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金庾信과 그의 시대(16)

정순태   |   2005-11-27 | hit 4937

金庾信과 그의 시대(16)

정순태


나이 50에 야전 사령관으로 활약

將(장)으로서 김유신은 인생 50~60대에 절정기를 맞는다. 오늘날보다 평균 수명이 훨씬 낮았을 신라 당시에 진골귀족의 나이 50이라면 고위 京職(경직)에 앉아 권력을 다투거나, 아니면 정치 2선에서 여생의 부귀나 누렸겠지만, 김유신은 국가 안보의 최일선에서 야전사령관으로 분투했다.

김유신은 押梁州(압량주:경북 경산) 軍主(군주; 군관구사령관)의 직책에 있던 선덕여왕 13년(644)에 관등이 한 단계 올라 제3위인 蘇判(소판)이 되었다. 그의 나이 50이었다. 이해 가을 9월, 그는 上將軍(상장군)이 되어 백제의 加兮城(가혜성; 지금의 거창) 등 7성을 공격하여 대승했다. 이로써 그는 낙동강의 水運(수운)을 再(재)개통하여 신라의 物流(물류)를 회복시키고, 다음 해 정월에 王京(왕경)으로 돌아왔다. 이 시기 羅濟(나제) 간 쟁탈의 요지는 낙동강 서안 지역인 경남 합천·거창 일대였다.

바로 그때 백제의 대군이 낙동강 상류의 買利浦城(매리포성)을 공격하자, 여왕은 다시 김유신에게 上州將軍(상주장군)을 제수하고 방어하도록 했다. 김유신은 가족들도 만나지 않은 채 출전하여 역공으로 백제병 2천명의 머리를 베었다. 3월에 개선한 그는 또다시 백제군이 서부 전선에 집결하고 있다는 급보를 접한다. 이번에도 그는 귀가하지도 못하고 서부전선으로 달려가 백제군을 물리쳤다.

이렇게 김유신은 불과 6~7개월 사이에 세 방면의 야전에 출전할 만큼 분망했다. 이것은 백제 義慈王(의자왕)이 全(전) 전선에 걸쳐 신라를 압박했다는 얘기다. 그러나 50대 답지 않은 체력과 지모를 지닌 김유신이 신라의 방패로 나섰다는 점이 의자왕의 불운이었다.

645년이라면 唐(당) 태종이 20년간이나 별러 오던 고구려 침략을 처음으로 감행했던 해였다. 신라는 백제와 교전 상태임에도 唐軍(당군)에 호응하여 3만병을 동원하여 고구려 南境(남경) 쪽에서 제2전선을 형성했다. 이때 신라군이 고구려 軍과 직접 교전했던 기록은 없지만, 이로 인해 신라 본국의 방어 태세가 허술해졌던 것 같다. 이 틈에 의자왕은 신라 서쪽 변경의 7개 城(성)을 공격하여 점령해버렸다.


舊 귀족세력의 반란 진압

신라는 守勢(수세)에 몰리고 있었다. 이런 외환 속에서 647년 서라벌에서 반란이 일어났다. 주모자는 舊(구) 귀족 세력을 대표하는 상대등 毗曇(비담)과 대아찬 廉宗(염종)이었다. 반란의 명분은 女主不能善理(여주불능선리), 즉 여왕은 정치를 잘할 수가 없다는 것이었다.

당 태종도 일찍이(643년) 신라가 보낸 請兵使(청병사)에게 말하기를, 『그대 나라가 여자를 왕으로 받들고 있으니, 이웃나라가 輕侮(경모)하는 것인데, 우리 황족 한 사람을 보내 그대 나라의 왕으로 삼는 것이 어떠냐?』면서 노골적인 탐욕을 드러낸 바 있었다. 비담 등은 이런 대내외적 정세를 교묘하게 이용하여 여왕에게 반기를 들었던 것이다.

반란군은 明活城(명활성)을 점거하여 본거지로 삼았다. 명활성은 지금의 경주 보문관광단지 바로 남쪽 산에 축조해 놓았던 王京의 外城(외성)이니까, 王城과는 불과 10여 리 거리다. 김유신이 이끄는 관군은 王城(왕성)인 月城(월성)에 진을 쳤다. 양군은 10일간이나 공방전을 벌였으나, 좀처럼 결판이 나지 않았다. 그러던 중 밤에 큰 별이 月城 쪽에 떨어졌다. 이에 비담은 반군의 기세를 돋우기 위해 점성술을 이용한 심리전을 전개한다.

『별이 떨어진 자리에는 반드시 피가 흐른다. 이는 여왕이 패전할 조짐이다』

이에 고무된 반군의 함성이 천지를 흔들었다. 여왕이 몹시 두려워하자, 김유신이 여왕을 뵙고 말했다.

