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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물연구] 아프리카의 황금어장을 제패한 한국인 - 權榮浩 인터불고 그룹 회장

정순태   |   2007-04-30 | hit 14708

1978년 연말, 대림수산 라스팔마스 基地(기지) 선박부 차장 權榮浩(권영호)씨는 부두로 들어온 낡은 어선 한 척에서 눈을 뗄 수 없었다. 日本 니치로 수산회사 소속의 300t급 船尾式(선미식) 트롤선, 수리비가 뱃값을 웃돌아 곧 廢船(폐선)될 것이라는 은밀한 정보가 그에게 들어와 있었다. 당시 일본 원양업계는 기름값 폭등과 선원 확보난으로 大西洋(대서양) 어장에서 철수하고 있었다.

그때 그의 나이 38세, 원양업계에 몸 담은 지 12년, 「바다의 남자」로서는 승부를 걸어볼 만한 시기였다. 누구도 거들떠보지 않던 노후선, 그러나 그에겐 남다른 자신이 있었다. 26세에 한국 원양어업史上(사상) 최연소 기관장을 맡은 이후 세 차례나 원양어선에 승선해 舶用(박용) 디젤엔진에 정통했다. 특히 1972년 이후엔 스페인領(령) 카나리아諸島(제도)의 라스팔마스港의 基地 주재원으로 있으면서 선박 수리를 「전공」으로 삼았던 그였다.

1979년 정초, 그는 스크랩(解體·해체) 직전의 그 트롤선을 日本 船主로부터 2만5000달러라는 고철값에 매입했다. 헐값이라고 하지만, 가난한 어촌 출신의 그에겐 올인 베팅이었다. 주위에선 그의 도전을 무모한 짓으로 보았다.

『權차장, 그 고철 덩어리를 뭣에 쓸 거라구 그렇게 밤낮 고치고 있소. 바다로 내보낸다구요? 괜한 짓 하지 마소』

3개월의 수리작업 끝에 「폐선」은 출어의 모양새를 갖추었다. 船主인 그가 지은 船名(선명)은 「大成號(대성호)」. 과연 大成號는 이름값을 했다. 1979년 3월25일 오전 7시에 출항한 첫 항차(약 2개월)에서 자그만치 31만500달러의 어획고를 올렸던 것이다. 1년에 다섯 번 이뤄진 매 항차에서 그는 잇달아 滿船(만선)을 기록했다. 이때 번 돈이 「인터불고」의 종자돈이 되었다.

그는 자기 사업을 시작한 지 2년 만에 350t 1척, 1350t급 2척을 증강시켜 모두 4척의 선대를 보유하게 되었다. 1980년, 그는 스페인의 수도 마드리드에 파나마 법인 「인터불고(INTER-BURGO) S.A.」를 설립했다. 이것이 오늘날 3대양(태평양·인도양·대서양)에서 조업하는 45척(2만t)의 정예 선대를 보유하고, 3개 대륙(아프리카·유럽·아시아)에 걸쳐 22개 계열기업을 거느리고 있는 「인터불고(IB) 그룹」의 母기업이 되었다. 「인터불고」는 「화목한 작은 마을」을 뜻하는 스페인語이다.


「어머니를 돌아보는 산마루」에 건설된 호텔 인터불고

「호텔 인터불고」정문 앞에 세워진「비 내리는 고모령」의 노래비.

지난 3월13일, 필자는 「인터불고 그룹」 權榮浩 회장을 인터뷰하기 위해 오전 10시 서울역發(발) 고속열차(KTX)를 타고, 11시45분 東대구역에서 내린 뒤 택시로 10분쯤 달려 「호텔 인터불고」(대구시 수성구 만촌동) 로비에 도착했다.

成熙丘(성희구) 호텔 사장이 맞으며 『회장님이 다른 일 때문에 30분쯤 늦게 도착할 것』이라고 말했다. 成사장은 돈키호테와 산초 主從(주종)의 동상 그리고 대형 파이프 오르간 등으로 꾸민 스페인風 호텔로비를 잠시 구경시킨 뒤 필자를 구내 레스토랑으로 안내했다.

레스토랑에서 대형 유리창을 통해 바라본 경관은 인상적이었다. 대구 시가지의 북쪽을 꿰뚫고 흘러가는 금호강 너머로 名山 팔공산이 우람하게 솟아 있고, 그 지맥이 동쪽으로 길게 뻗어내리고 있다. 레스토랑의 여성 지배인이 필자에게 이곳 지형을 매우 재미있게 소개했다.

『팔공산 기슭 「破軍(파군)재」에서 후백제왕 견훤의 매복공격을 받고 위기일발에 몰린 고려 태조 王建(왕건)은 匹馬單騎(필마단기)로 저기 팔공산 지맥의 동쪽 끝까지 40리쯤 도주한 후에야 겨우 安心(안심)했답니다. 그래서 지금도 그 동네를 「安心」이라 부릅니다.

왕건은 安心으로부터 조금 더 내려와 어둠 속에서 활로를 찾다가 문득 하늘을 우러러보니 반달이 떠 있더래요. 그래서 지금 安心 아랫동네의 이름이 「半夜月(반야월)」입니다. 우리 호텔은 「顧母嶺(고모령)」을 등지고 금호강변의 절벽 위에 서 있고요』

―아, 여기가 그 유명한 돌아볼 고(顧), 어미 모(母), 마루 령(嶺), 「고모령」의 현장입니까. 兪湖(유호) 작사, 朴是春(박시춘) 작곡의 「비 내리는 고모령」은 한국가요의 古典(고전)인데, 가사가 가물가물하군요.

『(지배인은 「비 내리는 고모령」을 낮은 목소리로 불렀다) 어머님의 손을 놓고 돌아설 때면/부엉새도 울었다오 나도 울었소/가랑잎이 휘날리던 산마루턱을/넘어오던 그날 밤이 그리웁고나』

이어지는 2절. 『맨드라미 피고 지는 몇 해이런가/물방앗간 뒷전에서 맺은 사랑아』로 넘어가는 순간이었다. 權榮浩 회장이 成사장과 함께 식당으로 들어왔다.

權회장은 키 165cm 정도, 얼굴은 예순일곱의 나이답지 않은 紅顔(홍안)이다. 수더분한 헌팅캡과 사파리 점퍼, 헐렁한 코르덴 바지 차림에 운동화를 신었다. 목에는 옅은 노란색 목도리를 둘러 약간의 멋과 여유를 보인 모습이다.

―대구 날씨가 좀 쌀쌀할 줄 알았는데, 와보니 봄날입니다.

