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奸臣(간신) 3人 때문에 멸망한 경제대국 南宋 ①

鄭淳台   |   2009-11-18 | hit 10862

鄭淳台 st-jung@hotmail.com


 


岳飛를 숙청한 간신 秦檜(진회)


 



中國 절강성 杭州(항주)의 명승지 西湖(서호) 변에 岳王廟(악왕묘)라 불리는 사당이 있다. 항주는 南宋의 수도였던 臨安(임안)이었으며, 岳王은 ‘萬古의 忠臣(충신)’으로 일컬어지는 무장 岳飛(악비: 1103-1142)의 追尊名(추존명)이다.


 



무릎꿇은 진회 부부의 동상 ⓒcreative commons

 


廟堂(묘당) 안뜰에는 岳飛의 무덤이 있다. 무덤 앞에는 두 남녀의 像(상)이 쇠사슬로 두 손이 꽁꽁 묶인 채 무릎을 꿇고 있다. 이것이 ‘매국노’로 미움받는 秦檜(진회) 부부이다. 지금은 금지되어 있지만, 옛적엔 岳飛의 무덤을 참배하는 사람들은 으레 이 진회 부처의 像에 침을 뱉거나 오줌을 갈겼다고 한다.


 


역사 인물의 像(상)은 대개 그 공적을 찬양하기 위해 건립되는 것인데, 이처럼 증오의 심벌로 조성되어 있는 것은 세계사적으로 드문 사례이다. 이곳에서는 중국인의 민족적 분노를 새삼 확인할 수 있다.


 


진회는 北宋 말기에 御史臺長官(감찰원장)으로 재직했다. 그는 1127년 北宋의 멸망 때 徽宗(휘종)・欽宗(흠종)과 함께 金軍에게 납치되었지만, 3년 만에 귀국해 南宋 정계에서 다시 피었다. 金에 억류기간 중에 그는 항전파로부터 강화파로 변신했다. 그는 金의 왕족 장군인 撻辣(달랄)에게 포섭되어 달랄이 金軍을 이끌고 남진할 때 참모로 복무했다. 특히 달랄을 위해 漢人들의 협조를 구하는 檄文(격문)을 써서 山東의 州郡을 항복시킨 일도 있었다.


 


이런 진회가 작은 배에 一家를 싣고 漣水(연수: 淮河 하구의 항만)에 주둔하는 南宋軍의 진지로 넘어왔다. 그 자신은 “金의 감시병을 죽이고 배를 탈취해 도망쳐 왔다”고 밝혔다. 그러나 그의 해명을 믿지 않은 사람이 많았다. 淮河(회하)는 北중국과 南중국을 가르는 강이다.


 


진회의 지론은 "천하의 평화를 바란다면 南・北으로서 각각 自立하고, 南은 南宋, 北은 金이 다스리면 좋다”는 것이었다. 그는 金將(금장) 달랄에게 서한을 보내 우호를 촉진하도록 高宗에게 상주했다. 당시, 金의 강력한 압박에 처한 南宋의 대외정책은 저항과 굴종 사이를 오락가락했다. 南宋을 세운 高宗은 항전파와 강화파를 對金관계의 흐름에 따라 그때그때 기용함으로써 王權의 안보를 도모했던 것이다.


 



岳飛와 岳王廟: 800여년 전 南宋 시기의 민족 영웅 악비의 사당. 중국의 국가급 문화재로 西湖를 찾는 관광객이라면 반드시 들르는 곳이다.



金과의 교섭력이 인정된 진회는 귀국 다음해인 1231년 右僕射(우복야: 副재상)에 올라 화평공작을 주도했다. 그러나 전세가 좀 호전되자 항전파의 반발에 의해 1년 만에 사직했다.


1234년, 南宋에 대한 金의 전면적인 침략이 재개되었다. 高宗은 추밀원장관 張浚(장준)의 헌책을 받아들여 岳飛에게 長江을 도하하여 淮東(회동)지방의 金軍을 견제하도록 명했다. 한편 韓世忠은 揚州(양주)에서 金軍을 패퇴시켰다. 金將 달랄과 올출은 韓世忠・岳飛의 부대에 저지되어 長江을 건널 수 없었다.



高宗은 항전파의 거두 張浚을 右승상으로 승진시키고 각 방면군의 總司令(총사령)도 겸임토록 했다. 張浚은 文官 출신으로서 南宋 초기에 都督諸路軍馬 등을 역임했다. 이때 岳飛는 河北 지역의 招討使(초토사: 기동부대 司令)에 임명되었다.


