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曹操가 袁紹의 배후를 치다!

鄭淳台   |   2010-01-07 | hit 6506

<前哨戰 &#8212 白馬의 싸움>

曹操(조조)와 袁紹(원소)는 黃河를 사이에 두고 中原의 패권을 다투었다. 中原이라면 당시 중국의 가장 先進 지역이었던 황하 中流의 大平原을 말한다. 당시만 해도 長江 이남은 아직 개발이 되지 않아 中原에 비해 인구와 耕地(경지)가 훨씬 적었다.
서기 200년 2월, 원소가 먼저 움직였다. 보병 10만과 기병 1만으로 이뤄진 대군을 거느리고 그의 본거지 &#37172(업: 지금 河北省 臨&#28467縣<임장현> 西南)에서 남진해, 黎陽(여양: 지금의 河南省 浚縣의 동쪽)에 본영을 설치했다. 이에 조조는 2만의 정예를 이끌고 북상해 河南省의 요충 官渡(관도·지금의 中牟縣<중모현>)에 본진을 두고 원소 軍을 迎擊(영격)할 태세를 갖추었다.



원소는 기선을 制하기 위해 대장 顔良(안량)에게 황하를 건너 조조의 전진기지 白馬城(백마성: 지금의 하남성 滑縣<활현> 동쪽)을 공격하도록 명했다. 4월, 3000명의 수비병을 거느린 東郡태수는 조조에게 화급하게 구원을 요청했다.
이때 조조 軍은 연진까지 북상해 延津에서 황하를 도하하여 원소 軍의 측면을 찌를 듯한 機動(기동)을 구사했다. 이는 黎陽(여양)으로 南下한 원소의 병력을 둘로 분리시키려는 작전이었다.
과연, 원소가 조조의 계략에 걸려들었다. 원소가 大軍을 몰아 延津 방면으로 西南進(서남진)하는 사이에 조조군은 급거 東北進(동북진)하여 백마성을 에워싸고 있던 顔良의 선봉부대를 강습했다. 이때 조조 휘하의 關羽(관우)가 적의 대장 안량의 목을 베고 백마성의 포위를 풀었다.
백마성을 구원한 조조 軍은 다시 西南 방향으로 내려와 연진 근교의 언덕 南阪(남판)에 요새를 쌓고, 원소의 대공세에 대비했다. 白馬의 싸움 3개월 후(200년 7월) 원소군의 대장 文醜(문추)가 객장 劉備(유비)와 함께 기병 5000-6000기를 거느리고 황하를 도하, 남판으로 육박했다.
이때 문추가 조조의 미끼작전에 걸려들었다. 조조는 白馬城로부터 후송해 온 군수물자를 전부 노상에 흩어 적의 대오를 무너뜨렸던 것이다. 과연 문추의 기병은 땅에 버려진 군수물자를 발견하고 말에서 내려 앞을 다투어 전리품 습득에 골몰했다.
이 기회를 노려 조조가 반격을 명했다. 조조의 정예 기병이 북소리와 나팔소리를 신호로 순식간에 언덕 위에서 아래로 돌진해 원소의 선봉부대를 무참하게 유린했다. 문추는 목이 달아났고, 유비는 재빨리 도주했다.
三國志演義(이하 演義라 표기)에서는 문추도 관우가 벤 것으로 되어 있지만, 正史 <삼국지>에는 문추가 난군 중에 전사한 것으로 되어 있다.


