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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통령 경호실, 서거 25년 만에 陸英修 피격 사건의 현장 復元·反省·교훈 도출

정순태   |   2010-02-03 | hit 3916

제1탄-誤發

1974년 8월15일 10시23분.

서울 장충동 국립극장 제29회 광복절 기념식장.

朴正熙 대통령 암살을 노리고 행사 현장에 침투한 재일교포 2세 테러리스트 文世光. 그는 오른손으로 왼쪽 옆구리 부분 바지춤을 가만히 더듬었다. 거기에 찔러 둔 권총을 빼기 쉽게 배 밑 쪽으로 옮기려고 했다. 그는 기념식장 입장 직전에 권총의 공이치기를 뒤로 제쳐놓고 있었다. 기회만 포착되면 0.1초라도 빨리 제1탄을 쏘기 위해서였다.

연설대에선 朴대통령이 특유의 금속성 음성으로 경축사를 읽고 있었다. 연설은 『통일은 평화적인 방법으로 이루어져야 한다는 것을--』이란 대목에 이르고 있었다.

그 순간. 文世光의 손가락이 예민한 방아쇠에 잘못 걸렸다. 『퍽』 소리와 함께 총알은 그 자신의 왼쪽 허벅지를 관통했다. 그러나 경축 연설의 마이크 소음 속에서 오발 총성에 즉각 관심을 보였던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대통령의 경축사도 그냥 계속되고 있었다.

무대 옆 커튼 뒤에서 대기 중이던 수행과장 李相烈(이상렬)과 수행계장 朴相範(박상범·뒤에 경호실장, 보훈처장 역임)도 이 소리를 제대로 듣지 못했다.

제1탄의 誤發(오발). 文世光은 당황했지만, 이제는 이판사판이었다. 용수철처럼 자리를 박차고 일어나면서 권총을 뽑아 들었다. 그의 자리는 B좌석群(군) 맨 뒤쪽 열 오른쪽에서 세 번째 좌석인 214석. 옆자리에 착석한 두 사람의 무릎을 스치면서 B좌석群과 C좌석群 사이인 중앙 통로로 뛰쳐나갔다.

거기서 그는 방향을 90도로 홱 돌려 연설대를 향해 정면 돌진을 감행했다. 한 발짝이라도 더 가까운 거리에서 대통령을 쏘려 했다.

그의 허벅지에선 피가 흐르고 있었다. 심장이 멎을 듯한 흥분 그리고 그 나름의 사명감 때문이었을까? 그는 관통상의 충격과 출혈을 느끼지 못했다.

약 4초 후 권총을 빼들고 연단으로 달려가는 文世光을 목격한 관중석에서 본능적으로 소리를 지르기 시작했다. 「우-」하는 소리는 文世光이 연단으로 접근해 가면서 점점 커져가고 있었다.

경호실장 朴鐘圭(박종규)는 제1탄의 오발 4.5초 후의 시점에서 달려오는 文世光을 보았다. 朴鐘圭는 단상의 좌석에서 벌떡 일어났다. 조건반사적 행동이었다.

제1탄 오발 후 1초, 2초, 3초, 4초, 5초, 6초. 그 사이에 文世光은 11.85m를 돌진했다.


제3탄, 生과 死가 결정된 제1의 승부처

연설대의 대통령과는 20.9m의 거리. 文世光은 멈추지 않은 채 朴대통령을 겨냥하여 제2탄을 쏘았다. 그러나 조준 실패였을까? 제2탄은 방탄 연설대의 상단부에 총구멍을 내고 들이박혔다. 대통령의 경축사는 『다시 한번 강조하면서, 우리가 그동안 시종--』이란 대목에 이르고 있었다.

제2탄 발사 후 0.5초. 찰나에 범인은 2.75m를 더 전진했다. 그러니까 제1탄 誤發 후 6.5초 동안 그의 이동거리는 14.6m에 이르렀다. 이제 대통령과 남은 거리는 18.15m. 文世光에겐 숙달된 사격권이었다.

그는 심장의 박동을 가까스로 억누르면서 제3탄의 방아쇠를 끌어당겼다. 그러나 『철컥』. 제3탄--그건 불발탄이었다. 바로 여기가 朴대통령의 生과 死가 결정된 승부처였다.

권총이 불발된 원인은 文世光의 사격방법에 있었던 것으로 추측된다. 그는 일본에서 이 날을 위해 일년여 동안 부지런히 사격연습을 해왔다. 실탄을 구하기 힘들었던 그는 순간적으로 최대발사속도를 유지할 수 있도록 방아쇠를 당길 때 필요한 둘째 손가락의 握力(악력)을 키우는 데 심혈을 기울였다. 둘째 손가락에 작은 아령을 달아 근육을 단련시키기도 했다.

이 날 文世光은 방아쇠 압력이 강한 리볼버 권총의 방아쇠를 1초당 3번이나 당겼다. 전문가가 아니면 이런 速射(속사)는 불가능하다. 그러나 文世光은 리볼버 권총으로 實射(실사)연습을 할 기회가 거의 없었다.

5~6개의 삽탄용 구멍이 있는 「실린더」라 불리는 탄창을 「돌린다(Revolve)」는 뜻에서 붙여진 리볼버 권총은 나름의 특징이 있다. 방아쇠를 한 번 당길 때마다 실린더에 꽂힌 실탄이 총구와 일치되도록 한 발씩 회전한다. 방아쇠가 완전히 뒤로 당겨지는 순간 공이치기가 후퇴-전진을 하면서 실탄의 뇌관을 때려 총탄을 발사한다. 당겼던 방아쇠를 놓아 원위치시켜도 탄피는 실린더에 그대로 남은 채로 있고, 실린더도 돌아가지 않는다. 제2탄을 발사하기 위해 방아쇠를 다시 당기면 실린더가 다음 실탄을 약실로 회전시키면서 공이치기가 뇌관을 때리기 위해 후퇴한다.

회전식 탄창은 그러나 한 번 당긴 방아쇠를 완전히 원위치시키지 않은 상태에서 다시 당기면 공이치기가 작동하지 않은 채 실린더만 회전하는 수가 생긴다. 文世光의 제3탄이 불발되던 0.5초 간의 원인은 이렇게 해서 발생했던 것으로 보인다.

