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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鄭淳台 기자의 역사현장 탐사] 松坡(송파) - 江東區(강동구)
漢城百濟 500년의 도읍지

정순태   |   2007-04-29 | hit 4455

지난 4월4일 오전 10시, 필자는 쉐라톤워커힐호텔(서울 광진구 광장동) 뒤편에 위치한 阿且山(아차산)과 좁은 고갯길 하나를 사이에 둔 홍련봉에 올라갔다. 홍련봉의 절벽 가장자리에 서면 漢江 너머로 삼각형 지붕의 건물(시티極東아파트)이 마주 보인다. 그 일대가 漢城百濟(한성백제)의 都城(도성)이었던 風納土城(풍납토성)이다. 風納의 우리말은 「바람들이」다.

2004~2005년에 실시된 고려大 「매장문화연구소」의 홍련봉 발굴조사에서는 고구려軍의 堡壘(보루) 2개소와 움집터, 그리고 銘文(명문) 토기 편 2점을 비롯한 많은 토기가 발굴되었다. 특히 南韓에서는 처음으로 고구려의 연꽃무늬 꽃기와가 출토되어 학계의 관심을 끌었다.

고구려의 변방이었던 이곳에서 당시로선 매우 귀한 연꽃무늬 꽃기와가 발견되었다는 사실은 도대체 무엇을 의미하는 것일까. 이는 475년 漢城百濟의 都城(도성)을 공격했던 고구려군의 최고사령부가 홍련봉에 설치되었을 가능성을 높게 한다. 그때 고구려군의 총사령관은 長壽王(장수왕)이었다. 다음은 「三國史記(삼국사기)」의 관련 기록이다.

<蓋鹵王(개로왕) 21년(475) 가을 9월, 고구려왕 巨璉(거련: 長壽王의 이름)이 군사 3만 명을 거느리고 와서 수도 漢城(한성)을 포위했다. (개로)왕이 싸울 수 없어 성문을 닫고 있었다. 고구려가 군사를 네 방면으로 나누어 협공하고, 또한 바람을 이용해 불을 질러 성문을 태웠다. 백성들 중에는 두려워하여 성 밖으로 나가 항복하려는 자들도 있었다. 상황이 어렵게 되자 왕은 어찌할 바를 모르고, 기병 수십 명을 거느리고 성문을 나가 서쪽으로 도주했으나 고구려군이 추격하여 …>


백제 개로왕이 참수당한 현장

아차산성과 그 주위의 아차산 보루.

개로왕은 500년 漢城百濟를 지켜내지 못한 悲運(비운)의 君主였다. 「三國史記」 개로왕 21년 條의 뒷부분은 그가 죽음에 이르는 과정과 함께 당시 백제의 都城 체제에 대한 중대한 시사를 하고 있다.

<이때 고구려의 對盧(대로: 관직) 齊于(제우), 再曾桀婁(재증걸루), 古?萬年(고이만년) 등이 군사를 거느리고 와서 北城(북성)을 공격한 지 7일 만에 함락시키고, 南城(남성)으로 옮겨 공격하자 성 안이 위험에 빠지고, (개로)왕은 도망해 나갔다. 고구려 장수 桀婁 등이 왕을 보고 말에서 내려 절을 하고, 얼마 후에 왕의 낯을 향해 세 번 침을 뱉고서 죄목을 따진 다음 阿且城(아차성) 밑으로 묶어 보내 죽이게 하였다. 桀婁와 萬年은 본래 백제의 사람으로서 죄를 짓고 고구려로 도망했었다>

위의 記事에서 고구려 장수 재증걸루와 고이만년은 개로왕에게 깊은 원한을 품은 인물임을 알 수 있다. 그들은 개로왕의 王權(왕권)강화 정책 추진과 그에 따른 백제 귀족계급 내부의 권력암투에 패배해 고구려로 망명한 것으로 보인다.

다음으로, 멸망 당시 한성백제의 都城 체제는 北城과 南城으로 2원화해 있었음을 알 수 있다. 개로왕은 7晝夜(주야)에 걸친 방어전 끝에 「北城」이 무너지는 모습을 「南城」에서 목격하고 南城을 탈출하다가 고구려 장수 재증걸루 등에게 사로잡혔던 것이다. 北城은 풍납토성, 南城은 700m 남동쪽의 夢村土城(몽촌토성)으로 比定(비정)된다.

홍련봉 보루에서는 고구려군의 對백제 기동로였던 중랑천뿐만 아니라 풍납토성과 몽촌토성이 관측된다.

