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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大영웅’ 漢 무제의 쓸쓸한 말년

鄭淳台 작가   |   2010-05-23 | hit 10839


&lt&lt사진- 필자가 중국 여행 때&nbsp사용한 지도&gt&g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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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中華민족에게 千秋萬代의 자존심을 심어준 인물”의 침략 本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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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nbsp중국의 역사 드라마를 보면 한무제를 “中華(중화)민족에게 千秋萬代(천추만대)의 자존심을 심어준 인물”이라든가 “그는 前人未踏(전인미답)의 공을 세운 대영웅”이라고 찬양하고 있다. 그는 흉노를 격멸하기 위해 거의 매년 대군을 파견했다. 흉노 격멸과 漢제국의 영토확장을 필생의 대과업으로 삼고, 백성의 삶이 파탄되는 것도 아랑곳하지 않았다.
&nbsp그 결과, 흉노는 그 右翼인 오로도스&#8228甘肅(감숙) 지역을 포기하고, 그 방면의 渾耶王(혼야왕)이 혼야&#8228휴도의 두 부족을 이끌고 漢朝에 항복하는 일대 사건도 일어났다. 뿐만 아니라 單于庭(선우정:수도)도 漢軍의 銳鋒(예봉)을 피해 大사막 以北으로 후퇴함으로써 흉노의 국위는 현저하게 실추했다.
&nbsp한편 무제는 甘肅(감숙)지방에 武威(무위)&#8228 張掖(장액)&#8228 酒泉(주천)&#8228 敦煌(돈황) 등의 4郡을 설치해서 西域(서역)을 향한 문을 열었다. 이어 烏孫(오손)과 동맹하여 흉노 세력을 배제하면서 東투르키스탄 경영에 착수하여 멀리 파미르高原 넘어 페르가나(지금의 우즈베키스탄) 일대까지 漢의 영향력을 확대했다.
&nbsp무제는 즉위 초기(BC 138년)에 이미 張騫(장건)을 흉노의 압력을 피해 서역으로 이동한 大月氏(대월지)에 사신으로 보내 군사동맹을 추진했다. 장건은 대월지와의 동맹 체결에는 실패했지만, 서역에 관한 많은 정보를 얻어 13년 만에 귀국했다(BC 126년).&nbsp
&nbsp팽창주의자 한무제는 南越(남월:지금의 광동성 지방에 있던 베트남의 前身)을 정복한 이듬해엔 고조선에 대해서도 수륙양면으로 대규모 침략을 감행했다. 조선은 BC 107년의 1차 접전에서 대승을 거두었고, 이후 약 1년에 걸쳐 漢의 대군에 맞서 완강하게 대항하였다. 그러나 장기간 전쟁에 지배층의 내분이 일어나 BC 108년에 왕검성이 함락되어 멸망했다. 고조선이 멸망하자 한은 고조선을 지배하기 위해 일부 지역에 군현을 설치하여, 토착민의 강력한 반발에 부딪쳤다. 그리하여 한의 세력은 점차 약화되었고, 결국 313년 고구려의 공격을 받아 소멸되었다.&nbsp&nbsp
&nbsp무제는 고조선 침략 때 병력 확보를 위해 죄수와 惡少輩(악소배)들까지 동원하여 漢軍은 질이 매우 낮았다. 당시 고조선은 밤에도 문을 걸어 잠그지 않을 만큼 치안이 좋았다. 그러나 고조선 멸망 후 漢으로부터 관리와 상인들이 들어옴에 따라 치안이 어지러워졌다고 중국 史書에도 기록되어 있다.&nbsp&nbsp&nbs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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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nbsp패전을 자초한 漢武帝의 과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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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nbsp그러나 무제는 재위 말년으로 가면서 흉노에게 패전을 거듭했다. BC 99년 貳師(이사)장군 李廣利(이광리)는 3만 기병을 거느리고 酒泉에서 天山으로 출격하여 우현왕의 흉노군과 싸워 흉노군 1만여 명을 무찔렀지만, 돌아오는 길에 흉노의 대군에 포위되어 漢兵(한병) 2만여 명이 전사했다.
&nbsp이광리는 무제 말년에 총애를 받았던 李夫人의 오빠였다. 무제는 어떻게든 이광리에게 작위를 내리기 위해 전공을 세우도록 출전의 기회를 부여했다. 漢朝에서는 공적이 없는 사람에게 작위를 부여하지 못한다는 것이 高祖의 遺訓(유훈)이었다.&nbsp
&nbsp무제는 이광리에게 貳師將軍(이사장군)이라는 칭호를 내리고, 大宛國(지금의 우즈베키스탄의 페르가나 지역)의 汗血馬(한혈마)를 탈취해오도록 했다. 貳師(이사)라고 하는 것은 대완국에 있는 城市인데, 이곳에 한혈마라는 西域産(서역산) 명마가 숨겨져 있었다. 한혈마는 하루에 1000리를 달리는 준마이고, 달릴 때 붉은 피와 같은 땀을 흘렸다고 한다.
