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흉노 선우국의 전성시대

鄭淳台   |   2009-07-31 | hit 18505

 黃帝·치우 신화의 현장


 


 북경(北京) 국제공항에 내린 필자 일행 12명은 마이크로버스를 타고 북경 서북쪽 관문인 거용관(居庸關)과 팔달령(八達嶺)장성을 넘었다. 이 일대가 한나라 때는 상곡(上谷)이라 불렸는데, 흉노를 막기 위한 최전선 기지였다. 상곡 땅을 지나 하북성 탁록현(涿鹿縣)에 도착했다. 북경공항에서 전세버스로 2시간 남짓한 거리다.


 



 ▲ 북경 서북부 팔달령 장성


 


&nbsp;탁록은 중국사람이 ‘중화문명의 開祖(개조)’로 숭배하는 황제(黃帝)가 동이족 치우(蚩尤)와 결전을 벌였다는 전설의 현장이다. <사기>5제본기(五帝本紀)에는 황제가 탁록 벌판에서 치우를 사로잡아 목을 베고 중국사상 처음으로 천자(天子)에 오른 것으로 되어 있다.


&nbsp;현재, 완공단계인 거대한 중화삼조당(中華三祖堂)에 들렀다. 삼조당 내부엔 황제를 중심으로 좌우에 치우와 炎帝(염제)의 거대한 상을 모셔 놓았다. <사기>엔 ‘흉폭한 반란 수괴’로 묘사된 치우를 현대 중국이 느닷없이 그들의 조상으로 받들겠다는 것이다. 동이족의 역사도 중국의 역사에 포함시키겠다는 동북공정(東北工程)의 속셈이 드러난 현장이다.


&nbsp;2002년 월드컵대회에서 우리 응원단인 ‘붉은 악마’는 어떤 근거에서인지 모르지만, 치우를 우리 민족의 수호신인 것처럼 그려진 깃발을 흔들었다. 치우는 네 개의 눈, 여섯 개의 손, 구리로 된 머리, 쇠로 된 이마를 가진 괴물의 모습이며, 사람처럼 말하며 모래나 돌 따위를 먹으며, 금으로 만든 무기를 사용했으며 안개를 뿜어내는 조화도 부렸다고 한다. 중국에서는 소수민족인 묘족(苗族)도 치우를 자기들의 시조로 받들고 있다.


&nbsp;<사기>의 기록에 따르면 중국의 5제는 황제(黃帝)에 이어 전욱(&#38995;頊)· 곡(&#22195;)·요(堯)·순(舜)으로 되어 있으며, 舜으로부터 선양(禪讓)을 받은 우(禹)가 하(夏)왕조를 열었다고 되어 있다. 중국인은 스스로를 ‘黃帝의 자손’ 으로 칭해 왔지만, 황제는 물론 그 후의 요··우도 전설상의 인물이며, 우 왕조도 역사적 실체로 검증된 바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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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탁록의 치우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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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탁록에 있는 치우泉&nbs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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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nbsp;답사단에 참가한 치우 연구자의 권유에 따라 탁록의 이곳저곳에 흩어져 있는 치우총(塚), 치우천(泉), 치우북채(北寨) 등 유적을 둘러보았다. 치우총의 봉분은 누군가에 의해 도굴되어 큰 구멍이 뻥 뚫려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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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nbsp;탁록 塔寺村에 있는 치우 首塚&nbs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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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nbsp;치우 수총(首塚: 목무덤)을 찾기 위해 흉려곡(匈黎谷)이라는 험한 고갯길을 돌고 또 돌아 탑사촌(塔寺村)에 이르렀다. 10여 가구가 사는 산골 외딴마을 탑사촌에서 조상 대대로 치우 수총에 제사를 지내 왔다는 집안의 周德瑞(주덕서)라는 이름의 칠순노인을 만났다.


&nbsp;그에 따르면 황제에게 패전한 후 치우의 부하들이 이곳에 도망쳐와 치우의 목을 묻었다고 한다. 수총에는 묘비가 세워져 있었는데, 1960년대 중반-70년 초반 문화혁명 때 홍위병(紅衛兵)의 습격·파괴를 막기 위해 땅속 깊이 묘비를 묻고, 그 자리에 아무 글자도 새기지 않은 백비를 세워 놓았다고 한다.


