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삼국지 4大 결전의 현장을 가다(2) - 이릉·효정 전투

정순태   |   2009-02-01 | hit 23780

서기 222년 여름, 劉備(유비)가 거느린 蜀(촉)의 10만 대군은 무더위에 지쳐 있었다. 유비의 대군은 그늘이면서도 물을 얻기 쉬운 숲속 골짜기로 영채를 옮겼다. 유비의 영채는 長江(장강) 양쪽 기슭을 끼고 700여 리나 이어져 있었다.

촉군이 東吳(동오) 원정에 나선 지 이미 1년이 되었지만, 동오의 대도독 陸遜(육손)의 지구전에 휘말려 전선은 고착되어 있었다. 양군이 대치했던 곳은 亭(효정), 현재의 후베이(湖北)성 이창(宜昌)시 효정구다.

음력 7월의 한밤중, 육손의 대반격이 개시됐다. 휘하의 潘璋(반장)·韓當(한당)·諸葛瑾(제갈근: 제갈량의 친형)·周胤(주윤: 주유의 차남)·駱統(낙통)의 부대가 일제히 유비 진영을 습격했다. 朱然(주연)이 이끄는 별동대는 후방으로 우회하여 촉군의 퇴로를 막았다.

동오의 병사들은 지니고 온 한묶음씩의 마른 풀로 蜀軍(촉군)의 영채에 불을 놓았다. 촉군은 전날 밤의 소규모 전투에서 승리해 방심하고 있었다. 동오군의 갑작스런 대공세에 촉군은 크게 놀라 혼란에 빠졌다. 강변을 따라 길게 늘어선 진지는 서로 연락이 끊기고, 주변의 숲과 함께 불바다가 됐다.

火光(화광)이 하늘을 찌르자 육손의 본대가 총공격을 가했다. 유비는 방어에 나설 경황이 없었다. 그는 얼마 안 되는 병사의 호위를 받으며 馬鞍山(마안산: 지금의 이창시 이링구)으로 후퇴했다. <삼국지> 吳書(오서) 육손傳(전)에 따르면 유비가 마안산으로 도망하던 도중에 역참의 小吏(소리)가 군악기와 갑옷을 길에 쌓아놓고 불을 질러 오군의 추격을 방해했다고 한다. 역참 관리의 이름과 그 후의 행적은 역사기록에서 누락됐다. 어떻든 이는 유비가 평생 쌓아온 인덕이 남달랐기 때문일 것이다.

馮習(풍습)·張南(장남)·馬良(마량) 등의 촉장과 武陵蠻(무릉만: 후베이성에 살던 소수민족)의 수령 沙摩柯(사마가)는 난군 중 전사했다. 關羽(관우)의 아들 關興(관흥)과 張飛(장비)의 아들 張苞(장포)는 동오의 배신으로 죽은 아버지의 원수를 갚기 위해 선봉장으로 참전했지만, 도주하는 유비를 호위하다 중상을 입었다.


<삼국지연의>(이하 <연의>라 표기)에서는 後將軍(후장군) 黃忠(황충)이 혼자 적진에 뛰어들었다가 동오의 부장 馬忠(마충)이 쏜 화살에 맞아 전사한 것으로 되어 있으나 정사 <삼국지>에서는 이릉전투 3년 전에 이미 병사한 것으로 기록되어 있다.

杜路(두로), 劉寧(유령)이라는 촉장은 동오에 항복했다. 유비의 주력군 북쪽에서 작전했던 鎭北(진북)장군 黃權(황권)은 퇴로가 막히자 북상해 魏(위)에 투항했다. 마안산도 이제 위험해져 유비는 다시 후방 거점 ?歸(자귀: 지금의 후베이성 이창시 자귀현)로 탈출했다.

하루 밤낮에 걸쳐 불탄 촉군의 군영은 40여 개, 전사자는 1만여 명, 포로는 不知其數(부지기수)였다. 유비가 동원했던 병선과 10만 대군은 순식간에 궤멸했다. 史書(사서)에서는 “시체가 長江(장강)을 메우며 하류로 떠내려 갔다”고 표현하고 있다.

동오군의 압력이 가중되자 유비는 선박과 수레를 모두 버리고 좁은 산길로 白帝城(백제성: 쓰촨省 충칭市 펑지에縣)까지 도주했다. 그는 부끄러워서 成都(성도)로 돌아가지도 못하고 백제성에서 10개월쯤 머물다가 실의의 고통 속에서 병사했다. 漢(한)제국 재흥을 꿈꾼 蜀帝(촉제) 유비의 최후였다.


“유비는 兵法을 모른다”
다리를 건너면 백제성. 삼협댐 건설로 수위가 올라가 백제성은 섬이 됐다.

겨울날의 오전 7시45분, 필자는 효정 서쪽 30여km 지점의 西陵峽(서릉협)의 太平溪津(태평계진) 부두에서 300t급 쾌속선에 승선. 장강 상류의 백제성을 향해 출항했다. 서릉협은 쓰촨성에 이르는 삼협(三峽)의 입구다. 출항 30분 만에 쾌속선은 바둥(巴東) 부두에 잠시 기항했다.

이제 쾌속선은 후베이성(湖北省)과 쓰촨성(四川省)의 경계지역인 巫浹(무협)으로 접어들었다. 기상천외한 봉우리들이 겹겹이 이어져 있다. 쾌속선은 쓰촨성의 우산(巫山) 부두에 15분쯤 기항했다. 우산은 동오의 최전선기지가 설치됐던 곳이다. 우산을 함락시킨 유비의 촉군은 이곳으로부터 효정에 이르기까지 300여 km에 이르는 장강 연안에 영채를 세웠다.

洛陽(낙양)의 魏文帝 曹丕(위문제 조비)는 吳(오)·蜀(촉) 전쟁의 승패에 비상한 관심을 쏟고 있었다. 촉군이 700여 리에 걸쳐 영채를 세웠다는 정보를 입수하자 조비는 “유비는 兵法(병법)을 모른다”면서 촉군의 패전을 예견했다. 필자도 백전노장 유비가 왜 이런 전술적 실수를 범했는지 의문이었다.

그러나 이번 답사에서 유비에게 불리할 수밖에 없는 지형적 조건이 눈에 띄었다. 이릉·효정 전투 당시 장강의 制水權(제수권)은 동오군이 장악하고 있었다. 棧道(잔도)는 蜀(촉·쓰촨성)과 關中(관중·산시성) 사이의 秦嶺(진령)산맥 구간에만 설치된 것이 아니었다. 삼협 양안의 산기슭에는 아직도 잔도가 남아 있다.

잔도는 兵站線(병참선) 유지 관점에서는 최악의 조건이다. 유비는 제수권을 장악한 동오군으로부터 병참선 확보와 유지를 위해 장강 연안을 따라 병참로 보호를 위해 목책을 세웠다.

<연의>에는 이릉·효정전투 당시 유비가 동원한 병력을 70만이라 되어 있지만, 당시 촉의 국세로 보아 병력 70만 동원은 불가능했다.