제3탄이 불발만 아니었더라면 文世光의 저격은 성공할 뻔했다. 그때 朴대통령과 文世光 사이의 거리는 18.15m, 文은 두 번 실수는 하지 않았을 것이다. 절체절명의 위기 모면--순간(불발 직후) 연설을 중단한 대통령은 연설대 뒤로 스스로 몸을 낮추기 위해 상체를 숙였다. 그러나 균형을 잃은 朴대통령은 연단 뒤로 넘어졌다. 객석에서는 연단에 가려 朴대통령이 넘어진 줄 몰랐다.

무대 뒤에 섰던 수행과장 이상렬과 수행계장 박상범은 제2탄이 들려오자 본능적으로 무대로 나왔다. 박상범은 『처음 총성은 마이크나 앰프가 잘못되어 나는 소리인 줄 알았다』고 회고했다. 여전히 무대에서 바라본 객석은 눈부신 조명 뒤편의 어둠뿐이었다.

이상렬은 달려나와 넘어진 朴대통령을 일으킨 뒤 방탄 연단 속으로 밀어 넣었다. 이상렬이 보니 대통령의 얼굴은 하얗게 질려 있었다고 한다.

이때쯤 권총을 빼든 경호실장 朴鐘圭는 연단 전면으로 뛰어나와 對敵(대적) 자세를 취했다.

「피스톨 朴」이란 별명이 붙은 그의 동작은 날쌨다. 그러나 그는 총잡이일 따름이지, 임무의 우선순위를 착각한 경호실장이었다. 그의 제1차적 임무는 그 자신의 몸을 던져 대통령과 영부인의 방패가 되는 것이지 저격범을 제압하는 것은 부차적 과제였다.


陸 여사 뒤로 숨어버린 경호원

저격범은 2.75m를 더 다가갔다. 그러나 범인의 시야에선 대통령이 사라졌다. 목표를 상실한 文世光--그는 對敵 자세를 취한 朴鐘圭 실장에겐 눈길도 주지 않았다. 그의 총구가 연설대 오른쪽으로 미세하게 돌아갔다.

그곳 응접탁자엔 대통령 부인 陸英修 여사가 단아한 자세로 앉아 있었다. 壇上(단상)의 인물들 중에 가장 의연했던 모습--그것이 인상적이었다. 生死의 갈림길에서 저처럼 평온한 표정은 어떻게 가능했을까?

18.2m의 거리(대통령 연단과는 15.40m의 거리)에서 文世光은 陸여사를 조준했다. 그리고 격발. 제4탄은 陸여사의 오른쪽 머리에 명중했다. 그 순간 경호원 하나가 陸여사 뒤로 몸을 감추고 있었다. 陸여사의 머리는 뒤로 비스듬히 넘어갔다. 文世光으로선 절반의 성공을 거둔 것이다. 제1탄 誤發 후 7초가 흐른 순간이었다.

文世光이 돌진했던 B좌석군과 C좌석군 사이 통로의 양쪽 가장자리에만 12명의 사복 경찰관이 앉아 있었다. 그들 중 아무도 행동을 취하지 않았다. 얼떨결에 자신들의 임무를 망각했던 것일까?

『얏!』 고함까지 지르며 달려들었던 文世光. 사복 근무 경찰관들과 범인의 사이는 지근거리였다. 범인의 몸을 슬쩍 건드리기만 했더라도 정조준은 불가능했다. 그랬다면 陸英修 여사는 총에 맞지 않았을 것이다.

범인의 조준 사격을 저지시킨 용감한 인물은 의외로 일반 참석자 이대산씨였다. 李씨는 오른발로 文世光의 발을 걸었다. 文世光은 몸의 중심을 잃은 상태에서 제5탄을 발사했다. 제5탄은 연단 뒤편에 게양된 태극기를 뚫어 버렸다. 제1탄 오발 7.5초 후, 범인의 이동 거리가 18.85m에 이르렀던 순간이었다.

이제 남은 실탄은 단 한 발뿐. 세 번째 실탄은 방아쇠를 세 번 계속 당겨 실린더를 회전시켜야 발사가능한 상태였지만 그러나 文世光은 포기하지 않았다. 그는 그 한 발에 최후의 희망을 걸었다. 『가능한 한 접근하여 저격하라』--북한 공작지도원의 지령을 文世光은 기계적으로 수행하고 있었다.

李씨의 발에 걸린 文世光은 쓰러질 듯하면서도 5m쯤 전진했다. 연단 위로 뛰어오를 작정이었다. 그러나 장애물이 그를 막아섰다. 극장 1층 바닥보다 1m쯤 낮은 교향악단 연주석과 칸막이가 버티고 있었다. 그는 흠칫했다. 칸막이만 없었더라도 그는 쓰러지진 않았을 것이다.

그 순간 前列(전열) 근무 경찰관이 일어나려는 그를 덮쳐버렸다. 그는 절망했다. 文世光은 마지막 한 발을 사용해 보지 못하고 제압당했다. 그 위치는 B좌석群 제1열 오른쪽에서 세 번째 좌석 전면과 연주석 칸막이 사이의 공간이었다.


굼뜬 경호 자초한 경호지침

이 날 단상에 있던 청와대 경호원 모두가 돌발 상황에 당황했다. 총소리가 나고 범인이 고함을 지르며 단상 쪽으로 뛰어 나오며 사격을 하는 상황이었는데도 朴 대통령과 陸여사를 몸으로 막으려는 경호원은 없었다.

朴鐘圭 실장이 돌발 사태를 눈치챈 것은 제1탄 오발 후 4.5초가 지난 시점이었다. 이 순간부터라도 단상 주변의 경호원들이 방호에 나섰다면 陸여사의 생존 가능성은 높았다. 단상 주변의 경호원들이 단상으로 뛰어나온 것은 제3탄 발사부터 제5탄 발사 사이의 시점이었다. 그때는 범인이 이미 14.6m~18.8m나 전진 이동했다. 그러니까 제1탄 오발 후 무려 6.5~7.5초가 흐른 시점이었다.

이처럼 壇上 주변 경호원들의 액션이 늦었던 데는 경호원의 「불필요한 노출」을 금지했던 당시 「경호 지침」의 탓도 없지 않았다. 이 날 壇上의 경호원은 朴鐘圭 실장을 포함하여 5명이었다. 그러나 朴 실장을 제외한 나머지 4명(수행 경호원 2명과 선발 경호원 2명)은 노출되지 않게 연단 좌우의 통로 입구에 배치되어 있었다.

이런 상황에서 돌발 사태가 발생하면 근접 경호는 시간상으로나 거리상으로 다소간 어려워지게 마련이다. 그러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陸여사 주변의 한 경호원이 방호에 나서기는커녕, 陸여사의 뒤쪽으로 몸을 숨기고 말았다는 것은 청와대 경호실 사상 최대의 수치스런 일이었다.

