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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원의 覇者(패자) 曹操(조조) 평전①

鄭淳台   |   2010-01-05 | hit 7011



&nbsp鄭淳台 月刊朝鮮 前편집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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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nbsp曹操(조조)의 무덤에 대한


신라 文武王의 見解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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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nbsp“세월이 가면 산과 계곡도 변하고, 세대 또한 흐름에 따라 변하는 것이니 吳王(오왕: 孫權)의 北山 무덤에서 어찌 金鳧(금부: 물오리 모양의 金製 향로)의 광채를 볼 것이며, 魏主(위주: 曹操)의 西陵(서릉)은 銅雀(동작)이란 이름만 들릴 뿐이로다. 옛날 萬機(만기)를 총람하던 영웅도 마지막에는 한 무더기 흙이 되어, 나무꾼과 목동들이 그 위에서 노래하고, 여우와 토끼는 그 옆에 굴을 팔 것이다. 그러므로 헛되이 재물을 낭비하는 것은 역사서의 비방거리가 될 것이요, 헛되이 사람을 수고롭게 하더라도 魂魄(혼백)을 구제할 수 없을 것이다. 이러한 일을 조용히 생각하면 마음 아프기 그지없으니, 이는 내가 즐기는 바가 아니다. 숨을 거둔 열흘 후, 바깥 뜰 창고 앞에서 나의 시체를 불교의 법식에 따라 화장하라”
&nbsp위의 인용문은 &lt三國史記&gt 신라 文武王 21년(681) 條에 실린 文武王의 유언 중 한 대목이다. 문무왕은 羅唐(나당) 7년 전쟁에서 승리하여 삼국통일을 완수한 우리 민족의 영웅이다. 문무왕의 시신은 그의 유언대로 화장된 후 그 유골은 慶州 동쪽 甘浦(감포) 앞 바다에 뿌려졌다.&nbsp&nbsp
&nbsp이런 유언을 남긴 문무왕은 정사 &lt三國志&gt 등 중국의 史書를 熟讀(숙독)했던 것으로 보인다. 曹操(조조)는 그의 근거지인 &#37172(업)이라는 땅에 호화스런 銅雀臺(동작대)를 지어 놓고, 中原의 覇者(패자)로 君臨(군림)했다. 曹操는 죽기 전에 후세의 盜掘(도굴)을 막기 위해 72개의 假墓(가묘)를 만들었던 것으로 전해져 왔지만, 그 위치는 미스터리였다. 어떻게 하든 그의 주검을 남에게 보이고 싶지 않아 가짜 무덤까지 만든 조조, 그러나 그의 永眠(영면)은 1790년의 세월을 흐른 후 방해를 받고 말았다.&nbsp
&nbsp‘治世의 能臣(능신), 난세의 奸雄(간웅)’이라는 曹操, 그의 무덤은 지난 12월27일 河南省 安陽縣 安豊鄕 西高穴村(서고혈촌)&nbsp 발견되었다. 人民日報의 보도에 따르면 이 陵墓(능묘)에서는 200점의 유물이 출토되었는데, 그 중에는 曹操의 무덤임을 입증하는 2개의 보물도 포함되어 있다. 그것은 銘文(명문)이 새겨진 큰 창과 돌 베개(慰脛石)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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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nbsp큰 창에는 ‘魏武王常所用格虎大戟’(위무왕상소용격호대극)이라 陰刻(음각)되어 있다. “魏武王이 평소 사용했던(常所用) 호랑이를 대적(格虎)하는 큰 창(大戟)”이라는 뜻이다. 여기서 호랑이는 그와 패권을 다툰 群雄(군웅)을 의미하는 듯하다. 당시 武將의 무기에는 조조의 格虎大戟처럼 독특한 명칭이 붙어 있었다. 예컨대 呂布의 무기는 方天畵戟(방천화극), 張飛의 그것은 丈八蛇矛(장팔사모)였다.
