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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무왕릉 碑石(碑文) 재발견!

정순태   |   2009-09-03 | hit 7341

 


조선시대에 발견됐다가 다시 실종됐던 신라 문무왕릉비의 조각이 200여년 만에 다시 발견되었다고 연합뉴스가 보도하였다. .

국립경주박물관(관장 이영훈)은 지난 2일 경주시 동부동의 한 주택에서 신라 문무왕릉비의 上段부분을 확인했다고 3일 발표하였다.  조선시대 경주부윤을 지낸 홍양호(1724-1802)의 ’이계집(耳溪集)’은 682년 경주 사천왕사에 세워졌던 문무왕릉비의 조각들을 정조 20년인 1796년에 발견했다고 기록하고 있고,  이 조각들의 탁본은 청나라 금석학자 유희해(劉喜海.1793~1853)에게 전해져 그가 쓴 ’해동금석원(海東金石苑)’에 내용이 실렸다.

이 조각들은 그 이후 있는 곳이 다시 묘연했으나 1961년 비석의 下段 부분이 경주시 동부동에서 발견돼 국립경주박물관에 소장돼 있으며 이번에 上段 부분이 발견된 것이다. 연합뉴스에 따르면
상단 부분은 주택의 수돗가에 박혀 있었으며 표면이 훼손되고 가장자리 등 일부는 심하게 마모됐지만 비문의 전체 내용을 읽는데는 큰 어려움이 없다고 박물관 측은 설명했다는 것이다.

진정환 학예연구사는 “’해동금석원’에서 제대로 밝히지 못한 일부 글자도 실제 조각과 비교하면 추가로 판독할 수 있을 것으로 보인다”면서 “조각을 안전하게 박물관으로 옮겨 보존처리를 진행할 계획”이라고 말했다고 연합뉴스는 전하였다. 이 비문의 역사적 의미에 대하여 鄭淳台씨가 쓴 아래 글을 참고바람.


 


 


文武王은 흉노 휴도왕의 후손


 


 흉노의 옛땅을 답사하기 전에 흉노는 누구이며, 흉노와 우리 역사와 어떤 연관이 있는지 잠시 살펴볼 필요가 있을 것 같다.


 국립경주박물관 현관에 전시되어 있는 문무왕릉(文武王陵)의 비문에 따르면 신라 김씨는 흉노(匈奴)의 후예이다. 비문에서 문무왕의 출자(出自)를 밝히는 구절인 전면(前面) 제5행에 “투후(秺侯) 제천지윤(祭天之胤)이 7대(代)를 전하여……하였다”라고 되어 있다.


 투후는 흉노 휴도왕(休屠王)의 태자 김일제(金日磾: BC 134-86)다. 휴도왕은 흉노 제국의 주권자인 선우(單于) 휘하 24 왕장(王將) 중 하나였다. 김일제는 한(漢)의 거기(車騎)장군 곽거병(霍去病)에게 포로가 되어 처음엔 말을 사육하는 노예가 되었다. 그러나 그는 곧 말(馬) 마니아인 한 무제(武帝)의 총애를 받았고, 마감(馬監)· 광록대부(光祿大夫)로 올랐으며, 망하라(莽何羅)의 난 때 무제의 위급을 구한 공로로 투후에 봉해졌다. 그는 흉노 種(종)의 일파인 휴도족이 제천(祭天)의 금인(金人)을 만들어 숭배하는 풍속에 주목한 한무제에 의해 金씨로 사성(賜姓)되었다. 금인은 샤마니즘적 청동 신인상(神人像)으로 보인다.


 비문의 제6행에는 “15대 祖 성한왕(星漢王)은 그 바탕이 하늘에서 내리고, 그 영(靈)이 선악(仙岳)에서 나와, ☐☐을 개창하여……”라 되어 있다. 비문은 여러 조각이 나고, 글자도 마모되어 전문을 해독하기 어렵다.


 성한왕에 대해서는 신라김씨의 시조인 김알지(金閼智)로 보는 견해, 알지의 아들인 세한(勢漢)으로 보는 견해, 알지의 7세손으로 김씨 중 최초로 신라의 왕위에 오른 미추왕(味鄒王)으로 보는 견해 등이 엇갈리고 있다.


