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赤壁大戰 패배로 全중국 통일 야망을 단념

鄭淳台   |   2010-01-08 | hit 6134




<赤壁大戰(적벽대전)의 敗因(패인)>

208년, 조조는 스스로 대군을 이끌고 우선 荊州(형주)의 劉表를 토벌하기 위해 남진했다. 형주 자사 유표는 조조軍의 침공을 앞에 두고 병몰했다. 유표의 후계자 劉宗에게는 원래 형주를 사수하겠다는 담력이 없었다. 조조의 대군이 宛(완), 지금의 南陽市에 육박했던 시점에 형주의 전토를 들어 항복하기로 작정했다.
당시 형주의 治所(치소:관공서가 있던 자리)는 襄陽(양양:지금의 湖北省 襄樊市<양번시>)이었다. 이때 유표의 客將 유비는 한수를 사이에 두고 양양을 마주보는 樊城(번성)에 주둔하고 있었다. 유종은 유비에게 사전통보도 없이 항복했다.
유비는 諸葛亮(제갈량)을 사자로서 급파하여 吳나라 孫權(손권)과 동맹을 맺고 조조에 대항하기로 했다. 양양성에 입성한 조조는 손권에게 항복을 권유하는 서한을 보냈다. 그러나 손권은 조조와의 開戰을 결단했다.
조조의 병력은 80만이라고 號했지만, 실제로는 20만 병력이었다. 한편 吳의 대장 周瑜(주유)가 이끄는 병력은 3만, 여기에 유비의 병력 2만, 도저히 정면대결은 어려운 듯이 보였다.
그해 겨울 10월, 江陵을 출발해 長江을 타고 내려온 조조의 水軍과 동쪽으로부터 長江을 거슬러 올라온 주유의 水軍은 赤壁(적벽) 수역에서 소규모 탐색전을 벌였다. 조조軍은 赤壁 대안 烏林(오림)에 함선을 집결시키고 공격의 기회를 엿보고 있었다.



208년 12월의 어느 날 야반, 長江(장강) 북안의 烏林(오림:지금의 호북성 洪湖市). 때마침 불어오는 동남풍을 등지고 일단의 군선이 曹操(조조)의 水營(수영)을 향해 달려오고 있었다. 吳(오)의 숙장 黃蓋(황개)가 이끄는 10여 척의 蒙衝(몽충)과 鬪艦(투함)이었다.




황개는 이미 조조에게 투항의 密書(밀서)를 보내 놓고 있었다. 뱃머리에는 사전 통보한 대로 ‘先鋒 黃蓋’(선봉 황개)’라 쓰인 깃발이 펄럭였다. 선체는 붉은 천막으로 덮혀 있었다. 그러나 이것은 火攻(화공)을 노린 위장항복이었다. 천막 밑에는 기름을 잔뜩 부은 장작과 마른 풀이 가득 쌓여 있었다.
황개의 부하들은 선상에서 횃불을 들고 조조의 수영을 향해 크게 ‘投降’(투항)을 외쳤다. 조조와 그의 부하들은 방심했다. 조조의 수영에 800m쯤 접근하자 황개는 자기가 타고 온 배에 불을 붙여놓고, 선미에 달고 온 작은 배로 탈출했다. 불덩이가 된 火船(화선)들은 강한 동남풍을 타고 그대로 조조의 水營에 돌입했다.
당시 조조의 대형 樓船(누선)들은 사슬로 서로 묶여 있었다. 火船과 충돌한 조조의 함대는 금세 불바다가 되었다. 불에 타 죽은 병사, 강물에 뛰어들어 익사한 병사가 不知其數(부지기수)였다. 水營의 화재는 바람을 타고 육상 兵營으로 번졌다.



