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金庾信과 그의 시대(4)

정순태   |   2005-11-21 | hit 5026

金庾信과 그의 시대(4)

정순태


利를 보면 大義를 생각하는 인물

김유신은 민족의 자존심을 지킨 걸출한 將(장)이었다.
백제 공략에 앞둔 660년 6월 羅唐 양군의 수뇌부는 서해상의 德勿島(덕물도:경기도 남양만의 덕적도)에 모여 전략회의를 갖는다. 이 회의의 결정 사항은 羅唐 양군이 7월10일 泗泌城(사비성:지금의 충남 부여) 외곽에서 집결하여 연합 병력으로 백제 王都(왕도)를 공략한다는 것이었다.
당군은 海路(해로)를 따라 병력을 이동시켰던 만큼 백제군과 조우하지 않고 伎伐浦(기벌포;금강 하류의 장항)에 상륙했다. 반면 김유신의 신라군은 육로로 진군하였기 때문에 黃山伐(황산벌:지금의 논산시 연산면)에서 백제의 용장 階伯(계백)이 이끄는 5천 결사대의 강력한 저항을 받았다. 황산벌의 격전에 따라 신라군은 軍期(군기)보다 하루 늦은 7월11일 사비성 외곽에 진출할 수 있었다.
羅唐 연합군의 총사령관 蘇烈(소열)은 신라군이 軍期를 어겼다는 이유로 督軍(독군:軍紀 장교) 金文潁(김문영)의 목을 베어 軍門(군문)에 내걸려 했다. 우리 역사에서는 蘇定方으로 알려지고 있지만, 定方은 蘇烈의 字(자)다. 어른의 이름을 함부로 부르지 못하도록 짓는 별칭이 字인데, 우리가 구태여 蘇烈의 字를 써야 할 까닭은 없다.
羅唐 양군의 자존심이 걸린 이 한판의 기세 싸움에서 김유신은 한 발자국도 물러나지 않았다. 다음은 「삼국사기」 태종무열왕 7년(660) 7월 條의 기록.
「대장군은 황산의 전투를 보지도 않고, 늦게 왔다고 죄 주려 하는구려. 나는 죄 없이 치욕을 당할 수 없으니, 반드시 먼저 당군과 결전을 한 후에 백제를 쳐부수겠소」
定方의 면전에서 일갈한 김유신은 곧 軍門에서 도끼를 집어드니, 노기 어린 머리털이 곧추서고 허리에 찼던 보검이 저절로 튀어 나왔다. 定方의 右將(우장) 董寶亮(동보량)이 발을 구르며 「신라 兵將(병장)이 變을 일으킬 것이다」고 말하니, 定方이 文潁의 죄를 불문에 부쳤다」
당시 김유신의 나이 66세. 백제 원정 직전 티베트(吐藩)를 정복한 蘇烈은 김유신보다 세 살 위인 69세. 두 역전의 老將(노장) 사이에 전개된 이 한판의 기세 싸움은 앞으로 羅唐 양국간에 벌어진 戰後(전후) 처리와 관련한 시비의 향방에도 심대한 영향을 끼치게 된다.
蘇烈은 노회한 장수다. 사비성이 떨어지고 의자왕이 항복하자 그는 신라 君臣(군신) 사이를 이간하려는 反間之計(반간지계)를 구사한다. 「삼국사기」에 따르면 蘇烈은 庾信, 仁問(인문), 良圖(양도) 등 3인에게 은근하게 말한다.
『내가 便宜從事(편의종사)하라는 황제의 명을 받았소. 이제 빼앗은 백제의 땅을 공들에게 食邑(식읍)으로 나눠 줌으로써 諸公(제공)의 공에 보답하고자 하는데 어떠오?』
便宜從事라면 현지 상황에 따라 일을 처리할 수 있도록 君主로부터 위임받은 재량권 행사를 말한다. 食邑은 租稅(조세)를 거둬 사용할 수 있도록 功臣(공신) 등에게 부여하는 고을이다. 그러면 김유신과 더불어 蘇烈로부터 회유를 받은 仁問은 누구인가.
仁問은 태종무열왕의 차남으로 對唐 宿衛(숙위:황제 경호 업무) 외교를 벌이던 중 唐 高宗(고종)의 命(명)에 의해 원정군의 副大摠管(부대총관)으로 참전했다. 그는 文武(문무)를 兼全(겸전)한 당대 제일류의 인물로서 唐으로선 이용가치가 충분했다.
이로부터 11년 후인 羅唐 전쟁 시기의 일이지만, 仁問은 당 고종에 의해 억지로 일시 신라국왕으로 봉해졌다. 그러나 그는 兄王(형왕)인 文武王(문무왕)에게 의리를 지키기 위해 눈물로써 固辭(고사)하는 등 매우 현명하게 처신한다.
쉽게 납득이 가지 않는 대목은 소정방에 의해 良圖가 논공행상의 대상자로 떠올랐다는 점이다. 蘇烈은 왜 良圖와 같은 30세 안팎의 젊은 무장을 포섭 대상으로 삼았던 것일까? 이때(660년 7월) 良圖의 관등은 아찬(제6위의 관등) 정도였을 것이다. 왜냐하면 「삼국사기」 태종무열왕 8년(661) 봄 3월 條 기사를 보면 양도가 대아찬(제5위)의 관등을 달고 백제부흥군을 토벌하기 위해 출전하고 있기 때문이다.
이에 대한 의문은 필사본 花郞世記를 보면 어느 정도 해소된다. 필사본 「화랑세기」의 존재와 信認度(신인도)에 관해서는 月刊朝鮮 1999년 4월호의 拙稿(졸고)에서 설명한 바 있으므로 여기서는 생략한다.
필사본 「화랑세기」에 따르면 良圖는 제22대 風月主(풍월주:신라 화랑도의 최고 지도자) 출신으로 특히 중국어에 능통했던 인물이다. 이런 양도였기에 羅唐 연합 작전에서 능력을 발휘할 수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이로부터 11년 후인 671년 羅唐 전쟁 시기의 일이지만, 양도는 신라 사신으로 唐京(당경;지금의 西安)에 들어갔다가 그곳 감옥에 억류중 순국했다. 이런 인물들이었던 만큼 蘇烈의 이간책에 놀아날 리가 없다. 김유신은 蘇烈에게 차갑게 거절한다.
『유독 우리만 땅을 받아 자신을 이롭게 한다면 이것이 어찌 의로운 일이겠소?』

