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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물연구] 인생 大逆轉의 주인공 成完鍾 대아그룹 회장

정순태   |   2007-03-02 | hit 7360

14세 소년은 고향 瑞山(서산)을 뒤로 하고 온종일 100리 길을 걸어 洪城(홍성)에서 서울行 밤기차를 탔다. 손에 쥔 것은 단돈 100원, 그리고 영등포驛(역) 부근에서 남의 집 식모살이를 하던 어머니의 주소가 적힌 편지봉투뿐이었다. 이런 소년이 42년 후인 지금은 연간 매출 2조원이 웃도는 대아그룹의 成完鍾(성완종·56) 회장이 되어 있다.

인생의 逆轉(역전)은 동일선 상에서 출발하는 마라톤의 월계관보다 훨씬 감동적이다. 인생의 스타트라인이 가장 열악했던 成회장의 성공 스토리가 궁금해 대아그룹 비서실에 인터뷰의 주선을 요청했다.

成회장은 요즘 좀 바쁘다고 했다. 成회장의 일정 중에서 「1월25일 오전의 홍성장학행사 참석, 오후의 唐津(당진)장학행사 참석」이 눈길을 끌었다. 成회장에겐 문자 그대로의 錦衣還鄕(금의환향)이다.

「비단 옷을 입은 남자의 귀향」은 어떤 것인지 한번 엿보고 싶었다. 成회장은 39세 때 서산장학재단을 설립해 현재까지 17년간 207억7000만원의 장학기금을 출연해 1만1000명에게 장학금을 지급해 왔다.

지난 1월25일 아침, 필자는 成회장에게 알리지 않고 홍성 행사장에 가기 위해 서해안고속도로를 탔다. 서해대교를 건너 당진을 지날 때까지는 승용차들로 고속도로가 제법 붐볐다. 서울에서 당진까지 1시간 거리, 이제는 수도권에서 출퇴근하는 직장인이 많다. 서해안고속도로 개통 이후의 새로운 모습이다.

당진을 지나면 곧 서산, 고속도로변으로 海美邑城(해미읍성)이 보인다. 왜구의 침범을 막기 위해 세종 2년(1420)에 완공된 平地石城(평지석성)으로, 조선시대 邑城의 전형적인 모습이다. 이곳에서 충무공 이순신은 선조 12년(1579) 兵使營(병사영)의 군관으로 근무했으며, 대원군 집권 때는 천주교도 1000여 명이 처형당했다.

海美는 成完鍾 회장의 출생지(서산군 해미면 紅泉里)이자 그의 첫 사업인 성실화물 해미영업소의 소재지다. 사업의 내용은 내포지방의 농산물을 서울에 내다 팔아야 할 농민과 트럭의 차주를 연결해 주고 건당 1000원의 수수료를 받는 영세 주선업이었다.


『고향을 더 살맛 나는 곳으로 만들기 위해』

서산장학재단 2006년 정기사업보고회에서 인사말을 하는 成完鍾 이사장.

필자는 승용차로 10여km를 달려 읍내로 들어가 홍성문화원으로 찾아갔다. 읍 단위의 문화시설로서는 번듯한 건물이다. 장학재단 홍성지부 회원 400명이 강당을 빼곡히 채우고 있었다. 서산장학재단의 제17기 정기사업보고회는 오전 10시에 시작되었다. 국민의례에 이어 장학재단의 설립 취지문이 낭독되었다.

『… 우리는 향토 발전의 공동 이념 아래 배움의 환경을 조성하고 人材를 양성해야 한다는 사명감을 갖고 있다. 이에 지역과 국가가 원하는 훌륭한 人材를 키워 내고 우리가 몸 담고 있는 고향을 더 살맛 나는 곳으로 만들기 위해 서산장학재단을 설립한다』

서산장학재단은 가난한 학생이나 우수한 학생에 대한 학자금·장학금 지급을 중심 사업으로 삼고 있지만, 그것으로 그치는 것이 아니었다. 이날 홍성군 지역 보고회에서 가장 인상적이었던 것은 오히려 효행부문 5명, 봉사부문 7명에 대한 시상이었다.

수상자는 남편이 교통사고로 별세한 이후 어려운 가계를 책임지면서 치매에 걸린 시부모를 잘 모셔온 며느리, 환경미화원으로 일하면서 폐품을 수집해 마련한 돈으로 양로원에 난방 보일러를 설치해 주는 등 가난한 이웃을 도와 온 아저씨, 혼자 사는 병든 노인들을 위해 밑반찬을 장만해 주고 목욕까지 시켜 준 주부 등이었다.