對岸(대안)인 赤壁의 정상에서 조조의 영채가 불타는 모습을 관망하던 吳의 대장 周瑜는 즉각 휘하 全軍에 총공격을 명했다. 吳軍의 정예는 수륙 양면으로 조조 진영을 향해 돌격했다. 혼란에 빠진 조조의 대군은 제대로 싸워보지도 못하고 궤멸했다. 조조 자신도 친위대의 호위를 받으며 死地(사지)를 탈출해 육로로 서쪽 江陵(강릉)을 향해 도주했다. 강릉에는 조조의 4촌 동생들인 曹仁(조인)와 夏候淵(하후연)이 진수하고 있었다. 강릉은 春秋戰國時代(춘추전국시대)의 강국 楚(초)의 도읍이었으며, 이후 長江 중류의 通商港(통상항)으로 번영했던 지금의 湖北省 荊州市(형주시)이다.



역사의 기록을 보면 적벽대전에서 유비軍의 戰功(전공)은 전혀 없었다. 유비軍은 夏口(현재의 호북성의 省都인 武漢市 漢口) 일대에 포진하고 있었다. <연의>에서는 조조가 江陵으로 도주하면서 趙雲(조운)과 張飛(장비)가 이끈 伏兵에게 차례로 요격당하고 華容(화용)에서는 關羽(관우)를 만나 목숨을 구걸하는 장면이 나오지만, 이건 모두 픽션이다.
적벽대전에서 유비軍이 전혀 전공을 세우지 못한 것을 두고 두 가지 가능성이 대두되고 있다. 그 하나는 유비는 조조가 북쪽으로 도주할 것으로 예상해 화용도 방면에 복병을 깔아 놓지 않아 조조를 잡지 못했다는 작전실패론, 또 하나는 戰後 문제에 고려해 일부로 조조의 퇴로를 막지 않았다는 諸葛亮의 計略說(계략설) 등이다.



어떻든 적벽대전에서 조조가 죽으면 천하는 손권과 유비의 대결로 되고, 이럴 경우 流浪軍團(유랑군단)을 이끄는 유비가 절대 불리했다. 吳軍의 맹위를 견제하여 제갈량이 天下三分의 大計(대계)를 실현하려면 조조는 살아 있어야 했다. 적벽대전 후 유비는 蜀(촉:지금의 사천성)을 정벌하여 근거지를 마련했다.
이로부터 본격적인 三國時代로 접어들게 된다. 魏·吳·蜀漢(촉한)의 국력은 6대 2대 1이었다. 魏가 절대 優位를 차지했지만, 吳는 長江이란 자연방벽이 있는데다 水戰이 강했고, 蜀漢은 험한 지형에 의지한 山岳戰(산악전)에 능했다. 大전략가 조조도 ‘南船北馬(남선북마)’의 公式을 극복하지 못했다. 적벽대전 당시 江南의 水土에 익숙치 못한 조조 軍의 진영엔 전염병이 크게 창궐했다고 한다.
적벽대전의 발발 원인의 하나로 조조가 대교&#8231소교 자매를 그의 호화 누각 동작대로 데려와 그의 만년을 즐기기 위해서라는 說이 있다. 적벽대전 당시 대교는 손권의 형 孫策의 미망인이었고, 소교는 손권 휘하의 최고사령관 주유의 부인이었다. 이것은 제갈량이 주유를 격동하기 위해 지어낸 말임은 <연의>에서도 언급하고 있지만, <삼국지>를 소재로 한 영화나 드라마에서는 이를 사실인 것처럼 부각시키도 한다. 그러면 史實(사실)은 어떤가?
대교와 소교는 太尉(태위: 국방부장관)를 지낸 橋玄(교현)의 두 딸이다. 젊은 시절의 조조를 매우 좋게 보고 처자식을 부탁하면서 다음과 같이 말했다.
“천하가 장차 어지러워질 것이니, 當代(당대)의 걸출한 인재가 아니면 구제할 수 없을 것이오. 천하를 편안하게 할 수 있는 사람은 아마 그대일 것이오.”
위의 발언은 정사 <삼국지>에 의하면 현임 태위 교현이 아직 無名의 조조에게 한 말로 되어 있다. 부탁 당시 대교&#8231소교는 어렸을 터이므로 교현이 조조에게 자매를 娶(취)하라는 말을 한 것은 아니었을 것이다. 대교와 소교는 二橋(이교)라 불리며 강동을 대표하는 미인이 되었다. 好色했던 조조였던 만큼 그가 만약 江東을 정복했다면 이교에 대한 ‘연고권’을 내세웠을지 모른다.
<世說新語>에 따르면 조조는 원소의 차남 袁熙(원희)의 처 甄(견)씨가 美貌(미모)라는 정보를 입수하고, 그의 아들 조비가 袁씨의 본거지 &#37172(업)을 점령하러 들어가기 직전에 甄씨를 붙잡아오라고 당부했다. 그러나 조비는 첫눈에 甄씨에게 반해 그의 여자로 삼고 총애했다. 조비가 황제가 되자 그녀는 魏의 初代 황후가 되었다. 조비 다음의 황제는 甄황후의 소생 曹叡(조예: 明帝)이다.


