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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鄭淳台 기자의 역사현장 탐사] 管山城 전투의 현장-沃川·報恩

정순태   |   2007-10-31 | hit 6551

기상청은 지난 9월19일 오후 늦게 남해안에 상륙한 태풍이 북상해 충청 지방에 집중호우가 내릴 것이라 예보했다. 여러 이유로 충북 沃川郡(옥천군) 소재 管山城(관산성)과 報恩郡(보은군) 소재 三年山城(삼년산성) 답사를 미뤄 왔지만, 곧 개시될 추석 연휴의 민족 대이동과 부딪히지 않으려면 답사일정을 더 늦추기는 어려웠다.

관산성이라면 서기 554년 백제-가야-倭(왜) 3개국 연합군이 신라군과 싸워 백제의 聖王(성왕) 이하 佐平(좌평: 官等 제1위) 4명, 장졸 2만9600명이 戰死(전사)한 처참한 古戰場(고전장)이다. 관산성 싸움의 승리에 의해 한반도의 주도권은 新羅(신라)로 넘어갔다.

이후 신라는 낙동강·한강의 양대 강 유역의 막강한 경제력과 한반도 중부의 교통로를 독점했고, 백제로부터 對중국 항로를 탈취해 삼국통일로 나아갈 결정적 기반을 마련했다.

沃川은 충북의 남부지역이다. 충북은 南韓(남한)의 중앙부이며 바다에 면하지 않은 유일한 道이다. 三韓시대에는 馬韓(마한)에 속했고, 삼국시대에는 백제·고구려·신라의 피 터지는 각축장이었다.

관산성의 소재지 옥천분지는 古代에 이미 사통팔방의 전략전술적 요지였다. 지름 약 10km에 달하는 圓形(원형)의 옥천분지 바깥으로 해발 500~600m 규모의 산들이 테두리처럼 빙 둘러싸고 있고, 분지 안에도 해발 150m 내외의 낮은 구릉지가 펼쳐져 방어전에 유리한 지형이다.

현재의 옥천도 교통의 요지이다. 경부선철도와 경부고속도로, 그리고 경부고속철도가 모두 옥천읍을 통과하고, 보은·괴산·상주·영동·금산·무주 방면으로 이어지는 여러 國道(국도)가 달리고 있으며, 현재의 교통중심 大田의 바로 이웃 고을이다. 전북 茂州郡(무주군)에서 발원한 錦江(금강)의 본류는 옥천군내에 들어서면 갑자기 굽이굽이 「갈 지(之)」 자의 걸음을 그리며 대청호를 거쳐 黃海(황해)로 흘러간다.

옥천향토문화연구회장 柳濟求(류제구) 선생과 만나기로 약속을 하고 여행가방을 챙겨 막 출발하려는 참에 갑자기 날씨가 기울어져 비가 내렸지만, 그렇다고 1시간 전의 약속을 일방적으로 연기하자고 할 염치는 없었다.

9월19일 오전 11시45분, 약속시간보다 15분 먼저 옥천IC를 빠져나와 옥천고등학교 앞에다 승용차를 세워 두고 잠시 옥천읍내 들머리의 네거리 주변을 기웃거렸다. 네거리 광고판에는 「제6회 聖王旗(성왕기) 남녀 궁도대회 9.16~ 9.18」이라는 플래카드가 대회 폐막 하루가 지났는데도 아직 떼지 않은 채 나붙어 있었다.

옥천 사람들은 悲運(비운)의 백제 聖王을 1400여 년의 세월을 뛰어넘어 아직도 애틋하게 추모하는 듯했다. 역사의 勝者(승자)보다 敗者(패자)를 기념하는 정서가 오히려 듬직하게 느껴졌다.

낮 12시, 柳濟求 회장과 옥천고등학교 앞 토속음식점 「금강올갱이」에서 처음 만나 함께 점심을 먹었다. 2002년 바이오엑스포 음식경연대회에서 일금 5000원짜리 「올갱이국」으로 동상을 수상했던 음식점이라고 한다.



管山城의 범위
백제 성왕의 아들 위덕왕 때 만들어진 것으로 추정되는 백제금동대향로.

점심식사 후 柳濟求 회장은 필자에게 『鄭기자는 길을 잘 모를 테니 내 차에 타라』고 하면서 자신의 승용차를 몰아 옥천 중심가를 빠져나왔다. 柳회장은 승용차를 옥천읍 양수리 다산금빛 아파트 옆 공터에 세워 놓고 『정상까지는 40분 걸린다』며 74세의 老年답지 않게 성큼성큼 가파른 산길을 오르기 시작했다.

관산성의 핵심부를 이루는 三城山(삼성산)을 밑에서 올려다보니 그렇게 오르기 힘든 산 같지는 않았다. 그러나 높이 300m 안팎의 삼성산은 원체 악산이었다. 뒤처져 허덕이는 필자를 향해 柳회장은 『젊은 사람이 뭘 그렇게 꾸물거리느냐!』고 벼락처럼 호통쳤다.

갑자기 빗발이 얼굴을 후려쳤다. 그것이 각성제가 되어 기분이 한결 상쾌해졌다. 비가 내렸지만, 산길은 질지 않았다. 石灰石(석회석) 지대여서 빗물이 금세 땅속으로 빠져든다고 한다.

柳회장은 뜬금없이 『옥천 올갱이가 왜 유별나게 향긋한지 아느냐』고 묻고는 『그건 옥천이 석회석 지대여서 하천의 올갱이도 석회석을 빨아 먹고 살기 때문』이라고 자문자답했다.

삼성산 동쪽 망대에 닿을 무렵, 비가 뚝 그치고 햇빛이 찬란했다. 망대 위에 올라 발 아래 남쪽을 내려보니 옥천읍내가 한 폭의 수채화처럼 산뜻하게 펼쳐져 있다. 멀리 경부고속도로 금강휴게소 옆으로 새파란 금강의 본류가 보인다. 금강의 물줄기는 지그재그를 그리며 흐른다. 그렇다면 금강은 관산성의 自然垓字(자연해자)인 셈이다. 경부선철도, 경부고속도로, 경부고속철도는 모두 금강 위에 걸린 다리로서 對岸(대안)과 이어져 있다. 옥천분지는 철봉산(449m), 월이산(551m), 도덕봉(407m), 서대산(903m), 壯龍山(장용산·656m), 대성산(704m), 馬城山(마성산·497m) 등으로 빙 둘러싸여 있다.

남쪽 멀리로는 마니산성(이원면 평계리)이 아스라하게 보인다. 북쪽으로는 서산성(옥천읍 서정리)이 손에 닿을 듯이 가깝고, 고리산성(군북면 환평리)과 노고성(군북면 이백리)이 한눈에 들어온다. 柳회장은 『삼국시대 쟁탈의 요지였던 옥천에는 이미 발굴된 古城(고성)만 46개나 된다』고 말했다.

옥천읍의 鎭山(진산)인 삼성산은 몸피만 보면 관산성 決戰의 현장으로서는 좀 협소하다. 백제-가야-왜 연합군의 전사자 수가 2만9600명이라고 史書(사서)에 기록되어 있고, 신라군의 병력은 적게 잡아도 백제군과 對等(대등)했거나, 아니면 그보다 훨씬 많았을 가능성이 높다. 그렇다면 양측이 동원한 병력을 합치면 최소한 6만 명 이상이었을 것이다. 추측컨대 백제군은 신라군을 맞아 옥천분지를 감싸고 있는 여러 山城에 병력을 분산 배치하여 방어전을 전개했던 것으로 보인다.

따라서 관산성은 삼성산성과 그 주위에 이어진 용봉·마성산·장용산 등의 방어시설을 합친 이름으로 판단된다. 관산성의 핵심부였을 삼성산성은 삼국시대의 전형적인 삼태기型(형) 산성이다. 「東國與地勝覽(동국여지승람)」에는 『삼성산은 郡의 서쪽 5리에 위치해 있고 古城의 遺址(유지)가 있다』고 기록되어 있다.


유혈의 古戰場에 세워진 정지용의 詩碑
백제 성왕이 신라 복병에 생포되어 참수당한 狗川. 이곳 주민들은「구진베루」라고 부른다.

삼성산성 꼭대기에는 「정지용 詩碑(시비)」가 나지막하게 세워져 있다. 시비에 새겨진 詩는 「산에서 온 새」이다. 옥천은 鄭芝溶(정지용: 1903~?)의 고향이다.

특히, 정지용의 「鄕愁(향수)」는 옥천의 山河(산하)를 대변해 왔다. 정지용은 6·25 사변 때 행방불명되었다. 柳회장은 정지용의 「鄕愁」를 흥얼거렸다. 필자도 그 감각적 詩語(시어)에 반해 뒤따라 불렀다.

<넓은 벌 동쪽 끝으로/ 옛이야기 지줄대는 실개천이 휘돌아 나가고/ 얼룩배기 황소가/ 해설피 금빛 게으른 울음 우는 곳./ 그곳이 참하 꿈엔들 잊힐리야./ (中略)/傳說바다에 춤추는 밤물결 같은/ 검은 귀밑머리 날리는 어린 누이와/ 아무러치도 않고 여쁠 것도 없는/ 사철 발벗은 안해가/ 따가운 해ㅅ살을 등에 지고 이삭 줏던 곳./ 그곳이 참하 꿈엔들 잊힐리야./…>

관산성 전투는 6세기 한국사 최대의 혈전이었다. 피냄새가 진동했을 古戰場이 後世(후세)에 와서 우리말의 감각적 레토릭을 한 단계 높인 「향수」의 子宮(자궁)이 되었던 사실이 이채롭다.