보기 좋은 몸매, 잘 생긴 용모, 고단수의 무술 실력은 당시 청와대 경호원의 자격 요건인 양 알려져 왔다. 경호원 제1의 덕목은 그러나 그런 외모가 아니라 자신의 몸을 던져 피경호인의 위험을 막아내는 성실성과 사명감이다.


여고생 합창단원 피격의 진상

그러나 그날의 비극은 여기서 끝나지 않았다. 다음은 사건 현장의 녹음을 통해 재생한 범인 체포 전후의 상황이다.

쪾제1탄 오발 후 17초:『가만 계세요』(경호원이 연단 뒤에 숨은 대통령에게)

쪾19초:『가만히 계세요』(대통령에 대한 경호원의 당부인 듯함)

쪾20초:『잡았니?』(대통령의 물음인 듯함)

쪾21초:『예』(경호원의 답변인 듯함)

쪾22초:『사모님이--』(경호원의 말인 듯함)

쪾23초:『탕』 하는 소리와 함께 어딘가로부터 제6탄이 날아와 합창단석에 있던 여고생 장봉화양(당시 18세)의 머리에 명중했다. 합창단석에서는 여학생들의 비명 소리가 터져나왔다. 장내에 웅성거리는 소리가 커지고 있었다. 누가 제6탄을 발사했는지에 대해서는 아직 공식적으로 밝혀진 바가 없다. 범인은 이미 제압된 뒤였다. 이것은 경호원 쪽에서 잘못 쏜 총탄이었다.

선발 경호요원 김씨는 단상(무대) 커튼 뒤편에서 근무 중이었다. 그는 『탕』 하는 총성과 군중의 웅성거림을 듣고, 장막을 헤치고 무대로 뛰쳐 나왔을 때는 범인이 통로 중간쯤에서 단상을 향해 사격 중이었다. 朴鐘圭 실장의 권총에서 난 두 발 정도 총소리를 듣고 범인을 향해 총을 겨누게 되었다고 한다(필자 注-박종규 실장의 총격은 녹음돼 있지 않음).

김씨의 증언-.

『대통령 쪽으로 이동하여 방호하기에는 어중간한 위치여서 사격 제압을 선택했다. 사격 후 명중되었다는 느낌을 받지 않았으나, 범인이 잠시 후 쓰러져 실탄 피격에 의한 것으로 착각했다(실제는 민간 참석자의 발에 걸려 넘어짐). 정확한 사격이 되지 않아 범인 제압에 실패하고 참석자(필자 注-장봉화양)를 희생시키는 결과를 낳았다는 것이 마음에 한이 된다』

쪾1분37초:장내 소란은 계속되었다. 사회자가 『앉으세요, 일반시민들 앉으세요』라며 장내 정리에 나서던 순간이었다. 『탕』 제7탄의 총성이 들렸다. 제7탄은 극장 내부 천장을 뚫었다. 경호요원의 誤發인가? 소란 진정을 위한 의도적 발사인가? 아직 명확하지 않다.

陸여사가 후송된 후 朴대통령은 보리차 한 모금을 마신 다음, 중단됐던 경축사를 끝까지 낭독했다. 이렇게 朴대통령은 책임과 오기의 인물이었다. 陸여사는 이 날 저녁 7시 서울대학부속병원에서 서거했다.

극장 1층 내부에는 경호실 요원 7명(단상 5명과 무대 뒤편 2명)과 경찰 61명이 배치되어 있었다. 그러나 현장 근무자 사이엔 상황 전파가 이뤄지지 않아 초기 대응은 전무했다. 극장 내부를 제외한 현장 근무자들은 저격 사건 발생 자체도 모르고 있었다. 고함 한 번만 쳤더라도 단상 밑 逆監視(역감시) 수행 근무자가 전기 스위치 조작으로 강한 조명 광선을 내보내 범인의 조준 사격을 원천 봉쇄할 수 있었다.

그 날 극장 내부 좌석 근무를 맡았던 경찰관들도 휴식 없는 잇단 행사 차출로 지쳐 있던 상태였다. 이들(서울 중부서 직원)은 하루 전날(8월14일) 여의도에서 개최된 미국의 유명 목사 빌리 그레이엄의 부흥회에 「행사 병력」으로 동원되었다가, 8월15일 새벽에 이동하여 국립극장 내부에 배치되었다.


비표 없는 文世光, 너무 쉽게 현장 침투

이제는 범행 당일 文世光의 현장 잠입 과정, 그리고 경호실과 경찰의 경호 태세를 되짚어볼 차례다. 범인은 너무 쉽게 범행 현장에 접근했다.

▲8월15일 새벽 2시경:文世光은 조선호텔 1030호 객실의 거울 앞에서 밤 늦게까지 실탄을 장전하지 않은 권총으로 조준-격발 연습을 끝낸 후 잠자리에 들었으나, 이 시각까지 잠을 이루지 못했다.

▲오전 6시경:조선호텔 커피숍에서 그는 커피와 케이크를 먹었다. TV방송 아침 뉴스를 통해 국립극장에서 朴대통령 참석하에 광복절 기념식이 거행된다는 사실을 재확인했다.

이 시각부터 3시간 동안(06:00~ 09:00) 경찰 병력은 국립극장 반경 2km 이내에 있는 남산 및 응봉산에 대한 제2차 산악 수색을 실시했다. 남산과 응봉산에 대한 제1차 수색은 하루 전날 오후 4시간 동안(13:00~17:00) 실시되었다. 이틀에 걸쳐 산악 수색에 동원된 연인원은 1백28명이었다.

▲오전 7시경:文世光은 호텔 프론트에 『국립극장에 갈 것이니 고급 승용차를 준비해 달라. 출발시간은 9시』라는 내용의 전화 통화를 했다. 잠시 후 프론트에 다시 전화를 걸어 『곧 출발할 테니 빨리 승용차를 준비하라』고 재촉했다. 그만큼 그는 초조했다. 이 시각(07:00)부터 경찰은 국립극장 주변 고층 건물 옥상을 봉쇄했다.

▲오전 8시30분경:청와대 경호2과 선발 요원 19명이 국립국장에 도착하여 근무 지점에 각각 배치되었다.