蘇烈이 서둘러 철군했던 배경

羅唐 연합군이 백제를 멸망시킨 직후 양군은 일촉즉발의 긴장 관계에 돌입한다. 蘇烈의 唐軍은 泗泌(사비) 언덕 위에 진영을 설치하고 신라 침공을 기도했다. 태종무열왕이 신하들을 급히 불러 대책을 물었다. 多美公(다미공)이 나서서 말한다.
『우리 군병들에게 백제 군복을 입혀 적대 행위를 하게 하면 唐軍은 반드시 이를 공격할 것입니다. 이때 그들을 반격하면 이길 수 있습니다』
김유신은 다미공의 계책을 채택토록 태종무열왕에게 촉구한다. 왕이 反問(반문)한다.
『당군이 우리를 위해 적을 멸했는데, 도리어 그들과 싸운다면 하늘이 우리를 도와 주겠는가?』
이때 당군의 병력은 13만. 이것은 병력 수송 船團(선단)의 水軍과 보급부대의 병력 등도 포함된 숫자다. 한편 김유신이 이끈 신라군은 야전군 위주의 精兵(정병) 5만. 승전 직후에 사비성에 당도한 태종무열왕의 친위부대도 정예 군단이었을 것이다. 따라서 이때 신라군의 야전 능력과 병력은 결코 唐軍에 비해 열세가 아니었을 것이다.
김유신이 다시 진언한다.
『개가 주인을 두려워하기는 하지만, 주인이 제 다리를 밟으면 무는 법입니다. 국난을 당하여 어찌 자구책을 취하지 않겠습니까? 대왕께서는 결단하소서』
전쟁도 불사한다는 신라군 수뇌부의 결심은 즉각 細作(세작=스파이)에 의해 당군 진영에 전해지게 마련이다. 다급해진 蘇烈은 郎將(낭장) 劉仁願(유인원)에게 병력 1만을 주어 잔류시킨 다음, 義慈王(의자왕)과 신료 93명 등 백제군 포로 2만명을 끌고 서둘러 귀국길에 오른다. 그 시점엔 백제부흥군이 일어나 기세를 떨치고 있었다. 불과 1주일 전(8월26일) 백제부흥군의 본거지 任存城(임존성:충남 예산군 대흥면)은 신라군의 대대적인 공격을 받았으나 難攻不落(난공불락)이었다.
그때 蘇烈이 얼마나 황급했던지는 夫餘(부여)에 가서 定林寺(정림사)의 5층 석탑을 보면 대번에 짐작할 수 있다. 정림사 탑의 1층 屋身(옥신)에는 「大唐平百濟國碑銘」(대당평백제국비명)이라는 제목 아래 당군의 과장된 공적 사항이 새겨져 있다. 그렇게 자랑스런 戰勝(전승) 장군이라면 기념탑 하나쯤 따로 세울 만했지만, 그럴 여유조차 없어 남의 佛塔(불탑)에다 낙서를 한 셈이다.
그렇다면 蘇烈의 속셈이나 심리 상태가 궁금해진다. 그는 漢武帝(한무제) 때의 해외 원정군 사령관 荀(순체)의 비극적 최후를 他山之石(타산지석)으로 삼았는지 모른다. 순체는 베트남에 원정하여 찌우(趙)왕조를 정복한 다음 곧바로 북상하여 기원 전 108년 고전 끝에 마침내 衛滿朝鮮(위만조선)을 멸망시켰으나 귀국 후 한무제의 標的司正(표적사정)에 걸려 피의 숙청을 당하고 만다.
蘇烈로서는 의자왕의 생포만으로 이미 戰功(전공)이 높은 판에 더 이상의 모험은 회피하고 싶었을 터이다. 그는 신라군과 결전을 벌여 다행히 이기더라도 엄청난 병력 손실이 불가피할 것이고, 패전하면 문책을 모면하기 어렵다고 판단했던 듯하다.
개선 장군 蘇烈의 귀국 후의 처신이 볼 만하다. 승전 보고를 받은 당 고종이 蘇烈에게 묻는다.
『어찌하여 뒤이어 신라를 치지 않았는가?』
蘇烈이 아뢴다.
『신라 왕이 어질어 백성을 사랑하며, 신하들은 충성스럽고, 아랫사람은 윗사람을 부형과 같이 섬기고 있더이다. 신라가 비록 소국이기는 하나 가볍게 도모할 수 없었습니다』