홍련봉 진입로에는 높은 울타리가 쳐져 있다. 아직 발굴조사가 끝나지 않아 「출입금지 구역」으로 되어 있지만, 필자는 마침 현장답사를 나온 국방부 軍史편찬연구소 선임연구원 白奇寅(백기인) 박사 일행에 끼어 홍련봉 벼랑 끝에서 江 너머 남쪽을 조망할 수 있었다.

홍련봉에서 내려와 고갯길을 건너 아차산 등산로 입구에 있는 「만남의 광장」에 이르렀다. 개로왕이 끌려와 참수당한 「아차산 밑」은 바로 이 「만남의 광장」 부근일 가능성이 높다.


고구려 장수 溫達이 전사한 현장

때마침, 바로 이곳 龍谷(용곡)초등학교 아이들의 합창소리가 떠들썩하게 들려왔다. 필자의 귀에는 개로왕의 목을 벤 고구려군의 함성처럼 섬뜩하게 들렸다. 그래도 세월은 무심하여 개나리와 진달래가 만개하고, 벚꽃이 개화해 봄 냄새가 물씬했다.

「만남의 광장」에는 溫達(온달) 장군과 平岡(평강) 공주의 동상이 세워져 있다. 590년, 온달은 신라가 차지하고 있던 漢江유역을 빼앗으려고 아차산성 밑에서 신라군과 싸우다가 흐르는 화살을 맞고 전사했다. 한강유역의 주인은 백제→고구려(475년)→백제(553년)→신라(553년 7월)로 바뀌었다.

이렇게 한강유역은 3국이 영토 확장을 위해 피터지게 싸웠던 유혈의 현장이다. 한강유역을 차지한 세력이 한반도의 主體(주체)로 떠올랐음은 역사가 가르치는 바이다.

「자생식물 관찰로」를 따라 아차산(316m)으로 올라갔다. 아차산은 九里市 서쪽과 서울市 동쪽의 경계에 위치해 있는데, 서쪽의 용마산(348m), 북쪽의 봉화산, 그리고 시루봉·홍련봉 등 주변의 봉우리들을 모두 포함하는 명칭이다.
아차산 입구「만남의 광장」에 세워진 고구려 溫達 장군과 平岡 공주의 동상. 국방부 답사단이 사진촬영을 하고 있다.

아차산성에서는 한강 南岸과 의정부에 이르는 길목(王宿川)을 조망할 수 있다. 표고 200m 봉우리 정상에서 시작해 동남으로 한강을 향하여 완만하게 경사진 산중턱을 둘러서 주위 약 1km의 성벽을 이루고 있다. 형식은 산꼭대기를 중심으로 동그랗게 산성을 쌓은 테뫼식(鉢卷式·발권식)에 속하지만, 규모가 커서 성 안에 작은 계곡도 있다.

성벽의 구조는 削土法(삭토법)에 의해 형태를 축조한 후 그 윗변을 따라 돌아가면서 낮은 석벽을 구축한 것 같으나, 현재는 돌이 무너져서 돌과 흙을 섞어 쌓은 모습을 보이고 있다. 성벽의 높이는 외부에서 보면 평균 10m 정도이며, 내부에서 1.2m 정도이다. 성 밖으로 廣津(광진)나루에 이르기까지의 사이에는 좌우 양쪽의 지형을 이용해 흙을 깎아 내어 성벽을 대신한 흔적들이 남아 있다.

아차산성은 북쪽 성벽이 더욱 튼실한 모습이다. 원래, 백제가 고구려군을 막기 위해 쌓은 山城이기 때문이다.

아차산 일대에는 아차산성과 함께 20여 개의 보루가 발굴되었다. 한강변을 따라 펼쳐진 낮은 봉우리에는 비교적 규모가 적은 보루, 아차산성 위쪽으로는 그보다 규모가 큰 보루들이 배치되어 있다. 발굴조사에 의하면 九宜洞(구의동) 보루는 10여 명, 아차산 제4보루는 100여 명이 주둔했던 규모이다.

아차산 보루에서는 성벽, 건물터, 온돌자리, 디딜방아 터가 발굴되었다. 아차산성에서는 고구려의 성벽, 건물터, 연못터, 東門터 등이 확인되었다. 아차산성과 아차산 일대에서는 모두 3000여 점의 고구려 토기와 철기류가 출토되었다.

아차산에서 내려와 쉐라톤워커힐 후문 부근에 있는 음식점 「明月館(명월관)」에 들렀다. 명월관 창가에 앉으면 한강 너머 풍납토성과 몽촌토성을 더 가까이에서 관찰할 수 있다.
일제 강점기에 촬영된 풍납토성의 北壁과 垓字. 垓字는 지금 천호동의 중심가인 43번 국도로 변해 있다.


