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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물연구] 2014년 仁川아시안게임유치위원장 愼鏞碩

정순태   |   2007-05-28 | hit 10224

韓國은 强小國(강소국)을 지향할 수밖에 없다. 자칫하면 중국과 일본이란 두 强者 사이에 끼어 존재감을 잃기 쉽다. 오늘날의 强小國은 국제행사, 국제경기, 외국기업, 외국자본, 해외두뇌를 많이 유치하는 데 능숙하다. 스위스·네덜란드·오스트리아·아일랜드가 그런 强小國의 대표적 본보기다.

한국의 환경은 열악했다. 외국어 교육의 실패에 따른 세계인으로서의 언어 장벽, 민족주의의 超强勢(초강세)에 따른 좁은 세계관, 외국 문화에 대한 낮은 이해가 强小國으로 가는 길을 막아 왔다.

2014년 仁川(인천)아시안게임 유치위원회 愼鏞碩(신용석·66) 위원장은 일찌감치 세계를 누비며 국제감각을 쌓아 온 한국의 국제화 제1세대다.

그는 자신의 역량을 시원하게 입증했다. 지난 4월17일, 쿠웨이트 JW 메리어트 호텔에서 열린 아시아올림픽평의회(OCA) 총회에서 仁川은 印度(인도)의 뉴델리를 물리치고 2014년 아시안게임 개최지로 결정되었다. 개최지 결정투표에서 인천은 총 45표 가운데 32표를 얻어 13표의 뉴델리를 압도했다.

개최지 결정 이후에도 愼鏞碩 위원장의 발걸음은 바쁘다. 愼위원장이 몽골에서 귀국한 날(5월6일)과 일본에서 귀국한 다음 날(5월9일), 두 차례에 걸쳐 모두 8시간 동안 그와 만났다. 첫날 인터뷰 장소는 그가 창설을 주도한 여행클럽 「尙美會」 사무실(태평로1가 코리아나호텔 9층)과 仁川 自由공원 옆에 있는 그의 집이었다.

―유치위원장의 임무는 유치 성공으로 일단 끝난 것 아닙니까.

『얼마 전까지는 표를 얻으러 다녔고, 이제는 우리를 지지해 준 나라에 인사하러 다닙니다. 내주에는 두바이, 바레인, 요르단, 레바논 등 中東 여러 나라를 방문할 예정입니다』

―아시안게임 유치에 성공한 요인을 무엇이라고 생각하십니까.

『仁川 스스로가 보유한 경쟁력, 1988년 서울올림픽과 2002년 월드컵대회 등을 훌륭하게 치른 大韓民國의 국가 信認度(신인도)를 밑천으로 삼아 OCA 회원국 체육지도자들과 인간적 신뢰를 구축한 결과로 봅니다』

―仁川이 보유한 경쟁력은 무엇입니까.

『仁川국제공항과 仁川 시내를 잇는 인천대교가 2009년에 완공되면 국제공항에서 경기장·선수촌까지의 거리가 30분 前後로 당겨집니다. 이런 조건은 全세계에서 유일한 것입니다. 기업 CEO 출신 安相洙(안상수) 인천시장이 바로 아시안게임 유치의 아이디어를 낸 분입니다.

그런 安시장인 만큼 최첨단 대회 개최와 仁川의 발전을 동시에 실현시킬 것이라고 믿습니다』

―仁川 아시안게임 유치는 「安相洙 시장의 절묘한 用人術(용인술)에 의해 부활한 맞춤형 전문가가 전개한 맞춤형 작전의 승리」라고들 합디다.

『安相洙 시장이 저를 유치위원장으로 선택해 주셔서 지난 2년 동안 저로선 「쎄(혀) 빠지게」 뛰었습니다. 印度의 거국적 유치운동에 비해 우리 정부는 평창 동계올림픽, 대구 세계육상대회, 여수 세계박람회의 유치활동이 동시에 진행되었던 만큼 仁川을 도울 여력이 없었어요. 安시장을 비롯한 인천시 당국의 알뜰한 「병참지원」과 270만 仁川시민의 뜨거운 성원이 없었다면 이길 수 없는 경쟁이었습니다』

지난 1월12일 강화도 마니산 참성단에서 열린 아시안게임 유치 기원제에서 安相洙 인천시장과 愼鏞碩 유치위원회 위원장 등이 제를 올리고 있다.


외국에 나가면 빛이 나는 인물

愼鏞碩 위원장은 朝鮮日報 파리특파원 시절에 이미 스포츠 외교와 국제대회 유치에 탁월한 재능을 보였다. 그래서 「대한체육회 출입기자」라는 별명을 얻기도 했다.

『평소 친분이 있던 대한체육회 산하 경기단체장들로부터 부탁을 많이 받았어요. 파리특파원 근무 13년간 대한체육회 관계자를 대리해 무려 160여 회에 걸쳐 각종 국제회의에 참석했죠. 프랑스·스위스·독일 등 유럽 각국에서 열리는 회의에 대리 참석하면서 국제무대를 체험한 거죠』

이런 점에서 그는 「한국의 제1세대 국제대회 유치전문가」라고 해도 전혀 어색하지 않다.