<관우를 떠나보내는 아량 보여>

이로써 조조는 전초전에서 승리했다. 그러나 白馬·延津의 싸움은 국지전이었다. 압도적인 병력을 보유한 원소 軍의 主力은 건재했다. 조조로서도 계속 공세를 취할 형편이 아니었다.
조조군은 서전의 승리 후 미련 없이 官渡로 남하했다. 이와 같은 조조의 결정은 탁월한 선택이었다. 적진 깊숙이 들어가면, 兵站線(병참선)이 길어질 수밖에 없다. 병참선이 늘어지면 전쟁비용도 늘어나게 마련이다. 옛 전쟁터인 官渡·白馬·延津은 지금은 黃河의 물줄기가 바뀌어 황하 北岸에 위치하고 있지만, 당시엔 모두 황하 南岸에 위치했다. 황하가 조조와 원소의 세력권을 가르는 경계였다.
7월, 원소의 주력군은 연진에서 남하해 관도의 서쪽 15km 지점인 陽武(양무)에 진출한 후본영을 설치했다. 원소는 군영 안에 높은 누대를 세우고 土山을 쌓아 높은 곳에서 조조 군영을 내려다보고 화살을 난사했다. 이에 조조군은 發石車(발석거)를 만들어 큰 돌을 포탄처럼 원소 군영으로 발사하면서 대항했다. 원소의 공병대는 땅굴을 파서 관도성을 함락시키려 했다. 조조 軍은 참호를 파서 땅굴을 파괴했다.
양군간의 공방전이 벌어지고 있는 가운데 일찍이 조조에게 투항한 바 있었던 黃巾의 잔당인 劉&#36767(유벽)이 汝南(여남)에서 원소 진영에 투항하여 조조의 후방을 위협했다. 이때 유비가 원소에게 유벽을 돕고 劉表(유표)와의 연합이 필요하다고 건의했다. 유표와 유비는 모두 劉씨 황실의 후예로 자처했던 만큼 원소·유표 연합의 주선에는 유비가 적임자라고 할 수 있다.
원소는 유비에게 원래 그 휘하에 있던 병사를 거느리고 여남으로 내려가 유벽을 지원하면서 형주의 유표와 교섭하도록 했다. 원소로서는 유비를 파견해 조조의 본거지 許都(허도) 후방에 제2전선을 형성하려 했던 것이다.



이때 관우는 조조가 내린 하사품을 보관한 창고를 봉인해 놓고 한 통의 편지만 남긴 채 조조 진영을 빠져 나와 옛 주인 유비를 찾아 나섰다. 조조는 主君을 잊지 않는 관우를 의롭게 생각하여 추격대를 파견하지 않는 襟度(금도)를 보였다.
관도에서 양군의 주력이 대치한 지 3개월여. 아직 무승부를 기록하여 戰局(전국)은 움직이지 않았다. 차츰 조조군의 군량이 바닥을 보이면서 병사들 사이에 厭戰(염전:전쟁에 싫증을 냄) 분위기가 만연했다. 좀처럼 기세가 죽지 않는 조조도 이때만은 한풀 꺾여 본거지 許를 지키고 있던 군사 荀彧(순욱)에게 편지를 보내 철군을 의론할 정도였다. 순욱은 다음 요지의 답장을 띠웠다.
“지금의 형세는 曹公(조공)께서 지극히 약한 상황에서 강한 상대와 맞붙은 것입니다. 그러나, 만일 싸워서 이기지 못한다면 깨끗이 멸망당할 것이고, 더 이상 제3의 가능성은 없습니다. (중략) 원소는 평범한 호걸에 불과하지만, 曹公께선 비범한 용기와 밝은 지혜를 가지고 있으며, 더욱이 천자를 받들어 不忠한 신하를 호령하고 있지 않습니까. 성공을 거두지 못할 이유가 어디에 있단 말입니까?”