<全중국 통일에 실패>

조조는 적벽대전의 패배로 全중국 통일의 야망을 사실상 단념해야 했다. 이후 中國대륙은618년 隋(수)제국이 등장할 때까지 약 400년간 大분열의 시대가 전개되었다. 그러나 적벽대전 패전 이후에도 中原에서 그의 지위는 흔들리지 않았다. 그 자신도 별로 낙담하지도 않았다. 적벽대전에서 전사한 병력은 거의 형주의 水軍이었고, 그의 정예 騎兵(기병)부대는 그대로 온존했기 때문이다.
213년, 조조는 魏公(위공)의 작위를 받고 魏의 宗廟(종묘)·社稷(사직)을 설치했다. 조조의 딸 셋이 궁중에 들어가 貴人이 되었다. 이듬해에는 獻帝의 황후 伏씨가 폐위되고, 조조의 차녀가 황후가 되었다. 216년, 조조는 魏王에 올랐다. 이후 조조가 간 길은 前漢 말의 王莽(왕망)과 같은 찬탈의 길이었다. 그러나 조조는 황제가 되기 전에 병몰했다. 향년 66세였다. 조조의 장남 조비가 후한을 찬탈하여 魏文帝로 즉위하면서 조조를 魏武帝로 추존했다.
전략가로서 조조는 중국 역사상 最多·最長의 전투와 원정, 최다 전승의 기록보유자인 데다 패전의 쓰라림도 누구보다 많이 체험한 인물이었다. 그는 정치·경제·문화 등 여러 측면에서 거대한 足跡(족적)을 남겼다. 조조의 트레이드 마크인 ‘治世의 能臣(능신)이며 亂世의 奸雄(간웅)’은 오히려 그를 過小評價(과소평가)한 것이었다.
<삼국지>를 읽지 않으면 중국인의 정서를 이해하기 어렵다. 중국인과 대화해보면 그들의 삼국지의 故事(고사)를 자주 인용한다. 다음은 <모택동 자서전>의 인용이다.
<나는 경서를 숙독했지만, 그러한 종류의 책을 좋아하지 않았다. 내가 즐겨 읽는 책은 중국 고대의 傳寄小說(전기소설), 특히 모반에 관한 故事들이었다. 나는 어렸을 때 선생님의 경고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岳飛傳(악비전)> <水滸傳(수호전)> <反唐(반당)> <三國志>와 <西遊記(서유기)> 등의 책을 읽었는데, 선생님은 이런 불경한 책을 혐오했으며, 그런 책을 사람에게 해를 끼친다고 늘 말했다. 나는 이런 책을 읽는 데 학교에서의 시간을 거의 보냈는데, 선생님이 내 앞으로 지나갈 때면 얼른 經書(경서)로 보던 책을 감추었다. 내 학우들도 대부분 마찬가지였다>
毛澤東과 그의 동년배들이 소학교 시절에 읽었던 책들의 목록이다. 위에서 말하는 <三國志>는 <三國志演義>를 말하는 듯하다. 다만 재미가 있는 <연의>를 역사로 인식하는 경향도 강하다.
모택동은 열세 살에 소학교를 마치고 한동안 집에서 농사일을 거들면서도 이런 책을 탐독했고, 중학교 진학을 위해 고향집을 나설 때도 <삼국지연의> <수호전> 등을 중국식 지게에 담아 매고 갔다고 한다. 한국전쟁 때 한국군과 미국군은 <삼국지연의>를 열독한 中共軍과 싸워 고전 끝에 무승부를 기록했다. (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