『1973년, 朴正熙(박정희) 대통령이 태릉사격장을 국제규모로 건설하면서 국제사격대회의 유치가 가능한지 제게 문의했어요. 그때 청와대에서 파견된 사람이 경호실에서 근무하던 김용운씨(후일 IOC위원 역임)였죠. 당시 대회 유치 제안서를 제가 썼습니다. 1981년에는 국무총리실에서도 서울올림픽 유치를 도와 달라고 회사를 통해 제게 요청해 왔어요. 그래서 바덴바덴까지 가게 되었습니다』

그는 외국에 나가면 더욱 빛을 발한다. 3년 전, 필자는 愼위원장과 함께 외국 여행을 한 적이 있다. 그때 참 마음이 편안했다. 키 190cm, 몸무게 100kg인 그를 앞세우고 우리 일행은 뒤에서 졸졸 따라다녔지만, 걱정할 일이 별로 없었다. 그는 영어와 佛語(불어)를 능숙하게 구사하고, 세계 여러 나라의 문화·역사·지리에 해박하며, 프랑스의 포도주와 요리, 미술품 평가에 높은 식견을 갖고 있다.

그의 친화력은 빠르게 사람을 끌어당긴다. 愼위원장과 함께 해외여행을 자주했던 사람들은 그를 다음과 같이 평가한다.

『愼위원장은 해외여행 중 어디 가면 무엇을 보고 배워야 할지를 아는 분입니다. 레스토랑에 가면 주방장과 음식문화를 논하고, 전시장에 가면 화가와 새로운 미술의 경향을 놓고 대화할 수 있는 분이죠. 대절버스 안에서는 여행지의 역사에 대해 짧지만 알차게 강연해 동행자들을 즐겁게 해줍니다. 그래서 우리들은 그를 「마스터 가이드」라고 부릅니다』

愼위원장과 가까운 趙甲濟 기자는 필자에게 이렇게 귀띔했다.

『개최지 결정 1년 전에 이미 愼위원장이 「30표는 얻을 것 같다」고 말해요. 긴가민가 했는데, 그의 예상이 무섭게 적중된 데 內心 놀랐습니다. 그는 승부에 강하고 운도 좋은 사람입니다. 이런 「능력 있고 재미있는 인간」의 캐릭터가 어떤 과정을 거쳐 형성되었는지는 연구대상 아닙니까』


祖父는 한국사 최초의 근대 汽船 함장
仁川 자택에서 先親 신태범 박사와 함께(1992년).

愼鏞碩은 1941년 仁川에서 태어났다. 아버지는 京城帝大 의학부를 졸업하고 仁川에서 「愼욋과」를 개업한 愼兌範(신태범) 박사, 어머니는 경남 晉州의 大지주 집안의 딸로 1951년 파리에 유학한 이래 계속 프랑스에 정착해 화가로 大成한 李聖子(이성자) 여사이다.

愼鏞碩 위원장의 조부 愼順晟(신순성·1878~1944)은 한국 최초의 군함 光濟號(광제호)의 함장을 역임했다. 「光濟號」라는 이름은 高宗 황제가 내렸다. 「鎭海고등해원양성소 校史」에 의하면 광제호는 舊한국정부가 우리 海關(해관) 자금으로 1905년 日本 가와사키造船에서 신조한 한국사 최초의 汽船(기선)이다. 그 제원은 총 톤수 1056t, 전장 66.7m, 主기관 2400마력, 최대속도 14.77마일.

1905년 12월, 광제호는 제물포(지금의 인천항)에 도착해 성대한 취항식이 베풀어졌는데, 船尾(선미)에 태극기를 달고, 선수와 선미에 3인치 포를 장착했다.

『광제호의 母港(모항)이 인천항이었기 때문에 서울 종로구 관수동에 살았던 우리 집안이 仁川으로 이주해 와 仁川 토박이가 된 겁니다』

광제호는 6년간 韓國籍(한국적) 선박으로 태극기를 달고 운항했을 뿐만 아니라 많은 한국인 海技士(해기사)를 양성했다.

『1910년 8월29일, 일제의 한반도 강점으로 조선총독부가 설치되자 광제호의 태극기는 日章旗(일장기)로 교체되었는데, 하루 전날 저녁에 할아버지께서 이 태극기를 몰래 숨겨갖고 나와 땅속에 묻어 보관하시다가 1944년 별세 직전에 아버지에게 남겼습니다. 이 태극기는 아버지께서 보관해 오셨는데, 아버지 별세 후(2003년)에는 제가 물려받아 家寶(가보)로 삼고 있습니다』

―愼위원장의 家族史(가족사)가 바로 한국의 近代史(근대사)군요.

『할아버지는 일제의 한반도 강점 후 草野(초야)에 묻혀 사셨는데, 그로부터 家勢(가세)가 기울었습니다. 할아버지께서는 아버지에게 「官吏를 하면 日帝의 하수인이 된다. 식민지 백성으로 살아가려면 그래도 의사가 제일 낫다」고 하셨대요. 그래서 아버지께서 京城中學(現 서울高)을 거쳐 京城帝大 의학부로 진학해 의사가 되신 겁니다』


선친 愼兌範은 仁川의 「의학박사 제1호」이며 향토사학가

―선친 愼兌範(신태범) 박사께서는 「仁川의 의학박사 1호」입니다.

