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金庾信과 그의 시대(20)

정순태   |   2005-11-29 | hit 4813

金庾信과 그의 시대(20)

정순태


김유신·소정방의 統帥權 다툼


신라군이 황산벌에 진출했던 7월9일, 唐군은 기벌포에 상륙했다. 기벌포 일대는 개펄 지대로 갈대밭이 우거져 있었다. 당의 육군은 물버드나무 가지와 갈대를 베어다가 개펄과 수렁에 메우면서 진격했는데, 서천군 韓山(한산) 방면에서 백제의 방어군과 조우하여 최초의 전투를 벌였다. 이 전투에서 백제군은 수천명의 사상자를 내고 패주했다.

당의 水軍은 때마침 역류하는 밀물을 타고 금강 하류로부터 육군과 병진했다. 백제는 사비성 천도 초기인 동성왕 때 도성에서 12km 떨어진 부여군 임천면 성흥산(높이 270m)에다 加林城(가림성)을 쌓아 都城(도성) 서남 방면의 요새로 삼았다. 가림성에 올라가 보면 視界(시계)가 매우 양호하여 수십리 사방을 관측할 수 있다.

그러나 이때 가림성 일대에 짙은 안개가 끼어 守城軍(수성군)은 당군의 都城 접근을 전혀 눈치채지 못했다고 전해 온다. 실제 가림성의 수비군은 당군에게 화살 하나 날리지 않고 요충지를 그냥 통과시켰다. 이것은 가림성의 장수가 斥候(척후)도 운용하지 않았을 만큼 용렬했다는 뜻이다.

蘇烈은 가림성 동쪽 세도면에다 휘하 군병을 집결시켜 놓고는 당 고종의 조서를 낭독했다. 백제에 대해 선전포고를 했던 셈이다. 그 후 이곳의 지명이 頒詔原(반조원)이라고 불리게 되었다.

羅唐 양군은 당초의 계획보다 하루 늦은 7월11일 사비성 외곽에서 합류했다. 소열은 신라군이 약속된 날짜보다 하루 늦게 도착한 것을 꼬투리로 삼아 신라군의 督軍(독군:軍紀장교) 金文潁(김문영)의 목을 벰으로써 김유신의 기를 꺾으려고 했다.

이에 김유신은 황산벌 전투의 상황을 들이대며 김문영을 군법으로 다스리려고 한다면 당군과 먼저 일전을 벌이겠다고 외쳤다. 소열로서는 적전분열까지 불사하겠다는 김유신의 기백에 한발 물러설 수밖에 없었다. 신라군에 대한 統帥權(통수권)까지 장악하려 했던 소열의 기도가 꺾여버린 것이다. 그러나 그의 심사는 편치 않았을 것이다.

羅唐 연합군은 의자왕의 도성을 포위하기 위해 소부리벌(충남 부여읍)로 진군하여 의자왕의 도성을 포위한다는 작전을 세웠다. 이 때 소열은 꺼리는 바가 있다며 진격하지 않으려고 했다. 이것은 신라군을 앞세우고 당군이 後軍(후군)이 됨으로써 병력 손실을 피하겠다는 속셈이거나 통수권 다툼에서 밀린 데 대한 공연한 심술이었던 것으로 보인다. 「삼국유사」는 당시의 상황을 다음과 같이 전하고 있다.

<갑자기 까마귀 한 마리가 蘇定方의 병영 위로 날아다녔다. 사람을 시켜 점치게 했더니, 『반드시 元帥(원수)를 해칠 것입니다』라고 했다. 소정방이 두려워서 싸움을 그치려 하자 김유신이 말하기를, 『어찌 새 한 마리의 괴이한 짓으로써 天時(천시)를 어길 수 있겠소. 天命(천명)에 응하고 인심에 순하여 지극히 어질지 못한 자를 치는 마당에 어찌 상서롭지 못한 일이 있겠소?』 라고 했다>

소열로서도 이같은 김유신의 논리를 거부할 명분이 없었다. 7월12일 羅唐 연합군은 백제의 도성을 향해 네 방향으로 일제히 진격했다. 백제의 수도방위군이 최후의 일전을 벌였지만, 거듭 패전하여 1만여명의 전사자가 발생했다. 사태가 이에 이르자 의자왕은 『成忠(성충)의 말을 듣지 않아 이 지경에 이르렀으니 후회스럽다』 한탄했다.


