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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鄭淳台 기자의 역사현장 탐방] 江華島

정순태   |   2007-03-04 | hit 5888

서울에서 江華島(강화도) 가는 가장 쉬운 길은 88올림픽대로를 타고 가다 김포공항으로 들어가기 직전에 48번 국도로 길을 바꿔 계속 西進(서진)해 바다와 마주치는 곳에서 新강화대교를 건너가는 코스이다. 그러나 이번에는 접근로를 좀 달리했다.

48번 국도를 달리다가 김포시 통진면에서 305번 지방도로를 타고 陽村(양촌)까지 내려와 여기서 302번 지방도로로 우회전, 강화해협이 보이는 곳까지 달리면 草芝大橋(초지대교)가 걸려 있다. 초지대교는 김포시 대곶면 大明里와 강화군 吉祥面(길상면)을 이어 준다. 초지대교는 강화해협의 연육교 3개 중 가장 최근에 놓인 다리이다.

초지대교 위에 서서 강화해협을 바라보면 우리 開港史(개항사)가 보인다. 강화해협의 폭은 800m에 불과하다. 강화해협의 또 다른 이름은 「鹽河(염하)」이다. 「짠물이 흐르는 강」처럼 보여 그런 이름이 붙은 것 같다. 그래도 염하는 한강·임진강·예성강의 河口(하구)와 이어지는 엄연한 바다이다. 고려·조선 시대의 강화해협은 수도권 방어의 요새였다. 강화해협이 봉쇄당하면 漕運船(조운선)의 물길이 막혀 수도권은 밥을 굶을 수밖에 없었다.


開港을 막은 강화해협

마침 오전의 썰물 때라 강화해협의 양쪽 가장자리와 군데군데에 갯벌이 드러나 선박운항이 가능한 水路(수로)의 폭은 100m가 되지 않는 것 같다. 강화해협 兩岸(양안)의 포대에 정확한 조준이 가능한 대포 몇 대만 설치해 놓았다면 그 시절엔 그 어떤 함선이라도 제압할 수 있었던 절호의 지형이다.

우리는 일본보다 22년 늦게 開港(개항)했다. 만약 강화해협이 근대 증기선의 기동이 용이한 해역이었다면 조선의 開港은 훨씬 빨랐을 것이다. 1853년 페리 제독의 「黑船(흑선)」이 무력시위를 통해 도쿠가와 막부를 굴복시킨 에도灣(지금의 東京灣), 1863년 사쓰마藩의 성밑거리(城下町)를 초토화시킨 영국 함대의 포격 현장인 가고시마灣, 1864년 4개국 연합함대가 침입해 조슈藩의 攘夷(양이)정책을 포기시킨 시모노세키해협은 海防의 지리적 조건에 관한 한 강화해협보다 훨씬 취약했다.

19세기 중엽까지 조선·淸國(청국)·일본의 東아시아 3국은 모두 쇄국을 國是(국시)로 삼았다. 그러나 3국의 쇄국은 질적으로 달랐다. 청국은 廣東港(광동항)을 통해 전통적인 南海무역을 계속했고, 일본은 규슈의 나가사키(長崎)港을 열어 놓고 네덜란드人에게 蘭學(난학: 서양학문)을 배우면서 교역의 파트너로 삼았다.

반면 조선은 事大交隣(사대교린)이란 정책下에 청국과는 朝貢冊封(조공책봉)관계, 일본 도쿠가와 幕府(막부: 바쿠후)와의 對等교류 관계를 제외한 모든 대외관계를 고집스럽게 거부했다. 세계의 간선교통로(메인 트렁크)에서 스스로를 제외시킨 조선의 낙후는 당연한 귀결이었다.

갯벌이 드러난 썰물 때의 강화해협 初入. 선박운항이 가능한 水路의 폭은 100m 정도이다. 이 해협에 걸린 연육교가 초지대교이다.


프랑스·미국·일본 함대와 차례로 격전을 벌인 草芝鎭
斥和碑

초지대교를 건너면 바로 草芝鎭(초지진: 강화군 길상면 초지리 624)이다. 초지진은 해상으로부터 수도권에 침입하는 외적을 막기 위해 孝宗(효종) 7년(1656)에 구축한 요새다. 高宗(고종) 3년(1866) 9월 천주교 탄압을 구실로 침입한 프랑스 극동함대, 高宗 8년(1871) 4월에 통상을 강요하며 내침한 미국의 아시아 함대, 高宗 12년(1875) 8월에 침공한 일본 군함 雲揚號(운양호)와 치열한 격전을 벌인 현장이다.

당시, 프랑스·미국 함대는 근대 무기를 보유한 데 비해 조선군은 사거리가 짧고 조준이 잘 되지 않는 구식 무기로 맞섰다. 그러나 강화도라는 전략적 지형을 이용해 프랑스군과 미국군을 물리친 당시의 집권자 興宣大院君(흥선대원군)은 기고만장했다. 그 표현이 1871년 서울을 비롯한 전국 요충지에 세워진 斥和碑(척화비)이다.

그 비문의 主文 12자는 「洋夷侵犯 非戰則和 主和賣國」(양이침범 비전즉화 주화매국)이었다. 「서양 오랑캐가 침입하는데 싸우지 않으면 화해할 수밖에 없고, 화해를 주장하면 나라를 파는 짓이다」라는 뜻이다.

그러나 조선보다 앞서 개항해 富國强兵(부국강병)을 추진해 온 일본은 어느덧 서양 열강의 본을 받아 강화해협에 운양호를 진입시켜 砲艦外交(포함외교)를 전개했다. 운양호의 침입은 이듬해(1876년 2월) 강화도조약(병자수호조규)을 맺게 되었는데, 이 불평등조약은 일본에 의한 국권강점(1910년)의 출발점이 되었다.

초지진은 강화해협의 남쪽 입구에 위치한 관계로 1866년 丙寅洋擾(병인양요)·1871년 辛未洋擾(신미양요)·1875년 운양호 침입 때 모두 격전장이 되었다. 지금도 성벽과 老松(노송)에는 각종 포탄을 맞은 흔적이 남아 있다.

초지진 내부에는 眞品(진품) 홍이포가 강화해협을 향해 거치되어 있다. 일제강점 때 일본 고관이 뜯어 가 자신의 별장 기둥 밑받침으로 쓰다가 광복 직후 장병찬씨에게 인계되어 이곳에 전시하게 되었다고 한다.

홍이포의 砲身(포신)은 2.6m. 포구에 화약과 포알을 넣고 심지에 불을 붙여 폭발하는 힘에 의해 발사되었다. 최대 사거리 700m. 포알 자체는 폭발하지 않아 살상능력은 미약했다. 다만 명중하면 선체에 구멍을 내는 정도였다.

초지진을 나와 해안순환도로를 따라 1.5km쯤 北上하면 곧 德津鎭(덕진진: 강화군 불은면 덕성리 833)이다. 덕진진은 숙종 3년(1677) 萬戶營(만호영)이 되었다. 고종 11년(1874)에 축조한 이곳 남장포대엔 15문의 포가 남아 있다.


대원군, 러시아의 南進에 위기감

병인양요 때는 梁憲洙(양헌수)의 부대가 밤의 어둠을 이용해 덕진진에 상륙한 뒤 인근 鼎足山城(정족산성)에 들어가 포진하고 있다가 프랑스군을 격파했다. 여기서 병인양요가 발생한 배경을 잠시 짚고 넘어가야 할 필요가 있겠다.

1860년, 英·佛 연합군이 北京을 점령하자 이를 외교적으로 중재한 代價(대가)로 러시아는 연해주를 확보했다. 이로써 조선과 러시아는 두만강을 사이에 두고 국경을 접하게 되었다. 이후 러시아는 조선에 통상을 거듭 요구했다.