 이 비는 능비(陵碑)로 보는 것이 다수설이지만, 문무왕의 유언에 따라 봉분을 쓰지 않고 화장하여 동해에 산골(散骨)하였다는 삼국사기(三國史記)와 삼국유사(三國遺事)의 기사가 전하고 있어 약간의 의문이 남는다. 문무왕의 시신을 경주의 사천왕사 근처에서 화장하고 부근에 의릉(擬陵)을 만든 것이거나, 사천왕사를 창립한 문무왕을 기려 그곳에 능비만을 세운 것으로 추측되기도 한다.


 


신라·가야의 금관과 각배(角杯)


 


 문무왕릉의 비문만으로 신라김씨의 출자(出自)를 단정하는 것은 위험하다. 그러나 신라김씨가 유목기마민족과 친연성이 깊다는 증거는 적지 않다. 경주 대릉원의 적석목곽분(積石木槨墳: 돌무지덧널무덤)은 북방 유목기마민족의 묘제와 동일하다. 또 거기서 나온 금관 역시 유목기마민족의 그것과 같은 신앙과 사상에서 만들어진 것이다.



 한국 민족이 단일민족이라는 것은 허구이다. 대륙에서 내려온 북방계와 배를 타고 건너온 남방계도 있다. 북방계라고 해서 모든 같은 계통은 아니다. 고구려와 백제의 왕가는 동북아의 명문 부여에서 갈라져 나온 것은 사서에 잘 기록되어 있다. 부여는 반목반농(半牧半農)의 국가였다.


 그러나 신라김씨와 가야김씨는 부여계가 아님이 확실하다. 그들이 유목기마민족 출신이라는 사실은 그들의 남긴 유물을 통해서도 짐작할 수 있다.


 


▲ 鷹形金冠


 그 대표적인 것이 금관과 짐승의 뿔로 만든 각배(角杯)다. 금관과 각배는 옛 신라· 가야 지역에서만 발굴되었을 뿐, 백제·고구려의 옛 판도에서 발견된 적이 없다. 각배는 기마민족의 휴대용 뿔잔이다.


 우리 국보로 지정된 신라의 기마무사 토기가 주목된다. 말을 탄 무사는 오연하게 전방을 응시하고 있는데. 그의 뒷머리는 편두(偏頭)이다. 편두라는 것은 투구를 쓰기에 좋도록 어릴 적에 돌로 눌러 납작 머리로 만드는 것이다. 군대에 갔다 온 남자라면 체험했겠지만, 뒤통수가 튀어나온 사람이 철모를 쓰면 잘 벗겨진다. 또 기마무사가 탄 말의 잔등에는 동복(銅鍑)이 실려 있다. 동복은 기마민족의 휴대용 청동제 솥이다.


 어떤 이는 문무왕의 능비에서 투후의 자손을 운운한 것은 사대주의의 표현이라고 말한다. 이건 어림도 없는 소리다. 백제·고구려의 멸망 후 문무왕은 전후처리 문제를 놓고 당시의 세계제국 당(唐)과 사생결단의 7년 전쟁을 감행해 승리한 자주정신의 화신이다.


 문무왕이 중국을 향한 사대주의자였다면 굳이 그의 선조를 흉노 출신 투후라고 밝히지 않았을 것이다. 우선, 흉노라는 글자부터 흉측하다. 匈奴는 ‘떠들썩한 종놈’이라는 뜻이다. 중국인들은 이렇게 자기 주변의 민족을 모두 오랑캐로 경멸했다.


 



▲ 오르도스 청동기(靑銅器)


 흉노는 기원전 3세기부터 중국 북방 초원지대에서 두각을 나타낸 기마민족이다. 목축을 생업으로 삼으면서 가축을 데리고 물과 풀을 찾아 이동했다. 남자는 활을 잘 쏘고, 전쟁이 일어났다 하면 즉각 갑옷을 입고 전사가 되었다. 중국의 전국(戰國)시대, 흉노와 접경했던 연(燕)·趙(조)·秦(진)은 잦은 흉노의 침구(侵寇)에 전전긍긍해, 각각 장성을 쌓아 방어에 힘썼다. 진의 시황제(始皇帝)는 중국을 통일한 후 장군 몽념(蒙恬)에게 30만 대군을 주어 흉노의 남부 영토인 오르도스를 점령하고, 만리장성을 완성했다.