간단하게 소개되었지만, 수상자 한 분 한 분의 공적사항은 감명 깊었다. 이런 분들의 숨은 선행으로 우리 공동체가 유지되어 온 것이다. 상을 받는 분들은 울고 있었다. 부상으로는 50만원짜리 순금 「행운의 열쇠」가 증정되었다.

홍성 행사는 두 시간 만에 끝났다. 成회장은 수상자 등과의 기념사진 촬영 등으로 분주했다. 그에게 다가가 처음 수인사를 나눈 뒤 홍성문화원 강당을 빠져나오는데, 成회장의 비서가 달려나와 『점심을 함께 하자』는 成회장의 뜻을 필자에게 전했다.

필자는 모처럼 고향사람들과 만난 成회장의 사정을 짐작해 점심 초청을 사양한 뒤, 이날 오후에 개최되는 당진 장학대상 시상식에도 참석하겠다는 뜻을 전해 달라고 부탁하고, 2년 전에 들렀던 읍내 「새조개 구이 식당」을 혼자 찾아 나섰다.

이날 오후, 당진 「문예의 전당」 소극장에서 열린 시상식은 홍성 행사와 비슷한 규모로 전개되었다.

잔잔한 감동을 먹고 상경한 지 이틀 뒤인 1월27일(토요일) 오후 5시 필자는 소공동 롯데호텔 비즈니스룸에서 成회장을 만나 네 시간 동안 얘기했다. 成회장이 먼저 필자에게 물었다.


카네기재단을 모델 삼은 서산장학재단

『우리 장학재단 행사가 어떻습디까』

―가슴 뭉클한 장면을 많이 목격했습니다. 행사의 흐름이 의외로 선진적이더군요.

『장학사업을 시작하기 전인 1987년부터 3년간 미국에 다니면서 카네기재단을 벤치마킹했죠. 서산장학재단은 카네기재단에 비하면 크게 미약하지만, 그 정신과 운영방식을 본받으려 노력하고 있습니다』

서산장학재단이 모델로 삼고 있는 카네기재단은 지금부터 102년 전인 1905년에 설립되었다. 100여 년의 세월이 흐르는 동안 카네기재단은 교육 및 의료 분야의 기부활동으로 어려운 처지의 청소년들을 미국의 성숙한 시민으로 키워 내는 데 공헌했다.

『미국은 백인종·흑인종·황인종이 모여 사는 다민족 국가인데다 계층 간 소득격차가 크기 때문에 사회통합을 이루어 내기가 매우 어려운 일입니다. 그럼에도 미국이 오늘날 초강대국으로서 군림할 수 있게 된 힘은 건전한 기부문화가 있었기 때문에 가능했다고 봅니다』

―서산장학재단이 그동안 지원한 학자금 및 장학금의 규모는 어느 정도입니까.

『재단에서 장학사업, 문화·학술사업, 복지사업으로 매년 지출하는 금액은 25억원 전후예요. 현재까지 제가 출연한 금액은 207억7000만원이며, 2010년까지 총 출연액 300억원을 목표로 하고 있습니다』

成完鍾 회장의 삶은 매우 드라마틱하다. 인생의 역전을 꿈꾸는 젊은이에겐 매우 교훈적일 것 같다. 다음은 成회장이 털어놓은 그의 과거사이다.

그는 1951년 충남 서산군 해미면 홍천리에서 태어났다. 아버지는 서산에서 인천까지 뱃길을 이용해 곡식을 내다 팔고 생필품을 사오는 장사를 했다. 김장철이 되면 새우젓이나 멸치젓 따위를 떼다가 인천 시장에 넘겨 수입이 쏠쏠한 편이었다.

그러나 成完鍾의 나이 세 살 때 가세가 기울기 시작했다. 한량 기질의 아버지가 친구들과 어울려 노는 데 열중한 나머지 사업에 등한시했기 때문이다. 곧 그의 가족은 해미의 큰 집을 팔고 서산군 지곡면 무장리로 이사를 가야 했다.


새엄마의 구박

완종 소년은 초등학교 5학년이던 해의 늦가을 학교에서 돌아와 동생 셋을 돌보고 있었다. 아버지가 짙은 화장의 여인을 데리고 집안으로 들어오면서 완종 형제 넷에게 『인사디려라, 새엄니다』라고 말했다. 그 여인이 누구인지 낌새를 차리고 있었던 완종은 반항했다.

『아줌마가 뭔디 우리 엄마란 말이유? 우덜 낳아 주신 엄니는 시퍼렇게 살아 계신디』

아버지는 열세 살짜리 장남의 뺨을 후려갈겼다.