유비의 도주로가 된 三峽
백제성에 있는 유비의 사당 白帝廟.

촉은 그 영지에 산악지대가 많고, 농업생산에 알맞은 곳은 사천분지 정도였다. 촉의 戶數(호수)도 약 90만 호(이릉전투 41년 후인 263년 후주 유선이 위에 올린 항복문서에 의거함)였기 때문에 동원 가능한 병력 규모는 10만~13만 정도였을 것이다.

병사 1인에 하루 1kg의 보급품을 공급해야 했던 만큼 10만 병력이라면 하루 100t의 물자가 필요했을 것이다. 1개월간의 원정이라면 3000t, 1년간이라면 3만6000t에 달한다. 병참선과 동원기간이 길어질수록 보급필요량은 기하급수적으로 늘어난다.

동오처럼 制水權(제수권)을 장악했다면 대형선 몇 척으로 대량의 보급품을 그때그때 실어 나를 수 있었을 것이다. 제수권을 장악한 동오를 상대로 10만 병력을 동원해 수천 리 밖에서 1년간 원정했다는 것은 촉의 국력과 수송 능력으로는 매우 위험한 일이었다. 관우·장비의 잇단 죽음에 의해 상황판단에 냉엄하지 못했던 것이 유비의 비극이었다.

오전 10시45분, 쾌속선은 장강 상류를 거슬러 올라간 지 2시간30분 만에 펑지에(奉節) 부두에 접안했다. 펑지에 부두에 상륙한 필자는 3륜차의 짐칸을 개조한 합승차에 무려 6명의 승객과 함께 동승해 3km쯤 東進(동진), 백제성 전방 1km 지점에서 내렸다. 백제성은 삼협댐 준공 후 주변 수위가 올라가 이제는 섬이 되어 있다. 300여m 길이의 다리를 건넌 다음 가파른 계단을 올라 백제성에 닿았다.

백제성에서는 삼협의 맨 서쪽 구간인 瞿塘峽(구당협)의 물길을 한눈에 감시할 수 있다. 현재, 10위안짜리 중국 지폐의 뒷면에는 구당협의 모습이 인쇄되어 있다. 베이징(北京)~항저우(杭州)를 잇는 대운하와 더불어 장강은 중국 물류의 대동맥이다.

<연의>에서는 동오의 대도독 육손이 추격병을 거느리고 삼협을 거슬러 오르다 魚腹浦(어복포)에 이르러 하늘을 찌르는 殺氣)(살기)를 느꼈다고 한다. 어복포가 바로 백제성이며, 패전 후 유비는 이곳을 永安城(영안성)이라 개명했다. 그렇다면 육손이 유비의 추격을 멈춘 까닭은 무엇일까?

正史(정사) <삼국지>에 따르면 휘하의 徐盛(서성), 潘璋(반장), 宋謙(송겸) 등 장군들은 백제성을 공략하여 유비를 사로잡자고 주장했지만, 육손은 입술이 亡(망)하면 이(齒)가 시리다는 이치를 꿰뚫어 보고 있었다. 吳主(오주) 손권이 육손의 의향을 물었다. 다음은 육손의 답변이다.

“유비의 거성(백제성)을 공격한다면 상대의 死戰(사전)을 각오하지 않으면 안 됩니다. 成都(성도)의 제갈량, 江州(강주: 지금의 충칭)의 趙雲(조운)도 군을 움직일 것이 틀림없습니다. 만약 백제성에 우리 군이 못박혀 있으면 魏(위)가 어떻게 나올지 불안합니다. 여기서 물러나야 할 것으로 생각합니다”

손권도 육손의 상황 판단을 존중했다. 손권은 “삼협으로부터 병력을 빼라”고 명했다. 魏(위)에서 동원령을 발했다는 정보가 손권에게 이미 들어와 있었다. 손권은 曹丕(조비)의 속셈을 짚고 있었다. 실제로 조비는 曹仁(조인), 曹眞(조진), 曹休(조휴) 등의 장수에게 병력 3만을 주어 오를 공격하려는 태세를 갖추고 있었다. 당시 위, 오, 촉의 동원력은 대략 6 대 2 대 1의 비율이었다.


“내 아들이 無能하면 그대가 황제가 되라”
유비 臨終(임종) 모습을 재현하고 있는 백제성 탁고당. 병상 좌우에는 제갈량과 조운, 한 단계 아래는 李嚴(이엄), 바닥에는 유비의 둘째 아들 劉永(유영), 셋째 아들 劉理(유리)가 엎드려 있다.

유비는 나이 어린 ‘백면서생’ 육손에게 패전한 것을 몹시 부끄러워했다. 백제성에서 유비는 “이번의 일은 모두 朕(짐)의 책임이다. 죄는 짐에게 있다”며 ‘罪己’(죄기: 자신을 처벌함)를 표명했다. 허탈감 속에서 유비는 병이 들었고, 유비는 승상 諸葛亮(제갈량)을 백제성으로 불렀다. 223년 2월, 제갈량은 成都(성도)에서 유비의 2남 劉永(유영: 魯王)과 3남 劉理(유리: 梁王)를 데리고 백제성으로 급히 달려왔다.

백제성의 託孤堂(탁고당)에서는 유비의 임종 모습이 여러 인물의 석상들로 재현되어 있다. 병상의 유비 좌우에는 승상 제갈량과 征南(정남)장군 趙雲(조운)이 시립해 있다. 정사에 따르면 이때 조운은 백제성에 오지 않았다.

백제성에 제갈량과 함께 託孤之臣(탁고지신: 임종 직전의 제왕으로부터 어린 후계자를 보좌하도록 위촉된 신하)이며 상서령인 李嚴(이엄)을 비롯한 여러 신하들은 제갈량과 조운보다 한 단 아래에 시립해 있다.

유비는 제갈량에게 이렇게 후사를 부탁했다.

“승상의 재능은 조비(魏文帝)의 10배입니다. 나라를 태평하게 안정시키고, 대업을 이루기에 충분합니다. 그래서 승상을 불러 향후의 일 처리를 의논하는 것입니다. 그 아이(유선)가 장래성이 없다면 승상이 옳다고 생각하는 일을 스스로 행하십시오(自行其是).>

만약 유선이 황제로서 능력을 발휘하지 못한다면 제갈량 스스로 황위를 차지해도 좋다는 말이었다. 제갈량은 유비의 말을 듣고 얼굴 가득히 눈물을 흘리면서 “臣(신)은 죽을 때까지 股肱(고굉)의 힘을 다하고 忠節(충절)을 바치겠습니다”고 맹세했다. 유비는 후계자 유선에게 조서로서 다음 내용의 유훈을 내렸다.