『오늘 좀 풀렸지만 바람은 세게 불더군요. 꽃샘추위로 올해 花信(화신)이 조금 늦는 것 같군요』

權榮浩는 1941년 8월17일 경북 울진군 竹邊邑(죽변읍) 어촌에서 「어부의 아들」로 태어났다. 그가 10세 되던 1950년 어느 날, 고기 잡으러 나간 아버지가 울릉도 근해에서 미군기의 오폭으로 별세했다. 불행은 겹쳐 오는 걸까. 그의 맏형마저 학도병으로 나가 전사했다.


「최연소 기관장」이 되기까지
고려 태조 王建이 후백제軍의 추격을 벗어났던 半夜月에는 현재 半夜月驛舍가 들어서 있다.

『위로 형 둘, 누나 하나, 저는 6남매의 셋째였습니다. 아버지가 돌아가신 후 가세가 기울어 어머니가 우리 키우느라고 고생 많이 하셨어요. 그 바람에 저는 일찌감치 보릿고개를 넘으며 배고픔의 설움을 알게 되었고요』

―어머니와 헤어지면서 돌아보는 고갯마루(顧母嶺)에 이렇게 훌륭한 호텔을 지으셨으니 어머님 생전의 기대에 보답한 것 아닙니까.

『어머니는 제가 라스팔마스 기지 주재원으로 일하던 1975년에 별세하셨습니다. 어머니가 조금 더 사셨으면 아들의 효도를 받으셨을 텐데, 못난 아들을 기다려 주지 않으셨어요』

―어릴 때의 소원이 무엇이었습니까.

『그저 배불리 먹는 것이 꿈이었고, 가난이 싫어 부자가 되고 싶었습니다』

그는 중학교를 중퇴했다. 책가방을 들고 학교에 가는 것보다 바다에 나가 고기를 잡고, 가끔은 들에서 농사를 지었다. 그럼에도 바다에서 집으로 돌아오기만 하면 손에서 책을 놓지 않았다. 독학으로 高入(고입) 검정고시와 大入(대입) 검정고시에 합격했다.

―결혼은 언제 하셨습니까.

『스무 살 때 한 살 아래 이웃 처녀와 연애 半·중매 半으로 결혼했습니다』

그는 결혼 직후에 軍징집 영장을 받았다.

『카투사로서 부산 제3부두 주둔 美 병참부대 수송부에서 근무했습니다. 부대장의 허락을 받아 1962년 부산 동아大 영문학과(야간학부)에 입학했어요. 제대 후에도 학비를 벌기 위해 군무원으로서 사령관의 차를 계속 몰았습니다. 봉급은 괜찮았지만, 육상 근무는 따분했어요. 그래서 바다로 나갔는데, 그 바람에 대학을 무려 7년 만에야 졸업할 수 있었구요』

1960년대는 서독에 광부와 간호사를 보내고 월남(베트남)에 군대를 파견해서라도 가난을 모면해 보려고 몸부림치던 시절이었다. 이런 가운데 「한국수산개발공사」라는 국책 기업이 설립되었다. 원양 개척으로 외화를 벌어들인다는 소문이 그를 설레게 했다.

『기왕에 배를 탈 바에야 고급선원이 되겠다고 결심하고, 우선 고급선원 연수과정을 거쳐 「을종1등기관사」의 면허를 취득했습니다. 당시만 해도 전문대 졸업생이거나 4년제 대학을 2년 이상 다닌 학력자가 3개월의 단기교육을 받으면 해기사 면허시험에 응시할 수 있는 자격이 부여되었거든요』
大邱「호텔 인터불고」구내에 있는 스페인 문화원. 權榮浩 회장은 그에게 돈을 벌게 하고 자녀들에게 교육을 베푼 스페인에 보은하기 위해「호텔의 얼굴」인 로비층에 이 문화원을 개설했다.

한국수산개발공사의 해기사 모집에 지원 서류를 제출하자 즉석에서 채용 통지서를 교부받았다. 「로이드 해상보험」 가입의 필수조건인 「자격증을 보유한 해기사」가 부족하던 시절이었다.

『면허만 있으면 경력을 따지지 않았어요. 인사담당자가 「어느 배를 희망합니까」하고 묻습디다. 「아무 배나 가겠습니다」라고 답했습니다. 대번에 「그러면 權榮浩씨는 제252 남해호 기관장으로 발령내겠습니다」 하더군요』

―權회장님이 26세에 기관장이 된 것은 그 후 40여 년이 지난 지금도 깨어지지 않은 우리 원양업계의 최연소 기록이라더군요.

『우리 배에 승선한 전체 선원 중에서 제 나이가 제일 어렸죠』

―그런데 왜 선장의 길로 가지 않고, 하필 기관장이 되셨습니까.

『선장을 하려면 이론을 체계적으로 배워야 하는데, 저는 그럴 처지가 못 되었어요. 기관장은 實技(실기) 위주여서 눈으로 보고 모르면 책을 보면 되니까요. 저는 군복무 시절부터 기계 만지기를 좋아했는데, 기계의 원리란 어느 것이나 비슷하거든요. 그때 기계 쪽을 선택해 지금도 유용하게 써먹고 있습니다』

―제252 남해호는 어느 어장에서 고기를 잡았습니까.

『아프리카 중부 몬로비아에 기지를 두고 대서양에서 조업했습니다. 몬로비아 기지에서 하루 항해 정도의 거리에 어장이 형성되어 있었거든요』

―舶用 디젤엔진을 다뤄본 경험이 있으셨습니까.

『처음엔 디젤기관에 대한 지식이 전혀 없었지만, 「인생은 어차피 아무것도 모르고 태어나서 배워 가는 것 아니냐」고 마음먹으니 「나라고 못 할 것 뭐냐」는 오기가 생깁디다. 영어 해독이 가능했기 때문에 각종 기기 취급설명서를 정독해 매뉴얼을 충실하게 지키고, 숙련된 기관사들이 하는 일을 주의 깊게 관찰하면서 함께 여러 문제를 풀어 갔습니다.

다행히 저는 어부의 자식, 어머니 뱃속에서부터 바다와 친숙했기 때문에 생선을 잡는 일이라면 두뇌회전이 빨랐어요. 경험이 부족한 대신, 어려운 일이라면 무엇이든 앞장서서 처리하려고 애썼습니다. 선장은 매우 기뻐했고, 본선은 곧 「우수 선박」이라는 명성을 얻었어요』


대림수산 吳辰鎬 회장과의 만남

「바다 사나이의 전성시대」가 펼쳐지고 있었다. 1965년 韓·日 국교정상화 이후 韓·日어업협정과 경제협력차관에 의해 일본으로부터 원양어선이 잇달아 도입되었다. 원양어업을 하겠다고 나선 기업도 많았다.

