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金庾信과 그의 시대(3)

정순태   |   2005-11-21 | hit 4841

金庾信과 그의 시대(3)

정순태


신라의 삼국 통일은 민족의 재통일 아닌 민족사 최초의 통일

신라의 삼국 통일은 과연 외세에 의존하여 동족의 국가를 망하게 한 것인가? 근대적 정치이념인 민족주의의 잣대로 羅-唐 연합군의 백제, 고구려 정복을 재단할 수 있는가? 신라의 삼국 통일로 민족의 무대가 좁아졌고, 그것이 민족의 약체화를 초래하여 마침내 일본 제국주의의 식민지가 되었다는 논리는 정당한 것인가?
결론부터 말하면 신라는 외세에 의존한 것이 아니라 외세를 활용하여 삼국 통일을 달성했고, 그것은 우리 민족 형성의 결정적 계기가 되었다. 신라는 민족의 재통일이 아니라 민족사 최초의 통일을 달성했던 것이다. 고구려, 백제, 신라의 삼국 사람들은 알타이語를 사용했으니까 서로 親緣性(친연성)은 느꼈겠지만, 동족 의식은 아직 형성되지 않았다.
고구려는 외교력의 미숙으로 東아시아의 슈퍼 파워로 등장한 唐과의 관계 설정에 실패했을 뿐만 아니라 내부 분열로 자멸을 길을 걷고 있었다. 뿐만 아니라 고구려는 羅-唐 연합군에 의해 수도 평양이 함락되기 2년 전(666년)에 이미 만주 영토의 지배권을 사실상 상실했다. 따라서 「만약 고구려가 삼국을 통일했다면」이라는 발상은 당시의 국제 정치 상황을 무시한 가상 시나리오에 불과하다.
백제, 고구려의 멸망 후 신라가 對唐 전쟁에서 승리하지 못했다면 한반도엔 漢四郡(한4군)이 아닌 唐三郡(고구려군, 백제군, 신라군)이 들어섰을 것이다. 예컨대 우리와 地政學的(지정학적) 유사성을 지닌 베트남의 경우 漢 武帝(한 무제)의 침략 이래 1천년간 중국의 직할 통치를 받았다.
베트남이 직할 통치를 받았다는 것은 식민지가 되었다는 얘기지만, 신라가 중국의 朝貢冊封(조공책봉) 체제에 들어갔다는 것은 당시의 東아시아 질서 속에서 국가 이익을 확보하는 수단이었다. 그것은 팍스 아메리카(Pax Americana) 시대에 영국이나 일본이 미국의 식민지가 아닌 것과 크게 다를 바가 없다.
민족의 흥망성쇠는 순환 법칙이라도 있는 듯 돌고 돈다. 로마제국은 세계사에 빛나지만, 그 후예들의 역사는 실로 오랜 세월에 걸쳐 굴욕적이었다. 西로마제국이 475년 게르만族 용병대장 오도아케르에게 멸망당한 이후 이탈리아인들은 1천4백년 동안 한번도 민족의 재통일을 이룩하지 못하고 外勢(외세)에 의해 이탈리아 반도의 운명이 좌지우지되었던 것이다.
그런 이탈리아인들이 1860년에 피에몽트 왕국의 주도로 리소르지멘토(Risorgimento=再生, 즉 이탈리아의 재통일)를 완성하면서 사보아와 니스 지방을 프랑스에 할양했다. 사보아와 니스라면 바로 리소르지멘토의 주체 세력인 피에몽트 王家(왕가)의 발상지다.
피에몽트는 이탈리아 북부와 중부 지방을 지배하던 오스트리아의 점령군을 격퇴하기 위해 나폴레옹 3세의 외교적 지원을 받았다. 영토 할양은 바로 그에 대한 代價였다. 이같은 영토 할양을 주도한 피에몽트의 수상 카부르는 리소르지멘토의 3傑(걸) 중에서도 첫째 인물로 손꼽히고 있다.