<나는 처음 설사 정도로 생각했지만, 이런저런 질환이 겹쳐 이제는 틀린 것 같다. 사람이 쉰 살까지 살면 요절이라고는 하지 않는다. 나는 육순을 이미 넘겼으니 한이 있을 리 없다. 다만 너희 형제들의 일이 걱정이다.… 내가 죽으면 너희들은 승상을 아버지로 생각하고 모셔라….>

223년 4월 24일, 유비는 파란만장했던 일생을 마쳤다. 향년 63세.

백제성을 둘러본 뒤 펑지에 부두로 내려와 쾌속선을 타고 이창의 태평계진 부두에 내렸다. 삼협 전용공로를 통해 호텔로 돌아왔다. 운행증을 교부 받아야 출입이 가능한 삼협 전용공로에는 길이 약 10km의 터널 구간이 있다.


효정전투 현장답사
백제성 서쪽 4km에 위치한 봉절 부두.

다음날 아침 일찍 삼협댐과 5단계 갑문. 西陵長江大橋(서릉장강대교)를 건너 댐건설 조형물 광장 등지를 둘러보고 난 뒤 효정으로 향했다. 입구에는 ‘三國(삼국) 효정대전 유적지’라고 쓰여 있다. 1800년 전에 육손의 화공으로 폐허화한 곳이지만, 이제는 장강과 어울려 절경을 이루고 있다. 강변 비탈길을 따라 이릉전투에 참전한 여러 장수들의 상과 조형물이 배치되어 있다.

특히 마안산 전투에서 포위된 유비를 탈출시키기 위해 적군과 싸우다 입에서 피를 물고 전사한 촉의 중군도위 傳?(전동)의 인물상이 눈길을 끌었다. 중국의 역사유적지는 어디든 그와 관련한 인물들을 실물대로 배치하여 잔잔한 감동을 주거나 당시의 상황에 대한 이해를 빠르게 유도하고 있다.


적벽대전 전후처리를 둘러싼 유비·손권의 불화
삼협댐의 閘門과 필자.

이제는 적벽 대전 당시엔 동맹이었던 유비와 손권이 왜 이릉·효정 전쟁에 돌입하여 승패를 나눠야 했는지, 그 과정을 살펴보기로 한다.

적벽대전 후 유비는 형주의 4郡(군)을 차지했다. 유비에게 다행이었던 것은 그에게 적대적이었던 주유의 죽음(210년)이었다. 주유의 죽음에 이어 동오의 총사령관 지위를 후계한 것은 유비에게 우호적이었던 魯肅(노숙)이었다. 노숙은 江陵(강릉)을 유비에게 넘기고 陸口(육구)로 내려가 주둔했다.

적벽대전에서 패배하고 북상한 조조는 ?城(업성)에 거대한 궁궐 銅雀臺(동작대)를 짓는 등 본거지에서 한동안 움직이지 않았다. 211년에 조조는 군사활동을 재개하지만, 이번에는 방향이 달랐다. 關中(관중), 즉 지금의 西安(서안) 일대에 할거하고 있던 馬超(마초)·韓遂(한수) 등 호족들이 조조에 반기를 들자 친정에 나섰던 것이다. 조조는 마초의 세력을 멀리 서쪽으로 쫓고 관중까지 판도를 확대했다.

조조의 압력이 줄어들자 荊州(형주) 귀속문제를 둘러싸고 손권과 유비가 긴장관계에 들어간다. 이 무렵 형주의 유비에게 기회가 찾아왔다.

益州牧(익주목: 지금의 쓰촨성의 장관) 劉璋(유장)은 익주 북부지역인 漢中(한중)에서 張魯(장로)라는 五斗米道(오두미도: 후일 중국 도교의 주류가 됨)의 수령이 세력을 키워가자 위기감을 품었다. 거기에다 관중을 제압한 조조가 호시탐탐 漢中(한중)을 노리고 있었다. 유장으로서는 이럴 수도 저럴 수도 없는 곤경에 처했다. 이때 張松(장송)이라는 부하가 유장에게 진언했다.
중국역사발물관 소장 삼국의 유물들. ① 魏(위)의 五銖銅錢(오수동전), ② 위의 銅弩機(동노기) 부품. ③ 조조의 무덤(산둥省 동아현)에서 출토된 陶耳杯(도이배), ④ 蜀(촉)의 동전. ⑤ 촉의 陶俑(도용), 쓰촨성 중션에서 출토, ⑥ 吳(오)의 陶院落(도원락), 후난성 어조우시에서 출토.


촉의 군사지도 입수한 유비

“조조의 군사력은 천하무적입니다. 조조가 한중의 풍부한 물자를 손에 넣고 우리를 공격해 온다면 큰일입니다.”

“나도 걱정하고 있지만, 좋은 방책이 없겠소?”

“유비를 우군으로 끌어들이는 것입니다. 그는 主君(주군)과 같은 劉(유)씨라는 인연이 있고, 조조와는 원수 사이이며 용병도 잘합니다. 그를 이용해 장로를 토벌하면 반드시 격파할 것입니다. 장로를 제압하면 익주는 조조가 공격해 오더라도 걱정할 일이 없습니다.”

유장은 法正(법정)이라는 부하에게 병력 4000을 주어 유비를 맞아오게 했다. 장송과 법정은 유장의 부하이긴 했지만, 어리석은 유장 대신 유비를 새로운 蜀主(촉주)로 받들 것을 모의하고 있던 사이였다.

법정은 형주(강릉)에서 유비를 만나 使者(사자)로서 전하는 말을 마친 다음 그와 장송의 계획을 다음과 같이 밝혔다.

“장군(유비)의 英才(영재)로 겁에 질려 있는 유장의 틈을 찌르는 일은 어렵지 않습니다. 더욱이 유장이 가장 믿고 있는 장송이 內應(내응)할 준비를 하고 있습니다. 성공의 그날에는 풍부한 物産(물산)을 장악할 수 있는 데다 천연의 要害(요해)에 의지할 수 있습니다. 대업 달성은 손바닥 뒤집기와 마찬가지겠죠.”

법정은 촉의 군사지도를 유비에게 헌상했다. 굴러들어온 복이었다. 솔직히 말하면 유비도 전부터 익주, 즉 蜀(촉)을 탐내고 있었다. 그러나 유비는 망설였다.

“지금 나와 천하를 다투고 있는 것은 조조 아니오? 그가 조급한 행동을 하면 나는 느림으로 대처할 거요. 그가 무력으로써 억누른다면 나는 仁政(인정)을 베풀고, 그가 술수를 부린다면 나는 성실로 대항할 겁니다. 그와 거꾸로 가는 것으로써 나의 목적을 달성시키려고 해요. 옳지 않은 일로 천하의 신의를 잃고 싶지는 않습니다.”


천하삼분의 계기 마련

유비의 군사 방통이 말했다.

