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金庾信과 그의 시대(24)

정순태   |   2005-12-02 | hit 4857

金庾信과 그의 시대(24)

정순태


淵蓋蘇文의 세 아들이 벌인 권력 다툼

666년 여름 5월, 고구려의 독재자 淵蓋蘇文(연개소문)이 병사했다. 연개소문은 임종 때 세 아들에게 유언하기를, 『너희 형제들은 고기와 물처럼 화목하여 절대로 벼슬을 다투지 말라』고 했다. 장남 淵男生(연남생)은 삼군대장군과 태막리지의 벼슬을 계승했고, 차남 男建(남건)과 삼남 男産(남산)도 권력을 나눠 가졌다.

남생은 나름대로 중앙 권력을 다진 데 이어 지방 순시에 나섰다. 남생은 그의 부재 중 조정의 일을 남건과 남산이 대행하도록 했다. 이때 어떤 자가 남건과 남산에 접근하여 이간질을 했다. 「어떤 사람」을 唐에 포섭된 첩자로 보는 연구자들도 있다.

『남생은 두 아우가 자기 자리를 빼앗을까 두려워하여 처치하려 하니, 먼저 도모하는 것이 좋겠습니다』

남건과 남산은 처음엔 「어떤 사람」의 말을 믿지 않았던 것 같다. 이번에는 「어떤 사람」이 남생에게 접근하여 두 아우를 모략했다.

『두 아우가 형이 돌아오면 자기들의 권세를 빼앗을까 두려워하여 형에 대항하여 조정으로 돌아오지 못하게 하려 합니다』

남생은 심복을 가만히 평양으로 보내 두 아우의 동정을 살피게 했다. 일이 꼬이느라고 남생의 심복은 붙잡히고 말았다. 남건과 남산은 드디어 「어떤 사람」의 이간질에 넘어가고 말았다. 둘은 왕명을 빙자하여 남생을 소환했다.

남생은 겁을 먹고 入京(입경)하지 못했다. 이에 남건은 남생의 어린 아들 獻忠(헌충)을 죽이고, 스스로 막리지에 올라 남생을 토벌하려 했다. 곤경에 빠진 남생은 國內城(국내성)으로 달아나 그곳에 웅거하면서 15세의 아들 獻誠(헌성)을 당에 보내 구원을 청했다.

문무왕도 연개소문의 사망에 따른 정세 변화를 읽고 이미(666년 5월) 당 고종에게 청병을 요청한 바 있었다. 당 고종은 헌성을 향도로 삼아 龐同善(방동선) 부대 등을 요동으로 급파했는데, 요동의 고구려軍은 쉽게 무너졌다. 당군은 남생과 합류했다. 당 고종은 남생에게 요동도독 겸 平壤道 安撫大使(평양도 안무대사)로 임명하고, 현도군공으로 책봉했다.

666년 겨울 12월, 당 고종은 다시 李勣(이적)을 대총관으로 하는 고구려 원정군을 일으켰다. 이 무렵 연개소문의 동생 淵靜土(연정토)가 조카들의 내분에 실망하여 벼슬아치 24명, 백성 3천5백명 그리고 성 12개를 들어 신라에 투항했다. 고구려 지도부 스스로가 무너져내리고 있었다.

667년 9월, 당군이 요하를 건너 고구려를 침공했다. 대총관 이적은 고구려의 서변 요충 新城(신성)을 공격하여 항복을 받았다. 그 일대 16개 성도 싸우지 않고 모두 이적 軍에 항복했다. 고구려軍은 한때 총관 高侃(고간) 부대에 급공을 가해 승세를 타고 추격하다가 좌무위장군 薛仁貴(설인귀) 부대의 측면 공격을 받아 5만여명의 전사자가 발생했다.

이때 신라軍은 평양으로 가는 길을 뚫기 위해 임진강의 요새 七重城(칠중성:경기도 파주군 적성면)을 공파하고 獐塞(장새:황해도 수안)까지 북진했다. 여기서 김유신은 첩자를 보내 당군의 상황을 살폈다. 나·당 양군은 평양성을 남북에서 협공하기로 되어 있었다. 그러나 이적은 겨울 작전에 따른 병력 손실을 염려하여 당군을 철수시켰다. 신라軍도 회군했다. 이 시기에 김유신은 제1위의 관등인 角干(각간)도 부족하다 하여 대각간의 지위에 올랐다.