『주위에선 모두들 「서울에서 개업하라」고 권유했지만, 先親께선 「우리 아버지 氣(기) 좀 살려 드려야겠다」며 굳이 仁川에서 「愼욋과」를 개업하셨답디다. 그때가 제가 태어났던 해인 1941년으로부터 1978년까지 장장 37년간 「愼욋과」의 문을 여셨습니다. 개업의를 그만두신 후에는 명예교수로서 인하大에서 20년간 영양학 등을 강의하셨습니다. 말이 명예교수이지, 1주에 4강좌나 맡으셨어요』

―愼兌範 박사께선 생전에 향토사학자로서도 유명하셨는데요.

『仁川市史 편찬 책임도 맡으셨어요. 향토사 관련 자료를 많이 소장하셨구요. 저는 아버지의 의사 직업은 대물림하지 않았지만, 1994년 이래 仁川향토사연구회 회장을 맡고 있습니다. 향토사 연구에 관한 한 대물림한 셈이죠』

―모친께선 왜 선친과 이혼하고 파리로 떠나셨습니까.

『아버지와 어머니, 모두 개성이 강한 분입니다. 이혼은 「성격차이 때문」이었다고 합니다. 어머니는 1950년 아버지와 이혼하고 다음해 프랑스로 유학을 떠나셨어요. 일찍이 일본에 유학해 예술을 전공하신 어머니는 프랑스에 가서 처음엔 패션 디자이너가 되려 했는데, 회화 쪽으로 진로를 바꾸신 거예요. 아직도 작품활동을 하시는데, 국내 전시회 관계로 지난 4월25일 일시 귀국하셨습니다』


개성이 강한 부모
仁川中 재학 시절의 신용석군(1956년).

금년 90세인 그의 어머니 李聖子 여사는 5월22일부터 2주간 서울 현대화랑에서 개인전을 열고, 오는 8월에는 昌原 소재 경남도립미술관에서 대규모 회고전을 개최한다.

―부모의 이혼이 어린 시절의 일이라 충격이 컸겠네요.

『아버지께서 우리 형제들을 잘 보살펴 주셨어요. 초등학교 5학년 때부터는 週給(주급)으로 용돈을 주셨는데, 「책 사는 돈은 무제한이니 얼마든지 사서 많이 읽으라」고 하셨죠. 그래서 저는 네 살 아래인 셋째 鏞克(용극)이와 함께 동화집·위인전·명작전집 등 갖가지 책을 많이 구입해 집에 우리 나름의 도서관을 차리고, 이름을 저와 아우의 이름 字 중 하나씩 떼어내 「碩克(석극)도서관」이라고 지었습니다. 그때 도장을 새겨 책마다 찍고, 친구들이 책을 빌려 가면 사인을 받았습니다』

―용돈은 많이 받았습니까.

『초등학교 때는 국화빵 사먹을 정도였는데, 중학에 진학하니 선친께서 「친구들과 자장면이나 우동 사먹고 나올 때 네가 먼저 음식값을 내라」며 주급을 올려 주셨습니다. 고교 시절에 받은 마지막 훈계는 「너도 이제 여자를 사귈 나이가 됐는데, 여자에게 거짓말하지 마라. 그게 제일 나쁜 일이다」 하시더군요』

인터뷰 중에 여러 나라에서 전화가 걸려 왔다. 그는 영국식 영어를 구사하며 통화했다. 혀를 굴리지 않고 간결해, 무슨 얘기를 하는지 필자도 대충 알아들을 만했다.

―영어를 참 쉽게 하시는데, 부러운데요.

『原語民처럼 하지는 못하죠. 「커뮤니케이션은 잘 되는 사람」이란 얘기는 들어요. 제가 영어에 대한 공포심에서 벗어난 것은 高2 때였어요』

―그 계기가 무엇입니까.

『서울高 다닐 때 제가 특활그룹 「郵票班(우표반)」의 반장이었어요. 당시 우리는 한 해에 한 번씩 교내 우표전시회를 열었지요. 高2 때의 전시회에 다울링 駐韓 미국대사가 관람하겠다는 연락이 갑자기 왔어요. 그분도 우표수집가였어요. 그런데 통역을 해야 할 英語선생님들이 웬일인지 자리를 비우셨어요. 교장선생님께서 「그러면 우표반장 愼鏞碩이가 설명해라」 하시는데, 처음엔 무척 당황했어요』


駐韓 미국대사 다울링에게 브리핑했던 高2년생
왼쪽부터 신용석(장남)·愼鏞克(3男·유로통상 회장)·愼鏞學(2男·파리건축大 교수) 형제와 그들의 외숙부 李漢弼(가수 藝名 「위키 리」)씨의 어린 시절(1948년).

―영어라면 단어 달달 외우고 문법이나 배우던 시절인데, 愼위원장께선 영어회화를 따로 공부했던 모양이지요.

『그런 건 아니고, 우표에 취미를 가지고 있었던 관계로 「우표수집」, 「테마별수집」 따위의 전문 단어나 용어를 조금 아는 수준이었지요. 그런데 저의 설명을 듣던 다울링 대사가 「격려 차원의 제스처」인지 연방 고개를 끄덕거리며 「엑셀런트」라고 했으니까 교장선생님에게는 제가 매우 대견스럽게 보였을 거예요』

―미국대사가 알아들을 만한 영어를 구사하셨으니 대단한 것 아닙니까.