국제 관계에선 공짜가 없다

이렇듯 국제 관계에선 공짜가 없다. 신라도 唐과 연합하여 백제와 고구려를 멸망시켰으니까 대가를 唐에게 지불해야 했다. 그러나 唐이 요구하는 대가가 너무 비쌌기 때문에 신라는 唐을 상대로 8년 전쟁을 감행했다. 그 결과 신라가 백제 영토의 전부와 대동강 이남 고구려의 땅을 차지했다. 그것은 당시의 국제적 힘 관계로 미루어 신라의 승리라고 해도 전혀 어색하지 않다.
고구려가 멸망된 지 30년 만인 698년에 고구려의 만주 故土(고토)에 건국되어 고구려의 후계국임을 선언한 渤海(발해)의 존재는 통일신라의 민족사적 자리매김에 영향을 주는 역사적 실체다. 발해는 고구려의 舊將(구장) 大祚榮(대조영)이 건국, 거란족 국가 遼(요)에 멸망당하기까지 2백여년간 번영한 국가인 만큼 민족사의 영역으로 끌어들이는 것은 당연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신라-발해를 묶어 南北國(남북국)시대라고 하기엔 떨떠름하다. 왜냐하면 발해의 민족 구성 때문이다. 현재까지의 연구로는 발해를 구성했던 다수 민족은 靺鞨(말갈)이다. 대조영까지도 말갈 출신이라고 보는 연구자들도 적지 않다.
말갈이라면 고구려의 附庸(부용) 종족이었다. 「삼국사기」를 보면 고구려의 멸망 직전까지 말갈 軍은 고구려의 동맹 세력으로서 신라의 변경을 침입하거나 唐軍과 싸우고 있다. 원래 말갈은 肅愼(숙신), 勿吉(물길)로 불리던 족속이다. 이런 말갈은 고려 이후엔 女眞(여진)이라고 불리게 되었으며, 그런 여진족이 세운 金과 淸은 중국 대륙의 절반 또는 전부를 차지한 정복국가가 되었다.
중국에서 「金史」는 그들의 正史(정사)인 24史 중 하나이며, 특히 淸의 경우 중국 역사상 그 영토가 가장 광대했던 정통 왕조로 평가되고 있다. 이런 맥락에서 지금 중국의 역사학계는 발해를 唐 제국 시기의 지방정권으로 취급하고 있다.
어떻든 통일신라를 부정하고 신라-발해의 남북국시대를 설정하려면 발해국 구성에 있어 다수 종족이던 말갈과 親緣性이 깊은 여진족의 정복왕조 金과 淸을 우리 민족사에서 어떻게 다룰 것인가 하는 문제도 아울러 검토되어야 할 것이다.
발해는 고려 시대의 官撰 史書(관찬 사서)인 「삼국사기」에서 우리 민족사의 정통 국가로 인정받지 못했다. 그것은 고려의 국력이 약했기 때문이라고 할 수도 있다. 말갈의 後身(후신)인 여진족이 세운 金이 한창 흥기하여 遼를 멸망시키고 중국 대륙 절반을 정복한 정세 속에서 말갈이 다수 종족이었던 발해를 우리 민족사의 영역에 끌어들일 수 없었던 것이다.
