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金庾信과 그의 시대(2)

정순태   |   2005-11-16 | hit 6727

시대정신은 亂世의 평정

亂世(난세)의 백성들은 혼란을 빨리 끝장내 주는 영웅의 출현을 갈망한다. 金庾信(김유신)이 역사 무대에 등장하던 무렵의 시대정신은 피를 피로 씻는 세상을 평정하여 평화의 시대를 만들어 내는 것이었다.
삼국시대는 우리 역사상 최대의 戰國時代(전국시대)였다. 전국시대는 群雄(군웅)을 배태하는 자궁이다. 백제의 近肖古王(근초고왕·346~375), 고구려의 廣開土王(광개토왕·391~413), 신라의 眞興王(진흥왕·540~576)은 모두 富國强兵(부국강병)의 英主(영주)들이었다.
근초고왕 대의 백제는 평양을 공격하여 고구려의 故國原王(고국원왕)을 敗死(패사)시키고, 중국 遼西(요서) 지방을 經略(경략)했으며, 倭王(왜왕)을 侯王(후왕=제후왕)으로 삼았다. 백제의 전성시대와 본격적 전국시대를 동시에 개막시켰던 것이다.
광개토왕은 南征北伐(남정북벌)을 통해 백제의 阿莘王(아신왕)을 굴복시키고, 신라의 보호자로서 王京(왕경) 서라벌에 고구려군을 주둔시켰으며, 부여와 숙신 등을 공략하여 북방 영토를 확대했다. 고구려 중심의 동북아 질서를 창출했던 것이다.
진흥왕 대의 신라는 고구려의 南進勢(남진세)를 꺾은 다음 백제의 聖王(성왕)을 전사시키고, 대가야를 비롯한 가야연맹의 영토를 완전히 병합했다. 우리 역사상의 4국시대를 3국시대로 압축시키면서 한반도의 핵심부인 한강과 낙동강의 지배자로 등장했던 것이다.
그러나 그 누구도 삼국을 하나로 통합하는 압도적인 힘을 발휘하지 못했다. 그것은 우리 민족사 발전 단계의 문제라기보다는 삼국의 국력이 팽팽한 互角之勢(호각지세)를 이루고 있었기 때문이라고 할 수 있다.
삼국의 쟁패전은 589년 중국 대륙에서 통일제국 隋(수)가 대두하면서 새로운 국면으로 접어든다. 590년 隋 文帝(수 문제) 楊堅(양견)은 고구려 平原王(평원왕·559~590)에게 다음과 같은 내용의 국서를 보낸다.
「遼水(요수=요하)의 넓이가 長江(장강=양자강)과 비교하여 어떠한지, 고구려의 인구가 陳(진)과 비교하여 어떠한지, 왕은 말하여 보라!」
외교 문서라기보다는 도전장이자 협박장이었다. 楊堅은 隋軍(수군)이 한해 전 양자강을 건너 南朝(남조) 최후의 왕조 陳을 멸망시키고 中原(중원)을 통일한 여세를 몰아 고구려 국왕의 복속을 강요하기 시작했던 것이다. 왕이 직접 와서 무릎을 꿇지 않으면 開戰(개전)하겠다는 통첩이었다.
고구려 평원왕은 군사 훈련, 군량 비축 등 국방 강화책을 서두르면서도 隋 文帝에게 朝貢使(조공사)를 보내는 和戰 兩面策(화전 양면책)을 구사했다. 그러나 평원왕은 이 해 겨울 10월 재위 32년 만에 죽고, 그의 맏아들 陽王(영양왕·590~618)이 왕위에 올랐다. 수 문제는 사신을 보내 영양왕에게 上開府儀同三司(상개부의동삼사)의 관위를 내리고 평원왕의 관직이었던 遼東郡公(요동군공)을 계승케 했다.
隋의 三品(3품) 관위와 郡公(군공)의 관직을 내린다는 것은 동북아의 강자 고구려 국왕의 체통을 여지없이 깎겠다는 얘기였다. 이처럼 중국 통일왕조의 군주들은 이웃 나라에 대해 으레 오만무례했다. 그래서 중국 주변국들은 中原(중원)의 분열을 좋아한다. 분열기의 中原 왕조들은 북방 스텝지역의 유목 강국들에 대해 비굴할 정도로 아부를 했다. 힘이 지배하는 국제정치 메커니즘의 실상은 예나 지금이나 바로 이러한 것이다.
예컨대 남북조 말기 北齊(북제)와 北周(북주)의 두 황제는 돌궐의 陀鉢可汗(타발가한)을 아버지로 섬기면서 막대한 조공품을 경쟁적으로 상납했다. 이때 돌궐의 타발가한은 절정의 짜릿함을 만끽하며 다음과 같은 호언을 한다.
『나에게 중국 황제라는 효성스런 아들이 둘이나 있으니까 가난의 걱정이 없노라!』

중원 통일 제국 隋의 대두

이런 돌궐도 타발가한의 사후에 東西로 분열되고, 隋의 등장 이후에는 그 위세가 크게 꺾였다. 隋 文帝(문제)는 東돌궐의 啓民可汗(계민가한)을 후원하여 西돌궐을 멀리 내쫓고, 東돌궐을 朝貢國(조공국)으로 삼았다.
文帝 시절의 隋는 인구가 4천5백만명에 달했으며, 減稅(감세) 정책을 썼는데도 막대한 財政黑子(재정흑자)를 시현하여 「錢穀珍寶(전곡진보)가 國庫(국고)에 흘러 넘쳤다」고 기록되었을 만큼 국력의 피크타임이었다. 文帝는 여러 가지 개인적 약점이 있었긴 해도 3백50년에 걸친 혼란의 시대를 治世(치세)로 바꾼 중국 역사상의 名君(명군)임에는 틀림없다.
영양왕으로서도 수 문제의 눈치를 살필 수밖에 없었다. 일단 몸을 낮춘 영양왕은 591년 봄 정월에 사신을 보내 表文(표문)을 올리고 왕으로 책봉해 줄 것을 간곡히 요청했다. 그제서야 수 문제는 영양왕을 고구려 국왕으로 인정했다. 이후 영양왕은 수에 조공사를 자주 파견하여 친선 관계를 도모했다.
그러던 고구려의 자세가 돌변했다. 598년 영양왕은 몸소 군사 1만을 거느리고 요하를 건너 隋의 遼西(요서) 지방에 대한 선제 공격을 감행했다. 그 이유는 확실치 않으나, 隋의 침공 기미를 눈치채고 적의 전진기지를 먼저 때려 놓는다는 전략적 판단 때문이었던 것으로 보인다.
고구려군은 營州摠管(영주총관) 韋沖(위충) 軍이 반격에 나서자 이렇다 할 전투 없이 슬그머니 물러났지만, 수 문제는 격노했다. 隋의 패권에 의한 東아시아의 朝貢冊封(조공책봉) 체제에 정면으로 도전했던 것이다. 수 문제는 곧 그의 넷째 아들 楊諒(양량=漢王)과 王世績(왕세적)을 원수로 삼아 水陸軍(수륙군) 30만을 동원하여 고구려 정벌전에 나선다. 그러나 수군은 한 번 싸워보지도 못하고 자멸했다.
隋의 육군은 국경의 군사 거점인 임유관까지 진군했으나 장마 때문에 군량 수송에 차질을 빚은 데다 軍中에 전염병이 돌아 전력을 상실해 버렸다. 周羅(주라후)가 이끈 水軍 함대도 평양으로 항진중 황해상에서 풍랑을 만나 거의 모두가 침몰했다.
고구려로선 일단 수 문제의 분노를 누그러뜨려야 할 필요가 있었다. 영양왕은 『糞土(분토)에 사는 신하 某』라고 운운하는 사죄의 表文을 올렸다. 이런 립서비스라면 실질적으론 손해볼 것이 없으므로 오히려 현명한 외교라고 할 만하다.
이런 거래가 오가는 판에 백제가 끼어들었다. 백제의 威德王(위덕왕)은 고구려에 대한 재정벌을 요청하면서 隋軍의 嚮導(향도)가 될 것을 자청했다. 수 문제는 당장에 군사를 동원할 형편이 아니었으므로 말로는 『고구려가 이미 服罪(복죄)하여 용서했다』는 반응을 보이는 등 체면치레를 했지만, 내막적으로는 고구려 재침을 위해 백제 사신을 크게 환대했다. 이후 한동안 수-백제의 밀월 관계가 계속된다.
이번에는 고구려가 발끈했다. 고구려로선 자기 머리 위에서 전개되는 수-백제의 군사동맹 관계를 그냥 놔둘 수 없었다. 고구려 軍은 백제의 변경을 침공하여 한바탕 징벌전을 전개하여 남북에서 협공할 우려가 있는 수-백제의 군사동맹을 일단 견제했다.
삼국간에는 서로가 서로에게 풀지 못한 원한이 누적되어 왔다. 7세기의 개막과 더불어 삼국 중 가장 먼저 소강 상태를 깬 군주는 600년에 즉위한 백제의 武王(무왕)이었다. <삼국사기>에는 무왕이 「풍채가 훌륭하고, 뜻이 호방하며, 기상이 걸출했다」고 쓰여 있다.
武王은 554년 聖王(성왕)의 전사 이후 처음으로 벼르고 벼르던 복수전을 전개한다. 그의 상대는 신라의 진평왕이었다. <三國遺事>(삼국유사)에 기록된 서동의 로맨스가 사실이라면 무왕은 바로 진평왕의 사위다.
왕위에 오르기 전의 무왕은 진평왕의 셋째 딸이 美色(미색)이라는 소문을 듣고 신라에 잠입하여 지모로써 선화공주를 품 속에 넣은 薯童(서동=맛동), 바로 그다. 그러나 국가 이익의 추구에 있어서는 장인-사위의 관계라고 해서 달라질 것이 별로 없다.
진평왕 24년(602) 가을 8월에 백제군은 신라의 阿莫山城(아막산성:전북 남원시 운봉읍)을 포위 공격한다. 진평왕은 정예 기병 수천기를 급파, 전세를 역전시켰다. 승세를 탄 신라군은 백제 동쪽 변경에 진공하여, 泉山(천산: 전북 장수군) 등지에 4개 성을 쌓고 백제를 압박한다.

