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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르도스의 거대한 칭기즈칸 무덤

鄭淳台   |   2009-08-04 | hit 16918

 칭기즈칸과의 인연


 


 몽골제국의 창업자 ‘칭기즈칸의 능(陵)’의 소재는 不明이라는 것이 역사학계의 정설이다. 그런데 중국에서는 오르도스시 남부 이금곽낙진(伊金霍洛津)에 거대한 ‘칭기wm칸 무덤’을 조성해 놓고 있다. 오르도스까지 와서 이곳을 둘러보지 않을 수 없었다. 도대체 이곳은 칭기즈칸과 무슨 인연이 있는 땅일까?


 칭기즈칸은 현재의 감숙성과 오르도스에 위치한 西夏國(서하국)를 정벌하러 갔다가 병이 들어 회군하던 중 사망했다. 혹시 사망 장소가 이금곽낙진 부근인지 모르겠다. 이곳은 섬서성 북부 지역인 유림시(楡林市)와의 경계지역이다.


 



▲ 몽골 窮廬(궁려) 형태로 조성한 칭기즈칸의 무덤. 오르도스의 伊金霍洛津 소재.


 


‘칭기즈칸릉’의 참배도는 남경(南京)에 있는 明 태조 주원장(朱元璋) 무덤만큼이나 길다. 한참 계단을 걸어가 빠오 형태의 능에 이르렀다. 빠오 내부에서는 촬영이 금지되어 있다. 입구는 칭기즈칸 관련 대형 기록화로 장식되어 있다. 몽골제국 시대의 무기류·생활용구도 전시되어 있다. 무덤 아래쪽에는 돌무더기가 쌓여 있는 서낭당도 만들어 놓았다.


 참배도를 내려오다 몽골족 의상을 입은 소녀 복무원을 만나 기념촬영을 청했더니 대번에 팔장을 끼고 포즈를 취해 주었다. 양고기와 양유를 먹고 광활한 초원에서 거침없이 살아온 때문인지 그녀는 탄력적인 몸매였다. 팔장을 끼고 안겨드는 그녀에게 부딪친 필자의 몸이 오히려 튕겨 나갈 정도였다. 이렇듯 몽골족은 남녀 불문하고 대개 힘이 세고 직정적이다. 문득, 공민왕의 몽골족 왕비 제국대장공주가 머리에 떠올랐다.


 



▲ 몽골제국을 일으킨 칭기즈칸의 기마상


 


 몽골제국의 간섭을 받았던 고려 말기 100년 동안 고려왕은 몽골 황실의 딸을 왕비로 맞았다. 그 시기에 우리 민족과 몽골인은 피가 많이 섞이고 문화교류도 빈번했다. 따지고 보면 韓民族과 몽골족의 선조들은 애시당초 대흥안령산맥을 사이에 두고 이쪽저쪽에 살았기 때문에 이웃 4촌간이라고 할 만하다.


 


 隋·唐제국의 子宮武川鎭



 


 오르도스에서 호화호특으로 되돌아갔다. 호화호특 북부에 위치한 무천진(武川鎭)을 답사하기 위해서였다. 무천진이라면 수(隋)·당(唐) 황실의 출발지이기 때문이다. 무천진 군벌은 북위·서위·동위·북제·북주 등 북조(北朝)에서 12명의 대장군을 배출했다. 수 文帝나 당 高祖의 집안은 원래 무천진 군벌이었다. 문제 양견(楊堅)이 수를 창업한 이후 무천진 군벌 출신 여덟 집안은 팔주국(八柱國)으로 출세했다. 양제(煬帝)가 3회에 걸친 고구려 원정에서 패전하여 전국 곳곳에서 내란이 동시다발적으로 일어났을 때 당의 창업자 이연은 太原유수로서 변경을 지키고 있었다. 사적으로 치면 이연에게 양제는 외가로 4촌간이다.


 



▲ 수·당 皇家의 子宮인 武川鎭 거리


 


 수 양제는 그가 건설한 대운하를 타고 내려가 양자강변의 양주에서 머물고 있었다. 태원에서 거병한 이연엔 세 가지 계책이 검토되었다. 첫째, 양주로 내려가 양제를 사로잡는 것, 둘째 대운하를 통해 올라온 강남의 양곡 창고가 집중되어 있는 부도(副都)인 낙양을 차지하는 것, 셋째 무천진 군벌이 이주해 있는 수도 장안에 들어가 그들의 협력을 얻는 것이었다. 결국, 이연은 2남 이세민(李世民)의 진언을 받아들여 장안으로 진군했다. 이때 병력이 부족했던 당은 당시 북방 초원지대의 패권국 돌궐로부터 기병 3000기를 지원받았다. 이것이 창업 초의 당이 돌궐에게 조공을 했던 까닭이다.