삼성산성 정상부에는 사시사철 마르지 않는다는 작은 못이 하나 있다. 석회석 지대여서 물 빛깔은 우윳빛이다. 관산성 주둔군의 식수로 사용되었을 것이다. 그 옆에는 날림으로 축조한 예비군 초소가 요즘은 사용되지 않은 탓으로 볼썽사납다. 柳회장은 『이것이 관산성의 경관을 망친다고 당국에 몇 번이나 철거 또는 고쳐 달라고 건의했지만, 들어주지 않는다』고 불평했다.
관산성 정상부에 있는 작은 못.

柳회장은 狗川(구천)을 조망할 수 있다는 지점으로 필자를 안내했다. 성왕은 陣中(진중)에서 갑자기 앓고 있던 아들(백제군 대장 餘昌)을 위문하기 위해 불과 50騎(기)의 호위를 받으며 관산성으로 달려오다가 구천에서 신라의 伏兵(복병)에 걸려 생포된 직후 참수되었다.

軍초소 바로 뒤편에서 北西 방향으로 서면 대전 市界의 동남단인 식장산과 고리산(環山)이 보인다. 식장산과 고리산 아래엔 금산 방면에서 북동진하는 서화천이 흐르고, 서화천을 끼고 37번 국도가 달리는데, 식장산 아래 서화천변 일대가 비극의 현장인 구천이다. 구천을 이곳 사람들은 「구진베루」라고 부른다.

아직 녹음이 짙은데다 지형도 험해 구진베루의 관측에 용이한 지점으로 접근할 수 없었다. 下山한 다음, 다른 길로 구진베루에 접근하기로 작정했다.

관산성의 성벽은 삼성산 정상으로부터 서쪽 背斜面(배사면)으로 100m쯤 내려간 곳에 흔적이 남아 있다. 柳회장은 『옥천 일대 도로·철도 공사를 하면서 이곳 관산성의 성돌을 마구 채취해 가는 바람에 이 꼴이 되었다』며 아쉬워했다.

성돌은 거의 대부분 거무스름한 석회석이다. 간혹 오랜 풍우로 허옇게 바랜 냇돌이 군데군데 나뒹굴고 있다. 이것은 1500년 전 축성 당시, 옥천 주변 하천에서 냇돌을 채취하여 산 위로 운반해 石材(석재)의 일부로 사용했음을 말해 주는 것이다.


삼국통일 때까지 對中 항로 死守
신라의 한강유역진출을 말해 주는 진흥왕 북한산 순수비.

관산성에서 내려와 승용차를 타고 狗川(구진베루)으로 향했다. 경부선 철로가 깔린 옥천철교 밑으로 뚫린 터널을 지나면 대전 가는 4번 국도와 금산 가는 37번 국도가 갈라지는 삼양사거리가 있다. 이 주위에 「진터벌」, 「말무덤」 등의 古戰場임을 말해 주는 地名(지명)이 아직도 남아 있다.

삼양사거리에서 서화천을 낀 37번 국도를 따라 1km쯤 서남진하면 군서면 월전리다. 서화천에 걸린 나지막한 다리가 보이고 그 다리 건너편에 높이 30m쯤 되는 벼랑이 보인다. 이곳이 백제 성왕이 신라의 복병에게 사로잡힌 구진베루라고 전해진다. 성왕의 전사에 의해 백제군은 戰意(전의)를 상실해 관산성 전투에서 참패했고, 이후 신라는 國運 급상승의 轉機(전기)를 잡았다.

원래, 신라는 한반도 동남방에 편재해 있어 당시의 先進지역인 중국과 교섭하려면 내륙으로는 고구려의 도움을 받지 않을 수 없었고, 바다로는 백제의 지원을 받지 않을 수 없었다. 역사상 어떠한 나라도 세계 幹線(간선)교통로(Main Trunk)로부터 제외된 상황에서 국가발전을 이룩한 사례가 없다. 또한 古代국가 역시 물자의 생산과 잉여 생산물의 교역은 발전의 필수조건이었다.

당시 한반도-중국 항로는 고구려가 장악한 北韓 연안-압록강 하구-요동반도-산동반도를 연결하는 老鐵山水路(노철산수로)와 백제가 장악한 경기도 남양만-산동반도를 연결하는 黃海 직통항로(赤山항로)뿐이었다. 한반도 남부와 중국의 절강성 닝포(寧波)가 연결되는 東중국海 斜斷(사단)항로의 개척과 활용은 張保皐(장보고)가 활약하던 9세기 이후의 일이었다.

신라의 입장에서는 국제적 고립에서 벗어나 對중국 교류를 모색하려면 백제의 手中으로부터 황해 직통항로를 탈취해야만 했다. 신라는 진흥왕 14년(553)에 백제로부터 한강하류 유역을 횡탈하면서 백제에 의해 개척된 황해 직통항로의 출발항인 경기도 남양만의 黨項城(당항성)까지 탈취했다. 그 다음해에 전개된 관산성 전투는 황해 직통항로를 둘러싼 복수전과 방어전이기도 했다.


옥천-보은은 3國의 각축장
관산성에서 옥천 일대의 지형을 설명하는 柳濟求 옥천향토문화연구회장.

이제, 한국사의 향방을 결정한 관산성 전투에 이르기까지의 삼국 관계사를 짚어볼 필요가 있다.

백제의 발상지인 서울과 廣州(광주) 일원은 한강의 양대 지류인 남한강과 북한강이 합류하는 지점이며, 한편으로는 강원도 산지와 경기평야의 접촉부이기도 하다. 건국 초 백제 국왕들은 국력 신장과 더불어 남한강 유역을 장악했다. 「삼국사기」에 따르면 서기 64~76년에 벌써 백제는 청주·보은·옥천 일대에서 辰韓系(진한계) 세력과 접전을 벌였다. 이때 辰韓系는 백제의 압력을 피해 2세기 중엽부터 충북지방을 포기하고 자연방벽인 소백산맥 남쪽으로 이주했다.

한편 압록강 상류 산악지대에서 힘을 길러 온 고구려는 南만주 벌판을 장악한 후 313년 대동강 유역의 漢族(한족: 낙랑·대방)을 몰아내고 그 여세로 한강유역의 백제에 압력을 가하기 시작했다.

신라는 경북지방 동남부의 형산강 분지에 사로국이라는 성읍국가에서 기원했다. 사로국은 婆娑王(파사왕: 80~ 112) 때 울산·의창·양산·동래 일대의 小國을 병합하여 영토를 확장했다.

사로국(신라)은 경상도 동남쪽에 치우쳐 있었던 까닭에 영토확장은 북쪽 해안, 계립령 방향, 죽령 방향, 서북 방향, 서남 방향 등 방사형으로 이뤄졌다. 이 가운데 계립령·죽령 방향과 서북 방향은 각각 고구려와 백제의 군사력이 집중된 곳이므로 삼국 간의 충돌은 예정된 일이었다. 신라의 영토확장 방향에 대해 고려大 崔永俊(최영준) 교수는 그의 저서 「영남대로」(고려大 민족문화연구원)에서 다음과 같이 기술했다.

<사로국은 우선 경주에서 가까운 영천(骨火國)을 병합한 후 의흥(岳林國), 의성(召文國), 안동(不斯國)을 점유하고, 죽령 밑 풍기(乙桓國)와 계립령 밑 용궁(園山國)까지 세력을 확장하게 되었다. 서북 방향의 영토확장은 경산(押督國)의 점유에서 시작되어 인근의 청도(伊西國)와 대구(達伐國)를 합병한 후 낙동강 서안의 상주(沙伐國), 개령(甘文國)까지 확대되었다.

특히 상주는 上州停(상주정)이 설치되었던 곳으로서, 영동·황간·보은 등 금강 상류까지 진출한 신라군을 통솔한 軍主가 머문 군사기지로 발전한다. 신라는 470년 보은 땅에 三年山城을 축성하여 금강 상류와 남한강 지류인 달천 상류지역으로 진출할 수 있는 교두보를 확보하였다>

4세기 말부터 5세기 말에 걸친 시기를 개관하면 고구려가 군사 1등국, 백제와 신라는 2~3등국이었다. 396년, 고구려 광개토왕은 친히 수군을 거느리고 백제를 공격하여 58성을 빼앗고 백제 진사왕의 王弟(왕제)를 볼모로 받았다. 400년, 가야-왜 연합군이 신라를 침공하자 광개토왕은 步騎(보기) 5만 명을 보내 신라를 구원했다.

그 무렵, 고구려는 신라의 왕위계승 문제에도 결정적인 영향력을 발휘했다. 예컨대 신라 訥祗王(눌지왕: 재위 417~458)은 實聖王(실성왕)을 제거하고 왕위에 올랐는데, 그것은 고구려의 지원 때문에 가능했다.

427년, 고구려 長壽王(장수왕: 재위 413~491)은 도읍을 압록강 중류 북안의 국내성에서 평양으로 옮겨 南進정책을 구사했다. 장수왕의 남진정책에 위협을 느낀 백제 비유왕은 433년 가을 7월 신라 눌지왕에게 사신을 보내 화친을 청했다. 다음해(434) 봄 2월에도 비유왕은 신라에 사신을 파견해 良馬 2필을 보냈고, 가을 9월에는 다시 흰 매를 보냈다. 이에 신라는 겨울 10월에 좋은 금과 구슬로 답례했다.

475년, 고구려 장수왕이 3만 병력을 거느리고 백제의 왕도 漢城(한성: 서울 송파구 방이동 몽촌토성과 강동구 풍납동 몽촌토성)을 포위했을 때 신라의 慈悲王(자비왕)은 개로왕의 백제를 구원하기 위해 원병 1만 명을 급파했다.

그러나 신라의 구원군이 당도하기 전에 漢城이 함락되고 개로왕은 고구려군의 본진이 위치한 아차산성(서울 광진구 쉐라톤워커힐 뒷산)으로 끌려가 참수당했다. 이로써 493년간 지속된 백제의 漢城시대가 종말을 고했다. 백제는 한강유역의 영토를 포기하고, 錦江 중류의 웅진(공주)으로 천도했다가 다시 사비(부여)로 再천도하여 안정을 되찾아 갔다.