신라 화랑 貴山의 臨戰無退

백제의 영토는 東高西低(동고서저)다. 동쪽 산악지대를 점령하여 서쪽 평야지대를 내려다보는 신라군을 그냥 놔둘 무왕이 결코 아니었다. 격노한 무왕은 좌평(제1위의 관등) 解(해수)에게 步騎(보기) 4만을 주어 4개 성의 탈환전을 벌인다. 해수의 군단에는 倭兵(왜병)도 끼어 있었다. 이번에는 신라군이 궤멸의 위기에 빠진다. 이때 화랑 출신 貴山(귀산)과 추항이 소리높여 외친다.
『내 일찍이 스승에게 들으니, 군사는 적군을 만나 물러서지 않는다고 했다. 어찌 감히 패해 달아날 수 있으랴?』
귀산과 추항의 스승이라면 2년 전(600) 중국 유학을 마치고 귀국한 圓光 法師(원광 법사)다. 원광은 그의 수도처 加悉寺(가실사·경북 경산)로 찾아온 두 젊은이에게 저 유명한 世俗五戒(세속오계)를 가르친 신라 호국 불교의 祖宗(조종)이다.
세속오계는 事君以忠(사군이충), 事親以孝(사친이효), 交友以信(교우이신), 臨戰無退(임전무퇴), 殺生有擇(살생유택)이다. 귀산과 추항은 온몸에 창칼에 찔리는 전상을 입고 전투 직후에 죽었으나, 세속오계의 제4항 臨戰無退가 과연 무엇인지를 처음으로 實戰(실전)에서 시범을 보였다.
귀산 등의 임전무퇴로 사기가 오른 신라군은 백제군을 철저하게 격파했다. <삼국사기> 열전에 따르면 쓰러진 백제군의 시체가 들판을 메우고 말 한 필, 수레 한 채도 돌아가지 못했다. 다만 백제군의 장수 해수만은 단신 도주했다.
한강 유역을 집어삼킨 신라는 백제, 고구려 공동의 적이었다. 바로 다음 해(603) 가을 8월에는 고구려가 高勝(고승)을 장수로 삼아 북한산성(서울 江北지역)을 침공했다. 진평왕은 몸소 1만병을 이끌고 출전하여 고구려군을 간신히 격퇴했으나, 二正面(2정면) 작전에 따른 國家疲勞度(국가피로도)는 가중되었다.
604년 수 문제가 고구려 정벌의 소원을 이루지 못한 채 죽고, 그의 차남 楊廣(양광)이 즉위했다. 그가 바로 수의 煬帝(양제)다. 煬帝라면 원래 色(색)을 밝히고 백성을 착취했던 군주가 죽은 뒤 부여받는 諡號(시호)다. 楊廣은 제2 황자 시절에 총사령관이 되어 멸망시킨 陳의 後主(후주)에게 煬帝라는 시호를 부여했는데, 그 역시 死後에 양제란 시호를 받았으니까 기막힌 인과응보라고 할 만하다.
<隋書>(수서) 열전에는 양광이 文帝의 애희 陳夫人(진부인)을 농락한 사실이 폭로되어 황태자의 지위를 잃을 위기에 봉착하자, 병든 문제를 시해하고 그날 밤 陳부인을 품었다고 쓰여 있다. 그러나 文帝 本紀(본기)의 기록은 전혀 달라 양광에 의한 文帝 피살설은 史家(사가)들에 의해 대체로 부인되고 있다.
그야 어떻든 개인적 자질로 본 양광은 詩文(시문)에 능통하고 나름의 지략도 있었다. 그의 병통은 허영심과 자존망대였다.
양제가 천하를 호령하자, 백제 무왕은 607년 率(한솔·제5위의 관등) 燕文進(연문진)을 파견하여 수 양제에게 조공을 했다. 이어 佐平(좌평·제1위의 관등) 王孝隣(왕효린)을 보내 고구려를 남북에서 함께 치자고 부추겼다.
이에 고구려의 영양왕이 울컥했다. 607년 여름 5월 고구려군은 백제의 松山城(송산성)을 공격하다가 함락시키지 못하자, 다시 石頭城(석두성)을 기습하여 남녀 3천명을 사로잡아 회군했다.
바로 이해에 수 양제는 노골적으로 영양왕의 入朝(입조)를 강요했다. 이것은 항복하러 오라는 얘기에 다름 아니다. 사단은 엉뚱한 데서 빚어졌다.
수 양제는 30만 대군의 옹위를 받으며 북쪽 변경을 순시하면서 돌궐의 군주 啓民可汗(계민가한)의 幕府(막부)에 들렀다. 이에 앞서 계민가한은 몸소 보검을 뽑아 들고 수 양제가 묵을 초대형 빠오(천막) 주변의 풀을 베는 등 草原(초원)의 王者(왕자)로선 체신머리 없는 언동을 서슴지 않았다. 「隋書」에 따르면 계민가한의 가상한 행동에 크게 만족한 수 양제는 除草(제초) 작업의 품삯도 포함하여 무려 20만필의 비단을 하사했다. 수 양제는 이처럼 손이 큰 기분파였다.
하필이면 이때 공교롭게도 계민가한의 幕府(막부)에는 고구려의 사신이 방문하고 있었다. 고구려로선 수의 압력을 완화하려면 돌궐과의 연대가 필요했다. 그런데 중국의 통일 왕조는 전통적으로 境外之交(경외지교), 즉 중국이 모르는 주변국들 간의 외교를 금지했다. 계민가한은 고구려 사신의 방문을 비밀로 하다가 들통날 것을 우려하여 수 양제에게 以實直告(이실직고)를 하고 만다. 이에 수 양제는 기고만장하여 고구려 사신을 불러 꾸짖는다.
『너희 왕이 入朝하지 않으면 계민가한을 앞세워 너희 나라를 징벌하려 한다!』
<삼국사기>에 따르면 영양왕은 「풍채가 준수하고 쾌활한」인물이었다. 이런 품성의 군주들은 좀처럼 주눅이 들지 않는다. 수와의 한판 승부가 불가피하다면 우선 배후의 적부터 강타해둘 필요가 있었다. 영양왕의 고구려군은 진평왕 30년(608)년 봄 2월에 신라 북쪽 변경을 습격하여 8천명을 포로로 잡아 간다. 이어 여름 4월에는 다시 신라의 牛鳴山城(우명산성)을 탈취했다.

15세에 화랑 조직의 제2인자로 발탁돼

만노군(충북 진천)에서 출생하여 거기서 소년기를 보낸 청년 金庾信이 王京 서라벌에 첫발을 디딘 것은 바로 이런 격동의 시기였다. 필사본 <화랑세기>에 따르면 만호 태후(진평왕의 母后)에게 불려가 외손자로 인정받은 金庾信은 그로부터 화랑도 내부 伽倻派(가야파)의 희망이 되었고, <삼국사기> 金庾信 傳에는 『公의 나이 15세 때 화랑이 되었다」고 기록되어 있다. 이런 사실 등으로 미루어 보면 金庾信의 上京(상경)은 608년이나 빨라도 그 한 해 전쯤의 일로 짐작된다.
그러니까 金庾信의 부모 서현-만명 부부는 오랫동안 변경 생활을 하다가 만호 태후의 배려로 그야말로 겨우 入京(입경)할 수 있었다. 서현-만명 부부는 슬하에 2남2녀를 두었다. 후일 삼국 통일의 원훈 중 하나가 되는 차남 欽純(흠순)은 金庾信의 세 살 밑 동생이니까, 그 역시 만노군에서 태어나 12세쯤의 나이로 이때 처음 상경했던 것으로 보인다.
金庾信이 신라 왕실의 최고 어른 萬呼太后로부터 그녀의 外孫(외손)으로 인정을 받았던 경과는 이미 앞에서 썼다. 그는 열다섯의 나이로 대번에 14세 風月主(풍월주·신라 화랑의 최고 리더) 虎林公(호림공)의 副弟(부제)로 발탁되었다. 부제라면 화랑 조직의 넘버 투 맨이다. 변두리 태수를 지낸 일개 武將(무장)의 아들로서는 눈부신 출세였다.
이것은 신라의 위기 상황에서만 가능했던 발탁이라고 할 수 있다. 국가적 위기를 타개해 나갈 인물은 王京에서 곱게 성장한 귀공자가 아니라 변경에서 야생마처럼 씩씩하게 자란 청년들 중에서 배출될 것이라는 신라 왕실의 기대감 때문이었다고 해도 좋을 것 같다. 그렇다면 청년 金庾信의 자질이 뛰어났다는 얘기다.
金庾信이 主兄(주형: 풍월주에 대한 호칭)으로 받든 호림 公은 진평왕의 장인인 福勝(복승) 葛文王(갈문왕: 왕의 장인 등에 대한 존칭)의 아들이었다. 진평왕의 妃(비) 摩耶夫人(마야부인)이 바로 호림 公의 맏누이다. 훗날 선덕여왕 때 신라 불교의 최고 지도자인 大國統(대국통)에 오른 慈藏 律師(자장 율사)는 호림의 아들이다.
호림은 심지가 맑고 곧을 뿐만 아니라 재물을 아낌없이 나눠 주었으므로 당시 사람들로부터 脫衣地藏(탈의지장)이란 칭송을 받았다. 지장이라면 불교의 메시아인 미륵불이 출현할 때까지 裟婆世界(사바세계)에 남아서 중생을 교화하는 大悲(대비)의 보살인데, 거기에다 중생 구제를 위해 입고 있던 옷까지 벗었다니(脫衣) 대단한 利他行(이타행)인 셈이다.
호림은 『仙道(선도=화랑도)와 불도는 하나의 도이니 화랑 또한 부처님을 모를 수 없다』면서 菩利 公(보리 공. 원광 법사의 아우로서 12대 풍월주 역임)에게 나아가 계율을 받았다. 이후 화랑도와 불교가 하나로 융합되기 시작한다.
화합의 인물 호림 공의 바로 밑에서 차기 풍월주를 향한 제1순위의 포스트를 차지할 수 있었다는 것은 망국 가야의 후예 金庾信에겐 대단한 행운이었다. <삼국사기> 金庾信 傳(전)에는 「당시 사람들은 그를 기꺼이 따르며 그 무리를 龍華香徒(용화향도)라 불렀다」 기록되어 있다.
용화라면 불교의 메시아(救世主)인 미륵불을 가리키며, 향도는 禮佛 結社(예불 결사)다. 불교 경전에 따르면 미륵불은 裟婆(사바)세계에 내려와 용화수 밑에서 대법회를 베풀어 중생을 구제하는 미래의 부처다. 그러니까 金庾信은 장차 佛國土(불국토) 신라를 구원할 미륵불과 같은 존재로 비유되었던 셈이다. 물론 유독 金庾信에게만 그런 신라 사회의 기대가 모아졌던 것은 아니다.