 무천진 군벌을 거론하자면 중국 최초로 기마민족 정복국가를 건설했던 북위(北魏)를 살펴 보지 않을 수 없다. 북위는 선비족의 척발(拓跋)씨의 나라였기 때문에 척발위라고도 한다.


북위의 첫 수도는 세 번 옮겼다. 첫 수도는 호화호특의 동부 지역인 성락(盛樂)이었고, 두 번째의 수도가 산서성 大同, 세 번째의 수도가 하남성 낙양이었다.


 척발위는 반목반농(半牧半農)의 기마민족 출신이면서도 화북(華北)을 통일한 후 중국화정책을 강화해 갔다. 문화가 서로 다른 한족·호한혼혈인·여러 기마민족을 지배하게 되면서 중국식 제도가 국가경영에 가장 효율적임을 깨달았다. 이와 같은 경향은 효문제 때(494년) 낙양으로 천도하면서 더욱 철저하게 시행되었다.


 첫째, 胡服·胡語의 금지. 모든 북족(北族)에게 그들 고유의 언어·풍속을 버리게 하고, 예제는 물론 언어까지 중국어를 채택했다.


 둘째, 북족의 姓 금지. 척발·독고(獨孤) 등 2字 이상으로 된 복성을 금지하고, 중국풍의 1字 성으로 고치게 했다. 國姓인 척발씨도 스스로 元씨로 개성(改姓)했다. 선비족 유력부족의 8姓(穆陵씨·步六孤씨·尉遲씨 등)은 중국의 명문 4姓(盧·崔·鄭·王)으로 바뀌었다.


 셋째, 북족·중국인 간의 통혼의 장려. 효문제 스스로도 중국 4대 명문의 딸을 후궁으로 맞아들였다.


 넷째, 북족의 분리. 평성(平城: 현재의 大同)과 그 부근에 살던 선비족 등 북족, 이른바 代人의 다수를 하남성으로 옮기고 낙양인으로 간주하여 북으로 돌아가지 못하게 하고, 죽어도 낙양의 북망산(北邙山)에 묻도록 했다. 이로써 선비족은 평성을 중심으로 북방에 거주하는 북족, 이른바 ‘北鎭 충실’을 위해 장성지대에 이주된 북족, 낙양 등 하남에서 이전한 북족 등 몇개의 그룹으로 분리되었다.


 이와 같은 정책에 의해 척발위 내부 북족의 중국화가 사회적·문화적으로, 또한 혈액적으로도 강행되어 결국 북족적인 것이 모두 박탈되었다. 알몸이 된 그들은 중국사회, 중국문화 속에 몰입했다. 이는 정복왕조로서의 척발위 자체의 존립을 위태롭게 한 자살적 행위였다. 이리하여 북족 무인들 사이에 불만과 반발이 팽배해졌다.


 


 중국에 최초로 기마민족 정복국가 세운 선비족


 


 척발위를 개창한 도무제가 중국적 군현제를 시행하기 위해 선비 등 북족의 부족제를 폐지했을 때 평성 주위에 8國制를 설치, 북족의 분산을 막고, 그들의 관리 등용의 길을 열어두었다. 그러나 척발위가 북중국 통일사업을 진행해감에 다라 중국인 관료가 정치의 주류를 차지해 북족은 중앙권력의 자리에서 멀어져갔다.


 한편 유연(柔然) 등의 발흥으로 장성 지대의 수비가 중요하게 되면 그들은 무천진 등에 배치되어 팔국제도 급속히 축소되어 효문제 시대에는 사실상 8國制는 붕괴했다. 이로써 북족의 다수는 하급 군인으로서 생계가 어려운 천민으로 전락했다. 서기 519년에는 제도상으로도 그들에게는 임관의 길이 막혀버렸다. 중국인 대신의 이같은 계획에 격분한 금위군이 폭동을 일으켰지만, 실권자인 중국인 출신 영(靈)태후는 미온적으로 대처, 척발위의 권위도 실추했다.


 한편 북방 방비를 위해 가족을 데리고, 무천진 등 북진에 이주했던 북족계 귀족들도 시대가 내려옴에 따라 귀족으로서의 권위를 잃었을 뿐만 아니라 자유를 박탈당하고 노역에 동원되었다. 더욱이 중앙으로부터 파견되어 있던 진도대장(鎭都大將) 이하 간부에게 농지를 빼앗긴 진민(鎭民)이 생활고에 허덕이다 자살하는 비극이 자주 발생했다.


 그래서 한번 한곳의 진민이 거병하면 여러 진에서 호응하여 대반란이 되었다. 더욱이 북방으로부터 柔然·高車·鐵勒 등의 침구가 잦았는데, 이를 방어하는 것은 북진의 북족에 다름 아니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척발위의 조정에서는 북족 출신자를 중용하지 않았다. 이에 그들의 마음은 조정을 떠났다. 이때 북족의 인심을 모은 흉노계 호족 이주영(爾朱榮)이 낙양을 공략하여 척발위의 황제·태후·귀족 수천 명을 학살했다. 이로써 척발위는 사실상 멸망했다. 중국에 있어서 최초의 정복국가인 척발위는 중국인민의 통제에는 성공했지만, 정복자인 자기 민족인 북족에 대한 무관심 때문에 와해되었던 것이다.