1863년, 고종의 즉위와 더불어 국왕의 아버지인 흥선대원군이 정권을 장악했다. 대원군은 러시아의 南進(남진)에 위기감을 느끼기 시작했다.

이때 승지이며 천주교도인 南鍾三(남종삼)이 프랑스와 동맹을 맺어 러시아의 남진을 저지하자고 건의했다. 조선에서 포교하고 있는 프랑스 주교 베르뇌를 활용하면 가능할 것이라 했다. 대원군도 받아들일 듯했다. 천주교도를 통해 프랑스 세력을 끌여들여 러시아의 남하를 저지하는 비밀교섭을 추진한 것이다.


大院君의 천주교 탄압
초지진의 성벽. 성벽과 老松에 포탄을 맞은 흔적이 아직도 남아 있다.

당시 조선에는 베르뇌 주교 등 프랑스 신부 12명이 포교활동을 하고 있었으며, 신도수가 2만여 명에 달했다. 천주교도들은 이 비밀교섭을 성사시켜 신앙의 자유를 얻고자 했다. 대원군도 직전의 安東 金氏 세도가와는 달리 천주교에 대한 악감정은 엷었다. 실은 대원군의 부인 민씨와 고종의 유모가 착실한 천주교도였지만, 대원군은 모른 척해 왔다.

그러나 南鍾三의 지지부진한 행동으로 지방에 내려가 있던 프랑스 주교와의 연결이 지체되어 비밀교섭 진행에 차질이 생긴데다 조정 내부에서 천주교에 대한 경계론이 높았다. 선교사를 먼저 보내 포교활동을 하고, 그 꼬리를 물고 군함을 파견하는 것이 제국주의 열강의 常用手法(상용수법)이었던 것이다. 때마침 北京을 다녀온 冬至使(동지사) 李興敏(이흥민)이 『청국에서 천주교도를 탄압하고 있다』고 보고했다.

이에 대원군은 태도를 돌변하여 천주교 탄압령을 내렸다. 1866년 1월5일, 베르뇌 주교의 하인 이선이·전장운 등이 체포되어 무시무시한 고문을 받았다. 이어 베르뇌 주교 등 프랑스 신부 9명과 홍봉주·남종삼 등 천주교인 수천 명이 전국에서 체포되었다. 이들은 모두 서울 새남터와 충남 보령의 갈매못 등지에서 순교했다. 이것이 한국사에서 최대·최악의 천주교도 학살사건인 「丙寅박해」이다.

천주교도에 대한 박해가 진행되는 가운데 리델 신부는 중국 천진으로 탈출해 프랑스 극동함대 사령관 로즈 제독에게 은신 중인 페롱·칼레 신부와 천주교도의 구출을 위해 조선에 군함을 출동시켜 달라고 요청했다.

로즈는 北京 주재 프랑스 대리공사 벨로네에게 즉각 이 사실을 알렸다. 벨로네는 가까운 시일 내에 조선을 쳐서 국왕을 갈아치울 것이라는 내용의 공문을 청국의 총리아문에게 보냈다.

청국의 총리아문사무 공친왕은 조선과 프랑스 사이의 중재에 나섰다. 『조선에서 천주교도를 박해했다면 무력행사보다는 우선 진상을 조사해야 할 것이고, 조선은 천주교의 박해에 대해 해명해야 할 것』이라고 양측에 통보했던 것이다.


프랑스 함대의 침입―丙寅洋擾
초지진 요새 안에 거치되어 있는 眞品 홍이포.

그러나 양측은 청국의 중재를 무시했다. 대원군은 「조선의 국법질서를 어지럽힌 자들을 다스리는 데 프랑스가 웬 참견이냐」는 식이었다. 로즈 제독과 벨로네 대리공사는 「진상조사는 필요 없고 이 기회에 조선을 정복하겠다」는 식이었다.

로즈 제독은 1866년 9월18일 旗艦(기함) 프리모오게 등 3척의 군함을 이끌고 중국 山東省(산동성)의 지부港을 출항했다. 리델 신부와 조선인 신자 3명이 통역 겸 안내인으로 동승했다.

리델 함대가 경기도 작약도 앞바다에 도착한 것은 9월23일. 旗艦 프리모오게가 암초에 걸려 선체에 약간의 손상을 입었다. 나머지 2척은 강화해협을 北上해 한강에 진입했다. 24일엔 양천의 염창港에, 9월26일엔 양화진을 거쳐 서강에 도착했다.

프랑스 함선 2척이 한강을 거슬러 올라오자 어영중군 李容熙(이용희)가 기마대 등 여러 부대를 동원해 한강변을 경계했다. 그러나 마땅한 요격 수단은 없었다. 시커먼 연기를 내뿜고 다가오는 괴상한 배(異樣船·이양선)를 바라볼 뿐이었다.

한강과 서울을 정찰한 프랑스 군함 2척은 다음날 유유히 한강을 내려가 旗艦 프리모오게와 합류했다. 로즈 제독은 함대를 거느리고 중국 산동성의 지부港으로 돌아갔다. 이것이 정찰 목적의 제1차 원정이었다.

프랑스 함대가 다녀가자 민심이 흉흉해졌다. 조정에서는 연안의 경비를 강화하고, 邑城(읍성)을 보강하고, 배를 수리하느라고 부산했다. 衛正斥邪派(위정척사파) 유학자들의 상소가 쇄도했다. 예컨대 奇正鎭(기정진)의 상소는 『서양과 통교하면 사람이 짐승으로 전락할 것이니 단연코 배격해야 한다』고 했다. 그러나 그 실행 프로그램은 『인심을 하나로 묶는 데 있다』는 수준이었다.

대원군은 조만간 프랑스 함대가 재침할 것으로 예상했다. 과연 그러했다. 그해 10월13일, 로즈 제독은 7척의 함선을 경기도 물류도 앞바다에 집결시켰다. 일본 요코하마에 주둔해 있던 병사까지 싣고 와 병력은 600명에 달했다.

프랑스군은 강화해협을 북상, 갑곶진에 이르러 그곳을 간단히 점령했다. 강화유수가 퇴거를 요구하자 『무슨 이유로 프랑스 신부들을 죽였느냐』면서 『너희도 죽음을 당할 것』이라고 협박했다. 다음날 아침, 프랑스군은 강화부를 공격해 점령했다. 그 다음날엔 강화해협을 건너 통진부를 습격·약탈하는 등 소규모 작전을 전개했다.

대원군은 기포연해 순무사중군 이용희에게 2000명의 병력을 주어 출정시켰다. 그러나 이들이 통진부에 접근했을 때 프랑스군은 이미 문수산성으로부터 강화해협을 건너 강화부로 철수한 뒤였다. 강화해협을 사이에 두고 양군은 대치하게 되었다.

이용희는 강화부를 점령하고 있던 프랑스군에 서한을 보내 속히 물러나라고 요구했다. 프랑스군 측은 『선교사를 살해한 주모자를 엄히 징계하고, 속히 전권대신을 보내 프랑스와 조약을 체결토록 하라』고 맞받았다.


호랑이 사냥꾼들이 사격술 뽐낸 鼎足山城 전투
양헌수의 호랑이 포수 부대가 매복해 있다가 프랑스 육전대에 기습 공격을 가해 승전한 정족산성 東門.

소강상태에 빠진 戰局을 타개하기 위해 프랑스군은 10월 하순부터 다시 공세로 전환했다. 그들은 10월26일 강화해협을 건너 다시 문수산성으로 진출했다. 이때 산성內에 매복하고 있던 廣州別破軍(광주별파군)은 기습공격을 가해 프랑스군 수명을 사살했다. 그러나 병력과 화력의 열세로 문수산성 수비대는 통진부로 후퇴했다. 통진의 조선군은 즉각 출동해 프랑스군을 공격하려 했으나 프랑스군은 안개를 이용해 재빨리 강화도로 퇴각했다.