메시아 미륵불에 비유된 청년

<삼국유사> 제4 塔像(탑상) 편을 보면 흥륜사의 중 眞慈(진자)가 未尸郞(미시랑)이란 동자를 미륵의 化身(화신)으로 믿고 왕에게 천거하여 화랑으로 세우는 기록도 나온다. 위기의 신라는 이럴 만큼 미륵의 출현을 대망했다. 화랑=미륵이기를 염원했다는 얘기다.
金庾信이 화랑도의 제2인자로 뛰어오른 경과를 살펴보면 어떤 운명성을 느끼게 한다. 필사본 <화랑세기>에 따르면 당초 副弟의 지위를 놓고 金庾信과 경합했던 인물은 美室 宮主(미실 궁주)의 막내 아들 寶宗(보종)이었다.
미실은 파워게임에 능숙하고 文才(문재)도 뛰어난 데다 섹스어필에 관한 한 신라 제1의 여성이었다. 그녀는 진흥왕-진지왕-진평왕으로 이어지는 3代 임금의 침실에서 총애를 받으며 화랑 정치에 막강한 영향력을 발휘했다.
처녀 시절의 미실은 5세 풍월주로서 요절한 斯多含(사다함)의 연인이었고, 6세 풍월주이며 出將入相(출장입상)의 인물인 世宗(세종)은 그녀의 남편이었다. 또 7세 풍월주 薛原郞(설원랑)은 그녀의 情夫(정부)였고, 10세 풍월주 美生(미생)은 그녀의 동생이었으며, 11세 풍월주 夏宗(하종)은 그녀와 世宗 사이의 아들이었다.
미실의 일생을 추적하는 것이야말로 近親婚(근친혼)과 私通(사통) 관계로 얽히고 설킨 화랑의 인맥을 꿰뚫어 볼 수 있는 지름길이지만, 이미 <月刊朝鮮> 1999년 4월호의 졸고 <화랑세기의 정체>에서 상술했으므로 여기선 생략한다.
다만 寶宗의 출생을 둘러싼 비화만은 이 글의 진행상 간단히 짚고 넘어갈 필요가 있을 것 같다. 이것은 프리섹스를 누리던 신라 귀족 여성의 모습을 적나라하게 드러내는 대표적 사례이기도 하다. 다음은 필사본 <화랑세기>의 관련 기록이다.
<弘濟(홍제) 8년에 (중략) 미실 궁주는 璽主(새주·宮中의 직책인 듯함)가 되어 政堂(정당)에서 책을 보고 있었다. 그러다 대낮에 흰 양이 품 속으로 들어오는 꿈을 꾸고 난 후, 이것이 길몽임을 깨닫고 서둘러 임금을 이끌고 침실로 들어갔다. 그러나 그때 임금이 아직 어려서 雲雨(운우)의 정을 도울 수 없었다. 이에 미실 궁주는 다시 衿荷(금하) 薛原郞에게 침소로 들어와 자신을 모시게 했다. 그리하여 보종 公을 낳았다>
홍제 8년은 진평왕 원년(579)이다. 홍제는 진흥왕 33년(572)에서 진평왕 5년(583)까지 사용된 연호다. 그러니까 위의 記事(기사)에서 여자를 몰랐던 어린 임금은 진평왕이다.
설원랑은 엄격한 骨品制(골품제)가 지배하던 신분사회의 높은 장벽을 한 줄기 봄바람과 같이 부드럽게 넘어간 멋쟁이였다. 그의 성씨인 薛(설) 씨에서 짐작할 수 있듯 그의 신분은 六頭品(6두품)이다. 6두품이라면 제 아무리 재주가 있다고 하더라도 신라의 17官等(관등) 중 제6위에 해당하는 阿(아찬)까지만 오를 수 있는 신분이다.
그런데 위의 기사를 보면 설원랑의 관직은 衿荷臣(금하신)에 이르고 있다. 금하신은 位和府(위화부)의 令(영=장관)이다. 위화부는 진평왕 3년(581)에 창설되어 나라의 법제와 관리의 선발 및 인사를 맡은 관청이다.
고위 官等(관등)의 귀족이 맡던 금하신의 지위를 제6위의 관등인 설원랑이 차지했다는 것은 대단히 예외적인 일이었다. 설원랑은 대단한 미남자였는데다 피리의 달인이었으며, 仙道(선도)에 해박하여 미실의 천거에 의해 제7세 풍월주에 오른 데 이어 신라 조정의 핵심 요직을 맡았던 것이다.
미실과 설원랑의 私通(사통)에 의해 태어난 보종은 어린 시절에 멋모르고 진평왕을 아버지라고 불렀다. 그러나 보종은 자랄수록 설원랑의 모습을 닮아갔다. 결국 보종은 그의 生父(생부)인 설원랑에게 돌아갔으나, 진평왕은 보종을 아들같이 여기고 자주 상을 내리는 등 애지중지했다.
요즘 사람들이 들으면 해괴망칙한 얘기지만, 신라 남성은 그가 왕이든 귀족이든 이처럼 바람 피우는 아내나 애인에 대해 處容歌(처용가)의 처용처럼 관대했다. 진평왕에게 보종의 존재는 摩腹子(마복자)였다. 신라에서는 자기의 情婦(정부)가 다른 남자와 관계하여 낳은 아들을 마복자라고 불렀다. 신라 21대 소지왕의 경우 이런 마복자 7명을 寵臣(총신)으로 삼기도 했다.

경쟁자까지 추종자로 만든 품성

그런데도 金庾信이 미실의 아들인 寶宗을 앞질렀다는 것은 얼른 이해하기가 어렵다. 다음은 그 배경을 짐작게 하는 필사본 <화랑세기>의 관련 기록이다.
<보종공은 (中略) 유신공이 여러 사람들에게 명망이 있다고 하여 그 자리를 양보하니 대개 미실 궁주가 萬呼 太后(만호 태후·진평왕의 母后)를 위로하고자 하여 명한 것이다>
金庾信이 만호 태후로부터 『참으로 내 손자』라는 인정을 받았다는 얘기는 앞에서 썼다. 그러나 만호 태후의 핏줄 인정만으로 金庾信이 두각을 나타낸 것은 결코 아니다. 신라 귀족 사회에선 그 이상의 혈통을 가진 청년들이 수두룩했다. 그렇다면 그 이유는 무엇일까?
소싯적부터 金庾信은 남을 심복시키는 비상한 품성을 지닌 인물이었던 것 같다. 예컨대 그에게 부제의 지위를 양보한 보종 公도 다섯 살 아래의 그를 따랐다. 다시 필사본 <화랑세기>의 기록을 인용한다.
<보종 공은 (중략) 아침에 일어나면 정원에 가득한 고목을 바라보았고, 물고기와 학을 기르며 그 가운데를 거닐었다. 특히 유신 공을 아버지나 형처럼 외경했다. 유신 공이 말한다.
『형은 어찌하여 아우를 두려워하십니까?』
『공께서는 하늘의 해와 달이고 저는 인간 세상의 작은 티끌이니, 어찌 감히 두려워하고 공경하지 않겠습니까?』
(中略) 이에 유신 공이 낭도들에게 호령한다.
『너희들 중에서 仙道를 배우려거든 보종 형을 따르고, 나라를 지켜 공을 세우려거든 나를 따르라』>
보종은 문장을 좋아하고 성품이 온순하여 마치 여성과 같았다. 음주나 여색을 꺼리고, 항상 작은 당나귀를 타고 피리를 불며 다니니 사람들은 그를 가르켜 「眞仙公子」(진선공자)라고 불렀다. 그는 金庾信이 병에 걸리기라도 하면 치료하는 데 온 정성을 기울였다고 한다.
『公께서는 나라의 보배이니 저의 의술을 숨길 수 없습니다』
보종은 창 칼과는 거리가 먼 文士(문사)이며 과학자였다. 이런 보종의 장래를 염려한 미실은 金庾信에게 가만히 부탁한다.
『내 아들은 어리석고 나약하니 도와 주기 바라오』
金庾信의 대답이 매우 사려깊다.
『제가 진실로 어리석습니다. 형(보종)은 비록 나약하지만, 仙道가 원대하니 염려하지 마십시오』
훗날의 얘기지만, 金庾信은 나라에 큰 일이 있으면 반드시 보종 공을 먼저 만나 물어보았다고 한다. 그만큼 보종의 견해를 중시했다는 얘기다. 金庾信과 보종의 관계는 文武(문무)의 절묘한 하모니라고 할 수 있다.

花郞徒는 全人 교육기관

화랑 제도의 특징은 문무의 균형적 배합에 있다. 그것은 단순한 무관 양성 학교가 아니라 국가와 시대가 요구하는 文武兼全(문무겸전)의 엘리트를 양성하는 全人(전인) 교육기관이었다. <삼국사기>에는 「金大問(김대문·화랑세기의 저자)이 말하기를, 여기서(花郞徒) 현명한 재상과 충성스런 신하가 선발되었고, 뛰어난 장수와 용감한 병사가 나왔다고 했다」고 기록되어 있다.
그렇다면 화랑 조직의 체제와 기능을 살펴볼 필요가 있다. 화랑 조직을 보면 풍월주-부제의 지도 체제 아래 3인의 大花郞(대화랑)이 병립해 있었다.
左方(좌방)대화랑 밑에는 左화랑 2인, 小화랑 3인, 妙(묘)화랑 7인이 있고, 그 아래 3部를 두어 道義(도의), 文事(문사), 武事(무사)를 관장했다.
右方(우방)대화랑 밑에는 右화랑 2인, 小화랑 3인, 妙화랑 7인이 있고, 그 아래 3部를 두어 玄妙(현묘), 樂事(악사), 藝事(예사)를 관장했다.
前方(전방)대화랑 휘하에도 역시 3部를 두어 遊花(유화), 祭事(제사), 供事(공사)를 관장했다. 이밖에 眞骨(진골)화랑, 別門(별문)화랑, 別方(별방)화랑 등을 두어 12, 13세의 귀족, 巨門(거문) 출신의 자제들이 참여토록 했다.
<삼국사기> 진흥왕 37년(576)條의 기사를 보면 신라가 어떤 방식으로 인재를 뽑아 썼는지에 대한 해답이 나온다.
<진흥왕 초기에 임금과 신하들이 인재를 알아볼 수 없는 것을 문제로 여겼다. 이에 여럿이 모여 서로 어울리도록 하고, 그들의 행동거지를 살펴 본 후에 적절한 자를 천거하여 임용하기로 했다.>
여러 청년들을 모아놓고 단체로 수련 생활을 시키면 자연히 각자의 능력과 개성이 드러나게 마련이다. 그러면 그들은 과연 어떻게 수련을 했던 것일까. 다음은 이어지는 <삼국사기>의 기록이다.
<(前略) 그들은 더러는 도의로써 서로 연마하고(相磨以道義), 더러는 노래와 춤으로 서로 즐기면서(相悅以歌樂) 산수를 찾아 노닐어(遊娛山水), 먼 곳이라도 그들의 발길이 닿지 않은 곳이 없었다(無遠不至)>
경주국립박물관에 가서 壬申誓記石(임신서기석) 앞에 서기만 하면 「도의로써 서로 연마했다」는 말이 무엇을 뜻하는지 대번에 가슴에 와닿는다. 임신서기석은 壬申年(임신년·552년 혹은 612년으로 추정됨)에 화랑 둘이서 하늘에 굳게 맹세하는 글을 새겨넣은 높이 34cm 짜리 냇돌이다. 이 냇돌에 담긴 74자의 吏讀(이두)문자를 풀이하면 다음과 같은 내용이다.
<임신년 6월16일 두 사람이 함께 하늘에 맹세한다. 지금부터 3년 뒤에는 忠道(충도)를 굳게 지녀 허물이 없기를 맹세한다. 만약 이 서약에 어긋남이 있으면 하늘로부터 큰 죄를 받을 것을 다짐한다. 만약에 나라가 편안치 못하고 크게 어지러워지면 나라를 위해 충성할 것을 맹세한다.>
위의 인용문에서 알 수 있듯 신라 화랑의 이상과 염원과 포부는 忠(충) 사상의 실현이었다. 圓光 法師(원광 법사)가 說(설)한 世俗五戒(세속오계)의 제1항도 忠이었다. 바로 이 점에서 花郞道(화랑도)는 유교가 추구하는 가치 체계와 다르다.
유교에서는 孝(효)가 근본 가치이며, 君臣(군신) 간에는 義理(의리) 관계가 소멸되면 벼슬을 버리고 물러가더라도 선비로서 부끄러울 바가 없다. 반면 花郞道는 忠을 실현함으로써 孝도 동시에 실현할 수 있다는 사상 체계다. 충과 효의 우선순위가 다른 것이다. <삼국사기> 列傳(열전)은 바로 이런 사상으로 단련된 화랑 출신 戰士(전사)들의 희생 정신과 용맹으로 가득 채워져 있다.
花郞徒(화랑도)는 상고시대로부터 유래된 청년집회나 戰士(전사)집단에 그 뿌리를 두고 있었다. 그런 만큼 가장 중시한 것은 외적을 제압할 수 있는 무술의 수련이었을 것이다. 그러나 신라 화랑의 수련은 거기에 그치지 않았다. 이어지는 임신서기석의 내용이 그것을 증명하고 있다.
<앞서 辛未年(신미년) 7월22일에 크게 다짐한 바 있는 詩(시=詩經), 尙書(상서), 禮(예=禮記), 傳(전=春秋左氏傳)을 3년 동안 모두 익힐 것을 맹세한다>
위의 인용문에서는 두 신라 젊은이가 임신년의 한 해 전인 신미년에 학문을 익혀 盡忠報國(진충보국)을 서로 맹세한 바 있었음을 알 수 있다. 신라 사회는 화랑에게 臨戰無退(임전무퇴)의 勇猛(용맹)한 장교뿐만 아니라 한 시대를 짊어지고 나갈 將帥(장수)와 經綸家(경륜가)를 기대했던 것이다.