 척발위는 내분으로 동위·서위로 분리되고 동위는 북제로, 서위는 북주로 간판을 바꾸었다. 북주는 곧 북제를 병합했다. 그러나 북주는 외척 양견에게 찬탈되어 중국은 수의 천하가 되었고, 무천진 군벌의 협조를 얻은 당이 수의 강산을 탈취해 버렸던 것이다. 따라서 수와 당의 子宮은 무천진이라고 할 수 있다.


 음산(陰山)산맥의 1750m고지를 넘어 무천진에 도착했다. 북방의 靑山만 넘어가면 외몽골의 초원지대이다. GPS 측정결과 무천현은 북위 41도 5분, 동경 111도 27분에 위치한 고도 1604m의 분지였다. 태평양에서 불어오는 몬순의 영향으로 습윤(濕潤)지대에서 살고 있는 우리 일행은 비를 몰고 온 듯했다. 포두의 황하대교를 건널 때, 샹샤완 사막, 그리고 무천진에 들어와서도 잠간이지만 반가운 비가 내렸다. 내륙건조지대에서 만난 비는 가랑비 정도였지만, 여간 상쾌한 것이 아니었다.


 



▲ 수·당 호화호특市 북쪽 음산 산맥 기슭에 있는 戰國시대 趙 長城


 


 무천진 시가지는 개척시대의 읍내처럼 황량했다. 읍내엔 전력회사의 고층건물, 술집, 잡화점 등이 ‘武川…’이라는 간판을 달고 있었다. 척발위 당시 북족의 군사시설 유적 등은 찾지 못했지만, ‘武川’이라는 이름만으로 감회가 깊었다. 가게에 들러 기념품으로 백주 한 병을 샀는데 이름이 무골(武骨)을 다수 배출한 지방의 술답게 ‘무황(武皇)’이었다.


 수·당의 황가를 흔히 한족으로 알고 있지만, 무천진에 오면 그들의 선조가 북방기마민족 혹은 호한잡종인 것을 느낄 수 있다. 특히 그들의 행태가 그러했다.


&nbsp;<수서>에 따르면 양제는 아버지 문제를 살해한 혐의를 받고 있다. 양제가 문제의 병석에 들어간 지 얼마 후 “악!”하는 비명 소리가 밖으로 새어나왔고, 문제가 죽었다고 기록되어 있다. 수법은 다르지만 모돈과 양제는 살부(殺父)이라는 점에서 공통적이다. 또 바로 그날 밤, 양제는 문제가 총애하던 陳부인을 품에 안았다. 이것은 호한야 선우의 아들 복수루 선우가 왕소군을 처로 삼았던 혼풍과 마찬가지다.


&nbsp;당 고조의 차남 이세민은 형과 아우를 죽이고 아버지를 퇴위시켜 황제로 즉위했다, 그가 태종(太宗)이다. 태종의 아들 고종은 부황과 잤던 武씨를 황후로 삼았다. 그녀가 고종과 함께 당을 공동통치한 측천무후(則天武侯)이다. 고종 사후 측천무후는 고종의 아들을 퇴위시키고 중국 최초의 여제(女帝)가 되었다.


&nbsp;유교의 관점에서 보면 흉노·선비 등 북족의 혼풍(婚風)은 해괴망측한 것이다. 이 점에서는 신라김씨의 그것도 마찬가지다. 일례를 들면 신라 화랑의 대모 美室은 진흥왕·동륜태자·진지왕·진평왕과 모두 성 관계를 가졌다. 그뿐 아니라 그녀는 대가야 공략에 제1공을 세운 화랑 사다함의 애인이었고, 제0대 풍월주 설원랑(薛原郞)의 정부였다.


&nbsp;이런 혼풍에 대해 흉노 선우의 측근 중행열(中行說)은 “그것은 宗姓(종성)을 지키기 위한 것”이라고 해명했다. 환관 중행열은 한 조정에서 억지로 흉노에 사신으로 파견하자 이에 앙심을 품고 흉노에 귀순하여 한에 대해 갖가지 복수를 했다. 그런 그가 한의 사신을 만나 흉노의 혼풍에 대해 논쟁을 하는 자리에서 위와 같이 말한 것으로 <사기>에 기록되어 있다.


&nbsp;그 정확한 의미는 잘 모르게만, 흉노 선우 가문인 연제(攣:虛連題)씨나 신라김씨 왕가는 모두 자손을 번성시키기 위해 난교(亂交)에 관대했던 것 같다. 따지고 보면 신라의 만장일치제 회의체인 和白회의도 몽골의 쿠릴타이 등 북족의 방식과 매우 유사하다.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