삼국 통일의 민족사적 의의에 대해서는 앞으로 이 글에서 더욱 심도있게 거론될 것이다. 다만 여기서 간단하게나마 짚고 넘어가지 않을 수 없는 대목 하나가 있다. 신라의 삼국 통일로 백성들의 삶이 과연 나아졌느냐 하는 점이다. 그렇지 못했다면 삼국 통일은 민족사의 발전에 아무런 의미가 없다.
신라의 삼국 통일은 죽은 자의 해골이 山河(산하)를 뒤덮었던 3백년 전쟁에 마침표를 찍고, 그후 2백년간 대평화의 시대를 창출했다. 이것 하나만으로도 삼국 통일은 우리 민족사 최대의 역사 발전이었다. 對唐 전쟁의 승리로 삼국 통일을 완수한 文武王(문무왕) 金法敏(김법민)은 681년 가을 7월1일 임종의 자리에서 다음과 같은 말을 남겼다.
「兵器(병기)를 녹여 農器(농기)를 만들게 해서 백성들로 하여금 天壽(천수)를 다하도록 했으며, 납세와 부역을 줄여 집집마다 넉넉하고 사람마다 풍족하여 백성들은 제 집을 편안히 여기고, 나라에는 근심이 없어졌다」
이같은 문무왕의 自負(자부)는 단순한 修辭(수사)가 아니다. 통일신라에서는 하층 계급인 1, 2두품의 신분이 철폐되었다. 이는 下戶(하호)의 사회경제적 위치가 격상되었다는 얘기다. 그리고 분명한 것은 고구려, 백제 귀족의 몰락으로 坐食者(좌식자), 즉 일하지 않고 놀고 먹는 계층의 수가 줄어들었다는 점이다. 「三國志」(삼국지) 卷 30 東夷(동이) 고구려 傳에 따르면 고구려의 경우 그런 坐食者가 인구의 3분의 1에 달했다.
특히 중국대륙의 唐, 한반도의 통일신라, 일본열도의 나라(奈良)-헤이안(平安) 시대로 대표되는 이 시기의 東아시아는 역사상 유례가 없는 밀접한 상호 교류를 통해 공동 번영의 시대를 구가했다. 唐은 중국대륙에서 명멸한 숱한 왕조들 중 가장 개방적인 세계국가였다. 통일신라는 「팍스 唐」의 국제질서를 활용, 우리 민족 문화를 한 단계 끌어올린 역사적 공적을 남겼다.
백성들이 누리는 삶의 질은 영토의 크기나 인구수에 비례하지 않는다. 오늘날 중화인민공화국은 대한민국(남한)에 비해 인구가 29배, 영토가 1백 배에 달한다. 그럼에도 대한민국 국민으로서 오늘의 중국에 대해 열등감을 가지거나 부러워하는 사람은 별로 없다. 따라서 신라의 삼국 통일이 민족의 약체화를 초래했다는 발상법은 출발점부터 빗나간 인식일 수밖에 없다. 그런데도 오늘날 서울의 하늘 밑에서 김유신을 논죄하는 일이 마치 지성적인 것처럼 誤導(오도)되고 있다. 이제는 이런 돌림병에 대한 우리의 입장을 정리할 차례다.

