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金庾信과 그의 시대(22)

정순태   |   2005-11-30 | hit 4940

金庾信과 그의 시대(22)

정순태


「물과 고기」처럼 성공한 君臣관계

661년 6월 태종무열왕이 59세의 나이로 병사하고, 그의 맏아들 金法敏(김법민:문무왕)이 왕위에 올랐다. 조선조의 경우 임금의 평균 수명이 44세였던 점과 비교해 보면 결코 단명했다고는 할 수 없지만, 유별나게 강건했던 무열왕이 재위 8년 만에 급사한 것은 삼국통일의 대업을 推動(추동)하는 데 일신의 에너지를 남김없이 소진했던 탓이라고 해도 좋다.

이때 문무왕의 나이가 36세였고, 김유신은 67세였다. 역사를 되돌아보면 선왕의 重臣(중신)은 후계왕으로부터 경원당하는 사례가 적지 않다.

그러나 문무왕과 김유신은 우리 역사상 가장 모범적인 君臣(군신) 관계를 이루었다. 둘의 관계에 대해 문무왕은 『과인에게 경이 있음은 물고기에 물이 있음과 같소』라고 했고, 김유신은 『왕께서 의심 없이 등용하여 의심 없이 임무를 맡겼기에 어리석은 소신이지만, 약간의 공을 이뤘습니다』고 화답했다. 바로 673년 6월 임종 직전의 김유신과 병문안을 하러 간 문무왕이 나눴던 대화 중 일부다.

태종무열왕이 병사한 뒤에 만약 김유신이 쿠데타를 일으켜 정권을 찬탈했다면 가야 金(김)씨의 새로운 왕조가 성립되지 않았겠느냐. 이런 의문을 가진 호사가들도 없지 않다. 그러나 김유신은 제2인자의 한계를 엄격히 지켰던 名臣(명신)이었고, 문무왕은 帝王學(제왕학)에 밝은 군주였다.

문무왕 김법민은 과보호되게 마련인 왕자로 태어나 구중궁궐에서 고이 길러진 인물이 아니었다. 그는 25세 때 이미 請兵(청병) 외교의 최일선에 나서 唐 高宗(당 고종)을 만났고, 아버지(김춘추)가 왕위에 올라 태자가 된 후에도 野戰(야전)에서 말을 달린 野性의 남자였다. 그의 시호가 문무왕이었다는 것은 그가 文武 兼全(문무겸전)의 임금이라는 얘기다. 만약 무열왕의 사후에 김법민이라는 결단의 군주가 등장하지 않았다면 당시 한반도는 당의 식민지가 되었을 가능성이 높았다.

흔히 君臣水魚之交(군신수어지교)라 하면 蜀漢(촉한)의 창업 군주 劉備(유비)와 그의 명신 諸葛亮(제갈량)을 연상한다. 유비의 사후에 제갈량이 後主(후주) 劉禪(유선)에게 올린 出師表(출사표)는 눈물 없이 읽을 수 없는 名文(명문)으로 손꼽히고 있지만, 유선과 제갈량은 실패한 군신 관계가 되고 말았다. 제갈량은 魏(위) 나라를 공략하기 위해 長安(장안:지금의 西安) 서쪽 渭水(위수) 방면으로 7년 동안에 무려 다섯 번이나 出師(출사)했지만, 寸土(촌토)도 얻지 못했다. 반면 김유신은 삼국통일의 원훈이 되었다. 문무왕과 김유신은 우리 역사상 가장 성공한 군신 관계였다.

김법민이 왕위에 오른 661년 7월 신라는 위기와 기회의 갈림길에 처해 있었다. 신라까지 먹으려는 당의 속셈이 이미 드러났고, 백제 부흥군의 저항 그리고 고구려와 왜국의 동향도 심상치 않았다.

이해 9월 왜국에 체류하던 의자왕의 아들 夫餘豊(부여풍)이 福信(복신) 등의 요청에 의해 귀국하여 백제 부흥군의 최고 지도자로 추대되었다. 「日本書紀」(일본서기)에 따르면 이때 왜왕 天智(천지)는 장군 사이노 무라지(狹井連)와 에치노 다쿠츠(朴市田內津)에게 병력 5천을 주어 부여풍을 호위하도록 했다. 이어 화살 10만 개, 실 5백 근, 피륙 1천 端(단), 가죽 1천 장, 벼 3천 섬 등의 물자를 지원했다.