화랑도의 경쟁력

앞에서 거론했던 수련 방식 가운데 「歌樂(가악)으로 서로 즐겼다」는 대목도 신라 화랑을 이해하는 데 결코 놓칠 수 없는 대목이다. 화랑 집회와 歌舞遊娛(가무유오)의 상관 관계에 대해서는 이미 일본인 학자 미시나 아키히데(三品彰英·1902-1971)가 그의 명저 <신라 화랑의 연구>에서 문화인류학적으로 설파한 바 있지만, 원래 歌舞를 통한 놀이는 개인과 단체를 결속시키는 데 결정적 역할을 한다.
집회의 성원으로서 노래와 춤을 배운다는 것은 한 사람의 집회 성원으로서의 자격 구비였고, 특정 가무는 집회 성원이 갖는 가장 중요한 공동적 재산이었으며, 조합원으로서의 특권은 그것을 주고 받음에 의해 결정되었다. 미시나의 논리다.
미시나의 얘기를 쉽게 이해하려면 오늘의 한국 사회에서 왜 하필이면 고등학교 동창 조직이 가장 끈끈한 동류의식을 공유하고 있는지를 생각해보면 된다. 그것은 바로 고교 시절 조회 때나 학교 대항 운동경기 같은 데서 뻔질나게 교가를 합창하고 응원의 몸짓(춤)을 함께 했기 때문이다.
歌樂과 군사는 불가분의 관계에 있다.
<삼국사기>를 보면, 적국에 대한 공격을 앞두고 가무로써 흥을 일으키는 기사(예컨대 진흥왕 12년 3월 條)가 더러 눈에 띄는데, 이것은 가악이 당시의 중요한 전투 준비 행위였다는 얘기다.
삼국 통일 전까지 신라에는 고구려의 太學(태학=국립대학)이나 堂(경당=사립학교)과 같은 상설 교실에서 교육하는 기관이 없었다. 花郞徒의 성원들은 단체로 「산수를 유람하여, 먼 곳이라도 그들의 발길이 닿지 않은 곳이 없었다」는 얘기는 앞에서 썼지만, 이런 야외 교육이 오히려 화랑의 강점이 되었다. 그 이유가 무엇일까?
개발 연대 한국의 主力(주력)은 누가 뭐라고 해도 지금은 名退(명퇴)를 당하거나 「찬밥」을 먹고 있는 50대 후반으로부터 60대에 걸친 세대다. 이 연령의 세대는 6·25 전쟁의 혼란중 교실과 책걸상이 불타버리거나 군에 징발되어 山野(산야)를 헤매면서 수업을 받은 경험을 공유하고 있다.
이런 세대는 생존력이 강렬하다. 그래서 그들이 일선에서 일했던 시기에 한국은 세계사에서 유례 없는 압축성장의 신화를 창조할 수 있었던 것이다.
花郞徒는 도의와 가악을 대자연 속에서 수련했다. 「遊娛山水」(유오산수)는 성지 순례, 地理(지리) 습득, 국토 사랑, 체력 단련이었다. 대자연 속으로 들어가려면 우선 멀리 걸어야 한다. 이것은 매우 눈여겨 볼 대목이다. 軍團(군단) 전투력의 우열은 行軍(행군)의 능력에서 결정되기 때문이다.
예컨대 나폴레옹의 步兵(보병) 부대는 당시 유럽 각국의 보병에 비해 2배 빠른 속도로 이동했다. 빠른 기동력으로 병력의 수적 열세를 극복했던 것이다. 1805년 아우스터리츠 三帝會戰(3제회전)에서 나폴레옹 휘하의 다부 軍은 이틀 동안 1백40km나 강행군하여 나폴레옹의 본대에 합류한 뒤 바로 전투에 참가했다. 이것이 바로 병법에서 말하는 集中(집중)에 의한 各個擊破(각개격파)다.
화랑도의 산천유람은 바로 놀이를 통한 전투 훈련이었다. 물론 신라 시대의 명승지에 유스호스텔이나 여관 같은 숙박 시설이 있었을 리가 없다. 화랑도는 野營(야영)을 하며 한솥밥을 먹었다. 이것이 野戰(야전)에서의 생존 능력과 협동 정신을 몸에 배게 했던 것이다.

신분제 사회에서 계층간 갈등 해소

화랑 조직의 탁월성은 귀족과 서민의 자제를 한 울타리 안에 포용했다는 점에 있다. 그러면 낭도는 어떤 과정을 통해 조직화되었던 것일까?
필사본 <화랑세기>에 따르면 서민의 자제들 중 준수한 자로서 郎門(낭문)에 들어오면 郎徒(낭도)라 불렸다. 13~14세에 童徒(동도), 17~18세에 平徒(평도), 23~24세에 大徒(대도)가 되었다. 大徒 가운데 선발된 자가 望頭(망두)에 오르고, 다시 망두 가운데 공과 재주가 있으면 臣頭(신두)나 郎頭(낭두)로 뽑혔다.
大徒로서 望頭에 오르지 못하면 화랑 조직에서 나와 兵部(병부=국방부)에 소속되거나 향리로 돌아가 마을의 지도자가 되었다. 당시의 징집 연령이 15세로부터 60세까지이고, 일생을 통해 두세 번씩 징병되는 병역 제도와 築城(축성) 등에 자주 동원되던 부역 제도 아래, 서민의 자제로서 낭도에 입문한다는 것은 대단한 신분 상승이었다.
고향에 돌아간 낭도 출신들은 중앙과 지방의 연결고리 역할을 했다. 이것이 바로 통일 전쟁 기간을 통해 신라의 동원 체제가 삼국 중 가장 원활했던 까닭이다. 화랑 제도는 골품제 사회에서 발생하게 마련인 계층간의 긴장과 갈등을 조절하고 완화하는 데도 큰 역할을 했다는 얘기다.
화랑과 낭도 간의 깊은 유대 관계가 잘 나타나 있는 것이 鄕歌(향가) 慕竹旨郞歌(모죽지랑가)다. 이 향가는 젊은 시절에 낭도였던 得烏(득오)가 당시의 화랑 竹旨(죽지)를 그리워하며 지은 노래다. 竹旨라면 金庾信 휘하의 부수(副帥)로서 통일 전쟁의 1급 공신이다.
<지나간 봄 그리매/ 모든 것이 시름이로다/아담하신 모습에 주름살 지시니/(중략)/낭이여, 그리운 이 마음/다북쑥 우거진 곳에 잘 밤 있으리이까>
득오는 竹旨의 늙어감을 안타깝게 생각하며 竹旨와 얽힌 옛일을 회상하고 있다. 그러면 <삼국유사>의 기록을 통해 화랑 죽지와 낭도 득오의 인간 관계를 요약해볼 필요가 있을 것 같다.
<득오는 낭도 시절에 갑자기 징집되어 화랑 竹旨에게 보고도 하지 못한 채 富山城(부산성·경북 건천)에서 병졸로 복무한다. 죽지는 득오의 행방을 수소문한 끝에 술과 떡을 장만하여 낭도 1백37명을 데리고 부산성으로 면회를 갔다. 부산성에서 득오가 밭일을 하고 있는 것을 목격한 죽지는 성주 益宣(익선)에게 말미를 청했다. 익선은 병사들에게 사사로운 노동을 시키고 있었음에도 죽지의 요청을 거절했다.
이런 장면을 목격한 侃珍(간진)이란 아전이 의분을 느끼고 익선에게 곡식 30섬을 주면서 득오의 휴가를 간청했다. 그래도 허락하지 않자, 舍知(사지·제13위의 관등) 珍節(진절)이 타고 간 말과 안장을 익선에게 내주었다. 그제서야 익선은 득오의 휴가를 허락했다>
화랑도 성원들 간의 의리가 이처럼 대단했다. 얘기는 다시 클라이막스로 향한다.
<이런 소문을 듣고 花主(화주·풍월주의 아내)가 발끈했다. 조정에서는 곧 익선에 대한 체포 명령을 내렸다. 익선이 달아나 숨어버리자, 그 아들을 대신 붙들었다. 그때가 2월의 추운 날이었는데, 그 아들을 성 안의 연못에 목욕시켜 얼어 죽게 했다. 익선의 더러운 때를 씻어 낸다는 뜻이었다>
대단히 가혹한 連坐制(연좌제)에 의한 처벌임엔 틀림없다. 그로부터 익선의 출신지인 牟梁里(모량리) 사람들 중 벼슬하는 사람은 모두 쫓아내고, 僧服(승복)도 입지 못하게 했다. 반면 곡식 30섬을 의로운 일에 던진 侃珍에게는 두텁게 상을 내리고, 그 자손은 坪定戶孫(평정호손=촌장)으로 삼았다. 이처럼 신라의 상과 벌은 뚜렷했다.
여기서 주목할 것은 신라 조정에서 화랑도의 氣(기)를 한껏 북돋았다는 점이다. 이같은 정책적 배려 가운데 화랑도는 생사를 같이 할 인너그룹(Inner Group= 內的 結社)을 형성할 수 있었다. 이런 인너그룹은 일단 유사시에 강력한 단결력과 추진력을 발휘하게 마련이다.
얘기가 조금 앞질러 가지만, 화랑과 낭도의 평생 동지 관계가 實戰(실전)에서 어떻게 나타나고 있는가를 살펴볼 필요가 있다. 그 대표적 사례는 <삼국사기> 裂起(열기) 傳에서 발견할 수 있다.
열기는 662년 1월에 대장군 金庾信이 唐軍(당군)을 구원하기 위해 輜重(치중)부대를 이끌고 평양성 외곽에 접근했을 당시, 步騎監(보기감)의 직책에 있었다. 이때 金庾信에겐 목숨을 걸고 적진을 돌파하여 唐將(당장) 蘇烈(소열=소정방)과의 연락 임무를 수행할 만한 용사가 필요했다.
<그때 당군은 식량이 떨어져 절박한 처지에 있었다. 金庾信은 열기를 불러 말한다.
『나는 젊어서부터 그대와 교유하여 그대의 지조와 절개를 안다. 이제 蘇 장군에게 내 뜻을 전달하려 하나 사람을 구하기 어렵다. 그대가 갈 수 있겠는가?』
열기가 답한다.
『제가 불초한데도 中軍職(중군직)에 있는 것이 외람된 일인데, 어찌 장군의 명령을 욕되게 하겠습니까? 제가 죽는 날이 바로 새롭게 태어나는 날이 될 것입니다』>
위의 기사에서 직접적 언급은 없지만, 金庾信과 열기는 화랑-낭도의 관계로부터 출발하여 평생 동지가 되었음을 짐작할 수 있다. 열기는 불과 15명의 특공조를 조직하여 목숨을 걸고 적진을 돌파했다. 이렇듯 金庾信 휘하에서는 열세나 궁지에 빠질 때마다 전성기 로마 軍團의 핵심 전사 百夫長(백부장=백인 대장)과 같은 용사들이 나서 임무를 완수하고 있다.