『저는 전문지식만 있다면 외국어가 능숙하지 않아도 커뮤니케이션은 된다, 제 아무리 혀를 잘 굴려도 해당 분야에 대한 콘텐츠가 없으면 커뮤니케이션이 어렵다는 것을 깨달았습니다. 외국어를 왜 배웁니까. 자기가 하고 싶은 말, 자기가 가지고 있는 아이디어를 전해 상대방과 의견을 교환하는 것 아닙니가. 자기 자신의 콘텐츠 없이 외국어 잘해 봐야 뭘 해요. 외국어를 원어민처럼 능수능란하게 구사하기보다는 다방면에 걸쳐 콘텐츠를 갖고 자신 있게 말하면 상대방이 이해해 줍니다』

―우표수집은 언제부터 시작하셨습니까.

『中2 때부터입니다. 프랑스에 계신 어머니께서 크리스마스 선물로 유럽 여러나라의 우표들을 정리해서 보내 주셨어요. 그것이 계기가 되었습니다』

―세계 각국의 우표 수집을 하면 뭣에 좋습니까.

『우선, 그 나라의 역사와 지리를 알게 되죠. 인물우표를 모으면 그 인물이 등장한 역사적 배경에 관심을 갖게 됩니다. 학생 때는 경제적 여력이 없으니까 외국 수집가들과 우표 교환을 많이 하게 돼요. 한때는 저와 우표를 교환한 외국수집가의 국적이 50여 개국에 달했죠. 그때는 이메일·팩스·인터넷 같은 것이 없었고, 유일한 통신수단은 편지였습니다.

영어 편지를 많이 쓰고 많이 받았어요. 자연스럽게 저의 교류 폭이 넓어진 거죠. 그렇게 편지를 주고받은 분들 가운데 그 후 외국여행 때 또는 파리특파원 시절에 다시 만나 가까운 친구가 되기도 했죠』

―요즘도 우표수집을 하십니까.

『지금은 일이 바빠 과거처럼 열정적으론 못 합니다』

―어떤 분야의 우표를 모았습니까.

『초기엔 全세계 우표를 수집 대상으로 삼았지만, 1980년대 이후엔 테마별로 전문화했어요. 새(鳥)우표, 기차 우표, 비행기 우표 등이었죠. 한국 우표 중에는 구한말과 韓日합방 초기의 우표와 郵皮(우피·우표봉투) 등 郵便史(우편사) 분야로 들어가 국제전에 여러 차례 출품해 메달을 수상했습니다』

그는 서울高 재학 중 농구와 아이스하키 선수로 뛰었고, 졸업 후 再修生(재수생)을 거쳐 서울大 농대 식품공학과로 진학했다.

―서울大 재학 시절엔 「大學新聞」 학생편집장을 맡으셨지요.

『1~3학년 때 학생기자, 4학년 때는 학생편집장을 맡았어요』

당시 서울大內 11개 단과대학에서 학생기자가 1명씩 선발되었는데, 그 경쟁시험이 치열했다. 「대학신문」은 週 2회, 월요판 8면, 목요판 4면 2만여 부가 발간되었다.

―대학 4학년 때 편집장이 되셨으니 少年登科(소년등과)를 한 셈이군요.

『그 덕분에 미국·일본·네덜란드 등 여러 나라 정부의 초청을 받아 해외여행을 일곱 번이나 했습니다』


방문의 타이밍은 절묘했지만…

오후 4시쯤, 愼위원장과 필자는 尙美會 사무실에서 나와 그의 승용차를 타고 인천으로 출발했다. 그는 「가족행사」를 위해, 필자는 취재 목적으로 그의 인천 집에 가야 했다. 승용차 안에서 인터뷰를 계속했다. 1시간 만에 인천항이 내려다보이는 자유공원에 도착했다. 우리는 맥아더 장군 동상이 서 있는 동산에 올랐다.

『연전에 「맥아더 장군 동상을 철거하자」는 좌익 행동대원들이 이곳에 몰려왔었습니다. 이 동상은 인천시민의 성금으로 건립된 역사적 기념물입니다. 인천시민과 애국단체의 저지가 없었다면 큰일 날 뻔했어요. 맥아더 동상을 허무는 「속 좁은 인천」으로 오해되어 국제대회 유치도 성공할 수 없었을 것입니다』

우리는 자유공원에서 내려와 이웃 松鶴洞(송학동) 언덕배기에 위치한 그의 집으로 걸어서 갔다. 마당에서 인천항이 보인다. 꽃밭은 잘 가꾸어져 있다. 부지 100여 평에 선친과 공동으로 지은 2층 집이다. 유치활동을 하면서 그는 각국 체육회장 등을 초청해 이 집에서 재우기도 했다.

방문 타이밍은 절묘했지만, 좀 염치없는 방문으로 비쳤을지 모르겠다. 그날 愼위원장 댁의 「가족행사」는 파리에서 귀국한 모친 李聖子 여사와 그의 형제들의 모임이었다. 愼위원장의 부인 催泰順(최태순) 여사는 시어머니를 모시기 위한 음식 장만으로 분주했다. 愼위원장이 부인의 일손을 덜어주기 위해 손수 「에스프레소」 커피를 끓여 필자에게 대접했다.