신라로서는 백제가 한강유역을 지배하여 완충 역할을 해주었을 때는 고구려의 막강한 군사력을 겁낼 필요가 없었다. 그러나 고구려가 남진하자 신라는 다급해졌다. 고구려군은 보은-용궁-예천-봉화에 이르는 영남지방 북부까지 점령했던 것이다.

이 시기에 나-제 동맹은 고구려의 남진을 저지하는 기본틀이 되었다. 강한 고구려에 각개격파를 당하지 않기 위해서는 백제와 신라는 동맹하지 않을 수 없었던 것이다. 드디어 소백산맥과 차령산맥을 사이에 두고 3國의 국경이 개이빨처럼 맞물린 상태로 서로 교섭·충돌하기에 이르렀다.


고구려의 內憂外患
고구려의 南進을 말해 주는 中原 고구려비.

고구려는 광개토왕과 장수왕이 재위한 5세기에 전성기를 누렸지만, 6세기에 들어서면서 국력 저하의 조짐을 드러내기 시작했다. 장수왕을 승계한 文咨明王(문자명왕: 재위 492~518) 때에는 신라와 백제와 자주 싸웠으나 번번이 패전했다.

「삼국사기」에 따르면 고구려군은 문자명왕 3년(494) 북진한 신라군과 薩水(살수) 벌판에서 싸워 초전에서는 승리했으나 백제 군사 3000명이 신라군을 지원하자 패퇴했고, 바로 다음 해에는 백제의 雉壤城(치양성)을 공격했지만 신라군이 백제군을 돕는 바람에 패전했다. 같은 왕 5년(496)에는 신라의 牛山城(우산성)을 공격했지만 신라군의 반격으로 패배했다.

문자명왕 11년(502)과 12년(503)에도 고구려는 백제의 침략을 받아 고전했다. 武寧王(무령왕: 재위 501~522)의 백제는 개로왕을 죽인 고구려에 복수전을 감행하는 등 군사강국으로 거듭나고 있었다.

문자명왕 15년(506)과 16년(507) 고구려는 두 차례에 걸쳐 무령왕의 백제를 공격했지만 두 번 다 실패했다. 더욱이 고구려는 심각한 내부 권력투쟁을 겪고 있었다. 安原王(안원왕: 531~544)이 죽고 陽原王(양원왕: 45~558)이 즉위하는 과정에서 발생한 고구려의 왕위쟁탈전에 대해 「日本書紀」 欽明 6년(545)조에서는 다음과 같이 전하고 있다.

<이해에 高(句)麗에 대란이 있어 죽임을 당한 자가 많았다. 「百濟本紀」(백제본기: 백제 멸망 후 왜국에 망명한 백제인의 저술)에 이르기를 「12월 甲午에 고(구)려국에서 細群(세군)과 鹿群(녹군)이 宮門(궁문)에서 싸웠는데, 치열하게 전투했다. 세군이 패하였으나 병사를 사흘 동안 풀지 않고 세군의 자손을 다 잡아 죽였다>

위의 기사는 고구려 귀족들 간의 치열한 권력다툼을 뜻한다. 그렇다면 세군과 녹군이 누구이며, 왜 내전이 벌어졌던 것일까. 다음은 「일본서기」 흠명 7년(546)의 기사이다.

<百濟本紀에 이르기를 『고(구)려가 정월 丙午에 中夫人의 아들을 세워 왕으로 삼았는데, 나이 8세였다. ?王(박왕: 고구려 안원왕)에게는 3명의 부인이 있었는데, 正夫人(정부인)에게는 아들이 없었다. 中夫人이 세자를 낳았는데 그 외조부가 녹군이었고, 小夫人도 아들을 낳았는데 그 외조부가 세군이었다. 박왕이 병에 듦에 이르러 세군과 녹군이 각각 자신의 외손자를 왕으로 세우고자 하였던 고로 세군 측의 죽은 자가 2000여 인이었다』 하였다>

외환도 닥쳐 왔다. 양원왕 7년(551) 7월, 돌궐이 내침하여 新城(신성: 요령성 무순)을 포위하였으나 이기지 못하자 白岩城(백암성)을 공격하였다. 당시만 해도 돌궐은 內陸 아시아에서 패권을 장악하는 것이 제1의 관심사로서 남쪽 농경지대 국가를 자주 侵寇(침구)하기는 했지만 그 목적은 약탈에 있었고, 그 스스로 농경지대의 땅에 이주한다든지, 그 땅에 정복왕조를 세우겠다는 의도는 없었다. 따라서 551년 돌궐의 고구려 침략은 약탈전이었던 것으로 판단된다.

그러나 고구려는 돌궐군을 방어하기 위해 漢江 방면의 주력군을 南만주지역으로 돌려 놓을 수밖에 없었을 것이다. 이때 고구려의 양원왕은 장군 高紇(고흘)을 보내 병사 1만을 거느리고 이들을 물리치고 돌궐병 1000여 명을 殺獲(살획)하였다.


백제의 中興과 신라의 背信
관산성에 흩어져 있는 큰 냇돌. 축성 당시 옥천 주변 하천에서 채취해 산위로 운반 石材로 사용했음을 말해 준다.

웅진시대의 백제는 국왕 6명 중 4명이 피살되는 등 국운의 침체기에 들었지만, 무령왕代에는 중국의 史書에서 「다시 강국이 되다」라고 표현될 만큼 중흥을 이루었다. 무령왕의 뒤를 이은 聖王(성왕)은 538년 왕도를 좁은 웅진(공주)에서 훨씬 넓은 사비(부여)로 옮겨 국가체제를 정비하고 국호를 「南夫餘(남부여)」라고 고치기도 했다.

삼국 중 가장 후진적이었던 신라가 처음으로 공세로 전환했던 것은 眞興王(진흥왕) 때였다. 진흥왕 11년(550), 신라는 고구려와 백제가 일진일퇴의 전투를 벌이던 와중에 고구려 金峴城(금현성: 충북 진천)과 백제의 道薩城(도살성: 충북 청주)을 탈취했다. 다음은 「삼국사기」 진흥왕 11년 조의 관련 기사이다.

<봄 정월, 백제가 고구려의 도살성을 빼앗았다. 3월, 고구려가 백제의 금현성을 점령했다. (진흥)왕은 두 나라 군사가 피로한 틈을 이용하여 이찬 異斯夫(이사부)로 하여금 두 성을 빼앗아 성을 증축하고, 甲士 1000명을 머물게 하여 그곳을 지키게 했다>

이같이 신라는 적국 고구려의 땅뿐만 아니라 동맹국 백제의 땅까지 가로챘다. 그런데도 나-제 동맹은 당분간 유지되었다. 바로 다음해인 551년 신라는 백제와 연합하여 고구려의 10개郡을 탈취했다. 이때 백제의 성왕도 고구려에게 빼앗겼던 한강 하류 6개군을 탈환했다.

그러면 당시 고구려의 내부 상황은 어떠했을까. 다음은 「삼국사기」 居柒夫(거칠부) 傳에 기록된 관련 기사이다.

<진흥왕 12년 辛未에 왕이 거칠부와 仇珍(구진) 대각간, 比台 각찬, 耽知 잡찬, 非西 잡찬, 노부 파진찬, 서력부 파진찬, 비차부 대아찬, 비진부 아찬 등 8將에 명하여 백제와 함께 고구려를 침공하였는데, 백제인이 먼저 평양을 공격하고, 거칠부 등은 승세를 타고 高峴(고현) 이내 10郡을 취하였다.

이때에 이르러 惠亮法師(혜량법사)가 그 門徒(문도)를 거느리고 路上(노상)에 나오니 거칠부가 말에서 내려 軍禮(군례)로서 揖拜(읍배)하고 나아가 말하기를 『옛날 (제가 고구려에서 신분을 숨기고) 유학할 때 법사의 은혜를 입어 性命(성명)을 보전하였는데, 지금 뜻밖에 서로 만나니 어떻게 보은을 해야 할지를 모르겠습니다』 하였다.

(법사가) 대답하기를, 『지금 우리나라의 정사가 어지러워 멸망할 날이 멀지 아니하니, 원컨대 그대의 城에 이르게 해주십시오』 하였다. 이에 거칠부가 수레를 같이 타고 돌아와 왕을 뵈니 왕이 僧統(승통)으로 삼고 처음으로 白座講會(백좌강회)와 八關(팔관)의 法을 說하였다>

고구려가 내부 균열 등 말기 증세를 드러냈던 것이다. 이어 552년에는 北齊(북제)의 文宣帝(문선제)가 요하 서쪽 營州(영주) 국경에 군사를 이끌고 와서, 사신을 파견해 北魏(북위) 말기의 혼란을 피해 고구려로 이주해 왔던 流民(유민) 5000호를 내놓으라고 요구하여 데려가기도 했다. 그 시대의 인구는 농업생산력의 가장 중요한 요소였다.

어떠한 군사강국도 국내 정정이 불안한 가운데 2正面 혹은 3正面 작전은 무리이다. 이때 고구려도 돌궐의 侵寇(침구) 상황에서 나-제 연합군의 협공을 받았던 만큼 이렇다 할 방어전 한번 제대로 전개하지 못한 채 장수왕代 이래 장악해 온 한강유역에 대한 지배권을 상실하고 말았다.


草原의 최강 돌궐
돌궐의 은제사슴상.

관산성 전투가 전개된 6세기 중반, 유라시아 대륙의 최강국은 돌궐이었다. 돌궐국가의 지배 중핵 씨족이었던 「阿史那(아사나)씨」는 6세기 초만 해도 西北 몽골의 알타이 산록을 떠도는 유목민에 불과했지만, 부근에 철광산이 있었고, 鐵工(철공) 솜씨도 뛰어나 세력을 기를 수 있었다. 阿史那씨의 발흥을 뒷받침한 경제적·군사적 원동력은 바로 제철업이었다.