「삼국사기」에 기록된 위의 기사를 보면 唐은 백제를 멸한 후 가능하면 신라까지 먹는다는 시나리오를 사전에 갖고 있었음이 분명하다. 또한 신라의 수뇌부는 그러한 唐의 속셈을 간파하고 一戰不辭(일전불사)의 대책을 세우고 있었던 것이다. 그러나 羅唐 양국 모두 고구려라는 공동의 적을 눈 앞에 두고 있었던 만큼 서로 가볍게 전단을 열지 못했다.
후일의 얘기지만, 蘇烈은 臥席終身(와석종신), 즉 명대로 살다가 죽었다. 唐書(당서)엔 「乾封(건봉) 2년(667) 그가 죽자 황제가 슬퍼하여 左驍騎大將軍(좌효기대장군) 幽州都督(유주도독)의 벼슬을 내리고, 시호를 莊(장)이라 했다」고 기록되어 있다.
흥미로운 것은 당 조정이 백제 멸망 후 김유신에 대해 특별 관리를 했다는 점이다. 문무왕 5년(665)에 당 고종은 사신 梁冬碧(양동벽)과 任智高(임지고)를 신라에 파견하여 김유신을 奉常正卿(봉상정경) 平壤郡開國公(평양군개국공) 식읍 2천호로 책봉했다. 平壤郡開國公 운운의 관작과 식읍은 고구려가 존속하고 있었던 시점이었으니까, 지불이 불확실한 약속어음에 불과한 것이었지만, 복선을 깔고 있는 교묘한 미끼였다.
이어 문무왕 6년(666)에는 김유신의 장남 대아찬(제5위의 관등) 三光이 당 고종의 命으로 당에 불려가 左武衛翊府 中郞將(좌무위익부 중랑장)이란 벼슬에 오르고 황제를 경호하는 宿衛(숙위)의 임무를 부여받았다. 宿衛라면 태종무열왕의 아들들인 김법민(문무왕), 仁問, 文旺이 거쳐간 직책이었다.
김유신에 대한 唐 조정의 이같은 특별 대우는 자칫하면 신라의 君臣간에 틈이 벌어질 꼬투리가 될 만했다. 당측으로서는 바로 그것을 겨냥했을 것이다. 병법에서 말하는 二虎競食計(이호경식계), 즉 두 마리 호랑이가 먹이를 놓고 서로 싸우게 하여 중간에서 利(이)를 챙기는 계책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김유신은 處世學(처세학)의 교과서 같은 인물이었다. 그에 대한 태종무열왕과 문무왕의 신임이 절대적이었다.
668년 고구려를 멸한 후 문무왕은 서라벌로 귀환하던 길에 南漢州(남한주:지금의 경기도 광주)에 이르러 김유신과 그 부친, 조부의 3대에 걸친 공적을 찬양하면서 좌우 신하들에게 行賞(행상)의 방법을 묻는다.
『(전략) 김유신은 조부와 부친의 유업을 계승하여 社稷之臣(사직지신)이 되었다. 그는 나가면 장수가 되고 들어오면 정승이 되었으니 그 공적이 매우 크다. 만일 公의 한 가문에 의지하지 않았더라면 나라의 흥망은 알 수 없었다. 그에게 어떤 직위와 상을 주어야 하는가?』
신하들도 입을 모아 『저희들의 생각도 대왕의 뜻과 같습니다』라고 김유신을 찬양했다. 이에 문무왕은 김유신에게 太大舒發翰(태대서발한)을 제수하고, 식읍을 5백호로 했다.
서발한은 角干(각간)과 동격인 신라 17관등 가운데 제1위. 그런데 그것도 미흡하다고 하여 서발한 위에다 크고 또 크다는 太大를 올렸다. 김유신은 백제 멸망 직후 角干에서 신라 초유의 大角干으로 승차해 있었는데, 또다시 爲人設官(위인설관:특정인을 위해 관직을 만듦)의 영예를 누린 것이다.