문제는 시장개척과 기술축적이 되어 있지 않은데다 대형어선을 운항할 만한 해기사가 부족했다. 대림수산의 오너 吳辰鎬(오진호) 사장이 對日차관으로 800t급 船尾式 트롤선 「대진호」를 일본에서 건조할 계획이라는 소문이 나돌았다.

그때 마침 權榮浩 기관장은 스페인領 카나리아 제도의 라스팔마스港을 기지로 삼은 「Tuna Long Line」船을 탔다가, 일하기보다 기항지에서의 유흥에 골몰했던 선장과의 불화로 두 번째 승선을 중도에서 포기하고 귀국해 있었다. 그는 경쟁자들을 물리치고 대진호를 타게 되었다. 대진호는 新銳船(신예선)이어서 승선을 희망하는 기관장들이 많았다.

『우선 저는 船主를 代行(대행)하는 신조선 인수감독으로서 일본 요코스카(橫須賀) 조선소로 떠나면서 吳사장에게 출국인사를 했습니다. 吳사장께서 「자네는 아직 나이나 경력이 적어서 대형선 기관장을 맡기기에는 좀 염려스럽지만, 울진 남자의 부지런함과 용맹함을 나는 익히 알고 있네」라고 격려해 주십디다』

원양업계에선 배를 잘 탄다는 「여수·남해 선원 열 명이 울진·영덕 선원 하나를 당하지 못한다」는 말이 있다.

요코스카 조선소에서 신조선 감독 자격으로 그는 자신이 운행해야 할 모든 기관과 장비에 대한 지식을 습득하고 瑕疵(하자) 보수공사까지 꼼꼼히 챙겼다. 저녁에 조선소 기숙사로 돌아오면 日本語 공부에 몰두했다.

요코스카로부터 대진호가 부산항에 입항하자 많은 시민들, 특히 원양업계 사람들은 이 신예선을 구경하러 부두로 몰려나왔다. 그로부터 며칠 후 출항식, 드디어 부두에 매어 놓은 밧줄이 풀어지면서 대진호는 육지와 떨어졌다. 오색 테이프가 나는 가운데 그는 滿船(만선)의 汽笛(기적)을 길게 불었다.

『대진호는 태평양을 넘고 파나마 운하를 통과해 카리브海에서 대서양을 질주하는 50일의 항해 끝에 라스팔마스港에 무사히 입항했습니다. 당시 북부 아프리카의 사하라 어장은 「황금어장」이라 불렸어요. 예상했던 대로 어디다 그물을 던져도 고기로 가득 채웠습니다』

라스팔마스港에는 한국수산개발공사의 어선 몇 척이 이미 진출해 있었으나 최신예 대진호의 상대가 되지 못했다.

그는 기관장으로서 선장의 선박 운영계획에 따라 선내에 작동되는 모든 장비가 고장이 없도록 전심전력을 다했다.

『다행히 저는 미군 병참부대 근무 이래 현대장비가 손에 익어 있었어요. 그런 관계로 선내의 모든 기기, 심지어는 항해실의 레이더·어탐기·통신장비까지 고장이 나면 밤을 새워 가며 수리했습니다. 선박이 기지항에 입항하면 새벽부터 밤 늦도록 기관정비를 했어요. 어획물의 상품성을 높이기 위해 고기 하나하나 빠짐없이 냉동시키는 일에도 앞장섰습니다』

대진호가 돈을 번다는 소문이 나돌자 국내에 수많은 수산회사가 설립되었고, 라스팔마스로 들어오는 韓國의 어선도 차츰 늘어 갔다. 어느덧 2년의 계약기간이 끝났다. 일본 조선소에서 이미 여러 척의 신조선을 짓고 있었던 대림수산은 그에게 1개월 후 신조선의 기관장으로 再승선하도록 발령을 내렸다.


2년간 승선해 논 100마지기 값을 벌어

라스팔마스를 출발한 지 이틀 후 權榮浩 기관장은 동료들과 함께 金浦공항에 내렸다. 그는 고향에 사는 어머니와 장모에게 모처럼 서울구경을 시켜 드렸다. 그가 2년 동안 바다에서 번 돈은 그의 어머니가 관리했다. 그가 술·담배와 유흥을 하지 않고 모은 돈과 어획고에 따라 회사가 분배해 주는 돈을 합치니 1971년 당시 돈으로 450만원이나 되었다.

『그때 고향에 있는 上畓(상답) 한 마지기가 평균 4만5000원, 논 100마지기를 살 수 있는 큰돈이었습니다. 저는 어머니께 논 100마지기를 사시라고 했습니다. 논 100마지기면 우리 고향 마을은 말할 것도 없고 우리 面에서 제일 가는 부자가 될 수 있었습니다만…』

―아니, 그렇게 갖고 싶었던 논을 못 사셨습니까.

『형님이 그 돈으로 연안에서 조업하는 中古 어선을 사겠다고 했고, 어머니는 형의 소원을 들어 주라고 하셨어요』

―형님의 사업은 잘 되었습니까.

『저의 예상대로 형의 사업은 실패로 끝나더군요. 그래도 어머니를 기쁘게 해드려고 한 일이었니까 후회하지 않았습니다』

1971년, 權榮浩 기관장은 다른 선원들과 함께 1000t짜리 신조선을 日本 요코스카 조선소에서 인수해 北태평양 어장으로 출어했다. 항차마다 만선의 깃발을 휘날렸다.

당시 원양어업은 돈벌이가 가장 빠른 산업으로 부상해 있었다. 대림산업의 吳辰鎬 사장은 무려 10여 척의 선박을 증강해 사하라 어장에서 승부를 걸 작정이었다. 吳사장에겐 선박 실무에 밝은 라스팔마스 기지 근무자가 필요했다.

吳사장은 權榮浩를 라스팔마스 기지 선박부 과장으로 발탁했다. 당시 고급 선원들에겐 기지 주재원이 최고의 희망사항이었다. 그는 부인과 2녀1남을 라스팔마스로 불러서 함께 생활하게 되었다. 그의 장녀가 초등학교에 막 진학했던 무렵이었다.

기지 주재원 생활 8년 동안 그는 남달랐다. 당시 대림수산 소속 트롤어선 선장으로서 라스팔마스 기지항에 자주 입항했던 손진영(현재 사조산업 상무)씨는 『그때 우리들 사이에서는 「權榮浩 차장님을 찾으려면 부두에 가면 된다」는 얘기가 유명했다』고 말한다.

