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똑같은 죽을 꾀:董卓(동탁)과 金正日의 화폐改惡

鄭淳台   |   2009-12-28 | hit 6904

董卓과 金正日의 화폐개혁


 


董卓(동탁)은 백성들의 재산을 수탈하기 위해 기존의 五銖錢(오수전)과 銅製(동제)의 佛像(불상)・鐘(종) 등을 몰수, 부수고 녹여서 새 화폐를 주조했다. 新화폐는 크기도 작고, 모양새도 볼품없고, 중앙에 네모 구멍도 뚫려 있지 않은 銅片(동편)에 불과했다. 그 결과 화폐가치는 폭락하고, 市場에서 拒絶(거절)반응을 받아 국가경제가 파멸하고 말았다. 오늘의 북한 金正日 정권도 화폐 改惡(개악) 등 董卓의 虐政(학정)을 되풀이하고 있다.


 


鄭淳台<st-jung@hotmail.com>&nbsp;&nbsp;&nbs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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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0년分 兵糧(병량)을 備蓄(비축)해 놓고&nbs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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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북한 金正日 정권의 行步(행보)를 보면 後漢 말의 독재자 董卓(동탁: ?-192)을 방불케 한다. 董卓은 화폐개혁 등의 惡政(악정) 때문에 패망한 역사인물이다.&nbsp;그는 경제행위를 전혀 이해하지 못하고, 오직 强性(강성) 정권 유지에만 급급한 軍閥(군벌)이었다. 그것은 당시 중국인에겐 一大 재앙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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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nbsp;董卓(동탁)


&nbsp;董卓은 그의 세력권인 長安(장안: 지금의 섬서省 西安) 근교 &#37119;(미)에 長安城 규모의 성벽을 쌓고, 여기에 30년 分의 兵糧(병량)을 비축했다.《동탁 動線 관련 지도 참조》 그는 이렇게 장담했다.



“大望(대망)이 실현되면 天下를 얻고, 실패하더라도 이것만 있으면 평생 걱정이 없다.”



이어 富者들의 돈을 갈취하기 위해 通貨改鑄(통화개주)를 강행했다. 잘 유통되고 있던 五銖錢(오수전)과 銅(동)제품을 몰수하여 새로운 통화의 재료로 삼았다. 오수전은 중국 古代史上 가장 오래 많이 유통된 신용 화폐였다.



董卓이 만든 새 화폐는 오수전에 비해 작고, 刻印(각인)도 되어 있지 않은 데다 중앙에 사각형의 구멍도 뚫려 있지 않고, 줄(&#37986;)로 가는 마무리 작업도 하지 않았다. 종전의 화폐에는 ‘五銖’라는 두 글자가 돋을새김(陽刻) 되어 있었지만, 새 돈은 銅片(동편)에 불과한 粗惡品(조악품)이었다. 이미 화폐경제에 익숙해 있던 유통시장은 곧바로 拒絶반응을 나타냈다.



그 결과, 화폐가치는 떨어지고, 惡性(악성) 인플레이션이 만연했다. 곡물 가격이 대번에 수백 배로 폭등했다. 그로부터 董卓의 정치는 파탄이 나고 말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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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동탁 動線(동선) 관련 지도


<三國志演義>에서 董卓은 초장부터 등장하고 있는 인물이다. 농민 반란군인 黃巾賊(황건적)의 수령 張角(장각)에게 패해 목숨이 위험한 상황에서 劉備(유비)&#65381;關羽(관우)&#65381;張飛(장비)가 등장해 구해 주는 장면이 나온다. 그런데도 董卓은 3인의 義형제가 아직 白頭(백두: 無官)라는 사실을 알자, 태도가 표변하여 ‘상것’으로 下待(하대)했다. 이에 발끈한 장비가 董卓을 도모하려 했지만, 유비의 간곡한 만류로 목을 치지 못한 것으로 되어 있다.



위의 설화는 <연의>의 픽션이다. 유비가 황건적 토벌에 참가한 사실은 있지만, 董卓을 만난 사실은 없다. 董卓은 <연의>에서 제1의 악당으로 지목하고 있지만, 그의 출신배경에 관한 언급은 거의 없다. 正史 <삼국지>魏書(위서) 동탁傳에는 다음 내용이 기록되어 있다.



凉州(양주: 지금의 甘肅省) 臨&#27950;縣 출신. 젊은 시절의 그는 遊俠(유협)의 기질이 있어 羌族(강족: 티베트系)의 땅을 돌아다니며 그곳 수령들과 깊은 인간관계를 맺었다. 귀향한 후에는 농경에 종사했는데, 가끔 羌族 수령들이 찾아오면 귀중한 耕牛(경우)를 잡아서 환대했다. 董卓의 통 큰 대접에 감동한 수령들은 보답으로 가축 1000여 마리를 선물했다.