하수도 시설을 갖췄던 風納土城
풍납토성의 위성사진(2002년). 해양왕국 백제의 都城답게 漢江 하류·西海를 항한 선박의 모습을 이루고 있다.

점심 후, 필자는 천호대교를 건너 풍납토성의 北壁(북벽: 길이 약 300m) 바로 앞에 차를 세웠다. 10년 전만 해도 아이들이 토성 위에 올라가서 놀기도 했지만, 이제는 울타리를 쳐서 출입을 막고 있다. 오후 2시, 풍납토성 北壁 앞에서 漢城百濟박물관 건립추진 전문위원 金起燮(김기섭) 경기大 대우교수와 만났다.

일제 강점기에 촬영한 풍납토성 北壁의 사진을 보면 성벽의 위용을 느낄 수 있다. 이 사진을 보면 풍납토성의 北壁 앞에는 상당한 폭의 샛강이 흐르고 있다. 金起燮 교수는 『이것은 자연하천이 아니라 풍납토성의 방어를 위한 垓字(해자)』라고 말했다. 垓字는 성 주위에 둘러 판 못이다.

―제가 1968년 2월26일(이날은 필자가 대학을 졸업한 날이었음), 지금은 철거된 옛 廣津橋(광진교: 천호대교 바로 동쪽에 위치함)를 건너 千戶洞(천호동) 친척집에 찾아간 일이 있는데, 그때 이 부근에서 이렇게 넓은 샛강을 보지 못했는데요.

『일제 강점기에 이 해자는 폭 40~ 50m 정도였을 것으로 추정되며, 鄭위원이 1968년 여기에 왔을 때는 실개천으로 변해 있었을 겁니다. 그런데 이 사진에 보이는 풍납토성 北壁을 보십시오. 우람하잖아요? 해자에서 파낸 흙으로 풍납토성의 北壁을 축조했을 겁니다』

현재, 北壁 앞 해자는 매립되어 천호동 중심가를 관통하는 43번 국도로 변해 있고, 도로변에는 현대백화점 千戶店(천호점) 등 고층건물이 즐비하다.

풍납토성은 한강변에 쌓은 平地城(평지성)으로, 원래는 둘레가 4km 정도였지만, 1925년 한강의 大홍수에 의해 일부가 유실되어 현재 성벽은 약 2.7km만 남아 있다. 현재, 풍납토성 내부의 주민은 약 5만 명, 초등학교가 두 개나 있다.

유물은 모두 초기 백제 당시의 최고급품이었다. 금반지·백동거울·옥구슬과 같은 귀중품뿐만 아니라 흙을 구워 만든 초석, 三足토기, 하수관용으로 사용되었던 土管(토관), 바닥에 까는 벽돌, 얇고 큰 기와 등 당시 최고 계급만 쓸 수 있었던 유물들이 많이 발견되었다. 청동 ?斗(초두), 동전무늬 토기와 청자 등 중국에서 들여온 물건도 많았다. 풍납토성의 20분의 1 정도만 발굴 조사한 현재, 이곳에서 출토 보관 중인 유물만 수만 점에 이르고 있다.

특히, 한성백제의 높은 문화 수준을 말해 주는 결정적인 유물이 土管(토관)이다. 20세기 중반 시골에서 어린 시절을 보낸 우리들은 토관 등의 하수처리 시설을 갖춘 집에서 살지 못했다. 풍납토성에서 출토된 토관은 지름 15cm, 길이 30cm다. 필요에 따라 몇백 개라도 연결할 수 있는 구조다.


건설현장에서 역사·고고학자의 출입을 막았던 내막
풍납토성에서 출토된 초두.

金교수와 필자는 풍납토성 北壁을 돌아 자동차 두 대가 교차하기도 어려운 주택가의 골목길로 들어섰다. 東壁(동벽)을 바라보며 100여m쯤 내려갔을까? 여기서 東壁은 끊겨 버리고, 평지화해 재래시장이 들어서 있다. 迷路(미로) 같은 주택가 골목길을 헤매다 보니 東壁의 군데군데를 허물고 풍납路를 향한 좁은 도로가 나 있다.

