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료실

金庾信과 그의 시대(19)

정순태   |   2005-11-29 | hit 4949

金庾信과 그의 시대(19)

정순태


유리한 地形을 선점하지 못한 까닭


신라군이 고구려를 칠 것처럼 북상했다가 갑자기 창 끝을 백제로 돌렸던 전략은 성공적이었다. 왜냐하면 김유신 軍의 진격을 막으러 나온 계백 軍의 규모가 5천에 불과했기 때문이다. 이같은 기만전술이 2백75년 후 고려 태조 王建(왕건)의 후삼국 통일 전쟁에서도 그대로 응용되었다는 점에서 그 전략적 탁월성을 의심할 필요는 없을 것 같다.

서기 935년 王建(왕건)의 고려군은 開京(개경)에서 남하하여 天安(천안)에다 전선사령부를 설치하고 여기서 후백제를 공격하려는 것처럼 陽動(양동)작전을 벌였다. 이에 후백제의 최고 실력자 神劍(신검)은 공주 방면의 금강 계선에 방어군을 집결시켜 고려군과 일대 결전을 전개하려고 했다.

그러나 고려군의 주력은 전격적으로 一利川(일리천:경북 구미시) 방면으로 남하하여 낙동강을 도하하려 했다. 이에 신검은 백제의 방어군을 황급히 낙동강 상류 西岸(서안) 방면으로 돌려 대적했으나, 병력의 열세에다 방어진지조차 구축하지 못한 상황에서 참패했다. 이것이 후삼국 통일에 있어 최후의 결전이 된 一利川 전투의 시말이다. 일리천 전투의 패전 후에 신검은 이렇다 할 접전 한번 해보지 못하고 후퇴를 거듭하다가 황산벌에서 그를 추격한 왕건에게 항복하고 말았다.

옥천-탄현-황산벌에 이르는 김유신 軍의 接敵移動路(접적이동로)의 현 위치도 아직 학계의 논란거리다. 김유신 軍이 大田(대전) 밑에 위치한 옥천까지 남하하지 않고 충북 진천에서 백제 영토로 바로 진격했다고 주장하는 등 여러 설이 난립해 있지만, 옥천을 공격개시점으로 보는 것이 학계의 다수 의견이다.

鄭永鎬(정영호) 박사의 「김유신의 백제 공격로 연구」에 따르면 신라군은 三年山城(보은군 보은읍 성주리)-山桂里 토성(옥천군 청성면 면사무소 건너편)-장군재(옥천군 청성면 소서리)-구진베루(옥천군 옥천읍 월전리)-郡西(옥천군 군서면)-馬山(마산:충남 금산)-炭峴(탄현)을 거쳐 황산벌로 진출했다. 나는 현지 답사를 통해 정영호 교수의 견해가 史實에 부합된다는 결론을 얻었다.

특히 炭峴의 현위치는 연구자들에 따라 구구각색이지만, 완주군 운주면의 西坪里(서평리)와 三巨里(삼거리) 사이에 있는 炭峙(탄치)로 보는 것이 합당한 것 같다. 탄치라면 임진왜란 때 전라병마절도사 權栗(권율)이 금산으로부터 전주로 침입하려던 왜군을 대파했던 梨峙(이치)와 10리 안팎 거리에 위치한 전략적 요충이다.

그러니까 김유신 軍은 대둔산(878m)과 천등산(707m) 사이의 골짜기를 타고 오늘날의 충남·전북의 경계 지대인 완주군 운주로 진군한 다음, 여기서 다시 북서쪽으로 진군하여 황산벌로 진출했던 것이다. 그러나 백제의 명장 階伯(계백)은 결단을 늦춘 의자왕의 우유부단 때문에 오늘날의 대둔산도립공원 일대의 전략적 지형을 선점하지 못한 채 가장 불리한 논산평야에서 김유신의 대군과 격돌했던 것이다.

요즘 계백 장군 묘역의 성역화 작업이 한창 진행중인 논산시 연산면·부적면 大明山(대명산)에서 판촉사에 이르는 일대가 당시의 격전지로 전해 오는데, 대명산은 산이라기보다 높이 70m 정도에 불과한 구릉이다. 대명산 바로 남쪽으로는 상당한 규모의 탑정(논산)저수지가 버티고 있지만, 이 저수지는 1941년경에 축조된 것이기 때문에 羅濟의 결전 시기엔 전술적 지형이 될 수 없었다.