문수산성 전투로 조선군의 방어상태를 확인한 프랑스군은 조선군의 강화도 상륙을 저지하기 위해 강화도 연안에 선박을 격침시키고, 대안의 京畿水營(경기수영)을 포격했다.

이용희는 千總(천총) 양헌수에게 호랑이 사냥꾼 등으로 구성된 포수부대(병력 500명)를 주어 야음을 틈타 강화해협을 渡海(도해)토록 했다. 11월7일 밤, 양헌수의 포수부대는 강화해협을 건너 덕진진에 상륙했다. 양헌수 부대는 다음날 새벽 5시경 10여 리를 행군해 鼎足山城(정족산성)에 잠복했다.

조선인 천주교 신자로부터 이 소식을 접한 로즈 제독은 올리비에 대령에게 160여 명의 병력을 주어 정족산성을 공격케 했다. 그동안의 전투에서 조선군의 전투력을 얕잡아 본 올리비에 대령의 육전대는 포병의 지원 없이 정족산성 동문과 남문으로 올라왔다.

양헌수 부대는 병력을 3分해 프랑스군이 성문 가까이 접근할 때까지 매복해 있다가 기습적인 일제사격을 가했다. 프랑스군은 즉각 반격에 나서 치열한 사격전이 벌어졌다. 조선군 포수들의 화승총은 프랑스군의 소총에 비해 성능이 떨어졌지만, 평소 맹수 사냥을 통해 사격술이 숙달되어 있었다.

이 전투에서 프랑스군은 6명이 전사하고, 30여 명이 부상했다. 불의의 기습에 패한 올리비에 부대는 도주했다. 그들이 버리고 간 무기와 장비가 동문 앞에 즐비했다. 조선군은 추격에 나섰으나 탄약과 화살이 떨어져 정족산성으로 돌아왔다. 조선군 측 피해는 전사자 1명, 부상자 3명뿐이었다. 프랑스군은 갑곶진까지 패퇴했다.


프랑스軍 敗退에 사기 충천한 朝野

이 전투 후 조선군은 계속 병력을 증강해 강화도에 교두보를 확보했다. 프랑스군은 정족산성에 포진한 조선군에 의해 견제를 받게 된데다 당초 침공목표(조약 체결)를 달성할 수 없게 되자 난처한 입장에 빠졌다.

11월11일, 살아남은 프랑스 신부 2명이 이미 중국으로 탈출했다는 사실이 확인되자 프랑스군은 강화읍에 불을 지른 뒤 그동안 약탈한 서적·무기·금괴·은괴 등을 갑곶진에 들어온 군함에 싣고 강화도에서 물러났다.

이로써 약 40일간 봉쇄되었던 漢江口(한강구)가 풀리게 되었다. 비록 강화부가 약탈당하기는 했지만 서양 오랑캐를 물리쳤다고 하여 조선의 朝野(조야)는 사기가 충천했다.

병인양요 후 천주교도에 대한 태도는 더욱 경화되었다. 양화진 근처에 새로운 형장이 만들어졌다. 강변북로를 상암월드컵경기장 쪽으로 달리다 보면 천주교 교회당이 정상부에 올라앉은 野山(야산) 하나가 눈길을 끈다. 이 야산의 이름이 「절두산」이다. 정상부의 형장에서 천주교도들의 목을 쳐 절벽 아래 한강으로 떨어뜨리게 했던 곳이라 하여 이런 이름이 붙었다. 「병인박해」 때 처형당한 천주교도는 8000명에 달했다.


덕진진, 辛未洋擾 때 美 극동함대와 포격전
대원군 시절 천주교도들을 처형했던 절두산.

양헌수 부대의 덕진진 상륙작전을 거론하다가 얘기가 정족산성 전투까지 번지게 되었다. 어떻든 이 야간 도해작전의 성공은 朝·佛전쟁(병인양요)에서 결정적 勝因(승인)이 되었다.

덕진진은 辛未洋擾(신미양요) 때 로저스 제독이 이끄는 美 극동함대와 치열한 포격전을 벌인 현장이다. 그러나 그 직후, 덕진진은 초지진에 상륙해 北上한 美 해병대에 의해 점령당하고 말았다. 이때 성첩과 문루가 모두 파괴되었는데, 1976년 복원되었다.

덕진진 남단 덕진돈대에는 아직도 「덕진진 경고비」가 서 있다. 고종 4년(1867)에 건립된 것이다. 비면에는 「海門防守他國船愼勿過」(해문방수타국선신물과)라 쓰여 있다. 「바다의 관문을 지키고 있으므로 외국 배는 통과할 수 없다」는 뜻이다. 결연한 쇄국의 의지를 담고 있는 이 경고비에는 우측 상단부에 탄흔이 남아 있다.

덕진진을 둘러보고 다시 해안도로를 따라 1km쯤 北上하여 廣城堡(광성보) 앞에 이르렀지만, 점심식사부터 챙겨야 했다. 광성보에서 해안순환도로를 타고 다시 1km쯤 北上하여 「돈대회식당」이란 간판이 붙은 조그마한 음식점 앞에 승용차를 세웠다. 유리창 너머로 식당 안을 들여다보니 손님들이 식탁 5개 전부를 차지하고 있었다. 이런 모습의 식당을 선택하면 음식맛은 거의 틀림없다.

강화도에 오기만 하면 수박 냄새처럼 향기 짙은 밴댕이회가 그리워진다. 그러나 밴댕이의 제철은 5월이다. 필자와 朴군은 우럭회와 매운탕을 주문했다. 주인 아주머니의 솜씨가 짭짤했다. 2인의 식사대는 합계 2만원이었다(돈대회식당 전화 032-937-8872).

점심식사 후 해안순환도로를 500m쯤 남진해 광성보 주차장으로 되돌아왔다. 고려 고종 때(1232) 몽골군의 예봉을 피해 강화도로 천도하면서 흙과 돌을 섞어 축성했다. 조선 光海君 10년(1618) 바깥 성벽을 보수했고, 효종 9년(1658) 광성보를 설치했다. 완전한 석성으로 개축한 것은 1745년으로 이때 성문인 按海樓(안해루)가 건립되었다.

1871년 6월10~11일에 전개된 광성보 전투는 신미양요의 최대 격전지였다. 먼저 신미양요의 배경을 짚어볼 필요가 있을 것 같다.


辛未洋擾의 발발 배경

1866년 7월, 미국의 무장상선 「제너럴 셔먼」號가 대동강을 타고 평양에 진입한 후 통상을 요구하다가 거절당하자 조선인 관리를 감금하고 발포하는 등 무력행사를 감행했다. 이에 분격한 평양 관민들은 배를 소각하고 선원 전원을 살해했다. 이것이 「제너럴 셔먼號 사건」이다.

셔먼號 사건이 발발하자 미국 측은 페리 제독이 무력으로 일본을 개항시킨 것과 마찬가지로 조선을 위압시켜 통상조약을 체결하기 위해 조선에 대한 무력 침공을 결정했다.

1871년 5월16일, 미국의 아시아함대 사령관 로저스 제독은 5척의 군함과 1230명의 병력을 이끌고 일본 나가사키港을 출항했다. 5월21일에는 인천 앞바다에 나타나 통상조약 체결을 위한 회담을 조선 측에 요구했다. 조선 측에서 아무런 응답이 없자 미국 측은 측량을 구실로 강화해협 어귀인 손돌목(덕진진의 對岸) 방면으로 진출했다.