6세기 중반에 이런 아사나씨로부터 萬人長(만인장)을 의미하는 「土門(토멘)」의 칭호를 가진 首長이 등장해 세력을 모으고, 중국의 長城 아래에 와서 絹布(견포)와 생필품을 매입하면서 통상을 원해 北周(북주)의 太祖는 545년 감숙성 거주 소구드 商人을 사절로 삼아 土門에 파견했다.

소구드人은 소위 「비단길」을 통한 동서교역에 일찍부터 활약해 온 무역 전문집단으로서 내륙 아시아 사정에 정통했기 때문에 경제사절로 기용되었던 것이다. 이러한 아사나씨는 중국과의 통상관계를 통해 국제무대에 나서게 되지만, 한편으로는 柔然(유연: 당시 초원의 패권국이었음)의 명령에 따라 준가리아 지방(황하 彎曲部 이북)의 鐵勒部(철륵부)를 토벌해 그 무리를 모두 병합했다.

이런 돌궐의 土門은 柔然의 카간(君主의 칭호) 阿那?(아나카이)에게 공주를 달라고 청혼했지만, 아나카이는 『너는 나의 鍛奴(단노)인데, 감히 그런 요구를 하는가?』라고 면박했다. 이에 土門은 柔然으로부터 독립하여 오히려 西魏(서위)와 화호해 西魏의 長樂公主를 맞아 아내로 삼고, 552년 아나카이를 토벌해 그를 자살시켰다.

이리하여 土門은 스스로 伊利(이리) 카간이라고 칭하고 돌궐왕국을 창건했다. 돌궐은 제3대 木杆(목간) 카간에 이르러 유연을 완전히 멸망시키고, 그 王庭(왕정)을 알타이산맥으로부터 오르혼江 유역의 우츄겐山으로 옮긴 다음 예니세이江 상류의 기르기스族을 병합하고, 靑海지방의 土谷渾(토욕혼)을 복속시켰다.

당시 北중국에서는 北周와 北齊가 대립하고 있었다. 양국은 군사원조를 얻기 위해 경쟁적으로 돌궐의 카간에게 공물을 바쳤는데, ?鉢(타발) 카간은 『중국의 두 아들(北周와 北齊)이 효도를 하는 한 내게는 물자 부족의 걱정이 없다』고 호언했다.

이와 같이 阿史那씨를 중핵 씨족으로 하는 돌궐은 제1代의 伊利 카간 이래 30년도 되지 않은 사이에 급속히 발전, 동쪽은 흥안령산맥, 서쪽은 카스피海에 이르는 초원지대에 흉노를 능가하는 大유목기마민족국가를 건설했지만, 곧 4인 카간이 병립하는 등 국가의 통합은 강고하지 않았다.

돌궐왕국의 분권적·분리적 경향은 그 국가 형성기에 伊利 카간의 子弟가 東西 정벌을 분담해 제각기 자기 정복지를 지배하고, 카간의 號(호)를 자칭해 그 지위가 자손에게 세습되어 봉건영주화했던 것에 기인하지만, 한편 大카간 位의 상속제가 확립해 있지 않았던 사정도 있어서 7세기 초엽 돌궐국가의 급속한 분열·붕괴를 초래한 遠因(원인)이 되었다.


中國대륙은 분열의 시기
몽골 아르항가이 하샤트 코쇼 차이담에서 발굴된 돌궐제국의 퀄 테긴 칸의 頭像.

西晉(서진)이 서기 316년에 멸망하자 西晉의 일족인 司馬睿(사마예)는 317년 양자강 남쪽인 建業(건업: 지금의 南京)에 수도를 정하고 東晋(동진)을 세웠다. 江南정권인 東晋의 성립과 때를 같이하여 北중국에서는 흉노·선비·갈·저·강 5개의 북방 및 서방 이민족이 약 130년간에 걸쳐 16개 왕조를 세우며 부침하는데, 이를 5胡16國이라고 부른다.

5胡, 즉 유목기마민족들은 일찍이 後漢(후한) 말과 중국의 삼국시대에 長城지역 남쪽에 이주해 와 용병이 되었는데, 西晉 왕조의 통제력이 약해진 304년 南흉노의 수장 劉然(유연)이 山西에서 독립하고, 316년 그의 아들 劉총이 서진 왕조를 멸망시킨 후 일제히 中原을 점거해 분할정권을 세웠다. 5호16국 중 ?族(저족)이 세운 前秦(전진)이 한때 北중국을 석권했으나 「헓肥水(비수)의 大戰」에서 東晋에 패함으로써 통일기도가 와해되었다.

이후 선비족인 척발氏가 세운 北魏가 439년 北중국을 통일하고, 강남에서는 劉裕가 동진을 멸망시키고 劉宋을 창업했다. 이로써 중국사상의 南北朝(남북조)시대가 전개된다. 이런 중국의 南北朝와 고구려·백제·왜국은 조공책봉 관계였고, 신라는 중국 왕조와 접촉하지 않고 아직 고립되어 있었다.

北朝는 北중국을 한때 통일한 北魏(386~534)에 이은 東魏(534~550)·西魏(535~556)의 병립시기와 北周(556~581)·北齊(550~577)의 병립시기를 말한다.

한편 南朝는 中原에서 江南으로 쫓겨난 漢族이 세운 5개의 왕조을 말한다. 동진에 이어 명멸한 南朝왕조는 劉宋(420~479), 齊(479~502), 梁(502~ 557), 陳(557~589) 등이다. 중국사에서는 이 5개 南朝 왕조에다 그에 앞선 삼국시대 孫權(손권)의 吳를 합쳐서 六朝라고 부르기도 한다.

이 가운데 100여 년 계속된 것은 東晋뿐이었다. 吳·劉宋·梁은 각각 50여 년, 齊는 22년, 陳은 32년짜리 短命(단명)왕조였다. 이 6개의 南朝 왕조는 모두 현재의 南京인 建業(건업)을 수도로 삼았다. 왕조의 단명으로 짐작할 수 있듯이 어느 왕조도 武威(무위)를 떨치지 못하고 음란·文弱(문약)에 흐르고 있었다.

따라서 관산성 전투가 벌어졌던 554년 전후의 시점에서 중국의 분열 정권으로서는 한반도 中部에서 전개되는 신라·백제·고구려의 패권전에 개입할 여력이 전혀 없었다. 南朝의 漢族(한족) 왕조들은 北朝의 선비족 정권의 침략을 겁냈고, 北朝 왕조들은 신흥 돌궐의 약탈전을 모면하기 위해 조공을 바치면서도 항상 전전긍긍했다.

狩獵(수렵)기마민족 출신인 鮮卑族(선비족)이 세운 북조 왕조들은 중국의 문화에 동화되어 어느덧 기마민족의 씩씩한 기상을 상실했다. 순수한 유목기마민족인 돌궐은 그 후 기마민족 정복국가를 세운 거란족·여진족·몽골족 등과는 달리 농경지대인 중국의 영토를 지배할 의도는 없고 물자의 약탈에 만족할 따름이었다.

554년 관산성 전투에 왜국은 백제를 위해 왜병 1000명을 파견하고 군수물자를 지원했다. 왜국에 있어 554년은 欽明(흠명: 킨메이) 15년에 해당한다. 「일본서기」에서는 欽明을 「제29대 천황」으로 기록하고 있지만, 「日本」이라는 국호와 「天皇」이라는 王號가 정해진 시기는 7세기 말엽인 天武(텐무) 때였다는 것이 일본 학계의 다수설이다. 따라서 관산성 전투 당시에는 「왜국」과 「왕」으로 표기되어야 옳다.

다만, 당시 일본 열도는 통일국가를 이루지 못하고, 여러 지방정권의 首長이 저마다 王을 자칭하고 있었다. 따라서 이 기사에서는 畿內(기나이) 지역의 王을 지방정권의 王들과 구별하기 위해 天王이라고 표기하기로 한다.

「일본서기」에 따르면 금관가야(경남 김해)가 신라에 의해 멸망의 위기에 놓인 서기 527년 6월 게냐(毛野)라는 倭將이 6만의 대군(병력수는 과장된 듯함)을 이끌고 신라를 정벌하려고 했다. 서기 527년은 欽明천왕의 父王인 繼體(계체: 케이이타이)의 재위 21년이었다.

이번 옥천~보은 답사 1개월 전, 필자는 재야학자 朴炳植(박명식) 선생을 댁으로 찾아가 왜국이 관산성 전투에 참전한 배경, 가야·백제와는 친선관계를 유지하면서 유독 신라만을 적대시한 배경 등에 관해 질문했는데, 그때의 문답은 이어지는 별항 기사에서 다루기로 한다.


羅濟의 開戰을 앞둔 眞興王의 對고구려 외교

이제, 고구려 장수왕의 남진정책 이래 120년간 계속되었던 백제-신라 동맹이 깨어지는 과정을 검토해 볼 차례이다.

553년 고구려가 북쪽으로 밀려난 뒤 한강유역은 신라와 백제가 兩分(양분)했다. 이때 백제 聖王은 수세에 몰린 고구려에 결정타를 가할 심산으로 나-제 연합군의 계속 북진을 신라 측에 제의했다. 다음은 그와 관련한 「삼국유사」의 기록이다.

<백제는 신라와 연합하여 고구려 정벌을 원했다. 그러나 신라 진흥왕이 말하기를, 『국가의 존망은 하늘에 달려 있다. 하늘이 고구려를 미워하지 않는다면 우리가 어찌 그것을 바랄 수 있으랴』 하였다>

위와 같은 진흥왕의 발언은 「국가이익을 위해서는 영원한 친구도 없고, 영원한 적도 없다」는 식의 매우 정략적인 것이었다. 쉽게 말하면 나-제 연합군의 북진에 의해 고구려 변경의 실속 없는 땅을 얼마 더 탈취하기보다는 백제가 이미 고구려로부터 탈환한 한강 하류유역이 더욱 탐난다는 뉘앙스를 풍긴다.