계백의 결사 항전


「백제의 옛 터전에 계백의 정기 맑고/관창의 어린 뼈가 지하에 혼연하니/웅장한 호남 무대 높이 우러러 섰고/대한의 건아들이 서로 모인 이곳이/오호! 젊은이들의 자랑 제2훈련소」

대한민국 남정네라면 위의 노랫말을 잊지 못하는 사람이 많다. 왜냐하면 제2훈련소(논산훈련소)의 군가이기 때문이다. 요즘은 상황이 조금 달라졌다지만, 1980년대까지만 해도 논산훈련소는 대한민국 육군의 기본병과인 보병 병사의 대부분을 배출했으며, 지금도 국군 최대의 요람이다.

『행군간에 군가 한다. 군가는 제2훈련소 歌(가). 요령은 前(전)과 同(동). 군가 시작. 하낫, 둘, 셋, 넷』

이런 구령이 떨어지면 훈련병들은 목이 터질 듯이 소리치며 논산훈련소의 군가를 불러야 한다. 군가에 이른바 기합이 들어가 있지 않을 경우 인솔 교관이나 조교는 대번에 「원기 부족」이라고 꾸짖으며 반복 또 반복하여 부르도록 다그친다. 그런 탓에 논산훈련소를 거쳐가는 남자라면 6주의 신병 교육 기간중 논산훈련소가를 적어도 골백번은 불러야 한다. 그러니까 논산훈련소가는 한국 남성의 상당수가 일생을 통해 제일 열심히 부른 노래라고 할 수 있다.

계백은 백제 최고의 용장이지만, 망해 가는 왕조의 제단에 피를 뿌린 불운한 장수였다. 그는 비록 패장이었지만, 그 패전이 그 자신의 책임일 수는 없다. 그러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대한민국 육군의 요람인 논산훈련소의 군가 첫 마디에 계백의 이름을 올린 것은 사려가 부족한 일이다. 국군은 이겨서 나라를 지키는 군대가 되어야 하기 때문이다.

계백은 김유신의 5만 대군에 맞서 10분의 1에 불과한 5천의 결사대로 맞서 싸웠다. 출전에 앞서 계백은 자신의 처자를 모두 죽였다. 이것은 계백 스스로도 대세가 이미 기울었음을 느끼고 있었다는 얘기다. 「삼국사기」 列傳(열전)에는 다음과 같은 계백의 결단을 기록하고 있다.

『한 나라의 인력으로 당과 신라의 대군을 당하자니, 나라의 존망을 알 수 없다. 나의 처자가 붙잡혀 노비가 될지 모르니 살아서 치욕을 당하는 것보다 차라리 통쾌하게 죽는 것이 낫겠다』

조선왕조 太宗 (태종)때의 명신이며 성리학의 대가였던 權近(권근)은 이런 계백의 처사에 대해, 『난폭하고 잔인무도한 짓이며, 오히려 출전하는 사졸들의 사기를 떨어뜨려 패하는 결과를 낳게 했다』라고 낮게 평가했다. 그러나 고려의 遺臣(유신)이면서 조선조를 섬긴 권근은 이런 말을 할 자격이 없을 것 같다. 계백은 황산벌에 이르러 세 개의 진영을 치고 있다가 김유신 軍이 3路로 공격해 오자 다음과 같이 호령한다.

『옛날 越王(월왕) 句踐(구천)은 5천명의 군사로 吳나라의 70만 대군을 격파했다. 오늘 우리는 마땅히 분발하여 승전함으로써 나라의 은혜에 보답해야 한다』

백제군은 드디어 죽음을 각오하고 싸웠다. 이같은 용전분투로 백제군은 서전에서 4번 싸워 4번을 이겼다. 당군과의 합류 기한에 쫓긴 김유신에겐 전선 교착 상태의 돌파구가 절실하게 필요했다.


신라 화랑의 윤리


이때 김유신의 동생이며 右翼(우익) 장군인 흠순이 그의 아들 盤屈(반굴)에게 말한다.