군인에게 聖職者의 덕목을 요구

앞에서도 썼지만, 丹齋는 김유신을 「음험하고 표독한 정치가」라고 매도했다. 그런데 現傳(현전)하는 史料(사료) 어디에도 김유신이 그런 혐의를 뒤집어쓸 만한 대목은 한 군데도 없다. 단재는 국가의 의지를 전쟁을 통해 관철해야 했던 군인 김유신에게 宗敎家(종교가)에게 필요한 덕목을 요구했다.
국가의 命運(명운)을 한 손에 거머쥔 將帥(장수)는 적을 속여야 싸움에서 이길 수 있다. 그래서 兵不厭詐(병불염사:兵家에선 계교로써 적을 속이기를 주저하지 아니함)는 將의 상식이다. 오늘날 소총소대의 분대장에게도 企圖秘匿(기도비익), 즉 적에게 아군의 의도를 감추는 것은 기본적인 心得(심득) 사항에 속한다.
1805년 12월 비엔나 북방 아우스터리츠 전투를 앞두고 나폴레옹은 적측인 러시아-오스트리아 연합군을 철저하게 기만한다. 심지어 두 제국 황제가 보낸 항복 권유 사절에게 대해 나폴레옹은 프랑스 軍의 弱勢(약세)를 인정하는 고뇌의 演技(연기)까지 구사했다. 김유신은 국가 목표 달성을 위해 적군뿐만 아니라 아군까지 속였던 병법가였다. 다음은 「삼국사기」 관련 기사.
「이때 유신은 押梁州(압량주:경북 경산) 軍主로 있었다. 그는 軍務(군무)에는 아무런 뜻이 없는 것처럼 술을 마시고 풍악을 울리며 수개월을 지냈다. 고을 사람들은 유신을 용렬한 장수라고 여기면서 『백성들이 편하게 생활한 지가 오래되었으므로 힘의 여유가 있어 한바탕 싸울 만한데, 장군이 저렇게 나태하니 이 일을 어찌할까?』라고 비방했다」
진덕여왕 2년(648)에 김유신은 6년 전 백제에게 빼앗긴 전략적 요충 大耶城(대야성:지금의 경남 합천)을 탈환하라는 왕명을 받고도 짐짓 군무를 태만히 했다. 적을 방심시키려면 아군부터 속여야 하는 것이 병법의 요체. 왜냐하면 적군도 아군이 속지 않는 일에 속아넘어가는 바보가 아니기 때문이다. 백제군의 경계가 소홀해졌다. 그제서야 김유신은 진덕여왕에게 나아가 말한다.
『민심을 살펴보니 이제 일을 할 만합니다. 청컨대 백제를 쳐서 大梁州(대량주=대야성)의 원수를 갚으십시오』
여왕이 걱정한다.
『작은 것으로 큰 것을 건드리면 그 위태로움은 어찌할 것인가?』
유신이 대답한다.
『전쟁의 승부는 세력의 크고 작음에 있는 것이 아니라 오직 민심에 좌우되는 것입니다. 紂(주=殷의 마지막 임금)에게는 억조의 백성이 있었으나, 인심이 떠나고 德을 잃어 周(주)의 열 명의 신하가 한 마음 한 뜻을 가진 것만 못하였습니다. 지금 우리는 한 뜻이 되어 생사를 같이 할 수 있으니 저 백제쯤은 두려워할 것이 없습니다』
이에 진덕여왕은 출정을 허락한다. 김유신은 각 주의 병사(지방군)를 선발하여 조련시켰다. 그는 王京 출신 병사보다 시골 출신의 순박한 병사야말로 정예병으로 다듬기 쉽다는 묘리를 이미 터득한 장수였다.
드디어 김유신 군은 대야성을 향해 진군한다. 대야성의 백제군도 성 밖에 진을 치고 역공을 감행한다. 김유신은 짐짓 파탄을 보이며 패주한다. 백제군은 大兵(대병)을 휘몰아 신라군을 추격했다.
輕敵必敗(경적필패), 즉 적을 얕잡아보면 반드시 패하게 마련이다. 추격하던 백제군이 玉門谷(옥문곡)에서 신라의 伏兵(복병)에 걸려 대패하고 만다. 이때 김유신 軍은 백제군 장군 8명을 사로잡고, 군사 1천명의 목을 베었다.
승세를 탄 김유신 軍은 다시 백제 경내로 진격하여 嶽城(악성) 등 12개 성을 함락시키고, 백제군 2만명을 베고 9천명을 사로잡는 대승을 거뒀다. 이같은 전공을 세운 김유신에 대해 진덕여왕은 이찬(제2위의 관등)의 작위를 내리고, 上州行軍大摠管(상주행군대총관)으로 삼았다. 이에 다시 김유신은 백제의 進禮(진례) 등 9성을 공취하고 9천명의 머리를 베었다.
전쟁은 인간을 삼키는 악마다. 적의 주력을 섬멸하지 않는 한 승리는 없다. 나폴레옹은 아우스터리츠 전투에서 러시아-오스트리아 동맹군을 死地(사지)로 유인하여 측면공격으로 2만명을 죽이고 3만명을 생포했다. 그리고는 실로 현란한 연설을 했다.
『병사들이여, 나는 그대들에게 만족하노라. 아우스터리츠의 하루 동안 그대들은 내가 기대한 대로 대담한 용맹을 발휘했다. (중략) 병사들이여, 나의 민중들은 그대들을 기쁘게 맞을 것이다. 그대들이 「나는 아우스터리츠 전투에 참전했다」고 말하기만 하면 프랑스 민중들은 「여기 용감한 인간이 있다」고 대답하리라』
대야성 탈환 전투에서 김유신도 백제군 장군 8명을 포함한 포로 9천명, 참수 3만명이라는 대전과를 기록했다. 이같은 그의 전적만 보더라도 「김유신은 智勇이 있는 명장이 아니다」라는 단재의 주장은 설득력이 없다. 다만 승전 후 김유신의 연설문만 역사에서 失傳(실전)되었을 따름이다.