都城 방어전략의 混線


7월13일 의자왕은 좌우의 측근들을 데리고 밤을 도와 웅진성(충남 공주)으로 도주했다. 羅唐 연합군이 사비성을 포위하자, 의자왕의 둘째 아들 夫餘泰(부여태)가 스스로 왕이라 일컬으며 수성전을 벌이려고 했지만, 왕자와 왕손끼리도 뜻이 맞지 않았다. 왕자 夫餘隆(부여융)이 대좌평 千福(천복) 등과 함께 출성하여 항복했다. 태자 김법민은 부여융을 말 앞에 꿇어 앉히고 얼굴에 침을 뱉으며 꾸짖어 말했다.

『예전에 네 아비가 내 누이를 죽여 옥중에 파묻었으니, 나는 이 일로 20년 동안 가슴이 아팠는데, 오늘은 네 목숨이 내 손에 달렸구나!』

부여융은 땅 바닥에 엎드려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7월18일 웅진성으로 피난을 갔던 의자왕이 태자 夫餘孝(부여효)와 웅진방면군을 데리고 사비성으로 되돌아와 항복했다. 금돌성에서 의자왕의 항복 소식을 들은 무열왕은 7월29일 소부리성으로 입성했다.

8월2일 羅唐 연합군의 승전 잔치가 벌어졌다. 무열왕과 소열은 여러 장수들과 함께 대청 위에 높이 좌정하고, 의자왕과 그 왕자 등은 마루 아래에 앉히어 의자왕으로 하여금 술잔을 치게 했다. 백제의 여러 신하들 가운데 목 메어 울지 아니하는 자가 없었다.

그러면 「百戰(백전)의 國」 백제가 왜 이렇게 土崩(토붕)의 사태처럼 패망했을까? 우선 都城 방어 전략의 실패부터 짚어볼 필요가 있다. 羅唐 연합군의 침공이 개시된 순간에도 백제의 수뇌부는 수도 방어 대책을 둘러싸고 국론의 통일을 이루지 못했다. 다음은 「삼국사기」 의자왕 20년 條의 관련 기록이다.

<의자왕은 군신들을 모아 공격과 수비 중 어느 것이 마땅한지를 물었다. 좌평 義直(의직)이 나서서 말하기를. 『당군은 멀리 바다를 건너 왔습니다. 그들은 물에 익숙하지 못하므로 배를 오래 탄 탓에 분명 피로해 있을 것입니다. 그러므로 그들이 상륙하여 사기가 회복되지 못했을 때 급습하면 뜻을 이룰 수 있습니다. 신라 사람들은 큰 나라의 도움을 믿기 때문에 만일 당군이 불리해지는 것을 보면 반드시 주저하고 두려워서 감히 빨리 진격해 오지 못할 것입니다. 따라서 먼저 당군과 결전을 하는 것이 옳습니다』라고 했다>

해로를 통해 침입하는 적의 가장 취약한 시점은 상륙 전후다. 바로 이런 점에서 의직의 계책은 병법에 부합된다고 할 수 있다. 그런데 常永 등이 전혀 다른 계책을 주장한다. 常永이라면 바로 황산벌 전투에서 김유신에게 항복하여 나중에 신라의 관등 7위 일길찬의 벼슬을 받은 사람이다. 일부 연구자들은 常永 등은 좌평 任子(임자)처럼 김유신에게 이미 포섭된 첩자가 아닌가 하고 의심한다.

『당군은 멀리서 왔으므로 속전하려 할 것이니 그 서슬을 당할 수 없을 것이며, 신라군은 이전에 여러 번 우리 군에게 패했기 때문에 우리 군의 기세를 보면 겁내지 않을 수 없을 것입니다. 오늘의 계책으로는 당군이 들어오는 길을 막아서 그들이 피곤해지기를 기다리면서, 먼저 일부 군사로 하여금 신라군을 쳐서 예봉을 꺾은 후에 형편을 보아 싸우게 하면 군사를 온전히 유지하면서 나라를 보전할 수 있을 것입니다』

常永 등은 당군에 대해서는 先守後攻(선수후공)의 전략을 구사하고, 신라군에 대해선 機動防禦(기동방어)로 대응할 것을 건의한 셈이다. 그러나 常永의 헌책은 백제군의 현실과는 부합되지 않는 비전문가의 탁상공론이었다.

