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金庾信과 그의 시대(23)

정순태   |   2005-12-02 | hit 4827

金庾信과 그의 시대(23)

정순태


兵站의 중요성을 이해했던 장수

이것은 김유신이 부상병 등을 후방에 남기고 정예병으로 퇴각 엄호의 부대를 재편성하여 다시 對岸(대안)으로 도하를 감행한 뒤 유리한 지형의 지점에서 고구려軍을 迎擊(영격)했다는 얘기다. 이때 신라軍은 몰려오는 고구려軍을 향해 다연발 강궁인 萬弩(만노)를 일제히 발사했다. 고구려軍은 갑작스런 반격에 놀라 혼란에 빠져 퇴각했다. 김유신 軍은 고구려軍을 급히 추격하여 장수 阿達兮(아달혜) 등을 사로잡고, 1만명의 머리를 베었다.

김유신 軍이 돌아오자, 문무왕은 김유신과 동생 인문에게 本彼宮(본피궁)의 재화, 전장, 노비를 절반씩 나누어 주고, 장병들에 대해서도 상을 내렸다. 그런데도 김유신은 그가 이미 현지에서 관등을 한 단계 올린 裂起와 仇近의 관등을 제8위인 급찬으로 다시 한 계단 더 올려 달라고 문무왕에게 요청했다.

신라의 官等(관등)제도의 운영에 있어 전사자가 아닌 경우 한꺼번에 관등을 2단계 올린 사례가 발견되지 않는다. 그래서일까, 문무왕은 김유신의 요청임에도 『사찬의 벼슬은 너무 과하지 않소?』라고 대답했다. 그러나 김유신은 재배하고 다시 요청하기를, 『爵祿(작록)은 公器(공기)로서 공로에 대한 보수로 주는 것이온데, 어찌 과분하다고 하겠습니까?』라고 했다. 문무왕도 허락할 수밖에 없었다. 이렇게 김유신은 정치 감각도 지닌 군인이었다. 김유신은 恩賞(은상)으로 인너 그룹, 즉 자기 사람을 만드는 데 철저한 장수라고 할 수 있다. 상벌을 뚜렷하게 시행하지 않는 장수는 용사를 얻을 수 없다.

그러나 將으로서 김유신이 탁월했던 것은 단지 위에 열거한 충성심이나 행동력, 그리고 위기상황에서 용사를 부리는 용인술 때문만은 아니었다. 그의 탁월성은 보급로야말로 야전군의 生命線(생명선)임을 정확하게 인식했다는 점 때문이다.

김유신이 수레 2천 대 분량의 군량을 적진을 돌파하며 1천 리 밖으로 운송하는 데는 적어도 2만 정도의 병력을 동원하였을 것이다. 이같은 병력 규모는 적의 관측을 회피하며 행군하기에는 너무 많고, 고구려軍의 주력과 교전하기에는 너무 적다고 할 수 있다. 더구나 치중대를 거느린 부대는 행동의 자유가 극히 제한된다.

신라軍 최고위 장수인 그가, 적의 공격에 가장 취약한 치중부대를 이끌고 적지를 종단했던 것은 이 임무야말로 對(대) 고구려戰의 향방을 가늠하는 제1의 요소라고 판단했기 때문이었을 것이다. 따지고 보면 이제껏 수·당의 침략군이 고구려와 싸워 참패했던 가장 큰 이유는 병참의 실패 때문이었다. 그러니까 김유신의 병참선 개척은 향후 나·당 양군으로 하여금 고구려의 淸野(청야), 즉 성 밖에는 곡식 한 톨도 남기지 않고 불태워버려 적의 인마를 굶주리게 하는 전술을 극복하게 함으로써 겨울 작전까지 가능하도록 만든 것이었다.


唐將 유인궤의 反間之計

김유신이 평양성 외곽에 진출하여 蘇烈의 당군을 구원하고 개선했던 662년 봄 2월 耽羅國主(탐라국주) 徒冬音律(도동음률)이 신라에 항복했다. 백제의 속국이었던 탐라국(제주도)은 이때부터 신라를 종주국으로 섬기게 되었다. 이것은 신라의 국가 위신이 남해상의 海島(해도)에까지 뻗치게 되었음을 의미한다.

이런 가운데서도 백제 부흥군의 대오는 증강되고 있었다. 663년 여름 달솔 福信과 승려 道琛(도침)이 이끄는 백제 부흥군이 웅진성의 劉仁願(유인원) 軍을 포위했다. 唐 高宗은 劉仁軌(유인궤)에게 구원군을 주어 웅진성으로 급파했다.

이때 福信 등은 웅진강 어귀 두 곳에 목책을 세워 椅角之勢(의각지세), 즉 앞뒤가 서로 호응하는 형세를 이루면서 나·당의 구원군과 웅진도독부의 합류를 저지하려 했다. 이 전투에서 부흥군은 전사자 1만여명을 남기고 패퇴하여 任存城(임존성)으로 물러났다.