『우리의 올바름으로 적의 그릇됨을 친다』

668년 봄 정월부터 이적의 唐軍은 부여성을 공략했다. 남건은 군사 5만명을 보내 부여성을 구원하려 했지만, 장졸 5천명을 잃고 패퇴했다. 부여성 주변 고구려의 40여성도 싸워보지도 않고 항복했다.

이해 여름 6월, 유인궤와 당에 宿衛(숙위)로 가 있던 金三光(김유신의 장남)이 고구려 출병을 명하는 당 고종의 조서를 가지고 신라로 들어와 軍機(군기)와 전략을 논의하고 唐京(당경)으로 돌아갔다. 문무왕은 20만 대군을 일으켜 평양성으로 진발했다. 대총관(대장군) 김유신 이하 총관 38명이 참전하는 傾國之兵(경국지병)이었다.

이때 동원된 신라의 병력수가 20만이라는 「삼국사기」의 기록에 대해 「과장된 것」이라고 판단하는 연구자들도 적지 않고, 심지어 4만 정도라고 추측하는 분도 있다. 원래 농경사회의 병력동원에서는 7호 당 兵(병) 1명을 징발해야 농업 생산에 큰 지장이 없는 것으로 되어 있다. 이런 일반 원칙에서 볼 때 신라의 동원 능력은 10만명에 미달될 정도였다고 할 수 있는데, 20만명이라면 適定(적정) 능력의 2배를 웃도는 숫자임에는 틀림없다.

그럼에도 20만명이란 숫자를 뒤집을 만한 새로운 증거가 없는 한 「삼국사기」의 기록을 부정할 수는 없다. 문무왕은 신라까지 먹으려는 당의 팽창 정책을 눈치채고 있었던 만큼 고구려 정벌을 앞두고 신라의 可用(가용) 병력에 대해 총동원령을 내렸던 것으로 보인다. 그러니까 동원 병력 중 일부만 평양성 攻圍戰(공위전)에 투입되고, 나머지 병력은 당군의 남하에 대비해 국경지대에 포진시켰다는 얘기다.

20만 대군을 호령하는 일대 캠페인의 將이라면 백전노장 김유신일지라도 남에게 양보할 수 없는 지위였을 것이다. 그러나 김유신은 불운했다. 때마침 風(풍)을 앓아 일생 일대의 기회를 놓쳤던 것이다. 風이라면 요즘 사람들은 중풍을 연상하지만, 실은 오늘날의 感氣(감기)에 해당하는 증세로 보아야 한다. 옛 醫書(의서)에는 感氣에 해당되는 병명이 風으로 적혀 있다. 당시 김유신의 나이 74세였다. 강체질의 김유신이었지만, 그런 증세를 가지고 야전에 나서기에는 너무 고령이었다.

문무왕은 王弟(왕제) 인문과 김유신의 동생 欽純(흠순)에게 야전군의 지휘권을 주었다. 인문과 흠순은 인간적인 미안함 때문이었는지, 일단 완곡하게 사양했다. 둘은 『만일 유신과 함께 가지 않는다면 후회할 일이 생길지 모릅니다』라고 문무왕에게 진언했다. 문무왕이 답한다.

『공들 세 신하는 국가의 보배이니, 만약 한꺼번에 敵地(적지)로 갔다가 불의의 일이 있어 돌아오지 못한다면 나라 일을 어떻게 하겠는가? 유신공이 여기에 남아 있게 하면 은연중 나라의 長城(장성)과 같아 종내 근심이 없으리라』

인문과 흠순은 김유신을 찾아가 말한다.

『자질이 부족한 저희들이 왕명에 따라 앞날을 예측할 수 없는 땅으로 가게 되었습니다. 어떻게 하면 좋을지 가르쳐 주기 바랍니다』

김유신이 대답한다.