『이 자슥이 어따 대고 이따우 말버릇이여?』

그 여인은 며칠 건너방에서 기거하더니 아버지의 힘을 빌려 기어이 안방으로 치고 들어왔다. 어머니는 어린 자식들을 끌고 사랑채의 뒷방으로 쫓겨나고 말았다. 그리고 며칠 지나지 않았다. 술집 출신인 그녀는 아버지에게 이렇게 퍼부었다.

『아니, 근디 술집 채려 줄팅게 들어오라 해놓고서 왜 여태 꿩 구워 먹은 소리여? 대관절 그놈의 술집은 언제 채려 줄 거여? 사내가 왜 한 입으로 두 말을 혀?』

어머니는 『술집이라니 대체 무슨 소리여? 누구 맘대로 우리 집에서 술장사를 하겠다는 거야?』라고 소리쳤다. 아버지로부터 학대를 받던 어머니는 결국 보따리를 쌌다.

섣달 초닷새, 어머니와 네 아들은 먼 친척집 행랑으로 쫓겨났다. 어머니는 몸져 누웠다. 완종 소년은 어머니와 세 동생을 위해 구걸을 하러 다녔다. 그러나 다섯 식구의 목구멍에 풀칠하기도 어려웠다. 어머니는 울먹이며 장남 완종에게 말했다.

『엄마는… 먼 곳으로 일하러 간다. 우리에겐 그 길밖에 없어. 그러니 넌 동생들 데리고 아버지한테 돌아가라. 엄마는 돈 벌어서 너희들 데리러 올 거야…. 그때까지만 동생들을 돌봐 줘, 알겠지? 미안하다, 정말 미안하다』

새벽녘에 어머니가 대문을 나서자마자 그는 부리나케 옷을 주워 입고 뒤따라 나섰다.

『어머니는 동구 밖으로 나서더니 걸음을 재촉하기 시작했어요. 우거진 숲 사이로 멀리 산등성이 부근의 호랑이고개가 희미한 윤곽을 드러내고 있었습니다. 그때 어머니가 뒤돌아보셨어요. 나는 따라가던 걸음을 멈추고 마주보았습니다. 어머니는 물끄러미 나를 보더니만 어서 돌아가라고 손짓을 한 뒤 다시 돌아서 발걸음을 빨리 하시더군요』

그는 동생들을 데리고 새엄마가 차지하고 있는 집으로 되돌아갔다. 새 학기가 시작되고 완종은 6학년으로 올라갔다. 시름시름 앓는 세 살배기 막내동생을 들쳐 업고 70리 길을 걸어가 외갓집에 맡긴 것도 그 무렵이었다.


소년의 가출

『새엄마는 기어이 집에서 술장사를 벌였습니다. 학교를 파하고 집으로 돌아오면 집 안에 가득한 막걸리 냄새가 역겨웠어요. 저녁이 되면 사내들의 웃음소리와 새엄마의 농지거리가 젓가락 두드리며 부르는 노랫가락에 섞여 지붕을 타고 동네로 퍼져 나갑디다. 친구들 보는 게 부끄러워 밖으로 나다닐 수 없는 형편이었습니다』

완종 소년은 동생들을 돌보며 빨래하고 집 안팎 청소까지 도맡아했다. 집에서 쫓겨난 일도 허다했다.

『그날도 발단은 간단했습니다. 내가 해온 나무짐이 적다는 이유로 새엄마가 지게를 마당에 내팽개치고 작대기로 때립디다. 구박받기보다는 가출하기로 결심했습니다. 미운 털 박힌 내가 집을 나가면 동생들이 오히려 살기가 나아질 것이라는 생각도 들었고요』

그는 두 달 넘게 밖으로 떠돌면서 남의 집 헛간 같은 곳에서 한뎃잠을 잤다. 부랑아처럼 동네를 방황하고 다녀도 아버지나 새엄마는 그를 찾지 않았다. 그래도 동생들이 식사 때 밥을 좀 남겼다가 몰래 툭툭 부스러지는 주먹밥을 만들어 그를 찾아와 손에 쥐어 주었다.

그는 어머니의 행방을 알기 위해 외갓집에 갔다. 모처럼 며칠 동안 잘 먹고 편히 잤다. 그러나 외할머니는 어머니의 주소를 모른다고 했다. 외할머니가 없는 틈을 타 방안을 뒤져 할머니에게 보낸 어머니의 편지를 찾아냈다. 「서울에서 의사댁의 가정부로 편하게 일하고 있지만, 새끼들이 늘 걱정스럽다」는 사연이 적혀 있었다.