진흥왕의 속셈이야 어떠했든, 위기에 몰렸던 고구려로서는 매우 듣기 좋았을 레토릭이었다. 「삼국유사」에는 『고구려 사람들이 진흥왕의 말을 전해 듣고 감동해 (신라와) 화친을 맺었다』고 기록되어 있다. 이것은 신라가 백제의 한강 하류 6개郡을 먹으려면 백제와의 一戰이 불가피하다고 보고, 고구려로부터 신라·백제의 개전시 好意的 중립을 지킨다는 밀약을 미리 얻어냈다는 뜻이다.

이런 국제적 환경 속에서 진흥왕 14년(553) 가을 7월, 신라군은 기습전에 의해 백제로부터 한강 하류 6개郡을 횡탈해 新州(신주)를 설치했다. 新州의 軍主(한강 하류 6개군의 행정장관을 겸한 군관구사령관)에는 金武力(김무력)이 기용되었다.

김무력은 532년 신라에 병합된 금관가야의 마지막 왕 仇衡(구형)의 셋째 아들이며, 130여 년 후 삼국통일의 원훈이 되는 金庾信(김유신)의 조부이다. 망국의 왕자이면서 전략적으로 매우 중요한 新州의 軍主로 임명되었다는 것은 그가 533년 한강 하류 攻取에 큰 전공을 세운 것으로 짐작된다.

간신히 탈환한 왕조의 발상지를 어제의 동맹국에 횡탈당한 백제로서는 깊은 원한을 품을 수밖에 없었다. 그러나 기묘하게도 聖王은 그해 겨울 10월 왕자 餘昌을 대장으로 삼아 고구려의 南境(남경)부터 공략했다. 이때의 백제-고구려戰은 무승부를 기록했다.

聖王이 신라부터 응징하지 않고 고구려를 공격한 이유는 확실치 않다. 아무튼 신라는 백제의 공격을 예상했던 만큼 대비책을 세우고 있었을 것이고, 백제도 경계심을 늦추지 않고 있었던 신라를 당장에 공략하는 것은 무모한 下策(하책)이라고 판단했던 것 같다.

聖王은 녹록지 않은 君主였다. 「삼국사기」 성왕 31년(553) 겨울 10월 조를 보면 백제는 고구려 공격과 거의 동시에 성왕의 딸을 진흥왕의 小妃(소비)로 시집 보내고 있다. 이같은 정략결혼은 비수를 감춘 聖王의 평화공세로 보인다.
경남 고령에 있는 가야시대의 고분군.


緖戰에서는 승리한 백제-가야-왜 연합군
가야의 기마인물형 토기.

관산성 전투는 4개국이 참전한 국제전이었다. 다음은 「삼국사기」 진흥왕 15년(554) 조의 기록이다.

<백제왕 明?(명농=聖王)이 加良(가량=가야)과 함께 와서 관산성을 공격하자 軍主 겸 角干(신라 16관등 중 제1위)인 于德(우덕)과 이찬(관등 제2위) 耽知(탐지) 등이 이들과 싸웠으나 불리했다. 이에 新州의 軍主 金武力(김무력)이 州兵을 이끌고 와서 이들과 교전하였는데, 裨將(비장)인 三年山郡의 高干(신라의 지방관직 10등급 중 제3위) 都刀가 재빨리 공격하여 백제왕을 죽였다. 이때 모든 군사들이 승세를 타고 싸워 크게 승리하였는데, 佐平(관등 제1위) 4인, 士卒 2만9600명을 참살하니 말 한 필도 살아서 돌아가지 못했다>

백제와 연합했던 加良은 지금의 경북 고령 일대에 있었던 大伽倻(대가야=우가야)와 경남 함안 일대에 있던 安羅伽倻(안라가야=아라가야) 등이었다. 대가야와 아라가야와 더불어 가야연맹의 「빅3」 중 하나였던 金官伽倻(금관가야:경남 김해)는 관산성 전투 12년 전인 532년에 이미 신라에 멸망당했다.

관산성 전투에는 왜군도 참전했다. 「일본서기」를 보면 欽明 15년 정월 백제가 일본에 사신을 파견해 원군을 요청했는데, 이때 왜의 조정은 군사 1000명, 馬 100필, 배 40척을 보내기로 결정했다. 백제는 그해 5월에도 왜국에 원군을 요청했고, 그 대가인지 모르지만 백제는 五經博士(오경박사), 易박사, 曆박사, 醫박사, 採藥師(채약사), 樂人(악인) 등을 왜국에 파견했다.

「일본서기」 欽明 15년(554) 조에 따르면 백제 聖王은 가야연맹의 여러 旱岐(한기: 왕)들과 논의한 뒤 有至臣(유지신)이란 이름의 사신을 보내 請兵(청병)했는데, 有至臣은 왜의 원병을 데리고 그해 6월에 귀국했고, 그해 12월에 백제·가야·왜 연합군이 신라를 공격했다. 왜가 파견했던 원군의 수는 확실치 않으나 倭 조정에서 그해 1월에 결정된 파병 규모 그대로라면 1000명 정도로 보인다. 「일본서기」에 기록된 서전의 상황을 요약하면 다음과 같다.

<東方의 物部莫奇武連(물부막기무련)에게 군사를 지휘시켜 函山城(함산성=管山城)을 공격하였는데, 有至臣이 왜국에서 데리고 온 왜병 竹斯(죽사)와 物部莫奇(물부막기)·委沙奇(위사기) 등이 불화살을 쏘며 공격, 12월9일 관산성이 함락하였다>

백제·가야·왜 연합군은 서전에서 승리한 후 전리품의 일부를 왜국에 보내면서 원군의 증파를 급히 요청하고 있다.

<백제 성왕이 따로 국서를 보내 말하기를 『만일 신라만이라면 有至臣이 거느린 군사로도 충분할 것이나, 지금 ?(박: 고구려)과 신라가 同心협력하고 있어서 성공하기 어려울 것입니다. 바라옵건대 속히 竹斯島에 있는 군사를 파견하여 백제와 任那(임나=가야)를 돕는다면 일은 가히 성공할 것입니다』 하고 『(백제가) 따로 군사 1만 명을 보내 任那를 돕고 있습니다. 비단 2필, 양탄자 1개, 도끼 300개 및 포로로 잡은 城民 남자 2명과 여자 5명을 보냅니다』 하였다>


「三國史記」보다 더 리얼한 「日本書紀」의 관산성 전투 기록
가야의 철제 갑주.

관산성 전투를 앞두고 백제 지도부의 견해가 일치하지 못했던 것 같다. 다음은 「일본서기」 관련 기사의 요약이다.

<餘昌이 신라 정벌을 꾀하니 耆老(기로: 나이 많은 大臣)들이 간하기를 『하늘이 아직 함께하지 않으니 화가 미칠까 두렵습니다』 하였다. 이에 여창은 『늙었도다. 어찌 그리 겁이 많은가』 하고는 신라국에 들어가 久陀牟羅(구타모라)에 요새를 쌓았다. 그 아버지 明王은, 여창이 오랫동안 고통스럽게 행군하고 寢食(침식)을 거르는 일이 잦아 이를 걱정하여 스스로 가서 위로하려 했다>

위의 기록을 보면 백제군의 신라 정벌에 성왕의 아들 여창이 주도했음을 알 수 있다. 한편 緖戰(서전)에서 패전한 신라는 全軍을 투입해 결전에 임했다. 다음은 이어지는 「일본서기」의 欽明 15년 조의 기록이다.

<신라가 明王이 친히 온다는 말을 듣고 나라 안의 모든 병력을 동원해 길을 끊고 쳐 격파하였다. 이때 신라가 佐知村(좌지촌)의 飼馬(사마)인 苦都(고도)에 일러 말하기를 『苦都는 천한 종놈이고 明王은 이름 있는 왕이다. 지금 賤奴(천노)로 하여금 名主(명주)를 죽이도록 하는 것은 후세에 전하여 잊혀지지 않기를 바라는 것일 따름이다』 하였다>

苦都의 직책인 「飼馬(사마)」가 정확히 어떤 직책인지는 알 수 없지만, 글자로 풀이하면 말을 사육하는 하위직인 것 같다. 그러나 「삼국사기」에서는 성왕을 생포해 목을 벤 사람이 都刀이고, 그의 계급이 신라의 지방관등 제3위인 高干이라고 기록되어 있다. 都刀는 그의 戰功에 의해 관산성 전투 직후 高干으로 승진한 것으로 보인다.


都堂의 계단 밑에 묻힌 聖王의 머리

<이에 苦都가 明王을 사로잡아 두 번 절하고 말하기를 『청컨대 왕의 머리를 베게 해주십시오』 하니 明王이 대답하기를 『왕의 머리를 노비의 손에 맡기는 것은 합당하지 않다』고 하였다. 苦都가 말하기를 『우리 국법에는 맹세한 것을 어기면 비록 국왕이라도 마땅히 노비의 손에 죽습니다』 하였다. 明王이 하늘을 우러러 크게 탄식하고 말하기를 『과인은 매양 뼈에 사무치는 고통을 참고 살아왔지만, 구차하게 살고 싶지 않다』고 말하고 목을 늘여 베임을 당했다.

苦都는 머리를 베어 죽인 후 구덩이를 파고 묻었다. 一書에 말하기를, 신라는 明王의 머리를 수습하여 두고 예로써 나머지 뼈를 백제에 보냈다. 신라왕이 明王의 머리를 北廳(북청)의 계단 밑에 묻었다. 이 北廳을 都堂(도당)이라고도 한다>

都堂이라면 신라의 君臣이 국정을 논의하는 건물이다. 신라가 聖王의 목을 백제에 돌려 주지 않고 都堂의 계단 아래에 묻었다면 신라의 君臣들이 그 위를 밟고 지나다녔다는 것을 의미한다. 적국의 왕의 목을 쳐서 그 해골을 술잔으로 삼아 군신이 함께 술을 마신 사례는 중국과 일본의 역사에서 더러 보이기는 하지만, 아무튼 성왕의 목을 돌려받지 못한 백제인으로서는 「一書…」 운운의 진상은 알 수 없지만 신라에 대해 깊은 원한을 품을 만했다. 다음은 이어지는 「일본서기」의 기록이다.