병인양요 이후 강화해협 수비부대는 路引(노인: 통행증) 없이 통과하는 선박을 포격하라는 명령을 받고 있었다. 美 함대가 손돌목을 지나 광성진 방면으로 진출하자 강화도 연안에 위치한 초지진·덕진진·광성보·德浦鎭(덕포진: 광성보 對岸) 등 여러 포대에서 일제히 포격을 개시했다.

그러나 화포의 성능이 좋지 못하고 사정거리가 짧아 대부분의 포탄은 美 군함에 미치지 못했다. 미국 함대는 즉각 응사하면서 전진하려 했지만, 전함 1척이 암초에 부딪혀 파손되고, 부상병이 발생하자 맹렬한 포격을 가해 연안 조선 포대를 손상시킨 후 일단 퇴각했다.

피아의 포격전으로 협상의 여지는 사라졌다. 조선 측은 연해지역에 계엄을 선포하고, 각종 무기 및 식량을 강화도에 증강 배치했다. 미국 측은 「조선군의 선제포격을 美 국기에 대한 모독으로 간주한다」면서 상륙전 전개를 결정했다.
신미양요 당시 미군의 포로가 된 조선군.


廣城堡 전투

1871년 6월10일, 美 함대는 강화해협에 다시 진입해 초지진을 맹포격하고 450명의 해병대를 상륙시켜 포대를 점령했다. 이날 밤 조선군은 초지진을 야습했지만, 미군의 우세한 화력을 당해내지 못하고 후퇴했다. 미군은 6월11일 초지진을 출발해 덕진진 방면으로 진격했다. 함포사격과 해병부대의 공격을 받은 덕진진은 쉽게 붕괴되었다. 미군은 다시 북상해 廣城堡(광성보) 공격에 나섰다.

광성보에는 巡撫中軍(순무중군) 魚在淵(어재연)이 지휘하는 300여 명의 병력이 주둔하고 있었다. 6월11일 오후 1시경, 킴벌레이 중령이 지휘하는 美 해병대 450명은 광성진을 포위한 뒤, 함포와 박격포의 지원사격을 받으며 공격을 개시했다.

포격을 받은 지 2시간이 못 돼 광성진의 조선군 포대는 침묵했고, 광성보의 보루도 거의 파괴되었다. 이에 미군은 파괴된 성벽을 넘어 진내로 돌입했다. 이때 선두에서 지휘하던 메키 중위가 조선군의 사격을 받아 치명상을 입었다. 이후 양군 사이엔 백병전이 전개되었다. 조선군의 도검은 강철로 만든 미군 총검과 부딪히기만 하면 활처럼 휘어졌다.

탄약이 떨어지고 병기를 잃은 조선군 병사들은 돌을 던지면서 끝까지 항전했다. 전세가 결정적으로 기울자 잔여 병력은 투항을 거부하고 불속에 뛰어들거나 바다에 몸을 던져 자결했다.

우리 측 기록에는 이 전투에서 어재연 이하 장교 5명을 포함한 53명이 전사하고, 20여 명이 부상한 것으로 되어 있다. 미군 측 기록에 따르면 미군은 전사자 3명과 부상자 10여 명이었고, 조선군은 전사자 100여 명, 익사자 100여 명, 부상 포로 20명으로 되어 있다.

미군은 전투에서 승리했지만, 조선군의 결사적 저항을 보고 서울까지의 무력 침공은 불가능함을 깨달았다. 광성보를 점령한 그날 밤, 미군은 초지진으로 철수했고, 이튿날 상륙부대 전원은 초지진마저 포기하고 귀함, 강화도 해역에서 물러났다.

미군은 조선군 부상 포로들의 송환을 미끼로 삼아 富平(부평) 앞바다에서 재차 협상을 시도했지만, 조선 측은 강경하게 거부했다. 결국, 로저스 함대는 조선군 포로들을 석방하고 7월3일 떠났다.

광성보를 둘러본 후 해안순환도로를 다시 20여 리 북상하여 강화역사관에 들렀다. 2층의 제4전시실에 근대 이후 강화도의 전쟁사 관련 자료·기록화·무기류 등이 전시되어 있다.
신미양요 당시 초지진 포대를 점령한 美 해병대.


연무당, 강화도조약 맺은 현장
신미양요 당시의 조선군 화포. 조준사격이 어렵고 사정거리도 짧았다.

강화역사관 뒤편이 甲串墩臺(갑곶돈대)이다. 갑곶돈대는 숙종 5년(1679)에 축조했다. 병인양요 때 프랑스군은 바로 이곳에 상륙했고, 이곳을 교두보로 삼아 강화읍성과 對岸의 文殊山城(문수산성: 김포시 월곶면)을 점령했다. 갑곶돈대에서 보면 강화해협에 걸린 新강화대교와 강화대교 너머로 문수산성이 마주 보인다.

갑곶돈대에서 나와 48번 국도를 10리쯤 달려 강화읍 중심가에 위치한 高麗宮址(고려궁지)로 갔다. 고려가 몽골군의 침략을 받고 항전하던 39년간 궁궐로 삼았던 곳이다. 조선조 때는 이곳을 강화유수의 관아로 삼았다. 경내에 外奎章閣(외규장각)이 있다. 병인양요 때 프랑스군은 바로 이곳에서 외규장각 문서를 약탈해 갔다.

고려궁 터를 나와 다시 48번 국도를 타고 강화읍성 西門 앞에 차를 세웠다. 서문 건너편 빈 터에 「연무당」이라 쓰인 표석이 세워져 있다. 강화부 군사들이 훈련을 하던 곳이다. 연무당이 바로 일본과 강화도조약이라는 불평등 조약을 맺은 현장이다. 그렇다면 강화도조약 체결 전 국내 사정부터 대충 살펴볼 필요가 있다.


개항 직전의 국내사정

1863년 12월, 조선에서는 「강화도령」 哲宗(철종)이 세상을 뜨고, 12세에 불과한 홍안의 소년이 어느 날 갑자기 왕위에 올랐다. 그가 조선조 제26대 임금 고종이다. 고종은 英祖의 현손인 흥선군 李昰應(이하응)의 아들이다.

고종 즉위 이후 10년간 정권을 틀어쥔 사람은 興宣大院君(흥선대원군: 이하 「대원군」으로 약칭함)으로 격상된 이하응이었다. 趙대비의 垂簾聽政(수렴청정)이 3년간 시행되었다고 하지만, 이미 실권은 대원군에게 넘어가 있었다. 대원군의 시정 목표는 그동안 누적된 폐정을 발본색원하는 것이었다. 특히 국가와 왕실의 위엄을 바로잡는 일에 적극적이었다.

대원군의 집권 전에 조선의 왕권은 安東 金氏의 勢道(세도)에 눌려 크게 추락해 있었다. 또한 西學이 전래되어 주자학 유일주의의 사회가 크게 동요하는 가운데, 정국의 파행이 계속되었다. 특히 田政(전정)·軍政(군정)·還穀(환곡) 등 三政이 크게 문란했다.

대원군의 내정개혁은 볼 만했다. 그동안 왕권을 추락시켜 온 외척세력(安東 金氏)을 밀어내고, 왕실의 권위를 세우려 했다. 인물만 괜찮다면 黨色(당색)과 地緣(지연)을 넘어 등용했다. 왕권을 능가했던 비변사의 기능을 축소하는 대신에 의정부와 삼군부의 기능을 부활시켰다. 부패한 유림들의 소굴로 변해 있었던 서원의 철폐령을 내려 전국 600여 개의 서원 중 47개소만 남겼다.

토지대장에 올리지 않은 땅인 陳田(진전)과 漏稅結(누세결)을 색출하고, 토호들의 토지겸병을 금지했다. 軍政에서도 常民에게만 부과해 온 軍布(군포)를 양반에게까지 확대해 징수했다.

