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료실

金庾信과 그의 시대(21)

정순태   |   2005-11-30 | hit 4946

金庾信과 그의 시대(21)

정순태


지도층의 방탕과 사치

백제의 멸망 원인에서 지도층의 방탕과 사치는 다시 한번 짚어볼 대목이다. 백제의 왕실은 이미 武王(600~641) 때부터 華麗浮薄(화려부박)한 풍조에 짙게 물젖기 시작했다. 무왕은 대궐 남쪽에 못을 파서 20여 리 밖에서 물을 끌어들이고, 사면 언덕에 버들을 심고 물 가운데 道敎的 유토피아 方丈仙山(방장선산:중국 三神山의 하나)을 흉내낸 섬을 쌓았다.

<포구의 양쪽 언덕에 기암괴석이 서 있고, 그 사이에 진귀한 화초가 있어 마치 그림과 같았다. 왕이 술을 마시고 몹시 즐거워 하여, 거문고를 켜면서 노래를 부르자 수행한 사람들도 춤을 추었다. 당시 사람들은 이곳을 大王浦(대왕포)라고 불렀다>

무왕은 큰 佛事(불사)도 일으켰다. 산을 무너뜨려 못을 메우고 그 위에다 거대한 미륵사를 창건했다. 전북 익산에 가서 동양 제일의 위용을 자랑하는 미륵사탑을 보면 불타버린 미륵사가 얼마나 장대한 규모였는지 짐작할 수 있다. 이러한 대대적 토목공사는 백제의 경제를 피폐시켜 민심을 지배층과 유리시켰을 것임에 틀림없다.

백성들은 토탄에 빠져 허덕이고 있는 가운데 의자왕은 657년 봄 정월, 그의 庶王子(서왕자) 41명에게 제1위의 관등인 좌평으로 임명하고 각각 食邑(식읍)까지 내렸다. 식읍이란 국가유공자에게 조세를 거둬 먹게 하는 고을을 말한다. 그러니까 엄청난 수의 庶王子들에 대한 의자왕의 특혜는 官等(관등)의 인플레를 일으켜 백제의 6인 佐平 제도를 파괴했을 뿐만 아니라 백성들의 稅(세) 부담을 가중시키는 악정이었던 것이다.

김유신은 655년 백제의 刀比川城(도비천성)을 공격한 뒤 그동안 수집한 정보를 바탕으로 『백제는 君臣이 사치하고 淫逸(음일)하여 국사를 돌보지 않으매, 백성이 원망하고 神靈(신령)이 노하여 災變怪異(재변괴이)가 여러 번 나타났다』 면서 백제 정벌을 위한 무열왕의 결단을 촉구했다. 당 태종도 654년에 이미 『백제는 바다의 험함만 믿고 機械(기계=병기)를 수선치 아니하고 남녀들이 뒤섞여 연회만 한다』면서 백제를 만만하게 보았다. 이런 인식이 고구려보다 약한 백제부터 멸망시킨다는 羅唐 밀약이 세워지는 단초가 되었던 것으로 보인다.

그런데도 의자왕은 자신의 머리 위로 전개되는 국제적 음모에 둔감했다. 652년 이후 백제는 당 나라에 사신을 파견하지 않았다. 그 대신 세력 균형의 방책으로 고구려와 왜국을 동맹국으로 삼았다. 그러나 백제의 멸망당하던 순간까지 고구려와 왜국은 아무런 군사 지원을 하지 못했다.


전투에 이기고 전쟁에서 패하다

당은 백제 공략에 앞서 658년과 659년에 연이어 요동 지역을 공략함으로써 고구려가 밖으로 눈을 돌릴 수 없도록 견제했다. 왜국은 당시 대규모 호화 토목 공사를 일으킨 여왕 濟明(제명)의 亂政 때문에 한반도 문제에 즉각적으로 개입할 만한 국력을 갖지 못했다.

그런데도 이런 국제 정세에 어두웠던 의자왕은 신라에 대한 공격을 되풀이한다. 백제 멸망 한 해 전(659년 여름 4월)에도 백제군은 신라의 獨山(독산), 桐岑(동잠) 두 성을 침공했다. 이러한 백제의 빈번한 신라 침략은 치밀한 전략 아래 결행되었다고 하기보다는 즉흥적으로 감행되었음을 느끼게 한다. 사실 말기의 백제는 신라에 대해 공세적 위치에 있었지만, 한 번도 결정적 승리를 쟁취한 바가 없었다.