『나는 편지를 몰래 품속에 감췄습니다. 외갓집을 나서려 하니 외삼촌이 150원을 쥐어 주어요. 10원짜리 열다섯 장, 처음으로 만져 본 큰돈이었어요. 갑자기 내 앞에 환한 빛이 비치는 것 같았습니다』

동생들을 가만히 불러내 오는 길에서 사온 빵과 과자를 나눠 주었다. 동생들은 눈깔사탕을 쪽쪽 빨았다.

『엄니가 서울에서 잘 지내고 계신단다. 다행이자? 형아가 서울 가서 엄니 모시고 니들 데리러 올 때까정만 참고 있어. 니들은 새엄마가 덜 미워하잖여. 엄니와 함께 니들 데리러 올 테니께… 형아가 약속하마, 우리 손가락 걸자』

그는 둘째의 손에 30원을 쥐어 주었다. 서울 가는 기차를 타려면 홍성까지 내려가야만 했다.

『홍성 가는 버스는 아침저녁으로 하루 두 번을 다녔지만, 100리 길을 걸어갔어요. 아버지에게 붙들릴까 겁났고, 차비가 아깝기도 했거든요. 새벽에 길을 떠나 14시간쯤 걸어 저녁 7시 무렵 홍성역에 닿았습니다. 그때가 열네 살, 난생 처음으로 기차를 탔습니다. 그리고 네 시간쯤 달렸을 거예요』

영등포驛. 이리저리 뚫린 통로, 큰 빌딩들이 그를 기죽게 했다. 편지봉투에 어머니의 주소가 적혀 있었지만, 찾아갈 도리가 없었다. 영등포역 건너편에 이삿집 간판들이 그의 눈에 들어왔다. 그 앞에 삼륜차가 줄지어 정차해 있었다.


「곰보아저씨」의 도움

안에서 불빛이 새어나오는 건물의 문을 다짜고짜 밀고 들어갔다. 난로의 온기로 훈훈했다. 운전기사들의 대기소였다. 한패의 운전기사들이 화투판을 벌이고 있었다. 배달 온 아이로 알았는지, 아무도 소년에게 주의를 기울이지 않았다. 얼마나 지났을까, 얼굴에 곰보 자국이 있는 아저씨가 소년에게 말을 걸었다.

『인석아, 너 어디서 왔어?』

『서산에서유』

『충청도 서산? 근데 왜 여기까지 왔어?』

『엄니 찾으러유』

『어머니? 어머니가 돈벌러 올라오신 거구먼』

『야』

『어머니 계신 곳은 알고 있구?』

『주소는 아는디, 그게 어딘지 몰라서유』

소년은 어머니의 주소가 적힌 편지봉투를 내보였다.

『고 녀석, 참 신통한 놈이네. 그래 잘 곳은 있구』

곰보아저씨는 호빵 하나를 사주면서 소년을 그의 옆에 재워 주었다. 다음날 아침에는 김이 모락모락 나는 해장국 한 그릇까지 사 먹였다.

『곰보아저씨는 용달차에 나를 태우고 10분도 안 돼 영등포동 5가 107번지 커다란 집 앞에 차를 세우더니만 초인종을 눌렀어요. 어머니는 대문을 열다가 그냥 실신해 쓰러지십디다. 가까스로 눈을 뜨더니 내 얼굴을 비비며 흐느끼기 시작하셨어요. 그때 등 뒤에서 「아주머니, 저는 갑니다」라는 소리가 들려왔습니다. 울고불고 하는 경황 중이라 아저씨께 감사의 인사도 드리지 못했어요』

그의 어머니가 일하는 집 주인 부부는 독실한 기독교인이었다. 그들은 소년을 따뜻하게 대해 주었으나 어머니와 함께 그 댁에서 눌러 지낼 처지는 아니었다.


약 심부름과 신문배달

『500m쯤 떨어진 시장 근처를 배회하다 보니 약사가 10여 명이나 되는 큰 약국이 있습디다. 「평생약국」. 바깥에서 얼마간 동정을 살피다 문을 밀고 들어갔습니다. 당시만 해도 경제적으로 여유가 있는 사람들은 전화로 약을 주문해 배달을 시키곤 했어요. 약국 주인은 기다리고 있었다는 듯 그날 당장 약 심부름을 내게 맡겨 주었습니다』

―당찬 소년이었군요.

『새벽녘에는 신문까지 돌렸죠. 신문 배달을 마치고 나면 아침을 먹고 부리나케 약국으로 달려갔어요. 새벽 4시에 일어나 밤 10시까지 일했습니다. 희망이 있으면 힘들지 않습니다. 어서 돈을 벌어서 어머니를 모시고 내려가 동생들과 함께 한집에서 사는 것, 이것이 삶의 목표였거든요』

어머니가 일하던 집에는 가정부용 작은 방 하나가 따로 있었지만, 그의 염치로는 거기서 기거할 수 없었다. 서울에 온 지 1주일 만에 그는 교회당에서 젊은 전도사를 만났다.