愼위원장의 모친과 동생이 대문으로 들어왔다. 필자는 얼른 마당으로 나가 李聖子 여사에게 인사를 드렸다. 구순의 연세였지만 정정하고 키도 컸다. 필자는 커피 한잔을 함께하고 愼위원장 댁에서 나왔다.

愼위원장의 운전기사가 달려나와 『愼위원장님이 손님을 서울까지 보내 드리라고 하셨다』고 말했다. 필자가 사양해 東인천역까지만 태워 주기로 했는데, 역전에 접근하자 필자의 마음이 변했다. 인천까지 와서 바닷가에 앉아 생선회 한 접시도 먹고 가지 못하면 나중에 후회할 것 같았다.

운전기사와 함께 仁川연안부두의 밴댕이 횟집에 들어가 저녁을 먹었다. 仁川연안부두 주변은 10여 년 전이나 지금이나 마찬가지였다. 아시안게임을 개최하려면 손을 좀 보아야 할 것 같다. 식사 후 운전기사는 필자를 東인천역에 데려다 주었다. 東인천發 용산行 특급전철을 타고 서울로 돌아왔다.


朝鮮日報 수습기자로 입사

愼위원장과 필자는 지난 5월9일 오후 6시 코리아나호텔 구내 중식점 「大上海」에서 다시 만났다. 인터뷰는 그가 기자가 된 시기로부터 이어 가기로 했다.

―대학을 졸업한 해인 1966년 朝鮮日報社에 수습기자로 입사했습니다. 왜 기자가 되려고 했습니까.

『1차 필기시험 합격 후 면접시험을 보게 되었는데, 方又榮 회장(당시 사장)께서 「자네, 경력이 화려하네. 왜 기자를 하려느냐」고 물으셔요. 「국제관계 기사를 쓰는 외신부(지금의 국제부) 기자가 되고 싶습니다」라고 답변했습니다.

方회장은 지금의 左派논객 리영희 외신부장에게 「이 친구가 외신부 기자를 하고 싶다는데, 英語 인터뷰를 좀 해보라」고 하셔요』

―그래서요.

『리영희 부장이 英語로 「월남전의 장래를 어떻게 생각하느냐」고 묻습디다. 「美軍의 군사력만 가지고는 곧장 끝낼 수 있는 전쟁은 아닌 것 같다」고 짧은 영어로 대답했어요. 대번에 리영희 부장이 方회장께 「우수합니다」고 보고합디다』

그는 외신부 기자 근무 4년 만에 朝鮮日報의 초대 파리특파원으로 부임했다.

『그때 한국일보·동아일보에서 파리특파원을 내보낸다는 소문이 들려옵디다. 외신부장에게 「파리특파원으로 내보내 주시오」 했더니 「네 경력으로는 어림도 없다」고 해요. 社內 경쟁자도 있었는데, 어찌된 셈인지 제가 가게 되었습니다』
인천항이 내려다보이는 자유공원에서.


『저 친구 적응력 좋아 한 달만 있으면 佛語 할 거다』

―佛語를 잘하셨군요. 고교 때 제2외국어로 佛語를 선택하셨습니까.

『아뇨, 실은 먹통이었어요. 나중에 안 일이지만, 당시 편집국장이던 선우휘(고인) 선생께서 「저 친구 적응력이 좋아 프랑스에 한 달만 데려다 놓으면 佛語 잘할 거다」며 저를 세게 미셨대요』

―그래, 佛語를 금방 배웠습니까.

『그게 어디 금방 되는 일입니까. 1969년에 부임한 지 1주일도 안 돼 드골 대통령이 下野(하야)했습니다. 의회에서 「上院 개혁안」이 부결되자 「대통령에 대한 불신임」으로 간주하고 자존심 높은 드골은 대번에 엘리제宮을 박차고 나와 그의 고향 「콜롱베」로 떠나 버렸던 겁니다.

저는 숙소도 못 얻은 상태에서 드골의 근황과 프랑스 정세 관련 기사를 쓰느라고 정신없이 바빴습니다』


『일류 레스토랑에 가서도 쭈뼛쭈뼛하면 대접 못 받아』

―愼위원장께선 「화려한 파리특파원」이라는 평판을 받았는데요.

『高임금은 아니었지만, 조선일보사에서는 당시 우리 외교관·상사주재원 정도의 월급을 지급했습니다. 저는 아버지의 「보조금」을 좀 받았구요』

그의 선친은 매달 월급 송금일에 맞춰 조선일보사 총무부로 찾아와서 아들에게 보낼 「보조금」을 월급과 함께 송금토록 요청했다. 그때만 해도 우리나라의 외화 사정이 어려워 개인적 송금은 일일이 한국은행의 승인을 받아야 가능했기 때문이다.

―보조금의 액수는 어느 정도였습니까.

『저의 월급과 맞먹는 금액이었습니다』

―선친께서 다 큰 아들에게 보조금을 보낸 이유는 무엇입니까.