『길흉에는 법칙이 없으니 오직 사람 하기에 달렸습니다. 德(덕)은 요사함을 이기는 것이니, 별의 변괴 따위는 가히 두려워할 것이 없습니다. 왕께서는 근심하지 마소서』

이어 김유신은 관군의 사기를 되살리기 위해 기상천외의 연극을 꾸민다. 허수아비를 만들어 불을 붙이고 그걸 연에 실어 하늘로 띄워 보냈던 것이다. 이로써 마치 떨어진 별이 하늘로 다시 올라가는 것처럼 보이게 했다. 그리고는 다음날 즉각 소문을 낸다.

『어젯밤에 별이 떨어졌다가 다시 하늘로 올라갔다』

점성술을 이용한 반란군 측의 先制(선제) 심리전에 역시 점성술로 대응했던 김유신의 수법은 그 방법론적인 면에서 매우 지혜롭다. 관군의 軍心(군심)을 다스린 그는 또한 백마를 잡아 별이 떨어진 자리에 제사를 지내면서 다음과 같이 기원했다.

『天道(천도)에는 陽(양)이 강하고 陰(음)이 부드러우며, 人道(인도)에는 임금이 높고 신하가 낮습니다. 만일 이 순서를 바꾸면 大亂(대란)이 일어나고 맙니다. 지금 비담의 도당이 신하로서 임금을 모해하며, 아랫사람으로서 윗사람을 범하니, 이는 이른바 亂臣賊子(난신적자)로서 사람과 신령이 미워할 일이요, 하늘과 땅이 용납하지 못할 일입니다. 지금 하늘이 이에 무심하여 도리어 별의 변괴를 王城에 보인 것이라면, 이는 臣이 믿을 수 없는 일이니 알 수 없는 바입니다. 하늘의 위엄으로서 인간이 소망하는 대로, 善을 善으로 여기고 惡을 惡으로 여기게 하여, 신령을 탓하는 일이 없게 하소서』

제사를 마친 후 김유신은 장졸들을 독려하여 분연히 돌격하니, 비담 등은 대패하여 도주했다. 김유신은 추격전을 전개하여 비담의 목을 베고 그 9족을 멸했는데, 이에 연좌되어 죽은 자가 30명에 달했다.

선덕여왕 말년의 반란은 신흥 귀족 세력과 舊 귀족 세력 사이의 헤게모니 쟁탈전이었다. 자녀를 두지 못한 선덕여왕이 병석에서 일어나지 못할 상황이었던 만큼 왕위 계승 문제를 둘러싼 실력자 간의 무력 대결이 벌어질 만도 했다. 그 결과는 선덕여왕의 4촌 동생 眞德女王(진덕여왕)의 후계를 반대하면서 자신이 왕위를 차지하려 했던 비담의 패망이었다. 진덕여왕의 왕위 계승은 김춘추의 즉위를 향한 징검다리가 된다.


大化改新 주체세력과의 관계 개선

「日本書紀(일본서기)」에 따르면 비담의 반란을 전후한 시기에 김춘추는 백제의 동맹국으로 배후에서 신라를 위협해 오던 왜국으로 건너가 있었다. 당시 왜국은 642년의 大化改新(대화개신)을 주도한 中大兄(나카노 오에; 뒷날의 天智天皇) 황자가 실권을 장악하고 있었다.

대화개신은 나카노 오에 皇子가 中臣鎌足(나카도미노 가마다리) 등과 합세하여 여자 천황 皇極(고교쿠)의 면전에서 집권자인 蘇我入鹿(소가 이루카)을 참살한 유혈 쿠데타였다. 이루카가 난도질당하자, 그의 아버지이며 막후 실력자였던 蘇我蝦夷(소가 에미시)는 이미 대세가 기울었음을 알고, 그의 아성 葛城部(갈성부)에 불을 질러 자결했다.

그때까지 왜국은 지역과 혈연을 기반으로 한 귀족들의 聯政(연정) 체제였다. 이들 가운데 최고의 권력을 휘두른 씨족이 百濟(백제) 木氏系(목씨계)인 蘇我(소아) 일족이었고, 천황은 허수아비 같은 존재였다. 대화개신의 쿠데타로 4代 1백년간 집권해 왔던 蘇我 일족은 완전 몰락했다.

그러면 김춘추가 권력 교체기의 왜국을 상대로 모험 외교를 감행했던 이유는 무엇일까? 그것은 백제의 고립을 겨냥하여 왜의 새 집권 세력과 우호 관계를 맺으려 했던 것으로 보인다. 「日本書紀」엔 이 때 김춘추의 모습에 대해 美姿顔 善談笑(미자안 선담소), 즉 용모가 훌륭하고 담소를 잘했다고 기록되어 있다.

