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흉노로 시집간 王昭君(왕소군)

鄭淳台   |   2009-08-01 | hit 18141

 흉노의 쇠퇴


 



 그러면 흉노의 사정은 어떠했을까. 흉노의 민족적 생산 양식은 원래 유목이기는 했지만, 전성기엔 약탈·납공(納貢)·징세·교역에 의한 수익이 훨씬 컸다. 그 많고 적음이가 국가 존립에 직접 심대한 영향을 끼쳤다. 즉, 흉노는 매년 한나라를 침입해 마음껏 약탈하는가 하면, 한과의 화평조약에 의해 다량의 비단·곡물 등을 공물로 따로 받아 내고, 開市(개시)라는 흉노·한의 교역시장을 통해 중국산의 물자를 적지 않게 입수했다. 또 오환·선비·정령 등 복속국가로부터 모피 등을 징세하고, 東투르키스탄의 오아시스 도시국가로부터는 노예·모직물·말·낙타 등을 징발했다. 흉노는 이렇게 수탈한 노예·가축 및 물자를 다른 지역에 전매했다.


 



 ▲ 방울머리(鈴首), 동물무늬머리(動物紋首) 靑銅刀


 


 그러나 이와 같은 흉노의 경제사정은, 그 국가 자체의 통제력 및 군사력과 표리 관계에 있어서, 흉노 국가가 번성한 시대에는 그 수익이 막대했지만, 세력이 실추함과 함께 일시에 전무(全無)의 상태로까지 감소하여 흉노국가 붕괴의 중요 요인이 되었다.


 한 무제의 등장 이후 흉노는 급속히 쇠운을 맞이한다. 무제는 흉노를 격멸하는 데 국력을 집중하기로 결심하고, 해마다 흉노의 영역 깊숙이 대군을 원정시켰다.


 마침 흉노에 선우의 상속문제를 둘러싸고 내홍이 벌어지고, 그 결과로 흉노의 혼야왕이 혼야·휴도 두 부족을 이끌고 한에 항복했음은 앞에서 이미 썼다. 한은 항복한 흉노 기병을 선봉으로 삼아 감숙 방면의 흉노를 격퇴했다. 흉노로선 오른쪽 어깨를 잃은 셈이었다.


 그리고 흉노 중 항복한 부족을 북변 5郡에 분산 배치하여 평시에는 정찰·초소의 임무를 맡게 했고, 전시에는 전위(前衛)로 종군시켰다. 이어 무제는 중국안에서도 대대적으로 군마를 사육하여 군에 공급하는가 하면 서방으로부터 이란 계통의 마종(馬種)을 수입해 마필을 개량했다.


 위청·곽거병 등은 이 새로 건설·편성한 기마군을 이끌고 원정, 흉노는 내몽골에서 버티지 못하고 고비사막을 건너 외몽골로 도주했다. 한군은 다시 고비사막을 넘어 추적, 바이칼 호반에다 기공비를 세우고 회군하기도 했다.


 이로써 흉노는 군사적으로 대타격을 받고, 내부 여러 세력에 대한 통제력을 상실했다. 이 시기에 예니세이 강변의 투르크계 정령족, 열하 방면의 동호의 후예인 오환족, 이리 강변의 오손족들이 모두 독립했다. 흉노는 대사막 주변을 이동하면서 한군의 예봉을 피할 수밖에 없었다.


 


 한혈마에 대한 욕망-張蹇(장건)과 비단의 길


 



 무제의 시대, 한은 흉노를 배제하고 천산남로의 오아시스 국가들을 거의 귀복시켰다. 이를 발판으로 이광리(李廣利)가 지휘한 한군은 중앙아시아의 파미르 高原을 넘어 한혈마(汗血馬)의 명산지 페르가나(大宛)까지 정벌할 수 있었다. 한혈마는 달리 때 피땀을 흘리는 용맹한 말이었다.


 서역(西域)의 길을 개척하여 한을 세계제국으로 부상시킨 최대 공로자는 장건(張蹇)이었다. 그는 서역 여행 중 절망적인 상황에 처하면서도 귀중한 서역의 정보를 수집, 본국에 보고했다. 그의 보고는 한의 세계정책에 결정적인 영향을 미쳤다.


 BC 139년경, 그는 한 무제의 명을 받고 당시 이리江 유역에 있던 월지국(月氏國)과 동맹을 하고자 長安을 출발했다. 원래, 월지는 몽골고원 서부에 있던 유목국가였는데, 흉노의 공격을 받아 국토를 잃고 국왕의 목은 잘려 그 해골이 흉노 선우의 술잔이 되었던 만큼 흉노에 원한이 많았다.