『처음 보는데도 그분은 앉으라면서 의자를 권했습니다. 나는 대뜸 「잠자리가 없어서 여기로 찾아왔다」고 털어놓았어요. 전도사는 나를 어떻게 보았는지 모르지만, 교회 안에 딸려 있는 방으로 데리고 가서 「나와 같이 생활하는 것이 싫지 않다면 여기서 자도 좋다」고 허락해요. 겹쳐 다가오는 행운 앞에 외람스러울 지경이었습니다』

도병희 전도사는 그가 초등학교를 중퇴했다는 것을 알고 야간학교에 다니게 해주었다. 영등포교회에는 학비 무료의 중등과정과 고등과정이 개설돼 있었다.

약국 일과 신문 배달로 돈을 벌어 저축하기 시작한 지 6년의 세월이 흘렀다. 드디어 외삼촌으로부터 우리 다섯 식구가 살 집과 논 세 마지기를 마련해 놓았다는 편지가 왔다.

『우리의 새 집으로 외삼촌이 동생들을 데리고 오던 날, 우리 다섯 식구는 한 덩어리로 부둥켜안고 웃음바다와 눈물바다를 이뤘어요. 우리는 한 울타리 안에 사는 것만으로도 행복했습니다』

그러나 논 세 마지기 농사로는 다섯 식구가 살아가기에 빠듯했다. 스무 살의 그는 저수지를 막아 수로를 내는 공사장 등으로 나가 무거운 지게짐을 졌고, 어머니는 새벽길을 걸어 겨울바다의 개펄에 나가 조개를 캐다가 시장에 내다 팔았다.

그해 가을, 김장철이 되자 배추와 무를 운반하러 외지에서 화물차들이 몰려왔다. 그는 동네 청년들과 함께 화물차에 배추를 실은 다음 장거리를 뛸 수 있도록 갈무리해 주는 일을 했다. 그럭저럭 겨울을 버틸 만한 돈을 모을 수 있었다.

그로부터 1년 뒤인 1973년 가을, 서산·태안을 비롯한 서해안 일대에 태풍 「아이리스」가 휩쓸고 지나가 들판에는 아무것도 남지 않았다. 그의 가족도 정부에서 나눠 주는 밀가루를 반죽해 만든 국수나 수제비로 끼니를 떼웠다. 논농사로는 미래가 없었다.


단돈 1000원으로 시작한 첫 사업
서산장학대상 시상식이 장학금 전달 행사와 함께 열렸다. 서산장학대상은 소외된 이웃을 찾아 헌신적인 봉사를 하고 있는 지역의 숨은 일꾼을 찾아 널리 알리기 위해 시상하고 있다.

그는 한 해 전에 눈여겨보아 두었던 트럭 화물 일을 배우기 위해 트럭운전사 이홍수씨를 찾아갔다. 보수도 필요 없으니 조수로 쓰면서 일만 가르쳐 달라고 매달렸다.

『나는 조수 일을 하면서 화주와 차주 사이에 중개업자가 개입해야 배추 한 포기라도 서산에서 서울까지 운반될 수 있다는 구조를 터득했습니다』

운전사 이홍수씨가 준 수고비는 이미 생활비로 나가고 그의 수중에 남은 것은 단돈 1000원이었다.

『벌어서 주기로 하고 해미우체국 앞 김동수씨 댁 사랑방 하나를 월세로 빌렸죠. 수동으로 거는 전화기도 한 대 놓았어요. 집기라면 알루미늄 밥상 하나에 노트 한 권, 볼펜 한 자루가 전부였습니다. 정성을 다해 쓴 「성신화물 해미영업소」라는 작은 간판 하나를 내달았죠』

그때, 그의 나이 스물둘이었다. 화물중개 한 건을 하면 수수료로 1000원을 받았다. 당시 90kg 들이 쌀 한 가마가 4000~4500원 정도였으니 꽤 짭짤한 수입이었다.

『가만 보니 농민들이 차가 없어 애를 태우는 날은 1년에 40일 남짓했어요. 어떻게 하면 1년 365일 화물차를 공백 없이 굴릴 것인가, 이것이 차주들의 목표였는데, 그 공백을 내가 나서서 메워 줘야 했습니다』

안정적인 수요처는 의외로 가까이에 있었다. 농협의 단위조합, 이곳은 지역에서 수확한 쌀을 수매해 서울에 되파는 일이 주요 업무였던 만큼 그의 주위에 그곳보다 더 고정적인 고객이 있을 수 없었다.

