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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3세로 요절한 ‘武帝의 匕首(비수)’곽거병

鄭淳台 작가   |   2010-05-22 | hit 1126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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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nbsp漢무제와 匈奴(흉노) 선우의 대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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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lt&lt사진-노인 우라 흉노 분묘(墳墓)에서 출토된 펠트의 조각(1세기). 이 펠트 조각에는 맹수가 포획된 동물을 덮쳐 교합(交合)하는 모습이 묘사되어 있다. 몽골과 알타이산맥의 동결(凍結) 분묘에서 출토된 유품을 보면 유목민의 예술은 귀금속류에 한정되어 있지 않고, 직물,· 견사(絹絲)로 자수(刺繡)한 펠트, 질좋은 모직물 등도 있다.&gt&g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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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nbsp이제는 유목초원지대의 最强(최강) 흉노제국의 軍臣(군신)&#8228伊稚斜(이치사) 선우와 농경지대를 대표했던 漢제국의 武帝(무제) 사이에 전개된 충돌의 역사를 정리해 볼 필요가 있을 것 같다.
&nbsp16세에 즉위한 漢무제도 즉위 초에는 흉노에게 공물을 바치는 등 화평정책을 답습했다. 攝政(섭정)으로서 실권을 장악한 무제의 조모 竇(두)태후가 어린 손자의 모험을 용납하지 않았기 때문이다.&nbsp
&nbsp그러나 무제는 재위 6년인 BC 135년 이후 對흉노 강경정책으로 전환했다. 무제를 제어하던 두 태후가 죽자 이제 그 누구도 무제를 제어할 수 없었기 때문이다. 무제는 馬邑(마읍:지금의 산서성 朔縣) 일대에 30만의 복병을 미리 깔아놓고, 흉노의 軍臣(군신) 선우를 이곳으로 유인했다. 즉, 馬邑의 豪族(호족)으로서 흉노와 교역을 하던 巨商인 &#32886壹(섭일)을 흉노에 위장 투항시켜 軍臣 선우에게“제가 마읍의 관리를 베어 죽이고 성문을 열면 선우께서 마읍의 재물을 다 얻을 수 있습니다”라고 유혹했다.
&nbsp섭일은 죄수들의 목을 성벽에 높이 매달아 성내의 봉기가 성공한 것처럼 가장했다. 이에 軍臣 선우는 10만 기병을 거느리고 마읍으로 진격했다. 그러나 마읍 주변의 가축들이 방목되고 있는데도 牧夫(목부) 한 사람도 보이지 않았다. 이에 군신 선우는 봉수대 한 곳을 급습해 그 組長(조장)을 신문한 결과 漢의 병력 30만이 매복하고 있다는 자백을 받아내고 아무런 피해 없이 유유하게 철수해버렸다. 이로써 한무제는 30만 대군을 동원하는 데 따른 인적&#8228물적 손해만 입는 치욕을 당했다. 그때까지만 해도 漢軍은 長城 바깥으로 나가 기동전을 전개할 수 있는 騎兵(기병) 부대가 취약해 추격전을 감행할 처지도 아니었다.&nbsp
&nbsp무제는 이같은 치욕을 씻기 위해 다시 4년을 벼르고 별렀다. 흉노에서는 軍臣(군신) 선우가 죽고 그의 동생인 伊稚斜(이치사)가 군신선우의 아들인 於單(어단)을 주저앉히고 선우가 되었다.
&nbspBC 129년, 무제는 衛靑(위청)&#8228公孫敖(공손오)&#8228公孫賀(공손하)&#8228李廣(이광) 등 네 장수에게 각각 1만의 기병을 주어 네 방향으로 흉노 땅을 공격케 했다. 漢軍으로서는 처음 장성 바깥에서 작전을 감행했던 것이다. 그러나 公孫賀는 길을 잘못 들어 흉노군과 만나지도 못했고, 공손오는 흉노군에게 패해 7000기를 잃었다. 더욱이 명장으로 이름난 이광은 흉노군에 패해 포로가 되었다가 겨우 탈출하여 돌아왔다.