<일생 일대의 승부수 - 식량창고 기습>

조조의 버티기 작전은 처절했다. 이런 위기의 시기에 원소의 모사 許攸(허유)가 자신의 책략을 무시한 데 대해 불만을 품고 조조에게 투항해 왔다. 南朝 宋 때의 사서 <漢晋春秋>(한진춘추)에 따르면 許攸는 양군의 대치가 길어지자, 원소에게 일부의 병사만 남겨 조조를 지키게 하고, 지름길로 許都로 달려가 天子를 납치한다면 금세 큰 성공을 거두게 될 것이라고 권했다. 그러나 원소는 허유의 건의를 묵살했다.
정사 <삼국지>는 허유의 배반 이유로 다음 두 가지를 거론하고 있다. 즉, 武帝紀(무제기)에는 “허유가 재물에 욕심이 많은데, 원소가 만족시켜 주지 못하자 도망했다”고 했고, <삼국지> 순욱傳에는 “審配(심배: 원소의 모사)가 허유의 가족을 법률 위반으로 체포하자 허유가 화가 나서 배반했다”고 기록되어 있다. 그야 어떻든 허유의 정보는 특급정보였다.
“원소군의 병량은 烏巢(오소)에 집적되어 있지만, 방비는 매우 허술하다”
허유의 제보를 받은 조조는 기습이란 일생일대의 승부수를 띄웠다. 기습부대는 조조 스스로가 지휘하는 정병 5000명. 先陣에 張遼(장요)·許楮(허저), 後陣에는 徐晃(서황)·于禁(우금), 중간에 曹操라고 하는 편성이었다. 본영의 방비에도 만전을 기해 중앙에 曹洪(조홍)·荀攸(순유)·賈&#35425(가후), 좌익에 夏侯惇(하후돈)·夏侯淵(하후연), 우익에 曹仁(조인)·李典(이전)을 배치했다.
10월23일, 일몰 후 기습부대는 은밀하게 행동을 개시했다. 조조 자신이 앞장선 기습부대는 야간행군 간에 소리가 나지 않도록 병사와 말의 입에 하무(枚: 防音用 막대기)를 물렸다. 그리고 적을 속이기 위해 원소軍의 깃발을 들었다. 이 위장공작이 성공했다. 적중 깊숙이 침입한 조조군은 원소軍의 저항을 받지 않고 烏巢(오소)에 접근했다. 병량 집적소를 포위하자마자 곳곳에 불을 놓고 함성을 지르며 돌격했다.
사방은 대번에 불바다가 되었다. 잠을 자다 습격을 당한 淳于瓊(순우경)의 수비대는 무기를 잡지도 못한 채 대혼란에 빠졌다. 화염과 검은 연기가 솟아오르는 가운데 수비대는 뿔뿔이 흩어져 도주했다. 오소의 兵糧 창고는 순식간에 잿더미로 변했다.
상상하지도 못한 급보에 접한 원소는 烏巢에 경무장의 구원군을 보내는 한편 張&#37059(장합)과 高覽(고람)에게 중무장의 대병을 주어 조조 본영을 공격하라고 명했다. 조조의 官渡의 귀환 전에 적의 주력을 일거에 섬멸하겠다는 복안이었다.
그러나 烏巢로 향한 구원부대는 원소군 깃발로 위장한 기습부대에 교란되어 궤멸했다. 官渡의 조조 본영에 대한 공격부대도 미리 대비하고 있던 수비군에 반격을 받았고, 장합과 고람은 조조군에 투항했다. 이에 이르자 원소군은 총 붕괴되어 시체가 산을 이루고 피는 강물처럼 흘렀다. <魏書>는 원소군의 전사자가 8만 명에 달했다고 전하고 있다. 장합의 항복이 순식간에 형세를 역전시켜 놓은 것이었다.
장합은 용맹과 지모를 겸비한 원소 군의 대장이었다. 그가 배신한 까닭에 대해 <삼국지> 장합 傳에는 다음과 같이 기록되어 있다. 조조가 기습하자 장합은 즉각 烏巢에 증원군을 보낼 것을 주장했다. 그러나 원소의 모사 郭圖(곽도)가 반대했다.
“장합의 방법은 옳지 않습니다. 지금 우리는 조조의 本營(본영)을 공격해야 합니다. 조조도 그 자신의 본영이 공격받는다는 말을 들으면 반드시 군대를 돌려 관도를 구원할 터이니 오소의 포위도 자연 풀릴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구원하지도 않아도 저절로 해결되는 계책입니다.”
이에 장합이 말했다.
“그것은 절대 불가능합니다. 조조의 본영이 어떻게 잠깐 사이에 함락되겠습니까. 또 오소의 병참부대가 어떻게 조조를 막아낼 수 있겠습니까. 조조의 본영을 함락시키지 못하고, 오소도 지켜내지 못하면, 우리는 포로가 되는 수밖에 없습니다.”
원소는 장합의 말을 듣지 않았다가 패전을 자초했다. 책임 회피를 위해 郭圖는 원소에게 다음과 같이 장합을 모략했다.
“장합은 우리 군사가 패한 것을 고소하게 생각하며, 불손한 말을 내뱉고 있습니다.”
이에 원소가 장합의 죄를 물으려 하자 장합은 고람과 함께 戰車(전차)를 불사르고 조조 진영에 투항했던 것이다.
관도에서 대패한 원소는 연진에서 황하를 건너 북쪽으로 도주했다. 그를 따르는 병력은 800기에 불과했다. 양군의 대결은 용기와 지모를 겸비한 조조의 완승으로 끝났다. 소수가 다수를 격파한 관도대전 이후 조조는 中原의 覇者(패자)가 되었다. 그때 그의 나이 46세였다.