▲오전 8시40분:대형 포드 M-20 승용차(서울 2바 1091호 렌터카)가 조선호텔 정문 앞에 도착했다. 文世光은 실탄 5발이 장전된 38구경 권총을 허리춤에 감춘 채 즉각 승차하여 국립극장을 향해 출발했다. 차내에서 그는 운전사 黃(황)씨에게 일찌감치 차비 1만원을 지불했다. 그리고는 『하차 때 먼저 내려 밖에서 문을 열어 달라』고 부탁했다. 1974년 8월 현재 쌀(혼합미) 60kg의 가격이 7천4백40원으로 1만원이라면 쌀 1가마 값을 웃도는 금액이었다. 요금이라기보다는 VIP 대우를 유도한 뇌물이었다. 차량 이동 중 그는 왼쪽 옆구리에 손을 가만히 넣어 권총의 공이치기를 뒤로 제쳐 놓았다.

▲오전 8시59분경:「승차 입장 카드」가 부착되어 있지 않았는데도 불구하고 文世光이 탄 외제 대형 승용차는 아무런 검문검색도 받지 않고 극립극장 정문을 통과하여 구내로 진입했다. 대형 차량 탑승자에 대해선 예외적으로 대우한 경호 조치였다. 비표 없는 차량에 대해선 일단 정차시켜 탑승자의 초청장과 신분증을 확인해야 했다.

▲정문 근무 경호실 요원은 文이 정문을 통과했을 때 정위치에 배치되어 있지 않았을 가능성이 높다. 왜냐하면 경호2과 직원의 행사장 도착 완료 시각이 9시였기 때문이었다. 정문 주변 경찰 근무자들은 당일 8시7분에 배치되어 있었음에도 범인 탑승 차량을 보지 못했다고 진술했다. 이들은 경호 근무보다 교통 혼잡 방지에 더 신경을 썼던 것 같다.


일본 대사와 만나기로 한 일본인으로 행세

▲오전 9시경:승용차는 곧 경내 분수대를 돌아 국립극장 건물 계단 앞 우측 下車(하차) 지점에 정차했다. 운전기사가 사전에 부탁받은 대로 재빨리 먼저 내려 뒷좌석의 차문을 열어 주자, 文世光은 고위층 행세를 하며 下車했다.

모든 참석자가 통과해야 하는 극장 현관에는 청와대 경호원(선발요원) 3명, 경찰 8명이 3개의 현관문(중문, 남문, 북문)을 열고 근무 중이었다. 중문은 VIP, 남북과 북문은 일반 참석자의 통로였다.

文世光은 운전사의 배웅을 받으며 계단을 비스듬히 올라 남문(좌측 현관문)을 통해 내부 로비로 입장했다. 남문 입구에는 경호실 선발요원 1명, 경찰관 4명, 그리고 행사 안내 요원 3명이 근무했다. 그러나 秘標(비표) 리본을 달지 않은 文世光에 대해 현관 근무자는 아무런 확인 절차를 취하지 않았다.

文世光은 나이가 23세에 불과했지만, 정장에 중절모까지 쓰고 있어 풍채가 그럴 듯해 보였다. 더욱이 일본말을 하는 文世光에 대해 경호 관계자들은 고위층이나 외국인에 약한 습성 때문에 검문할 엄두도 내지 못했다. 겉모습만 보고 알아서 모신 편파적 대우였다. 현장 근무자들은 5개월 전 3·1절 행사 때 외국인에 대한 과도한 경호 조치로 행사 경호 책임자가 문책을 받는 등의 후유증으로 인해 몸을 도사리는 분위기였다(이 점에 대해선 뒤에서 다시 거론할 것이다).

1층 로비 좌측에 입장한 그가 로비 우측편을 바라보니까 거기엔 긴 의자가 놓였고, 그 앞으로 붉은 색 카펫이 깔려 있었다. 대통령을 비롯한 VIP가 지나갈 길목이란 것은 누구나 짐작할 수 있었다. 文世光은 거기서 대기하다가 대통령을 저격하기로 작심했다.

그는 우측 로비로 건너갔다. 그곳 긴 의자에 앉은 그는 담배를 빼 물고 불을 붙였다. 무려 50분 가까이 앉아 있었지만, 비표를 달지 않은 文世光에 대해 누구도 의심하지 않았다. 바로 그 주변에 배치된 근무자는 4명이었다.

▲오전 9시50분경:극장 2층으로 오르는 계단 옆에서 경호원 15명 정도가 권총에 실탄을 장전했다. 이를 목격한 文世光은 가만히 있으면 경호원들의 관심을 끌어 검문을 받을 것으로 판단했다. 그는 담뱃불을 끄고 경호원들에게 먼저 다가가 일본어로 수작을 걸었다. 다음은 그 때의 문답.

『우시로쿠 일본 대사와 스즈키라는 사람을 로비에서 만나기로 했습니다. 아직 오지 않았습니까?』

『그런 건 알 수 없습니다』

『극장 로비는 여기뿐입니까?』

『2층에도 있습니다』

경호원들은 일본말을 잘 알아듣지는 못했다. 그들은 이치에 닿지 않는 말을 하는 文世光의 정체를 의심하지도, 통역을 구해보려 하지도 않았다. 만약 통역이 있었다면 「광복절 기념 행사에 일본 대사가 참석하는 것은 좀 이상하다」고 판단했을 터이다.

한국의 광복절은 일본의 패전일이다. 그러니까 여간 수상쩍지 않는 언동이다. 여기서 불심검문을 받았다면 그의 허리춤에 감춰져 있던 권총쯤은 쉽게 적발되었을 것이다.


경호원의 에스코트까지 받았던 암살범

「일본 대사와의 약속」 운운했던 文世光은 경호원의 안내를 받으며 2층으로 올라갔다. 테러범이 경호원의 에스코트를 받은 셈이다. 2층 로비에도 1층 로비와 똑깥은 긴 의자가 놓여 있었다. 안내 경호원은 『여기서 만나기로 약속한 것이 아니냐?』고 물었다.

그렇게 물을 만도 했다. 주한 외교사절 참석자들의 좌석은 입법부, 사법부, 행정부 참석자들과 함께 국립극장 2층에 배치되어 있었기 때문이다. 文世光은 『일본 대사와 1층 로비에서 만나기로 했다』고 둘러댔다.

文世光은 경호원 안내를 받으며 다시 반대쪽 계단을 통해 1층 로비로 내려왔다. 안내 경호원이 경호실 간부(경호계장)에게 무어라고 말하며 文世光을 인계했다. 경호계장은 文世光에게 『그냥 여기 의자에 앉아 있으면 된다』고 말했다. 文世光은 그 지시대로 의자에 앉았다.