&nbsp;보행이 불편한 周씨 노인을 부축하여 산 중턱의 ‘수총’앞에 이르렀다. 백비의 석질은 의외로 좋았다. 치우연구회 회원 등은 백비 앞에 미리 준비해간 막걸리를 올려놓고 넙죽 큰절을 올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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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탁록 中華三祖堂에 있는 치우石像. 우측은 '중화문명의 開祖'로 숭상되는 黃帝의 성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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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nbsp;날이 저물어 탁록 읍내의 호텔에서 하룻밤을 묵게 되었다. 우리 답사단은 미리 호텔을 예약하지 않고 그날그날 편리한대로 숙소를 정하기로 되어 있었다. 신종 플루의 영향인지, 세계적 경제 위기의 탓인지 호텔 방 구하기가 쉬웠다.


&nbsp;그런데 호텔 이름이 공교롭게도 헌원따샤(軒轅大夏)이다. 헌원이라면 바로 치우를 죽인 黃帝의 이름이다. 훤원의 성은 공손(公孫)이다. <사기>에 헌원은 치우를 물리친 후 탁록을 도읍으로 삼았다고 되어 있지만, 물론 신화이다. 아무튼 신화의 체계는 漢族 헌원이 기마민족치우를 토벌하고 중국을 건설했다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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呂태후에게 보낸 선우의 외설적 편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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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nbsp;중국의 秦漢(진한)과 흉노가 대치하던 최전선은 어양(漁陽: 北京)·상곡(上谷: 하북성 懷來 동남)·대(代: 하북성 蔚縣 동북)·안문(雁門: 산서성 右玉 서부)·定襄(정양: 내몽골 和林格爾 서북)·운중(雲中: 내몽골 托克托 동북)·오원(五原: 내몽골 包頭市 서쪽)·삭방(朔方: 내몽골 杭錦旗 北황하 남안)이었다.


&nbsp;北京 서쪽을 달리는 태행(太行)산맥을 지나면 북위 40도 전후, 표고 약 1000m의 황토고원지대인데, 우리 일행의 답사코스도 바로 이 지역이었다(지도 참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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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nbsp;우리 일행은 7박8일 동안 하북성·산서성의 북부 지역과 내몽골자치주와 오르도스 지역을 답사했다. 여름 7월의 한낮 기온이 35도에 육박했으나 건조한 기후의 영향으로 땀을 많이 흘리지는 않았다.


&nbsp;전국시대에는 진··연이 흉노와의 경계를 접해 북방에 각각 장성을 쌓았다. 탁록에서 고속도로로를 6시간쯤 달려 내몽골자치구의 省都 호화호특(呼和浩特)에 도착했다. 호화호특 시가 북쪽 陰山(음산)산맥 자락에는 전국시대 趙 장성이 남아 있다(사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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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호화호특市 북쪽 음산산맥 기슭에 있는 戰國시대 趙 長城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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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nbsp;長城이란 표현이 어울리지 않게 짧게 토막이 난 토성이지만, 최소한 2300년의 세월을 견뎌온 당당한 유적이다.


전국시대 북방 3국의 장성을 연결·보강한 것이 진(秦)의 만리장성이다. 그러나 진 왕조는 중국통일 15년 만에 멸망했다. 바로 이 무렵에 즉위한 흉노의 모돈 선우는 楚漢(초한) 전쟁 시기에 세력을 확대했다. 중국을 통일한 한 고조가 백등산(白登山: 산서성 大同)에서 모돈 선우에게 포위되어 화평을 요청한 사실은 앞에서 거론했다. 한의 화친 정책은 여후(呂后) 때도 계속되었지만, 매우 굴욕적이었다.


&nbsp;고조 유방의 사망 후 한나라의 실질적 통치자는 고조의 아내였던 呂태후였다. 고조의 뒤를 이은 혜제(惠帝)· 소제(少帝) 등으로 이어진 제2-4대 황제는, 정권욕이 강렬했던 여태후의 꼭두각시였다. 사마천의 <史記>에도 혜제 이후 세 황제는 여태후 본기(本紀)에서 부수적으로 다루고 있다. <漢書>에 따르면 이때 모돈 선우는 여태후에게 매우 외설적인 편지를 보냈다.