『주민들이 東壁 위에다 집을 짓고 파밭을 일구며 살았습니다. 일제 강점기 이래 1960년대까지 풍납토성 안에는 흙벽돌 공장이 여러 개 있었어요. 성벽의 모래흙으로 흙벽돌을 찍어 냈던 거지요. 천호동 현대백화점-英坡(영파)여중·고교-풍납동 극동아파트 앞으로 이어지는 풍납路(땅 밑으로 8호선 지하철이 지나가는 도로)는 한성백제 당시엔 폭 30~40m의 해자였습니다. 이 해자를 축조하면서 퍼낸 모래흙으로 東壁 1.5km를 쌓았던 것으로 추정됩니다』

한강변 쪽의 西壁(서벽: 서울아산병원 바로 북쪽)은 홍수 등으로 크게 훼손되고 일부만 남아 있는 상태다.
풍납토성에서 출토된 土管(위쪽)과 수키와(아래쪽). 하수도用 토관은 한성백제의 높은 문화 수준을 나타내는 결정적 유물이다.

『풍납토성은 1966년 서울大 고고학과 金元龍(김원룡) 교수가 학생들을 데리고 와서 실습 수준의 조사를 했습니다. 그때 몇 군데를 파고는 아무것도 나오지 않자 조사를 계속하지 않았습니다』

―1976~1978년에 풍납토성 北壁이 현재처럼 정비되었는데, 무엇을 근거로 했던 것입니까.

『제대로 조사하지 않고 그냥 복원해 「사적 11호」로 지정한 것입니다. 성벽 높이가 7~9m, 성벽 밑부분 폭은 20~30m쯤 되겠다고 어림짐작해 현재의 모습으로 정비된 것입니다』

그 후 조사에서 풍납토성의 성벽 높이는 9~11m, 성벽 밑부분 폭은 43~45m인 것으로 밝혀졌다. 우리는 다시 풍납路로 나와 풍납동 현대아파트 앞을 지났다.

『1996년, 저 현대아파트를 지으면서 시공사 측에서 펜스를 높이 치고 역사학자나 고고학자의 출입을 막았어요. 그때 상문大 李亨求(이형구) 교수가 百濟문화개발연구원의 조사 의뢰를 받아 공사현장에 들어가려고 했지만, 경비원들에게 저지당했습니다. 李교수는 경비가 조금 느슨해진 1997년 신정 연휴기간에 지질학자를 「사칭하고」 공사현장에 들어갔다가 깜짝 놀라고 말았습니다』

―왜요.

『공사현장의 땅을 4~5m쯤 파놓았는데, 한성백제 시절의 토기 편이 고스란히 남아 있었고, 그중 몇 개는 문화재급이었기 때문이죠. 李교수가 즉각 문화재청에 신고해 아파트 건설공사가 일시 중단되었습니다』


잠실은 섬이었다
풍납토성 東壁 밖에서 발굴된 나무로 짠 우물.

―그렇다면 한성백제의 사람들은 지금보다 4m 아래에 주거공간을 형성하고 있었군요.

『한성백제 사람들은 지금 우리보다 4m 아래의 땅을 밟고 살았던 거죠. 성벽을 쌓기 전의 주거공간은 세 겹의 環濠(환호)로 둘러싸여 있었습니다』

우리는 올림픽공원 北2門을 향해 우회전하면서 城內洞(성내동) 再개발현장을 바라보았다. 성내동의 옛 시영아파트(5층)는 허물어지고 고층화 공사가 진행 중에 있다.

―한강의 물줄기나 한강변의 지형도 세월이 흐르면서 많이 달라지는 것 같습니다. 옛 지도를 보면 한강에는 지금보다 훨씬 河中島(하중도)가 많더군요.

『지금의 蠶室(잠실)도 河中島였습니다. 조선조 中宗(중종) 때까지만 해도 城內川(성내천)-석촌호수(롯데월드 앞)-炭川(탄천)을 잇는 선으로 한강의 本流(본류)가 흘렀어요. 지금의 본류가 支流(지류)였고요. 당시 송파나루는 석촌호수 변에 있었죠. 지금 송파대로를 사이에 두고 2개의 호수로 나누어진 석촌호수는 그때의 흔적입니다. 1970년대의 개발에 의해 잠실은 섬이 아니라 완전히 뭍으로 변한 거예요』


500년 漢城百濟의 유물을 전시할 박물관이 없다

―城內洞은 풍납토성 밖에 위치해 있는데, 왜 「성 안 동네」라는 뜻의 이름이 붙은 걸까요.

『성내동이 풍납토성과 몽촌토성 사이에 있어 그렇게 불린 것 같아요. 지금의 성내동·吉洞(길동)은 물론, 先史 주거지가 있는 岩寺洞(암사동)에서도 백제시대의 주거지가 발굴되었습니다. 그러니까 지금의 江東區는 한성백제의 수도권인 것입니다』

―어떤 유물이 발견되고 있습니까.