&nbsp 이광리는 제1차 원정(BC 104년)에 참패하고, 제2차 원정(BC 102년)에서는 6만여 대군을 동원한 끝에 기어히 小國 대완국의 항복을 받아냈지만, 駿馬(준마) 수십 마리와 中等(중등) 이하의 馬 3000 마리를 획득했을 따름이다.
&nbsp이광리의 원정군 6만 명 중 玉門關(옥문관)으로 귀환한 병력은 1만여 명, 軍馬는 1000여 두에 불과했다. 병량이 부족했던 것도, 전사자가 많았던 탓도 아니었다. 그럼에도 사망자가 8할을 넘었던 것은 將官&#8228軍吏(군리)의 탐욕으로 개인 전리품을 병사들에게 운반토록 하는 등 학대했기 때문이었다. 이같이 무능한 장수를 원정군의 사령관으로 기용한 무제의 모습에서 그의 老妄(노망)을 엿볼 수 있다.
&nbspBC 99년 무제는 이광리를 파견해서 흉노를 공격했다. 이때의 전투에서 별동대의 장군인 李陵(명장 李廣의 손자)이 흉노에게 패해 항복했다. 무제는 5000의 보병을 거느리고 居延澤(거연택:내몽골 지역의 호수) 북방 浚稽山(준계산:지금의 내몽골 西部)에서 흉노의 주력과 조우하여 사투를 벌이던 이릉에게 구원군도 보내지 않았다.



&lt&lt사진- 漢代의 보병&gt&g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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또한 이릉의 패전 후 그의 분전을 변호한 太史令 司馬遷(사마천)에게는 男性을 거세하는 치욕적인 형벌을 가했다. 이때 이릉의 가족은 族滅(족멸)당했다.
&nbsp한무제 시대엔 죽을 죄를 범해도 贖錢(속전)만 바치면 사면을 받을 수 있었다. 그럼에도 사마천은 가난하여 속전을 내지 못해 2년간 옥살이를 해야 했다. 그가 자결하지 못하고 치욕을 감수한 것은 태사령을 지낸 先親(선친)의 유언에 따라 &lt史記&gt를 저술해야 했기 때문이다. 무제시대는 지식인의 수난시대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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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nbsp황태자의 억울한 반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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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nbspBC 91년에는 황태자 劉據(유거)가 반란을 일으켰다가 패해&nbsp 추격병의 칼에 맞아 죽고, 그의 생모인 衛황후가 자결하는 대사건이 일어났다. 그 경위는 이렇다.
&nbsp당시 漢나라에서는 巫蠱(무고)사건이 자주 일어났다. 무고란 증오하는 사람의 나무 인형 등을 만들어 땅에 묻어놓고 저주하는 일종의 巫術(무술)이다. 당시엔 미신에 불과한 무고가 효력이 있는 것으로 믿었고, 따라서 무고 행위가 발각되면 가혹하게 처벌당했다. 예컨대 승상 公孫敖(공손오)는 부인이 저지른 무고행위에 연좌되어 腰斬(요참:허리를 자르는 형벌)을 당했다.
&nbsp공손오는 원래 유난히 소심한 인물이었다. 무제가 그를 승상으로 임명했을 때 그는 엎드려 울면서 苦辭(고사)했다. 무제 즉위 이후 그때까지 승상 담임자 9명 중 4명이 갖가지 이유로 처형당했기 때문이다. 무제는 울먹이는 공손오 앞에다 승상의 印綬(인수)를 툭 던져놓고 그 자리에서 나가버렸다. 공손오는 衛황후의 언니의 남편이기도 했다. 그럼에도 그는 자신도 몰랐던 부인의 무고 행위 때문에 처형되어 승상 50%(10명 중 5명) 처형이란 기록을 채우게 되었다.
&nbsp공손오를 처형시킨 사건에서 무고의 효용성에 큰 힌트를 얻은 자가 酷吏(혹리)로 이름 높은 江充(강충)이었다. 江充은 원래 趙王(조왕)을 섬기다 그의 태자 劉丹(유단)의 非行을 무제에게 고발하여 투옥시킨 인간이었다. 독재자는 원래 이렇게 과감한 고자질쟁이를 좋아한다.