&lt&lt사진-漢代의 기병 일러스트&gt&g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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네 장수 가운데 오로지 위청만은 上谷(상곡:지금의 하북성 張家口市)으로부터 북상하여 흉노가 하늘에 제사 지내는 용성까지 공격, 참수 또는 포로 700명이라는 전과를 올렸다. 4로군의 공격은 漢軍 측의 피해가 수십 배나 많아 전체적으로는 패전이었다. 다만, 漢軍이 건국 70년 만에 처음으로 長城을 넘어 흉노의 王庭(왕정) 가까이까지 진격했다는 것은 하나의 驚異的(경이적) 사건이었다. 長安은 경축 무드였다.&nbsp
&nbsp그 다음 해(BC 128년), 무제의 총애를 받고 있던 衛子夫(위자부)가 훗날의 황태자 劉據(유거)를 출산했다. 唱妓(창기:가수) 출신인 위자부는 車騎將軍(거기장군) 위청의 누나이다. 위청은 이 해에도 3만 기병을 거느리고, 雁門(안문:지금의 산서성 左云 서쪽)에서 출격, 적 참살 수천 명이라는 전과를 올렸다.
&nbsp위청은 下吏(하리)였던 아버지가 主家(주가)의 여종과 野合(야합)해 낳은 아들로서 正妻(정처)의 아들들로부터 노예 취급을 받는 서러운 소년시대를 보냈다. 그런데 누나 위자부가 무제의 애첩(후의 衛황후)이 됨으로써 거기장군에 올랐다.&nbsp&nbsp
&nbsp또 그 다음해(BC 127년)에도 위청은 雲中(운중:지금의 內몽골 호화호특 남쪽)으로부터 장성 바깥으로 西進하여 흉노가 차지하고 있던 황하 彎曲部(만곡부)의 內地인 오르도스를 탈취했다. 이같은 공적에 의해 위청은 長平侯(장평후)가 되어 食邑(식읍)이 3800호에 이르게 되고, 大將軍(대장군)으로 승진했다. 漢代의 대장군&#8228표기장군&#8228거기장군은 三公과 같은 직급이다.
&nbspBC 124년 가을, 흉노가 또 代郡(대군:지금의 하북성 蔚縣)에 침입해서 都尉 朱英(주영)을 죽였다. 아듬해 봄, 대장군 위청은 定襄郡(정양군:지금의 호화호특 동남쪽)으로부터 흉노 정벌에 나섰다. 이때 토벌에서 흉노의 首級(수급) 수천을 얻었다. 다시 1개월 후, 全軍은 다시 定襄郡으로부터 출격하여 수급과 포로를 합쳐 1만여의 전과를 올렸다.&nbsp
&nbsp그러나 이때 위청 휘하의 右장군 蘇建(소건)과 前장군 趙信(조신)의 부대가 단독으로 군신 선우의 主力과 조우, 하루 동안 전투 끝에 전멸의 위기에 빠졌다. 趙信은 원래 흉노 출신으로 漢에 귀순하여 翕侯(흡후)가 된 部將인데, 고전 중 흉노로부터 투항 권고를 받고 잔병 800기를 이끌고 선우에게 항복했다. 우장군 소건은 휘하 병사를 전부 잃고, 혼자 살아 도망쳐 왔다. 左&#8228右&#8228前&#8228後 將軍은 모두 각료급 將軍號이다.