『선친께서는 「프랑스 특파원으로 가는 것은 네 일생에 한 번 올까말까한 행운이다. 이참에 프랑스 음식도 먹어 보고, 좋은 곳도 다녀 보거라. 프랑스 문화와 예술을 접하면 너의 인생에 많은 도움이 될 거다. 파리의 일류 레스토랑에 가더라도 문 앞에서 쭈뼛쭈뼛하지 마라. 그러면 돈은 돈대로 내고 대접을 못 받는다. 문을 꽝 차고 당당하게 들어가야 대접받는다」고 하시데요. 아버지는 프랑스의 음식문화에 관심이 많았고, 食(식)문화와 관련한 저서를 세 권이나 남기신 분입니다』

―어머니 李聖子 여사는 프랑스 어디서 거주하십니까.

『1년에 절반은 파리에, 나머지 절반은 南佛의 아름다운 마을 「투레트」의 화실에서 지냅니다. 화실 안팎의 모든 걸 晉州를 연상시키게 가꿔 놓으셨습디다. 소녀 시절에 살던 고향땅에 대한 그리움이랄까, 애착 아니겠습니까』

―어머니의 동생이 1960~1970년대의 인기 팝송가수 「위키 리」라고 하던데요.

『어머니께 남동생이 두 분 계신데, 큰동생이 서울大 병리학과 李尙國(이상국) 교수이고, 그 아랫동생이 藝名(예명)을 「위키 리」라고 썼던 李漢弼(이한필)씨죠. 한필이 삼촌은 저보다 5년 연상인데, 초등학교 다닐 적부터 晉州에서 올라와 우리 집에서 같이 자랐던 만큼 유별나게 정답게 지냈어요. 초등학교 시절의 제가 京畿中에 다니던 한필이 삼촌으로부터 유행가를 여러 곡 배웠죠』

―아이쿠, 조숙도 하셔라.

『그때 배운 「서울야곡」이 저의 18번입니다. 가사가 「봄비를 맞으면서/ 충무로 길을 걸어갈 때/쇼윈도 글라스에 눈물이 흘렀다…」인데, 내가 한필이 삼촌에게 「쇼윈도가 뭐예요」라 물었더니 「얌마, 그건 몰라도 돼」라고 하데요. 한필이 삼촌은 미국 LA에 살고 계십니다』
조선일보 논설위원 시절. (왼쪽부터)이도형·김영하·신용석·고학용·류근일·이규태·공종원 위원이 회의를 하고 있다.


어머니, 인맥 관계에 도움 줘

―프랑스에 가셔서 모친을 뵈니 뭐라고 하십디까.

『당신께서 「아들들을 위하는 유일한 길은 내가 프랑스에서 성공하는 것」이라고 말씀하십디다. 어머니는 1965년 「에콜 드 파리 畵派」의 중심 화랑 「갤러리 샤르팡티」에서 등단하셨습니다. 그곳에서 초대전을 했으니 한국화가로선 파격적 대우를 받으신 겁니다.

어머니의 당시 테마는 「大地(대지)」였습니다. 「大地」 연작을 보면 물감을 조금씩 찍어 화폭에 짓뭉개 바르는 기법이었죠. 엄청난 노력과 정열을 요하는 치열한 작업이었습니다. 힘들 때는 큰아들·작은아들을 생각하셨대요. 저도 자식 키워 보니 어머님의 마음을 이해하겠더라구요』

―모친께서 在佛 유명 화가여서 도움을 받지 않았습니까.

『어머니는 인맥 관계에서 많은 도움을 주셨습니다』

―인맥이라뇨.

『프랑스 문화성이나 미술관 쪽 사람들을 접촉해야 했는데, 그 루트를 이끌어 주셨습니다. 아버님의 재정지원으로 프랑스 문화계 사람들과 좋은 레스토랑에서 만나 사귈 수 있었습니다. 자연히 저의 활동영역이 넓어졌고 그랬기 때문에 1970~1980년대 프랑스 국보급 대형 미술품들을 한국에서 전시할 수 있는 계기를 만든 거죠』

그가 유치한 조선일보사의 1971년 「밀레 특별전」은 大성공을 거두었다.

『루브르 박물관의 전시품을 모두 가져올 수 없는 것 아닙니까. 루브르 박물관에서 5점, 지방 박물관에서 몇 점씩 빌려 목표하는 50점을 채워야 했는데, 프랑스에서는 중앙에서 「협조해 주라」 해도 지방에서 「안 된다」고 하면 안 되는 거예요. 그래도 10여 개 지방 박물관을 설득해 「밀레 특별전」을 성사시켰어요』

이어지는 愼위원장의 회고담이다.

『관람객들이 전시장인 덕수궁 석조전의 입구로부터 덕수궁 담을 넘어 지금의 서울시의회 청사 앞까지 줄을 섰죠. 2개월간 연 관람객이 무려 70만 명에 달했습니다. 고급 문화의 수요는 많은데 공급은 적었던 시대상황의 반영이었습니다. 폭발적인 프랑스 예술작품의 수요가 있는 한 1년에 한두 번의 전시회를 유치해야 한다고 결론을 내렸죠. 이후 조선일보사의 「프랑스 미술 전시회」는 연례행사가 되었어요』

―프랑스 미술전으로 훈장을 받으셨더군요.