동탁은 타고 난 무예의 高手인 데다 대단한 완력도 지니고 있었다. 두 개의 화살주머니를 양 옆구리에 차고 말을 달리며 교묘하게 左右로 번갈아 가며 화살을 날렸다. &#37913;子(등자: 발걸이)가 발명되지 않았던 시절에 말을 달리며 활을 쏜다는 것은 騎馬民族(기마민족)에겐 몸에 밴 일이었지만, 漢族에겐 神技(신기)나 마찬가지였다. 이를 높게 평가한 중랑장 張奐(장환)에게 발탁되어 幷州(병주: 지금의 山西省) 북방에서 對흉노 작전에서 공을 세워 郎中에 승진했고, 이때 비단 9000필을 恩賞으로 받았다. 그러나 그것을 모두 부하들에게 나누어 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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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獄吏 하나를 보내 首魁 잡아내면 끝날 일을&#82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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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런 그가 어떻게 포악무도한 인물로 변해 갔던 것일까?
그는 황건적의 난 때(서기 184년) 中郞將(중랑장)으로 출전했지만, 패전하여 파면되었다. 그러나 韓遂(한수)가 강족을 이끌고 반란을 일으켜 &#38580;西郡(농서군: 지금의 감숙성)을 포위했을 때(185년) 동탁은 中郞將으로 복직했다. 함께 출동한 다른 5軍은 모두 패했지만, 董卓만은 奇計(기계)로써 공을 세우고 전원 귀환하여 前將軍으로 승진한 후 長安 서쪽 30km에 위치한 槐里(괴리)에 주둔했다. 그 奇計란 이러했다.



韓遂 휘하 강족 수만 명에게 望垣&#30820;(망원협) 북쪽에 포위되어 토벌군의 군량이 떨어졌다. 董卓은 짐짓 강가에서 고기를 잡는다고 사칭하고, 歸路(귀로)의 導船場(도선장: 나루터) 부근에 높은 둑을 쌓아 큰 못으로 만들어 강물을 담아 놓은 다음 둑 밑 길을 따라 퇴각했다. 羌族이 추격하자 董卓은 둑을 터서 추격군을 수몰시켰다.
董卓은 任免(임면)을 거듭하는 사이 末期 증세의 漢왕조에 대해 불신감을 품게 되었다. 董卓의 叛心(반심)은 조정에 알려졌다. 그래서 조정은 董卓을 少將(宮內官)으로 전보시켜 兵權을 회수하려 했다(188년). 董卓은, 凉州의 불온한 정세와 부하들이 자기를 떠나려 하지 않는다는 것 등을 이유로 내세워 轉出(전출)을 거부했다.
이듬해에는 董卓을 幷州牧(병주목)으로 발령하고, 동탁의 휘하 병졸을 左將軍 皇甫崇(황보숭)에게 引渡(인도)하라는 勅命(칙명)이 떨어졌다. 이번에도 董卓은 거부했다.



때마침 靈帝(영제)가 죽고, 열네 살짜리 少帝가 즉위했다. 靈帝의 미망인이 된 何太后의 오빠 何進이 大將軍으로서 實權를 장악, 이 기회에 內朝(내조)를 장악하고 있는 宦官(환관)들을 일소하려는 계획을 세웠다. 하지만 何태후는 허락하지 않았다. 무식했던 何進은 董卓&#65381;丁原 등의 군벌들을 낙양으로 불러들여 何태후에게 압력을 넣으려고 했다.



이때 曹操(조조)는 “獄吏(옥리: 형벌에 관한 일을 심리하던 벼슬아치) 하나에게 명해 首魁(수괴)를 죽이면 끝날 일인데, 바깥의 장수를 불러들여 공연히 허풍을 떨려 한다”고 비웃었다. 과연, 何進의 거사계획이 새어나가 환관들은 宮內로 유인된 何進을 난도질해 버렸다. 이에 何進의 手下로서 사례교위(치안총감)였던 袁紹(원소)는 궁내로 난입해 환관 2000여 명을 주살했다.



난중에 살아남은 환관 일부가 少帝를 납치하여 洛陽을 탈출했다. 때마침 부대를 이끌고 上京하던 董卓이 少帝 일행과 만나 환관들을 베고 少帝를 옹위하여 還宮(환궁)했다. 幷州자사 丁原(정원)도 이때 入城해 동탁과 힘을 겨루었다. 董卓은 丁原 휘하의 맹장 呂布(여포)를 회유, 여포의 손으로 丁原을 죽이고 軍權을 한손에 장악했다.