&nbsp이때 한에는 &#38669去病(곽거병)이란 새로운 에이스가 등장했다. 소년장군 곽거병은 대장군 衛靑(위청)의 생질이다. BC 123년, 흉노 원정 때 18세로서 대장군 휘하의 驃姚校尉(표요교위)로 처음 종군했다. 그는 종군할 때마다 본대에 앞선 과감한 기습 공격으로 전공을 올려 弱冠(약관) 20세에 장군직 중 제2위인 驃騎將軍(표기장군)에 임명되었다. 어려운 환경에서 자란 외삼촌 위청과는 대조적으로, 그는 두 살 때부터 궁중에서 자란 귀족답게 거침이 없는 당당한 태도였다.&nbsp
&nbsp무제는 기질적으로 위청보다 곽거병을 좋아했다. 무제의 親누이 平陽公主(평양공주)의 저택에서 마부 생활을 하여 노예 기질이 몸에 밴 위청은 너무 겸손하여 무제에겐 그것이 오히려 아양을 떠는 것처럼 보였던 것이다. 遠征(원정) 때는 최정예 부대와 최상의 무기&#8228軍馬&#8228장비는 으레 곽거병의 차지였다. 그는 대사막을 가로질러 흉노국가를 마구 휘젓고 다녔던 ‘무제 得意(득의)의 비수’였다. BC 121년 한 해 동안 그는 세 번이나 출전하여 흉노 국가를 전율케 했음은 앞에서 썼다. 이때 곽거병은 “흉노의 右臂(우비:오른쪽 어깨)를 잘랐다”는 평가를 받았다.&nbs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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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nbsp&lt대장군 위청과 표기장군 곽거병을 ‘더블 포스트’로 배치&g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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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nbspBC 119년 봄, 무제는 대장군 위청, 표기장군 곽거병 2인을 ‘더블 포스트’의 사령관으로 임명하고, 각각 5만의 기병을 주어 대규모 흉노 토벌전을 전개했다. 이때 흉노에 투항한 趙信이 伊稚斜(이치사) 선우에게 “大사막을 건너서 온다면 漢軍은 피로해져 있어 손쉽게 사로잡을 수 있다”고 헌책했다.
&nbsp이에 따라 선우는 輜重隊(치중대:군수품의 운송을 맡은 부대)를 멀리 북방으로 이동시키고 정예 부대를 大사막 바로 북쪽에 포진했다. 바로 이곳으로 위청의 부대가 진격했다. 국경선 1000리 밖에서 선우의 정예 부대와 조우한 위청은 즉시 陣形(진형)을 정비했다. 위청은 武剛車(무강거:판자로 지붕을 덮은 차량)를 環狀으로 둘러 본영으로 삼은 다음, 5000기를 적진에 돌격시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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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lt&lt사진-위청의 武剛車(무강거) 포진&nbsp일러스트&gt&gt



&nbsp흉노군도 약 1만기를 선봉대로 삼아 맞싸웠다. 해질 무렵, 질풍이 모래를 감아올려 사정없이 병사들의 얼굴을 후려쳤다. 兩軍 모두 상대의 움직임을 볼 수 없을 정도였다. 그러나 위청은 좌&#8228우익군을 투입하여 포위태세를 굳혀 갔다.
&nbsp이치사 선우는 漢軍 병력이 많고, 투지도 왕성하여 이대로는 흉노군이 불리하다고 판단했다. 그래서 황혼 중에 준마 6두가 끄는 마차에 올라탄 이치사 신우는 호위대 수백기로써 단숨에 포위망의 일각을 돌파하여 서북방으로 도주했다. 兩軍의 격전은 해가 져도 계속되어 양군 모두 거의 동수의 사상자를 냈다.&nbsp
&nbsp漢軍의 左校(영관급 장교)가 포로의 말을 통해 선우가 이미 전장을 탈출했다는 사실을 밝혀냈다. 그는 재빨리 輕騎兵(경기병)을 몰아 어둠을 뚫고 추격에 나섰다. 대장군 위청도 직속 부대를 이끌고 그 뒤를 쫓았다. 흉노는 어지럽게 潰走(궤주)했다. 동틀 무렵까지 200여리를 추격했지만, 결국 선우를 놓치고 말았다. 위청 軍의 전과는 수급과 포로 합쳐서 1만여에 이르렀다.