이로써 웅진성의 포위는 풀렸지만, 나·당군이 부흥군에 대해 완승을 거둔 것은 아닌 것으로 판단된다. 왜냐하면 웅진강 전투 직후에 신라軍은 군량이 떨어져 곧 회군했으며, 임존성의 백제 부흥군의 세력은 더욱 증강되었다는 사실이 「삼국사기」에 기록되어 있기 때문이다.

그 무렵 복신과 도침은 각각 霜岑將軍(상잠장군)과 領軍將軍(영군장군)으로서 역할을 분담하고 있었다. 복신은 軍使를 보내 유인궤에게 말하기를, 『듣건대, 당이 신라와 약속하기를 백제 사람은 노소를 막론하고 모두 죽이고, 그후에는 우리나라를 신라에 넘겨 주기로 하였다고 하니, 죽음을 기다리기보다는 차라리 싸우다가 죽는 편이 낫다고 생각하여, 이렇게 모여 진지를 고수하고 있을 뿐이다』라고 했다. 복신은 당군의 허실을 탐색하기 위해 軍使를 파견했을 것이다. 이에 유인궤 역시 軍使를 파견하여 부흥군의 지도부를 분열시키려는 反間之計(반간지계)를 구사했다. 유인궤는 원래 모략전에 정통한 장수였다.

유인궤가 보낸 使者를 대하는 태도로 미루어보아 도침이 제1의 對唐(대당) 강경파였던 것으로 짐작된다. 「삼국사기」의 관련 기록은 다음과 같다.

〈도침은 군사가 많은 것을 믿고 인궤의 使者를 外館(외관:바깥 숙소)에 재우고 비웃으며 말하기를, 『使者의 벼슬이 낮고, 나는 일국의 대장이므로 함께 말할 수 없다』면서 답장을 주지 않고 그냥 돌려보냈다〉

이때 복신의 태도는 기록의 누락으로 알 수 없지만, 도침에 비해서는 융통성이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어떻든 복신과 도침 사이에 노선과 전략의 차이로 인한 갈등이 빚어지고 있었던 것만은 확실하다. 이런 내분 때문에 부흥군은 곤경에 빠진 유인궤·유인원 軍에 대해 결정타를 가할 기회를 놓친 것 같다.

웅진성의 위기를 풀기 위해 문무왕은 金欽(김흠)을 장수로 삼아 구원군을 급파했다. 그러나 김흠의 부대는 古四(고사; 전북 고부)에서 백제 부흥군에 대패하여 葛嶺道(갈령도)로 도주했다. 그럼에도 신라는 즉각 증원군을 보내지 못할 만큼 부흥군은 위력적이었다.

그러나 부흥군의 수뇌부 안에서 암투가 벌어졌다. 이로 인해 복신이 도침을 죽이고, 도침의 장졸을 자기 휘하에 넣어버렸다. 부흥군의 왕으로 옹립된 부여풍은 이런 분열 사태를 제어하지 못하고 제사만 주관했다. 복신은 고립된 웅진성의 유인원에게 使者를 보내 농락한다.

『大使(대사) 등은 언제 서쪽으로 돌아가려 하오? 그때 사람을 보내 전송하여 주겠소』


백제 부흥군의 敵前分裂

결정적 시기의 적전 분열로 백제 부흥군의 기세가 점차 꺾이기 시작했다. 663년 7월에 유인원·유인궤 軍은 웅진 동쪽에서 복신의 부흥군을 공격하여 지라성 및 윤성 등의 목책 등을 함락시켰다. 부흥군은 眞峴城(진현성)에 들어가 병력을 증강시켰으나, 나·당군의 협격을 받고 8백명의 전사자를 내고 다시 도주했다. 이로써 신라·웅진 간의 군량 수송로가 트이게 되었다.

이런 가운데 부여풍과 복신은 서로가 서로를 제거하려고 한다고 믿고 암투를 벌였다. 복신은 병을 칭하고 굴방에 누워 있으면서 부여풍이 문병을 오면 처치할 계획을 세웠다고 한다. 이를 탐지한 부여풍은 먼저 심복들을 풀어 기습적으로 복신을 체포하고, 그의 손바닥을 뚫어 가죽으로 묶었다.

복신은 참수를 당하면서 부여풍의 심복들에게 『썩은 개, 얼빠진 종놈』이라고 외쳤다. 복신의 머리는 소금물에 절여져 젓갈이 되었다.

부여풍은 왜국에 사자를 급파하여 구원병을 요청했다. 당시의 왜왕은 天智(천지)였다. 그가 바로 大化改新(대화개신)을 주도한 中大兄(나카노 오에) 황자로서 661년 7월 즉위 이후 백제 부흥군에 대한 지원태세를 강화해 왔다. 왜군 2만7천명이 속속 내도하여 백제 부흥군의 진영에 가세했다.

나·당군과 부흥군·왜국 연합군은 최후의 결전을 앞두고 大兵(대병)을 움직이기 시작했다. 문무왕은 대장군 김유신을 비롯하여 인문, 천존, 죽지 등의 28將을 거느리고 친정의 길에 올랐다. 당 고종은 좌위위장군 孫仁師(손인사)에게 山東兵(산동병) 7천을 주어 웅진도독부를 응원토록 했다.

