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百濟의 遷都(천도)와 亡國이 주는 교훈①

鄭淳台   |   2010-02-16 | hit 5281



<溫祚(온조), 북한산에 오른 뒤 서울을 都邑(도읍)으로>

百濟(백제)의 수도라고 하면 흔히 공주나 부여를 연상한다. 그러나 공주(熊津·웅진)는 피난시절 60년간, 부여(泗&#27800·사비)는 패망에 이르는 120년간의 수도였을 뿐이다. 그러나 서울(漢城)은 近肖古王(근초고왕)의 전성시대를 포함한 500년간의 수도였다. 그렇다면 漢城백제 500년은 어떤 나라였던가? <三國史記>에 기록된 백제의 건국과 定都(정도)는 다음과 같이 요약할 수 있다.



백제 시조 溫祚(온조)는 그의 아버지가 고구려 시조 朱蒙(주몽)이다. 주몽이 北扶餘(북부여)로부터 난을 피해 卒本夫餘(졸본부여)에 이르렀더니 卒本王이 아들은 없고, 딸만 셋 있었다. 주몽을 보자 그가 보통사람이 아님을 알고 둘째 딸 召西奴(소서노)로 아내를 삼게 했다. 그 후 卒本王이 죽자 주몽이 뒤를 이어 즉위했다. 나라 이름은 高句麗(고구려), 주몽 자신의 姓은 高씨로 정했다.
주몽과 소서노 사이에 두 아들을 두었는데, 그들이 바로 沸流(비류)와 溫祚 형제이다. 그러나 주몽이 북부여에 있을 때 禮(예)씨와의 사이에 낳은 맏아들 類利(유리:후일의 제2대 琉璃明王)가 아버지를 찾아와서 太子가 되었다. 비류와 온조는 太子에게 용납되지 못할까 염려한 끝에 어머니 소서노를 모시고 烏干(오간)·馬藜(마려) 등 열 명의 신하와 함께 남쪽으로 떠났다. 따르는 백성이 많았다.
압록강 北岸(북안)에 있던 척박한 北國을 탈출하여 예성강·임진강을 건너 漢山(한산:지금의 서울 江北)에 도착, 負兒岳(부아악:지금의 북한산)에 올라서 살 만한 땅을 살폈다. 漢江 남쪽의 땅은 북으로 한강을 끼고 동쪽으로는 높은 산악이 요새처럼 둘러있고, 남쪽으로는 비옥한 들판이 바라보이고, 서쪽으로는 큰 바다에 臨(임)하고 있었다. 온조는 이곳이야말로 도읍으로 정할 곳이라고 판단했다.



그러나 定都(정도) 문제를 놓고 비류와 온조는 견해를 달리했다. 형인 비류는 그 백성들을 나누어 가지고 彌鄒惚(미추홀:지금의 인천)에 가서 살게 되었다. 온조는 河南慰禮城(하남위례성)에 도읍을 정하고 열 명의 신하로써 보좌를 삼고, 나라 이름을 什濟(십제)라 하였다. 이때가 B.C 18년이었다. 온조 자신은 본디 扶餘(부여) 출신이라 해서 성을 扶餘라고 일컬었다.
비류가 이주한 미추홀은 땅이 습하고 물이 짜서 편히 살 수 없었다. 위례에 돌아와 보니 이곳에는 도읍이 정비되고 백성들은 太平하였기에 비류는 부끄러워하다가 죽었다. 비류의 신하들과 백성들은 모두 위례성에 귀속하였다. 海洋세력인 비류系를 통합한 후 나라 이름을 百濟로 고쳤다. <삼국사기>는 수도의 선정이야말로 국가경영의 成敗를 결정짓는 결정적 조건임을 이렇게 實例까지 들어 전하고 있다. 이후 韓民族史는 漢江 유역을 차지하는 세력이 主流(주류)를 형성하게 된다.