“임기응변으로 일해야 할 시기에 그런 자세로서는 성공할 수 없겠지요. 어리석은 자를 공격하는 것은 춘추시대 覇者(패자)가 취했던 常法(상법)입니다. 비상수단으로 천하를 빼앗았지만 그 후에 선정으로 보답했던 湯王(탕왕: 夏를 멸망시킨 殷의 王), 武王(무왕: 殷을 멸망시킨의 周의 왕)의 權道(권도)를 따라야 합니다. 천하평정의 그날, 유장을 大國(대국)의 왕으로 封(봉)하면 어찌 신의를 저버리는 일이겠습니까.”

211년 12월, 유비는 대군을 거느리고 촉으로 들어가 ?城(부성)에서 유장과 회견했다. 이어 북진해서 가맹관에 이르렀지만, 장로 토벌에 나서지 않고 인심 얻기에 주력했다. 병력을 온존하여 기회를 보다가 성도를 공략할 속셈이었다.

212년 10월, 위의 조조가 동오 토벌에 나서자 유비는 손권을 지원해야 한다는 구실로 일시 철수하겠다고 유장에게 통고했다. 방심하는 성도를 공략하려는 술책이었다. 그러나 병력을 움직이기도 전에 음모가 발각되어 장송이 참수됐다.

이제 강공책밖에 없었다. 유비는 가맹관으로부터 南進(남진), 부성을 함락시키고 성도로 진격했다. 그러나 성도 목전의 城(낙성)에서 수비병들의 선전으로 공성전은 길어졌다. 유비의 군사중랑장 龐統(방통)은 여기서 전사했다.

유비의 고전 소식에 형주에 있던 제갈량, 장비, 조운은 촉으로 침입, 巴東(파동), 江州(강주)를 제압하고 지원부대를 둘로 나눠 1대는 장비가 이끌고 巴西(파서)-德陽(덕양)으로, 또 1대는 조운이 이끌고 江陽(강양)-?爲(건위)로 진격했으며, 제갈량은 낙성의 유비에게 직행했다. 그 사이 유비군도 약 1년에 달하는 공성전 끝에 낙성을 함락시켰다. 드디어 제갈량 등의 지원부대도 합류한 유비군은 총력을 집결하여 성도를 포위했다.

성내에는 병력 3만명과 2년의 농성에 견딜 만한 식량을 보유하고 있었지만, 유장은 일전도 치르지 않고 항복했다. 214년 5월의 일이었다. 성도에 입성한 유비는 위의 조조, 오의 손권, 촉의 유비로 수렴되는 천하삼분의 실현을 위한 발판을 딛게 됐다.

유비가 익주의 지배권을 확립했다는 정보는 洛陽(낙양)의 조조와 建業(건업: 지금의 난징)의 손권에게는 유쾌한 일이 아니었다. 특히 손권으로서는 주유의 죽음으로 익주(촉) 공략계획을 늦추고 있다가 유비에게 선수를 빼앗긴 셈이었다.

새로운 분쟁의 불씨는 유비가 촉으로 들어간 후 관우가 총독하고 있던 형주 남부 4 郡(군)의 반환문제였다. 손권으로서는 적벽대전 후 유비에게 4군을 빌려 주었다는 입장이었기 때문에 익주를 차지한 유비가 그것을 오에 되돌려 주어야 한다고 주장했다.

이런 손권의 뜻을 전하기 위한 사자로서 제갈량의 형 제갈근이 성도로 달려갔다. 그러나 유비는 답변을 피했다. 손권은 형주의 장사·영릉·계양 3郡(군)에 제각기 태수를 임명했다. 3군이 동오의 판도임을 선언한 셈이다. 이에 관우는 즉각 병력을 움직여 3군의 동오 관리를 추방했다.

손권은 여몽에게 병력 2만을 주어 3군을 탈취하려 했다. 여몽은 3군에 항복 권유장을 보냈다. 洞庭湖(동정호) 이남 3군에는 촉의 병력이 적었다. 거기에 여몽의 2만명이 진격해 가자 장사와 계양의 태수는 항복했다. 단지 영릉태수 ?普(학보)만이 농성 태세로 들어갔다. 여몽은 영릉성에 대해 교란전술을 구사했다.

“좌장군 유비는 한중에서 하후연의 위군에게 포위되어 고전 중이다.”

“관우는 南郡(남군)에서 움직일 수 없는 형편이다….”

이때 유비는 성도로부터 형주의 중심인 公安(공안)까지 달려왔고, 관우도 부대를 이끌고 益陽(익양) 근처까지 남하하고 있었다. 그러나 학보는 가짜 정보에 넘어가 영릉성을 나와 여몽에게 항복했다. 손권도 陸口(육구: 지금의 우한과 웨양 사이)에 진주해 諸軍(제군)을 지휘했다. 오·촉 간에 전면전이 벌어질 상황이었다.

그러나 유비·손권 양 진영은 모두 조기해결을 바라고 있었다. 손권은 魏(위)의 최남단 기지인 合肥城(합비성)을 공격하여 동오의 수도 建業(건업)에 대한 압박을 완화시키려고 했다. 또 유비로서는 漢中(한중)으로 진격해오는 조조 군에 대처하지 않을 수 없었다.

손권의 총참모장 노숙과 형주의 총독 관우는 이때까지 국지적인 분쟁 때 자주 대화하는 사이였다. 관우도 손권 진영 내의 親(친) 유비파인 노숙을 신용했다. 노숙은 호남의 益陽(익양) 근처에서 대진 중이던 관우에게 회담을 제의했다.


관우와 노숙의 單刀赴會
중국 도교의 성지 武當山(무당산). 후베이성과 쓰촨성의 경계 지역에 위치해 있다.

담판장의 조건은 호위병을 100보 밖으로 물리고 두 장수가 단검 하나만을 휴대한다는 것이었다. 1보는 1.4m 정도다. 이것이 이른바 관우와 노숙 사이의 ‘單刀赴會’(단도부회: 칼 하나씩 지니고 회동함)다. 이로써 일촉즉발의 위기는 해소되고, 양측은 화해의 길로 들어섰다.

그러나 유비가 손권에게 3군을 반환한 것은 ‘단도부회’의 성과가 아니라 조조의 공세 때문이었다. 215년, 봄부터 7월에 걸쳐 오-촉 불화의 틈을 이용해 조조는 익주의 북부 지역인 한중을 침공해 점거했다. 조조의 침공 전 한중에는 ‘黃巾(황건)의 난’을 일으킨 太平道(태평도)와 비슷한 五斗米道(오두미도)가 성행해 그 교조인 장로가 독립정권을 세우고 있었다. 陽平關(양평관) 싸움(215년)에서 패배한 장로는 도주했다. 그때 장로는 참모의 진언을 물리치고 식량창고에 불을 지르지 않았다.

이에 감명을 받은 조조는 장로를 불러 항복시켰다. 장로에게 鎭南將軍(진남장군) 직책을 내리고, 關中侯(관중후)에 봉했다. 오두미도라는 이름은 신자로 입회할 때나 치료를 받아 병이 나은 뒤에 쌀 닷되를 교단에 바쳤기 때문에 명명된 것이다.