『풍납토성 바깥 城內洞에서 목재로 짠 우물이 발굴되었습니다. 땅속 120cm에 묻혔고, 땅 위로 60∼70cm가 표출된 모습이었습니다. 나무로 된 우물을 짰다면 상당히 유족한 사람들이 살았던 것을 의미하죠』

金교수와 필자는 올림픽공원 北2門 주차장에 차를 세워두고 성내천 변을 걸어서 夢村(몽촌)역사관으로 발길을 옮겼다. 城內川은 몽촌토성의 북쪽 해자다. 요즘 해자 안에는 온갖 종류의 새와 수초들이 서식하고 있다. 몽촌역사관은 500평 규모이다.

―몽촌토성에 출토된 유물은 얼마나 됩니까.

『약 7000점입니다. 풍납토성에서 출토된 유물을 합치면 수만 점에 달합니다』

―그걸 어디에 보관하고 있습니까.

『유물을 관리할 공간이 없어 일부는 대학 박물관에 빌려 주고, 대부분은 국립 문화재연구소의 「닭장 격납고」에 간신히 쌓아 두고 있어요. 60년 熊津百濟(웅진백제)의 유물은 공주박물관, 120년 泗泌百濟(사비백제)의 유물은 부여박물관에서 전시·보관하는데, 500년 漢城百濟의 유물은 전시할 공간이 없습니다』
한성백제의 王城으로 추정되는 몽촌토성 성벽이 산책로가 되고 있다. 뒤편 산은 江北의 아차산.


흐지부지된 漢城百濟박물관 건립
몽촌토성에서 출토된 유물 - 기대(높이 54cm)

―서울시 역사박물관은 이용할 수 없습니까.

『그곳은 定都(정도) 600년에 맞춰 지은 조선왕조 전문 박물관입니다. 사적지인 慶熙宮(경희궁) 터에 자리 잡고 있어 증축할 수도 없어요. 더욱이 한성백제박물관은 몽촌토성과 풍납토성 가까이에 있어야 의미가 있는 겁니다. 올림픽공원 안에 2500평의 부지는 확보된 상태이지만, 서울시가 건립을 위한 예산 배정을 미루고 있습니다』

―서울시장이 오페라 하우스를 짓겠다면서 한성백제 박물관 건립에 대해 소극적인 까닭은 무엇입니까.

『「박물관 지어 뭣 하느냐」는 분도 많고, 人文 쪽 문화보다 예술 문화를 중시하는 시대 풍조도 작용하는 것 같습니다. 그러나 서울 江北은 조선왕조 500년의 도읍지, 강남은 한성백제 500년의 도읍지로서 문화 인프라를 갖춰야 한다는 차원에서 생각하면 한성백제박물관의 건립을 미룰 수 없는 일입니다』

몽촌토성의 行路(행로)는 비극적이다. 왜냐하면 「주인」인 몽촌토성이 「굴러들어 온」 올림픽공원에 곁방살이를 하는 모습이기 때문이다.

정부는 88서울올림픽 개최를 앞둔 1983년, 몽촌토성이 위치한 송파구 방이동 일대에 올림픽공원을 건설하기로 결정했다. 이때, 몽촌토성을 한성백제의 王城으로 지목하고 있던 李基白(이기백·故人) 교수 등 역사학자들은 『문화재가 소실될 우려가 있다』면서 『王城인지 조사해 보자』고 제의했다.
몽촌토성에서 출토된 유물 - 금동 버클(길이 4.3cm)

발굴조사 결과 유물이 金銅 대금구, 뼈갑옷, 器臺(기대) 등 7000여 점 발굴되어 몽촌토성의 중요성이 세상에 알려지게 되었다.

정부와 서울시는 학계의 건의를 받아들여 『올림픽공원 안에 한성백제박물관을 지어 주겠다』고 약속했다. 그러나 88서울올림픽이 끝난 뒤 계획 규모가 2500평→1500평→1000평으로 자꾸 줄어들더니만, 겨우 500평 규모의 「몽촌역사관」으로 졸아든 규모로 건립되어 1992년에 오픈했다. 「역사관」은 학예사가 상주하지 않는 소규모 전시관이다.

이런 상황에서 1997년 인근 풍납토성에서 수만 점의 유물이 쏟아져 나왔다. 발굴조사가 계속되고 있는 만큼 앞으로 또 얼마나 많은 유물이 쏟아질지 아무도 예상할 수 없다. 2003년 무렵, 서울시는 한성백제박물관을 짓겠다고 재차 공약했다. 그러나 박물관 건립은 자꾸 미뤄져 이제 흐지부지된 상황이다.