그로부터 4~5분 후. 경호계장은 대통령이 입장하고 있다는 뜻의 몸짓을 하며 文世光의 손을 잡고 바로 옆에 있는 기둥 뒤로 이끌고 가서 세워 두었다. 그 직후 文世光은 대통령 일행이 붉은 카펫을 따라 극장 내부로 들어가는 모습을 얼핏 목격했다. 기둥 뒤에 있었던 文世光은 저격 시도를 하지 못했다.

▲오전 10시10분경:대통령 입장 후 文世光은 약 10분간 1층 로비의 긴 의자에 앉아 있다가 옆에 있던 경호계장에게 일본말로 『안에 들어가서 대통령의 얼굴을 보고 싶습니다』라고 했다. 경호계장의 표정에서 文世光은 『그렇게 해도 좋다』는 듯한 느낌을 받았다. 文世光이 극장 안으로 들어가려 하자, 좌측 문에서 근무하던 경찰관은 『비표가 없다』며 일단 입장을 저지했다.

文世光은 경호계장을 가리키며 『저 사람이 들어가라고 했다』고 말했다. 경찰관은 경호계장에게 무어라 말했다. 경찰 근무자는 경호계장의 무표정한 얼굴을 「괜찮다」는 뜻으로 알고 文世光에게 문을 열어 주었다.

설사 남은 좌석이 있어 내부 입장을 허용했다 하더라도 초청받지 않은 그에 대해 기본적인 검색은 했어야 했다. 또한 신원이 확인된 사람이라고 할지라도 행사 진행에 비교적 영향이 적은 3층에 입장시켜야 했다. 그러나 경찰 근무자는 청와대 경호계장의 뜻에 맹목적으로 추종했다.

더욱이 출입문 근무자는 文世光의 일본어 사용 때문에 언어 소통이 곤란했다. 이것도 그가 적극적으로 文世光의 신원을 확인하려 하지 않았던 까닭 중 하나였다. 이런 근무자세가 결국 범인에게 절호의 기회를 제공했다. 외국인에 대한 사대적 배려와 책임전가가 재앙을 부르고 말았던 것이다.


극장 내부 근무자들의 실책

1층 후미 근무자(白某 순경) 또한 비표 없이 입장한 文世光에 대해 아무 의심을 품지 않았다. 文世光은 白순경의 안내를 받아 공석으로 있던 B좌석군 맨 뒷열 오른쪽으로부터 세 번째 좌석(214석)에 앉았다. 그 좌석은 25년이 지난 지금도 커버의 천과 좌석 번호만 바뀌었을 뿐 옛 모습 그대로다.

文世光은 10여분간 좌석에 앉아 있으면서 연설 중인 朴대통령 그리고 4명의 VIP가 단상에 있음을 거듭 확인했다. 대통령 부인 陸英修 여사, 丁一權(정일권) 국회의장, 閔復基(민복기) 대법원장, 그리고 朴鐘圭 경호실장 등이 눈에 띄었다.

더욱 기막힌 것은 文世光의 좌석 하나 건너 옆 좌석(B-216석)에 앉아 있었던 경찰 근무자(金某 순경)의 근무 자세였다. 金순경은 文世光이 제1탄 오발 직후 총을 들고 그의 무릎 앞을 스쳐 지나가는데도 불구하고 그저 구경만 하고 있었다.

내부 좌석 근무자는 총성 발생시 자리에서 일어나 확인하고, 출입문 근무자는 출입자를 통제하고 제2의 상황에 대비하여 통로를 확보해야 했다. 金순경이 고함 한 번만 쳤더라도 文世光은 제5탄까지 발사하기가 불가능했을 것이다. 『암살범이 경호원인 줄 알았다』는 것이 金순경의 사건 후 변명이었다. 범인과 근접한 근무자는 몸을 날려 體位(체위) 확장으로 VIP의 노출 방향을 차단한 후 對敵 조치로 범인을 제압해야 했다.

위기 상황에서 제일 민첩하게 움직였던 경호원은 그래도 朴鐘圭 실장이었지만, 그는 중대한 실수를 범했다. 무엇보다 앞서 그는 연설대로 달려나와 朴대통령의 머리부터 숙이게 조치했어야 했다. 그런데도 그는 총을 뽑아 사격 자세부터 취하고 말았다.

돌발 사태가 발생하면 경호인의 임무는 對敵보다 피경호인의 대피와 방호가 우선적이다. 그런데도 陸여사 주변의 경호원이 결정적인 순간에 陸여사 뒤로 몸을 숨겼음은 앞에서 지적한 바 있다. 결국 陸여사는 아무런 방호를 받지 못한 채 文世光의 조준 사격에 피격되고 말았던 것이다.

그 날 최대의 실책은 일본인으로 위장한 암살범 文世光의 현장 접근을 너무 쉽게 허용했다는 점이었다. 1974년 8·15 기념 행사에선 외국인에 대한 적극적인 검색 조치가 생략되는 분위기 속에서 치러졌다. 그렇게 된 배경에는 기막힌 사연이 숨어 있다. 약 5개월 전에 陸英修 여사는 주한 외국대사 부인들로부터 청와대 경호실의 「과잉 경호 조치」와 관련하여 강한 항의를 받았다.

1974년 3·1절 기념 행사 때였다. 여성 참석자들은 핸드백을 갖고 행사장에 입장할 수 없었다. 행사장 입구에 임시 물품보관소를 설치하고, 휴대품을 일시 보관시켰던 것이다. 외국 대사 부인들에게까지도 예외없이 손수건 한 장 정도만 들고 입장하도록 했다.

남자 경호 근무자들로선 여성 핸드백을 체크하기가 곤란해서 이런 편법을 사용했겠지만, 외교 의전상 항의를 받을 만한 일이었다. 그때까지만 해도 대통령 경호실에서도 아직 MD(門型 검색기)와 같은 현대적 장비를 운용하지 않았다. 육감 또는 더듬기에 의한 비과학적 검색 방법이 통용되던 시절이었다.

1974년 8월이라면 1972년 「10월 유신」이 선포된 지 1년10개월이 되는 시점이었다. 유신 체제에 대한 국내외의 도전은 갈수록 거세지고 있었다. 특히 1973년 8월8일 「金大中 납치사건」 이후 한국의 대외적 이미지는 더욱 악화되고 있던 상황이었다.