189년, 董卓은 少帝를 자질이 없다고 廢位(폐위)하고, 少帝의 이복동생 劉協(유협)을 황제로 세웠다. 그가 그 후 31년간 허수아비처럼 在位(재위)한 後漢의 마지막 황제 獻帝(헌제)이다. 동탁은 이어 少帝의 생모였던 何태후와 廢帝(폐제)를 차례로 독살하고, 스스로 三公보다 높은 太師(태사)가 되어 권위를 높였다.&nbsp;&nbsp;&nbsp;



曹操&#65381;袁紹 등은 洛陽을 탈출하여 고향으로 돌아가 關東(관동: 函谷關 以東)의 제후들과 함께 董卓 토벌을 위한 의병을 일으켰다(190년 1월). 袁紹를 盟主(맹주)로 세운 諸侯(제후) 연합군은 羌族의 강력한 기마부대를 거느린 董卓과의 정면대결을 회피했다. 제후들은 기회만 있으면 지방 일각에라도 할거해서 自立하려는 속셈이었던 만큼 어떻게든 병력의 損耗(손모)만은 피하고 싶었던 것이다. 실제로 이때 董卓과 本心으로 싸운 제후는 曹操&#65381;孫堅(손견) 정도였다.&nbsp;



동탁의 官軍과 諸侯 연합군의 싸움은 무승부였지만, 저지른 죄 많은 董卓은 왠지 불안했다. 191년, 董卓은 그의 근거지와 가깝고 장기전에도 유리한 長安으로의 遷都(천도)를 결심했다. 천도를 앞두고 董卓은 우선 洛陽 부호의 재산을 모두 몰수했다. 이유 따위는 없었다. 닥치는 대로 빼앗았다.



<後漢書>에 따르면 董卓은 洛陽 근교에 있는 歷代 황제와 호족들의 陵墓(능묘)를 파헤쳐 副葬(부장)된 보물을 도굴했다. 더욱이 洛陽의 宮&#65381;宗廟(종묘)&#65381;府庫(부고)&#65381;民家 등에 모조리 불을 질러 100리 사방이 불바다가 되었다. 後漢 200년 도읍지 낙양이 하루아침에 폐허가 되었다. 史上 유례없는 폭거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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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nbsp;낙양에 불을 지르는 董卓



오늘날 洛陽-西安(옛 長安) 간에는 &#38580;海線(농해선: 중국의 江蘇省 連雲港에서 甘肅省 &#20848;州까지 이르는 철로)이 놓여 있다. 직선거리로는 270km에 지나지 않는다. 그러나 당시엔 산&#65381;골짜기&#65381;강 등을 답파해야 했던 만큼 실제로는 약 800km의 길이었다. 洛陽 사람 약 100만은 병사들에게 떠밀려 아무 희망도 없이 끌려가야 했다. 그것은 얼어 죽고 굶어 죽는, 이른바 죽음의 행진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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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後漢書>董卓傳에는 그의 학정을 다음과 같이 기록되어 있다.



&#8227;부정축재 및 비자금 조성: 董卓은 長安 교외에 &#37119;城(미성)을 축조하여 그의 居城(거성)으로 삼았는데, 높이를 長安城과 같게 하고, 주변으로부터 끌어 모은 30년분의 곡물을 창고에 비축했으며,&nbsp;금&#65381;은&#65381;비단&#65381;보물을 산처럼 쌓아놓았다&nbsp;&nbsp;



&#8227;본때정치: 지방순시에 나서는 董卓을 전송하기 위해 公卿(공경)들 모두가 橫門 밖에서 열린 환송연에 참석했다. 미리 세운 대형 텐트 안에서 酒宴(주연)이 시작되자 北地郡(오르도스 所在)에서 반란을 일으켰다가&nbsp;항복한 사람 수백 명을 장막 안으로 끌고 와 우선 그들의 혀를 끊어버렸다. 이어 손발을 잘라내고, 눈알을 뽑은 후 큰 솥에다 삶았다. 公卿들 모두가 놀라 손에 쥔 수저를 바닥에 떨어트릴 정도였다. 董卓만 태연히 술을 마시고, 요리를 먹어 치웠다.



&#8227;족벌정치: 治董卓의 側室(측실)에서 태어나 아직 걷지도 못하는 아이들까지 모두 侯로 책봉되었고, 侯의 상징물인 황금 印은 장난감으로 사용되었다. 15세짜리 손녀는 渭陽君(위양군)으로 봉하고 領地(영지)가 부여되었다.