밤낮 기름때투성이의 작업복 차림으로 부두를 지키면서 대림수산뿐만 아니라 다른 회사 선박에 대해서도 代價(대가) 없이 수리를 해주거나 기술고문에 응했다. 이러한 공로로 그는 한국원양어업협회가 발족한 후 최초의 공로상을 수상했다.

―그때 라스팔마스에 살던 한국 사람치고 權榮浩 차장의 도움을 받지 않은 사람이 없다더군요.

『아, 그거는요, 제가 의약용어와 병원 진료를 받을 때의 예상문답을 정리한 한글 對譯(대역) 스페인語 책자를 만들어 현지 동포들에게 배포했거든요. 한창 때 라스팔마스에는 한국인이 5000명이나 상주했는데, 그 책자가 꽤 인기 있었어요』

―요즘 라스팔마스에 거주하는 한국인은 얼마나 됩니까.

『1000여 명쯤 됩니다. 원양어업이 사양화되었기 때문이에요. 남아 있는 동포들은 영세어업을 하거나 국제결혼을 해서 라스팔마스를 떠날 수 없는 경우가 대부분입니다』

대림수산 기지 주재원이던 그가 일본 선주로부터 폐선 직전의 트롤선 1척을 헐값에 사서 성공의 첫발을 내디뎠음은 앞에서 썼다.

『대림수산 吳辰鎬 회장님이 외국출장 중에 고혈압으로 갑자기 별세하셨어요. 吳회장님은 저를 아들처럼 사랑하고 격려해 주셔서 제가 대림수산 주재원과 배 1척(大成號)의 선주를 겸할 수 있었는데, 후임 회장은 이런 저의 겸업을 허락해 주지 않습디다. 그래서 제가 대림수산에서 나와 회사를 차린 겁니다』


최대의 勝負處-앙골라의 「황금어장」
참다랑어를 배로 끌어올리는 모습. 權회장은 1989년 지중해 참다랑어 定置網 어업에 도전해 경험 부족으로 실패했지만,『기회가 주어지면 再도전하겠다』는 의지를 피력했다.

대성호의 성공에 의해 그가 보유한 어선은 모두 4척으로 불어났다. 그러나 곧 사하라 어장이 황폐해져 우리 원양어업계에 심각한 불황이 닥쳤다. 權榮浩 사장은 직접 승선해 원가절감을 꾀하는 등 불황 타개에 골몰했다. 그런 그에게 새로운 일생 일대의 승부처가 다가왔다.

1982년, 그는 중부 아프리카에 위치한 앙골라 해역에서 어장 개척에 나설 기회를 잡았다. 당시만 해도 앙골라는 한국 원양회사들에게 너무나 멀고 무섭게 느껴지던 나라였다. 1975년 포르투갈로부터 독립해 사회주의 노선을 걷던 나라로서 북한의 동맹국이었다. 북한군의 교관단도 파견되어 있었고, 서울올림픽을 방해하기 위해 KAL기를 폭파시킨 북한 공작원 金賢姬(김현희)의 아버지도 앙골라 북한대사관에서 근무했다.

『예년에 없던 불황으로 고심하고 있는 저에게 이탈리아 商社가 앙골라 어장 진출을 제의해 왔어요. 나중에 알게 되었지만, 이탈리아 商社는 저에게 그런 제의를 하기 전에 한국의 여러 원양회사에 똑같은 제의를 했지만, 모두 거절했더군요.

당시 앙골라는 한국의 적대국으로 무슨 문제가 생기면 외교적으로 해결할 수 없다고 생각했던 겁니다. 또한 라스팔마스로부터 어장까지의 거리가 너무 멀고, 좌우파 간의 내전이 진행 중이었거든요. 그럼에도 불구하고 저는 그 제의를 받고 단 하루 만에 앙골라에 들어가기로 결단했습니다』

―왜 한국의 다른 원양회사들은 결단을 내리지 못했던 걸까요.

『라스팔마스 기지에서 앙골라 어장에 가는 데만 15일이 걸립니다. 서울에 있는 큰 원양회사의 오너들은 라스팔마스 기지장의 보고를 듣고 진출 여부를 판단해야 하는데, 현장에 있는 저처럼 신속한 결단은 어려웠겠지요』

―權회장께선 「위험한 곳에 돈이 있다」는 商訓(상훈)을 따른 것입니까.

『그것뿐만 아닙니다. 저에게는 한 가지 자신감이 있었습니다. 일본 니치로 회사로부터 세 척의 중고선을 매입하면서 선내 재고품을 파악하던 중 앙골라 漁場圖(어장도)를 발견해 보관하고 있었거든요』

―일본인의 기록정신이야 여객기가 추락해 죽기 직전임에도 일본인 승객은 메모를 남겼을 정도로 유명한 것 아닙니까.

『일본 원양회사는 앙골라가 포르투갈로부터 독립하기 전인 1970년대 초까지 이곳 어장에서 고기를 잡았거든요. 漁場圖에는 고기를 많이 잡은 포인트, 어디부터 어디까지 해저의 암초가 있다 또는 없다, 해초와 플랑크톤 서식지까지 세세하게 기록해 둔 것입니다.

특히 이곳에서 서식하는 主어종은 일본인이 「렌코다이」라 부르는 돔 종류입니다. 일반 돔보다 눈이 크고, 주둥이는 좀 작아요. 일본에서는 결혼식 피로연에나 내놓는데, 일반 돔보다 40~50% 높은 가격으로 매매되는 겁니다』

―일본 어선들은 왜 이 황금어장을 버리고 갔습니까.

『일본의 대선단은 렌코다이의 씨가 마를 정도로 바닥을 훑고는 이 해역에서 철수했던 겁니다. 그러고 난 지 이미 10년의 세월이 흘렀어요. 황폐한 어장이라도 10년만 가만히 두면 수초가 자라 물고기의 먹이인 플랑크톤이 생기고 물고기가 많이 서식하는 등 원상복구가 되거든요』


『바다의 노다지』
앙골라의 수도 루안다에 있는 인터불고 사옥.

그는 우여곡절을 겪고 駐라스팔마스 한국총영사관으로부터 앙골라에 들어가도 좋다는 허가를 받았다. 1982년 6월22일 앙골라와 입어계약을 체결하고 1350t급 대성2호를 루안다港에 입항시켰다. 대성2호는 6월25일 새벽 2시30분 설레는 마음으로 첫 출어에 나섰다. 출항한 지 여덟 시간 만에 고대하던 첫 보고가 들어왔다.