―金교수께선 「삼국사기」 백제본기 개로왕 21년(475) 條에 나오는 「北城」과 「南城」을 풍납토성과 몽촌토성으로 比定하시는데, 이같이 都城이 2개의 성으로 구성된 다른 사례가 있습니까.

『특히, 여러 나라가 치열하게 싸웠던 중국 戰國시대의 都城 중에는 동-서 혹은 남-북으로 2개의 성이 나란히 축조된 형태가 적지 않습니다. 대표적인 예로서 邯鄲故城(한단고성: 趙의 도성), 臨淄故城(임치고성: 齊의 도성), 燕下都故城(연하도고성: 燕의 도성) 등이 유명해요』


夢村土城 위에 올라도 漢江이 안 보인다
몽촌토성에서 출토된 유물 - 뼈갑옷

―한성백제 패망과 관련한 「日本書紀」의 기록을 보면 『고구려가 大城을 7일 낮밤 동안 공격해 王城을 함락하니 마침내 尉禮(위례)를 잃었다」고 되어 있습디다만, 여기서 「大城」·「王城」·「尉禮」는 무엇을 의미합니까.

『大城은 풍납토성, 곧 北城이고, 몽촌토성은 그와 연계된 南城이며 王城입니다. 尉禮, 즉 河南慰禮城(하남위례성)은 북성과 남성의 合稱(합칭)으로 봅니다. 李亨求 교수는 「풍납토성이 한성백제의 王城이며, 몽촌토성은 유사시를 대비한 山城으로서 軍城」이라고 주장하고 있습니다』

―풍납토성이 있는데, 몽촌토성을 쌓은 이유가 무엇이라고 봅니까.

『北城의 인구증가 또는 국방上의 이유로 南城을 지어 또 하나의 王宮을 두었을 가능성이 높습니다. 일제 강점 시기에 촬영된 사진을 보면 몽촌토성은 南漢山의 지맥과 이어져 있어요. 외적이 일단 한강을 渡河하면 낮은 지대에 위치한 풍납토성보다는 몽촌토성이 방어에 유리한 지형입니다』

―몽촌토성은 경치가 좋아졌군요. 올림픽공원 덕택 아닙니까.

『올림픽공원이 조성된 1983년 이래 몽촌토성의 성벽에 나무를 많이 심고 잘 자라라고 영양제까지 주어 왔습니다. 25년이 지난 이제, 나무 굵기가 2배로 되고 뿌리도 넓게 뻗치고 있습니다. 문제는 그로 인해 성벽이 망가지는 것입니다』

필자는 金起燮 교수와 헤어져 혼자 몽촌토성 성벽 위를 걸었다. 안내판에는 「몽촌토성 산책로 2340m」라고 쓰여 있다. 몽촌토성의 성벽 위 「산책로」는 시멘트로 포장되어 있다. 올림픽공원관리공단은 몽촌토성을 史蹟(사적)이라기보다 올림픽공원의 일부로 보기 때문인 것 같다.

이제, 잠실동·성내동·풍납동에는 고층아파트가 촘촘히 들어서 한강을 향한 「窓口(창구)」를 막아 버렸다. 최고 높이 45m인 몽촌토성 위에 올라도 한강이 보이지 않는다. 불과 3~4년 전만 해도 여의도 63빌딩이 보였던 곳이다. 「산책로」를 절반도 돌지 않았는데, 벌써 날이 어둑어둑해졌다. 다음날 다시 찾아오기로 하고 몽촌토성에서 내려왔다.
석촌동 백제고분군의 제3호 돌무지무덤. 백제의 전성기를 개막한 近肖古王의 무덤으로 추정되기도 한다.


죽은 사람들의 공간
방이동 백제고분군의 횡혈식 석실을 갖춘 무덤.

4월5일 오전 9시, 필자는 한성백제의 왕릉급 무덤이 모여 있는 石村洞고분군(송파구 석촌동 248번지 일대)을 찾았다. 서울 지하철 8호선의 7번 출구로 나와 터널이 뚫린 구릉 윗동네에 석촌동고분군이 있다.