『저의 정성을 불쌍히 여겨 방도를 가르쳐 주십시오』

金庾信이 화랑도의 리더로 떠올랐던 무렵의 東아시아 정세는 천하 판갈이의 大戰(대전)을 향해 시한 폭탄의 초침처럼 돌아가고 있었다. 신라로서는 백제와 고구려의 협공에 견딜 수 없을 만큼 급박했다. 진평왕은 611년 隋 煬帝에게 고구려를 쳐줄 것을 요청하는 乞師表(걸사표)를 보낸다. 고구려의 남침을 막으려는 정책이었다.
걸사표는 원광 법사가 지은 외교 문서다. 이때 원광의 말이 매우 인상적이다.
<자기가 살기 위해 남을 멸하려 하는 것은 沙門(사문=불교)에서 행할 바가 아니지만, 貧道(빈도)가 대왕의 땅에서 살고 대왕의 땅에서 나는 물과 곡식을 먹고 있으니, 어찌 감히 명을 좇지 않겠습니까?>
원광은 그가 說(설)한 세속오계에서 이미 호국 불교의 깃발을 높이 들었다. 臨戰無退(임전무퇴)와 殺生有擇(살생유택)은 적을 죽이지 않고는 달성할 수 없는 목표다. 그는 佛國土(불국토=신라)의 안보를 위해서는 殺生도 護法(호법)의 방법이라는 논리를 폈던 것이다.
611년 봄 2월에 수양제는 고구려 정벌을 위한 詔書(조서)를 발표한다. 그 내용은 「고구려가 중국의 반역자들을 유혹하고, 척후를 놓아 변경을 괴롭혔다」는 것이었다. 이런 선전포고의 구실이야말로 賊反荷杖(적반하장)의 극치다.
수 양제는 5백만의 백성들을 동원하여 양자강과 황하를 연결하는 대운하를 건설하고, 萬里長城(만리장성)을 대대적으로 보수했는데, 이때 2백만명이 죽거나 도주했던 것으로 전해진다. 그러니까 『중국의 반역자를 유혹했다』는 말은 중국의 도망자들 중 일부를 고구려에서 받아들였다는 얘기다.
611년은 수 양제의 大業(대업) 7년이다. 바로 이 해에 오랫동안 중국에 복속하지 않던 西돌궐의 處羅可汗(처라가한)도 수양제의 부름을 받고 入朝(입조)하여 무릎을 꿇는다. 기고만장한 수 양제는 文帝의 소극책을 버리고 더욱 적극적인 대외 정책을 구사한다. 그것이 커다란 파문이 되어 사방으로 뻗쳐나가기 시작했다.
611년이면 金庾信의 나이 17세다. 그는 고구려와 백제가 잇달아 신라 땅을 침범하는 것에 비분강개하여 적들을 토벌할 뜻을 품고, 홀로 中嶽(중악)의 石窟(석굴)로 들어가 몸을 깨끗이 씻고 하늘에 誓願(서원)한다.
<『적국이 무도하여 승냥이나 범처럼 우리 영토를 침범하여 소란을 일으키므로 해마다 평안한 날이 없습니다. 저는 한갓 보잘 것 없는 신하로서 재주와 용력이 없사오나 재앙과 난리를 없앨 뜻을 갖고 있사오니, 오직 이를 살피시어 저의 손에 힘을 빌려 주소서』
4일 후 한 노인이 칡 베옷을 입고 나타나 묻는다.
『이곳에는 독한 벌레와 사나운 짐승들이 많은 곳인데, 귀한 소년이 어찌 혼자 이런 곳에 왔는가?』
범상치 않는 노인의 모습을 보고 유신이 말한다.
『어르신께서는 어디서 오셨는지, 존함을 알고자 하나이다』
노인이 대답한다.
『나는 일정한 주거가 없고, 인연이 닿는 대로 가고 머무나니, 이름은 難勝(난승)이다』
유신이 두 번 절하며 간청한다.
『저는 신라 사람으로 나라의 원수를 보니 가슴이 아파 여기 왔는데, 어르신을 뵙게 되었습니다. 엎드려 비옵건대 어르신께서는 저의 정성을 불쌍하게 여기시어 방도를 가르쳐 주십시오』
노인은 묵묵히 말이 없다. 유신이 눈물을 흘리며 예닐곱 번이나 간청하니 노인이 그때서야 다시 입을 연다.
『그대가 어린 나이로 삼국을 병합하려는 뜻을 품고 있으니, 이 또한 장하지 않은가!』
노인은 말을 마치고, 곧 비법을 가르쳐 주면서 당부한다.
『부디 함부로 전하지 말라! 만약에 이를 의롭게 사용하지 않으면 도리어 재앙을 받으리라』
노인은 말을 마치고 떠났다. 유신이 2리쯤 뒤따라가 보았으나 어디로 갔는지 보이지 않고, 다만 산 위에 오색 빛이 찬란했다>

제갈공명 兵法書

위의 인용문은 <삼국사기> 金庾信 傳의 기사를 옮긴 것인데, 漢 高祖(한 고조) 劉邦(유방) 막하 제1의 謀士(모사)였던 張良(장량)이 異人(이인) 黃石 公(황석 공)과 만나는 장면과 유사점이 많다. 장량은 원래 중국 전국 7雄(웅)의 하나인 韓(한)의 公子(공자)로서 조국을 멸망시킨 秦始皇(진시황)에게 복수하기 위해 滄海(창해:지금의 天津)의 力士(역사)와 공모하여 암살 작전을 결행했다가 실패하고 떠돌이 신세가 되어 있었다.
이런 청년 망명객 張良 앞에 홀연히 나타나 병법을 가르친 노인이 黃石 公이다. 황석 공은 그 자신이 지은 병법서 <三略>(삼략)을 장량에게 전수했다. <삼략>은 周 武王(주 무왕)의 名 재상 姜 太公(강 태공)이 지은 <六韜>(육도)와 더불어 병법의 古典(고전)으로 회자되어 왔다.
그렇다면 金庾信이 難勝에게 전수받은 병법서는 무엇일까? 군사학 연구자들 중에는 그후 金庾信의 행적과 전략 전술, 그리고 그가 임종을 앞두고 문무왕에게 했던 유언 등으로 미루어 보아 「諸葛亮心書」(제갈량심서)일 것이라고 추정하는 분도 있다. 특히 <삼국사기> 문무왕 14년 條에 신라군이 六陣兵法(육진병법)을 훈련했던 기사가 보이는데, 이 陣法(진법)은 諸葛亮의 八陣法(팔진법)을 개량한 것이었다고 한다.
金庾信의 기도처인 中嶽(중악)은 경주시 건천읍에 있는 斷石山(단석산·827m)으로 比定(비정)되고 있다. 현재 삼국시대 五嶽(5악) 가운데 하나인 중악의 위치에 관해서는 연구자들의 견해가 엇갈리고 있지만, <삼국사기>에 기록된 石窟이 단석산 神仙寺(신선사) 경내의 石窟(석굴)의 모습과 일치한다는 등의 이유로 「중악=단석산」이 다수설이다.
단석산 석굴은 칼로 내리친 듯한 바위가 외가닥 통로와 하늘 面만 남기고 사면을 둘러싸고 있는 모습이다. 석굴 안쪽 벽면에는 10여구의 불상과 부처에게 공양하는 인물상이 陰刻(음각)되어 있다.
이것은 古신라 최대의 佛像群(불상군)이라는 점에서 미술사학계의 주목을 받아 왔는데, 특히 삼국 시대의 服飾(복식) 연구에 귀중한 사료가 되고 있다. 불상의 조성 연대는 6세기 말~7세기 초로 추정되고 있다. 그러니까 金庾信이 중악의 석굴에서 수도했던 시기(611년)를 벗어나지 않는다.
필자는 작년 늦가을에 단석산 석굴을 답사하다가 1천4백년의 풍우를 견뎌온 磨崖佛像(마애불상)의 관찰에 정신을 팔았던 나머지 하산 시간을 놓치고, 달빛도 없는 어둠속에서 길을 더듬느라 꽤 고생한 일이 있다. 2km에 달하는 하산 길 곳곳이 여름 폭우로 사람 키보다 깊게 패여 있었지만, 두어달 동안이나 방치한 바람에 추락할 뻔했다. 순례객들이 줄을 잇는 역사의 현장을 그렇게 방치해도 되는 것인지, 요즘 세월이 그런 것인지 묻고 싶었다.
단석산에는 斷石寺(단석사) 터, 화랑바위 등 화랑과 관련한 유적이 많고, 그것에 얽힌 전설도 적지 않다. 단석산에 오르면 언양 석남사 배후의 가지산(1,240m), 운문산(1,181m) 등 「영남 알프스」 연봉의 실루엣과 雲海(운해)가 절경을 이루고 있다.
또한 단석산은 신라가 낙동강 서쪽 지역으로 진출하는 데 있어 교두보로 삼았던 淸道(청도)로 가는 주요 교통로 변에 위치해 있다. 따라서 신라 화랑의 순례지가 되었을 것임도 의심할 여지가 없다.
金庾信의 석굴 수행을 전후한 시기는 신라가 백제군의 공세에 고전을 거듭하던 때다. 麗-隋 대전의 개전을 눈 앞에 둔 611년 겨울 10월, 백제군은 假岑城(가잠성·충북 괴산)을 포위 공격했다. 가잠성이 무너지면 신라의 생명선인 鳥嶺(조령)이 위험해진다.
신라의 守城軍(수성군)은 양식과 물이 떨어지자, 시체를 뜯어 먹고 오줌을 받아 마시며 1백여일 간 농성했다.
그러나 가잠성의 포위를 풀기 위해 달려온 신라 上州(상주), 下州(하주), 新州(신주)의 구원 軍이 백제군에 패해 후퇴해버렸다. 612년 정월에 성이 무너지는 가운데 守城將(수성장)인 현령 讚德(찬덕)은 홰나무에 머리를 부딪쳐 자살하고 만다.