『무릇 장수란 나라의 干城(간성)과 임금의 손발이 되어 矢石(시석)의 사이에서 승패를 결하는 것이다. 반드시 위로는 天道(천도)를 얻고 아래로는 地利(지리)를 얻으며 중간으로는 人心(인심)을 얻은 뒤에야 성공할 수 있다. 지금 우리 나라는 忠信(충신)으로 인하여 존재하게 되었고, 백제는 오만으로 인하여 멸망했으며, 고구려는 교만으로 인해 위태롭게 되었다. 이제 우리의 올바름으로 저편의 그릇됨을 친다면 이기지 못할 것이 없다』


고구려의 멸망

김유신은 「諸葛亮心書」(제갈량심서)에 정통했음에 틀림없다. 「제갈량심서」는 『무릇 대세를 아는 데는 세 가지 요체가 있으니, 첫째가 天(하늘)이요, 둘째가 地(땅)요, 셋째는 人(사람)이다」라고 지적하고 있다. 김유신과 제갈량의 공통점은 둘 다 至誠(지성)의 장수였다는 것이다.

7월16일 漢城州(한성주)를 출발한 신라군은 평양성의 외곽 蛇水(사수:대동강 지류)에서 당군과 합류했다. 男建(남건)도 결전을 결심하고 출병했다. 사수 會戰(회전)에서 최고의 무훈을 세운 인물은 신라 장군 金文潁(김문영)이었다. 김문영이라면 8년 전 백제 공략 때의 統帥權(통수권) 다툼에서 김유신이 蘇烈을 제압하지 못했다면 蘇烈에게 참수될 뻔한 당시의 督軍(독군:군기장교)이다. 훗날의 얘기지만, 그는 上大等(상대등)으로 크게 출세한다.

김문영은 선봉장으로 나서 고구려軍의 본진을 대파했다. 고구려軍은 패주하여 평양성으로 퇴각했는데, 이로써 평양 성중의 기세가 크게 꺾였다.

드디어 고구려 보장왕은 男産(남산)으로 하여금 首領(수령) 98명과 함께 백기를 들고 항복하게 했다. 고구려 시대의 首領이라면 오늘날의 북한에서와는 달리 군의 장교였다. 그러나 막리지 남건은 성문을 닫고 수성전을 벌였다. 전세가 극히 불리한 가운데 남건은 승려 信誠(신성)에게 지휘권을 넘겼다.

信誠은 이적에게 密使(밀사)를 보내 內應(내응)하겠다는 뜻을 전하고, 5일 후 가만히 성의 북문을 열었다. 선발된 용사 5백명으로 구성된 신라軍 특전대가 제일 먼저 북문으로 뛰어들어 성루에 불을 질렀다. 남건은 칼로 자신을 찔렀으나 죽지 않았다. 당군은 보장왕과 남건 등을 붙잡았다. 이로써 고구려는 28왕 7백5년 만에 멸망했다.


唐의 동방 정책 견제한 김유신의 對倭 외교

李勣(이적)의 당군이 평양성 공위전의 주력이었던 것은 부인할 수 없는 역사적 사실이지만, 신라軍은 사수 전투, 평양성의 大門(대문) 전투, 평양 軍營(군영)의 전투, 평양 城內(성내) 전투, 평양 南橋(남교) 전투에서 모두 승전함으로써 고구려 평정에 결정적 전공을 세웠다. 그러나 당군은 승전의 果實(과실)을 거의 독식했다.

이적은 668년 10월 보장왕을 비롯하여 왕자, 대신, 백성 등 20만여명을 포로로 삼아 개선장군으로 귀국했다. 문무왕도 고구려인 7천여명을 포로로 데리고 귀환했다. 문무왕은 남한주에 이르러 여러 신하들에게 김유신의 공적에 대해 말하기를, 『그가 나가면 장수의 일을 하였고, 들어서는 재상의 일을 하였으니 그 공적이 매우 크다. 만일 공의 한 가문에 의지하지 않았더라면 나라의 흥망을 알 수 없었다』라고 했다. 이해 겨울 10월22일의 논공행상에서 김유신에게는 태대각간의 직위와 식읍 5백 호가 내려졌다. 문무왕은 또 그에게 수레와 지팡이를 하사하고, 殿上(전상)에 오를 때 허리를 굽힌 채 빠르게 걷는 신하의 예법을 따르지 않게 했으며, 그의 屬官(속관)들에 대해서도 각각 관등을 한 급씩 올려 주었다.