&#8227;공포정치: 董卓은 부하에게 명해 관리&#65381;백성들 중 불효한 자, 불충한 신하, 청렴하지 않는 관리, 순종하지 않는 동생 등의 리스트를 만들어 모두 사형에 처하고, 재산은 몰수했다. 그 결과, 愛憎(애증)에 따라 서로를 고발, 다수가 억울한 죽음을 당했다.&nbsp;&nbsp;&nbsp;&nbsp;&nbsp;



이런 새디스트적 공포정치로 민심이 董卓으로부터 떠나버렸다. 당연한 일이지만, 그의 최후는 처참했다. 董卓은 192년 4월 그가 양아들로 삼은 呂布의 창에 찔려 죽었다. <연의>에서는 司徒(사도: 3公의 1인) 王允(왕윤)의 양녀인 초선이 董卓과 呂布 사이를 戀敵(연적) 관계로 떼어놓는 義俠女(의협녀)의 役으로 등장하지만, 초선은 실존인물이 아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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董卓의 최후와 金正日의 失政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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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만, 동탁이 사소한 일로 화가 나 呂布을 향해 창을 던진 사건이 있었고, 더욱이 여포는 董卓의 시녀와 密通(밀통)하고 있어 들통이 나면 목이 달아날 위기에 처해 있었다. 이런 상황을 이용하여 王允이 董卓의 주살을 사주했던 것이다.&nbsp;
董卓의 시체는 市場 바닥에 공개, 햇볕과 비바람을 맞게 했다. 비만체여서 많은 脂肪(지방)이 흘러나와 땅바닥을 붉게 물들였다. 밤이 되자 파수병이 董卓의 배꼽에 심지를 꽂아 불을 밝혔는데, 며칠 동안이나 불탔다고 한다.



董卓은 무력만으로 정권을 장악했지만, 一國을 경영할 만한 경륜이 없었다. 만약 董卓이 화폐경제를 파괴하지 않고, 五銖錢을 계속 사용하면서 훗날의 曹操처럼 屯田(둔전)제도를 실시하여 경제를 안정시키고 天子의 깃발을 앞세워 제후들을 호령했다면 그 후 중국역사는 曹操&#65381;孫權&#65381;劉備의 삼국시대로 진입하지 않았을 것이다.
동탁 軍의 主力은 &#27664;(저)&#8228;羌(강)族으로 이루어진 티베트系 胡騎(호기: 오랑캐의 기병)였다. 동탁의 사후에 그 지위를 상속한 인물이 曹操에 다름 아니었다. 동탁에 의해 시작된 胡騎의 중국 천하 橫行(횡행)이야말로 중국의 古代史的 발전을 정지시켜 이후 장장 350년간의 中世的 분열에 빠뜨리게 한 제1步로 평가되고 있다. 曹操는 동탁의 옛 부하인 胡兵을 입수했을 뿐만 아니라 새롭게 유목민의 旗兵(기병)을 징발해 대열에 가담시켰다. 그 첫째가 幷州(병주) 출신의 匈奴(흉노)기병이었고, 그 둘째가 遼西(요서) 출신의 烏丸突騎(오환돌기)였다.&nbs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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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nbsp;삼국시대의 騎兵·刀兵



金正日 정권의 경우 열대지방에서나 가능한 ‘다락밭’을 山地 곳곳에 만들어 비가 조금만 내려도 ‘다락밭’의 土砂(토사)가 흘러내려 저지대의 논밭을 폐허화하고 하천을 막아 ‘큰물난리’를 자초했다. 이러한 농업정책의 실패로 그동안 북한 동포 수백만을 굶겨 죽였다.



金正日은 세계에서 이미 실험이 끝난 사회주의 경제를 강행하면서도 곡물 배급은 平壤(평양) 시민 등 일부 핵심계층에게만 베풀고, 외국의 원조 식량은 軍糧(군량)으로 비축하고 있으며, 일부 해묵은 쌀은 외국에 헐값으로 매도하여 金正日의 비자금을 만들어 왔다.



뮈니뭐니 해도 최악의 虐政(학정)은 백성을 굶겨 죽이는 것이다. 그들은 굶어 죽지 않으려고 텃밭 등에서 나온 생산물과 家內수공업품을 장마당(암시장)에 내다 팔아 연명해 왔다. 金正日 정권은 독재통치를 어렵게 한다는 이유로 장마당을 단속하면서 장마당을 통해 형성된 피 같은 돈까지 몰수하려고 화폐개혁을 단행한 것으로 보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