gt&g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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嘉&#23786關市(가욕관시) 동쪽 21km 에 위치한 酒泉市(주천시)로 이동했다. 주천은 하서4군 중 동쪽으로부터 세 번째의 오아시스이다. 기련산맥의 눈 녹은 물이 흐르는 강과 伏流水(복류수:모래 사막 속을 흐르는 물)를 이용해 관개농업을 한다. 이곳 특산품으로는 ‘포도의 美酒, 夜光(야광)의 杯(배)’라는 王翰(왕한)의 詩句로 회자되는 夜光杯(야광배)이다. 기련산의 玉으로 만든 공예품으로서 색깔은 짙은 녹색, 테두리는 희미하지만 투명한데, 술을 담고 밤에 등불을 비추면 아련한 형광을 발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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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천을 적시는 北大河와 張掖(장액)을 휘감아 도는 黑水는 주천 외곽에서 합류하여 북북서로 흘러간다. 이것이 弱水(약수)로서 사막을 지나 내몽골에 이르러 居延澤(거연택)을 이룬다. 居延에는 漢代 長城의 최전선이 구축되어 있었다. 이곳에서 漢代의 군사·행정제도를 파악할 수 있는 木簡(목간) 문서 2만여 점이 발견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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酒泉은 河西(하서:지금의 감숙성)를 前漢(전한)의 영토를 만든 ‘少年장군’ &#38669去病(곽거병)의 전설로 채색되어 있는 오아시스 도시다. BC 121년 여름, 약관 20세의 곽거병은 정예 기병 3만을 거느리고 北地(북지:지금의 섬서성 環縣 남방)를 출발하여 황하의 大만곡부 서북단을 도하한 후 내몽골의 텡케르(騰格里) 사막과 보딘자란(巴丹吉林) 사막을 질풍같이 횡단하여 흉노의 유목거점인 居延澤(거연택) 일대를 휩쓸었다. 이어 그는 弱水(약수)를 따라 남하하여 祿福(녹복)이라는 곳에 이르러 전승 자축연을 벌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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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nbsp&lt&lt지도-BC 121년 봄과 여름에 전개된 곽거병의 河西 공략도&gt&g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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곽거병은 출정 전 漢무제로부터 하사받은 술 한 병을 갖고 있었다. 물론 이 술로는 병사들에게 한 잔씩 돌릴 수 없었다. 그는 이 한 병의 下賜酒(하사주)를 물이 펑펑 솟아오르는 큰 샘 속에 부어 병사들에게 한 잔씩 떠서 마시도록 했다. 이후 이곳의 지명은 술이 솟아오르는 샘이라 하여 酒泉(주천)으로 바뀌었다. 사기가 오른 곽거병 軍은 흉노 右翼(우익)의 핵심 거점인 기련산을 공격하여 탈취했다. BC 121년 여름 원정을 통해 곽거병은 참수 3만여 급, 흉노의 王 5명을 포획하는 큰 전과를 올렸다.(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