&nbsp;고유문자가 없었던 흉노는 자신들의 역사를 스스로 기록하지 못했다. 흉노의 역사를 파악하려면 현장 답사에 앞서 중국의 사서를 참고할 수밖에 없다. 우선, 사마천(司馬遷)의 <史記>흉노열전에 기록된 유명한 일화를 소개할 필요가 있을 것 같다. 흉노를 東아시아의 패권국으로 만든 영웅의 등장에 관한 기록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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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오르도스 북단 黃河 연안. 강변 좌우에 경지가 조성되고 건물도 들어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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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웅 모돈의 골육상쟁 쿠데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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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nbsp;두만(頭曼)이라는 흉노의 선우에게는 모돈(冒頓: 흉노족은 묵특이라고 읽은 듯함)이라는 태자가 있었다. 그러나 두만 선우는 후비(後妃)가 낳은 어린 아들을 사랑해 모돈을 폐적하고, 후비의 어린 아들을 태자로 세우려고 획책하다. 모돈은 서쪽의 강국 월지(月氏: 서북방의 유목국가)에 인질로 보내졌다. 그런 직후, 두만은 일부러 월지에 대한 토벌군을 일으켰다.


&nbsp;당연한 일이지만, 월지는 인질로 잡고 있던 모돈을 죽이려 했다. 위기일발, 모돈은 준마를 훔쳐 타고 본국으로 도주했다. 두만의 노림수는 빚나갔지만, 그는 자기 아들을 다시 보고, 1만기의 장군으로 임명했다.


&nbsp;장군이 된 모돈은 부하들에게 맹렬히 기사(騎射) 훈련을 시켰다. 그러던 어느 날,


“모두 잘 들엇. 내가 명적(鳴鏑: 우는 소리를 내며 날아가는 신호용 화살)을 쏜다면 너희들은 명적이 날아가는 곳을 향해 일제히 화살을 날려라. 따르지 않는 자는 참한다!” 라고 명령하고, 사냥에 나섰다. 모돈은 그날 자신의 애마를 향해 명적을 날렸다. 부하들 중에는 화살을 발사하지 않는 자도 있었다. 모돈은 용서 없이 그들의 목을 날려 버렸다.


&nbsp;또 어느 날, 모돈은 자신의 애첩을 향해 명적을 날렸다. 망설이다 화살을 쏘지 않은 부하들을 역시 참했다.


&nbsp;이런 냉혹한 훈련을 시킨 다음, 모돈은 어느 날 아버지 두만 선우의 애마를 향해 명적을 날렸다. 부하들은 한 사람도 남김없이 그를 뒤따라 화살을 쏘았다. 이제, 그는 부하들이 그의 명령대로 움직일 것이라고 확신했다.


&nbsp;곧, 두만 선우를 따라 사냥에 나섰다. 모돈은 사냥 중에 갑자기 두만을 겨냥하여 명적을 날렸다. 과연, 부하들은 명적의 나는 방향을 향해 모두 화살을 쏘아 두만을 사살했다. 모돈은 아버지를 죽인 데 이어 계모와 이모제(異母弟), 그리고 복종하지 않는 중신들을 모조리 참살했다. 모돈은 스스로 선우가 되었다.


&nbsp;모돈의 쿠데타에 관한 <사기>의 기록은 설화적인 분식이 더러 느껴지지만, 흉노가 선우 승계문제로서 자주 골육상쟁을 벌인 것은 확실하다. 다음 일화는 더욱 흥미있는 기사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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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방 초원지대 석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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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nbsp;모돈의 즉위 당시, 흉노 동쪽에는 동호(東胡)가 세력을 떨치고 있었다. 동호라면 단군조선의 중심세력과 친연성이 깊은 종족이다. 단군조선과 동호는 대흥안령(大興安嶺)산맥 동쪽의 요서(遼西)지역에서 이웃해 살았던 것으로 보인다.


&nbsp;모돈이 찬탈했다는 정보는 즉각 동호의 왕에 전해졌다. 동호왕은 사자를 보내 두만 선우의 천리마를 양도하라고 요구했다. 모돈 선우는 여러 신하에게 자문했다. 신하들은 “천리마는 흉노의 보물, 당연히 거부해야 합니다”라고 입을 모았다. 그러나 모돈은, “한 마리의 말을 아껴서 이웃나라와의 우호를 저버릴 수 없다”고 측근의 의견을 물리치고 동호의 요구에 선선히 응했다.