麗-隋 대전의 승인과 패인

612년 2월, 隋 煬帝(수 양제)는 고구려가 국경으로 삼았던 遼河(요하) 서쪽에 진출했다. 隋軍(수군)의 병력은 총 1백13만3천8백명. 매일 1軍씩 40리 간격으로 진발시킨 수군의 군세가 1천리에 뻗혔다니까, 고대 세계의 戰史上(전사상) 최대의 병력 동원이었다. 후방에서 군량 수송을 맡은 인원을 합치면 총동원 규모는 그 2배에 달했다고 역사서는 기록하고 있다.
양제의 고구려 원정은 隋 文帝(수 문제)의 1차 원정 실패 이후 隋 제국의 숙원이었고, 중국 중심주의의 체면이 걸려 있던 문제였다. 당시 동아시아의 동맹 관계에서 고구려는 고립되어 있었다. 그런 만큼 수 양제로서는 절호의 기회였다.
북방 草原(초원)의 강자 돌궐은 이미 隋에 복속했고, 고구려에 시달림을 받아온 신라와 백제는 고구려 원정을 수 양제에게 간청하고 있었다. 특히 백제는 隋와 연합하여 고구려를 치겠다는 적극성을 보였다.
양제의 1차 원정의 緖戰(서전)은 遼河 도하 작전으로 전개되었다. 서전에서 隋軍은 대단한 병력 손실을 감수하면서도 기어이 요하를 건넜다. 이를 저지하려던 고구려 군도 1만의 전사자가 발생했다.
이어 수군은 고구려의 만주 영토의 핵심인 遼東城(요동성)을 포위 공격했다. 그러나 요동성이 좀처럼 함락되지 않자, 수 양제는 요동성 서쪽으로 수십리 떨어진 六合城(육합성)에 진을 치고, 宇仲文(우중문), 宇文述(우문술)에게 병력 30만5천명을 주어 육로로 평양성을 바로 찌르도록 했다.
한편 隋의 水軍은 山東半島(산동반도)에서 출항, 황해를 건너 곧장 貝水(패수=대동강) 하구로 진출했다. 水軍 지휘관 來護兒(내호아)는 우중문-우문술의 육군과 합동 작전으로 평양성을 공략하기로 되어 있었는데도 불구하고 功(공)을 서둘렀다. 그는 정병 4만을 뽑아 평양으로 진격했다. 水軍의 단독 작전이었다.
고구려의 수도방위사령관이었던 영양왕의 이복동생 建武(건무·후일의 영류왕)는 空城之計(공성지계)를 구사하여 내호아 軍을 일단 평양 外城(외성)으로 끌어들였다. 외성에 진입한 내호아 軍은 재물 약탈에 몰두하여 隊伍(대오)가 흩어졌다. 이 순간, 외성 곳곳에 매복하고 있던 건무 軍이 대대적인 역습을 감행했다. 내호아 軍은 대동강 하구까지 60리나 물러나 겨우 전열을 수습했으나 사실상 전투력을 상실해버렸다.
한편 우중문-우문술의 육군은 兵站(병참)의 실패로 인해 고구려의 乙支文德(을지문덕)에게 철저히 농락당한다. 육군 30만5천은 압록강을 건너기 전에 각개 병사들이 한 달간 먹을 식량을 지급받아 휴대토록 했다. 무기와 군장까지 합치면 1인당 감당해야 할 짐의 무게가 3石(약 70kg)에 달했다. 병사들은 軍令(군령)을 어기고 야전 천막 안에서 땅을 파고 군량을 파묻어버렸다.
배고픈 적을 다루는 을지문덕의 용병술이 탁월했다. 압록강 도하 직후 우중문-우문술 軍은 을지문덕 軍의 작전상 후퇴에 따라 하루에 七戰七勝(칠전칠승)하며 평양성 30리 밖 근교까지 진출했다. 그러나 평양성은 견고한데, 우문술-우중문 軍의 식량이 떨어졌다. 바로 을지문덕의 堅壁淸野(견벽청야) 작전에 걸려들었던 것이다.
견벽청야는 우세한 병력의 침공에 대비하여 방어 거점에 미리 山城(산성)과 平地城(평지성)을 견고하게 쌓아 놓고, 開戰(개전)과 동시에 들판이나 가옥에 곡식 한 톨 남김없이 불태워버린 다음, 군관민이 모두 입성하여 守城(수성)하는 전술이다. 이런 전술을 쓰면 원정군은 군량과 말먹이의 현지 조달이 불가능하다.
진퇴양난에 빠진 우중문-우문술에게 을지문덕은 회군의 명분을 준다. 隋軍이 물러가면 영양왕이 入朝(입조)하겠다는 미끼를 던진 것이다. 우중문과 우문술로서도 그 말을 전적으로 믿지야 않았겠지만, 회군 후 수양제에게 복명할 구실은 찾았던 셈이다.
우중문-우문술 軍이 회군 길에 오르자 薩水(살수=청천강)에서 미리 포진하고 있던 을지문덕 軍의 일대 섬멸전이 전개된다. 이것이 고구려의 先守後攻(선수후공) 전략이다. 우중문-우문술 軍 30만5천명 중에서 살아서 돌아간 숫자는 2천7백명에 불과했다. 역사에서 말하는 薩水大捷(살수대첩)이 바로 이러했다.
불같이 화를 낸 수양제는 우문술 등의 목을 쇠사슬로 묶어 짐승처럼 끌고 長安(장안)으로 돌아갔다. 우문술 등은 압록강 도하 직전에 항복 교섭의 명목으로 수군 진영을 방문하여 수군의 허실을 살핀 을지문덕을 사로잡지 못하는 등 전술상의 실책을 저질렀다고 문책되었다.
수 양제와 우문술은 사돈 관계를 맺었을 만큼 가까운 사이였다. 우문술의 막내 아들 宇文士及(우문사급)이 수양제의 사위다. 6년 뒤(618)의 얘기지만, 우문술의 장남과 차남인 우문화급-우문지급 형제가 수 양제를 시해함으로써 수 제국은 37년 만에 멸망하고 만다.

검술 수련하고 國仙에 올라

612년의 여-수 대전 중 백제, 신라의 대응이 흥미롭다.
<隋書>(수서) 百濟 傳(백제 전)에는 「(隋의) 6軍이 요하를 건너자, 백제 무왕이 국경에 병력을 엄중히 배치하고, 말로는 隋軍을 돕는다고 하면서(聲言助隋), 실제로는 양단책을 썼다(實持兩端)」고 기록되어 있다.
<삼국사기> 영양왕 23년(612) 조에 따르면 백제 무왕은 수 양제에게 사신 國知牟(국지모)를 파견, 隋-百濟 양군이 합류할 기일까지 사전에 합의해놓고도 비밀리에 고구려와 내통하여 隋軍의 기밀을 전달했다고 한다. 국가 이익 확보를 위한 철저한 2중 외교였다.
신라도 마찬가지였다. 진평왕은 바로 한 해 전인 611년에 사신을 보내 請兵(청병)의 국서를 올려 수 양제의 허락을 받은 바 있었지만, 여-수 대전이 벌어진 612년 신라군은 움직이지 않았다. <삼국사기>에는 진평왕 34년(612)의 기록이 누락되어 있어 정확한 사정은 알 수 없다.
그러나 불과 수개월 전에 백제군에게 가잠성을 탈취당한 신라로서는 백제군의 재침에 대비하여, 비상 경계 태세에 돌입해 있었을 것이다. 그럼에도 만약 隋軍이 승세를 보이기만 했다면 신라군도 호응하여 북진했을지도 모른다.
바로 이런 상황에서 金庾信은 다시 홀로 보검을 차고 咽薄山(열박산)으로 들어가 병서를 읽고 무예를 단련하고 있다. 그의 나이 18세 때다. 열박산은 지금의 경북-경남 도계에 위치한 영남 알프스 연봉 중 하나일 것으로 추정되고 있다. <삼국사기> 열전은 당시 金庾信의 수련 모습을 다음과 같이 기록하고 있다.
<金庾信이 향불을 피우고 축원하니 그 때 하늘에서 靈光(영광)을 내려 보검에 실리고, 3일째 되는 날 밤에 虛宿(허수=화성)와 角宿(각수=목성) 두 별의 빛이 아득히 내려오자 보검이 스스로 움직이는 것 같았다>
위의 인용문은 워낙 神異(신이)한 얘기여서 이해하기가 까다롭다. 예로부터 인도, 페르시아, 중국 등지에서는 별자리를 동서남북의 四宮(4궁)으로 나누고, 다시 각 宮을 일곱으로 나누어 28宿(수)라고 했는데, 허수는 그 열한 번째 별, 각수는 그 첫 번째 별이다. 그런 별들이 金庾信의 칼에 氣(기)를 실어 주었다는 얘기다. 하늘의 신령스런 빛에 대해선 잘 모르겠지만, 氣는 실재한다.
지난 5월 초에 한 무술 수련자가 1km가 넘는 한강을 사이에 두고 강남 쪽에서 강북 쪽으로 손바닥 바람(掌風)을 날려 10여명을 뒤로 쓰러뜨리려고 했던 시범이 중인환시리에 성공한 사례가 공영 텔레비전 방송을 통해 보도되었다. 그러니까 金庾信이 보검에 精氣(정기)를 실었다는 기록을 허황한 얘기로 돌릴 수 없다.
미시나 아키히데는 그의 <신라 화랑 연구>에서 「金庾信의 刀劍(도검) 전설 중에는 道敎(도교) 계통 전설과의 습합 흔적을 찾아볼 수 있다」 주장했다. 즉, 七星劍(칠성검) 풍습에 관한 사상의 개재를 암시하는 것으로, 이같은 칼에 대한 신앙은 일찍부터 중국, 한국, 일본에 성행했다는 것이다. 미시나의 주장은 신라의 花郞道를 중국 고유 道敎의 아류 쯤으로 오해할 수 있는 여지를 남기고 있다.
원래 道敎는 중국에서 外來(외래) 종교인 불교에 대항하기 위해 老子(노자)의 道德經(도덕경)을 경전으로 받들고 神仙說(신선설)을 골간으로 삼는 중국의 민족주의적 종교다.
도교의 신선설이란 인간의 몸으로 불로장생의 신선이 된다는 것인데, 신선이 되기 위한 方術(방술)이 바로 養生術(양생술)이다. 중국의 진 시황이나 당 태종은 모두 불로장생을 위한 丹藥(단약)을 제조해 주겠다는 사기꾼 道士(도사)에게 속아 넘어가 엉터리 약을 먹고 오히려 생명을 단축시키고 말았다.
도교의 운둔 사상 역시 名利(명리)와 권세의 지위를 버림으로써 그 지위에 따르는 위험에서 벗어날 수 있다는 보신술이다. 특히 도교의 無爲自然(무위자연)은 아무 하는 것 없이 제대로 내버려 둔다는 사상인데, 이런 사상에 젖어 있는 백성이 많으면 많을수록 군주는 편안한 법이니까, 군주의 통치술로 이용되기도 했다. 실제로 왕조 시대의 중국에서 백성들이 가장 많이 신봉했던 종교는 도교였다.
일본의 역사학자 쓰다 소키치(津田左右吉·1873-1961)는 그의 명저 <중국 사상과 일본 사상>에서 「도교 사상은 보신하는 법, 성공하는 법, 백성을 다스리는 통치술이므로 결국은 처세술」이라고 규정하면서 다음과 같은 논리를 전개했다.
「신선설은 육체적 생명을 무한히 연장시키는 것으로, 인생의 쾌락을 무한정 향수하고픈 욕구로부터 출발하고 있다. 그런데 이런 욕구와 향수는 모두 자기와 관련된 것이기 때문에 신선설과 양생설은 물론, 은둔 사상, 道家에 있어서의 保身(보신)의 道도 결국 자기 본위의 사고이며, 일종의 利己主義(이기주의)다」
신라의 花郞道는 세속오계의 5개 항 중 하나인 臨戰無退에서 알 수 있듯이 保身이나 養生과는 전혀 인연이 없다. 화랑은 우리 고유의 仙道에 뿌리를 두고 있다. 이것은 필사본 <화랑세기>의 서문을 보면 명확하다.
<화랑은 仙徒(선도)이다. 우리 나라에서는 옛날부터 神宮(신궁)을 받들어 하늘에 큰 제사를 지냈다>
우리 고유의 샤머니즘은 중국의 것과 사뭇 다르다. 예컨대 우리의 三韓(삼한)시대에는 祭天(제천) 의식을 올리던 蘇塗(소도)가 있었다. 오늘날에도 「솟대」라 하여 그 옛 모습을 찾아볼 수 있는 소도는 神聖(신성) 지역으로서, 설사 죄지은 사람이 이곳에 도피해 와도 붙들어 갈 수 없는 곳이었다. 이런 소도는 중국인과는 전혀 무관한 것으로 오히려 서양의 아실럼(Asylum=遁避所)과 유사하다.
그러니까 우리의 문자가 없었던 시대에 우리 고유의 종교가 仙이나 道 등의 한자로 표기되었다고 해서 그것이 중국의 민족 종교인 道敎로 혼동해서는 안된다는 얘기다. 따라서 미시나(三品彰英)의 견해는 신라 화랑 또는 金庾信의 종교적, 사상적 배경을 이해하는 데 혼돈을 줄 가능성이 있다.
어떻든 이때쯤 金庾信의 병법과 무술이 상당한 경지에 이르렀던 것 같다. <삼국사기>에는 金庾信이 18세에 검술을 닦아 國仙(국선)에 오른 것으로 기록되어 있다. 국선이라면 바로 화랑 최고의 리더인 風月主다.