그러면 고구려를 멸망시킨 평양성 공위전에 직접 참전하지 않았던 김유신이 논공행상에서 제1위에 오른 이유는 무엇일까? 그것은 단지 그의 前功(전공) 때문이 아니었다. 「日本書紀」 天智(천지) 7년(688) 條의 기사는 주목할 수밖에 없는 김유신의 행적을 전하고 있다.

이해 9월12일 신라는 급찬 金東嚴(김동엄)을 파견하여 일본에 調物(조물)을 보냈다. 9월12일이라면 평양성이 함락되기 직전이니까 문무왕은 親征(친정)중이었다. 국왕 부재중의 王京(왕경)에서 김동엄의 왜국 파견을 주도한 인물은 김유신이었다고 해도 좋다.

왜냐하면 9월26일 일본의 內大臣(내대신) 中臣鎌足(나카도미노 가마다리)이 중(僧) 法弁(호오벤)과 秦筆(신히쓰)를 시켜서 김유신에게 배 한 척분의 回謝品(회사품)을 보냈기 때문이다. 이어 29일에는 일왕 天智가 문무왕에게 進調船(진조선) 한 척을 보냈다.

天智·中臣의 관계는 일본판 김춘추·김유신 동맹이었다. 642년 황자 中大兄(중대형)이 大化改新이라는 쿠데타를 일으켜 권력을 장악했을 때 中臣은 中大兄의 오른팔이었는데, 中大兄이 661년 즉위하여 천지천황이 된 것이다. 이후 中臣은 일본 최고의 문벌인 藤原(후지와라) 가문의 시조가 되었다.

김유신이 외교적 이니셔티브를 구사하기 직전까지만 해도 신라와 왜국은 仇敵(구적) 관계였다. 신라는 고구려에 대한 최후의 공격을 하기 위해 병력을 대거 북상시키면서 배후 왜국의 동향에 신경을 쓸 수밖에 없었을 것이다. 더욱이 왜국은 663년 백제 부흥군을 지원하기 위해 2만7천명의 大兵을 파견했다가 백강구 전투에서 패배한 후 九州(규슈) 일대에 산성을 쌓고, 나·당 양군이 자기들을 치러 오지 않을까, 잔뜩 긴장하고 있었다.

김유신의 메시지는 그런 왜국의 위기 의식을 해소시키는 내용이었을 것이다. 신라가 주도적으로 왜와 국교를 재개한 것은 對 고구려 전쟁 기간중의 배후 위협을 제거하려는 의도뿐만은 아니었을 것이다. 신라의 수뇌부는 이미 對唐 전쟁이 불가피한 것으로 예견하고 있었다. 따라서 김유신의 對日 외교는 향후 對唐 전쟁에 대비한 주변 외교였다고 보아야 한다.

일본은 이해 11월 초순에도 문무왕에게 비단 50필, 풀솜(綿) 5백 근, 가죽 1백 장을 보냈다. 이런 교류는 나·왜 양국이 왕은 왕끼리, 重臣(중신)은 중신끼리 격에 맞는 인사를 차리면서 무역을 했다는 점 이상의 의미를 지니고 있음은 물론이다. 이것은 당의 팽창 정책을 견제하는 나·왜 간의 관계 개선이었다.

김유신은 동아시아 세계를 움직이는 핵심 인물이었다. 당 고종도 김유신 앞으로 조서를 보내 그의 전공을 표창하고, 입조할 것을 명했다. 그러나 김유신은 입당하지 않았다. 고구려 멸망 후에 곧 나·당 간에 힘겨루기가 표면화되고 있었기 때문에 입당할 분위기가 아니었을 것이다.
<25편에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