부여풍은 周留城(주류성)을 백제 부흥군의 지휘 본부로 삼고, 福信과 왜장들로서 항전 태세를 굳혔다. 백제 유민들은 부여풍을 왕으로 받들었고, 부흥군은 한때 2백 성을 회복할 만큼 맹위를 떨쳤다. 이것은 당의 웅진도독부가 웅진·부여 일원만 장악하고, 나머지 백제의 故土(고토) 모두를 부흥군이 탈환했다는 얘기다.

백제 부흥군의 본거지 주류성의 위치는 연구자들에 따라 구구각색이다. 일본인 학자 쓰다 소키치(津田左右吉)가 주류성을 충남 서천군 한산면으로 比定(비정)한 이래, 이것이 학계의 통설이 되어 우리 국정 교과서에도 그렇게 실렸다. 그러나 한산 說(설)은 관련 史書(사서)의 지형 설명 등과 전혀 부합되지 않는다는 문제점이 제기되었다.

이후 전북 부안 說 등이 대두되어 오다가 수년 전에 83세의 향토사학가 朴性興(박성흥)옹이 충남 홍성 說을 발표했다. 홍성군 장곡면의 石城(석성)과 鶴城(학성) 일대를 답사해 보면 「日本書紀」에 기록된 주류성의 위치나 모습과 일치함을 알 수 있다. 1백30여년 전의 지도지리학자 金正浩(김정호)도 그의 「大東地志」(대동지지) 홍주목 條(조)에서 「홍주는 본래 백제의 주류성이다」(洪州牧本百濟周留城)라고 명기했는데, 홍성 說이 나오기 전까지 국내외 학자들은 「大東地志」의 이 기록을 주목하지 못했다. 홍주목이라면 바로 오늘날의 洪城(홍성)이다.


『죽더라도 국가 대사는 사양할 수 없다』

백제 부흥군의 勢(세)가 흥기하던 상황임에도 불구하고 唐 고종은 고구려 공략전에 신라의 참전을 요구했다. 661년 6월 蘇烈(소열)은 수륙 35軍을 거느리고 평양성으로 진발했다. 8월 문무왕은 상중인데도 김유신을 대장군으로 삼아 친정의 길에 올랐다. 이때 백제 부흥군이 甕山城(옹산성; 大田市 대덕)에 웅거해 있으면서 앞길을 차단했다. 김유신이 옹산성을 포위하고 軍使(군사)를 성 아래로 가까이 보내 적장을 회유했다.

『백제는 공손치 않았기 때문에 토벌을 받게 되었던 것이다. 내 명령에 따르는 자는 상을 받을 것이며, 명령에 따르지 않는 자는 죽음을 면치 못할 것이다. 이제 너희들이 홀로 고립된 성을 지켜서 무엇을 하겠는가? 결국 비참하게 궤멸될 것이니 나와서 항복하는 것만 못하다. 그러면 목숨을 보존할 뿐만 아니라 부귀도 기약할 수 있을 것이다』

백제 부흥군의 장수가 맞받았다.

『비록 하찮은 작은 성이지만, 병기와 식량이 충족하며, 병사들이 의롭고 용감하니 차라리 싸워 죽을지언정 맹세코 살아서 항복하지는 않겠다』

백제 부흥군은 이렇게 비장했다. 김유신이 웃으며 말하기를, 『쫓기던 새나 짐승도 궁지에 몰리면 되레 달려든다는 것은 이를 두고 하는 말이로구나』라고 했다. 김유신은 깃발을 휘두르고 북을 울리게 하여 싸움을 돋우었다. 음력 9월27일 성이 함락되자, 김유신은 적장만 붙잡아 참수하고, 백성들은 모두 놓아 주었다.

신라군은 옹산성의 백제 부흥군을 격파했으나 당군과 합류하기 위한 북진에는 차질을 빚고 있었다. 여기서 신라 수뇌부는 일단 평양성 전투의 전황을 살폈다. 蘇烈(소열)의 당군은 貝江(패강:대동강)에서 평양 서남쪽 馬邑山(마읍산)을 점거한 뒤 한 달 넘도록 평양성을 포위했지만, 평양성은 견고했다.

兵站線(병참선)이 막힌 데다 겨울의 한파가 다가오고 있었던 만큼 蘇烈은 매우 불안했다. 신라의 입장에서도 겨울 작전을 각오하고 動兵(동병)을 하기는 어려웠을 것이다. 이때 蘇烈의 급보가 문무왕에게 당도했다.