고구려가 납치하려 했던 제거 대상

제1세 풍월주 魏花郞(위화랑) 이후 15세 풍월주 金庾信까지의 면면을 보면 기라성을 방불케 한다. 그것이 바로 신라의 국가 경쟁력이었다.
5세 풍월주 斯多含(사다함)은 大伽倻(대가야) 병합에 제1 공을 세웠고, 6세 풍월주 世宗(세종)은 고구려와 백제의 침략군을 패퇴시키고 재상을 지낸 인물이었으며, 8세 풍월주 文努(문노)는 花郞徒의 기풍을 불굴의 戰士團(전사단)으로 전환시켰다. 또 12세 풍월주 菩利(보리)와 14세 풍월주 虎林(호림)은 花郞道와 호국 불교를 하나로 융화시켰고, 13세 풍월주 龍春(용춘)은 金春秋(김춘추=태종무열왕)의 미래를 열어 주었다.
필사본 <화랑세기>를 면밀하게 검토해 보면 金庾信은 615년까지 3년 동안 풍월주의 지위에 있었음을 알 수 있다. 왜냐하면 金庾信의 후임인 16世 풍월주 寶宗(보종)과 17世 풍월주 廉長(염장)의 재임 기간 합계가 11년간이고, 金庾信보다 8세 연하인 김춘추가 그 나이 24세 때인 626년에 18세 풍월주에 올랐기 때문이다.
<삼국유사>는 15세 풍월주 재임 당시 金庾信의 행적을 다음과 같이 전하고 있다.
<당시 白石(백석)이라는 자가 있었는데, 그가 어디서 왔는지 알 수 없지만, 유신의 낭도에 소속된 지 여러 해가 되었다. 유신 랑이 고구려와 백제를 치려고 밤낮 깊이 궁리하고 있었는데, 백석이 그 계획을 알고 낭에게 말했다.
『제가 공과 함께 저쪽을 몰래 정탐한 뒤에 도모하는 것이 어떻겠습니까?』
낭이 기뻐하여 친히 백석을 데리고 밤중에 길을 떠났다.>
위의 인용문을 통해 삼국간에는 서로 치열한 첩보전을 벌이고 있었음을 알 수 있다. 그런데 金庾信은 白石의 건의에 따라 이렇다 할 사전 준비도 없이, 예컨대 고구려어를 습득하지 않은 채 선뜻 고구려 침투를 결단한다. 그렇다면 신라인과 고구려인 간에는 서로 말이 통했던 것일까?
진지왕(576~579) 때 상대등(귀족회의 의장)을 지낸 居柒夫(거칠부)도 젊은 시절에 『문득 고구려를 엿보고 싶어』 고구려에 잠입하여 승려 惠亮(혜량)의 불경 강의를 들었다. <삼국사기> 열전에 따르면 이때 혜량은 거칠부에게 가만히 『고구려에도 사람을 볼 줄 아는 이가 있으니 잡힐까 걱정되어 몰래 알려준다』면서 『빨리 신라로 돌아가라』고 하였다.
신라의 진골귀족이었던 거칠부가 썼던 말은 경주 중심의 신라어라고 할 수 있다. 그런 그가 고구려 사람 속에서 신라인이라는 점을 감추고 불경 강의까지 들었다는 것은 결국 고구려어와 신라어가 상당히 비슷했다는 얘기다.
의무교육을 통해 표준말을 강력하게 보급하고 있는 오늘날에도 지방 사투리 때문에 정확한 의사의 전달이 어려운 경우도 있음을 볼 때, 신라어와 고구려어가 물론 같을 수는 없었을 것이다. 이를테면 집단 거주 지역을 나타내는 어휘의 경우 고구려어에서는 忽(홀), 신라어에서는 벌(伐) 또는 불(火)이 많이 사용되었다. 또 물(水)을 뜻하는 고구려어는 매(買)였지만, 신라어는 물(勿)이었다.
그러나 이런 차이점에도 불구하고 삼국인 간의 의사 소통에는 큰 장애가 없었던 것은 확실하다. 왕위에 오르기 전 백제의 무왕은 신라의 왕경에 잠입하여 薯童謠(서동요)를 지어 전파시킴으로써 결국은 진평왕의 셋째 딸 선화공주를 품속에 안게 되었다는 사례도 전해지고 있다.
그야 어떻든 白石과 함께 길을 떠난 金庾信은 骨火川(골화천·경북 영천)에 이르러 세 낭자와 만나게 된다. 다음은 <삼국유사>의 이어지는 기록이다.
<낭자들이 맛있는 과일을 바쳤다. 낭이 받아 먹고 마음이 통하게 되자, 속마음을 이야기했다. 낭자들이 말했다.
『공께서 하신 말씀은 이미 잘 알겠습니다. 공께서 白石을 떼어두고 저희들과 함께 숲 속으로 들어가시면 다시 속마음을 여쭙겠습니다』
유신공이 그들과 함께 숲 속으로 들어가자, 낭자들이 문득 귀신의 모습을 나타내면서 말했다.
『우리들은 奈林(내림. 경주시 낭천), 穴禮(혈례. 청도), 骨火(골화. 영천 금강산)의 세 호국신이다. 지금 적국 사람이 낭을 유인해 가는데도 낭이 깨닫지 못하고 길을 떠나기에, 우리들이 낭을 만류하려고 여기까지 왔다』
세 호국신은 말을 마친 후 사라져버렸다. 공이 이 말을 듣고 놀라 엎드려 두 번 절하고, 骨火館(골화관)으로 돌아와 白石에게 말한다.
『지금 중요한 문서를 잊고 왔으니, 집으로 돌아가서 문서를 가져오자』
곧 함께 귀가한 뒤 白石을 묶어놓고 사실을 추궁했다.>
위의 인용문은 고구려의 첩자 白石에게 유인당하고 있는 金庾信을 구원하기 위해 신라의 호국신들까지 陰佑(음우)했다는 얘기다. 그만큼 金庾信이라는 존재가 중요했다는 점을 강조하기 위한 기록으로 보이지만, 현대인의 정서엔 너무 神異(신이)하다.
이를 현대적으로 해석해 보면 어떨까? 그러니까 白石의 언동을 통해 고구려의 납치 공작을 뒤늦게 눈치챈 金庾信이 將計就計(장계취계), 즉 적의 계교를 역이용하는 계책으로 白石을 붙들어 고구려의 허실을 캐냈다고 하면 진실에 가까운 기록이 될지도 모르겠다.
白石은 그가 金庾信을 납치하기 위해 고구려에서 파견된 특수 요원임을 자백한 뒤 사형을 당했다. <삼국유사>에는 고구려의 첩보 기관이 金庾信을 납치하려 했던 이유도 장황하게 설명되고 있다. 金庾信은 그 前生(전생)이 점치는 선비로서 고구려 왕에게 바른 말을 했다가 목이 달아나고, 이에 대한 복수를 위해 신라에서 還生(환생)했는데, 이를 안 고구려가 암살 공작을 벌였다는 스토리다.
이것은 불교적 輪回說(윤회설)과 緣起說(연기설)에다 도교적 占卜術(점복술)까지 혼합된 설화임으로 자세한 풀이는 생략한다. 다만 위의 인용문을 통해 김유신은 풍월주 재임 시기에 이미 적국의 경계 또는 제거 대상이었음을 짐작할 수 있다.