&nbsp江充은 제후의 자제뿐만 아니라 황태자 주변의 비위 사실도 용서하지 않았다. 어느 날, 황태자의 사자가 수레를 몰고 황제의 전용도로를 달린 사실을 적발해낸 것이었다. 황태자는&nbsp 江充에게 사람을 넣어 이 사건을 눈감아 주도록 청탁했지만, 江充은 그걸 그대로 무제에게 보고했다.
&nbsp이 일이 있었던 만큼 황태자는 江充을 미워했다. 이때 무제의 나이 66세이고, 황태자는 이미 38세의 장년이었다. 무제가 세상을 떠나면 황태자가 즉위할 것이고, 그렇게 되면 강충이 생명을 부지할 수 없었을 터였다. 강충은 무고를 이용해 황태자를 실각시킬 계획을 세웠다. 무제가 황태자 유거의 유약함을 불만족스럽게 생각하고 있다는 것은 황실 주변에서는 다 알고 있는 사실이었다.
&nbsp우선, 강충은 흉노 출신 무당을&nbsp 매수하여 “궁중에 무고 기운이 있어 이를 제거하지 않으면 큰 화를 입을 것입니다”라고 무제에게 아뢰게 했다. 무제는 강충에게 무고를 治罪(치죄)하도록 명했다. 이후 황후&#8228황태자&#8228후궁의 거처 등 궁전의 곳곳이 파헤쳐졌다. 파는 곳마다 나무 인형이 나왔는데, 특히 태자宮 근처에서는 무제를 저주하는 글을 적은 인형까지 마루 밑에 많이 묻혀 있었다. 원래 이런 저주의 인형들은 강충 일당이 사전에 가만히 묻은 것들이었다.
&nbsp이때 무제는 엉터리 道士(도사)의 꼬드김에 넘어가 長安 서북방 80km에 위치한 甘泉宮(감천궁)에서 不老長生術(불로장생술) 연마에 열중하고 있었다. 황태자는 강충을 제거하지 않으면 자신이 위험하다고 판단했다. 강충을 불러내 목을 베고 흉노 출신 무당도 불태워 죽였다. 황태자는 백관들에게 다음과 같이 고했다.
&nbsp“황상께서 지금 甘川宮에서 병으로 고생하고 계시다. 의심컨대 무슨 변고가 있어 간사한 무리가 반란을 일으킬 기미가 보인다.”
&nbsp 이렇게 선포한 황태자는 長安의 죄수들을 석방하고, 北軍(長樂宮을 호위하는 부대)의 軍門 앞에 이르러 北軍의 사자 任安(임안)을 불러 符節(부절)을 보이고 北軍의 출동을 명했다. 임안은 원래 황태자의 외삼촌인 대장군 위청(故人)의 門人이었다. 그러나 임안은 營門(영문)을 굳게 닫고 병력을 출동시키지 않았다.
&nbsp황태자는 하는 수 없이 시민군을 급조해 장락궁 西門 근처에서 승상 劉굴리가 지휘한 부대와 5일간 전투를 벌여 피아간 수많은 사상자가 발생했다. 이때 감천궁에서 앓고 있다던 무제가 長安城 서쪽 建章宮(건장궁)에 모습을 드러내자 대세는 금방 기울고 말았다. 황태자는 장안 동쪽 湖縣(호현)으로 도주하여 신발장수의 집에 은신 중에 추격병들이 들이닥치자 장렬하게 싸우다가 최후를 맞고 말았다.
&nbsp이때 황태자의 두 아들도 죽음을 당했다. 강보에 싸여 있던 황태자의 손자만은 생명을 부지하여 감옥에서 여죄수의 젖을 먹고 자랐다. 황후 衛子夫는 무제가 황후의 옥쇄를 거두려고 사람을 보내자 독을 마시고 자결했다.&nbs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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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nbsp 漢軍의 최고사령관 李廣利가 흉노에 항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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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nbsp그러나 황태자의 무고사건은 江充에 의해 날조되었다는 사실이 밝혀졌다. 황태자는 강충을 죽이는 것이 목적이었지, 무제에게 반항할 의사는 없었던 것이다. 무제는 후회하기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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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lt&lt사진- 몽골 스텝(초원) 지역의 유목민. 천막 주위에서 양· 소· 낙타 등이 풀을 뜯고 있다.&gt&gt



&nbsp무제는 강충 일가의 3족을 멸하고, 강충에게 협력했던 환관 蘇文(소문)을 渭水(위수)의 다리에서 불태워 죽였다. 호현에서 황태자에게 칼질하여 列侯(열후)에 올랐던 두 사람은 관직이 삭탈되고 族滅(족멸)당했다.