陸여사로선 대사부인회의 항의를 가볍게 처리할 수 없었다. 이건 朴대통령도 신경을 쓸 수밖에 없는 일이었다. 드디어 3·1절 행사 담당 경호과장이 과잉 경호 조치에 책임을 지고 2개월 정직 처분을 받았다. 경호실은 대통령의 心機(심기)에 예민하기 마련이다. 이후 외국인에 대한 경호 조치는 눈에 띄게 느슨해지기 시작했다.

8·15 행사를 하루 앞둔 8월14일 朴鐘圭 실장은 다음과 같은 내용의 지침을 내렸다.

「비표에 의한 철저한 출입 통제를 실시하되, 내빈들에게 불쾌감을 주지 않도록 친절성을 결하지 말도록 유의할 것」

국립극장 8·15 행사 책임자인 金某 경호2과장은 하루 전날인 8월14일 경호실 요원 도착 전이라도 비표 없는 차량을 입장시키라고 경찰에 지시해 놓고 있었다. 심지어는 택시도 행사 시작 5분 전까지라면 입장시켜도 좋다고 당일 아침 8시에 재지시했다.


그날 경호실은 몹시 어수선했다

그날 朴대통령 내외는 오전 9시45분 청와대를 출발하여 광복절 기념식, 서울 지하철 및 수도권 전철의 개통식(청량리역-종로5가역-구로역-안양역)에 참석했다가 오후 1시에 청와대로 돌아올 예정이었다. 저녁 6시에는 경복궁 경회루에서 대통령 임석하에 광복절 경축연까지 베풀어지기로 되어 있었다.

그러니까 그날은 대통령의 바깥 행사가 겹친 날이었다. 당시 청와대 출입 기자나 경호실 관계자들은 『그날 경호실 분위기가 뭔지 모르게 몹시 어수선했다』고 증언한다. 사건 당일 경호실 경호처 경호1과는 지하철과 전철 개통식, 경호2과는 광복절 기념식, 경호3과는 본관(청와대) 당직 근무를 맡았다.

당시 경호실 경호처 산하엔 5개 경호과가 있었는데, 3개 경호과는 대기(선발 임무), 본관 근무, 휴무의 순서로 운영되었다. 나머지 2개 과는 경호 행정 업무, 제반 물품 안전조치, 기동 경호, 가족 경호 등을 분담했다.

이 날 경호2과 직원들은 규정대로 휴무에 들어가지 못하고, 광복절 행사의 先發(선발) 업무에 동원되었다. 경호2과 1係(계) 요원은 8시30분, 2係 요원은 9시에 각각 국립극장에 도착했다.

본관(청와대) 근무 교대 시간이 원래 오전 9시였으니까, 경호2과는 경호3과와의 본관 근무 인수인계 시간을 1시간 정도 앞당길 만큼 서둘렀다는 얘기다. 그럼에도 선발 경호 업무를 제대로 수행하기엔 턱없이 늦은 현장 도착이었다.

경호2과 요원들은 전날의 본관 근무 때문에 D -1일(행사 하루 전날) 현장 활동도 생략했다. 현장 사정에 어두워서는 동원된 경찰 병력을 지휘하기도 어렵고, 협동 작전에 차질을 빚게 마련이다. 경호실의 8·15 행사 병력 운용은 다음과 같았다.

경호2과 선발 요원 19명은 정문 및 출입 요소, VIP 動線(동선) 등 내부 취약 지역에 배치되었다. 수행 경호원(15명)은 단상에 3명, 승하차 지점에 2명 등 VIP 근접 지점에 배치되었고, 나머지 10명은 차량 등 행사장 주변에 대기토록 했다.

경호 안전 조치 및 정보 수집을 위해서는 2명의 정보보안과 요원, 내외곽 검측 및 통신망의 지원을 위해서는 6명의 요원이 근무했다. 내곽 취약 요소에는 61헌병중대 8명이 배치되었다.

그러니까 국립극장 현장에 동원된 청와대 경호실 병력은 모두 50명이었다. 그때의 근무자인 전직 경호원 金모씨는 다음과 같이 증언한 바 있었다.

『경호는 지휘가 일원화되고 상하 근무자의 신뢰 관계가 이뤄져 있어야 한다. 그러나 당시 경호원의 인적 구성은 공안직, 별정직, 軍 파견자 등 신분과 특성이 달랐다. 이질적 집단이 동일한 목적을 달성하기 위해 함께 일한다는 것은 조직 운영상 문제점이 많을 수밖에 없었다. 행사 때 간부는 자신의 별정직이라는 신분 때문에 지위가 높을수록 윗사람의 눈치나 보고, 윗사람의 지적이 두려워 행사장 이면에만 근무자를 배치하는 단계에 이르게 되었다』


너무 늦게 배치된 경호병력

경찰은 국립극장을 중심으로 반경 2km 이내의 남산과 응봉산 일원에 대해 병력 1백28명을 동원하여 14일 오후와 15일 아침 2차에 걸쳐 산악 수색을 실시했다. 또 식장 내곽 경비는 행사 개시 2시간 전부터 병력을 배치했고, 진입로 주변 고층 건물 옥상 등 취약 지역을 장악했다.

경찰은 국립극장 내부 좌석에 88명(1층 61명, 3층 27명)의 사복 근무자를 배치하는 등 내부 감시 업무에 2백30명을 투입했다. 사복 예비대 21명은 행사장 바로 옆쪽 소극장에서, 정복 예비대 21명은 인근 국토통일원 지하실에서 각각 대기했다. 이밖에 내곽 교통 근무 및 취약지에 1백51명, 연도 근무를 포함한 외곽에 1백65명을 배치했다. 8·15 기념 행사에 동원된 경찰관은 총 5백46명에 달했다.

그날 서울시 행사요원은 아침 7시40분부터 입장했고, 범인 文世光은 9시 직전에 행사장에 도착하여 움직이기 시작했다. 당시 MD(門型 검색기)를 운용하지 않던 시대여서 비표에 의한 안전 조치를 주로 했는데, 행사 참석자나 종사자보다 늦게 경호원이 출동했다는 것은 경호 기획상 최대의 실패 사례로 지적되고 있다.

기념식 시작 시간이 10시인데, 9시에 경호실 선발 요원들이 행사장에 도착 완료하여 1시간 만에 행사장 주변을 답사하고, 자기 근무지에 위치하여 경호 조치를 취했다는 것은 상식 밖의 일이었다. 당시 경찰은 7시50분에 병력 배치를 완료하도록 되어 있었다. 그 결과 경호실은 경찰에 대해 정확한 지시를 하거나 상호 업무 협조 관계를 이루기 어려웠다.