그러나 임진왜란 때 불타 버린 뒤 270여 년 방치되어 왔던 조선왕조의 정궁인 景福宮(경복궁)을 중건하면서 대원군의 內治에 흠이 생기기 시작했다. 대원군은 『본채가 없이 곁방살이를 하다니, 나라와 임금의 체면이 말이 되느냐』면서 국민들에게 노동력과 재력의 제공을 독려했다. 재화를 납부하는 사람에게는 벼슬과 포상을 내리겠다고 해 매관매직의 풍습이 되살아나고 「願納錢(원납전)」이 생겼다. 말이 자원해서 바치는 願納錢이지, 실은 원성이 자자한 「怨納錢」이 되고 말았다.

중건 경비가 모자란다고 「結頭錢(결두전)」이라 하여 단위면적 1結당 100文의 세금을 부과하고, 도성 출입자에게 통행세를 받아냈다. 常平通寶(상평통보)의 액면가 100배에 달하는 「當百錢(당백전)」이란 이름의 惡貨(악화)를 발행함으로써 물가를 치솟게 했다. 경복궁은 이같이 국민경제에 심한 압박을 가한 가운데 착공한 지 2년 만인 고종 5년(1868) 7월에 완공되었다.

경복궁의 중건은 나라의 正宮이 270여 년간 방치되었던 사정 등을 감안한다면 이해될 수 있는 대목이 전혀 없는 것은 아니었다. 어떻든 경복궁의 중건을 제외한다면 대원군의 內治는 후세 역사가들에게 비교적 후한 평가를 받았다.

그러나 그의 對外정책에 대한 역사가들의 평가는 매우 낮다. 백암 박은식은 「韓國痛史(한국통사)」에서 다음과 같이 평했다.

<대원군의 용기와 결단성은 높이 평가할 만하다. 그러나 해외사정에 대한 無知와 그릇된 세계정세 판단으로 역사의 물줄기를 거스르며 나라의 정책방향을 이끌어 간 것은 더할 수 없는 실책이다. 참으로 애석하다>

이제, 1875년 운양호 사건의 도발에 이르는 일본의 움직임을 살펴볼 차례다. 사쓰마·조슈를 중심으로 하는 到幕派(도막파)는 1867년 12월 도쿠가와 막부 체제를 종식시키는 王政復古(왕정복고)의 쿠데타를 감행했다. 다음해인 1868년 1월 일본의 新정부는 외교권의 장악을 선언했다.


書契 문제의 발생

그러나 에도(江戶)막부 시대에 선린우호관계를 맺어 온 조선과의 교섭에 관해서는 종전처럼 쓰시마(對馬)藩이 담당하기로 했다. 동년 4월의 에도 開城(개성)에 이어, 9월에는 메이지(明治)로 改元했다. 일본 정부의 명령을 받은 대마藩은 조선에 왕정복고를 알리는 사절을 파견했다. 12월에 對馬藩 사절이 지참했던 외교문서(書契·서계)는 종전의 형식을 일방적으로 바꾼 것이었기 때문에 조선 측은 수취를 거부했다. 이른바 書契 문제의 발생이다.

書契는 「일본국 左近衛少將(좌근위소장) 對馬守 平朝臣義達」로부터 「조선국 禮曺參判(예조참판: 종2품·현재의 외무부 차관)公 각하」에게 보낸 것으로서, 직전에 송부된 예조참의(정3품 당상관) 앞 書契와 함께 「皇(황)」·「勅(칙)」의 문자를 사용해 왕정복고의 일을 통고하는 내용으로 되어 있었다.

조선 측이 문제 삼은 것은 宗氏의 官位가 종래의 「對馬州 大守拾遺(대수습유) 平某」에서 상향조정되는 한편, 조선 측에의 경칭이 「大人」에서 「公」으로 격하된데다 「皇」·「勅」의 문자가 사용된 것 등이다.

이것들은 상호 對等性(대등성)을 손상하지 않도록 세심한 주의를 기울여 온 도쿠가와 막부 시절의 書契와는 사뭇 달랐다. 즉, 「皇」·「勅」이란 문자가 조선 국왕에 대한 일본 천황의 優位(우위)를 뜻하는 것이었던 만큼 조선 측이 접수할 수 없었던 것이다. 1869년 외무관원 미야모토(宮本小一)가 정리한 「朝鮮論(조선론)」에는 다음과 같이 쓰여 있다.

<조선국에 御一新(어일신: 明治維新)의 일을 報知(보지)했지만, 흔쾌히 접수하지 않았다. 또한 그 답서도 보내지 않고 因循(인순)했다. 그 까닭을 들어본즉 前 막부와 동등한 交禮(교례)를 했는데, 이제 天朝(천조: 일본을 의미함)와 교제할 때는 막부의 장군은 천황의 신하인 만큼 (막부 시절에 비해 조선은) 2~3等 지위가 떨어질 수밖에 없다. 따라서 이미 교류하는 宗氏와 교제하고, 일본의 國變(국변)에 關涉(관섭)하지 않는 방식이, 그 나라 王號(왕호)에 관련해서도 좋은 방법이라는 說이 있다고 들었다>

일본의 明治정부가 「皇」·「勅」이 들어간 書契를 보낸 것이나 宗씨의 官位를 일방적으로 인상한 것은 외교관례를 무시하는 것이었다. 대마도주 스스로도 이같은 내용으로는 조선 측이 받아들이지 않을 것을 예상하고, 「성공하지 못할 경우에는 藩(번)의 존망이 걸릴 것이니 각오해 두라」는 말을 번내에 미리 公知시키고 있었다. 維新정부의 이러한 자세는 도대체 어디에 기초한 것일까.


虛構에 바탕한 역사인식

조선과의 교섭을 命(명)받은 대마도주 소오(宗義達)가 1868년 4월에 제출한 上書는 維新정부에 영합하기 위해, 「中世 이래 대등한 외교」가 일본의 국위를 실추시켰다면서 다음과 같이 술회하고 있다.

<中古 이래 양국의 교제는 모두 막부가 상대했는데, 이제는 제도를 고쳐 조정 直交(직교)를 함에 있어 처음부터 名分(명분)과 條理(조리)를 바르게 하고…>

이와 같이 明治정부에 있어서 조선 문제의 핵심은 소위 「조정 直交」의 실현이었다. 즉, 막부 시절의 對等외교를 고쳐서 「名分과 條理」에 맞추자는 것이었다. 천황이 외교를 담당하게 된 이상, 「古代처럼 조선은 천황에게 복속하는 것」이 바른 모습이라는 억지였다.

한반도의 古代 국가들이 「일본 천황에게 복속했다」는 것은 물론 역사적 사실이 아니다. 그렇게 기록한 것은 韓·日관계사에 관한 한 픽션에 불과한 「古事記」와 「日本書紀」뿐이다. 이런 점에서 明治일본의 對조선 정책은 역사적 虛構(허구)에 바탕하고 있었다. 다음은 앞에서 거론한 미야모토(宮本小一)의 「朝鮮論」의 한 구절이다.

<왕정복고의 大號令(대호령)이 천황 폐하로부터 나온 이상, 조선은 옛날처럼 속국으로 되고, 藩臣(번신)의 예를 취하지 않으면 안 된다. 적절하고 신속하게 皇使(황사)를 파견해 그 무례를 꾸짖어 入貢(입공)시켜야 한다>

참으로 오만불손한 교섭태도였다. 일본의 主權者(주권자)가 막부의 장군에서 천황으로 바뀌었으니 막부의 장군과 對等외교를 해온 조선 국왕은 천황의 신하가 되어야 한다는 것은 非논리적이다. 막부 시절의 천황은 祭祀(제사)나 주관하는 존재였지 정치권력은 완전히 박탈당한 존재였다. 당시 일본인 대부분은 천황이 존재하는 것조차 몰랐다. 조선 국왕이 막부지배下의 일본과 통교하면서 허수아비(천황)를 상대하지 않은 것은 당연한 일이었다.