&nbspBC 90년, 이번에는 승상 유굴리가 무고사건에 얽혀들었다. 그 전말은 이러하다. 유굴리의 아들과 이사장군 李廣利(이광리)의 딸이 결혼함으로써 둘 사이는 사돈관계였다. 이광리의 여동생인 李夫人은 무제의 총애를 받고 昌邑王(창읍왕)을 낳기는 했지만, 그때는 이미 죽고 없었다. 그러나 창읍왕이 즉위하면 이광리와 유굴리는 황제의 외척으로서 지위가 튼튼해지게 마련이었다.
&nbsp그해 3월, 흉노가 五原(오원)과 酒泉(주천)에 침공했다. 이를 맞아 치기 위해 이광리가 7만 대군을 거느리고 원정길에 올랐다. 승상 유굴리는 위수 다리 부근까지 나가 이광리에게 송별연을 벌였다. 이 자리에서 이광리는 유굴리에게“승상께서는 서둘러 창읍왕을 太子로 세우도록 황상께 주청하십시오”라고 속삭였다.
&nbsp황태자 유거가 죽은 후 무제는 아직 후계자를 정하지 못하고 있었다. 유굴리의 부인은 무고의 방법으로 창읍왕의 라이벌인 세 황자를 저주했다. 이 무고 사실이 고발에 의해 밝혀져 승상 유굴리는 腰斬(요참)의 형에 처해지고, 그 일가족도 몰살당하고 말았다. 이광리의 妻子(처자)도 투옥되었다.
&nbsp원정중이었던 이광리는 처자를 살리기 위해 큰 전공을 서둘렀다. 그는 흉노 영토 깊숙이 진공하여 무모한 작전을 거듭한 끝에 선우 主力 5만 기에게 대패하여 마침내 흉노에 항복했다. 투옥된 그의 가족은 모두 처형되었다.
&nbsp이제, 무제에게 남은 것은 늙은 몸과 적막감뿐이었다. 무제는 의욕과 기력을 잃고 말았다. BC 89년, 무제는 자신의 잘못를 사죄하는 이른바‘輪臺(윤대)의 詔(조)’를 발표했다. 이 詔의 골자는 그의 재위 동안 外征(외정) 및 重稅(중세)로써 백성을 괴롭힌 것을 후회한다는 내용이었다. 사실, 징세가 너무 가혹했기 때문에 시중은 불경기에 허덕여 무제 말기에는 각지에서 도적이 들끓었다. 만약 ‘윤대의 조’가 나오지 않았다면 천하 통일 15년 만에 멸망한 秦(진)의 전철을 모면하기 어려운 상황이었다. BC 87년에 독재군주 무제는 재위 54년, 71세의 나이로 죽었다.
&nbsp무제의 시대를 되돌아보면 그는 뛰어난 재능과 원대한 포위를 가진 군주임에는 틀림없었다. 先代인 文帝(문제)와 景帝(경제)가 다년간 축적해 놓은 풍부한 재력을 바탕으로 흉노와 사생결단의 전투를 되풀이했다. 그 결과, 高祖 劉邦(유방)이 白登山에서 7일간 포위되었다가 간신히 도주하여 모돈 선우에게 많은 재물을 바쳐 사직을 보존해 온 치욕을 씻기는 했다.
&nbsp그러나 그는 주변국들에 대한 침략전쟁을 일으켜 재정위기를 자초했다. 거기에다 사치스런 궁전&#8228高樓&#8228專用(전용)사냥터 등 대규모 토목공사를 일으켰을 뿐만 아니라 막대한 돈이 드는 封禪(봉선:천하를 안정시킨 황제가 하늘과 땅에 제사하는 의식)을 강행하는 등 낭비에 낭비를 거듭했다. 재원을 마련하기 위해 소금과 철을 국가 독점사업으로 만들었고, 작위를 돈을 받고 판다든지 사형수도 돈만 바치면 사면하는 제도를 강행했다. 그래도 모자라는 재원을 확보하기 위해 均輸法(균수법)과 平準法(평준법)을 시행했다.
&nbsp균수법은 전국 각지로부터의 조세물자의 수송비를 절약하고, 물자의 균등한 유통을 기한다고 칭하면서, 실은 그 물자가 부족한 지방에 市價(시가)로 팔아 국고수입을 늘리기 위한 법이었다. 평준법은 수도에 平準局(평준국)을 설치해서 전국의 물자를 集積(집적)하고, 수레와 器具(기구)의 제조사업도 국가가 경영하는 것이다. 그 결과, 전국의 물자를 독점 관리하여, 가격이 떨어질 때에 매입하고, 가격이 오를 때 매입함으로써 국고수입 증대를 위한 악법이었다. 前漢은 무제 사망 후 90년 만에 멸망하지만, 그 단초는 무제의 失政(실정)에 의한 것이었다.&nbsp&nbsp&nbsp(계속)&nbsp&nbsp&nbsp&nbsp&nbsp&nbsp