<고구려 故國原王(고국원왕)의 목을 쳐 장대 끝에 매단 近肖古王(근초고왕)>

溫祚(온조) 집단은 先進 철기문화, 북방민족의 활발한 기동력, 우세한 騎馬(기마)·善射(선사:활을 잘 쏘는 것)의 능력으로 북방 樂浪(낙랑)·靺鞨(말갈)의 위협을 물리치고 馬韓의 여러 城邑(성읍)국가들을 야금야금 정복했다. 近肖古王(근초고왕:재위 346~375)은 漢城백제 최고의 전성기를 이룩했다. 13代 국왕인 그의 정복활동은 크게 세 방향으로 전개되었다. 그 첫째는 전라도 지역 진출, 둘째는 낙동강 유역 진출, 셋째는 황해도·강원도 진출이었다.
<日本書紀> 神功(신공) 49년 條에 적혀 있는, 전라도 지역에서 전개되었던 왜군의 군사활동은 사실상 백제군의 南進이었다. 백제군은 蘆嶺山脈(노령산맥) 이북의 전라북도와 낙동강 유역의 경상도 서부 일부, 그리고 전라남도 해안지역인 &#24561彌多禮(침미다례:海南)까지 진출했다. 근초고왕은 369년경 馬韓과 帶方(대방:황해도)을 병합했다. 371년에는 大同江 유역에서 고구려군을 무찔러 故國原王을 전사시키고 平壤城을 점령했다. 이때의 전쟁 경과는 이러했다.
369년, 고구려의 故國原王이 보병&#8228기병 2만을 거느리고 남침하여, 지금의 황해도 白川(배천)으로 짐작되는 稚陽(치양)에 진을 치고 민가를 약탈했다. 이에 근초고왕의 태자 近仇首(근구수)가 군대를 이끌고 稚陽으로 北進, 방심하고 있던 고구려 軍에 痛擊(통격:통렬한 공격)을 가해 敵 5000여 명의 머리를 베는 큰 전과를 올렸다. 그로부터 두 달 후, 漢江 남쪽에서 백제군의 대규모 사열이 벌어졌다 黃色(황색) 깃발이 물결처럼 나부끼는 가운데 임석한 近肖古王은 그가 한반도의 최강자임을 유감없이 과시했다.
2년 후인 371년, 고구려군이 보복을 위해 대거 再侵(재침)했다. 이 소식을 들은 근초고왕은 敵 예상 진격로인 浿河(패하:지금의 예성강) 부근에 백제군을 매복시켜 놓았다. 남진한 고구려군은 백제군의 매복공격에 걸려 크게 패하고 쫓겨갔다.
고구려의 남진을 제압한 백제는 이제 북진을 준비했다. 그해 겨울, 近肖古王은 태자 近仇首와 함께 정예병력 3만을 이끌고 平壤城(평양성)으로 북진했다. 故國原王은 평양성에서 백제군을 迎擊(영격:공격하는 적을 나아가 맞서 침)했는데, 이는 당시 평양성이 수도 國內城에 버금가는 국방상의 요충임을 뜻한다.
평양성 전투 중 故國原王은 흐르는 화살에 맞아 전사했다. 그로부터 100여년이 지난 후에도 개로왕은 “그때 故國原王의 머리를 베어 장대에 꽂았다”고 先代의 勝戰史(승전사)를 들먹이기도 했다. 그것은 백제의 자랑거리였고, 고구려의 치욕이었다.



故國原王의 손자인 廣開土王(광개토왕)의 勳績碑文(훈적비문:滿洲 集安 소재 廣開土王陵碑文)은 유독 백제에만 ‘百殘(백잔:倭로 달아나지 않고 남은 백제의 잔당들)’이라는 蔑稱(멸칭:경멸하는 호칭)을 썼다. 이것은 故國原王의 敗死(패사) 이후 백제에 대한 고구려의 격렬한 증오심을 드러낸 것이다.
近肖古王은 東晋에 朝貢(조공)하여 현란한 南朝 문화를 수용하여 백제 문화의 수준을 한 단계 높이고, 이를 諸侯國(제후국)인 倭(왜)에 傳授(전수)했다. 근초고왕이 파견한 阿直崎(아직기)와 王仁(왕인)은 차례로 왜국 太子의 스승이 되어 高等(고등) 학문을 가르쳤다. 그의 아들 近仇首는 백제의 태자 신분으로 倭王에게 ‘일곱 갈래의 기묘한 칼’을 하사했다. 이것이 현재 교토(京都)의 이소노가미 神宮(신궁)에 보존되어 있는 일본 국보 ‘넘버 원’ 七支刀(칠지도)이다.
近肖古王으로서는 복수전을 노리며 칼을 갈고 있던 고구려에 대비한 주변외교가 매우 중요했다. 당시 왜국은 쌀 농사에 적합한 高溫多濕(고온다습)한 기후 풍토로 인해 人口가 급증하고 있었다. 일본과 잘 지내면 유사시의 병력 지원을 기대할 수 있었던 것이다.
그는 內政에도 힘썼다. 박사 高興에게 국사 <百濟書記(백제서기)>를 쓰게 했다. 또한 여러 차례에 걸친 영토 확장으로 王權이 강화되어, 王位계승이 종래의 兄弟상속으로부터 父子相續에 의해 이뤄지게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