<餘昌이 드디어 포위당하여 탈출하고자 하였으나 그럴 수 없었다. 사졸들도 놀라고 당황하여 어찌할 바를 몰랐다. 활 잘 쏘는 筑紫(축자)의 國造(국조)가 나아가 활을 당겨 신라의 騎卒(기졸) 중 가장 용감한 건장한 자를 낙마시켰다. 화살이 안장을 뚫고 갑옷의 목가리개를 관통했다. 계속 화살을 빗발처럼 날려 포위한 군대를 물리쳤다. 이로 말미암아 餘昌 및 諸將(제장)이 사잇길을 따라 도주할 수 있었다. 餘昌은 國造가 활을 쏘아 도주로를 열었던 것을 찬양해 그를 鞍橋君(안교군)이라고 칭송했다>

筑紫(축자: 츠쿠시)는 지금의 규슈, 國造(국조: 쿠니노미얏코)는 지방장관이다. 필마단기로 혈로를 뚫고 도주한 餘昌은 패전의 책임과 참수당한 父王에 대한 애도 때문인지 한사코 승려가 되겠다고 했지만, 群臣(군신)의 권유로 왕위를 계승했는데, 그가 백제 제25대 威德王(위덕왕)이다.

관산성 전투 유적지를 안내한 柳선생은 『옥천에 왔으면 정지용 生家는 당연히 둘러보아야 할 것 아니냐』면서 옥천舊邑(구읍) 쪽으로 차를 몰았다. 정지용의 生家는 「지줄대며 흐르는 실개천」 위에 걸린 돌다리 건너편에 복원된 초가집이다. 生家 옆 「정지용 문학관」은 시인의 삶과 문학을 이해할 수 있도록 꾸며져 있다.

정지용 生家 바로 이웃 마을에는 역대 대통령 부인 중에서 인기가 가장 높았던 陸英修(육영수) 여사가 나고 자란 生家가 있다. 육영수의 부친 종관이 1920년 閔정승에게 매입했다는 99칸짜리 저택인데, 마침 수리공사 중이었다.

옥천구읍에서 柳선생과 작별한 필자는 三年山城의 소재지 報恩(보은)을 향해 37번 국도를 北上했다. 도로변으로 대청호의 경관이 펼쳐진다. 30km쯤 달려 보은읍 중심가를 지나 報靑川邊(보청천변) 온천여관에서 하룻밤을 묵었다.


삼국통일로 가는 전초기지
삼년산성의 성벽.

다음날 아침 일찍, 삼년산성 답사에 나섰다. 報靑川 위에 걸린 다리를 지나면 길 왼쪽으로 KBS 보은중계소, 오른쪽으로는 보은군청이 위치해 있다. 여기서 右前方(우전방)을 바라보면 산 위에 축조된 三年山城이 보인다. 성벽이 아침햇빛을 받아 번쩍번쩍거렸다.

번쩍거리는 성벽을 향해 가파른 오정산 중턱까지 올라가 길가에 승용차를 정차시켜 두고 100여m 걸어서 西門을 통해 삼년산성에 입성했다. 「삼국사기」에 따르면 삼년산성은 신라 자비왕 13년(470)에 처음 쌓았다. 신라는 사벌(지금의 尙州)을 점령한 뒤 이때 비로소 소백산맥 북쪽으로 진출했다.

삼년산성은 원래 漢城에 도읍한 백제에 대비해 축조되었으나 475년 漢城을 고구려에 탈취당한 백제가 웅진(공주)으로 천도하고, 고구려군이 남하하자 신라는 소지왕 8년(486)에 이찬 실죽을 장군으로 삼아 一善(일선: 지금의 구미시 선산읍 일대)의 장정 3000명을 징발하여 삼년산성을 개축했다. 이후 삼년산성은 서쪽 백제의 東進(동진)과 북쪽 고구려의 남진을 막고 삼국통일로 나아가는 전초기지가 되었다.

554년 백제 성왕이 가야·왜와 연합하여 관산성을 공격한 것은 신라의 낙동강 유역과 한강 유역을 중간에서 차단해 한강 하류유역과 황해 직통항로를 탈환하려는 전략이었던 것 같다. 이때 신라 (新州)의 軍主 金武力이 경기도 廣州에서 출발해 삼년산성에서 재정비를 마친 후 32km 남쪽의 관산성으로 달려가 백제군에 완승한 사실은 앞에서 거론했다.

삼년산성이 위치한 오정산은 표고 250m 정도이지만, 산세가 매우 가파르다. 벼랑 위에 축조된 삼년산성의 성벽 위로 올라갔다. 성벽 높이는 최고 13m. 발아래로 청주-옥천-보은-상주로 이어지는 30번 고속도로(공사 중), 상주로 연결되는 25번 국도, 속리산 법주사 앞을 지나 괴산에 이르는 37번 국도, 영동에 이르는 19번 국도 등이 보인다. 철도는 지나가지 않지만, 내륙 교통의 요지이다.

城은 남동-북동-북서의 봉우리를 이은 능선을 따라 병풍처럼 이어지고, 안쪽은 골짜기를 이룬 포곡식 산성이다. 「삼국사기」에 따르면 성을 쌓는 데 3년이 걸려 삼년산성이라 했다고 한다. 이로써 신라는 금강 상류와 남한강 지류인 達川(달천: 달래강) 상류지역으로 진출하기 위한 교두보를 확보했다.

삼년산성은 신라의 한강유역 진출뿐만 아니라 7세기 중엽 통일전쟁 중에도 중요한 군사기지의 역할을 했다. 554년 관산성 전투 때 聖王을 생포해 목을 벤 金武力 휘하의 비장 都刀는 삼년산성의 裨將(비장)이었다.

삼년산성은 백제의 수도 사비(부여)의 동쪽 80km에 위치해 있으며, 신라의 북방 군사거점 도시인 上州停(상주정: 지금의 상주)까지는 직선거리로 52km 거리이다. 삼년산성을 관장한 상주는 계립령과도 근거리에 위치하므로 嶺北(영북: 소백산맥 북쪽)의 國原城(국원성: 충주)에 대응하는 전략요지로 발달하게 되었다.

성벽 위에서 내려와 삼년산성 문화재관리인 李哲來(이철래)씨를 만나 「삼년산성의 성벽이 왜 이렇게 번쩍거리느냐」고 물었더니, 『15여 년 전, 삼년산성을 보수할 때 자체의 돌이 부족해 시공자가 어딘지는 확실치 않지만 外地의 화강석을 운반해 와서 서쪽 성벽 일부를 쌓았던 탓인데, 번쩍번쩍거린다고 지적하니까 창피해 죽겠다』고 대답했다. 삼년산성의 성돌은 거무스름한 점판암이다. 이런 실수 때문에 1500여 년의 역사를 명확하게 지닌 삼년산성이 유네스코의 세계문화유산 지정에서 탈락했다고 한다.

삼년산성의 西門址(서문지)에서는 1980년 7월 폭우로 수로가 무너지면서 西門의 문지방돌이 발견되었다. 長大石인 이 문지방돌에는 수레바퀴와 마찰한 흔적이 역력한 홈이 양쪽 가장자리에 파여 있다. 홈과 홈 사이의 너비는 1.66m. 이것은 바퀴의 축거리가 1.66m나 되는 큰 수레가 삼년산성을 출입했음을 의미한다.

西門 바로 안쪽에는 수초가 무성한 연못 하나가 있다. 옛 기록에는 삼년산성 안에 우물 다섯 군데, 연못 한 군데가 있다고 했는데, 이곳이 바로 그 한 군데의 연못이라고 한다. 연못 건너편 암벽에는 「蛾眉池(아미지)」라는 로맨틱한 글씨가 새겨져 있다. 「蛾眉」는 글자 풀이 그대로는 「누에나방이의 눈썹」이지만, 「젊은 美人」을 뜻한다. 신라의 명필 金生의 글씨라고 전해 온다.


『日本고대사는 韓國史다』
1980년 폭우로 수로가 붕괴되면서 발견된 삼년산성 西門의 구조물과 문지방돌. 문지방돌에는 수레가 지나다닐 수 있도록 홈을 팠다.

삼년산성 답사 후 필자는 말티고개를 굽이굽이 넘어 법주사 寺下村의 음식점에서 비빔밥 한 그릇을 시켜 먹고, 되돌아 나와 옥천군의 靑山面 소재 「동학혁명의 유적지」인 문바위와 문암저수지를 돌아본 뒤 경부고속도로 永東IC를 통과해 上京했다. 문바위 일대는 東學 제2대 교주 崔時亨(최시형)을 비롯한 지도부가, 관헌에게 체포되어 처형당한 敎祖(교조) 최재우의 억울함을 풀어 달라는 운동을 모의하던 산골이다.

관산성 전투의 상황은 우리 正史인 「三國史記」보다 「日本書紀」에서 훨씬 리얼하게 기록되어 있다. 도대체 일본사람은 남의 나라 역사에 이렇게 관심이 많았을까? 美國의 동양사학사 존 코벨(1910~1996) 박사는 그가 저술한 「부여기마민족과 倭」(김유경 편역)에서 『日本고대사를 배우려고 일본에 가서 공부했더니, 그것이 바로 한국고대사인 것을 깨닫고 한국에 다시 유학할 수밖에 없었다』라고 밝히고 있다.