무장교단화한 오두미도는 ‘米賊(미적)’이라 불리기도 했지만, 張攸(장유)·張陵(장릉)·張魯(장로)의 3代(대) 교주를 거치면서 여행하는 신자를 위해 무료로 숙식을 제공하는 등 민정에 힘써 한중 일대의 백성들을 복종시켰다. 오두미도는 後魏(후위)의 寇謙之(구겸지)에 의해 도교로 대성, 중국 최대의 민간신앙으로 오늘에 이르고 있다.

한중은 일찍이 漢 高祖(한 고조)가 되는 劉邦(유방)이 초패왕 항우에 의해 한왕으로 책봉 받은 영지로서, 북쪽으로 秦嶺(진령)산맥을 넘으면 長安(장안)에 다가서고, 동으로 한수의 흐름을 따라 내려오면 장강 중류의 武漢(무한) 평야에 이를 수 있어 천하를 노리기에 좋은 지방이었다.

더욱이 이곳은 익주와 경계를 접해 유비의 촉과 조조의 위 사이에 위치한 완충지대였다. 만약 유비가 익주 지배를 굳힌 다음 대군을 몰아 진출하면 中原(중원) 땅이 안온할 수 없었다. 따라서 조조로서는 유비가 손을 대지 않는 사이에 오두미도의 나라를 흡수해 국방의 최전선으로 삼아야 할 필요가 있었다.


조조와 유비의 漢中 쟁탈전
영유권을 둘러싼 오·촉 전쟁의 불씨 형주성.

조조가 한중을 차지한 것은 유비의 목에 비수를 들이대는 것과 마찬가지였다. 유비 입장에서 형주 문제 해결은 손권보다 더 화급한 상황이었다. 그 결과 형주 동부의 長沙(장사: 지금의 후난성 성도), 江夏(강하: 지금의 후베이성 성도인 우한시), 桂陽(계양) 등 3개 군은 吳(오)에, 서부의 零陵(영릉), 武陵(무릉), 南郡(남군: 지금의 형주시)은 촉에 귀속됐다. 오와 화해한 후 유비는 급히 성도로 돌아왔다

216년 5월, 유비는 黃權(황권)을 장수로 삼아 익주의 북부 巴東(파동)·巴中(파중)·巴西(파서)로 파병했다. 이에 조조는 장합을 巴西(파서) 지방에 침입시켜 그 주민들을 한중으로 이주시켰다. 이는 적국의 생산력을 저하시키는 조조의 전략이었다. 촉의 파서군 태수 장비가 가만히 있을 리가 없었다. 장비는 1만의 정예를 거느리고 사잇길로 宕渠山(탕거산) 영채를 공격, 장합을 패주시켰다.

218년, 유비는 장비, 마초, 조운, 황충 등 제장과 함께 대군을 이끌고 한중을 향해 발진했다. 이것은 참모 法正(법정)의 한중 공략론에 따른 출전이었다. 다음은 법정의 건의다.

“조조가 일거에 장로를 항복시키고 한중을 차지했음에도 불구하고 승세를 타고 파촉을 도모하지 않고 급히 북으로 돌아간 것은 내우가 있었음에 틀림없습니다. 지금 크게 병을 일으켜 한중을 공격한다면 반드시 승리할 것입니다. 한중의 땅을 얻으면 농경지를 넓혀 곡식을 축적하고, 다시 북벌을 계속한다면 凉雍(양옹: 지금의 깐쑤성과 산시성)을 잠식하는 것도 가능하고, 要害(요해)를 지켜 지구전략을 세우는 것도 가능해집니다. 이것은 하늘이 주는 기회, 때를 놓쳐서는 안됩니다.”

<연의>에서는 법정이 제갈량보다 하위의 참모인 것처럼 되어 있지만, 전선에서 실제로 활약하며 촉한의 건국을 개척한 제1의 공로자는 법정이었다. 218년 3월, 定軍山(정군산) 싸움에서 법정은 전선 감독관으로 출진, 山上(산상)에 진을 쳐놓고 위의 맹장 夏侯淵(하후연)을 진 아래로 유인했다. 성질 급한 하후연이 법정의 계책에 넘어가자 유비군의 老將(노장) 황충은 산 아래로 내달으며 하후연의 목을 벴다.

4촌 동생 하후연이 전사하자 조조는 참을 수 없었다. 조조는 복수를 위해 대군을 이끌고 출진, 長安(장안)으로부터 斜谷道(사곡도)를 빠져 陽平關(양평관)에 이르렀다. 그는 촉군을 일거에 짓밟을 작정이었지만, 요새를 방패로 삼아 굳게 지키기만 하는 유비를 2개월 남짓 공격했으나 전과를 올리지 못했다.


유비, 漢中王에 오르다
관우의 번성 공략도.

형주의 서부 3군에다 巴蜀(파촉)과 漢中(한중)을 확보한 유비는 漢中王(한중왕)에 올랐다. 그의 라이벌 조조는 3년 전에 이미 魏王(위왕)에 올라 있었다. 이때가 유비의 전성시대였다. 한중왕 유비는 법정을 행정의 실질적인 톱인 尙書令(상서령)과 護軍(호군)장군에 임명했다. 유비가 익주와 한중을 얻는 데 있어 실질적인 軍師(군사)는 법정이었다. 그러나 그 다음해 법정은 45세의 나이로 병사했다.

유비가 한중에서 조조 세력을 축출함으로써 天下三分(천하삼분)의 계책이 현실화하기 시작했다. 바로 그때 장강 중류의 강릉(지금의 징조우시)과 공안(지금의 징조우시 공안현)을 근거지로 삼아 형주를 지키고 있던 關羽(관우)가 위의 전진기지인 樊城(번성: 지금의 후베이성 샹판시 번성구)을 공격했다. 번성 공략에 성공하면 유비의 중원 제패가 용이해진다는 것이 관우의 판단이었다.

번성에서는 조조의 4촌 동생인 曹仁(조인)이 정남장군으로서 진수하고 있었다. 조인은 부하들에게 인망이 높고 위기에 강한 智將(지장)이었다. 조조 진영의 용장 夏侯惇(하후돈), 夏侯淵(하후연), 曹仁(조인), 曹洪(조홍) 등은 모두 조조 일족이다.

219년, 관우는 문관 출신인 ?芳(미방)과 傅士仁(부사인)을 근거지인 南郡(남군: 적벽대전 당시의 강릉이며 현재의 징조우시)과 공안(현재의 징조우시 공안현)에 남겨 병참을 맡기고 출진했다. 관우는 병졸들에게는 부드러웠지만 사대부에게는 교만했다. 특히 남군태수 미방은 유비가 徐州(서주)에 있을 때부터 측근으로서, 安漢將軍(안한장군) 미축이 그의 형이었다.