『주저하지 않고 조합장을 찾아갔어요. 그분은 평소에 「일 하나는 꼼꼼이 한다」며 저를 귀여워했거든요. 첫 거래에 만족한 조합장은 이후 일을 통째로 떠맡겨 주다시피 하셨어요. 그분이 최순기씨입니다』

개별화물은 물론 단위조합 일까지 도맡아 처리하면서 그도 모르는 사이에 그는 내포지역 차주들에겐 일종의 「큰손」으로 통하게 되었다.

『어머니는 더 이상 바닷가로 일하러 갈 필요가 없게 되었어요. 동생들도 앞날에 대한 불안을 떨치게 되었고요. 그렇게 2년 정도 지나니 내 손에 100만원이라는 돈이 쥐어져 있었습니다. 우리 초가집을 양철지붕으로 바꾼 것도 그 무렵이었어요』


건설업에 뛰어든 사연

그는 동업자 1인과 함께 트럭 한 대를 사서 운송업을 겸업했다. 그러나 그 트럭이 군용 지프와 충돌하는 사고가 일어났다. 그 사이 그는 돈을 좀 모았지만, 더 이상 운송업에 손대고 싶지 않았다고 한다. 트럭을 처분하고 영업소 일에만 전념했다. 1977년 어느 날, 퇴근 무렵의 그를 최순기 조합장이 찾아왔다.

『자넨 내가 건설업에 관계하고 있다는 것 잘 모르지? 내가 조합장이 되기 전까지 서산토건이라는 회사에 지분을 갖고 사업을 했거든. 네게 제안 하나 할게』

『… 』

『조합장이 되고부터는 그 일을 제대로 추스를 수 없네. 그 지분을 자네가 인수하면 어떨까』

『글쎄요, 당최 무슨 말씀이신지… 』

『그러니까 그 회사에 주주가 한 열 명쯤 있거든. 다들 사장인 셈이지. 그중에 나도 하난데』

『저는 건설업을 전혀 모르는데요』

『괜찮아. 처음부터 잘 아는 사람이 어디 있나? 자넨 무슨 일을 해도 성공할 사람이야. 돈이 좀 모자라면 지금 있는 대로만 줘. 나중에 갚으면 되니까』

『그게 저 같은 사람도 할 수 있는 일입니까』

『걱정하들 말어. 차근차근 가르쳐 줄 테니 그대로 따르기만 하면 되는 거여』

그 제안에 그는 오래 고민하지 않았다. 그때 그가 가진 현금은 140만원, 건설업을 하기엔 상당히 부족했다. 조합장은 그 돈으로 200만원어치 주식을 양도하겠다고 했다. 그러나 비즈니스는 비즈니스. 그는 100만원어치 주식만 주주명부에 올려 주고, 나중에 돈이 더 생기면 남은 지분을 올려 달라고 조합장에게 부탁했다.

그가 나머지 반을 등재하는 데는 그리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건설업이 그 뒤 수십 년 동안 그의 삶을 관통하며 필생의 사업이 될 것이라는 사실은 그 당시 그로서는 짐작하지도 못한 일이었다.

―스물다섯의 나이에 주식회사의 등기이사로서 대외명칭 「사장」이라면 대단한 성공 아닙니까.

『알고 보면 영업사원보다 조금 나은 역할이라고 할까요. 어떻든 내 인생의 여러 은인들 가운데서 최순기 조합장만큼 든든한 후원자이자 사업의 스승이 없었습니다. 어려울 때마다 친아들처럼 보살펴 주며 곁에서 조언과 훈수를 아끼지 않으셨습니다』

열 명의 주주가 각자 맡은 구역에서 공사를 수주해 독자적으로 일을 진행하는 것이 서산토건의 업무추진 방식이었다. 그의 담당 구역은 서산이었다.

1980년대만 해도 건설업계에선 5단계까지 하청을 주는 사례가 있었다. 이런 부조리가 횡행하면 말단 현장에서 비뚤어진 사고방식을 가질 수밖에 없었다. 그러나 그는 공사현장에서 노동자들과 함께 시멘트를 비비고, 철근을 세우며, 벽돌도 쌓았다. 정도를 지키려 애쓰는 그를 따르는 사람들이 차츰 늘어났다.

서산은 내포지방의 어느 市·郡보다 면적이 넓고 일거리도 많았다. 그는 경지정리사업 등으로 튼튼한 기반을 쌓았다.