진입로 정면으로 백제 초기 돌무지무덤(적석총) 2호분, 4호분, 3호분이 줄지어 있다. 규모가 가장 큰 3호분은 밑 테두리에 크고 긴 돌을 두르고 3단으로 쌓아올린 基壇式(기단식) 돌무지무덤이다. 만주 集安(집안)에 있는 장군총(광개토왕릉으로 추정됨)에 버금가는 규모로 동서 길이 49.6m, 남북 길이 43.7m, 높이 4m이다. 이것은 「백제의 시조왕 溫祖(온조)가 고구려로부터 내려왔다」는 역사의 기록을 뒷받침해 주는 물적 증거이다.

석촌동고분군과 가락동고분군은 원래 이어진 「한성백제 때 죽은 사람의 공간」이었다. 1916년 조사에 따르면 이곳에는 돌무지무덤 23基, 흙무덤 66基 등 모두 89基의 고분이 있었다. 지금 석촌동고분군에는 6基의 무덤만 보존되어 있고, 가락시영아파트가 들어선 가락동고분군의 무덤들은 흔적도 없이 사라졌다.

오랜 세월에 걸쳐 밭으로 경작되었는 데다 1970년대 이후엔 급속한 도시개발로 인해 이곳 유물은 대부분 망실되었다. 그러나 석촌동고분군은 왕실의 공동묘지답게 귀고리와 瓔珞(영락)이, 가락동 2호분에서는 우아한 직구단경호가 나왔다.

석천동고분군을 둘러보고 나서 8基의 무덤이 모여 있는 방이동백제고분군(송파구 방이동 125번지)에 들렀다. 지하철 5호선 방이역에서 내려 방산고등학교 쪽으로 걸어가면 5분 거리이다.

서북쪽 경사면에 4基, 동남쪽 낮은 언덕에 4基가 있다. 墳丘(분구)의 형태는 모두 원형이고, 내부 구조는 수혈식 석관과 횡혈식 석실의 두 형태로서 石像(석상), 石劍(석검)의 파편, 高杯(고배: 굽다리접시) 등이 출토되었다.

문제는 여기서 나온 高杯가 전형적인 新羅(신라)토기의 형식이라는 점이다. 이 때문에 이 무덤들은 서기 553년 이후 한강 하류유역을 장악했던 신라의 고분이라고 주장하는 연구자들이 있다.


개로왕의 토목공사

방이동 백제고분군에서 몽촌토성까지의 거리는 1km 정도이다. 올림픽공원 南1門(지하철 8호선 몽촌역에서 가깝다)을 들어가면 주차장이 있다. 여기서 정면을 보면 몽촌토성 성벽 위로 올라가는 나무 층층계단이 설치되어 있다. 층층계단을 타고 몽촌토성 위에 올라갔다.

「몽촌토성」이란 이름이 붙은 것이 1983년 복원 당시까지 성 안에 「꿈말」, 즉 「夢村」이라는 마을이 있었기 때문이다. 성 안 면적은 21만6000m2. 동북쪽 바깥의 작은 능선에 둘레 270m의 外城(외성)을 따로 쌓았다. 동·남·북쪽에 성문이 하나씩 있으며, 사이사이에 은밀한 통로가 있었다. 東2門 쪽의 산책로에는 「움집터」가 있다. 몽촌토성 수비병의 兵營(병영)으로 보인다.

몽촌토성에 오르면 「悲運(비운)의 君主」 개로왕이 생각난다. 다음은 한성백제 패망의 원인을 설명한 「三國史記」 개로왕 21년 조의 기사이다.

<고구려 장수왕은 백제를 치기 위해, 백제에 가서 첩자 노릇을 할 만한 자를 구하였다. 이때 중 道琳(도림)이 이에 응해 말했다. (中略) 장수왕이 기뻐하여 그를 백제에 밀파했다. 이에 도림은 거짓으로 죄를 지어 도망하는 체하고 백제로 왔다.

당시 개로왕은 장기와 바둑을 좋아했다. 도림이 대궐 문에 이르러 『제가 어려서부터 바둑을 배워 묘수의 경지를 알고 있으니, 왕께 들려 드리려고 합니다』 하였다. 개로왕이 그를 불러 對局(대국)을 하여 보니 과연 國手였다. 개로왕은 마침내 도림을 上客(상객)으로 대우하고 매우 친하게 여겨 서로 늦게 만난 것을 한탄하였다>

위의 기사는 장수왕이 밀파한 細作(세작) 도침의 꾐에 빠진 개로왕이 나랏일을 돌보는 데 소홀했다는 것을 강조하는 내용이다. 도침은 개로왕에게 성곽과 제방의 수축, 궁궐의 수리, 先王(선왕: 비유왕) 능묘의 축조 등을 권유했다. 다음은 이어지는 「三國史記」의 기록이다.