또한 明治정부의 중추에 있으면서 조선외교를 주도했던 조슈번 출신의 參議(참의) 기도 다카요시(木戶孝允)는 대마번의 사절이 출발한 직후, 書契의 收取가 거부되기 전인 12월14일자 일기에 다음과 같이 썼다.

<빨리 천하의 방향을 하나로 정하고, 사절을 조선에 파견해 그 무례를 묻고, 만약 불복할 때는 죄를 물어 그 땅을 공격하고, 크게는 神州(신주: 일본)의 위엄을 신장하는 것을 원한다>


이와쿠라 사절단의 訪美

여기에서 기도 다카요시가 「무례」라고 말한 것은 결코 書契의 수취를 거부당했기 때문이 아니다. 원래 천황에의 조공을 태만히 하고, 막부와 대등외교를 해온 것 자체가 무례하고 不逞(불령)하다는 뜻이다. 조선 측이 이런 書契의 文面에 태도를 경화시킨 것은 당연한 일이었다.

書契 문제가 교착상태에 빠진 중에 일본 정부內에서는 외무성이 對조선 외교권을 對馬로부터 인수해 「皇使」, 즉 「천황이 직접 사절을 파견해야 한다」는 의견이 일어났다.

황사 즉각 파견안에 대해서는 청국과의 교섭 해결 후에 파견해야 한다는 淸·日교섭 先行案이 채택되어, 1870년 8월 야나기하라(柳原前光)가 청국에 파견되었지만, 이 淸·日 교섭기간 중의 임시조치로서 「政府對等論(정부대등론)」에 기반하여 일본 외무성은 관원 요시오카(吉岡弘毅)를 조선에 파견했다.

요시오카가 지참한 外務卿(외무경) 명의의 書契에는 조선 측을 자극할 만한 문자를 사용하지 않았다. 그러나 「정부와 정부의 교섭이라면 對等해도 괜찮다」는 정부대등론 자체가 조선 국왕과 천황 사이에는 대등한 관계가 성립될 수 없다는 속셈을 깔고 있었던 것이다.

이 교섭도, 조선 측이 일본 측의 속셈을 이미 간파하고 있었던 만큼 진척이 될 리 없었다. 이러던 1871년 7월에 淸日수호조규가 성립되고, 廢藩置縣(폐번치현)에 의해 대마번이 폐지되면서 또다시 「朝廷直交의 원칙」에 바탕한 주장이 크게 대두했다. 그러나 동년 11월, 이와쿠라(岩倉具視) 사절단이 미국으로 출발하기 전에 對조선 교섭의 「凍結(동결)」 방침을 결정했다. 이와쿠라 사절단에 首席參議(수석참의) 사이고 다카모리를 제외한 明治정부의 實勢가 모두 참가했기 때문이다.

이 사절단은 左大臣 이와쿠라 도모미가 正使, 기도 다카요시·오쿠보 도시미치·이토 히로부미 등 명치유신 주체세력인 조슈번과 사쓰마번 실력자들이 副使(부사)로 참여했다. 新정부 핵심요원 50명이 참가한 대규모 사절단이었다. 이들은 약 2년에 걸쳐 歐美 여러 나라를 찾아가 선진제도와 문물을 견학했다.
1872년 1월 샌프란시스코에서 촬영된 이와쿠라 사절단. 왼쪽부터 기도 다카요시, (한 사람 건너) 이와쿠라 도모미, 이토 히로부미, 오쿠보 도시미치.


征韓논쟁

이와쿠라 사절단의 귀국이 당초 예정보다 크게 지연된 가운데 「留守(유수) 정부」에서 조선에의 사절파견 문제가 대두했다. 부산 왜관의 館門에 붙여진 조선 측의 표찰이 일본을 모욕했다는 외무성의 보고가 계기가 되었다. 표찰의 내용은 다음과 같았다.

<그들은 서양 오랑캐의 제도를 받아들이고도 부끄러워하지 않으며, 자신들의 모습을 바꾸고, 풍속을 바꿨다. 이들을 일본인이라 할 수 없다. 우리 땅에 그들이 왕래하는 것을 허락해서는 안 된다>

각의에서 일본인 보호를 위해 군함을 파견하자는 외무성의 요청에 이어 參議 이타가키 다이스케(板垣退助: 도사藩 출신)는 우선 1개 대대를 파견하자고 구체안을 제시했다. 그러나 사이고는 반대했다. 일본인 보호도 중요하지만, 갑자기 군대를 보내면 조선을 자극해 최악의 사태가 벌어질 수 있다고 했다.

사이고의 주장은 『우선 사절을 보내 公理公道로써 교섭에 임해야 한다』는 것이었다. 또한 『이제껏 하급관리에게 일을 맡겼기 때문에 실패했으니, 이번에는 전권대사를 보내자』고 제안했다. 이에 參議 오쿠마가 반대했다.

『전권사절을 보내더라도 일이 잘 해결되리라는 보장은 없고, 전쟁이 벌어질 수도 있다. 일본의 현재 재정 상태로는 전비를 조달할 수 없다』

參議 에토 신페이(江藤新平)가 오쿠마를 질책했다.

『돈이 없다는 말만 되풀이해서야 되겠는가. 재정은 대장성 담당 참의인 오쿠마의 책임이 아닌가』

오쿠마는 침묵했다. 그가 비록 같은 참의의 반열에 있었다고는 하지만, 「維新3傑」 중 제1인자로 꼽히는 사이고나 막부 타도를 위한 무진전쟁에서 도사藩兵을 이끈 歷戰(역전)의 武骨(무골) 이타가키에게 맞설 처지가 아니었기 때문이다. 이로써 이타가키의 파병안과 사이고의 전권대사 파견안 중 하나를 선택해야 하는 상황이 되었다. 이에 사이고는 이타가키에게 여러 차례 편지를 보내 협조를 요청했다.
明治 신정부 각의에서의 征韓논쟁을 표현한 기록화. 일어서서 테이블을 치며 발언하는 사람이 사이고 다카모리. 맞은편에 앉아있는 사람은 오른쪽부터 기도 다카요시, 이와쿠라 도모미, 산조 사네토미.


사이고의 「皇使 파견론」

8월17일자(1873년) 편지에서 사이고는, 「전쟁은 제2단계」가 되게 하고 우선 사절을 파견해 「隣交(인교)를 薄(박)하게 한 일을 꾸짖고, 또한 이때까지의 不遜(불손)을 바르게 고쳐야」 할 것이지만, 그렇게 하면 조선 측은 「사절을 暴殺(폭살)시킬 것」이기 때문에, 「천하의 사람들이 모두 (조선이) 정토되어야 할 죄」를 알게 된다. 이어 사이고는 자신의 주장에 대해 「내란을 간절히 바라는 마음을 밖으로 돌려 나라를 興하게 하는 遠略(원략)」이라고 강조했다.

어떻든 이타가키의 협조도 있어서 8월 중순 留守정부의 각의에서는 사이고의 皇使 파견안이 가결되었다. 그러나 9월 중순 이와쿠라 사절단이 귀국한 후 征韓論은 다시 정쟁의 초점으로 부상했다.

10월14·15일에 개최된 각의에서 오쿠보는 사절 파견 연기론을 주장하면서 사이고의 皇使 파견안을 정면에서 비판했다.