관산성 전투는 신라-백제의 국운을 판가름한 분수령이었다. 여기서 승세를 탄 신라군은 西進하여 금산, 무주, 그리고 전주 동부지역까지 攻取하여 完山州(완산주)를 설치했다. 진흥왕 23년(562)에 이르러서는 대가야를 멸망시키고, 가야연맹의 全영토를 병합했다. 진흥왕은 함경도 이원까지 북진하여 그곳에 순수비를 세웠다.

신라는 낙동강 서쪽지역(지금의 경상남도)의 비옥한 토지를 판도에 넣어 경제력이 급상승했을 뿐만 아니라 당시의 선진지역 중국대륙과 직결되는 항해항로의 요충지 黨項城(당항성: 경기도 화성군 남양)을 장악했다.

물론 그로 인해 신라가 치러야 했던 대가는 혹독했다. 그 이후 100여 년간 신라는 고구려와 백제에게 협공을 받아 일방적인 수세에 몰리면서도 漢江유역, 특히 黨項城을 단 한 번도 빼앗기지 않았다.

소백산맥과 낙동강이란 자연 방패 안쪽에 잔뜩 움츠려 있던 신라가 삼국통일을 성취할 수 있었던 도약대는 三年山城 건설과 管山城 전투의 승리였다.

이후 100여 년간 고구려·백제·왜국에 의해 3面 포위된 신라는 7세기 중엽 羅-唐(나-당) 연합으로 活路(활로)를 찾아 삼국통일을 이룩하게 되지만, 그것은 외교적 줄타기만으로 가능한 것이 결코 아니었다. 통일전쟁기의 신라 사람은 한번 공격을 당하면 반드시 보복했던 대담한 戰士집단이었고, 국가적 위기에 오히려 국민적 단결을 이룬 强小國의 모범이었다.●



[在野학자 朴炳植 선생 인터뷰] 韓日역사논쟁의 뿌리

『天皇氏는 伽耶金씨, 欽明천왕의 生母는 백제 무령왕의 高孫女』

欽明천왕은 太子에게 『新羅를 쳐라. 그러면 죽어도 餘恨이 없다』고 유언했다.
先祖의 나라 伽耶와 百濟를 멸망시킨 新羅는 天王家의 철천지 원수였다.



[편집자 注] 在野학자 朴炳植(박병식) 선생은 古代 韓日관계에 관한 日本語 저서 30여 권을 저술·발표하고 자주 日本 대학에 초빙되어 강연해 온 석학이다. 올해 79세의 그는 세계 10개국어를 구사하는 언어학자로서 「야모토 言葉(말) 語源辭典」 등을 저술했다. 필자는 지난 8월 두 차례에 걸쳐 朴선생의 一山자택을 방문해 관산성 전투 前後의 韓日관계사에 대해 인터뷰했다. 다음은 그때 문답의 일부이다.

이와이(磐井)의 반란
필자와 인터뷰하는 朴炳植 선생.

―「일본서기」 繼?(계체) 21년(527) 조에 따르면 멸망 위기에 처한 금관가야를 구원하기 위해 왜국은 毛野(게냐)라는 장수에게 6만의 대군을 주어 신라를 공격하려 했습니다. 그때 게냐의 원정군의 출정을 막아선 인물이 규슈의 호족인 이와이(磐井)였습니다. 「日本書紀」에 따르면 『이와이는 「신라로부터 뇌물을 받고 게냐의 대군이 진격하지 못하도록 했다」고 기록되어 있는데, 이와이는 누구입니까.

『이와이는 서라벌의 모체 중 하나였던 彌凍國(미동국), 즉 경남 密陽(밀양) 지방 출신입니다. 일찍이 규슈로 건너가 末羅(마쓰라: 현재 규슈의 松浦반도 일대)國을 중심으로 北규슈를 지배하고 있던 이와이는 게냐의 대군을 맞아 2년 동안 혈전 끝에 패전·전사했습니다. 그러나 이와이가 저항한 2년이란 기간을 이용해 신라는 金官伽倻(금관가야)를 쉽게 병합할 수 있었죠』

「日本 古代史에서 최대 규모의 반란」으로 기록되고 있는 「이와이의 亂(난)」은 『신라의 왕좌를 탈환하려 했던 訖解王(흘해왕) 후예의 마지막 몸부림과 이를 저지하려 했던 신라 출신 규슈 호족의 충돌이라는 것』이 朴柄植 선생의 견해이다. 그렇다면 흘해왕은 누구인가.

「삼국사기」에 따르면 신라 제16대 왕인 訖解王(흘해왕: 재위 310~356)은 昔(석)씨이다. 흘해왕은 재위 47년에 죽었는데, 그에게 아들이 없었므로 金奈勿(김내물)이 왕위를 계승했다고 한다.

―현존하는 昔씨의 족보를 보면 그에게 외아들 甫(보)가 있었고, 恬(염)과 性(성)이라는 두 손자가 있었던 것으로 되어 있습니다. 그런데도 47년간 재위한 흘해왕에게 후손이 없어 金내물이 즉위했다는 「삼국사기」의 기록을 그대로 믿을 수 있습니까.

『가령 흘해왕이 20세 前後에 즉위해 47년간 재위했다면 사망 당시 나이는 67세쯤 되었을 겁니다. 따라서 흘해왕의 아들과 손자가 있었다는 昔씨 족보의 기재내용이 오히려 타당할 것 같습니다.

그렇다면 흘해왕의 뒤를 이어 왕위에 올랐어야 할 사람은 그 아들 甫이고, 甫가 만의 하나 아들 둘을 낳고 요절했다 하더라도 이미 成人이 된 두 손자 중 1인이 왕위 계승자가 될 수 있었습니다』

―동서고금을 막론하고 왕권교체의 이면에는, 심지어 혈육 사이에도 얽히고 설킨 모략과 유혈이 낭자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신라에서만은 朴·昔·金이라는 세 異姓(이성)이 별다른 분쟁이나 유혈 없이 왕권을 주고 받았다고 기록되어 있지 않습니까.

『신라의 세 王姓 교체가 「삼국사기」의 기록처럼 평화롭게 진행되지 않았음을 짐작케 하는 것은 그들 간의 姻戚(인척)관계의 변천입니다. 「삼국사기」를 보면 金내물이 왕위에 오르기 전에는 세 王姓 간에는 서로 얽히는 인척관계를 유지했는데, 金내물왕 이후 昔씨 왕비를 맞이한 적이 한 번도 없습니다. 이것은 金씨와 昔씨 사이에 일어난 왕권교체가 결코 원만한 것이 아니었음을 뜻하는 것입니다. 昔씨의 경우와는 달리 朴씨는 金내물왕 이후 金씨王의 왕비를 배출하는 집안으로 대접받았어요』


흘해왕 後孫의 복수전

―왕권을 뻬앗긴 흘해왕의 자손은 어떻게 되었다고 보십니까.

『昔씨들은 대거 일본 땅으로 망명했을 겁니다. 이러한 추리는, 「古事記」와 「日本書紀」(이하 「記紀」로 표기함)에 「바다를 넘어 (일본으로) 돌아왔다」고 적혀 있는 스쿠나히코가 흘해왕의 아들 甫와 손자 恬·性 중 누군가를 가리키는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일본의 사서에는 「스쿠나히코」라는 인물에 대해 어떻게 기술하고 있습니까.

『記紀의 기술을 요약하면, 오쿠니누시(이즈모國의 王)가 해안에서 점심을 먹고 있는데, 어떤 사람이 바다 저쪽에서 배를 타고 왔대요. 노인에게 물어보니 「그 사람은 이즈모國(지금의 시마네縣)의 자손으로 오랫동안 어디엔가 갔다가 이제야 돌아온 것입니다. 나라를 다스리려면 저 사람의 협력을 얻는 것이 좋습니다」 했습니다.

이후 오쿠니누시는 스쿠나히코의 도움을 얻어 나라를 잘 다스렸습니다. 그러나 스쿠나히코는 얼마 후 「곰의 땅」(九州)으로 떠나 버리자 오쿠니누시는 「이제부터 어떻게 혼자 나라를 다스릴 수 있는가!」하며 몹시 걱정했다고 합니다』

―스쿠나히코가 흘해왕의 후손, 즉 昔씨라는 근거는 무엇입니까.

『스쿠나히코는 석탈해(昔脫解)의 일본어의 음독입니다. 받침이 없는 일본어로는 「석(昔)」을 「스쿠」라고 읽을 수밖에 없습니다. 박(朴)을 바쿠, 김(金)을 기무라고 하지 않습니까. 우리말 「달(탈)」은 「음달=陰地」, 「양달=陽地」에서 보듯 땅(地)를 뜻합니다. 일본말 「나」도 「那=地」를 뜻합니다. 우리말 「해」는 太陽 또는 남자를 뜻합니다. 일본말 「히코」도 남자를 뜻하기 때문에 「彦=뛰어난 사나이」라는 한자로 표기됩니다. 따라서 석탈해와 스쿠나히코는 모두 「昔씨 나라의 뛰어난 남자」라는 뜻을 나타내는 것임을 알 수 있습니다. 따라서 석탈해는 신라 제3代 왕의 이름인 동시에 그 후손인 昔氏族(석씨족)의 美稱(미칭)인 것입니다』

―倭가 대대적으로 신라를 공격하기 시작한 것은 金내물왕 9년(364)부터죠.

『金내물왕이 즉위년인 356년 무렵에 이즈모로 건너간 스쿠나히코가 몇 해 동안 이즈모국의 首長 오쿠니누시를 돕다가 규슈로 건너갔다는데, 그때부터 왜의 신라에 대한 공격이 격화되어 갔던 것입니다』

「일본서기」 仲哀(중애: 주아이) 8년(362) 8월 조에 따르면 靈媒者(영매자)인 다케우치 스쿠네(武內宿彌)는 神託(신탁)을 빙자하여 곰(熊) 신앙족이 사는 熊襲(웅습: 九州)을 공략하려는 천왕에게 「금은보화가 가득한 신라」부터 공격해야 한다고 꼬드겼다.