유능한 장수는 謀略과 用間으로 이긴다

김유신에 대해 「평생의 大功이 전장에 있지 않고 음모로써 隣國을 亂한 者」라는 단재의 평가 역시 장수의 德目(덕목)이 무엇인지를 고려하지 않은 속단이다.
孫子兵法(손자병법)에서는 싸우지 않고 이기는 것을 上之上策(상지상책)으로 규정하고 있다. 유능한 장수의 전투 행위는 이미 이겨놓은 상황을 확인하는 절차에 다름 아닌 것이다. 따라서 장수는 적국에 간첩을 심어 내부 분열 또는 혼란을 유도한다. 이것이 단재가 말하는 「음모」라면 그런 「음모」에 능숙하면 능숙할수록 名將이라고 해야 한다. 다음은 「삼국사기」 김유신 傳 중 관련 기사의 요약.
급찬(신라의 관등 제9위) 租未押(조미압)이 夫山(부산) 현령으로 있다가 백제로 잡혀가서 좌평(백제의 관등 제1위) 任子(임자)의 종이 되었다. 그는 정성을 다해 任子를 모셔 신임을 얻은 다음 신라로 탈출하여 백제의 정세를 김유신에게 보고했다. 김유신이 조미압에게 가만히 이른다.
『나는 任子가 백제의 국사를 전담한다고 듣고 있다. 내가 그와 의논하려 했으나 기회를 얻지 못하고 있다. 그대는 나를 위해 다시 백제로 들어가서 任子에게 내 말을 전하라』
조미압은 대답한다.
『公께서 저를 불초하다고 여기지 않고 기밀을 맡기시니 비록 죽더라도 후회가 없습니다』
조미압은 다시 백제로 들어갔다. 그리고 任子 앞에 엎드려 말한다.
『제가 기왕에 백제의 백성이 되었으니 이 나라의 풍습을 알아야 하겠기에 수십일 동안 나다니면서 돌아오지 못했습니다』
任子는 그 말을 믿고 조미압을 책망하지 않았다. 조미압은 기회를 타서 다시 任子에게 다가가 말한다.
『전번에는 죄를 받을까 두려워서 감히 바른 말을 하지 못했습니다. 실은 제가 신라에 갔다가 돌아왔습니다. 김유신이 좌평께 「나라의 흥망은 예측할 수 없으니 만일 백제가 망하면 좌평이 신라에 의탁하고, 신라가 망하면 내가 백제에 의탁하기로 합시다」라는 말씀을 전하라 했습니다』
任子는 이런 말을 듣고도 못 들은 척 반응을 보이지 않았다. 여러 달이 지난 후 任子는 주위를 물리치고 조미압을 가만히 불러 묻는다.
『네가 지난번에 전하겠다고 한 김유신의 말은 어떤 것인가?』
조미압은 두려워하면서도 김유신의 말을 반복하여 전달한다. 드디어 任子는 김유신과의 내통을 결심하고 만다.
『네가 전한 말은 내가 이미 잘 알았으니 돌아가 김유신 장군께 내 뜻을 알려드려라』
위의 기록에서 알 수 있듯 백제의 핵심부를 겨냥한 김유신의 用間之計(용간지계)는 한치의 오차 없이 적중하고 있다. 조미압은 다시 신라로 돌아와 김유신에게 任子의 말을 전하고 백제의 안팎 사정을 속속들이 보고한다.
『백제는 임금과 신하가 사치하고 음란하여 국사를 돌보지 않는다. 백성들은 이를 원망하고, 신령이 노하여 재앙과 괴변이 잇달아 일어난다는 流言(유언)이 번지고 있다』
上大等(상대등=수상) 김유신은 서둘러 백제 병합의 전략을 수립하고 태종무열왕에게 나아가 아뢴다.
『백제가 무도하여 죄악이 桀(걸=夏의 마지막 임금), 紂(주=殷의 마지막 임금)보다 심하니 이제는 실로 하늘의 뜻에 따라 불쌍한 백성들을 구원하고 그 죄를 다스릴 때입니다』

<4편에서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