장건은 도중에 흉노에 붙잡혀 10년간 포로 생활을 했지만, 탈출에 성공하여 대완·강거(康居)를 거쳐 아무다리아 北岸으로 다시 이동한 대월지에 도착했다(BC 129년경). 그러나 대월지는 흉노에 한과 더불어 흉노를 협격할 의사가 없어 동맹에는 실패하고 귀로에 올랐는데,또 흉노의 포로가 되었다. 때마침 흉노에 선우 후계다툼이 벌어지자 그 틈새에 그는 귀국할 수 있었다(BC 126년). 13년에 걸친 대모험이었다.


 BC 121년, 그는 오손과 공수동맹을 맺기 위한 사신으로 파견되었다. 장건은 이때 많은 금과 비단을 휴대하고, 황제의 부절(符節)을 가진 부사(副使)들을 수행시켰는데, 도중에 그들을 주변 여러 나라에 파견시켰다. 부사들은 서역 여러 나라의 사절·대상(隊商)들을 데리고 귀국했다. 장건의 여행에 의해 서역의 지리·민족·산물 등에 대한 지식이 중국으로 들어와서 동서간의 문화교류와 교역이 발전하게 되었다.


 




▲ 흉노 박물원 입구의 조형물. 왕소군과 호한야 선우가 손을 잡고 있다


 


 呼韓耶(호한야) 선우의 굴복


 


 한나라의 국력도 거듭된 정벌 때문에 피폐해졌지만, 흉노의 힘도 쇠잔해졌다. 한무제의 증손자인 선제(宣帝) 시대에 흉노에 내홍이 일어나 5인의 유력자가 선우를 다투었다. 2인 선우의 대결로 좁혀졌는데, 호한야(呼韓耶)와 질지(郅至) 형제의 골육상쟁이었다.


 호한야는 질지와 싸우기 위해 한나라에 원조를 요청했다. 漢이 호한야를 정통으로 인정했던 것이다.


 호한야는 현재의 호화호특으로 돌아가서 흉노를 재통일했지만, 장기 내전의 여파로 인민들은 굶주리고 있었다. 드디어 호한야는 한에 항복, 장성을 한과 흉노의 국경으로 정하고, 흉노는 한에 대해 신하의 예를 취하면서 장성 계선의 방비 임무를 맡았다.


 이에 대해 한은 매년 다액의 물자를 선우에게 지급하기로 했다. 이후 흉노는 한의 속국이 되었다. 甘露 3년(BC 51), 호한야는 長安에 들어가 스스로 번신(藩臣)이라 칭했다. 선제(宣帝)는 호한야의 궁중 석차를 황족과 모든 제후왕의 위로 하고, 양곡 3만4000 곡(斛)을 흉노에 급송했다.


 호한야 선우가 두 번째 입조한 것은 BC 49년이었다. 이 무렵 선제가 죽고 황태자인 원제(元帝)가 즉위했다. 이번에도 호한야 선우는 긴급 원조를 요청했다. 한은 운중군과 오원군에서 보유하던 쌀 2만곡을 흉노에 보냈다. 민심을 얻은 호한야는 흉노 전역에 대한 지배력을 확보했다. 호한야 세력과 연합한 漢軍이 질지 선우를 공격, 살해한 것은 원제 建昭 3년(BC 36년)의 일이었다.


 BC 33년 1월, 호한야 선우는 세 번째로 입조했다. 이때 그는“漢 황실의 사위가 되어 양국의 친선을 깊게 하고 싶습니다”라고 청했다. 이에 원제는, “짐에게는 적령의 딸이 없다. 어떤 여자가 좋을까…”라고 되물었다. 황실의 여성 중에 흉노로 시집을 갈 희망자가 없었다.


 “어떤 여자냐고 물으셨습니까. 이번에 하사하신 오녀도(五女圖) 속의 가운데 여성이 좋습니다”라고 호한야가 대답했다. 초원의 군주는 이처럼 솔직했다.


 “오녀도라니?”


 원제는 그런 것을 알지 못했다. 곁에 있던 환관의 설명으로 원제는 오녀도가 무언지 알게 되었다.


 유목민인 흉노는 잦은 이동 때문에 빠오(텐트)를 치고 생활을 했다. 빠오는 대개 펠트로 만들고, 때로는 짐승 가죽을 그 위에 덧대기도 한다. 내부는 융단을 깔고, 벽걸이도 있어 의외로 쾌적하다. 이 무렵엔 한의 비단 그림이 벽걸이로 인기가 높았다고 한다.