&nbsp 위청이 사투를 벌이고 있을 때 예하의 前장군 李廣(이광)과 우장군 趙食其(조이기)는 길을 헤매다 전투에 참가하지 못했다. 위청은 보고서를 작성하려고 이광에게 출두하여 해명할 것을 요구했다. 그러나 명예심이 강한 이광은 이를 거부하고 자결했다. 조이기는 贖罪金(속죄금)을 내고 평민으로 강등되었다.&nbsp
&nbsp한편 표기장군 곽거병은 기병 5만, 輜重隊도 위청 軍과 같은 규모였다. 다른 것은 휘하에 副사령관급의 막료가 없다는 것뿐이었다. 다만, 李敢(이감:李廣의 아들) 등 젊은 士官을 大校(예하 부대장)로 발탁해 막료로 삼았다. 곽거병 軍은 右北平郡으로부터 출격하여 1000리를 달리며 흉노의 좌익을 휘저었다. 그의 전과는 대장군 위청의 전공을 훨씬 웃돌았다. 무제는 조서를 내려 그를 다음과 같이 찬양했다.
&nbsp“표기장군 곽거병은 군을 통솔하고, 거기에 포로의 정예를 더하여 대사막을 넘었다. 獲章渠(획장거:江 이름)를 건너 흉노의 왕 比車耆(비거기)를 주살하고, 左大將의 부대와 轉戰(전전)해서 그 旗鼓(기고:깃발과 북)를 빼앗고, 離侯山(이후산)을 넘고 宮閭河(궁려하)를 건너 屯頭王(둔두왕)&#8228韓王(한왕) 등 3인과 장군&#8228大臣을 비롯하여 간부 83인을 붙잡았다. 다시 狼居胥山(낭거서산)에서 하늘에 제사 지내고 姑衍山(고연산)에서 땅에 제사 지냈으며, 翰海(한해:바이칼 호수?)를 눈 아래로 흘겨보았다. 포로의 총수는 7만443 명. 적군의 거의 3할을 격멸했다. 더욱이 糧&#31203(양말:양식과 말먹이)은 敵의 것을 빼앗아 오지 깊숙이 침공하면서 給養(급양)은 거름이 없었다. 표기장군에게 5800호의 食邑을 加贈(가증)한다”&nbsp&nbsp
&nbsp곽거병 예하 校尉級(교위급) 막료들에게는 모두 爵位(작위)가 부여되었다. 위청의 막료들에겐 아무런 恩賞(은상)이 없었다. 선우의 정예부대와 사투를 벌여 끝내 선우를 패퇴시킨 위청의 전공은 질적인 면에서 결코 낮은 것은 아니었다. 아무튼 이후에 흉노는 한동안 漢朝(한조)를 넘보지 못했다.
&nbsp그러나 ‘무제의 날카로운 비수’ 곽거병은 불과 23세의 나이로 요절했다. 그 경위는 이러하다. 李廣의 아들 李敢(이감)이 大將軍의 집에 가서 야료를 부리며 위청에게 상처를 입혔다. 大將軍 위청이 그의 아버지 이광에게 전장에 늦게 도착한 데 대한 ‘보고서’ 작성을 요구하고, 이광이 이를 거부하고 자결한 데 대해 울분을 느꼈기 때문이었다. 이광은 전국 말기 楚(초)를 멸망시킨 秦의 명장 李信의 후예로써 가문에 대한 프라이드가 높았다.&nbsp&nbsp
&nbsp곽거병은 그의 외삼촌 위청에 대한 이감의 아료에 격분하여 이감을 사냥터로 불러내어 활을 쏘아 사살해버렸다. 이에 무제가 격노하여 곽거병을 지방으로 추방했다. 이와 같은 무제의 조치는 물의를 일으킨 곽거병에게 잠시 長安으로부터 떠나 있다가 적당한 시기에 돌아오라는 배려로 보인다. 그러나 곽거병은 지방으로 가던 중 급병으로 죽었다. 곽거병은 사막과 초원을 전전하면서 풍토병에 감염되었던 것으로 보인다.(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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