 


실로 예기하지 않았던 승리로 南宋의 위기는 일단 해소되었다. 실은 이때 金의 太宗(太祖 阿骨打의 동생 吳乞買)의 부고가 날아들어 금군은 회군해야 할 정황이었다. 그 후 金의 내부에서는 황족들의 세력다툼이 벌어졌다. 南宋으로서는 국방력을 강화할 수 있는 절호의 기회를 맞았다. 그러나 이 시기에 南宋 장군들은 상호간의 반목과 질시로 행동통일을 기하지 못했다.


 


童稚(동치: 아이)의 恥(치: 부끄러움)


 


1135년, 高宗은 岳飛를 湖北의 宣撫使(선무사: 방면군사령관)로 발탁했다. 선무사라는 군직은 淮東의 韓世忠, 江東의 張俊(장준: 우승상 張浚과는 다른 인물) 등 歷戰(역전)의 장수가 임명되는 군직이었다. 반면, 岳飛는 농민 출신의 일개 병사로부터 몸을 일으켰던 인물이었다. 그러나 이런 발탁인사에 韓世忠・張俊 등은 불만을 품었다, 岳飛는 高宗의 전방시찰에 자주 수행하면서 高宗에게 故土(고토) 회복전략을 상주했다.


 


이때 진회는 추밀원 副장관으로 컴백하여 여전히 金과의 화의를 주도하고 있었다. 진회도 岳飛의 戰功을 질시했다. 岳飛의 부대는 ‘岳家軍(악가군)’이라고 불렸는데, 군율이 엄격하면서 精强(정강)하여 백성들의 지지를 받고 있었다. 1138년, 진회는 재상으로 기용되어 金과의 화의를 추진했다.


 


高宗은 즉위(1127년) 이래 계속 金의 침략을 받으면서도 거의 매년 金에 사자를 보내 “南宋은 帝號(제호)를 사용치 않고, 金의 正朔(정삭)을 받들고 藩臣(번신)의 禮(예)를 다하려 하니 進攻(진공)을 중지해 달라”라고 제의했다. 이후에도 金의 진공은 매년 되풀이되었지만, 결국 長江이라는 거대한 ‘물의 장벽’이 가로막고 있어 騎馬(기마)군단으로 江南 공략이 어렵다는 점을 차츰 깨닫게 되었다. 이에 따라 1239년 金・南宋의 제1차 화의가 다음 조건으로 성립되었다.


 


(1)南宋 황제는 金 황제에 대해 신하의 禮(예)를 취한다. (2)南宋은 매년 銀 25만 량, 비단 25만 필을 金에 헌납한다. (3)金은 陜西(섬서)・河南(하남)을 南宋에 반환한다. 이에 대해 반대론이 들끓었다. 당시 南宋의 편수관 胡銓(호전)의 상주문은 유명하다.


 


“폐하, 한번 무릎을 꿇으면 祖宗廟社(조종묘사)의 靈(영) 모두를 夷狄(이적)에게 더럽혀지고, 祖宗의 赤子 모두가 左袵(좌임: 오랑캐의 풍습)에 물들게 되고, 조정의 신하 모두가 오랑캐의 陪臣(배신=家臣)이 되어 버립니다. 삼척동자라도 개・돼지에게 절하라고 하면 불끈 화를 낼 것입니다. 당당한 天朝, 여진에게 절하는 것은 童稚(동치: 아이)의 恥(치: 부끄러움)보다 오히려 못한 것 아니겠습니까”


 


‘童稚의 恥’는 굴욕외교에 대한 저항정신을 나타낸 名句로 훗날 널리 사용되었다. 胡銓은 진회의 미움을 받아 귀양을 갔다. 岳飛도 화의에 반대하여 사직서를 냈지만, 수리되지는 않았다. 金・南宋의 제1차 화의는 1년도 되지 않아 파탄이 났다. 金의 3代 황제 熙宗(희종)이 즉위한 이후 황제파와 황제의 종조부인 撻辣(달랄)파가 대립한 끝에 달랄이 주살되었다. 그 결과, 달랄이 추진해 온 對宋 화평이 전면 부정되었다.


 


간첩이 집권한 나라


 


1140년, 金軍은 네 방면으로 남하했다. 南宋의 劉錡(유기)는 兀朮(올출)이 지휘하는 金軍을 順昌府(순창부)에서 격파했다. 秦檜는 서둘러 高宗에게 주상해 유기를 전선으로부터 소환했다. 이때 岳飛도 金軍을 郾城(언성)에서 격파하고 朱仙鎭(주선진)까지 진출해 조금 더 밀면 올출을 사로잡을 수도 있는 지점을 확보했다. 진회는 또다시 서둘러 高宗에게 주상, 岳飛를 후방으로 소환했다.