<개로왕은 백성들을 모조리 징발해 흙을 구워 성을 쌓고, 그 안에 궁실·누각·射臺(사대)를 지으니 웅장하고 화려하지 않은 것이 없었다. 또한 郁里河(욱리하: 한강)에서 큰 돌을 캐다가 관을 만들어 아버지의 해골을 장사하고, 蛇城(사성) 동쪽으로부터 崇山(숭산)까지 강을 따라 둑을 쌓았다. 이로 말미암아 창고가 텅 비고, 백성들이 곤궁하여져 나라는 累卵(누란)의 위기를 맞게 되었다>
몽촌토성의 방위체계. 해자·목책·성벽의 3중 방어 구조로 이뤄져 있다.


개로왕의 후회

위의 記事를 음미하면 개로왕은 폭정의 군주가 아니었음을 알 수 있다. 성곽을 쌓아 都城의 방어체제를 보강하고, 민가가 홍수에 떠내려가지 않게 한강가에 둑을 쌓았던 것은 오히려 治績(치적)이었다. 先王의 능묘와 궁궐을 수축한 일은 개로왕의 왕권확립이라는 차원에서 이해할 필요가 있다. 다만, 오랫동안 고구려와 끊임없는 국지전을 벌여 왔던 상황에서 강행된 대규모 토목공사가 국가재정을 어렵게 했던 것만은 부인할 수 없다.

백제의 경제를 파탄에 빠트린 도림은 고구려로 돌아와 장수왕에게 백제의 실상을 보고했다. 장수왕은 즉각 3만군을 이끌고 親征(친정)에 나섰다. 고구려군 침공의 급보를 들은 개로왕은 그의 동생 文周(문주)에게 다음과 같이 말했다.

<내가 어리석고 총명하지 못하여, 간사한 사람의 말을 믿다가 이렇게 되었다. 백성들은 쇠잔하고, 군대는 약하니 비록 위급한 일을 당하여도 누가 기꺼이 나를 위하여 힘써 싸우려 하겠는가? 나는 당연히 나라를 위하여 죽어야 하지만, 네가 여기에서 함께 죽는 것은 유익할 것이 없으니, 난리를 피해 있다가 國系(국계: 王統)를 잇게 하라>

이같은 개로왕의 후회는 후세 사람들의 가슴을 저미게 한다. 사실, 개로왕은 解(해)씨, 眞(진)씨 등 귀족세력의 발호에 의해 先代의 구이신왕, 비유왕이 암살당하는 왕권 추락기에 즉위한 이후 강력한 왕권을 확립하려고 비상하게 노력했던 군주이다.

따지고 보면 개로왕의 강력한 왕권 구축에 있어 최대의 저해 요인은 고구려의 부단한 남침 압박이었다. 장수왕 15년(427), 국내성으로부터 평양으로 도읍을 옮긴 고구려는 당시 東아시아 최강국 北魏(북위)에 친선관계를 유지하고 한반도 남부를 먹으려는 소위 「西守南進(서수남진)」 정책을 구사했다.


개로왕의 全方位外交

개로왕은 全方位外交(전방위외교)로 고구려의 西守南進 정책에 맞섰다. 신라와 관계를 개선하고, 倭國(왜국)과 군사동맹을 추진하는 한편, 472년에는 국교가 없었던 北魏에 자신의 사위를 사신으로 파견해 군사원조를 요청했다. 이 시기, 고구려는 매년 세 번이나 北魏에 조공함으로써 백제의 기도를 봉쇄했다.

한편 개로왕의 동생 文周는 木?滿致(목협만치)와 祖彌桀取(조미걸취)를 데리고 남쪽으로 떠났다. 다음은 「三國史記」 文周王 즉위년도의 기사이다.

<개로 재위 21년에 고구려가 침입하여 漢城을 포위하였다. 개로가 성을 막고 굳게 수비하면서 文周를 신라로 보내 구원을 요청토록 하였다. 그는 구원병 1만 명을 데리고 돌아왔다. 고구려군은 비록 물러갔으나 성이 파괴되고 왕이 죽어서 文周가 마침내 왕위에 올랐다>

이때 文周가 신라의 구원병과 함께 漢城까지 북상했는지는 의문이다. 왜냐하면 漢城지역은 553년 羅濟(나제) 연합군이 한강유역을 탈환할 때까지 고구려의 영토였고, 몽촌토성 안에서 고구려의 토기 등이 발견되었기 때문이다. 어떻든 475년 연말, 文周는 熊津(웅진: 지금의 공주)으로 남하해 웅진백제 시대를 개막한다. <다음 호에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