先守後攻의 전략은 수·당의 침략군을 번번이 패퇴시킨 고구려의 상용수법이었다. 그러나 백제의 사비성은 고구려의 평양성과는 달리 방어체계가 빈약했을 뿐만 아니라 그 사방 1백 리 안에 금강을 제외하면 침략군을 막을 만한 험난한 지형지물도 없었다.

더욱이 백제군의 주력이 신라군과의 전투에 대비하여 동부 국경 지대의 성채에 분산 배치되어 있었기 때문에 서남쪽 금강 하류 방면의 방어 태세는 허술했다. 따라서 금강 하구 지역에 방어 병력을 증강 투입하여 당군의 상륙 작전을 저지하거나 설사 저지엔 실패하더라도 일정한 타격을 가해 당군의 행동을 견제하는 것은 화급을 다투는 일이었다.

어떻든 두 개의 방어 전략이 팽팽하게 맞서자, 의자왕은 주저하면서 어느 말을 따라야할지 몰랐다. 사태가 급박해지고서야 의자왕은 조정에서 쫓겨난 賢臣(현신) 興首(흥수)의 헌책이 아쉬웠다. 이 때 좌평 흥수는 古馬彌知縣(고마미지현:전남 장흥)에 귀양살이를 하고 있었다. 의자왕은 急使(급사)를 보내 興首의 견해를 물었다. 興首가 말했다.

『당군은 숫자가 많을 뿐만 아니라 군율이 엄하고 분명합니다. 더구나 신라와 함께 우리의 앞뒤를 견제하고 있으니 만일 평탄한 벌판과 넓은 들에서 마주하고 대진한다면 승패를 장담할 수 없습니다. 백강(금강)과 탄현은 우리나라의 요충지로서 한 명의 군사가 창 하나를 가지고도 만 명을 당할 수 있을 것이니, 마땅히 용사를 선발하여 그곳에 가서 지키게 하여, 당군으로 하여금 백강으로 들어오지 못하게 하고, 신라군으로 하여금 탄현을 통과하지 못하게 하소서. 대왕께서는 성문을 굳게 닫고 지키면서 그들의 물자와 군량이 떨어지고 적군들이 피곤해질 때를 기다린 후 분발하여 급공한다면 반드시 이길 수 있을 것입니다』

흥수의 헌책은 5년 전에 사망한 좌평 成忠의 전략과 비슷했다. 성충은 656년 의자왕의 실정을 간하다가 투옥된 끝에 백강과 탄현의 중요성을 강조하는 유서를 남기고 굶어 죽었던 충신이다. 그러나 대신들은 다시 흥수를 중상모략했다.

『흥수는 오랫동안 옥중에 있으면서 임금을 원망하고 애국하지 않았을 것이니, 그 말을 따를 수 없습니다. 차라리 당군으로 하여금 백강으로 들어오게 하여 강의 흐름에 따라 배를 병진하지 못하게 하고, 신라군으로 하여금 탄현에 올라 小路(소로)를 따라 말을 나란히 몰 수 없도록 해야 합니다. 이 때 군사를 풀어 공격하면 마치 닭장에 든 닭이나 그물에 걸린 고기를 잡는 것과 같을 것입니다』

드디어 의자왕은 흥수의 계책을 무시하고 機動防禦(기동방어) 전략을 흉내내려 했던 것 같다. 기동방어라면 적을 불리한 지형으로 유인하여 타격을 가하는 데 필요한 최소한의 부대만 전방 방어지역에 배치하고, 주력은 결정적 장소와 시간에 적을 격멸하기 위해 예비대로서 운용하여 과감한 역습을 가하는 전술이다.

계백의 5천 결사대는 예비대가 뒷받침하는 가운데 험난한 지형을 선점해야 기동방어의 實效(실효)를 거둘 수 있었다. 그러나 의자왕은 兵家에서 가장 금기시하는 우유부단의 愚(우)를 범했다. 의자왕이 우물쭈물하는 사이 신라군과 당군이 탄현과 금강을 아무런 저항도 받지 않고 돌파해버렸다.