 


또한 韓世忠도 金軍을 匯陽(회양)에서 격파했다. 이렇게 南宋군은 각지에서 승리하고 있었다. 이러한 전황 속에 올출은 어쩔 수 없이 開封(개봉)까지 물러나 河南・河北 진주군과 본국으로부터 파견된 부대를 재정비했다.


 


1141년, 올출은 和州(안휘성)까지 침입했지만, 南宋의 劉錤・楊근中이 이끈 부대에 의해 격파당했다. 이번에도 진회는 高宗에게 주상하여 劉・楊의 부대를 철퇴시켰다. 張俊의 부대도 建康(남경)으로 후퇴했다. 그리고 세 장수는 모두 宣撫使(선무사)의 직위에서 파면당하고, 그들의 거느린 부대는 황제 직할군에 편입되었다. 이후는 出兵의 필요성이 생기더라도 그때마다 勅許(칙허)를 얻도록 했다. 또 군의 거두인 韓世忠과 張俊은 문관직인 樞密院(추밀원) 장관으로, 岳飛도 추밀원 副장관으로 임명되어 軍務에서 제외되었으며, 더욱이 韓世忠과 岳飛는 곧 파면되었다. 그렇다면 왜 이런 利敵행위가 일어났을까?


 


당시, 장수들은 제각기 私兵을 거느리고 있었다. 私兵의 숫자는 韓世忠은 5만, 張俊은 4만, 岳飛는 3만 등이었다. 특히 岳飛는 30代 젊음으로 高宗의 신임도 두텁고, 부하의 인망도 모으고 있었다.


 


金과의 강화를 추진하는 진회로서는 우선 전방사령관의 힘을 삭감하는 일에 전력을 기울였다. 즉, 장군들을 중앙으로 소환하고 그 私兵들을 중앙군에 편입함으로써 장수들의 어금니를 뽑아버렸던 것이다. 장군들 사이에 불신과 대립을 조장하는 ‘디바이드 엔 룰’은 진회의 常用手法이었다. 戰時의 武官을 제 마음대로 콘트롤했다는 점에서 善惡이야 어떻든 진회는 정치공작의 高手였다.


 


항전파 장군들 중 가장 강경했던 것은 岳飛였다. 진회로서는 가장 방심할 수 없는 존재였던 것이다. 金의 재상 올출이 진회에게 보낸 서한에서 다음과 같이 편지를 보내 岳飛의 제거를 교사했다.


 


“당신은 아침저녁으로 和議를 요청해 오지만, 당신과 반대로 岳飛는 河北을 탈환하려고 기도하고 있지 않은가? 岳飛를 주살하지 않으면 강화 교섭에 응할 수 없다”


진회의 수법은 악랄했다. 진회는 우선 岳飛의 부장인 王貴와 張憲의 사이가 나쁜 것에 착안하여 王貴에게 張憲이 叛意(반의)가 있다고 고발하게 했다. 이것이 단초가 되어 張憲과 岳飛의 아들 岳雲, 뒤이어 岳飛가 체포되었다.


 


죄목은 일찍이 岳飛가 節度使로 영전했을 때 “32세로 절도사가 된 것은 太祖(趙匡胤・조광윤)와 나뿐이다”고 放言(방언)했던 것, 金軍의 남하 때 張俊에 대한 구원에 늦었던 것, 張憲과 공모해 모반을 기도했다는 것 등이었다. 결국 岳飛 부자와 張憲은 처형당했다.


 



岳飛의 글씨: 陝西省 岐山縣 五丈原의 제갈량 사당에 걸려있는 出師表. 글씨를 쓴 사람은 南宋의 충신 岳飛. 악비는 성도에서 제갈량의 사당을 참배하고 깊은 감명을 받아 철야하면서 書寫했다고 한다.


 


岳飛를 죽임으로써 金과의 제2차 화의가 성립되었다. 그 결과, 金에 억류되어 있던 高宗의 생모 韋태후가 귀환하고, 억류 중에 사망한 徽宗(휘종)의 유해가 반환되었다. 欽宗은 계속 金에 억류당했는데, 그것은 南宋 측이 金에 송환을 요구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欽宗이 돌아오면 그 동생인 高宗의 位相이 난처해지기 때문이었다. 欽宗은 결국 유배지인 松花江 동북방 五國城(오국성)에서 1156년 병사했다.



그러나 金은 제1차 화의에서 반환을 약속했던 陜西(섬서)・하남을 여전히 반환하지 않았고, 되려 唐州(당주)・鄧州(등주) 등을 金의 영토를 편입했다. 그래서 양국은 대체로 淮河를 국경으로 삼게 되었다. 진회는 1155년, 65세로 죽을 때까지 권력을 장악하게 된다.(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