그러나 각의에서는 사이고의 皇使 파견안이 가결되어 「논쟁」의 승자는 사이고인 듯이 보였다. 그러나 이후 오쿠보의 반격이 시작되었다. 오쿠보는 각의 도중에 양론을 절충하지 못하고 혼절해버린 태정대신(수상) 산조 사네토미(三條實美)를 대신해 태정대신대리가 된 이와쿠라 도모미와 모의, 뒤집기에 성공했다. 이와쿠라가 각의에서의 결정과는 반대인 사절 파견 연기를 상주해 메이지 천황의 재가를 받아냈던 것이다.

당초 정한론자였던 參議 기도 다카요시도 歐美 제국을 순방한 후에는 동행했던 이와쿠라·오쿠보·이토에 동조해 內治 우선派로 돌아섰다. 만약 사이고도 이와쿠라 사절단에 참여해 넓은 세상을 보았더라면 「정한론」에서 한 발 물러섰을지 모른다. 사이고의 「皇使 파견론」은 征韓을 위한 시빗거리를 마련하려는 속셈에 다름 아니었다.

어떻든 이런 뒤집기에 격분한 수석참의 사이고가 사표를 제출했다. 이타가키·에토·고토(後藤象二郞)·소에지마(副島種臣) 등 4參議가 사이고를 뒤따라 下野, 오쿠보를 중심으로 하는 내치派 정권이 확립됨으로써 「明治 6년의 정변」이 일응 완결되었다.


이른바 「名分과 條理」

사이고와 오쿠보는 어릴 때부터 한마을에서 살았던 竹馬故友(죽마고우)이며, 막부 타도에 생사를 함께했던 동지였다. 사이고는 전통적인 사무라이 기질을 지닌 武人이었던 반면에 오쿠보는 비전 제시와 실행에 능숙한 관료형 인물이었다.

정한론을 둘러싼 사이고와 오쿠보의 대립은 막부 타도 후 일자리를 잃게 된 士族(舊사무라이) 계급과 명치유신 후 새로 등장한 관료계급 사이의 대립이었다. 사이고는 士族 계급의 이익을 대변해 다음과 같이 주장했다.

『세상 사람의 논란이 되어 입을 닫고 있지만, 참으로 攘夷派 士族(舊사무라이) 등이 나에게 기대하는 문제의 핵심이 「名分과 條理」를 바르게 하는 것이라고 알고 있다. 그것이야말로 「到幕(도막)의 根元」이며 「御一新의 기본」이라고 해야 할 것이다. 그러지 않고서는 「물색만 좋은 到幕」에 지나지 않는다. 維新을 위해 목숨을 바친 동지 및 부하들에게 볼 면목이 없다.

「명분과 조리」라는 것은 「메이지 初年, 대마번주의 上書에 강조된 대로 왕정복고의 이념에 바탕해 皇威(황위)를 빛나게 하고, 천황 중심의 國體가 폐지되었던 이래의 잘못된 상태를 개혁해 國勢를 만회하는 것에 다름 아니다. 그것은, 조선 문제에 관한 한 전형적으로 시현되어야 할 것이다』

사이고는 이어 조선에의 사절 파견에 대해 다음 요지로 술회했다.

『중요한 것은 維新의 이념에 바탕한 日·韓관계, 조정 直交의 확립이고, 「최초」로부터 단순한 「친목」을 구하는 것이 아니라 「方略(방략)」이 있어야 하고, 그같은 「시작」을 변질시켜 「因循(인순)의 論」에 빠져서는 아니되고, 「최초의 御趣意(어취의: 천황의 뜻)에 따라서 단호하게 條理를 관철하지 않으면 안 된다』

사이고는 조선 측이 「조리」를 이해해, 평화적으로 해결 가능하면 더할 나위가 없겠지만, 그렇지 않다면 힘을 다하여 「正義」를 관철하지 않을 수 없다고 했다. 조리를 관철하는 것이 중요한 것으로서 그것이 평화적인가, 무력적인가 하는 것은 사이고에 있어 제2의적인 문제였다는 것이다.


대원군의 실각
덕진진의 남장포대.

사이고의 주장이 「명분 조리」를 관철하는 것에 대하여 오쿠보는 「義(의)」라든가 「恥(치)」 등의 관념에 바탕한 외교를 비판했다.

『무릇 국가를 經略(경략)하고 그 강토와 인민을 保守하는 데에는 遠謀深慮(원모심려)가 없어서는 안 된다. 따라서 進取退守(진취퇴수)는 반드시 機(기)를 보고 움직이고, 그 不可를 보고 멈춘다. 부끄럽다고 해도 참고, 義가 있다 해도 取하지 않는다. 그것은 그 重輕을 재고, 時勢를 살펴 大期하는 까닭이다』

萬國公法에 입각한 파워 폴리틱스의 관점에 서서 외교는 「輕重」을 재고, 시세를 생각하고, 소위 「원모심려」에 바탕해 실행해야 한다는 것이 오쿠보를 중심으로 한 내치派의 주장이었다. 조선에의 압력도 내치를 정비하고, 군비를 증강하며, 열강과의 관계를 조정해 성공의 전망이 보이는 상황에서 착수해야 한다는 것이었다.

일본의 정변과 거의 때를 같이하여 조선에서도 정변이 일어났다. 고종의 아버지이며 攝政(섭정)으로서 10년간 정권을 장악해 오던 흥선대원군이 하야하고, 왕비 閔씨 일족을 중심으로 하는 閔씨 정권이 성립되었던 것이다.

대원군의 정책이라면 뭐든 뒤집어버리려 했던 閔씨 정권의 출범으로 교섭은 진척의 조짐을 보이는 듯했다. 1875년 들어 오쿠보 정권은 새로운 외무경 서계를 지닌 모리야마 시게루(森山茂)를 조선에 파견했다. 그러나 「皇上」 등의 문자가 들어간 서계에 대해 조선 정부는 접수할 의사가 없었다. 더욱이 모리야마의 양복 착용 문제 등으로 새로운 분규가 발생했다.


雲揚號의 도발

일본 측은 군함 雲揚號(운양호)를 부산에 입항시켜 무력시위를 했지만, 조선측은 꿈쩍도 하지 않았다. 일단 나가사키(長崎)로 돌아간 후 또다시 한반도 근해에 출동했던 운양호는 1875년 9월20일 강화도 초지진에 접근했다. 운양호는 그해 5~6월 남해안과 동해안을 떠돌며 시위포격을 하는 등 조선 軍民을 불안하게 했던 일본 군함(春日號·운양호·제2정묘호) 중 하나였다.

운양호는 흰 천에 빨간색 동그라미를 그린 깃발을 달고 있었다. 그러나 초지진 수비병들이 이 배의 정체를 알 까닭이 없었다. 더욱이 병인양요·신미양요를 겪은 뒤여서 잔뜩 긴장한 상태였다. 설사 일본 배임을 알았다 해도 서울의 코앞에 무단 침범해 온 만큼 그냥 놔둘 수 없었다.

초지진 포대는 다가오는 운양호에 포격을 가했다. 그러자 상대쪽에서는 기다렸다는 듯 함포사격을 가해 왔다. 운양호는 초지진 포대로부터 포격을 받고 응전한 뒤 남하해 인천 앞바다에 떠있는 永宗島(영종도)에 육전대를 상륙시켜 영종진을 점령했다. 이들은 약탈과 방화를 감행한 뒤에야 물러났다.

결과는 조선군 전사자 35명, 부상자 및 포로 16명이었지만, 일본 측은 경상자 2명뿐이었다. 일본군은 영종도에서 대포 36문과 화승총 130정을 전리품으로 취득했다. 조선 측의 참패였다.