『신하가 되어서는 충성이 제일이고, 자식이 되어서는 효도가 제일이다. 위태로움에 당하여 목숨을 내놓는 것은 충과 효를 兩全(양전)함이다』

世俗五戒(세속5계) 제1항과 제2항의 뜻을 가장 선명하게 압축시킨 훈계였다. 반굴은 즉각 적진 깊숙이 돌격하여 분전하다가 전사했다. 필사본 「花郞世記(화랑세기)」에 따르면 반굴은 흠순의 아들일 뿐만 아니라 김유신의 사위다. 국운을 건 전쟁에서 지도층의 자제가 먼저 목숨을 바치는 것이 신라 화랑의 윤리였다.

한국전쟁 때 美 8군사령관 밴플리트의 아들과 毛澤東(모택동)의 외아들은 남의 나라의 최일선에서 전사했지만, 우리 고위층의 자제들 가운데 전사한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지금 우리 사회에선 신라 화랑의 윤리, 즉 우리 역사도 모르는 무식한 사람이 지도층으로 행세하는 경우가 수두룩하다. 이때 신라 지도층의 윤리는 우리 민족사상 가장 모범적이었다.

이번에는 左翼(좌익) 장군 品日(품일)이 결심한다. 그는 아들 官昌(관창)을 불러 말 앞에 세워 놓고 『내 아이는 나이 아직 열여섯이나 志氣(지기)는 자못 용맹하다』고 격동시키고 『오늘 싸움에 있어 네가 능히 三軍의 모범이 되겠느냐?』 라고 묻는다.

관창도 單騎(단기) 돌격을 감행했다. 그러나 그는 곧 백제군에게 생포당하여 계백 앞으로 끌려갔다. 계백이 관창의 투구를 벗겨보고 그의 나이가 어림에도 불구하고 용감한 것을 가상히 여겨 차마 죽이지 못하고, 그를 살려 보냈다. 관창이 돌아와 품일에게 고한다.

『제가 적진에 들어가서 적장의 목을 베고 軍旗(군기)를 뽑아 오지 못한 것은 죽음이 겁나서가 아닙니다』

세속5계의 제4항 臨戰無退(임전무퇴)를 범하지 않았다는 얘기다. 관창은 말을 마치자 손으로 우물물을 떠 마시고, 다시 적진 속으로 뛰어들어 날카롭게 싸웠다. 계백이 다시 관창을 붙들자 이번에는 머리를 벤 다음 말안장에 매어 신라 진영으로 보냈다. 품일이 그 수급을 거두자 붉은 피가 흘러 소매를 적셨다. 품일이 부르짖었다.

『내 아들의 얼굴이 살아 있는 것 같구나. 나라 일을 위하여 죽을 수 있었으니 다행이로다!』

우익과 좌익 장군 부자의 언행이 이러했으니까 신라군 모두가 비분강개할 수밖에 없었을 것이다. 신라의 대군이 북을 치고 함성을 지르며 죽기를 각오하고 진격하니 계백과 그의 5천 결사대는 衆寡不敵(중과부적)이었다. 이 전투에서 좌평(백제 16 관등 중 제1위) 忠常(충상), 常永(상영) 등 20여명만 신라군에게 투항하고, 계백을 비롯한 나머지 장병 모두가 장렬하게 전사했다.

만약 계백의 죽음이 없었다면 백제 왕조 6백78년의 大尾(대미)는 너무 허망할 뻔했다. 후인들도 계백의 충용을 백제 제1로 꼽았다. 지금 백제 古都(고도) 부여 시가지에 세워져 있는 동상으로는 계백의 동상이 유일한 것이다. 그러나 階伯은 성명이 아니고 複姓(복성)으로서 그 이름은 전해지지 않았다. 역사의 기록은 패장에 대해 불공평하게 대우했던 셈이다.

충상과 상영의 관등이 제1위인 佐平(좌평)인 데 비해 5천 결사대의 최고 지휘관이었던 계백의 관등이 제2위인 達率(달솔)이라는 점은 주목할 만하다. 계백은 자기보다 관등이 한 계단 높은 忠常과 常永 등을 휘하에 거느릴 만큼 출중한 장수였던 것이다. 계백의 전사 후 백제의 저항은 지리멸렬했다.
<20편에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