『내가 황제의 명을 받아 만리 밖에서 창해를 건너 적을 토벌하러 와서 해안에 배를 댄 지 한 달이 넘었는데, 대왕의 군사가 오지 않고 군량도 떨어져 심히 위태로우니, 왕께서는 대책을 세워 주소서』

문무왕이 군신들을 모아 놓고 당군에 대한 군량 지원의 방책을 물었다. 신하들이 난색을 표명한다.

『賊地(적지) 깊이 군량을 나른다는 것은 지금 형세로 보아 불가합니다』

문무왕이 계책을 정하지 못하고 한탄만 거듭하자, 김유신이 나아가 말한다.

『臣(신)이 과분한 은총을 받아 외람스럽게 중책을 맡고 있사온데, 국가 대사에 당하여 죽는 한이 있더라도 사양할 수 있겠습니까? 지금이야말로 늙은 몸이 충성을 다할 때이오니, 신이 적국으로 들어가 蘇 장군의 뜻에 부응하도록 하겠습니다』

문무왕이 앞으로 나와 김유신의 손을 잡고 눈물을 흘리면서 말한다.

『公 같은 어진 신하를 얻었으니 걱정할 일이 무엇이겠소』

왕명을 받은 김유신은 목욕재계하고 사찰의 靈室(영실)로 들어갔다. 문을 닫고 홀로 향을 피우고 앉아 며칠 밤을 지낸 뒤에 나와서, 그 스스로 기뻐하며 말하기를, 『나는 이번 행군에서 죽지 않을 것이다』라고 했다. 유신이 길을 떠날 때 문무왕은 친서를 주어, 『국경을 넘어서서는 상벌을 마음대로 행하여도 좋다』라고 했다. 便宜從事(편의종사)의 권한을 부여했던 것이다.

12월10일, 김유신은 仁問(인문), 良圖(양도) 등 9將(장)을 부장으로 삼아 치중부대와 호위부대를 이끌고 고구려 경내로 들어갔다. 이때 평양성을 공략중이던 당군에게 운송했던 곡식은 쌀 4천 섬(石)과 벼 2만2천 섬이었다. 무게로 환산하면 대략 3천t에 달한다. 수송에 동원된 수레가 2천 대였다니까 수레 하나 당 1.5t을 적재했던 셈이다.

병사 1인에 대한 하루 곡물 보급량은 최소 5백g이다. 20만 병력이라면 하루 곡물 소요량이 1백t에 달한다. 그러니까 김유신은 20만 병력의 1개월치 군량을 수송했던 것이다. 牛馬車(우마차)를 사용했던 당시의 수송 능력을 감안하면 엄청난 수량이었다.


68세 老將의 솔선수범

해가 바뀌어 문무왕 2년(662) 1월23일 김유신 軍은 七重河(칠중하=임진강)에 이르렀다. 이때 한 달 이상 계속 내리던 궂은 비가 눈보라로 변하면서 기온이 급강하했기 때문에 동상자가 속출했다. 장졸들 모두가 두려워하여 감히 먼저 강을 건너려는 사람이 없었다.

김유신은 『그대들이 죽음을 두려워한다면 왜 여기까지 왔는가?』라며 먼저 배에 올라 강을 건넜다. 모든 장졸들이 뒤따라 고구려의 지경으로 들어갔다.

신라군은 고구려군의 요격을 피해 평탄한 대로를 버리고 험한 소로를 따라 행군했다. 임진강과 개성 사이에 있는 蒜壤(산양)에 이르러 김유신 軍은 고구려의 一枝軍(일지군)과 조우하여 패퇴시켰다. 그는 다시 장졸들을 격려했다.

『고구려, 백제 두 나라가 우리 강토를 침노하여 우리 백성들을 해쳤다. 더러는 장정들을 포로로 데려가 죽이기도 했으며, 더러는 아이들을 사로잡아 노비로 부리기도 했다. 이런 일이 오래 계속되었으니 어찌 통탄스럽지 않은가? 내가 지금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고 어려운 일을 하려는 것은, 나라의 원수를 갚으려 하기 때문이다. 마음에 맹세하고 하늘에 고하여 조국 영령의 가호를 기대하는데, 이제 여러 장졸의 심경이 어떠한가를 알 수 없기에 다짐해 두는 것이다. 만약 적을 두려워하면 사로잡힘을 면할 수 없다. 마땅히 한 마음으로 협력하여 누구나 일당백의 용기를 내기 바란다』

모든 장졸들이 외친다.