―「古事記」에 따르면 원정군의 총지휘관 게냐는 다케우치 스쿠네(武內宿彌)의 자손이라고 명기되어 있습니다. 다케우치 스쿠네가 누구입니까.

『흘해왕의 후손으로 일본땅에 망명한 스쿠나히코가 바로 다케우치 스쿠네입니다』

―선생님께서 다케우치 스쿠네와 흘해왕의 후손으로 이즈모國으로 망명했다가 다시 「곰의 땅」(九州)으로 갔던 스쿠나히코를 同一인물로 보시는 근거는 무엇입니까.

『다케우치 스쿠네는 이즈모(出雲國)의 「다케우치=高家=貴人」을 뜻합니다. 다케우치는 「다카=高」+「우치=內·家」=고귀한 집안, 스쿠네는 「스쿠=淸地+네」, 즉 이즈모(出雲=淸地) 사람을 가리킵니다. 따라서 다케우치 스쿠네라는 이름은 바로 스쿠나히코의 별칭임을 알 수 있습니다』

―그러니까 4세기 말 이후 왜의 거듭되는 신라 침략은 흘해왕의 후손이 新羅金씨에 대한 복수전이었군요.

『흘해왕의 후손 다케우치 스쿠네는 후일 일본의 天皇家가 되는 首露王(수로왕)의 5, 6대 후손이 곰 신앙족의 우두머리가 되어 畿內(기나이)를 공략할 야심이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다케우치 스쿠네는 당시 九州 남부에 웅거하던 首露王(수로왕)의 후예를 찾아가서 모종의 밀약을 했을 가능성이 높습니다』


『일본의 天皇氏는 원래 金海金씨』

―그렇다면 天皇氏가 원래 金海 金氏라는 말씀입니까.

『日帝가 한반도를 강점하고 있던 시기인 1915년 6월29일, 조선총독부는 「치안상」 金海金씨의 족보 간행을 금지한다고 포고한 바 있습니다. 그 이유는 다음과 같은 기록 때문이었던 것으로 보입니다.

<首露王에게는 아들 10명이 있었는데, 그중 7인이 구름을 타고 하늘로 올라갔다>

일제가 이런 내용이 알려지기는 것을 막은 까닭은 記紀에 기록된 그들의 건국신화에 다음과 같은 대목이 있기 때문입니다.

<천황의 선조는 구름을 타고 와서 다카치호다케(高千穗岳)의 쿠지후루(久士布流)에 내려왔다>

이 신화는 金海에서 출발한 首露王의 일곱 아들이 다카치호다케에 도착했다는 것으로 해석됩니다. 이런 사실을 입증해 주듯 다카치호다케 기슭에는 나나구마노사토(七熊の里), 즉 「일곱 곰의 마을」이라는 지명이 아직 남아 있습니다. 이는 곰 신앙족 일곱 사람이 살던 곳이라는 뜻이죠』

일본 東京大 교수 江上波夫(에가미 나미오: 故人)는 그의 저서 「騎馬民族國家(기마민족국가)」에서 『記紀의 傳說과 「駕洛國記(가락국기)」에 전하는 6가야의 건국전설이 중요한 점에서 모두 일치한다』고 말하면서 다음과 같이 설명했다.

<특히, (1)국토를 지배하라는 天神의 명령(神勅)을 받고 天降한 것, (2)眞床覆衾(이불: 記紀)·紅幅(밧줄:駕洛國記) 등, 요컨대 布帛(포백)에 싸여서 낙하했다는 것, (3)…… 久士布流(쿠지후루: 記紀)·龜旨(구지:駕洛國記) 등 거의 同一 지명으로 인정되는 곳에 降下했다는 것 등 양자의 일치는 도저히 우연이라고는 믿어지지 않는다>

에가미 교수는 記紀가 전하는 天孫降臨(천손강림)의 건국설화는 南韓, 특히 6가야 방면으로부터 가져온 것으로 보았다. 그 이유에 대해 그는 다음과 같이 설명했다.

<그것은 쿠지후루의 「후루」가 漢語에서의 村의 뜻이어서 쿠지후루는 「龜旨의 村」에 다름 아니라는 것, 또 記紀의 一書에서는 쿠지후루가 添(소호리)로 되어 있고, 이 소호리는 백제의 수도 所夫里(소부리)·신라의 수도 蘇伐(徐伐: 서호루)·현재의 서울처럼 王都를 의미하는 韓語여서 모두 일본어로서는 그 의미를 알기 어렵지만 韓語에서는 용이하게 또 합리적으로 이해 가능하다는 것으로부터도 방증된다>


訖解王의 후손 昔씨와 伽耶金씨 후예의 밀약

다시 朴炳植 선생과의 문답이다.

―首露王이 철저한 태양 숭배주의 왕국인 印度(인도) 아유타國의 공주와 결혼했다는 기록으로 미루어 보면 수로왕 역시 태양 신앙족일 터인데, 그 아들 일곱은 왜 곰 신앙족이 되었다고 보십니까.

『원래 우리 겨레는 「해님의 자손」이라는 믿음을 가지고 있었죠. 그러나 농경, 특히 쌀농사를 중요시한 이래 급격한 속도로 곰 신앙을 갖게 됩니다. 태양 신앙족이 흰색을 신성하게 여기는 것과 정반대로 검은색을 신성시하는 곰 신앙은 농사에 종사하는 백성들의 지지를 받게 되는 겁니다.

검은 구름이 해를 가려 주고, 비를 오게 해야만 농작물이 잘 자라서 풍성한 수확을 얻을 수 있거든요. 햇빛이 내려쪼이는 날이 너무 계속되면 한발로 흉년이 들어 많이 사람이 굶어 죽는 참상을 여러 번 겪었던 만큼 비를 뿌려주는 먹구름을 상징하는 검은빛에서 연유된 곰 신앙이 싹트기 시작했던 겁니다』

―朴선생님은, 흘해왕의 후손인 다케우치 스쿠네가 당시 규슈 남부의 首長이었던 수로왕의 후손과 만나 모종의 밀약을 했다고 추측하셨는데, 밀약의 내용은 무엇이라고 생각하십니까.

『다케우치 스쿠네는 자신이 신라의 昔씨系 왕손이라는 신분을 밝히고, 「나는 신라의 왕좌를 되찾기를 원하고, 당신은 야마토(大和)의 大王이 되려고 하니 힘을 합치자」고 했을 겁니다. 「일본서기」에는 仲哀 천왕이 신탁을 의심해 신라 정벌을 하지 않았기 때문에 神罰(신벌)을 받아 병몰했다고 기록되어 있는데, 이는 다케우치 스쿠네 등에 의한 암살로 봅니다』

―그러면 당시 야마토, 즉 일본의 畿內(기나이) 지방의 지배자는 누구였습니까.

『당시 畿內(기나이)엔 제1기 야마토(大和) 정권인 우가야(上伽倻=大伽倻) 왕조가 성립되어 있었어요. 우가야는 원래 가야족의 宗家(종가)입니다. 그들은 지금의 경북 고령을 떠나 일본열도로 건너가 자기들이 처음 정착한 곳을 「나라(奈良)」라고 불렀습니다. <라=태양의 자손>들이 사는 <라=땅>, 즉 <라라=태양족의 땅>이란 뜻입니다. 이 「라라」는 첫 ㄹ을 ㄴ으로 발음하는 우랄알타이語族의 특성(두음법칙) 때문에 「나라」로 소리바꿈 되었습니다. 오늘날 나라縣이라고 불리는 지방이 바로 그것입니다』

한편 일본 학계에서도, 패전 직후 에가미 나미오(江上波夫) 교수가 기마민족 일본열도 정복설을 제기한 이래 應神(오진) 천왕이 筑紫(츠쿠시=九州)로부터 東征(동정)하여 「나라」 인근 河內(가와치: 지금의 오사카)에 상륙해 근거지를 설치한 다음 제2기 야마토 王國을 세웠다는 說이 유력시되어 왔다.


欽明천왕의 유언, 『新羅를 쳐라, 그러면 죽어도 恨이 없다』

『554년 관산성 전투 당시의 천왕 欽明(킨메이: 재위 539~571)는 신라가 그들의 고향인 금관가야를 멸망시켰기(532) 때문에 왜군을 파병해 백제·가야·연합군을 지원했던 것입니다』

欽明은 재위 33년인 571년 4월 63세로 병사했는데, 태자(敏達천왕으로 후계함)에게 다음과 같은 유언을 남겼다고 「일본서기」에 기록되어 있다.

<그대는 신라를 쳐서 任那(임나=가야)를 다시 세워라. 그리하여 옛날처럼 두 나라(왜국과 가야)가 서로 친하게 지내면 (나는) 죽어도 한이 없다>

『현재의 일본 天皇家(천황가)는 欽明-敏達(비다츠) 천왕의 직계 자손입니다. 더욱이 欽明천왕의 生母(생모)가 백제 武寧王의 고손녀인 高野新笠(고야신립)임은 현재의 平成(헤이세이) 천황이 스스로 밝힌 바 있습니다』

欽明천왕으로서는 父系의 본국인 가야, 母系의 조국인 백제를 모두 멸망시킨 신라는 철천지원수였다. 왜국은 이런 反신라의 감정 때문에 백제 멸망 직후에도 백제부흥군을 지원하기 위해 前後 세 차례에 걸쳐 3만2000명의 원정군을 투입하지만, 663년 白村江 전투(663)에서 참패했다.

『8세기 초에 記紀를 저술한 安萬侶(안만려) 등은 백제 출신의 망명인이었습니다. 그들은 韓日 관계사를 왜곡 기술하여 천황의 뜻에 영합했죠. 이것이 바로 오늘날 韓日 양국 사이에 역사논쟁이 벌어지게 되는 遠因(원인)이 되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