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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희대의 플레이 보이’ 徽宗(휘종)

鄭淳台   |   2009-10-26 | hit 11561

<탐관오리는 축재, 백성은 도탄에 빠지다>

1100년, 哲宗이 친정 7년 만에 죽고, 그의 동생 徽宗(휘종)이 즉위했다. 휘종은 新法黨의 蔡京(채경)을 재상으로 기용해 정치를 맡겼다. 蔡京은 新法黨 출신이긴 했지만, <宋史>의 奸臣列傳(간신열전)에 오른 인물이다.

정쟁에도 불구하고 新法의 시행의 결과로 인해 宋의 경제는 다소 호전되었다. 특히, 大運河를 통해 江南의 물자가 집결되는 수도 開封(개봉)은 세계 최대의 도시로 번영했다. 開封의 환락가는 不夜城(불야성)을 이룰 만큼 흥청거렸다.

채경은 “滿朝(만조) 모두가 그 父子의 黨”이라는 악평을 들을 만큼 정부 요로를 자파 세력으로 굳히고 부정축재에 혈안이 되었을 뿐만 아니라 휘종에게 사치생활을 마음껏 즐겨야 한다고 권유했다. 그는 다음과 같은 饒舌(요설)을 주청했다.

“지금은 易(역)에서 말하는 豊亨豫大(풍형예대)의 運勢(운세)에 해당하는 시기입니다.”

쉽게 말하면 흥청망청 소비를 해도 좋은 豊饒&#8228;(풍요) 亨通(형통)의 太平盛代에 진입하고 있다는 뜻이다. 이에 고무된 휘종은 대규모 토목공사를 일삼았다. 都城의 확장, 궁전의 신축, 御苑(어원)의 조성, 九鼎(9정)의 주조 등이 그것이다. 이로써 延福宮(연복궁), 保和殿(보화전), 그리고 萬歲山(만세산)이란 이름의 인공산을 축조했다.

이때 휘종은 벼락출세한 朱&#21204;(주면)에게 악명 높은 花石綱(화석강)을 맡겼다. 화석강이란 江南지방으로부터 奇花, 異木, 怪石(괴석), 奇獸(기수) 등을 수집해 開封으로 옮기는 일이었다. 백성들은 진귀한 것이라면 一木一草(일목일초)까지 헌상해야만 했다. 꽃 한 포기 운반하는 데 수천 량, 돌 하나 운반하는 데 수만 량의 비용이 들었다. 거대한 괴석을 옮기는 데 방해물이 된다고 사정없이 민가를 허물어버리기도 했다.

그리한 지 20년. 만세산은 수목이 무성하고, 크고 작은 사슴들이 무리를 지어 노닐게 되었다. 중국 역사의 손꼽히는 화가이기도 했던 휘종의 사치는 독특했다. 만세산에 茶店(다점), 酒店(주점)을 만들어 놓고, 청색 깃발의 간판을 나부끼게 했다. 밤에는 등불을 휘영하게 밝히고 돈 많은 일반인까지 입장시켜 술판과 도박판을 벌이게 했다.

휘종은 중국 역사상 제1의 風流天子(풍류천자), 쉽게 말하면 ‘플레이 보이’였다. 開封은 이런 풍류천자에겐 지상낙원이었다. 당시 대운하 연변에는 호화주점, 즉 北宋式 룸살롱이 즐비했다. 밤만 되면 휘종은 微服(미복)으로 변장한 후 妄臣(망신)들을 거느리고 룸살롱들을 순례했다. 룸살롱의 미녀들과 밤을 새워 노닥거린다고 다음날 정무를 작파하기 일쑤였다.

이런 가운데 정부재정은 악화일로를 걸었고, 蔡京(채경)을 비롯한 탐관오리들은 법과 권력을 남용하여 축재에 혈안이 되었으며, 백성들은 塗炭(도탄)에 허덕였다. 그때의 宋나라의 부패상이 중국의 4大 奇書 중 하나인 <水滸傳(수호전)>에 잘 묘사되어 있다. 떼강도 소굴 梁山泊(양산박)의 두령 宋江은 실존인물이다.

<新羅金氏의 후예 阿骨打(아골타)가 세운 征服왕조 金>

휘종이 방탕생활에 푹 빠져 있는 동안 遼(요)의 북쪽 만주 땅에서는 여진족이 흥기했다. 여진족은 북방의 산림지대에서 半농경 半수렵에 종사했는데, 우리 삼국시대엔 고구려에 복속되었던 靺鞨族(말갈족)의 後身이다.

여진족의 한 갈래인 完顔部(완안부)에 阿骨打(아골타)라는 영걸이 등장했다. 그는 1115년 金나라를 세우고, 황제의 位에 올랐다. <金史(금사)> 世紀에 따르면 아골타는 新羅 왕족 출신으로 羅末麗初(나말여초) 만주로 넘어가서 여진 추장의 과부 딸과 결혼한 金函普(김함보)의 7代 孫이다. 金의 건국에는 다음의 사연이 배경을 이루고 있다.

遼의 최후의 황제 天祚(천조)는 유달리 사냥과 여색을 밝히는 군주였다. 그 무렵, 遼 지배층의 사냥에서는 海東靑(해동청)이라는 매(鷹)가 필수장비였다. 천조제는 매년 海東靑의 헌상을 女眞에 강요했다. 그런데 해동청은 여진의 땅에서 서식하지 않아 그것을 입수하기 위해서는 松花江(송화강) 방면에 거주하던 五國이라는 부족과 전투를 벌이지 않을 수 없었다. 완안부의 추장 아골타는 이런 압박을 견딜 수 없어 반기를 들었다.

이에 遼는 4路軍을 동원하여 아골타를 토벌하러 오지 깊숙이 진군했지만, 아골타의 各個擊破(각개격파) 전술에 걸려 오히려 대패하고 말았다. 기세가 오른 여진은 遼의 동부 국경을 돌파해 그곳에 거주하던 熟女眞(숙여진)을 지배 하에 편입시켰다. 熟女眞은 遼에 복속해 문명의 세례를 받은 여진족을 말한다.

이에 발끈한 天祚帝는 스스로 총지휘관이 되어 여진 평정에 나섰지만, 또 다시 패전했다. 여진은 승세를 타고 渤海(발해)&#8228;遼陽(요양) 등 54州를 병합하고, 다시 遼西 5州를 공략했다. 그리고 황제 즉위 다음해(1116)에 遼의 수도 上京(지금의 내몽골 赤峰市 시라무렌江 북안 左林巴旗)을 포위 공격했다.

신흥국 金이 遼를 혼내고 있다는 뉴스를 접한 宋의 휘종은 짜릿한 흥분을 느꼈다. 송&#8228;요 관계는 ‘전연의 盟’ 이후 대체로 평화관계를 유지해 왔지만, 宋으로서는 遼에 빼앗긴 燕雲(연운) 16州(지금의 北京과 河北省 북부 지역)의 탈환이 太祖 이래의 숙원이었다. 金과의 동맹하면 遼를 협격하여 失地(실지)를 회복할지도 모른다는 희망에 부풀었던 것이다. (계속)

鄭淳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