일본 정부는 「음료수를 구하려고 접근했는데 돌연 포격을 당했다」고 국내외에 선전했다. 하지만 강화도는 수도방위의 요충이며, 1866년과 1871년 프랑스 및 미국 함대에 점령당한 바 있어 그 방비가 더욱 강화되어 있었다. 따라서 강화도에 접근하면 유사한 사태를 초래할 것이라는 정황이 예측되었던 만큼 운양호의 강화해협 진입은 일본의 의도적인 도발이었다.

운양호의 출동 자체부터 조선 측을 위협하는 일이었다. 해군성은 이미 미국 함대가 1871년 강화도를 점령(辛未洋擾)한 후에 작성한 海圖(해도)를 양수하는 등 치밀한 전투 준비를 하고 초지진에 접근했던 것이다.

사건 발생이 전해지면 일본 국내에서는 개전론이 크게 고양되었다. 오쿠보 정권은 「問罪(문죄)」의 사절로서 正使(특명전권대신) 구로다 기요다카(黑田淸隆)와 副使 이노우에 가오루(井上馨)의 파견을 결정했다. 조슈 출신의 구로다는 막부 잔당의 최후 거점이었던 하코다테의 요새 五稜郭(오릉곽)을 포위해 항복을 받아낸 武骨이며, 후일(1884년) 제2대 총리대신이 되지만, 술 먹고 귀가한다고 바가지를 긁는 부인을 단칼에 베어 죽여 물의를 일으켰던 인물이다. 외교·재정통인 이노우에는 이토 히로부미와 평생 친구로서 조슈 인맥의 제3인자였다. 구로다와 이노우에는 1876년 2월 7척의 함대를 거느리고 강화도에 들어왔다.


『분하고 원통하지만…』

이들을 상대한 조선 측 관료는 접견대관 申櫶(신헌), 부관 尹滋承(윤자승)이었다. 신헌은 禁營大將(금영대장)·병조판서를 지냈고, 현직 판중추부사(종1품)였다. 문관 출신인 윤자승은 당시 오위도총부 부총관(종2품)이었다.

2월11일, 강화도 연무당에서 조선과 일본 간에 제1차 회담이 열렸다. 여기서 일본 측은 운양호 사건을 들어 조선이 일장기를 모독했다고 비난했다.

구로다는 『운양호가 중국의 牛莊(우장)으로 항해하던 도중 식수를 보급받기 위해 강화도 해역에 진입한 것』이라면서, 『운양호에 일장기가 게양되어 있음에도 불구하고 포격을 가한 것은 일본 국기에 대한 모독』이라고 주장했다.

신헌은 『비록 그 깃발이 일본 국기라 하더라도 해상 관문을 지키는 군사가 어찌 알고 있겠느냐』라고 응수했다. 그러나 애당초 시비를 걸 구실을 마련하기 위해 운양호를 강화도에 진입시킨 일본 측이었던 만큼 말이 통할 리 없었다.

구로다는 「일장기 모독」으로 일본 국내에서 정한론이 고조되고 있다고 협박했다. 이러는 가운데 강화해협에 들어온 일본 함대에서는 시도때도 없이 대포를 쏘아 조선 측 협상대표들을 위협했다. 이것은 1853년 페리 제독이 에도灣에 함대를 진입시켜 대포 발사 등의 해상시위를 한 뒤 美日화친조약(神奈川조약)을 끌어낸 수법을 그대로 흉내낸 것이었다. 기세에 눌린 조선 측은 일본 측의 요구에 끌려가는 판세였다.

이때 조선 조정에서는 講和(강화) 여부를 놓고 의논이 분분했다. 김병학·홍순목 등 대부분의 大臣들은 조약 체결에 반대했다. 그러나 우의정 朴珪壽(1807~1877)는 강화의 불가피성을 역설했다.

『삼천리 강토가 內守外攘(내수외양)의 방책을 다했던들, 조그마한 섬나라가 이처럼 감히 우리나라를 엿보고 공갈과 협박을 자행할 수 있겠는가. 분하고 원통하지만, 오늘의 조선 군대로는 일본 세력을 막을 수 없다. 일단 강화하자』
강화도조약이 체결된 연무당 주위를 둘러싼 일본군.


강화도조약의 체결
강화도조약 당시 조선 측 대표였던 申櫶.

진작에 국방을 강화하지 않고, 이제 감당할 능력도 없으면서 결과가 뻔한 싸움을 하자니 무슨 망발이냐는 질타였다. 이때 청국을 다녀온 李裕元(이유원)이 개항을 권고하는 청국의 총리아문대신 李鴻章(이홍장)의 서한을 전했다.

<조선이 일본과 조약을 체결하면 전쟁을 피할 수 있을 것이다. 만약 조선이 청국의 권고를 받아들이지 않을 경우, 장차 조선과 일본 간에 어떠한 일이 일어난다 해도 청국은 책임질 수 없다>

당시, 청국은 영국인 피살사건(1875년 2월21일)으로 영국과 단교 중이었는 데다 중국 서북부 지역의 내란에 토벌군 파견을 준비 중이었다. 따라서 한반도에서의 분쟁을 원치 않았다. 더욱이 러시아 남진을 고려할 때 조선과 일본 간의 조약을 굳이 저지할 필요가 없다고 판단했던 것이다.

결국, 조선조정은 강화 쪽으로 방침을 굳혔다. 1876년 2월21일, 조선 측 대표(신헌·윤자승)와 일본 측 대표(구로다·이노우에)는 연무당에서 朝日수호조규를 체결했다. 이를 「강화도조약」 또는 「병자수호조약」이라고 부른다. 그해 8월에는 위 조약에 의거해 수호조규 附錄(부록) 및 무역규칙이 성립되었다.

12개조로 구성된 朝日수호조규는 제1조에서 「조선국은 자주국으로서 일본과 평등한 권리를 보유한다」고 되어 있지만, 실태는 일본에 일방적으로 유리한 조약이었다. 그 내용을 보면 다음과 같다.

1)20개월 이내에 부산 이외 3개 항을 개항하고, 일본 상인의 거주·무역의 편리를 제공할 것(제4·5조)

2)일본은 조선의 연해·島嶼(도서)·암초 등을 자유로이 측량하고 海圖를 작성할 것(제7조)

3)일본은 조선이 지정한 항구에 領事(영사)를 파견하고, 조선에 거주하는 일본 상인의 범죄는 일본 관원이 심판할 것(제8·10조)

이 조약에서 조선을 「자주국」이라고 한 것은 조선에 대한 청국의 정치적 우월성을 부정함으로써 조선 침략을 용이하게 하려는 일본의 술책이었다. 그리고 조선이 3개 항을 개방하고 거류지를 제공한 데 비해 일본에겐 부담해야 할 의무가 하나도 없었다. 또한 연해 등을 자유로이 측량한다는 것은 조선의 항만과 요새에 대한 침략이었다.


준비 없는 근대화의 첫걸음

일본은 개항장에서 일본 화폐의 유통권을 확보해 금융 침투의 통로를 마련했다. 또한 수출입 상품에 대한 無관세를 명시해 조선이 국내시장을 보호하고 재정수입을 확대하는 수단을 배제했다. 특히 일방적인 領事(영사) 파견의 권리와 영사재판권은 일본 침략자가 조선에서 어떤 범죄 행동을 저지르더라도 조선의 사법권이 취체·단속이 불가능한 治外法權(치외법권)의 설정이었다.

이같은 불평등조약은 일본이 歐美 열강으로부터 당하면서 배운 수법을 이번에는 세계 조류에 無知한 이웃나라 조선에 써먹었던 결과였다. 따라서 강화도조약은 일본에는 준비된 정한론 실행의 출발점이었고, 조선에는 준비 없는 開港의 첫걸음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