 한의 조정에서도 벽걸이 用의 비단 그림을 자주 하사했는데, 외교 담당자의 보고에 의하면 풍경화보다 인물화가 환영을 받고, 인물화도 신선도보다는 미인화(美人畵)를 좋아했다는 것이다. ‘오녀도’란 5명의 궁녀를 모델로 삼아 궁정화가가 그린 미인화를 漢 조정에서 호한야 선우에게 증정한 것을 말한다.


 “그 여자를 불러라”


 원제의 명으로 왕소군이 불려나왔다. “왜 이런 미녀가 여태에 내 눈에 띄지 않았는가!”라고 원제는 몹시 애석해 했다. 그러나 이미 흉노 선우에게 시집보내기로 약속해 버렸던 여자였다.


 호한야 선우는 “상곡군(上谷郡)으로부터 서쪽 돈황군(敦煌郡)에 이르기까지 요새의 방비는 흉노 쪽에서 담당하여 한의 변경 경비를 담당하는 이졸(吏卒)을 제대시켜 천자가 백성을 휴양시키게 하고 싶다”고 자청했다.


 


 王昭君은 흉노 땅에서 행복했다


 


 왕소군은 장안을 떠나 북으로 향했다. 후세, 왕소군의 출새도(出塞圖)이라고 하면 수심에 가득한 얼굴로 비파를 안고 말 안장에 옆으로 탄 모습으로 정형화되었다. 그러나 사실은 그녀가 꽃가마에 올라 말을 탄 호한야 선우의 호위를 받으며 지금의 호화호특으로 출발했다. 호한야는 손녀 나이의 왕소군이 하마 다칠세라 말에 태우지 않았던 것이다.


 



▲ 왕소군 묘역인 靑塚 안 '소군 박물원'에 걸려있는 '왕소군 出塞圖'  


 


 선우는 왕소군을 알씨로 삼았다. 알씨라는 것은 흉노의 말로 선우의 비를 의미한다. 알씨는 몇 사람이 있었지만, 측실이 아니다. 호한야는 흉노 호연왕(呼衍王)의 두 딸을 알씨로 맞이했지만, 동생이 大알씨였다. 왕소군에게는 영호(寧胡)알씨, 즉 흉노를 편안하게 하는 황비라는 존호가 부여되었다.


 흉노의 땅에 들어온 왕소군은 행복했다. 유목국가에는 한나라에서 맛보지 못한 자유가 있었다. 그녀는 선우에게 승마를 배웠다. 승마가 좀 익숙해질 무렵, 왕소군은 임신을 했다. 왕소군이 낳은 아들은 이도지아사(伊屠智牙師)라는 이름을 얻었다.


 그러나 노령의 호한야는 마치 아기의 생명과 맞바꾸듯 병사했다. 기원전 31년의 일이었다. 대알씨의 장남이 후계자가 되었는데, 그가 제15대 선우 復株累(복주루)다. 흉노의 관습에 의해 새로 등극한 선우는 자기의 생모 이외의 부친의 처첩을 모두 자기 것으로 삼는다. 왕소군은 복주루 선우의 품에 안겼다.


 호한야 선우의 애무는 부드러웠고, 젊은 선우의 그것은 거칠기는 했지만 열정적이었다. 왕소군은 젊은 선우에 의해 여자의 성에 눈떴을 것이다. 복주루 선우와의 사이에는 2명의 여아가 태어났다. 장녀는 수복거차(須卜居次), 차녀는 당간거차(當干居次)라 불렸다. ‘居次’라는 말은 내친왕(內親王)을 의미한다.


 왕소군이 흉노에 시집을 간 지 40년 만에 한은 외척 왕망(王莽)에게 찬탈되어 멸망했다. 한과 흉노는 그 사이에 우호관계를 유지했다. 왕소군의 제2의 남편 복주루 선우는 재위 10년에 사망했다. 그의 동모제(同母弟)가 계승, 제16대 수해(搜諧) 선우라 칭했다. 수해 선우는 재위 8년에 장안에 입조하는 도중에 병사하고, 大알지의 언니가 낳은 아들이 차아(車牙) 선우가 되었다. 차아는 재위 4년에 죽고, 그의 동모제인 오주류(烏株留)가 승계했다. 복주루·수해·차아·오주류로서 4대에 걸친 형제상속, 그것도 그들의 어머니가 자매관계이다. 오주류 선우는 21년간 재위했다.