徐州(서주) 시절 미축· 미방 형제는 소작인 1만호를 소유한 대부호로서 패전을 거듭한 유비에게 소작인 2000호를 헌납해 군자금을 삼도록 했던 만큼 유비 군단의 ‘창업 주주’라고 할 만하다. 그후 미축·미방 형제는 조조가 내린 관위를 버리고 유비를 따라 각지를 전전했다. 正史(정사)의 기록에 의하면 미축은 온화한 성품과 성실한 인품이 평가되어 익주 평정 후 안한장군으로 임명되었는데, 그 석차는 軍師(군사)장군 제갈량보다 오히려 상위에 있었다.

이런 미방이 군량 1만석(당시의 1석은 27kg)을 보내라는 관우의 명령을 제대로 이행하지 못하자 관우는 승전 후 돌아가서 군율로 다스리겠다고 으름장을 놓았다. 이런 소식을 들은 미방은 “아무리 병기와 식량을 모아 보내도 공은 저 수염(관우)이 독점하는 것 아니냐”며 반발했다.


여몽이 쳐놓은 덫에 걸린 관우
<삼국지>는 魏書(위서) 武帝(무제: 조조) 紀(기)로부터 서술되어 있다.

관우는 병량문제로 어려움을 당하면서도 승승장구하고 있었다. 219년 8월, 형주에는 큰비가 내려 번성 앞을 흐르는 漢水(한수)가 범람했다. 수상전이라면 위의 장수들보다 관우가 한수 위였다. 큰 병선을 만들어 호우에 대비한 관우는 조인을 구원하기 위해 대군을 거느리고 번성 밖까지 내려온 위의 맹장 于禁(우금)을 사로잡고, 항복을 거부하는 龐德(방덕)을 참수했다. 물에 잠긴 번성은 완전히 고립됐다.

이때 관우의 위세는 하늘을 찔렀다. 번성을 함락시키면 한 헌제의 행재소이던 허도까지 바로 북상할 형세였다. 조조조차 河北(하북)으로의 천도를 검토했다. 관우의 기세를 두려워한 것은 조조뿐만 아니었다. 동오의 손권도 위협을 느꼈다.

위의 참모 司馬懿(사마의)와 張濟(장제)는 “許都(허도)로부터 天子(천자)를 옮기면 민심이 동요한다”고 반대했다. 특히 사마의는 번성의 위기를 구하려면 손권에게 江南(강남)의 지배권을 인정해주는 것을 미끼로써 회유하여 동오가 관우의 배후를 습격하도록 공작할 것을 건의했다. 조조는 이 헌책을 받아들여 동오와의 동맹을 맺었다. 이때 손권은 오촉동맹을 일방적으로 파기했을 뿐만 아니라 조조에게 황제에 오를 것을 권유했다.

魯肅(노숙)은 임종 시 동오 全軍(전군)을 지휘했던 자신의 후임으로 呂蒙(여몽)을 천거했다. 노숙의 死後(사후) 그의 병마를 인수한 여몽은 표면적으로는 관우에게 우호적이었다. 그러나 관우가 번성 공격에 나서자 즉시 공작을 개시했다. 여몽은 손권에게 상소했다.

“관우는 번성 공격에 나서고 있으면서도 수비병을 (본거지에) 다수 머물러 있게 하는 것은 제가 배후를 찌를 것에 대비한 것입니다. 제가 병력의 일부를 데리고 건업에 돌아가면서 신병 요양을 명목으로 하겠습니다. 관우가 이를 들으면 반드시 수비병을 끌어올려 번성 공격에 투입할 것입니다.”

과연, 여몽이 建業(건업)으로 떠나자 관우는 강릉과 공안의 수비병을 불러올려 전선에 투입했다. 여몽은 자신을 대신할 장수로 젊은 육손을 추천했다. 육구에 부임한 육손은 관우의 武勳(무훈)을 찬양하고 자신을 비하하는 내용의 인사 편지를 보내 관우를 안심시켰다.

수비가 엷어지는 모습을 본 여몽은 정예병을 숨긴 수송선을 상선으로 변장시켜 형주로 진발했다. 병력을 흰옷을 입혀 상인으로 위장했다. 관우가 강변에 설치한 봉화대의 감시병들은 설마 그것이 적이라고 생각지도 못하는 사이에 포로가 됐다. 당시 강릉과 공안을 수비하던 미방과 부사인은 오군의 급습을 받자 저항 없이 항복했다.


관우의 최후
관우의 패전과 죽음

관우는 번성을 몰아쳐 함락 직전의 상황이었다. 바로 이때 徐晃(서황)이 이끄는 위의 원군이 달려왔다. 서황은 적진 깊숙이 침입, 번성 공격 때 화살을 맞아 부상한 관우를 애워싸고 쳤다. 서황에게 관우는 평소 존경하던 고향(山西省 運城市) 선배.

고향 후배에게 참패한 관우는 혈로를 뚫고 강릉으로 회군했지만, 이미 오군에게 점령된 상태여서 당양의 맥성에 들어가 농성했다. 관우는 上庸(상용)과 房陵(방릉)에 주둔하고 있던 유봉과 맹달에게 구원을 요청했으나 묵살당했다.

맥성에 포위된 관우는 그의 양자 關平(관평)과 함께 맥성을 탈출해 도주하다 30km 서북쪽 지점의 臨沮(임저)에서 동오의 부장 馬忠(마충)에게 붙잡혀 현장에서 참수됐다. 이때의 ‘반역’으로 유봉은 처형됐고, 맹달은 위에 투항했다. 관우의 도주로였던 玉泉山(옥천산) 기슭에는 중국 禪宗(선종)의 명찰 玉泉寺(옥천사)가 자리잡고 있다.

옥천사에는 중국 국보인 철탑과 則天武后(측천무후)가 기증한 석가모니의 사리 등이 있다. 그러나 관광객들은 얼굴을 붉게 칠을 한 관우의 상을 모신 사당과 관우의 적토마가 물을 먹었다는 샘물과 청룡언월도를 갈았다는 바위에 몰리고 있다. 중국에서 붉은 색깔의 얼굴은 관우 이후 충신을 표현하는 상징 색깔이 됐다.
관우의 목 없는 시신이 묻힌 關陵(관릉). 후베이성 당양시 소재.

<연의>에서는 관우의 愛馬(애마) 적토마는 일찍이 여포가 타던 말인데, 여포를 잡아 죽인 조조가 관우에게 내린 것으로 되어 있다. 적토마를 타고 10년간이나 최고의 鬪將(투장)으로 날렸던 여포의 사망연도가 198년, 관우의 사망연도가 219년인 만큼 이 적토마가 최소한 31년 이상의 전성기를 누렸다는 것인데, 이것은 말의 생태로 보아 불가능한 일이다.

<연의>에서는 장수 2인이 서로 창을 들고 기마전을 벌여 승패를 결하는 장면이 자주 등장하지만, 이것도 과장이다. 삼국시대엔 아직 등자가 발명되지 않아 마상에서 활을 쏘거나 창을 휘두르기가 어렵다. 중국에서 등자가 처음 등장한 것은 4세기 중반이었다.