『韓佛 문화교류에 기여한 공로로 프랑스정부 문화훈장, 파리시 문화훈장, 프랑스정부 국가공로훈장을 받았습니다. 우리 정부로부터는 메달 하나 못 받았습니다. 문화사업은 무료 봉사여야 하는데, 프랑스 미술 전시회는 입장료를 받은 영리사업이라는 거예요. 한국 정부와 프랑스 정부의 시각 차이죠. 편협하면 문화는 발전하지 못해요』


세계적인 特種

愼鏞碩 기자는 두 차례에 걸쳐 13년간 파리특파원으로 근무했다. 그때 그는 세계적 특종기사를 썼다. 특종 기사의 내용은 유네스코 「책의 해(The Year of Book)」 특별전시회의 대표 서적으로 세계 최초의 금속활자본인 韓國의 「直指心經(직지심경)」이 선정되었다는 내용이었다.

直指心經은 「直指心體要節(직지심체요절)」의 약칭이다. 「직지심체요절」은 역대 佛祖(불조)들의 法話(법화)를 요약한 내용으로 고려 말기인 1377년 忠州 교외에 있던 興德寺(흥덕사)의 鑄字施(주자시)에서 인쇄한 하권이 프랑스 국립도서관에 보관되고 있다. 이 책은 구텐베르크보다 80년 앞서 금속활자로 인쇄한 세계 最古(최고)의 금속활자 인쇄본이다.

―이 세계적 특종은 어떻게 가능했습니까. 기사 내용은 우리 교과서에도 실렸는데….

『우연이었어요. 특파원은 외국에서 1인 사무실에서 근무하는 것인 만큼 자칫하면 생활리듬이 깨지기 쉽죠. 그래서 저는 매일 오후에 2~3시간씩 파리국립도서관에 가서 책을 읽고 집필도 했습니다. 그러다 보니 자연히 도서관 직원과 친해졌는데, 하루는 한 직원이 한국 책이 「책의 해」의 대표전시 서적으로 출품된다고 귀띔해 주더군요. 귀가 번쩍 띄데요』

―그래서요.

『막상 취재에 들어가려 하니 프랑스인 관계자들은 입을 꽉 다물었어요. 마침 파리국립도서관에 박병선 박사가 직원으로 계셨는데, 책이름과 발간연도를 알려 주셨죠』

―「直指心經」이 어떤 경로로 프랑스로 흘러들어갔다 합디까.

『書誌學(서지학)에 조예가 깊은 모리스트 쿠랑이란 분이 舊한말에 駐韓프랑스공사로 근무하면서 우리나라의 古서적을 많이 모았는데, 「直指心經」도 그중 하나래요. 그분은 귀국 후 한국에서 수집한 古서적의 목록을 만들었어요』


수집벽
駐韓 프랑스대사로부터 프랑스 국가공로훈장을 전달받고 있는 朝鮮日報 논설위원 시절의 신용석 위원장(1989년).

愼鏞碩 위원장의 수집벽은 파리특파원 시절에도 여전했다.

『파리국립도서관에 매일 다니다 보니 古서적을 자주 접하게 되었습니다. 그러다 우연히 100년 전 제물포港의 全景(전경)이 담겨 있는 사진엽서를 발견했습니다.

그래서 파리의 古書店을 뒤져 바로 그 사진엽서를 찾아냈어요. 그것을 구입했을 때는 맨땅에서 다이아몬드를 주운 기분이었어요. 아버지께서 仁川 향토사 자료를 많이 가지고 계셨고, 글도 많이 쓰셨으므로 저도 그 방면에 관심을 갖게 된 거죠』

―얼마나 수집하셨습니까.

『유럽에는 그런 희귀 자료나 사진을 경매하는 회사가 많잖아요. 그런 회사를 통해 구입하는 루트를 터득했어요. 특파원 시절에 인천 관련을 주로 해서 모은 우리나라 사진엽서 600점, 古지도 수십 점을 수집했죠. 그 당시 한국인 가운데 古엽서를 저만큼 모은 사람은 아마 드물 겁니다』

―그걸 공개하셨습니까.

『1987년, 仁川에서 처음 전시회를 연 후 10여 차례 계속하고 있습니다. 향토사학자뿐만 아니라 인천시민에게 큰 기쁨을 주었지요. 仁川 도서관이나 시청에는 없는 자료이거든요』


1973년, 소련 취재
프랑스 최초의 여성 총리 에디트 크레송과 회견하는 신용석 파리특파원(1984년).

―1973년에 한국 기자로서는 제일 먼저 소련에 들어가셨죠. 소련이 우리나라를 적대시하던 시절이었는데, 그것이 어떻게 가능했습니까.

『당시, 핀란드의 헬싱키港에서 여객선을 타고 레닌그라드(지금의 상트페테르부르크)港에 입항해 레닌그라드에서 통과비자를 받으면 3~7일간 모스크바에 다녀올 수 있었죠. 여객선 회사에서 내 이름과 국적을 기재한 승객명단과 함께 통과비자를 신청했더니, 소련당국으로부터 여객선 회사에 OK 회신이 왔습디다』

─그런데요.