이런 가운데 정부는 사회간접자본(SOC) 확충 계획을 세우고 각 市·郡에 전화국 등을 신축하거나 증설하기 시작했다. 건설업계는 덩달아 바빠지기 시작했다. 「서산토건」도 대전까지 진출해 한국전력 등이 발주한 큰 프로젝트를 하나씩 수주하며 몸집이 급격히 불어났다. 드디어 한국전력 부속 한일병원 신축공사(서울 도봉구 쌍문동)도 수주했다. 무려 60억원짜리 공사. 서산토건 한 해 매출액을 몽땅 합친 것의 여섯 배나 되는 금액이었다. 그로서는 첫 上京戰(상경전)의 빛나는 승리였다.


대아건설 인수해 충청권 기업랭킹 제1위로 키워
작년 12월 成完鍾 회장은 일본능률협회컨설팅으로부터「2006 글로벌 경영대상」을 받았다.

나이 스물아홉의 패기만만한 사업가 成完鍾. 그는 해미중학교 국어교사 동영숙씨와 결혼했다. 결혼 후 사업은 불같이 일어났다. 이제 고향 서산·태안을 놓고 나이든 동업자들과 밥그릇 싸움을 할 처지가 아니었다.

1981년, 그는 대전을 포함한 충청지역 기업 중 자산규모 제3위인 대아건설을 9억원에 인수했다. 관급공사 수주로 명맥을 이어 가던 회사였다.

1986년, 그는 정치인에게 뇌물을 주고 부정입찰을 했다는 누군가의 투서 때문에 대검 중수부에 불려가 5박6일간 철야조사를 받았다. 그 사이 수사관들은 그의 회사를 압수수색했지만, 비자금 같은 건 없었다. 그가 전세 들어 사는 집(그는 2004년 처음으로 서울 청담동에 자택을 마련했다)을 뒤져 보았지만 현금은커녕 제대로 된 통장 하나 없었다. 결과는 내사종결. 마지막 날, 수사관은 15층 조사실에서 도가니탕을 놓고 소주 한잔을 주면서 『참, 당신은 된 사람 같소』라고 사과 겸 위로를 했다고 한다.

―대아건설이 참여한 대표적 실적은 무엇입니까.

『정부 대전청사, 한국전력 본사, 서울대학교, 잠실운동장 수영장 등입니다. 경부고속철도, 호남고속철도, 서해안고속도로, 김해국제공항과 같은 대형 국책사업과 광주 지하철 건설 등에 전체 시공을 맡았거나 컨소시엄의 파트너로 참여했습니다』

―대아건설의 경쟁력을 하나만 내세운다면 무엇입니까.

『고도의 기술을 요하는 플랜트 분야죠. 5大 메이저 건설사들과 당당히 경쟁해 평택·인천·통영의 LNG 기지와 태안화력발전소·여의도변전소 등 고난도 기간시설을 자체 기술로 완공했습니다』

그의 사업은 성장·확대 가도를 달렸다. 1996년에는 농산물 유통 분야에서 국내 제1위인 중앙청과시장을 인수했다. 연간 매출 5000억원 규모의 가락동 중앙청과시장은 2년 뒤 국내 최초로 전자입찰 시스템을 도입해 재래시장에서도 신용거래를 가능하게 하는 획기적인 발판을 마련했다.

1997년 말부터 몰아친 IMF 금융위기는 건설업계에도 엄청난 시련을 강요했다. 대아건설은 직원들이 보너스 400%를 자진 반납하는 등 「회사 살리기 운동」에 힘입어 위기를 극복했다. 2000년에는 아파트를 짓기 위해 5000평 부지의 온양관광호텔을 매입했지만, 역사적 유적을 보전해 달라는 지역 여론을 듣고 리모델링 공사를 해 시설을 업그레이드할 만큼 자금의 여유가 생겼다.


해외건설업 면허 제1호인 京南企業 인수
서울 동대문구 답십리에 위치한 대아그룹 서울 사무소 건물.

2003년 8월22일, 대아건설은 M&A시장에 나와 있던 한국의 해외건설업 면허 제1호인 京南企業(경남기업)을 인수했다. 경남기업은 1951년 창사 이후 해외 16개국 160여 건, 38억4000만 달러 규모의 해외건설 공사를 수행했다. 국내보다 해외에서 지명도가 더 높은 회사다. 1973년 건설업 최초로 증시에 상장된 기록을 보유하고 있다. 그 뒤 경영부진으로 1984년 대우그룹에 편입되었으나 대우그룹 전체가 어려워진 1999년 워크아웃에 들어갔다가 3년 만에 졸업한 사연을 지닌 업체였다.