<멸망하는 집안의 悲劇 &#8212 骨肉相爭>

202년 5월, 원소는 분노와 부끄러움에 고뇌하다가 다량의 피를 토하고 病沒(병몰)했다. 조조의 다음 과제는 원소의 잔존세력을 토벌해 숨통을 끊어버리는 것이었다. 생전의 원소는 용모가 출중한 3남 袁尙(원상)을 편애하여 후계자로 삼고 싶었지만, 이를 공표하기도 전에 급사했다. 원소의 휘하 家臣團(가신단)은 양분되었다. 辛評(신평)·郭圖(곽도)는 장자 袁譚(원담)을 지지했고, 審配(심배)·蓬紀(봉기)는 3남 袁尙을 추대했다.
이를 틈타 조조는 원가의 영토인 河北을 침공했다. 이에 袁씨 형제는 일시 骨肉相爭을 멈추었지만, 203년 黎陽의 싸움에서 조조 軍에 패배하여 본거지 冀州로 도주했다. 이때 조조의 모사 郭嘉(곽가)는 다음과 같이 진언했다.
“지금 袁씨 형제를 추격하는 것은 쓸데없는 일입니다. 그냥 놓아 두어도 원담과 원상 사이에는 반드시 암투가 재발해 뿔뿔이 흩어지고 말 것입니다. 이런 시기에 그들을 급히 공격하면 두 사람을 뭉치게 할 따름입니다. 우리가 남쪽 荊州의 劉表를 정벌하려는 체하면서 형제간에 이변이 일어날 것을 기다리는 것이 上策입니다.”
조조는 남하해 짐짓 형주를 공격하려는 자세를 보였다. 조조는 원소의 아들 사이에 벌어지는 후계다툼이 더욱 치열해기를 기다렸다. 과연, 원담과 원상이 기주를 차지하기 위해 싸우기 시작했다. 형제간의 싸움에서 원담이 패해 平原으로 도주했다. 이때 곽가가 말했다.
“곧 원담으로부터 항복의 사자가 와서 구원을 청하겠죠.”
원담의 항복을 받은 조조는 204년 &#37172城(업성)을 공격했다. 원상은 심배를 守將으로 삼아 저항했지만, 조조는 水攻을 가해 업성을 함락시켰다. 업성은 殷代(은대)의 갑골문자가 대량 발굴된 殷墟(은허)와 가깝고, 春秋시대에는 齊(제)의 桓公(환공)이 도읍으로 삼았던 곳이다.
조조는 204년 이곳에 超호화판 누각 銅雀臺(동작대)를 짓고 都城을 건설했는데, 魏文帝 조비가 낙양으로 천도하기까지 曹魏의 수도였으며, 천도 후에는 副都(부도)가 되었다. 그후 後趙(후조)·後燕(후연)·東魏(동위)·北齊(북제)가 잇달아 수도로 삼았다.