&nbsp;모돈이 자기를 두려워한다고 판단한 동호왕은 얼마 후 두 번째의 사자를 보내왔다. 이번에는 후비(后妃) 1인을 양보하라고 요구했다. 모돈의 부하들은 모두 격분해 “공격 명령을 내려 달라”고 아우성쳤다. 그러나 모돈 선우는 이 때도, “여자 하나를 아껴서 이웃나라와 우호를 손상시킬 수 없다”면서 측근을 누르고 총애하는 후비 중 1인을 동호에 보냈다.


&nbsp;동호는 점점 교만해져 드디어 흉노와의 국경을 침략하기 시작했다. 흉노와 동호의 중간에는 1000여 리에 걸친 불모지가 펼쳐져 있었다.


“귀국이 우리나라와의 경계로 삼고 있는 황무지는 귀국에 있어 쓸모없는 땅이다. 이 황무지를 우리 쪽이 영유하려고 한다”


&nbsp;모돈 선우는 측근들과 상의했다. 몇 명이 이렇게 말했다.


&nbsp;“아무런 쓸모없는 황무지입니다. 주더라도 차질이 없을 겁니다”


&nbsp;이 말을 듣고 모돈 선우는 격분했다.


&nbsp;“땅은 나라의 근본, 촌토도 내줄 수 없다”


&nbsp;그는 주어도 좋다고 말한 부하들을 한 사람도 남김없이 참해 버렸다. 그리고 말에 올라타, “이제부터 동호를 토벌한다. 늦는 자는 참한다”라고 전군에 포고했다. 즉각 동쪽으로 군사를 몰아 동호를 습격했다. 동호는 모돈 선우를 용맹하지 않은 바보로 생각해 평소 대비에 소홀했다. 모돈 선우는 순식간에 동호를 격파하여 동호왕을 죽이고, 주민과 가축을 탈취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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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nbsp;▲ 한고조와 흉노의 모돈 선우가 결전을 벌인 平城(대동市 서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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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nbsp;위의 설화는 흉노가 일반적으로 말을 소중하게 생각하고, 땅을 그렇게 가치 있는 것으로 생각하지 않았다는 것과 기만과 기습이 그들의 상용 전법임을 나타내는 기록이다. 내륙 유라시아의 기마민족에게 이러한 사고와 행동은 거의 공통적이다.


모돈 선우는 동호로부터 개선하면, 이번엔 서쪽으로 진격해 월지를 궤주시키고, 월지왕의 머리를 베어 술잔으로 사용했다. 이어 말머리를 남쪽 오르도스(황하 중류의 대만곡부· 大彎曲部)로 돌려 누번왕(樓煩王)과 백양왕(白羊王)의 영지를 병합해 일찍이 진(秦)의 장군 몽념에게 빼앗겼던 옛 영토를 모두 회복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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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nbsp;흉노에게 굴복한 漢 고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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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nbsp;당시 중국에서는 한왕(漢王) 劉邦(유방)과 초패왕 항우(項羽)가 격렬한 패권전을 전개하고 있었던 만큼 모돈 선우의 초원지대 석권을 견제할 여력이 없었다. 이 무렵 모돈은 30여만의 병력을 보유하게 되었다.


흉노는 전쟁을 할 때 반드시 별과 달의 상태를 본다. 달이 차면 공격에 나서고 달이 기울면 바람처럼 회군했다. 적의 수급이나 포로를 얻은 자는 선우로부터 큰 잔의 술이 하사되었다. 노획품과 포로는 포획한 병사의 소유가 되었다. 따라서 모두 자신의 이익을 위해 용감하게 싸웠다. 모돈 선우는 그 후 북방의 혼유(渾庾)· 정령(丁靈)·격곤('730;昆) 등을 하나하나 굴복시켰다.


&nbsp;바로 이때(BC 202년) 漢의 高祖 유방이 항우를 죽이고 중국 천하를 통일했다. 고조는 韓王 신(信: 초한전쟁의 영웅 韓信과는 다른 인물임)을 대왕(代王)으로 전봉하여 마읍(馬邑: 山西省 북부)에 도읍을 두게 했다. 그러나 그는 흉노의 맹공을 받고 마읍이 포위되자 대왕 信은 버티지 못하고 항복하여 선우의 신하가 되었다.