―「새우가 고래를 삼킨다」는 얘기까지 들으며 5파전의 치열한 인수경쟁에 뛰어든 까닭이 무엇이었습니까.

『앞으로 10년 후에는 국내 건설시장엔 소재가 없을 것으로 보았습니다. 그때까지 대아건설엔 해외건설 경험이 없었어요. 해외건설 경험이 풍부한 경남기업을 인수해 중국·이라크·베트남, 그리고 아프리카 시장에 진출하려고 결단했던 것입니다』

成회장은 대아건설이라는 간판을 내리고 피인수회사인 「경남기업」이라는 브랜드를 사용하기로 결심했다. 대아건설의 임원들과 고참사원들이 『어떻게 키워 온 회사인데, 하루아침에 「대아건설」이란 간판을 내릴 수 있느냐』고 눈물로 호소했다. 인수 당시 대아건설과 경남기업의 실질적 규모는 2대 1이었다. 그때 그는 이렇게 설득했다.

『여러분의 마음은 알겠지만 10년, 20년 뒤의 상황을 생각해 보세요. 국내엔 SOC가 충족돼 일감이 고갈될 거요. 결국 해외로 나갈 수밖에 없어요. 그러면 「경남」이란 이름이 유리하잖아요. 이것은 후배에게 일자리, 나아가 꿈과 희망을 주기 위한 선배의 어려운 결단이에요』

―경남기업과의 합병 이후 어떤 시너지 효과가 나타났습니까.

『브랜드 가치가 높아졌고, 자금조달에도 유리해졌으며, 작년의 해외수주액이 4억 달러를 넘었습니다. 현재 中東· 스리랑카·베트남 등 8개국에서 플랜트·주택사업을 진행 중에 있고, 중국·카자흐스탄·예멘·中東에서 신규시장을 개척해 플랜트 등 高부가가치 사업의 개발 및 참여를 추진하고 있습니다』

지난 1월22일 오후 3시30분, 成회장과 세 번째 인터뷰를 위해 동대문구 답십리동 대아그룹 서울사무소를 방문했다. 대아건설은 경남기업으로 바뀌었지만, 본사는 그대로 충남 아산시에 두고 있다. 대아그룹 서울사무소는 박치기 하나로 세계 頂上에 올라섰던 레슬러 金一(김일·故人)이 후진들을 양성하며 비지땀을 흘렸던 체육관을 리모델링한 건물이다. 成회장이 30세 때 上京했다가 우연히 배추밭 한가운데 우뚝 선 그 우람한 모습을 보고 입을 딱 벌리며 이렇게 결심했다고 한다.

『웬 개인 체육관이 서산군청보다 크냐! 서울 사업이 잘되면 나도 저런 건물을 지어 사원들로 가득 채워야지』


『재산은 사회에 환원하겠다』

―두 아들에겐 국민주택 규모의 아파트 하나씩만 사주고, 나머지 재산은 모두 사회에 환원하겠다고 말씀하셨는데, 부인께서는 뭐라 합디까.

『1999년, 대전 목원大에서 명예박사 학위를 받으면서 제가 공언한 건데, 물론 사전에 가족으로부터 흔쾌한 동의를 얻었어요. 우선은 2010년까지 서산장학재단에 매년 25억원씩 출연해야 합니다. 경영 일선에서 물러날 때 제가 가진 주식을 모두 처분해 장학재단이나 사회사업에 모두 기부할 생각입니다』

기독교 교회 장로인 成회장은 부인 동영숙 여사와의 사이에 2남을 두고 있다. 장남은 軍복무를 마치고 고려大 경영학과 4학년으로 복학했고, 차남은 미국 에모리大 1학년에 재학 중이다.

―이미 많은 것을 성취하셨습니다만, 앞으로 꼭 하시고 싶은 일은 무엇입니까.

『저의 고향 서산은 월드 스케일의 항만으로서 최상의 입지조건을 두루 갖추고 있는 加露林灣(가로림만)을 껴안고 있습니다. 수심 20m, 안벽 길이 9000m 이상으로 20만t 선박의 접안이 가능하며, 배후지가 3억 평으로서 싱가포르의 1.5배에 달합니다. 가로림(이슬숲)만 프로젝트는 朴正熙 대통령의 금고에 보관된 마지막 대형 프로젝트였던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여기에 자유경제특구를 만들어 놓으면 1인당 주민소득 4만 달러 실현이 어렵지 않다고 합니다. 「이슬숲」 프로젝트가 추진되고 거기에 제가 참여해 혼신의 힘을 바칠 수 있는 날이 도래했으면 좋겠습니다』●

사진 : 조준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