경호2과 선발 요원 19명의 배치에서도 숱한 운용상의 문제점을 노출했다. 다음은 청와대 경호실 자체에서 지적한 자기 반성의 주요 내용이다.

1)경호실 근무자 중 1층 내부 좌석 근무자를 1명도 배치하지 않았다. 유사시 내부 근무 경찰 간부를 지휘하여 경호실-경찰 협조체제를 이룰 수 없었다.

2)先發 요원 19명 중 짧은 VIP 이동로에 7명, 휴게실에 3명을 집중 배치했다. 이는 경호보다는 儀典(의전) 위주로 병력을 운용했기 때문이다.

3)고정 근무로 인해 경호 기능이 저하되었다. 주요 포인트를 제외한 나머지 근무는 1, 2차로 임무를 구분해서 운용해야 효율성을 올릴 수 있다. 예컨대 대통령 부처의 입장 후에는 로비에 2명만 남기고 다른 취약 지점으로 배치한다거나, 3명이 배치된 무대 뒤편 휴게실엔 1차로 1명만 배치하고 2명은 내부 좌석의 근무자로 돌려야 했다.

4)경호 CP(지휘소)를 설치하지 않았다. 전체 상황을 접수, 전파, 처리하고 지휘체계를 단일화하고 유관기관과의 협조체제를 이루기 어려웠다.

文世光 사건은 중앙정보부 오사카 分室(분실), 오사카 주재 한국총영사관, 김포공항 세관, 外事(외사) 경찰 등 여러 국가 기관 가운데 어느 한 곳만의 기능이라도 제대로 작동했다면 원천 봉쇄될 수 있었다. 그것은 한국 정부 기관의 총체적 부실을 드러낸 보기였다. 범인이 「커다랗게 뚫린 구멍」을 통해 입국하는 과정부터 추적해 볼 필요가 있다.

▲1972년 9월5일:조총련 오사카부(大阪府) 이쿠노구(生野區) 西지부 정치부장이며 對南공작 지도원 金浩龍(김호룡)이 文世光의 집을 방문했다. 反韓(반한)단체 「한국청년동맹」 감사였던 文世光은 金浩龍으로부터 『7·4 남북공동성명 지지 청년 학생 공동대회』의 성공적 개최에 대한 찬사를 듣고 고무되었다. 둘은 의기투합하여 『앞으로 자주 만나자』는 약속을 주고 받았다.

▲1972년 10월 17일:한국에서는 10월 유신이 선포되었다. 이후 조총련을 비롯한 일본의 반한 세력들은 朴正熙 정권의 타도를 위한 각종 집회와 시위 활동을 더욱 적극화했다.

▲1973년 9월 중순:金浩龍은 다시 文世光의 집을 방문했다. 文世光은 김호룡으로부터 「사회주의 제도」 「인민민주주의 혁명노선」 「김일성 주체사상」 등 북한과 조총련에서 발행한 각종 선전물과 함께 학습 교양을 받았다. 며칠 후 文世光은 그의 집에서 金浩龍을 만나 朴대통령 암살을 처음 모의했다.

▲1973년 10월 하순:김호룡-文世光은 역시 文世光의 집에서 만나 『1974년 3·1절 기념식장에서 권총으로 朴대통령을 암살한다』는 실행 계획을 세웠다. 文世光은 해외여행 체험 및 권총 구입을 위해 일본여인 요시이 미키코(당시 23세)와 부부 로 위장하여 홍콩에 다녀오겠다고 金浩龍에게 제의하여 승낙을 받았다. 요시이 유키오(吉田行雄·당시 24세)란 일본 남자의 아내인 미키코는 文世光의 고교 시절 친구로서 당시 연인 관계였다.

▲1973년 10월 하순:오사카府 천사당역 부근 에코호텔 지하 찻집(喫茶店)에서 요시이 미키코와 만나 처음으로 『한국에서 공산혁명을 성공시키려면 朴대통령을 제거하는 방법밖에 없어 암살하기로 결심했다』고 털어놓았다. 미키코는 동반 해외여행 제의를 승낙했다.

▲1973년 11월11일:文世光은 그의 집 앞에서 金浩龍으로부터 권총 구입 대금, 여비 등의 명목으로 일본 돈 50만 엔을 제공받았다.

▲1973년 11월19일:文世光은 요시이 유키오 명의의 위장 여권으로 미키코와 부부로 위장하여 홍콩에 도착하여 범행에 사용할 권총을 구입하려 했으나 실패했다. 11월22일 오전 10시 둘은 여객기 편으로 일본으로 돌아왔다.

▲1974년 2월 초순: 文世光은 그의 집에서 金浩龍으로부터 『朴대통령 암살은 제29회 광복절 기념식장에서 결행하도록 변경하되 이 계획에만 전념하라』는 지시를 받았다. 또한 도쿄(東京都 梅田 4-33) 소재 조총련계 운영의 아카후도 병원에 1개월간 입원하라는 지령도 받았다.


김포 공항 검색대 무사 통과

▲1974년 5월3일:金浩龍은 文世光에게 전화로 『만경봉호에 승선, 북조선에서 파견한 공작지도원과 만나라』고 지시했다. 당시 만경봉호는 북한 함흥-일본 니가타(新瀉)와 오사카(大坂) 간을 운항하던 5천t급 공작선인데, 화물선으로 위장하고 있었다.

▲1974년 5월4일:文世光은 오사카港 에 정박 중인 만경호에 승선하여 공작지도원(47세)에게서 세뇌교육을 받았다. 성명 미상의 공작지도원은 『남조선 공산혁명을 완수하기 위해서는 朴正熙를 암살하는 길밖에 없다. 이 과업을 끈기 있게 추진하기 바란다』고 촉구했다. 文世光은 『김일성 수령님을 위해 목숨과 젊음을 다 바쳐 혁명과업을 완수하겠다』고 맹세했다.

▲1974년 7월2일:요시이 유키오의 妻(처) 요시이 미키코로부터 요시이 유키오 名義(명의)의 여권 신청 관계 서류를 받아낸 文世光은 여권 발급에 필요한 절차를 밟기 시작했다.