&nbsp;<고독에 번민하고 있는 나는 늪지에서 태어나 초원에서 자랐노라. 이따금 국경을 넘어 중화(中華)의 땅에서 노닐기를 원한다. 지금 폐하는 혼자 된 몸, 나 또한 홀몸이라 우리 두 임금이 모두 쓸쓸하다. 원컨대 내가 가진 것을 가지고, 당신의 없는 곳을 채움이 어떠하리>


&nbsp;원래, 흉노는 말 위에 올라 초원을 달리는 것과 미인의 몸 위에 오르는 것을 남자의 양대 즐거움으로 삼는 야성적인 민족이었다. 그러나 이때 여태후는 나이 칠순, 이미 여자로서의 용색(容色)을 잃고 있었다. 그런 만큼 모돈 선우의 편지는 연서가 아니라 능멸의 편지였다.


&nbsp;이에 격노한 여태후는 흉노를 토벌하려고 했다. 즉시, 여러 장수들을 모아 대책을 논의했다. 상장군 번쾌(樊&#22130;)가 먼저 말했다.


&nbsp;“원컨대 신이 10만의 군대를 얻어 흉노 땅을 휩쓸고 오겠습니다”


&nbsp;여러 장수들은 여태후가 무서워 감히 이견을 내세우지 못하고 머뭇거렸다. 그러자 낭중으로 있던 계포(季布)가 앞으로 나서,


&nbsp;“일찍이 고조께서 40만 대군을 거느리고 가서도 백등산에서 곤욕을 당하셨습니다. 그때 번쾌는 상장군이었습니다. 그런데 지금, 번쾌가 10만의 군대를 가지고 흉노를 휩쓸 수 있겠습니까. 전쟁의 상처가 아직 아물지 않았는데도 불구하고 번쾌가 망녕된 말로 아첨하여 천하를 요동시키려 합니다. 번쾌를 참형에 처하소서”


&nbsp;번쾌라면 여태후에게 여동생(여수)의 남편이다. 그러나 냉정히 판단할 때 흉노와 싸울 시기는 아니었다. 여태후도 이 점을 깨닫고, 더 이상 흉노 정벌을 거론하지 않고, 계속 화친을 추진했다. 여태후는 “소첩(小妾), 나이 이미 칠순, 병이 들어 대선우를 모실 수 없어 송구하다”라는 내용의 답서를 보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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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nbsp;흉노 선우국의 전성시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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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nbsp;여태후가 죽은 후 즉위한 5대 문제(文帝) 그리고 6대 경제(景帝) 때도 한나라는 흉노선우국에 해마다 비단·곡식을 세폐(歲幣)로 바쳤다. 그러나 문제 3년(BC 177) 5월, 흉노의 우현왕(右賢王)이 오르도스를 점령하고, 상군(上郡: 섬서성 楡林 동남)의 요새를 공격했다.


&nbsp;문제는 승상 관영(灌&#23344;)에게 토벌을 명했다. 관영이 전차대와 기병대 8만5000을 이끌고 우현왕을 공격하고, 문제가 太原(태원)까지 나아가 뒤를 받쳤지만, 때마침 제북왕 흥거(興居)의 반란이 일어나 흉노 토벌은 중지되었다. 그 이듬해, 모돈 선우는 다음 내용의 서한을 문제에게 보냈다.


&nbsp;<천제(天帝)가 세운 흉노의 大선우, 삼가 황제께 문안을 드린다. 별고 없으신가. 이번 사태는 원래 귀국의 수비대가 맹약을 깬 일로 비롯된 것이지만, 나는 인국과의 우호를 손상한 데 대한 징벌의 뜻에서 우현왕(右賢王)에게 서방의 월지(月氏)를 토벌하도록 명했다. 나의 군대는 하늘의 가호와 훈련된 병력, 강건한 말의 도움으로 월지를 항복시키고, 다시 누란(樓蘭)·오손(烏孫)·호게(呼揭) 및 그 주변 27개국을 병합했다.……현재 나의 희망은 무기를 거두고, 병사와 말을 쉬게 하며, 이때까지의 한(恨)을 물에 떠내려 보내고, 화친조약을 부활시키는 것이다. 이에 의해 종전처럼 변경의 백성을 안심시켜 어린이가 튼튼하게 크고 늙은 사람이 평안하게 사는 천하를 만들어 이것을 자손에게 남기고자 한다>