『조선일보에는 「1945년 이후 한국 기자로는 최초의 소련 입국」이라는 社告(사고)를 1면 중간 톱으로 실었어요. 그런데 막상 레닌그라드港에 입항하니 북한영사관에서 소련 당국에 거세게 항의했던 것 같았습니다. 소련 국경수비대 정복 차림의 군인들이 여객선에 올라와 「조사할 게 있다」면서 나를 연행하려는 겁니다. 그때 핀란드 선장이 「본선은 레닌그라드港에 정박하고 있지만, 본선 안은 핀란드 영토」라면서 「우리 영토인 본선 안에 있는 누구도 데려갈 수 없다」고 단호하게 거부했어요』

―그러고는 아무 일 없었습니까.

『레닌그라드 주재 北韓 영사로 자처하는 자들이 내가 외국인들과 함께 식사하는 자리까지 찾아와서 「무슨 일로 소련에 왔느냐」고 물어요. 「소련의 사회주의 체제를 보기 위해서 왔다」고 대답했습니다.

그들은 「같은 민족이 하는 사회주의 국가를 먼저 보고 난 후에 로스케(러시아)가 하는 사회주의를 보아야 할 것 아니냐. 북조선은 기자 선생의 입국을 열렬히 환영한다」며 떠들어요. 핀란드 선장은 북한의 납치에 대비해 저를 입항 3일째부터 선장실에서 기거하도록 배려해 주었어요. 저는 선장실에서 「愼鏞碩 특파원이 본 오늘의 소련」을 집필해 본사에 파우치 편으로 송고했습니다』


마크 샤갈, 사르트르와의 會見
파리특파원 시절 세계적인 화가 마크 샤갈을 南佛 「생폴 드 방스」의 화실에서 인터뷰하고 그의 대표작 앞에서 기념촬영했다(1973년).

1980년, 그는 파리특파원 11년 만에 본사로 돌아와 정치부 기자로 배치되었다가 1983년 정치부 차장대우로 승진했다.

『청와대 또는 국회 출입 기자보다 프랑스를 출입처로 삼는 파리특파원으로 다시 나가고 싶었습니다. 1983년, 소망이 이뤄져 駐파리특파원으로 再부임해 2년여간 근무하게 되었죠』

―특파원 시절 프랑스에서 만난 취재대상 중 누가 가장 인상적이었습니까.

『예술가로는 마크 샤갈, 철학가로는 장 폴 사르트르였습니다』

―왜요.

『마크 샤갈은 南佛 생폴에 살았는데, 그의 화실에 두 번 찾아가서 식사를 함께하며 인터뷰했습니다. 인터뷰를 마친 후 「선생님이 잘 그리는 물고기나 양 같은 것을 사인으로 그려 주세요」라고 부탁했습니다. 샤갈은 「이건 돈이야 돈」이라고 농담을 하며 얼른 물고기를 그려 주셨어요』

―사르트르는요.

『사르트르는 파리 지식인들이 모이는 「드 마고」라는 카페에 시몬느 보바르 女史와 자주 들렀는데, 거기서 제가 여러 번 인사도 하고 인터뷰도 했어요. 그때 저의 질문에 대한 답변에서 「지식인이란 자기의 신념을 행동으로 옮겨야지, 신념만 견지해서는 지식인이 아니다」고 하더라구요.

왜 그런 말이 나왔느냐 하면, 당시 르노 자동차회사에서 파업이 잦았는데 사르트르는 그때마다 찾아가 과격한 투쟁을 만류하고 기업의 공공성을 강조하는 연설을 하셨어요. 그래서 제가 「선생님 같으면 신문이나 책을 통해 선생님의 생각을 발표해도 좋을 터인데 굳이 거기까지 가셔서 그럴 필요가 있느냐」고 물었거든요』

1985년 그는 두 번째 파리특파원 생활을 접고 본사로 돌아와 외신부장·사회부장을 지냈다.

그 후 그는 조선일보 부국장대우 서울올림픽취재본부장, 논설위원, 중견언론인의 모임인 관훈클럽 총무를 지냈다.

기자생활 25년 만인 1991년 그는 조선일보사에 사표를 내고 퇴사했다.

―왜 사표를 내셨습니까.

『태어나서 25년간 배우고, 25년간 기자생활을 하고 보니 내 나이 어언 50이 되었습니다. 앞으로 일할 수 있는 기간이 기껏 25년이라고 생각하니 이제는 고향 仁川을 위한 일을 하고 싶어졌습니다』


인생의 大역전승

언론사를 떠난 그는 정치판에 뛰어들어 두 번의 국회의원 선거에서 낙선하고, 仁川시장 선거에서 떨어졌다. 3戰3敗, 모두 차점 낙선이었다. 그는 選出職(선출직)에는 인연이 먼 팔자인지 모른다. 그는 入門 6년 만에 정치판을 떠났다. 상당한 「상처」를 입었을 터인데도 그는 늘 당당했다. 그런 그가 아시안 게임 유치로 大역전승의 주인공이 되었다.

『만약 제가 정치에서 성공했다면 아시안게임 유치위원장을 맡지 못했을 거 아닙니까. 유럽에서는 자기가 태어나 자란 고장을 조금이라도 더 살기 좋은 곳으로 만드는 데 기여한 사람을 높게 평가합디다. 이제 저는 仁川아시안게임의 성공적 준비에 혼신의 힘을 쏟고 싶습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