관우의 목 없는 무덤인 關陵(관릉)은 당양시 중심가 서쪽 3km에 위치해 있다. 관우의 목은 洛陽(낙양)의 關林(관림)에 묻혀 있다. 손권이 관우의 목을 소금에 절여 낙양에 있던 조조에게 바쳤기 때문이다. 조조는 관우의 목에다 나무로 만든 몸통을 끼워 넣고 제후의 예로 장사를 지내 주었다.


“人生 살면 얼마나 산다고…”
玉泉寺(위쪽) 경내에 세운 ‘漢雲長顯聖處(한운장현성처)’. 雲長은 관우의 字.

관우의 죽음은 성도에 있던 유비에게 엄청난 충격을 주었다. 중원 제패를 실현시키는 데 있어 요충인 형주의 상실은 뼈아픈 일이었다. 유비, 관우, 장비가 의형제를 맺은 桃園結義(도원결의)는 ‘연의’의 픽션이지만, 3인은 황건적을 치기 위해 거병한 이래 형제보다 더 진한 동지였다. 관우와 장비의 출생연도는 역사 기록에서 누락되었지만, 관우는 유비보다 1세 연하인 162년생, 장비는 관우보다 6세 아래인 168년생으로 추정되고 있다. 정사에 의하면 이들은 한 침대에서 잠을 잘 정도로 우애가 깊었지만, 여러 사람이 모인 장소에서는 온종일 유비 옆에 차렷 자세로 시립하여 主從(주종) 관계를 엄격히 드러냈다.

220년 1월, 조조가 洛陽(낙양)에서 병사했다. 향년 66세. 그의 아들 조비가 魏王(위왕) 지위를 계승했다. 관우를 장사 지낸 지 열흘 후였다. <삼국지>에 등장하는 인물 가운데 후세에 이름을 남긴 시인이라면 조조밖에 없다. <연의>에서는 조조를 ‘梟雄(효웅)’이나 ‘奸雄(간웅)’으로 묘사하고 있지만, 그가 남긴 시는 豪壯(호장)하고 격조도 높다. 그의 대표작 ‘短歌行(단가행)’을 음미하면 조조의 넓은 氣宇(기우), 뜻을 이루려는 진지성이 느껴진다.
관우의 얼굴. 關陵(관릉) 소장.

<술을 들고 노래 부르세/ 인생을 살면 얼마나 산다고/ 아침 이슬 같은 인생/ 지난날들이 또 얼마나 고통스러웠던고/ …/ 달은 밝고 별은 드믄데/ 烏鵲(오작: 까마귀와 까치)이 남으로 날아가네/ 나무 주변을 돈 지 3번/ 어느 가지에 의지할 것인가/ 산은 높아지기를 마다하지 않고/ 바다는 깊어지기를 마다하지 않는다/ 周公(주공)처럼 먹던 음식을 세 번 뱉으면/ 천하의 민심이 (나에게) 따르리….>

밝은 달은 조조 자신이고, 흐릿한 별들은 그에 대항하는 여러 세력이라고 할 수 있다. 烏鵲(오작)은 인재들을 의미하고, 그들은 어느 진영에 붙어야 할지 두리번거리고 있다. 나 조조도 주공 旦(단)처럼 식사 중에 사람이 찾아오면 세 번이라도 먹던 음식을 뱉어내고 그 사람들을 맞고 그들의 能(능)함을 구사하여 大業(대업)을 이루고자 한다.

조조는 ‘적벽의 싸움’을 앞두고 옆구리에 창을 낀 모습으로 술을 뿌려 河神(하신)에 제사하면서 이 단가행을 노래했다. 이런 조조도 죽음에 앞서 侍女(시녀)들의 장래를 걱정하며 귀한 香(향)을 나누어 줄 만큼 섬세했다. 그는 惡(악)과 善(선)이 한몸에 공존하는 多面(다면) 성격의 인물이었다.
유비가 형주를 동오에 탈취당한 후의 삼국의 판도(219년).


조조의 民生 안정정책
조조가 창을 끼고 시를 지어 노래하고 있다. 建安(건안)문학의 정점에 군림했던 조조는 싸움터에서도 틈틈이 시를 읊었다. <삼국지통속연의>의 삽화로부터.

조조는 당대 최고의 經世家(경세가)였다. 後漢(후한) 말기는 정치 문란과 부패로 유민이 대량 발생해 농촌은 황폐해졌다. ‘黃巾(황건)의 난’도 이런 유랑 농민들의 집단봉기였다. 조조는 이런 유민들을 위해 역사상 처음으로 民屯(민둔)이라는 屯田制(둔전제)를 시행했다. 前漢(전한) 武帝(무제)가 시행한 둔전제는 국경지대에 주둔하는 병사들이 식량 자급자족을 위해 ‘일하며 싸운다’는 형식으로 영농케 했던 軍屯(군둔)이었다.

조조는 점령한 농토를 국가소유로 하고, 희망하는 유랑 농민들에게 대여하여 경작케 했다. 농토를 받은 농민은 국가에 수확량의 50%를 바쳤다. 농경을 하는 데는 소가 필요한데, 국가에서 소도 대여할 경우 국가와 농민의 분배량은 6 대 4였다. 당시 소는 병참에 있어 가장 중요한 수송 동력이었다. 조조는 대부분 농한기에 전쟁을 했는데, 그때 소를 병참용으로 이용했다. 이로써 조조는 백성의 생활 안정과 국가 재정 확보라는 난제를 한꺼번에 해결했다. 이것이 위·오·촉의 국력이 6 대 2 대 1로 되었던 결정적 이유였다.

조조를 후계한 조비는 220년 가을 後漢(후한)의 獻帝(헌제)에게 ‘禪讓(선양)’을 강박하여 퇴위시키고, 魏(위)의 文帝(문제)가 되었다. 유비도 그해 중에 蜀漢(촉한)의 황제가 됐다. 흔히 前漢(전한)과 後漢(후한)과 구별하기 위해 蜀漢(촉한)이라고 했지만 유비가 창업한 나라의 정식 국호는 漢(한)이었다.

유비가 우선 결심한 것은 吳(오)에 대한 복수전이었다. 조운은 동오와의 전쟁에 반대했다. 유비는 오랜 부하인 조운을 처벌할 수 없었다. 그러나 “天時(천시)는 東征(동정)에 이롭지 않다”고 진언한 秦宓(진복)은 투옥됐다. 제갈량은 동정 반대를 강하게 주장할 수 없는 입장이었다. 동오 수뇌부에 있는 형 제갈근이 손권의 使者(사자)로서 촉에 왔을 때도 제갈량은 사적으로는 만나지 않았다.

원래 유비가 촉을 제패한 것은 형주라는 근거지가 있어 비로소 가능한 것이었다. 이를 위해 진력한 장병들의 대부분은 형주 출신이었다. 이제 그들은 돌아갈 고향을 잃었다. 이들의 불안과 동요를 막기 위해 유비는 반드시 형주를 회복해야 했다. 그뿐만이 아니다. 형주를 잃음으로써 최종 목표인 중원을 차지하려 해도 험한 진령산맥의 잔도를 넘을 수밖에 없게 됐다. 유비로서는 중원 진출을 위해 형주를 포기할 수 없었다.