▲1974년 7월18일:文世光은 범행용 무기 획득을 목적으로 오사카 南西高津(남서고진) 파출소 출입문을 파이프렌치 등으로 파괴, 내부로 침입하여 숙직실에 있던 권총 2정, 실탄 10발을 훔쳤다. 훔친 권총 2정은 美製(미제) 「스미스 앤드 웨슨(S&W) 38구경 리볼버 칩 스페셜(5연발·총기번호 402508)」 한 정과 일제(日製) 「뉴 남부 38구경 리볼버(5연발)」 한 정. 文世光이 다소간의 위험을 무릅쓰고 일본 경찰 보유 권총을 절취한 것은 북한의 개입 사실을 은폐하려 했기 때문으로 보인다. 범행 후 어차피 현장에 남게 될 권총으로 인해 한-일 간에 분쟁이 촉발할 것으로 판단한 것 같다.

▲1974년 7월25일:文世光은 김호룡으로부터 범행 자금 80만엔을 제공받았다.

▲1974년 7월27일:그의 집을 방문한 김호룡에게 『8월6일 한국에 가겠다』고 보고했다.

▲1974년 8월6일:S&W 1정과 실탄 5발을 일제 트랜지스터 라디오 속에 감춰 휴대하고 대한항공(KAL) 여객기 편으로 오사카 공항을 출발하여 오후 1시경 김포공항에 도착했다. 김포 세관의 16번 검색대에서 X레이기를 통과했지만, 아무런 제지도 받지 않았다.

이어 서울 중구 소재 조선호텔 객실 1030호에 요시이 유키오(吉井行雄) 명의로 체크인 했다. 그는 범행 당일 아침까지 1030호 객실에 투숙하면서 광복절 기념 식장을 탐문하는 등 범행 예비 활동에 들어갔다.

▲1974년 8월14일:이날 석간신문과 TV방송의 예고 기사를 통해 8월15일 오전 10시 장충동 국립극장에서 朴대통령 참석 하에 광복절 기념식이 거행된다는 사실을 확인하고, 택시 편과 도보로 국립극장 주변을 답사했다.


라디오 속에 숨긴 권총

文世光은 북한 공작선 만경봉호에 승선하여 암살 지령을 받았으며, 조총련계 아카후도 병원에 입원하여 비밀 아지트에서 사격 훈련을 받았다.

더욱이 文世光은 反韓(반한)단체의 간부로서 자기 집 대문과 방안에까지 反韓 포스터를 붙여 두고 있었던 「요주의 인물」이었다. 그런데도 중앙정보부 오사카 지부는 文世光의 인적사항과 동향에 관해 전혀 무관심했다.

文世光은 1974년 7월 요시이 유키오(吉井行雄)라는 이름으로 한국 입국을 위한 비자를 발급받는 데 성공했다. 만약 오사카 총영사관에서 조총련계 핵심 인물과 反韓단체 주요 인물의 사진만이라도 비치하고 영사 업무를 했더라면 文世光의 범행 기도를 사전에 무력화시켰을 것이다.

김포공항의 세관 검색도 허술했다. 文世光은 X레이 검색기를 통과했는데도 트랜지스터 라디오 속에 감춰 온 권총과 실탄이 적발되지 않았다. 당시 휴대품 검색원(16번 검색대)은 『트랜지스터 라디오는 면세 조치하게 되어 있어 별다른 검색 없이 통관시켰다』고 진술했다. 만약 세관 직원이 라디오를 한 번 들어만 보았더라도 무거운 중량 때문에 금세 이상 상태를 확인할 수 있었다.

범인은 오사카 산트라벨 여행사의 예약으로 조선호텔 1030호실에 10일 동안 장기 체류했다. 조선호텔은 특급호텔로서 경찰 외사과 직원이 상주하면서 반한 인물 등의 동향을 체크하도록 되어 있었지만, 文世光의 행각은 전혀 주목받지 않았다.

범인의 여권상의 국적은 일본, 직업은 회사원이었다. 범행을 앞둔 그는 초조와 불안을 해소하기 위해 서울 유흥가와 청평 유원지 등지를 배회하며 음주와 엽색 행각, 그리고 관광으로 시간을 보냈다.

文世光 사건은 숱한 경호의 문제점과 개선 방향을 제시했다. 사건 직후 청와대 경호실이 확대 개편되고, 경호-경비 규정이 강화되었다. 門型 금속탐지기(MD)가 행사장에 설치 운용되고, 3중 경호 등 경호 기법도 개발되었다.


절반의 성공

논란을 빚었던 경호에 있어 「非露出(비노출) 개념」도 재정립되었다. 비노출 경호는 경계 대상자들로부터 경호원인지 아닌지 잘 구분이 되지 않도록 근무하라는 뜻이지, 종래처럼 피경호인이 보이지 않는 곳에서 근무하라는 것으로 오해해서는 안된다는 점이 강조되었던 것이다.

경호는 실수를 용납하지 않는 특수한 성격을 지니고 있다. 경호에 있어 한 번 실수는 곧 경호 대상자를 잃게 하는 결과를 초래하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文世光 사건 발생 5년 만에 朴대통령이 피살되는 10·26 사건이 발생했다.

10·26 사건의 경우 대통령을 지켜야 할 중앙정보부장 金載圭(김재규)가 되레 대통령을 저격했다는 점에서 文世光 사건 때의 경호 실패와는 성격을 달리하는 측면도 있다. 그러나 역사를 되돌아보면 집권자 암살이 대부분 측근자의 소행에 의해 이뤄졌다는 점에서 그런 교훈을 간과한 당시 車智澈(차지철) 실장의 경호실 역시 경호 실패의 책임을 모면할 수 없음은 물론이다.

文世光은 그 범행 목적의 절반은 달성했다. 왜냐하면 陸여사의 피살로 내조자를 잃은 朴대통령은 그후 自己節制(자기절제)의 면에서 적지않은 취약점을 드러냈고, 그것이 10·26 사건을 불러온 하나의 요인이 되었기 때문이다. 궁정동 安家의 사건 현장이 바로 그런 일면을 상징하고 있었다.

文世光은 사형 선고를 받고 1974년 12월에 처형되었다. 체포된 후 그는 현장검증 때도 고개를 숙이지 않았던 확신범이었다. 남북 분단 상황에서 이런 확신범은 앞으로 얼마든지 돌출할 수 있다.

최근 청와대 경호실은 4반세기 만에 朴 대통령 저격 미수 및 陸여사 암살 사건에 대한 본격적 사례 연구를 진행 중인 것으로 알려지고 있다. 대표적 경호 실패 사례를 덮어버리는 것만이 능사가 아니라는 점을 인식한 것이다.

이스라엘 보안국(ISA:Israeli Security Agency)은 1995년 11월의 라빈 수상 암살 사건을 철저하게 분석·반성하고 세계 37개국의 경호관계자들을 초청하여 경호상의 교훈을 보고한 바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