 흉노의 풍습으로는 부형(父兄)이 죽으면 그 후계자가 부형의 처첩을 차지하게 되어 있다. 이것을 수혼제(嫂婚制)라고 한다. 왕소군이 제2의 남편(복주루 선우)의 동생 3명과 실제의 부부 관계였는지는 알 수 없다. 흉노의 풍습으로 당연한 일이기 때문에 사서에 실리지 않은 지 모른다. 오주류 선우가 즉위 당시 왕소군은 40세를 조금 넘었을 나이였다. 오주류 선우 재위 20년 우골도후(右骨都侯)로서 국정을 장악했던 당(當)이라는 인물은 왕소군의 사위(장녀 須卜居次의 남편)였다.


 


 흉노와 신라의 婚風은 동일


 


&nbsp;필사본 <花郞世紀>에 따르면 신라 황실의 혼풍이나 섹스관행도 흉노와 별반 다르지 않았다. 예컨대 신라 화랑의 대모(代母)였던 미실(美室)은 진흥왕, 동륜태자, 진지왕, 진평왕 등 왕과 그 후계자를 잠자리에서 모셨다. 진평왕의 장녀 천명공주(天明公州)는 남편 김용수(金龍樹)가 병사하자 김용수의 동생 김용춘(金龍春)의 아내가 되었다. 이는 父兄이 죽으면 그 처첩을 물려받는 흉노의 수혼제(嫂婚制)와 하나도 다를 바 없다. 신라 제29대 왕 무열왕 김춘추(金春秋)는 김용수와 천명공주의 아들이다.


&nbsp;호화호특은 호한야 이후 흉노의 선우정(單于庭)이 설치되었던 곳이다. 원래, 궁전이나 궁성을 축조한 적이 없는 만큼 그런 유적이 남아 있을 리 없다. 선우도 이동식 빠오(궁려)에서 기거했기 때문이다.


&nbsp;호화호특 남쪽에 있는 왕소군의 묘는 내몽골 최고의 관광지가 되어 있다. 주변은 황량한 황토지대이지만, 그녀의 묘역만은 초목이 무성해 청총(靑塚)이라고 불리고 있다. 절세미녀의 무덤에 걸맞게 매우 예쁘고 아늑하게 조성되어 있다(사진 참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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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王昭君의 석상.&nbsp;사진 오른쪽 뒤 정상에 정자가 있는 봉우리는 왕소군의 묘인 靑塚&nbs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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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nbsp;묘역 안 ‘昭君박물원’ 2층에는 여러 점의 ‘왕소군 출새도’가 걸려있는데, 모두 수심이 가득한 얼굴이다. 이곳에는 5세기 西로마제국과 東로마제국을 약탈하고 막대한 보물을 조공품으로 받아낸 흉노의 수장 아틸라의 그림, 한·흉노전쟁지도 등이 전시되어 있다.


왕소군의 사망년도는 역사에 누락되었다. 만약 왕망의 찬탈에 의해 한이 멸망했을 때까지 왕소군이 살아 있었다고 해도 60세 전후였다.


&nbsp;왕망의 유교적 형식주의에 의해 흉노와의 관계가 급속히 악화되었다. 고조 이래 한은 선우에게 ‘匈奴單于之璽(흉노선우지새)’라는 인장을 주었는데, 흉노에 대한 대우가 지나치다고 판단한 왕망은 흉노를 降奴(항노), 璽를 章(장)으로 고쳐 발급했다. 원래 璽는 황제의 印 이외엔 사용할 수 없다는 것이었다.


&nbsp;호한야 선우 이후 흉노가 한에 복속한 것은 사실이었지만, 굳이 降 자를 썼던 이유는 무엇이었을까. 왕망은 개명(改名) 마니아였다. 長安을 常樂(상락)으로 고친 것은 그렇다 치고, 동방의 고구려(高句麗)도 말을 잘 안 듣는다고 해 下句麗(하구려)라고 고쳐 불렀던 것이다.


&nbsp;특히 왕망은 흉노 땅에 15명의 선우를 세워서 분열시킨다는 비현실적인 분리통치책을 감행하려 했다. 약 60년간 평화를 누리던 북변의 땅은 갑자기 봉화의 연기가 연이어 오르고 군마가 울부짖고, 인골이 흩어져 있는 모습으로 변했다.


&nbsp;왕망은 왕소군의 첫째 사위인 當(당)을 선우의 위에 올리려는 공작을 진행했다. 當이 병사하자 이번에는 왕소군의 장녀 수복거차의 아들 사(奢)를 선우로 세우려고 했다. 그러나 반란군이 중국 곳곳에 일어나 장안에 들어와 왕망을 주살했다. 이로써 왕망이 창업한 新은 15년만인 BC 8년에 망했다.(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