패망 자초한 백제의 亂政


그럼에도 계백의 5천 결사대는 김유신의 5만 대군을 맞아 초전에 네 번 싸워 네 번 이겼다. 이 때라도 의자왕이 즉각 예비부대만 투입할 수 있었다면 전쟁의 승패는 전혀 달라졌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패망기의 백제는 오랜 亂政(난정)에 따른 국가 기강의 해이로 기동방어 전략을 수행할 만한 국가 총동원 체제를 갖추고 있지 못했던 것이다.

그렇다면 이번에는 백제의 패망을 불러온 亂政의 실상을 짚고 넘어갈 필요가 있다. 「삼국사기」에는 다음과 같은 백제의 말기 증세를 기록하고 있다.

①의자왕 15년(655) 봄, 太子宮(태자궁)을 사치스럽게 수리하고, 왕궁 남쪽에 望海亭(망해정)을 세웠다.

②의자왕 16년(656) 봄, 왕이 궁녀들을 데리고 음란과 향락에 빠져서 술 마시기를 그치지 않으므로 좌평 成忠이 적극 말렸더니, 왕이 노하여 그를 옥에 가두었다. 이로 말미암아 감히 간하려는 사람이 없었다. 성충은 옥사에 앞서 왕에게 글을 올려 말하기를, 『충신은 죽어도 임금을 잊지 않는 것이니 한 마디 말만 하고 죽겠습니다. 제가 항상 형세의 변화를 살피건대, 반드시 큰 전쟁이 있을 것입니다. 무릇 전쟁에는 반드시 지형을 잘 선택해야 하는데, 상류에서 적을 맞아야만 군사를 보전할 수 있습니다. 만일 적군이 오거든 육로로는 탄현을 통과하지 못하게 하고, 수군은 기벌포 언덕으로 들어오지 못하게 하십시오』라고 했다.

③의자왕 19년(659) 봄 2월, 여우떼가 궁중으로 들어왔는데, 흰 여우 한 마리가 상좌평의 책상에 앉았다. 여름 4월, 태자궁에서 암탉이 참새와 교미했다(백제 왕실 내부의 치맛바람과 성적 문란을 의미하는 듯함). 가을 8월, 여자의 시체가 生草津(생초진)에 떠올랐는데, 그 길이가 18척이었다(귀족계급 美人의 피살을 의미한다는 해석도 있음). 9월, 대궐 뜰에 있는 홰나무가 사람이 곡하는 것처럼 울었다.

④의자왕 20년(660) 봄 2월, 왕도의 우물이 핏빛으로 변했다. 서해 바닷가에 작은 물고기들이 나와 죽었다. 泗河(사비하)의 물이 핏빛처럼 붉었다. 여름 4월, 王都의 시정인들이 까닭도 없이 놀라 달아나니 누가 잡으러 오는 것 같았다. 그러다가 죽은 사람이 1백명이나 되었다(내란을 의미한다는 해석도 있음).

6월, 왕이 이상하게 생각하여 사람을 시켜 땅을 파게 했다. 석자 가량 파내려 가니 거북이 한 마리가 발견되었다. 그 등에 「百濟同月輪 新羅如月新」(백제동월륜 신라여월신), 즉 백제는 둥근 달과 같고 신라는 초승달과 같다는 글이 쓰여 있었다.

왕이 무당에게 물으니 무당이 답하기를, 『둥근 달은 가득 찬 것이니 가득 차면 기울며, 초승달은 가득 차지 못한 것이니 가득 차지 못하면 점점 차게 된다』고 했다.

이에 왕이 노하여 그를 죽여버리자 측근에서 아첨하기를, 『둥근 달과 같다는 것은 왕성하다는 것이요, 초승달과 같다는 것은 미약한 것입니다. 생각건대 우리나라는 왕성하여지고, 신라는 쇠약해 간다는 것인가 합니다』고 말하니 왕이 기뻐했다.

위의 「삼국사기」의 기사들은 자연재해 등까지 통치자의 不德(부덕)이나 失政(실정)과 연결시키는 유교적 史觀(사관)에 따른 기록이므로 오늘날의 상식으로는 전부 동의할 수 없다. 그러나 백제의 말기 증세를 보면 왕실과 지도층이 스스로 망하는 수순을 밟았다는 점 역시 부인할 수 없다.
<21편에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