&nbsp;여기에서 누란이라는 것은 신강(新疆)자치구의 로프놀 호반(湖畔)에 번영했던 오아시스 도시국가이고, 오손은 당시 준가리아 분지 북변에 있었던 유목기마민족, 호게는 위구르族으로 보인다. 이리하여 흉노는 東투르키스탄(지금의 신강자치구)의 도시국가로부터 노예··펠트·모직물 등을 징세하고, 종래 월지가 주무르고 있던 동서교역의 이익을 장악하게 되었다(지도 참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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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nbsp;한편 월지는 흉노를 겁내 멀리 이리 분지(盆地)로 도망했지만, 그 후 오손에 의해 이리로부터도 쫓겨나 아무 강 유역으로 근거지를 옮겼다. 이로써 東투르키스탄에 대한 흉노의 지배권이 확립되었는데, 이와 함께 흉노는 감숙(甘肅) 지방을 통하여 티베트系의 강(羌) 등도 영향권에 넣어 한나라를 서북방과 측면으로부터 위협을 가하게 되었다.


&nbsp;이처럼 흉노의 유목기마민족국가는 모돈 선우 一代에 동쪽은 열하(熱河: 지금의 하북성 북부)로부터 서쪽은 東투르키스탄까지, 북쪽은 바이칼 호변(湖邊)·예니세이江 상류 유역으로부터, 남쪽은 장성 지대·오르도스 방면에 이르는 모든 민족을 지배 하에 두었다. 실로 모돈 선우와 그의 아들 노상(老上) 선우 시대는 흉노의 발흥기인 동시에 전성기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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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nbsp;위청·곽거병의 흉노 정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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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nbsp;文帝·景帝의 시기, 한나라는 오랜 전란에 시달린 백성을 휴양시키는 데 힘써 경제가 크게 발전했다. 그래서 중국사에서는 이를 문경의 치(文景의 治)라고 부른다. 景帝 초기, 吳王 유비(劉&#28638;)가 주동이 된 吳楚(오초) 7국의 반란이 일어나고, 반란군의 개입 요청을 받은 흉노가 안문군 장성 북방에 병력을 집결시키는 사태가 일어났다. 그러나 오초7국의 난은 곧 진압되었다. 흉노도 정세를 관망했기 때문에 만리장성을 넘어오지 않았다.


&nbsp;BC 141년, 경제가 죽고, 황태자 유철(劉徹)이 17세의 나이로 그 뒤를 이어 제위에 올랐다. 그가 바로 한의 7대 황제 무제(武帝)이다. 한무제는 중국역사상 진시황과 더불어 秦皇漢武(진황한무)로 일컬어질 정도로 과감했고, 많은 치적을 남겼다.


&nbsp;건원 6년(BC 135), 어전회의에서 흉노에 대한 대책이 논의되었다. 무제는 고조 이래 흉노에 취해 오던 화친정책을 굴욕적이라 하여 공세 위주의 강경책으로 전환했다. 그러나 흉노를 치기 위해서는 수천 리 원정을 감행해야 했고, 그럴 경우 흉노가 만반의 태세를 갖추고 있다가 피로에 지친 한군에 대해 역습하면 백전백패하게 마련이었다.


&nbsp;그래서 장성 남쪽 안문군 마읍(馬邑: 산서성 북부)에다 30만 명의 복병을 미리 숨겨놓고 이곳에 흉노를 유인해 결정타를 가한다는 작전을 세웠다. 명망이 높은 마읍의 호족 섭일(&#32886;壹)이 흉노로 들어가 선우에게 다음과 같이 말했다.


&nbsp;“제가 혹독한 마읍의 관리들을 모두 베어 죽이고, 성을 들어 항복하면 막대한 재물을 얻을 수 있습니다”


&nbsp;이때 흉노의 군주는 모돈 선우의 손자인 군신(軍神) 선우였다. 섭일은 죄수들의 머리를 베어 마읍의 성벽에 높이 매달아 성내의 봉기가 성공한 것처럼 가장했다. 흉노의 밀정이 그것을 마읍 관리의 수급인줄 믿고 선우에게 보고했다. 군신 선우는 10만의 기병을 거느리고 공격에 나섰다.