<성공했습니다. 5시간 항해해, 첫 投網(투망)을 하고, 45분 曳網(예망)한 후 揚網(양망)한 결과 똑같은 사이즈의 렌코다이 7t 정도를 어획했습니다. 질도 양호합니다. 어탐기에 많은 魚群(어군)이 형성된 것으로 나타납니다. 사장님, 어려운 용단을 잘 내리셨습니다. 바로 이곳이 바다의 노다지입니다>

그는 즉각 아프리카 북부 어장에서 대기 중이던 同型(동형)의 대성3호도 앙골라 어장에 투입했다. 이어 350t급 중고선 1척을 구입해 이 어장에 투입시켰다.

―일본인이 작성한 漁場圖가 바로 보물지도였군요.

『1척의 어획고가 하루 평균 25t, 한 항차(약 2개월)에 100만 달러의 노다지를 캤어요. 세 척을 투입했더니 2개월마다 300만 달러가 내 은행계좌에 쑥쑥 들어온 겁니다』

그가 누구보다 양적·질적으로 월등한 실적을 올리자 방해공작이 들어왔다. 『북한대사관이 앙골라 정부에 한국 어선을 철수시키라고 압력을 가한다』는 것이었다. 당시 앙골라는 自國(자국) 선대에 북한 선원들을 승선시키고 있었는데, 그 어획량은 그의 실적과는 비교도 되지 않을 만큼 미미했다.

『저는 어획량의 50%를 앙골라에 공급하고, 나머지 50%는 우리 마음대로 유럽·일본·한국 시장에 팔았습니다. 국민의 식량 부족 해결이 초미의 관심사였던 앙골라 정부로서는 고기 잘 잡아 공급하는 저를 내칠 수 없었어요. 북한으로부터 압력을 받았지만, 앙골라 정부는 이념보다 경제를 우선했던 것이지요』

―당시 앙골라는 치열한 내전을 치르고 있지 않았습니까.

『우리는 총소리를 들으며 일했습니다. 낮에는 정부군과 협상하고, 밤에는 반란군과 교섭해야 했어요』

―참으로 억척스런 코리언이었군요.

『한때 수도 루안다의 일부가 반군에 점령되자 외국인들은 모두 피란 가고 타국 어선은 루안다 입항을 아예 포기했습니다. 앙골라 수산장관이 제게 「굶주림 문제 해결이 시급하다. 배를 돌려 고기를 풀어 달라」고 부탁하더군요.

저는 우리 어선들에 「滿船을 기다리지 말고, 15일 또는 한 달 조업한 상황이라도 좋다, 빨리 들어오라」고 지시했어요. 선원들은 「외국 어선들은 다 떠났는데, 왜 우리만 들어가야 하느냐」고 불평했습니다. 저는 「이때야말로 우리가 남들과 다르다는 것을 보여 줘야 한다. 만약 명령을 어기면 다시는 우리 회사 배에 승선시키지 않겠다. 피해는 내가 전적으로 책임진다」고 입항을 다그쳐 잡은 고기를 루안다 국민들에게 공급했습니다』
1992년 바르셀로나 올림픽에 참가하는 마라톤 한국대표팀을 마드리드 공항에서 맞이하는 權榮浩 회장(왼쪽에서 두 번째). 權회장은 그의 집을 전지훈련의 베이스캠프로 제공하고, 황영조(왼쪽에서 세 번째) 등 마라톤 선수들에게 지구력 보강에 좋다는 지중해의 참다랑어를 먹였다.


安益泰 선생 유택 매입해 기증

앙골라에서 대성공을 거둔 그의 위상은 달라졌다. 1988년 12월, 그는 스페인의 수도 마드리드에 자본금 100만 페세타(현지 화폐) 규모의 무역회사(INTER-BURGO ESPANA, S.A)를 설립했다. 스페인 정부의 보호를 받고 스페인에 기여하는 기업을 가져야 했기 때문이다. 1990년에는 「애국가」의 작곡가 安益泰(안익태) 선생의 유택을 매입했다.

―故 안익태 선생의 유택이 지중해의 섬 「팔마 데 마요르카」에 있게 된 사연은 무엇입니까.

『제2차 세계대전 발발 당시 파리에 거주했던 안익태 선생은 독일군이 파리를 침공하자 安선생의 팬이었던 파리 주재 스페인대사의 권유로 함께 바르셀로나로 피란했대요.

때마침 「팔마 데 마르요카」 시립 교향악단이 조직되면서 安선생이 창단 멤버로 초빙되셨답니다. 安선생은 거기서 롤리타 여사와 결혼해 딸 셋을 낳고, 南美 여러 나라의 초청을 받아 교향악단을 지휘하는 등 전성기 20년을 보냈다고 해요』

―安선생의 유택을 權회장께서 매입하게 된 까닭은 무엇입니까.

『안익태 선생 별세 후 「팔마 데 마르요카」 市響(시향)은 「안익태 추모 음악회」를 개최하는데, 그럴 때면 으레 스페인 주재 한국대사를 초빙한답디다. 한번은 우리 대사가 「안익태 추모 연주회」에 다녀와서 「큰일 났다. 安선생 유택을 보러 갔더니 미망인은 부재 중이고, 賣買라는 쪽지가 붙어 있더라. 權회장이 사서 기증하면 우리 정부가 기념관을 만들어 영구히 보존하겠다」고 해요. 그런데 일이 자꾸 꼬이는 겁니다』

―왜요.

『외국인 누군가가 사면 安선생의 유택이 워낙 낡은 것이라 허물고 새 건물을 지을 것 아닙니까. 그런 사태를 막아야 했습니다. 제가 부랴부랴 매입한 다음 우리 정부에 기증하려 했더니 「정부가 해외의 유산을 기증받은 전례가 없다」면서 안 받으려는 거예요』

―전례는 만들면 되는 것인데요.

『某 부처에선 「安선생의 유택을 스페인 정부가 관리하도록 교섭하면 어떠냐」고 해요. 기가 막혀 「그러면 기증할 수 없다」고 버텼어요 그 후 3년이 지났는데, 이런 사실을 한국 기자들이 취재해 연일 보도했어요. 그러자 관계 부처에선 「법인을 설립해 기념관을 관리하게 하면 어떠냐」고 해요. 저는 외무부 해외문화국장이 안익태선생기념사업회의 당연직 이사가 되는 조건으로 정부의 제안을 수락했어요』

―유택을 사는 데 돈이 얼마나 들었습니까.