代王 信을 휘하에 거느린 모돈 선우는 승세를 타고 다시 남하, 태원(太原: 현재 산서성의 성도) 에 쇄도해 진양성(晋陽城)을 포위했다.


&nbsp;항우를 격파하여 자존심이 드높았던 고조가 흉노 선우의 도전을 묵과할 리 없었다. 고조는 스스로 40만 대군을 이끌고 흉노 정벌에 나섰다. 이제, 북방 초원의 최강자와 농경지대의 최강자가 東아시아의 패권을 놓고 결승전을 벌이게 된 것이다.


흉노의 전법은 실로 교묘했다. 모돈 선우는 약세를 가장하며 슬슬 물러나, 한군을 북방으로 유인하는 작전을 구사했다. 정예를 후방에 감추어 놓고, 허약한 병사와 비루먹은 말들을 전면에 내세웠던 것이다. 평성(平城)으로 북상하던 유방이 걸려들었다. 평성은 현재 산서성 대동시(大同市) 서부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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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nbsp;▲ 오르도스의 샹샤란 사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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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nbsp;그러나 추격을 너무 서둔 나머지 한군의 대열이 길게 늘어져 후속의 보병 32만은 훨씬 후방에 처져 있었다. 모돈은 이것을 노려 정예 기병 40만을 몰아 고조가 이끈 선두부대 10만기를 평성 동북쪽 백등산(白登山)에 몰아넣고 포위했다.


&nbsp;고조는 7일간 후방의 본대와 분단된 위기 상황에 처했다. 흉노는 서쪽은 백마, 동쪽은 청룡마(백마에 푸른 빛이 섞인 말), 북쪽은 흑마, 남쪽은 적황색 말을 탄 부대를 배치, 물샐 틈 없이 포위했다.


&nbsp;한군은 아무리 포위망을 뚫으려 해도 뚫을 수가 없었다. 게다가 추운 겨울이어서 한병은 20%가 동상에 걸려 손가락이 떨어져 나가는 고통을 당했다. 반면 흉노의 기병은 추위에 익숙해 아무런 피해도 없었다. 고조는 군사 진평(陳平)의 계교로써 포위를 풀어야 하겠다고 생각했다. 고조는 화공에게 미인화를 그리게 하고 그 미인화와 후한 뇌물을 모돈의 알씨(閼氏: 선우의 后)에게 보냈다.


&nbsp;흉노 선우의 알씨는 정치·군사에 상당한 영향력을 행사했다. 전쟁에 종군해 선우 유고(有故)시에는 부대를 지휘했다. 이런 기마민족의 여성 파워는 훗날 몽골족에도 계승되었다. 이때 한의 사자가 알씨에게, “지금 한나라 황제는 곤경에 처하여 미인도의 여인들을 모돈 선우에게 바치고 화(和)를 청하고자 하십니다”라고 말했다. 알씨로선 이런 미인들이 오면 선우의 총애를 빼앗길까 두려웠다.


&nbsp;효과는 즉각 나타났다. 알씨는 모돈에게 진언하기를, “설령 이 싸움에 이겨 한나라 땅을 손에 넣는다고 거기서 살지는 못할 것입니다. 그리고 두 임금이 다 하늘의 가호를 받고 있는데, 굳이 서로가 괴롭힐 필요까지는 없는 것 아닙니까”했다.


사실, 순수 유목기마민족인 흉노는 농경지역에 대한 영토적 관심은 없었고, 약탈과 조공품 수탈이 침략의 목표였다.


&nbsp;마침 이때 모돈 선우는, 합류하기로 되어 있던 韓王 信의 휘하 장군 왕황(王黃)과 조리(趙利)가 기일이 되어도 나타나지 않자, 혹시 그들이 한(漢)과 내통하고 있는 것이 아닌가 하고 의심했다. 그래서 알씨의 진언을 받아들여 포위의 일각을 풀었다.


&nbsp;고조는 재빨리 탈출하여 후방의 대군과 합류했다. 이에 모돈은 병력을 이끌고 북으로 회군하고, 고조도 장안으로 돌아왔다. 고조는 당초 약속대로 사자 유경(劉敬)을 선우에게 파견하여 황실의 여자와 비단·곡물·누룩 등 막대한 진상품을 바치고 흉노와 정전협정을 맺었다. 이후 약 70년간 東아시아의 패권국은 한이 아니라 흉노 선우국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