문무왕의 신라군은 7월17일 웅진으로 들어가 손인사·유인원의 당군과 합세하여 8월13일 두솔성(충남 청양군 칠갑산)을 쳐서 함락시켰다. 문무왕은 포로가 된 왜병들을 풀어주며 말했다.

『우리나라는 너희 나라와 바다를 사이에 두고 경계를 나누고 있고, 서로 다투지 않고 사이좋게 교류해 왔는데, 무슨 까닭으로 오늘날 백제와 함께 악행을 하며 우리나라를 침해하려고 하느냐? 지금 너희 군사가 모두 내 掌中(장중)에 있으나 죽이지 않고 돌려 보내니, 돌아가서 너희 왕에게 이 사실을 알리도록 하라』

왜병을 통해 왜왕에게 훈계의 메시지를 보내는 문무왕의 솜씨가 이렇게 비범했다. 문무왕은 백제와 고구려의 멸망 후 전개될 동아시아 세계의 역학 관계까지 고려하여 미리 왜국에 대해 선심을 써둔 것 같다.


白江口 전투에서 궤멸당한 왜병 2만7천명

한편 4백 척 규모에 달한 왜의 수군은 주류성의 백제 부흥군을 지원하기 위해 白江口(백강구)로 접근하고 있었다. 주류성의 부여풍은 이를 접응하기 위해 騎兵(기병)을 거느리고 백강구 언덕으로 달려가 군진을 세웠다. 이에 유인궤, 杜爽(두상), 부여융(의자왕의 왕자)은 당의 수군을 거느리고 웅진에서 백강구로 진발했다. 663년 9월에 전개된 백강구 전투는 육전과 수전이 배합된 입체적 국제전이었다.

해안 언덕에는 부흥군의 기병이 포진하여 왜국의 전선을 보호했다. 신라의 기병이 부흥군의 기병에 대해 먼저 일격을 가해 기선을 제압함으로써 전단이 열리게 되었다. 이에 倭船(왜선) 4백 척은 唐船(당선) 1백70척에 대해 전후 네 차례에 걸쳐 선제 공격을 감행했다. 그러나 왜선은 唐船의 적수가 되지 못했다. 맞바람을 맞으며 돌진했던 왜선은 바람을 등진 唐船의 火攻(화공)에 걸려들어 불타기 시작했다.

왜선은 척수에 있어 唐船보다 훨씬 많았지만, 크기가 작은 데다 조선술의 낙후 때문에 배가 견고하지도 못했다. 唐船은 득의의 撞破戰法(당파전법)으로 왜선을 들이받았다. 왜선 4백 척을 불사르니, 화염이 하늘을 찌르고 바닷물도 붉게 물들었다. 백강구 전투에서 참패한 부흥군·왜군 병사들이 울부짖었다.

『백제라는 이름은 이제 끝났다. 앞으로 누가 조상의 묘소를 돌볼 것인가』

부여풍은 종자 몇을 데리고 고구려로 망명했다. 부여풍과 부여융은 형제간이면서도 각각 다른 진영에 붙어 싸웠으니 기구한 운명의 인물들이었다. 당 고종은 부여융을 웅진도독부의 도독으로 삼았는데, 실권은 유인원이 장악했다. 웅진도독부는 신라가 점령했던 옛 백제 영토의 일부까지 도로 내놓을 것을 요구했다. 이런 요구를 신라가 들어줄 리 없었다. 나·당 사이에는 이미 깊은 불신의 냉기류가 흐르고 있었다.

문무왕 4년(664) 봄 정월 김유신은 늙음을 이유로 은퇴를 청했다. 그의 나이 70이었다. 그러나 문무왕은 김유신의 은퇴를 허락하지 않고, 그에게 안석과 지팡이를 하사했다.

이 해에 唐將(당장) 유인원의 억지 주선으로 신라 王弟(왕제) 김인문과 웅진도독 부여융의 會盟(회맹)이 강행되었다. 신라로서는 괴뢰 부여융과의 회맹이 달갑지 않았지만, 勅命(칙명)을 빙자한 유인원의 요구를 거부할 수 없었다. 그런데 665년 당 고종은 한 술 더 떠 문무왕과 부여융의 회맹을 명했다.

665년 8월 양측은 웅진강 북쪽 就利山(취리산)에 제단을 쌓고, 문무왕과 부여융이 나란히 서서 회맹 의식을 거행했다. 의식은 먼저 천지와 산천에 致祭(치제)한 뒤 백마의 피를 나눠 마시는 절차를 밟았다.

패망한 백제가 신라와 대등한 집단으로서 회맹했다는 것은 모순일 뿐만 아니라 唐이 패권적 우위에 있는 한 웅진도독부가 곧 신라보다 우월한 위치로 변화할 가능성이 농후했다. 일찍이 부여융을 자기 말 앞에 꿇어앉혀 호령했던 문무왕으로선 치욕적이었지만, 후일을 기약할 수밖에 없었다.
<24편에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