天官女와 조제핀의 차이점

<나폴레옹은 조제핀과 연애하면서 유럽 정복 전쟁을 벌였다. 영웅 호색의 낭만이 있다. 그런데 金庾信은 어떠한가. 한 여자도 사랑하지 못하는 주제에 어떻게 통일의 대업을 꿈꾸는 대장군이라고 할 수 있으며, 게다가 그는 자신의 맹세를 지키지 못한 허물을 영특한 말에게 뒤집어씌워 그 말의 목을 벴다. 얼마나 졸렬한가>
문화부 장관을 지낸 李御寧(이어령)씨는 사랑과 관련한 글에서 프랑스의 영웅 나폴레옹에 빚대어 신라의 영웅 金庾信을 위와 같이 내리 깎은 적이 있다. 바로 청년 시절의 金庾信에게 버림받은 天官女(천관녀)의 悲戀(비련)을 두고 하는 비난이다. 그러면 「東國與地勝覽」(동국여지승람), 「東京雜記」(동경잡기), 「破閑集」(파한집)에서 전하고 있는 비련의 스토리를 다시 끄집어내 볼 필요가 있다.
<유신이 어렸을 때부터 어머니 만명부인은 날마다 엄격하게 가르치며 함부로 사귀어 놀지 못하도록 했다. 그러던 어느날 유신이 娼妓(창기) 천관의 집에서 자고 왔다. 만명부인은, 『나는 네가 성장해서 功名(공명)을 세워 인군과 어버이를 영화롭게 해주기를 바랐는데, 천한 계집과 음란한 방에서 술을 마시고 회롱하여 논단 말이냐!』라고 하며 울음을 그치지 않았다. 유신이 만명부인 앞에서 스스로 맹세한다.
『다시는 그 문 앞을 지나다니지 않겠습니다』>
金庾信은 원초적으로 立身揚名(입신양명)에 한계가 있는 망국의 후예였다. 더욱이 그의 부모 서현-만명 부부는 野合(야합)과 掠奪婚(약탈혼) 때문에 신라 귀족 사회에서 오랫동안 따돌림을 받아 왔다. 이런 가운데 아들에게 기대를 걸고 엄격한 가정교육을 했던 만명부인으로선 그가 하이틴의 나이로 벌써 기생 오입을 했으니까 설움이 복받쳐 울음이 나오지 않을 수 없었을 것이다. 다음은 이어지는 천관녀의 스토리다.
<하루는 유신이 술에 취해 귀가하는데, 말이 잘못하여 창기 천관의 집에 이르렀다. 천관은 반색하고 한편으로 원망하며, 눈물을 흘리면서 그를 맞았다. 술에서 깬 유신은 타고 온 말을 칼로 베고 그 길로 집으로 돌아왔다>
그렇다면 金庾信은 과연 李御寧씨의 지적대로 졸렬한 사람이었던가? 필자는 李御寧씨가 金庾信과 나폴레옹의 처지가 전혀 다른데도 무리하게 비판을 했다고 생각한다.
나폴레옹에게 6세 연상의 조제핀은 육체적 쾌락을 일깨워준 첫 여인이었을 뿐만 아니라 출세를 위한 징검다리였다. 혁명 장군의 미망인이었던 조제핀은 파리 사교계의 꽃으로 總裁政府(총재정부)에 대한 능란한 로비 활동을 통해 나폴레옹이 이탈리아 원정군 사령관으로 임명되는 데 결정적인 역할을 했다. 이후 승승장구한 나폴레옹은 숱한 情婦(정부)를 거느렸고, 황제로 등극한 후에는 조제핀을 차버리고 유럽 최고의 명문 합스부르그家(오스트리아 皇家)의 어린 公主 마리 루이즈와 재혼했다. 그러면 金庾信은 어떤가?
경주 시가지 남쪽, 都堂山(도당산)과 五陵(오릉) 사이에 천원이라는 자연부락이 있다. 지금도 이 마을 동쪽 논둑에 불상의 지대석, 석탑재, 초석들이 박혀 있다. 이곳이 인간 金庾信을 느낄 수 있는 사적 제340호, 天官寺(천관사) 터(경주시 교동 244번지 외 11필지)다.
천관사는 천관녀가 죽은 후 그녀의 집 자리에 세워진 절이다. 金庾信이 功業(공업)을 이루고 난 뒤에 천관녀의 명복을 빌기 위해 그녀가 살던 집을 절로 바꾸었다고 전해진다. 그렇다면 金庾信은 결코 비정한 인물이 아님을 알 수 있다.
한 가지 흥미로는 것은 천관녀의 신분에 관한 논란이다. 최근 들어 천관이 창기가 아니라 여성 神官(신관)이라는 견해가 상당한 설득력을 갖고 대두되고 있다. 즉, 비천한 창기였다면 天官이란 이름이 가당치도 않고, 천관녀의 집이었던 천관사 터가 신라의 聖域(성역)과 너무 가깝다는 논거에서다.
그러고 보면 그렇다. 천관사 터의 이웃에는 신라의 시조 왕 赫居世(혁거세)와 왕비 閼英(알영)의 탄생지로 전해져 오는 蘿井(나정)과 閼英井(알영정), 그리고 신라 초기의 왕들이 묻힌 五陵(오릉)이 있다. 「삼국사기」에 의하면 시조 왕에게 제사지냈던 廟堂(묘당)과 神宮(신궁)도 이곳에 세워져 있었다고 한다. 천관사 터 남쪽의 도당산(높이 95m)은 신라의 重臣(중신)들이 모여 국사를 논의했던 南堂(남당)으로 추정되기도 한다.

이길 수 있을 때만 싸우는 전략가

천관사 터에서 南川을 사이에 두고 5백m 상거한 곳에는 「삼국유사」와 필사본 「화랑세기」에 각각 金入宅(금입택) 또는 水望宅(수망택)이라고 기록되어 있는 金庾信의 집 터가 있다. 금입택이나 수망택이란 말은 재물이 물같이 밀려드는 큰 부자의 집이란 뜻이다.
신라 때 유물로는 냇돌과 다듬은 돌로 멋있게 쌓은 우물 財買井(재매정)과 주변에서 수습된 석재 등이 눈에 띄는데, 그 모양새로 보아 대단한 호화 저택이었음을 짐작케 한다. 이곳의 발굴 조사는 1991~1993년의 3년에 걸쳐 국립경주문화재연구소에 의해 이루어졌다.
이 조사에서 석축 담장, 석축 基壇 遺構(기단 유구)와 여덟 곳의 건물지 유구가 드러났고 와전류, 토기, 자기류, 금속류도 출토되었다. 우물은 깊이 5백70cm, 최대 직경 1백80cm, 바닥 직경 1백20cm다. 金庾信의 先公後私(선공후사) 정신을 말해 주는 재매정(1회 연재 참조)의 우물돌(井口石)은 ㄱ자와 ㄴ자로 가공되어 짜맞추어져 있는데, 우물 안에는 지금도 물이 고여 있다.
천관사터는 이렇게 신라의 성역과 금입택 등이 몰려 있던 동네 가까이에 있다. 이런 곳에서 방음 시설도 없었던 그 시절, 창기가 가무음곡의 판을 질펀하게 벌이며 영업을 하기는 어려웠을 것이라는 생각이 든다.
그렇다면 천관녀의 신분이 神官(신관=무녀)이었을 것이라는 주장이 그럴 듯해진다. 천관을 창기 또는 賤隸(천예)라고 한 것은 천관녀의 설화를 기록한 후세 유교 사가들의 오해 때문인지도 모른다. 귀신을 불신하는 유교 신봉자들의 가치 판단으로는 무녀나 창기, 두 직종 모두가 굳이 구별할 필요성도 없는 천한 계집이다. 어떻든 金庾信과 나폴레옹, 두 인물의 옛 情人(정인)에 대한 상반된 태도는 서로의 문화적 풍토의 차이에서 기인되었던 것인지 모르겠다.
金庾信이 자신의 말을 벤 데 대한 李御寧씨의 비난에 대해서는 소설 「金庾信, 무덤에서 뛰쳐나오다」를 쓴 崔普植(최보식·조선일보 기자)씨가 매우 재미있는 반론을 피력했다.
<유신이 죽인 말은 영특하지 못했다. 그 말이 영특했다면 주인의 심중을 헤아렸을 것이다. 그런데 그 말은 주인이 취하자 천관녀의 집에 다시 갔다. (중략) 만약 전쟁터였다고 가정해 보라. 그 말은 의식을 잃은 주인을 태우고 주인이 가기를 원치 않은 곳으로 태우고 갔을 것이다. 말을 처단할 사유가 충분하지 않는가>
金庾信과 나폴레옹은 時空(시공)을 달리하지만, 비교해 볼만한 대조적 인물임에 틀림없다.
나폴레옹은 17세(만 16세)에 포병 소위로 임관된 후 프랑스 대혁명 직후의 혼란기인 25세 때 대위에서 영관급을 거치지 않고 바로 장군으로 승진했다. 프랑스군 장교들의 다수가 해외 망명하거나 혁명정부에 비협조적이었던 데 반해 나폴레옹은 反(반)혁명 민중봉기를 진압한 공으로 여단장으로 임명되었던 것이다.
그는 31세의 나이로 쿠데타를 일으켜 제1 통령으로서 정권을 장악하고, 36세 때(1804) 프랑스 황제로 즉위했다. 그러나 그는 45세 때(1813) 라이프치히 전투의 패배로 폐위당해 엘바 섬으로 쫓겨갔다. 이어 그는 47세 때(1815) 再起(재기)했으나 워털루 전투의 패전으로 다시 대서양의 절해고도 세인트헬레나로 추방되어 그곳에서 53세(1821)의 나이로 암에 걸려 병사하고 만다.

大器晩成

金庾信은 풍월주의 지위에서 물러난 22세 이후 34세까지 12년간 역사의 무대에서 전혀 두각을 나타내지 못했다. 나폴레옹이 이탈리아 원정군 사령관으로서 아르콜레 전투와 마렝고 전투에서 공전의 대승을 거두었던 당시, 그의 나이는 불과 28세였다. 이에 비해 金庾信은 35세 때 副장군으로서 낭비성 전투에 출전하여 비로소 역사에 기록된 첫 전공을 세웠다.
이렇게 두 영웅을 비교해 볼 때 나폴레옹은 초특급 스피드로 정상에 올라 급전직하의 몰락을 했던 반면, 金庾信은 大器晩成(대기만성)의 인생을 살았다. 나폴레옹은 用兵(용병)의 천재였지만, 모스크바 원정, 라이프치히 전투, 워털루 전투에서 패배하여 유럽 정복의 야망을 이루지 못했다. 반면 金庾信은 삼국 통일에 성공한 영웅이다.
나폴레옹 전쟁 기간에 프랑스군 전사자 수가 2백만을 웃돌았지만, 그것에 비하면 金庾信 휘하 장병들의 희생은 거의 없었다고 해도 좋을 정도였다. 나폴레옹은 모스크바 원정에서 병참에 실패하여 50만 대군의 궤멸을 자초했고, 라이프치히 전투와 워털루 전투에서는 친위 군단의 투입 시기를 놓치는 등 전략 전술에서 허점을 드러냈다. 그러나 金庾信의 用兵은 화려하지는 않았으나 실패가 없었다.
나폴레옹은 국가의 운명을 걸어 놓고 승패를 예상할 수 없는 전투를 수없이 치렀지만, 金庾信은 이길 수 있는 정황을 먼저 만들어 놓고 이긴다는 확신을 가질 때만 전투를 했다. 바로 이 점이 金庾信의 전략가다운 면모다. 뛰어난 장수는 승패가 불확실한 전투는 회피하며, 유리한 국면이 도래할 때까지 끈질기게 참는 것을 장기로 삼는다.
이런 金庾信에 대해 「졸렬」 운운하는 李御寧 씨의 평가는 전혀 논리적이지 못하다. 얘기가 너무 앞으로 나가버렸는데, 말머리를 다시 613년 전후의 東아시아 무대로 되돌릴 것이다.<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