원상과 원희(원소의 2남)는 멀리 요서로 도주하여, 당시 기마민족 중 최강이었던 烏丸(오환)의 탑돈 單于(선우)에게 의지했다. 烏丸은 烏桓이라고 표기하기도 한다. 선우는 흉노제국 이래 기마민족제국 군주의 칭호이다.
조조는 이어 南皮(남피)로 도주한 원담을 패사시켰으며(205년), 206년에는 원소의 조카이며 幷州(병주: 지금의 산서성) 자사였던 高幹(고간)을 壺關(호관)의 싸움에서 격파했다. 이로써 袁씨의 세력권을 모두 빼앗았다.


<최정예 기병 烏丸突騎(오환돌기) 획득>

207년 5월, 조조는 袁尙(원상)과 袁熙(원희: 원소의 차남)를 토벌하기 위해 만리장성을 넘어 烏丸(오환)의 세력권인 遼西(요서: 지금의 요녕성)를 침공했다. 7월, 조조는 큰 비를 만난 데다 오환의 저항에 부딪쳐 오도가도 못하는 상황에 처했다. 조조는 오환을 속이기 위해 다음과 같은 방을 게시했다.
“지금은 더운 여름이고, 큰 비가 내려 도로가 통하지 않는다. 이에 가을까지 기다린 후 다시 진군한다.”
이러는 한편으로 조조 軍은 가만히 오환의 柳城(유성: 지금의 요녕성 朝陽)으로 진군한다. 이를 눈치챈 오환은 柳城(유성) 서쪽 200 리에 위치한 白狼山(백랑산)에서 조조 軍을 요격했지만, 조조 軍의 역습으로 패배했다.
2년 전 필자는 한국땅이름학회 회장 이형석 박사(2009년 별세)와 함께 내몽골자치주 赤峰(적봉)에서 遼西(요서) 지역으로 南下하여 朝陽으로 향하던 중에 建昌 못 미치는 지점에서 백랑산에 이르렀다.
조조가 백랑산 기슭에서 오환의 선봉부대를 격파당했음에도 불구하고 탑돈 單于(선우: 기마민족국가의 主權者)는 조조가 감히 조조가 그들의 王庭(왕정)이 설치된 유성까지 急襲(급습)할 것이라고 예상하지는 못했다. 그러나 조조는 백랑산에서 즉각 유성으로 급습하여 탑돈의 목을 베고, 1만여 落(락: 1락은 유목단위인 3-4戶)을 포로로 획득했다.
이때 袁尙&#8228 袁熙 형제는 수천 기를 이끌고 다시 달아나 遼東 태수 公孫康(공손강)에게 의지했다. 조조는 정벌을 계속하려 하면 公孫씨와 袁씨가 연합해 결사항쟁을 할 것이라면서 유성에서 회군했다. 과연, 조조가 예상했던 대로 공손강은 원상&#8228 원희 형제의 목을 베어 조조에게 바쳤다.
또한 조조는 오환 정벌에서 획득한 1만여 落의 포로를 冀州로 옮겨 살게 하였는데, 여기서 징집한 오환 突騎(돌기)는 당시 ‘天下의 정예’로 일컬어졌다. 오환은 鮮卑族(선비족)과 함께 東胡의 후예로서 우리 韓民族도 더불어 大興安嶺(대흥안령) 기슭에 거주했던 親緣性(친연성) 깊은 기마민족이었다. 여기서 後漢 말에 전개된 北方 기마민족의 중국 移住(이주)에 대해 잠시 살펴볼 필요가 있다.
後漢의 북쪽 변경에 있어서 幷州(병주)는 중앙에 위치하고, 그 동쪽은 冀州(기주)이고, 서쪽은 凉州(양주)였다. 이 3州의 군벌들은 모두 기마민족을 招募(초모)하여 군에 편입시켰다. 특히 양주에는 &#27664(저)&#8228 羌(강) 등 티베트系 민족을 다수 거주했다. 후한 말기, 양주&#8228 병주의 胡騎를 이끌고 洛陽에 들어와 정권을 틀어잡고 폭정을 감행하여 後漢의 분열을 초래한 군벌이 董卓이었고, 동탁의 사후에 그 지위를 계승한 것이 조조였다.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