&nbsp조조의 무덤에서는 여성 2명도 配葬(배장)되어 있었다. 그녀들이 누구인지 밝혀지지 않았다. ‘英雄 好色(호색)’일까, 그는 12명의 처첩을 거느렸다. 好色으로 인한 방심으로 하마터면 戰死할 뻔한 위기도 더러 겪었다. 正婦人(정부인) 卞씨는 비록 妓女(기녀) 출신이지만 매우 賢淑(현숙)했다. 曹操 만한 인물이 紅燈街(홍등가)의 여성을 正부인로 맞았다는 것은 그가 형식에 구애되지 않음을 말해 준다.&nbsp
&nbsp조조는 대단한 페미니스트였다. 臨終(임종)에 앞서 조조는 그를 모시던 侍女(시녀)들의 앞날까지 걱정하면서 그녀들에게 일일이 귀한 香을 나누어 주었다. 後世의 유학자들을 그런 조조가 너무 사소한 일에까지 신경을 썼다고 비난했지만, 영웅의 胸中(흉중)을 누가 알랴? 그는 能小能大(능소능대)했고, 여자든 남자든 능력 있는 인간을 아꼈다.&nbsp&nbsp&nbsp&nbsp&nbsp&nbsp
&nbsp이번 발굴로 다음 사실이 확인되었다. 사망 당시에 ‘魏王(위왕)’이었던 曹操는 처음엔 ‘武王’이란 諡號(시호)를 받았다는 점이다. 서기 220년, 조조가 洛陽에서 병사한 직후 그의 아들 曹丕(조비)는, 31년간 在位했던 後漢의 마지막 천자 獻帝(헌제)를 ‘禪讓’(선양)이란 美名 아래 강제 퇴위시키고, 새 제국 魏를 개창했다. 이때 조조의 시호가 武王에서 武帝로 격상된 것이다. 이에 따라 魏를 正統(정통)으로 보는 정사 &lt三國志&gt는 武帝 本紀로부터 기술되어 있다.
&nbsp조조의 능묘는 현재까지 발견된 삼국시대의 묘 중에서 가장 고위급의 무덤일 뿐만 아니라 부장품도 가장 많다. 이번에 발굴된 조조의 무덤은 삼국시대의 繪畵(회화), 書藝(서예), 靑磁공예, 銅器의 구조, 무기, 武具, 葬儀 등의 연구에 있어 귀중한 자료를 제공할 것이다. 중국 고고학상의 10大 발굴 중 하나로 평가되고 있다.&nbsp&nbsp&nbs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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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nbsp曹操(원소)의 두 가지 콤플렉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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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nbsp曹操는 서기 155년 沛國 &#35673縣(패국 초현: 현재의 安徽省 毫州)에서 태어났다. 그의 조부 曹騰(조등)은 後漢 順帝 이래 4명 황제를 모시고 황후의 侍從長(시종장)에 오른 고위 宦官(환관)이다. 조숭은 費亭侯(비정후)에 봉해졌다.&nbsp&nbsp
&nbsp환관이라도 高官은 養子(양자)를 들일 수 있었다. 조등은 夏侯씨로부터 養子를 들였는데. 그가 조조의 아버지 曹嵩(조숭)이다. 당시, 고위 환관은 實수입이 좋았다. 養父의 재산을 상속한 조숭은 1억 錢(전)을 나라에 바치고 太尉(태위: 국방부장관)의 직위를 샀다&nbsp 武帝 이래 買官(매관)은 漢왕조의 관행이었으며, 심지어는 사형수일지라도 돈을 바치면 사면을 받을 수 있었다.
&nbsp환관 집안 출신인 조조는 평생 名門 컴플렉스에 시달린 인물이다. 후일 그가 孔子 20代의 후손인 孔融(공융)을 주살한 것도 이러한 열등의식의 발로였다. 조조의 최대 라이벌은 4代에 걸쳐 三公(삼공: 재상)을 배출한 名家 출신 袁紹(원소)였다. 결국, 원소의 집안은 조조에 의해 族滅(족멸)당했다.&nbsp&nbsp&nbsp&nbsp&nbsp&nbsp&nbsp
&nbsp조조에게는 또 하나의 컴플렉스가 있었다. &lt삼국지&gt에는 劉備(유비)&#8228 孫權(손권)의 용모를 자세히 묘사했지만, 조조의 그것은 생략되어 있다. 당시 중국인의 理想的 체구는 비만형이었지만, 조조는 반대로 왜소한 몸집이었던 듯하다.
&nbsp南朝의 劉宋(유송) 때 劉義慶(유의경)이 저술한 &lt世說新語(세설신어)&gt에는 이런 에피소드가 기록되어 있다. 魏王(위왕) 때의 조조에게 匈奴(흉노)의 사절이 찾아왔다, 容姿(용자)에 자신이 없었던 조조는 그의 막료 중 체구가 크고 인물도 잘 생긴 崔琰(최염)을 왕좌에 앉히고, 그 자신은 劒(검)을 잡고 옆에서 侍立(시립)했다. 알현이 끝난 후 조조는 사람을 보내 흉노의 사절에게 은근히 알현의 소감을 물었다.