『매입하는 데 12만 달러, 보수하는 데 13만 달러, 모두 25만 달러를 썼습니다』


『참고, 또 참자』
지중해 마요르카 섬에 있는 故안익태 선생 유택. 權회장은 이 유택을 1990년에 매입해 수리한 후 1993년 정부에 기증했다.

―안익태선생기념사업회의 이사가 되셨습니까.

『기증자는 기증자로 끝내야지요. 추모 행사를 하면 간혹 제게 연락은 옵니다』

1992년, 그는 한국 원양어업의 전진기지인 카나리아 제도의 테네리페 섬에 있는 수리조선소를 인수해 한국 수산인의 자긍심을 높이고 지역경제 활성화에 기여했다. 세계적 추세로 볼 때 수리조선소나 조선소는 유망 업종은 아니었다. 그럼에도 그는 이 사업에 투자해야 할 남다른 까닭이 있었다.

『수리조선이라면 저의 전문분야이고, 우리 회사 선대의 규모로 보아 수리조선소를 가질 만했으며, 이제는 우리가 돈을 번 현지의 경제발전과 고용에 기여해야 하는 의무감도 있었습니다』

그가 인수한 수리조선소는 총면적 4만 m2, 2000t급 선박을 들어 올릴 수 있는 도크 시설, 한꺼번에 13척의 배를 수리할 수 있는 파킹 시설 등을 갖추고 있다. 여기서 일하는 스페인人 직원만 70명이라고 한다.

1989년 5월, 權榮浩 회장은 앙골라 수산장관의 면담 요청을 받고 수도 루안다로 출장을 갔다. 수산장관은 『스페인·앙골라 어업협정에 의거 5년 전 스페인의 비고港 조선소에서 300t급 어선 7척을 건조했는데, 예산 부족으로 인수하지 못하고 있다』면서 『인터불고가 그 배들을 인수·운영해 달라』고 요청했다.

당시 앙골라 해역에는 소련·폴란드·쿠바·스페인·이탈리아·한국 어선대와 自國의 소규모 선박들이 조업하고 있었다. 최대 선단은 그가 거느린 30여 척이었다.

『벌써 이때는 어자원의 감소는 물론 현지 입어조건이 점차 까다로워지고 있었어요. 과거엔 맥주 한 병이면 해결되던 사소한 위반사건이 이제는 수백만 달러의 벌금으로 바뀐 겁니다. 때로는 터무니 없는 트집을 잡아 선박을 수개월간 압류해 회사의 피해가 이만저만이 아니었어요. 직원들은 이곳 어장을 포기하고 떠나자고 건의했어요. 그런데도 저는 앙골라 수산장관의 제의를 수락했습니다』

―왜요.

『저는 직원들을 설득했습니다.

「지금, 이 어장이 황폐한 것은 우리에게도 책임이 있지 않은가. 다른 원양업체가 떠나는 이런 때일수록 현지 관리들과 인간관계를 개선할 수 있지 않은가. 참고, 또 참자」

저는 사업을 하면서 한 번도 거래선을 바꿔본 일이 없습니다. 자꾸 바꾸면 철새와 다를 바 뭐 있겠습니까. 믿음은 세월이 흐르면서 쌓이는 것입니다』


한국-앙골라 修交를 막후에서 지원
權榮浩 회장이 가족들과 함께 선원들에게 먹일 김치를 담그고 있다.

그는 앙골라에 진출한 이래 매년 컨테이너 박스 3~5개 분량의 식품·의류·의약품·잡화 등을 가난한 현지인들을 위해 기증해 왔다. 그리고 1991년 10월, 그는 현지 유력자 3人과 합작해 앙골라 수산회사 「World-Wide Lda」를 설립했다. 그가 진출한 지 10년 만인 1992년 1월, 아프리카의 대표적 사회주의 국가 앙골라는 한국과 수교했다.

『앙골라 관리를 만났더니 「우리는 당신들이 땀 흘리며 고기를 잡는 근면성에 깊은 감명을 받고 한국과의 수교를 앞당겼다」고 말합디다』

수교 직후, 앙골라 대통령이 그를 만나고 싶다는 연락이 왔다. 그해 3월, 그를 태워 갈 앙골라 대통령 전용기가 라스팔마스 공항에 도착했다. 대통령은 앙골라의 국민기업을 키우는 그의 노고를 치하하고 그를 駐韓 앙골라공화국 명예영사로 임명했다.

그는 현지에 소형이지만 鐵(철)구조물 공장을 세웠다. 앙골라 해군에서 운영하던 낡은 호텔을 인수해 리모델링 공사를 했다. 그는 호텔 수리 작업 현장에 직접 참여했다(1997년 6월).

그때 안전사고가 일어났다. 시멘트 섞는 장비를 확인하고 벨트 줄을 잡고 올리는 순간, 현지 노동자가 무심코 동력 스위치를 작동해 權회장의 왼손이 벨트에 말려들어 갔다.

사고 11시간 만에 그는 南阿共의 병원으로 이송돼 치료를 받았지만, 왼손의 인지·중지·새끼손가락의 끝부분을 절단해야 했다. 필자와 인터뷰 중 權회장은 왼손을 테이블 위에 올려놓았는데, 주먹을 쥔 모습이었다.


매년 장학금 5억원 지급

權榮浩 회장은 1986년 한국에 수산회사인 (주)인터불고를 설립했다. 이어 그의 고향 울진에 東榮(동영)장학재단을 설립했다. 「東」자는 동해, 「榮」자는 자신의 이름 자에서 따온 것이다. 동영장학재단은 이후 고등학생 200여 명, 대학생 80여 명, 해외유학생 10여 명, 중국 조선족과 한족 대학생 300여 명 등 모두 600여 명에게 매년 5억여 원의 장학금을 지급해 오고 있다.

1987년 그는 부산 사하구 장림동에 8000t급 냉동공장을 인수해 이를 1만2000t급 대형 냉동공장으로 증설했고 대구 파크 호텔을 123억5000만원에 인수했다. 파크 호텔 인수에 이어 그 옆쪽 금호강변을 낀 절벽을 이용해 특1급 호텔을 새로 짓기로 작정하고 고모령 주변 과수원과 밭 1만 평을 미리 매입해 두었다.

1996년, 그는 네덜란드에 있는 한국농수산유통공사의 현지법인인 KTDC를 인수했다. 동양 식품을 유럽에 유통시킨다는 목적으로 설립된 KTDC는 적자가 누적되고 있었다. 그는 인수한 KTDC의 상호를 「인터불고 네덜란드 B.V」로 바꾸고, 유럽 물류의 중심인 로테르담에 랜딩시켰다.