왜의 임금을 天皇(천황)이라고 부르는 데 대해 오늘의 우리가 알레르기 반응을 보일 이유는 하나도 없다. 일찍이 聖德(쇼도쿠) 태자가 집권했던 시기(607년)에 여왕 推古(스이코)는 수 양제에게 보낸 국서에서 자신을 당당하게 天皇으로 칭했다.

『아침해 떠오르는 동쪽 나라의 천황이 해가 지는 서쪽 나라의 황제에게 소식을 전합니다. 그간 안녕하십니까?』

이런 허두로 시작되는 對隋(대수) 외교 문서의 작성을 주도한 쇼도쿠 태자는 오늘날 일본 민족주의의 상징적 인물로 손꼽히고 있지만, 따지고 보면 당시의 왜가 어느 정도로 국제 정세에 둔감했는지를 드러내는 사례이기도 하다. 이 같은 倭(왜)의 국서를 접한 수 양제는 벌컥 화를 내면서 『蠻夷(만이)의 書(서)가 무례하니 다시는 받지 말라』고 鴻月盧卿(홍려경:使臣 접대 관청의 長官)을 꾸짖었다.

이후 천황은 어디까지나 왜의 국내용 호칭이었고, 대외적으로 공인된 지위는 왜국왕이었다. 수·당으로부터 선진 문물을 받아들이는 일이 절실했던 왜로서는 중국의 조공책봉 체제에 들어가야만 그것이 가능했고, 그러려면 왜국왕이란 칭호를 감수해야만 했다.

그러니까 대륙과 陸接(육접)했던 우리 민족 국가의 군주가 황제나 천자의 칭호를 사용하지 못했다고 해서 오늘의 우리가 우리 민족사에 대해 열등감을 가질 필요도 없고, 바다 멀리 떨어져 살던 왜인이 그들 임금의 국내 호칭을 천황이라고 했다고 해서 기분 나빠할 까닭도 없다.

또한 중국이 황제국을 자처했다지만, 중국의 역사를 개관해보면 그것도 별로 자랑할 것이 없다. 중국인의 절대다수인 漢族(한족)은 실로 오랜 세월에 걸쳐 피눈물 나는 피식민지의 백성으로 살아 왔다.

중국의 중심 무대였던 양자강 이북 화북지역에서는 수·당 시대 직전까지 다섯 오랑캐(五胡) 민족의 16개국이 부침하면서 漢族을 지배했다. 이런 5호16국 시대의 대표적 왕조인 前秦(전진)은 티베트系 羌族(강족)의 국가였고, 後魏(후위)는 鮮卑族(선비족)이 세운 나라였다.

隋와 唐의 왕실은 漢族 출신으로 자처했지만, 그 혈통 속에는 鮮卑族과 狄人의 피가 짙게 흐르고 있던 이른바 胡漢 雜種(호한 잡종)이었다. 唐末(당말) 5代의 나라들도 거의 이민족 군벌 등이 중국 대륙을 분할하여 세운 나라들이었다.

그 후 漢族 국가인 北宋(북송)이 1백60년간 중원을 차지했지만, 거란족의 나라 遼(요)를 섬기며 영토 할양 등 온갖 수모를 받았고, 뒤이어 遼를 멸망시킨 여진족의 나라 金의 침략을 받아 양자강 이북을 빼앗기고 강남으로 쫓겨가 1백50년간 南宋(남송)으로 잔명을 겨우 이어갔다. 그런 南宋도 북방 초원에서 흥기한 칭기즈칸의 몽골족에게 계속 압박을 받아오다 그 손자인 쿠빌라이칸에게 멸망당하고 말았다. 몽골족의 정복왕조 元(원)은 민족 차별정책을 강력하게 시행하여 漢族을 최하위인 제4의 신분으로 강등시켜 유별나게 괄시했다.

그후 1백년 만에 漢族 비적 출신인 朱元璋(주원장)이 일어나 元을 漠北(막북)으로 내쫓고 中原을 되찾아 明을 세웠다. 이런 明은 2백여년 만에 다시 여진족(만주족)이 세운 淸(청)에 멸망당하고 만다. 淸은 중국을 3백년간 지배한 정복왕조였다.

이상이 중세 이래 중국의 역사로서 漢族은 동족 왕조보다 이민족 왕조의 지배를 훨씬 오랫동안 받아온 피압박 민족이었다. 이것이 오늘날 중국인민을 구성하는 민족의 수가 50개를 넘게 된 까닭이다. 漢族은 압도적인 인구수와 유목민족에 비해서는 월등한 문화로써 자신들을 지배했던 이민족을 다만 중국인의 범주에 넣어 왔을 따름이다.
<17편에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