『대장군의 명령을 받들어 구차하게 살아갈 마음을 먹지 않겠습니다』

이윽고 험준한 獐塞(장새; 황해도 수안)에 이르렀다. 날씨는 얼어붙고 人馬(인마)는 피로를 견디지 못하고 자꾸 쓰러졌다. 김유신은 팔을 걷어 어깨를 드러내고 말에 채찍을 가하며 앞에서 달려갔다. 예순여덟 살의 노장이 앞장서자, 뭇 장졸들이 힘을 다해 뒤따르며 감히 춥고 힘들다는 말을 꺼내지 못했다. 드디어 평양성과 3만6천步(보) 상거한 지점에 당도했다.

이제는 고구려군의 縱深(종심) 깊은 방어 진지를 뚫고 나가 당군 진영에 신라군의 도착을 알리는 일이 제일의 난제였다. 당군은 군량이 떨어져 궤멸 직전의 위기에 처해 있었다. 김유신이 步騎監(보기감)의 지위에 있는 裂起(열기)를 불러 말한다.

『나는 젊어서부터 그대와 교유하여 그대의 지조와 절개를 안다. 이제 蘇장군에게 우리의 뜻을 전하고자 하나 사람을 구하기 어렵다. 그대가 갈 수 있겠는가?』

裂起가 엎드려 말했다.

『제가 불초하나 외람되이 中軍職(중군직)에 있는데, 항차 장군의 명을 욕되게 하겠습니까? 제가 죽는 날이 새롭게 태어나는 날이 될 것입니다』

裂起는 장사 仇近(구근) 등 15명의 용사들과 함께 혹한 속에서 적진을 뚫고 나갔다. 그는 蘇烈을 만나 김유신이 군량을 운반하여 대동강 어귀에 진출한 사실을 통고했다. 蘇烈은 크게 기뻐하며 裂起의 귀로 편에 사례의 글을 김유신에게 보냈다. 김유신은 이틀 만에 귀환한 열기와 구근에게 제9위 沙(사찬)의 관등을 주었다.

김유신은 양오(대동강 어귀)에 진을 치고 중국어에 능통한 仁問과 良圖, 그리고 그의 서자 軍勝(군승)에게 唐營(당영)으로 치중대를 호송하도록 명했다. 이로써 蘇烈의 당군은 아사를 모면하고 폭설 속에서 서둘러 철수했다.

蘇烈 軍이 철수하기 직전에 唐의 옥저도총관 龐孝泰(방효태) 軍이 蛇水(사수; 대동강 지류) 언덕에서 연개소문이 이끄는 고구려軍과 싸우다가 방효태와 그의 아들 13명을 포함한 장졸 모두가 전사했다. 고립된 김유신 軍도 회군을 서두를 수밖에 없었다. 淵蓋蘇文(연개소문)은 추격군을 일으키고 복병을 깔아 귀로의 김유신 軍을 섬멸하려 했다.

그러나 김유신은 고구려軍 수뇌부를 철저히 기만했다. 철수 직전, 북과 북채를 소 여러 마리의 허리와 꼬리에 매달아서 소가 꼬리를 칠 때마다 요란한 소리가 나게 하고, 섶과 나무에 불을 질러 연기와 불빛이 끊이지 않게 했다. 그런 다음 가만히 영채를 버리고 야음을 틈타 퇴군했다.

추격당할 때 탈출은 매우 어렵다. 왜냐하면 全軍이 심리적으로 당황하기 때문이다. 원래 軍 교육 과정에서 공격 훈련은 하지만 철퇴 훈련을 하는 경우는 없다.

그럼에도 김유신 軍은 추격군을 교묘하게 따돌리고 임진강의 지류를 건넜다. 도하 작전 후에도 김유신은 병졸들을 휴식시키면서 추격군에 대비해 경계를 늦추지 않았다. 이것이 將으로서 김유신이 뛰어난 점이었다. 원래 경계에 실패한 장수는 명장이 될 수 없다.

뒤늦게 신라군의 텅 빈 營寨(영채)를 짓밟은 고구려軍은 서둘러 추격에 나섰다. 고구려軍은 철수하는 신라軍의 꼬리를 물고 신라의 영토 안으로 밀고 들어올 기세였다. 「삼국사기」 신라 본기에는 「적이 멀리까지 따라올까 염려하여 적이 강을 건너기 전에 먼저 강을 건너가서 접전을 벌였다」고 기록되어 있다.
<23편에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