&nbsp;그런데 진격로 일대의 초원에 소··양 떼가 가득히 방목되어 있는데도 불구하고 사람의 그림자 하나 비치지 않았다. 푸른 초원을 바라보고 사는 유목민족은 시력이 5.0-6.0인 사람도 허다하다. 수상쩍게 생각한 군신 선우는 장성 가까이에 있는 봉화대 하나를 급습, 그 책임자로부터 한병이 마읍에 매복하고 있는 사실을 알아냈다. 군신 선우는 아무런 타격을 받지 않고 북쪽으로 회군했고 한군은 막대한 동원비용만 허비했다.


&nbsp;그로부터 4년 후인 BC 126년, 한무제의 명을 받은 위청(衛靑)·공손오(公孫敖)·공손하(公孫賀)·이광(李廣) 등 장수 넷은 각각 1만기를 거느리고 네 방향으로 흉노 땅에 쳐들어갔다. 이 가운데 공손하는 흉노를 만나지도 못했고, 공손오는 패전해 7000기를 잃었으며, 이광은 흉노에 패해 부대가 전멸하고 자신은 포로가 돼 끌려가다 겨우 탈출했다. 공손오와 이광의 죄는 참형에 해당되었으나 돈을 바치고 사형을 면하고 서인(庶人)이 되었다. 무제 때는 군비 조달에 급급해 사형수도 돈을 내면 사면되었다.


&nbsp;네 장수 가운데 오직 위청만이 상곡으로부터 북진, 흉노가 하늘에 제사지내는 용성을 공략하여 적을 참수하거나 포로로 잡은 것이 700명에 달했다. 그다지 큰 전과는 아니었지만 건국 이래 70년 만의 경사로서 조야가 흥분했다. 그러나 전체적 전황은 패전이었다.


&nbsp;BC 127년 위청은 기병 3만을 거느리고 안문을 나가 흉노 수천 명을 죽였고, 다음 해엔 운중으로부터 출진하여 장성 바깥 서쪽을 돌아 진나라 말기 흉노에게 빼앗겼던 오르도스 지방을 회복했다. 그 후 위청은 대장군이 되어 7차례에 걸쳐 원정군을 이끌고 흉노와 싸워 공을 세웠으나, 그 후반엔 그의 생질인 곽거병(&#38669;去病)의 눈부신 전공 때문에 그의 명성은 오히려 빛을 잃을 정도였다.


&nbsp;BC 112년, 곽거병은 3회에 걸친 원정을 감행했다. 제1회 원정은 흉노의 절란왕(折蘭王)·노후왕(盧侯王)을 죽이고, 혼야왕의 아들을 사로잡고, 적의 수급과 포로가 8100 명에 이르렀다.


&nbsp;그해 가을의 제3회 원정은 혼야왕의 항복을 받기 위해 하서(河西)로 진출한 것이었다. 계속되는 패전에 흉노의 이치사(伊雉斜) 선우가 격노하여 혼야왕과 휴도왕에게 그 책임을 물으려 하자 이들 두 왕은 문책이 두려워 한나라에 항복하려 했다. 그런 중에 휴도왕이 항복을 망설였기 때문에 혼야왕이 휴도왕을 죽이고, 그 무리를 빼앗았다.


&nbsp;혼야왕은 한나라 측에 흉노 내부의 사정을 알리고 지원을 요청했다. 이에 무제는 곽거병에게 군을 이끌고 가서 혼야왕을 맞으러 갈 것을 명했다.


&nbsp;곽거병이 황하를 건너 혼야왕의 부대에 접근하자 부장의 다수가 동요하여 도망할 낌새를 보였다. 이에 곽거병은 혼야왕의 진영에 급히 달려가 왕과 회견하고, 도망하려고 하는 자 8000여 명을 참살했다, 이때 항복한 흉노는 수만 명에 달했는데, 공식적으로는 10만 명이라고 칭했다.


&nbsp;장안에 도착한 흉노 일행에게 무제는 거액의 은상을 내리고, 혼야왕에 대해선 1만 호의 영지를 주고 누음후(&#28426;陰侯)로 봉했다. 그의 부장 4명도 각각 작위를 받았다.(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