1997년, 우리나라에 외환위기가 도래했다. 이 해 대구에서 개최하려던 세계청소년체육대회가 국가재정난을 이유로 취소되었다. 대구 파크 호텔에 대한 외국 선수단과 임원들의 숙소 지정이 취소되었다. 그러나 그는 곧 2002년 월드컵 대회 준비에 돌입하지 않을 수 없었다.

『부지를 제외하고 건축비만 800여억원을 투입해야 했어요. 800억원이면 어선 30척을 건조해 연간 800억~1000억원의 매출을 올려, 적어도 200억원의 이익이 기대되었습니다. 호텔을 지어서는 매출 300억원도 올리기 어렵거든요. 그래도 누군가가 하지 않으면 2002년 월드컵 예선전의 대구 유치는 어려웠어요. 국제대회를 앞둔 대구시에서 저에게 자꾸 지으라고 요청했습니다』

그는 신관(호텔 인터불고)을 세우는 공사를 시작한 지 3년 만인 2001년 5월25일 준공, 개업식을 하게 되었다. 호텔 인터불고는 구관을 포함해 총부지 2만4600평, 건축면적 2만1000평, 객실 360실, 국제회의장 620평 규모이다. 2002년 월드컵뿐만 아니라 2003년 하계 유니버시아드의 선수단 숙소로 사용되었다. 호텔의 모든 시설은 스페인풍으로 가꾸었고, 로비층에 「스페인 문화원」을 두었다. 이곳에서는 스페인 문화를 소개하는 도서관을 열고, 스페인語 강좌를 개설하고 있다.

『저는 스페인에서 돈을 벌었고, 저의 딸과 아들은 스페인에서 교육을 받았습니다. 받은 만큼 돌려 주어야 한다는 도리를 실천하기 위해 스페인 문화원을 설립한 것입니다』

2003년 그는 문화교류에 대한 공로로 스페인 국민훈장을 수상했다. 스페인 문학을 전공해 덕성女大 교수로 재직 중인 그의 맏딸도 2006년 아버지와 같은 스페인 국민훈장을 받았다.

1998년, 그는 스페인 북부 갈라시아 지방의 美港 비고에 「골프 리아 데 비고(Golf Ria de Vigo)」를 건설했다. 스페인 대학에서 경영학을 공부한 아들 철민씨가 이 골프장에서 근무하고 있다.


『회장님은 프라이드를 좋아해』
손수 운전하는 소형 승용차「프라이드」옆에 선 權榮浩 회장.

「호텔 인터불고」 레스토랑에서 점심을 함께 하면서 시작한 인터뷰가 4시간을 지날 무렵에 權회장은 경산시 坪山洞(평산동)에 건설 중인 골프장 현장에 가려고 일어서면서 필자에게 『동행하면서 인터뷰를 계속하자』고 제의했다.

그는 소형차 「프라이드」의 운전석에 앉았다. 필자는 뜻밖에도 純자산 1조원의 巨富(거부)가 손수 운전하는 승용차의 「승객」이 되었다. 成熙丘 사장의 사전 귀띔에 따르면 權회장은 10여 년간 현대차 「엑셀」을 탔는데, 『차 좀 바꾸라』는 주위의 성화에 응해 6개월 전에 기아차 「프라이드」로 바꾸었다. 成熙丘 사장의 말이다.

『權회장님은 주변 사람들에게 「기름값도 비싼데, 큰 차를 탈 필요가 있느냐」고 하셔요. 유럽지역에 갈 때도 여객기의 이코노미席만 타십니다. 누가 뭐라면 「일등석 탄다고 빨리 가냐」고 하셔요』

출근 때 중형차를 타는 필자로선 가슴이 뜨끔한 얘기였다. 權회장은 매우 얌전하게 차를 운전했다. 시골 풍경의 顧母驛(고모역) 앞을 지났다.

『골프장이 개장될 즈음에 이 구불구불한 시골길이 6차선 도로로 확장될 계획이라고 합디다』

―회장님께서 청와대 초청에도 엑셀을 타고 가셨다면서요.

『2001년 2월1일 앙골라 대통령이 우리나라에 국빈방문을 하셨는데, 駐韓 앙골라 명예영사로서 김포공항에서 영접한 다음, 1990년형 엑셀을 타고 영빈관에 갔습니다. 아무 흠잡히는 일 없이 무사히 만찬 행사에 참석하고 돌아왔어요』

30분 만에 경산 골프장 건설 현장에 도착했다. 건설비 1000억원, 51만여 평 부지, 27홀 규모로서 2007년 연말 준공 예정이다. 그가 먼저 물었다.

『우리 골프장이 어떻습니까』

―저는 골프를 하지 않아 잘 모르겠습니다. 다만 전망은 매우 좋군요.

『처음엔 45만 평 규모로 건설하려 했는데, 국제행사를 치르기 위해 세 번이나 설계변경해 51만 평 규모로 늘렸습니다. 2010년 LPGA를 유치할 계획이거든요』

골프장 아래로 영남大 캠퍼스가 보이고, 그 너머로는 押梁面(압량면)의 벌판이 펼쳐 있다. 押梁이라면 선덕여왕 13년(647) 金庾信(김유신) 장군이 押梁州軍主(압량주군주: 지금의 수도방위사령관 格)로서 그의 군진을 설치했던 역사현장이다.

權회장은 나무를 옮겨 심는 작업을 잠시 둘러보고 클럽 하우스에 들어갔다. 실내 벽면을 장식하고 있는 대형 벽화는 아직 미완성 상태였다.

―매우 이국적이고 느낌이 강렬하군요.

『아프리카 화가들을 데려와 벽화작업을 맡기고 있습니다. 우리 같으면 국전 입상 수준의 화가들이 그리고 있는데, 그림값이 매우 쌉니다』

―2011년 세계육상대회의 대구 유치가 성사될 것 같습니까(이 인터뷰 2주 후에 대구 개최가 확정되었다).

『대구로 實査(실사)하러 오신 세계육상연맹(IAAF) 집행위원들을 우리 호텔에서 모셨는데, 아침에 산책이나 조깅을 하고는 모두들 「원더풀」을 연발했어요. 평가기준은 개최 후보도시의 인프라·마케팅·관중호응도라고 합디다. 3월27일 케냐의 몸바사에서 개최되는 IAAF 집행이사회에서 28명의 집행이사가 무기명 투표로 개최도시를 결정합니다. 저도 2011년 대구 세계육상대회 유치위원의 한 사람입니다. 우리 계열사인 「IB스포츠」를 통해서 유치운동에 힘을 보태고 있습니다』

―스포츠 마케팅 회사인 「IB스포츠」는 미국 프로야구 메이저 리그 중계권과 아시아축구연맹이 주관하는 한국 대표팀 경기 중계권을 사들여 공중파 3社의 공격을 받기도 했죠.