&nbsp“魏王의 모습은 대단히 훌륭했다. 그러나 그 옆에서 검을 쥐고 서 있던 인물, 그 사람이야말로 진짜 영웅으로 보였다”
&nbsp조조는 이 말을 들은 즉시 추격대를 파견해 흉노의 사절을 붙잡아 죽였다. 그가 흉노 사절의 안목을 두려워했는지, 아니면 그 자신의 빈약한 용모에 대한 소문이 나라밖으로 퍼지는 것을 꺼려했는지 어떤지 알 수 없다.&nbsp&nbsp&nbsp
&nbsp조조는 어린 시절의 모습은 꾀 많고 사고를 잘 치는 非行(비행)소년이었다. 하기야 權謀術數(권모술수)는 환관 집안의 家藝(가예)였다. &lt삼국지&gt 裴松之(배송지) 註에서 인용한 &lt曹瞞傳(조만전)&gt에서는 조조가 어렸을 때에 “매를 날리거나 개를 풀어놓고 사냥하기를 좋아했다”고 적혀 있다. 놀기만 하는 조조를 보다 못한 그의 숙부가 “이 아이는 제대로 가르쳐야 한다”고 조숭(조조의 아버지)에게 말했다. 이에 조조는 영악한 꾀를 냈다.
&nbsp어느 날, 숙부가 멀리서 오는 것을 보고는 얼른 입을 일그러트려 입이 돌아간 흉내를 냈다. 숙부는 바로 조숭에게 조조가 풍을 맞은 것 같다고 귀띔했다. 조숭이 급히 조조를 불러 보았더니 아무 이상도 없었다. 조조는 즉각 숙부를 모략했다.
&nbsp“숙부가 저를 좋아하지 않아 저에 대한 험담을 아무렇게나 합니다.” 이후 숙부가 조조에 대해 어떤 말을 해도 조숭은 믿지 않았다. 조조는 더욱 신나게 놀았다.&nbsp&nbsp&nbsp
&nbsp조조와 원소는 젊은 시절 非行을 함께 했던 친구 사이였다. 南朝 宋 때 劉義慶(유의경)이 저술한 &lt世說新語&gt에 따르면 원소와 조조는 어느 날 야음을 틈타 신방에 뛰어들어 新婦를 강탈해서 도망쳤다. 그 집안사람이 둘을 추격하자 원소는 급한 와중에 도망갈 길이 막히자 덤불숲에 뛰어들었다가 가시나무에 걸려 꼼짝달싹 못하게 되었다. 앞서 도망가던 조조에게 奸計(간계)가 떠올랐다. 조조는 갑자기 큰 소리로 외쳤다.
&nbsp“도둑이 여기 있다.”
&nbsp다급해진 상황에서 원소는 결사적인 몸부림으로 가시덤불을 뛰쳐나왔다. 비상상황에 발휘되는 인간의 잠재능력을 활용하게 유도했던 것이다.
&nbsp그러나 청년기에 들어 조조는 四書五經(사서오경)을 숙독하여 유교적 교양을 쌓았을 뿐만 아니라 諸子百家(제자백가)를 섭렵했으며, 특히 兵學에 심취하여 후일 &lt孫子兵法&gt의 주석서를 저술했다. 더욱이 그는 後漢末을 대표하는 시인으로서 그의 ‘短歌行(단가행)’은 유명하다.&nbsp&nbsp 조조의 시는 도입부부터 사람의 심금을 울린다. 다음은 短歌行 도입부이다.
&nbsp&lt술을 들고 노래 부르세/인생이 살면 얼마나 산다고/아침이슬 같은 인생/지난날이 또 얼마나 고통스러웠는고.&gt
&nbsp陣中에서 朔(삭: 창) 비껴들고 읊은 短歌行에서는 이렇게 이어진다.
&nbsp&lt푸르고 푸른 것은 그대의 옷깃이요. 유유한 것은 나의 마음이다/다만 그대와의 인연 때문에 지금도 그대를 깊이 그리워하네/사슴이 쑥을 찾아 서로 부르며 울부짖듯이/나에게 좋은 손님이 있다면 거문고를 타고 피리를 불며 맞이할 텐데/밝고 밝은 저 하늘의 달님은 언제나 운행을 멈출 것인지(中略).&gt
&nbsp위에서 ‘달님’은 여러 군벌 진영을 기웃거리며 진로를 고민하고 있는 인재를 의미한다. 다음은 그 결말 부분이다.