그러나 동정을 앞두고 비보가 날아들었다. 장비 암살 소식이었다. 원래 장비는 주사가 심하고 부하들을 험하게 다루었다. 장비는 동정을 앞두고 둔영하고 있던 ?中(낭중)에서 유비와 重慶(중경)에서 합류하기 위해 출전 준비 중이었다. <연의>에서는 짧은 기한 내에 병사 전원에게 입힐 흰색 갑옷을 마련하라는 무리한 지시에 견디다 못한 부하 2인이 잠자는 장비의 목을 베어 동오에 투항했다고 했다.


외교의 達人 손권
삼협의 입구(西陵峽) 언덕 위에 세워진 장비의 상. 장비가 병사들에게 진격을 독려하며 陣太鼓(진태고)를 두드리고 있는 모습이다.

221년 7월, 유비는 대군을 이끌고 동오를 향해 진발했다. 이때 동오의 남군태수는 제갈량의 형 제갈근이었다. 제갈근은 화해의 사자를 보내 유비를 설득하려 했으나 유비는 상대도 하지 않았다.

손권의 외교공작은 화려했다. 위에 사절을 파견하고, 포로 于禁(우금)을 송환했다. 손권은 조비에게 보내는 친서에 자신을 ‘臣(신)’이라 칭했다. 이는 동오가 위에 항복했음을 의미한다. 위의 중신회의에서 신하들은 모두 기뻐했지만, 劉曄(유엽)만은 동오의 투항을 받지 말 것을 주장했다.

“손권이 언사를 낮추어 복종하려는 것은 절박한 사정이 있음에 틀림없습니다. 유비의 공격 때문이겠지요. 민심이 불안해 궁지에 처해 있을 것인 만큼 지금이야말로 군을 보내 江南(강남)을 취해야 할 것입니다”

그러나 조비는 유엽의 건의를 받아들이지 않고 손권을 吳王(오왕)으로 봉했다.

‘유비의 동정 개시’ 정보를 접한 손권은 陸孫(육손)을 대도독으로 임명하고, 朱然(주연)·潘璋(반장)·宋謙(송겸)·韓當(한당)·徐盛(서성)·鮮于丹(선우단)·孫桓(손환) 등의 장군들을 그의 지휘하에 넣었다. 병력은 5만이었다.

유비는 吳班(오반)·馮習(풍습) 등에게 4만 병력을 주었다. 촉의 선봉부대는 장강을 따라 동진해 오의 최전선 요새인 巫城(무성)을 공략하고, 자귀성으로 진격했다. 이와 같은 전세를 보고 형주 남부의 士族(사족)들이 유비에 호응해서 봉기했다. 초전은 촉군에게 유리하게 전개됐다.

동오의 대도독 육손이 채택한 것은 후퇴작전이었다. 육손은 당시 나이 42세로 관록이 부족했고, 그 휘하에는 孫策(손책) 이래의 숙장이 많았다. 그의 후퇴작전에 대해 겉으로 반항하지는 않았지만, 뒤에서는 ‘겁쟁이’라고 수군거리는 자들도 있었다.

촉군은 적개심에 불타고 있었다. 거기에 상류로부터의 공격이어서 촉군이 지형적으로도 유리했다. 촉군은 이릉과 효정까지 진격했다. 이릉은 지금의 후베이성 이창시 이릉구이며 효정은 이창시 효정구다.

여러 장수들은 “유비를 공격하려면 침략 당초에 해야 했다. 이미 700리나 침략당했고, 지금 대치상태가 7, 8개월에 이르러 요해의 땅에 수비를 굳히고 있어 앞으로 공격을 걸어도 얻을 것이 없다”고 불평했다. 이에 육손이 말했다.

“유비는 교활한 자로서 여러 전투를 해본 데다 촉군이 공격해 온 당초에는 모략이 많아 치고 들어갈 틈이 없었다. 그러나 이제 촉의 병사는 피로하고 사기도 떨어졌다. 이 적도들의 손발을 묶을 때는 바로 지금부터다.”


“법정이 살아 있었더라면…”
고대 중국의 수상전 상상도.

육손은 윤5월에 반격으로 전환하기 시작했다. 오군은 촉군의 1개 진지에 공격을 걸었지만, 전과는 없었다. 촉군은 오군의 힘을 과소평가하고 방심하기 시작했다. 육손은 유비 진영에 대한 火攻(화공)을 결심했다.

유비는 왜 육손에게 무참하게 패했을까. 유비가 무협으로부터 이릉에 이르기까지 700리에 걸쳐 수십 개의 진영을 설치하는 전술적 잘못을 범했다고 지적되어 왔다. 유비는 소년 시절에 관료학자 盧植(노식) 문하에서 잠시 수학하기는 했으나 음악을 좋아하고 옷차림에 신경을 썼던 캐릭터로서 조조·조비 부자나 손권처럼 史書(사서)와 병법서 등을 숙독한 흔적이 없다.

20대 초반에는 馬(마)상인의 보디가드가 되는 등 任俠(임협)의 세계에서 놀면서 부하들을 챙기는 보스 기질은 대단했지만, 대군을 움직이는 장수로서의 능력은 평가 받지 못한 인물이었다. 더구나 유능한 군략가 法正(법정)이 이릉·효정 전투 3년 전에 병사한 것은 유비에게 치명적이었다. 만년의 유비가 폭주한 것은 그를 억제할 참모가 없었기 때문이다.

유비가 여러 신하의 간언을 듣지 않고 동오를 공격해 대패하자 제갈량은 “孝直(효직: 법정의 字)이 살아 있었더라면 주상에게 간하여 東征(동정)을 중지했을 것이고, 설사 동정을 해도 이런 위기에 빠지지는 않았을 것”이라고 한탄했다,

유비는 開戰外交(개전외교)에서부터 실패했다. 이 때문에 조조와 손권의 협공으로 유비는 형주와 관우를 잃었다. 이에 분격한 유비는 전략적 판단 없이 동정을 감행했다. 반면 개전이 임박하자 손권은 재빨리 조비에게 臣(신)을 칭하여 魏(위)로부터 好意的(호의적) 중립을 끌어내는 외교적 승리를 거두었다. 3국간 쟁패전에서 손권은 항상 2 대 1의 전략을 주도하는 외교정책의 제1인자였다.

유비는 이릉·효정의 싸움에서 전술상의 실수도 범했다. 숲속에 진을 치면 화공을 당하기 쉽고, ‘700리 영채’라면 우군 간의 연락도 어렵다. 더욱이 10만 병력으로 수천 리 밖의 적지에서 1년간 원정했다는 것은 촉한의 경제력과 병참 현실을 무시한 일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