『방송과 중계는 별개의 사업으로 가고 있는 추세입니다. 공중파 방송사가 중계권을 독점해야 한다는 법이 없고, 우리는 중계산업이 커지는 미래를 내다보고 진출했을 따름입니다』

―지금처럼 미국의 메이저 리그나 영국의 프리미어 리그의 경기를 중계방송하면 국내 프로야구와 프로축구가 죽는 것 아닙니까.

『세계가 하나로 되어 가는 만큼 국내 리그의 경기 수준을 높이는 것이 중요하지 않을까요』
權회장이 의료혜택을 받지 못하는 조선족들과 중국인들을 위해 1997년 중국 吉林省 梅河口市에 건립한 비영리법인 東榮병원과 의료진.


조선족 선장과 기관장을 양성해
건설 중인 경산골프장을 둘러보는 權회장.

權榮浩 회장이 중국에 살고 있는 조선족 선원을 고용하기 시작한 것은 중국의 대외개방 직후인 1990년부터였다. 그가 조선족 선원을 고용한 것은 국내에선 원양어선을 타겠다는 희망자가 갈수록 줄어들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하루에 여덟 시간만 일하는 사회주의적 풍토에 젖어 온 조선족 선원들에게 하루 12시간, 필요에 따라선 그 이상 일해야 하는 작업환경은 애당초 무리였을지 모른다. 그들에게 동기부여가 필요했다.

權회장은 조선족 선장·기관장을 배출하겠다고 마음먹었다. 그리고 7년 후인 1997년 2월1일, 마침내 그는 대성5호 선장과 기관장에 조선족인 고영봉·김언철씨를 발령했다.

『현재 우리 회사 배에 승선 중인 조선족 선장과 기관장은 모두 55명이고, 항해사·기관사는 무려 100명에 달합니다』

1999년, 그는 중국정부와 교섭해 길림성 梅河口(매하구)市의 고급중학교(한국의 고등학교)에 항해과와 기관과를 신설했다. 한국에서 교사를 파견하고, 1만2000달러를 들여 어학실습실을마련해 주며, 매월 600달러의 장학금을지원해 해기원 양성에 착수했다. 지금까지 5기에 걸쳐 100여 명의 졸업생을 배출했다. 현재의 항해科·기관科 재학생은 漢族(한족)들이다. 조선족 청년들은 중국에 진출한 한국 기업 등에 취업하러 吉林省(길림성)을 떠났기 때문이다.

1996년 10월 그는 매하구市에 비영리법인 東榮병원을 지어 조선족과 중국인의 건강을 돌보고 있다. 홍수로 파괴된 매하구市의 송강대교를 복원해 주기도 했다. 成사장은 『현재까지 인터불고에서 일한 조선족 선원들이 벌어들인 수입은 3억 달러가 넘는다』면서 『이는 吉林省의 지역경제에 상당한 활력을 준 것으로 평가된다』고 말했다.

2002년 9월, 그는 길림성 長春(장춘)시에 있는 국립 길림大에 단과대학인 東榮학원을 설립했다. 그가 800만 달러를 투입한 東榮학원 건물은 연건평 3만3000여 평, 18층이다. 東榮학원에는 중국의 국가교육위원회가 허가한 스페인학과와 관광학과 등이 설치되어 이미 2기 학생을 모집했다.

2005년 중국 정부는 權榮浩 회장에게 「友誼賞(우의상)」을 수여했다.
테네리페 조선소에서 정비를 마치고 출항을 앞둔 인터불고 漁船의 조선족 선장과 선원들이「파이팅」을 외치고 있다.


『큰 부자는 民心이 만든다』

오후 6시30분쯤 「호텔 인터불고」로 되돌아온 權회장과 필자는 구내 레스토랑에서 저녁밥을 먹으면서 밤 9시까지 인터뷰를 계속했다. 스페인産 포도주 한 병이 테이블에 올랐지만, 權회장과 成사장은 포도주잔에 입술만 적실 뿐이었다. 두 분 다 술·담배를 못 한다고 했다. 필자는 포도주 한 잔만 마셨다.

―權회장과 비슷한 시기에 바다로 나간 사람들 중에 돈 못 번 이도 있습디다.

『돈 버는 배를 타지 못하면 미리 가불해 쓴 돈 때문에 빚까지 지는 경우가 있어요. 더욱이 항구마다 술집과 여자 아닙니까. 돈은 쓰면 모을 수 없습니다』

―작은 부자는 열심히 일하고 모으면 되겠지만, 큰 부자는 어떻게 하면 될 수 있습니까.

『「큰 부자는 하늘이 낸다」고들 하지만, 저는 「民心이 큰 부자를 만든다」고 생각합니다. 존경받지 못하는 기업은 미래가 없거든요』

인터뷰 후 숙소로 정해진 8층 객실에 들어가 權회장의 저서 「지중해의 미녀 참다랑어」를 읽었다. 1989년 한국인으로서는 최초로 地中海(지중해) 참다랑어 定置網(정치망) 어업에 진출해 현장에서의 체험담을 필자와 같은 문외한이 읽어도 재미있게 쓴 책이다. 다음 대목은 특히 감동적이었다.

<비록 경험 부족으로 실패는 했으나 이 사업을 포기하지 않았다. 앞으로 기회가 주어지면 다시 시작할 것이다. 그리고 다음엔 반드시 성공담을 쓸 것이다>

밤 11시쯤 되어 혼자서 호텔 3층 바에 들렀다. 전속가수가 부르는 스페인 노래 「베싸 메 무초」(Kiss me much)가 정감 있게 느껴졌다. 그 분위기에 젖어 잔술 몇 잔으로 회포를 달랬다.

다음날 아침에는 호텔 경내를 한 바퀴 돈 뒤 해장국으로 아침식사를 하고 구내 커피숍에 들러 「악기의 여왕」 파이프 오르간 연주를 들었다.

장진익 호텔 총지배인과 이중로 총무팀장을 만나 인터불고 그룹의 자료를 얻은 다음에, 택시로 후백제왕 견훤에게 패전한 고려 태조 王建의 도주로 팔공산-安心-半夜月을 한 바퀴 돈 뒤 東대구역에서 서울行 기차를 탔다. 그리고는 자신에게는 엄격하면서도 남들을 위해서는 크게 베푸는 한 남자의 삶을 거듭 음미해 보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