&nbsp&lt산은 높아지기를 마다하지 않고, 물은 깊어지기를 마다하지 않는 법/周公(주공)처럼 人材를 얻기 위해 먹던 음식을 세 번 뱉으며 맞이한다면/천하가 나를 기뻐하며 따르지 않겠는가.&gt&nbsp&nbsp&nbsp
&nbsp비록 짧은 인생이지만, 인재를 얻어 대사업을 이루고, 정치적 포부를 실현하겠다는 뜻이 담겨 있다. 그는 陣中에서도 책을 손에서 놓지 않았다. 文史哲에 대한 그의 지식은 중국역사에서 冠絶(관절:가장 뛰어남)한다.&nbsp
&nbsp184년, 黃巾(황건)의 난 때는 중랑장 皇甫崇(황보숭)의 휘하에서 기병대장(騎都尉)으로 참전하여 전공을 세웠다. 황보숭의 토벌군은 黃巾軍의 수령 張角(장각) 3형제를 討滅(토멸)했다. 그 전공으로 조조는 皇城(황성)의 경비司令인 西園八校尉(서원팔교위)의 하나가 되었고, 이어 齊南國의 相에 올랐다. 相이라면 연봉 2000石으로서 郡의 太守와 동격이다.
&nbsp이때 조조는 중앙의 권력가를 믿고 苛斂誅求(가렴주구)를 일삼던 縣令(현령) 10여 명을 파면하고, 백성들을 괴롭히던 陰祀(음사: 바르지 못한 귀신을 모시는 집)를 모두 허물어버렸다. 이어 그는 東郡태수로 임명되었지만, 정치적 보복을 피해 사퇴한 후 잠시 귀향했다.&nbsp&nbsp
&nbsp조조는 宦官 집안 출신이었지만, 환관들이 증오했던 ‘淸流派(청류파)’ 지식인들과 노선을 같이 했다. 그는 고위 환관의 삼촌이 조카의 권세를 믿고 상습적으로 법규를 위반하자 본때로 잡아들여 방망이로 때려죽일 만큼 과감했다.
&nbsp189년 4월, 靈帝(영제)가 죽고, 어린 아들 少帝(소제)가 즉위했다. 少帝의 외삼촌 何進(하진)이 大將軍으로서 軍權을 장악하고, 사례교위(치안총감) 袁紹(원소)와 짜고 환관 誅殺(주살)을 모의했다. 그러나 少帝의 생모 何태후가 환관 숙청에 반대했다. 하진은 何태후에게 압력을 가하기 위해 董卓(동탁)&#8228 丁原(정원) 등 지방군벌을 洛陽으로 불러올리는 바보짓을 했다.
&nbsp하진은 거사도 하기 전에 모의 내용이 밖으로 새어나가 환관들에게&nbsp 암살당했다. 원소는 즉각 궁궐로 난입하여 환관 2000여 명을 도륙했다. 일부 환관이 少帝와 그의 이복동생 劉協(유협)을 납치하여 낙양성을 빠져나갔다.
&nbsp少帝 일행은 낙양 근교에서 동탁에 의해 구출되어 還宮(환궁)했다. 동탁은 곧 少帝를 황제의 자질이 없다고 폐위하고, 少帝의 이복동생인 유협(王美人의 아들)을 즉위시켰다. 이어 何태후와 少帝를 살해했다. 동탁의 공포통치가 시작되었다.
&nbsp동탁은 엘리트 관료였던 원소와 조조를 포섭하려 했지만, 둘은 낙양을 탈출하여 각각 그들의 근거지로 돌아갔다. 조조는 河南의 陳留(진류)에서 거병했다. 그의 막하에 조조의 4촌 동생들인 曹仁&#8231曹洪&#8231曹純&#8231夏侯惇(하후돈)&#8231夏侯淵(하후연), 그리고 사회적 신분이 낮았지만 용맹한 樂進(낙진)&#8231李典(이전) 등들이 그의 막하로 달려왔다. 조조는 누구보다 먼저 전국의 유력자들을 향해 檄文(격문)을 날렸다.
&nbsp&lt曹操 등은 삼가 大義로써 천하에 告한다. 동탁은 하늘을 속이고 땅을 모욕하고 임금을 弑害(시해)하여 나라를 망치고 있다. …지금 천자의 密詔(밀조)를 받들어 의병을 크게 모집하여 群凶(군흉)을 討滅(토멸)하려 한다. 원컨대 仁義의 師(사:군대)를 움직여 忠烈의 盟陣(맹진)에 會同, 위로는 왕실을 받들고, 아래로는 黎民(여민)을 구제하라….&g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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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nbsp물론 ‘천자의 密詔(밀조:비밀리에 내린 조서)는 가짜였다. 그러나 동탁의 폭정에 반감을 가진 17명의 刺史(자사:지방관리)&#8228 太守 등이 反동탁 연합전선에 가담했다.&nbsp&nbsp &lt계속&g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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