의자왕은 전투에서는 자주 이겼지만, 전쟁에서는 패배했다. 서양의 戰爭史家(전쟁사가)들은 이런 경우를 피루스(Pyrrhus)의 승리라 일컫는다. 古代 에피로스의 王인 피루스는 전투 능력에 관한 한 알렉산더 大王 이래 최고의 강자로 회자되었으나, 너무 잦은 전투로 유능한 장졸들을 소모시킨 끝에 자기 당대에 패망했다. 동양에서는 後漢(후한) 말기의 최대 군벌 董卓(동탁)의 말로가 그러했다.

「삼국사기」에 따르면 멸망 당시 백제의 국세는 5部, 37郡, 2백城, 76만戶로 되어 있다. 오랜 전란으로 인해 집집마다 사망자가 많았던 점을 감안하여 1호당 가족수를 4인으로 잡더라도 백제의 인구가 3백만에 달했던 것이다. 668년 멸망 당시 고구려의 국세는 5部, 1백76城, 69만 戶로 기록되어 있다. 백제는 고구려에 비해 영토는 훨씬 좁았으나 인구수는 오히려 더 많았던 것이다.

이것은 백제의 농경지가 기름져 농업 생산량이 많고, 그만큼 인구밀도가 높았다는 얘기다. 역사의 기록이 없어 속단할 수 없지만, 농경사회인 삼국 가운데 國富(국부)를 축적하는 데 관한 한 백제가 고구려나 신라보다 훨씬 유리했을 것이다. 그런데도 지배층의 향락 때문에 백제는 부국강병에 실패했던 것이다.

의자왕의 항복 후 당은 백제 땅에 5도독부를 설치했다. 당초 약속을 어기고, 백제에 대한 지배권을 신라에 주지 않고 당의 직할 식민지로 삼았던 것이다.


백제부흥군의 분투

그러나 백제는 그렇게 간단한 나라가 아니었다. 羅唐 연합군의 기습적이며 압도적인 병력 집중으로 사비성은 함락당하고 말았지만, 백제군의 지방군은 건재했던 것이다. 이것은 羅唐 연합군이 백제군의 주력을 포착 섬멸하기 보다는 都城 함락을 우선시하는 전략을 채택했기 때문이다. 그 결과 백제부흥군이 곳곳에서 봉기했다.

무왕의 종질인 福信(복신)과 승려 道琛(도침) 그리고 서부 출신의 黑齒常之(흑치상지)가 任存城(임존성)에서 깃발을 들자, 10여일 사이에 3만여명의 군세가 이뤄졌다. 임존성은 지금의 충남 예산군 대흥면의 봉수산이다. 임존성과 인접한 고마노리성(홍성군 홍성읍 고모리)에서는 달솔 餘自進(여자진)이 궐기했다. 羅唐 연합군은 백제부흥군의 임존성을 공격했으나 패퇴했다.

백제부흥군의 응집력은 만만치 않았다. 그런데도 9월3일 蘇烈의 당군은 본국으로 개선했다. 이 때 의자왕 이하 백제인 1만2천여명이 포로로 끌려갔다. 그렇다면 백제의 전역이 평정되지 않았는데도 소열이 그렇게 철수를 서두른 까닭은 무엇일까? 고구려 공략을 위한 준비 때문이었다고는 하지만, 상당히 정략적 속셈을 깔고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소열은 필사적인 백제부흥군과 싸워 보았자 병력의 손실만 초래할 뿐이지 그 자신의 戰功(전공)이 더 높아지는 것이 아니라고 판단했을 것이다. 소열은 소모전이 불가피한 백제부흥군과의 전투를 신라 쪽에 미뤄버린 셈이다. 사비성·웅진성 지구에는 劉仁願(유인원)의 당병 1만과 무열왕의 아들 金仁泰(김인태)의 7천 병력이 잔류했다.

661년 정초가 되면서 백제부흥군의 세가 더욱 커져 웅진도독부가 설치된 공주와 부여를 계속 공략했다. 웅진의 唐將 유인원은 서라벌에 급보를 띄우고, 신라는 구원군을 급파했다. 3월5일 이찬 品日 휘하의 선발군이 豆陵山城(두릉산성)의 남록에 진을 치려 하다가 백제부흥군의 급습을 받고 참패했다. 두릉산성은 지금의 충남 청양군 정산면 백곡리의 계봉산이다.

3월12일 무열왕의 셋째아들 金文汪, 대아찬 良圖(양도)의 후속 대부대가 달려가 두릉산성을 36일간 공격했지만, 이기지 못하고 철군했다. 이 때 신라의 치중(병참)부대가 백제부흥군의 습격을 받아 막대한 군수품을 탈취당했다. 두릉산성 전투의 승리 후 福信의 부흥군은 지금의 대전 부근까지 진출하여 신라·웅진간의 보급로를 차단했다. 무열왕은 몸소 백제부흥군의 진압에 나서 웅진성의 포위를 풀어야 했다.●
<22편에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