君臣水魚之交의 모델

김유신은 문무왕 13년(673) 7월1일 79세의 나이로 세상을 떠났다. 임종을 앞두고 문무왕이 김유신의 私家(사가)로 행차하여 병 문안을 했다. 이때 君臣간의 대화는 國家大計(국가대계)를 거론하는 가운데 저 유명한 君臣水魚之交(군신수어지교:고기와 물과 같은 임금과 신하의 관계)가 들먹여지고 있다.
『臣이 온 힘을 다하여 元首(원수)를 모시려 하였으나 犬馬(견마)의 몸에 병이 들어 오늘 이후로 다시 용안을 뵈옵지 못하겠습니다』
대왕이 울면서 말한다.
『과인에게 卿(경)이 있음은 마치 물고기에 물이 있는 것과 같소. 만일 피치 못할 일이 생긴다면 백성은 어떻게 하며 社稷(사직)은 또 어떻게 하리오?』
유신이 대답한다.
『신이 우둔하고 못났으니 어찌 나라에 도움이 되었겠습니까? 오직 다행스럽게도 현명한 임금께서 의심없이 등용하셨고, 의심없이 일을 맡기셨기에, 대왕의 밝은 덕에 힘입어 마디만한 공을 이룬 것입니다. 지금 三韓이 一家가 되고 백성들이 두 마음을 가지지 아니하니 비록 太平에는 이르지 못했으나, 小康(소강:다소 안온함)이라고 할 만합니다.
臣이 보건대 예로부터 대통을 잇는 임금들이 처음에는 잘못하는 일이 없지만, 유종의 미를 거두는 경우는 드물었습니다. 그래서 여러 대의 공적이 하루 아침에 무너져 없어지니 심히 통탄할 일입니다. 바라옵건대 전하께서는 공을 이루는 것이 쉽지 않음을 아시며, 守成(수성)하는 것 또한 어렵다는 것을 염두에 두시고, 소인배를 멀리하며 君子를 가까이 하시어, 위로는 조정이 화목하고 아래로는 백성과 만물이 편안하여 禍亂(화란)이 일어나지 않고 나라의 기틀이 무궁하게 된다면 臣은 죽어도 여한이 없겠습니다』
「삼국사기」 金庾信 傳은 이때 문무왕의 반응을 다음과 같이 전하고 있다.
『왕은 흐느끼면서 그 말을 받아들였다』
역사를 되돌아보면 전장에서 높은 공훈을 세운 신하일수록 그의 최후는 비참했다. 楚覇王(초패왕) 項羽(항우)를 패망시키고 중원의 통일제국 漢(한)을 창업한 劉邦(유방)의 공신들이 그러했다.
野戰(야전) 최고의 명장 韓信(한신)은 실로 억울한 모반죄를 뒤집어 쓰고 형장에서 참수되면서 오늘날에도 회자되는 狡兎死 走狗烹(교토사 주구팽)이라는 유언을 남겼다. 꾀 많은 토끼가 죽으면 그 뒤를 쫓던 사냥개가 솥 안에서 개장국으로 푹 삶기게 된다는 얘기다.
유방이 항우에게 몰릴 때 항우 軍의 배후에서 게릴라 戰을 전개하여 楚漢戰(초한전)의 흐름을 역전시켰던 彭越(팽월)의 최후도 韓信과 다를 바 없었다. 공신들이 하나하나 제거되던 가운데 전전긍긍하던 그도 끝내 유방의 아내 呂后(여후)의 덫에 걸려 죽임을 당했다. 漢 조정은 팽월의 사체로 젓을 담가 여러 제후들에게 돌려 맛보게 했으니까 문자 그대로 烹(팽)을 당했던 것이다.
권력의 세계에서는 竹馬故友(죽마고우)도 없었다. 유방과 盧(노관)은 한 마을에서 한날 한시에 태어나 같이 글을 배우며 형제보다 가까운 사이로 성장했다. 유방의 천하통일 후 노관은 燕王(연왕)에 봉해졌으나 참소 때문에 얼마 견디지도 못하고 도주하여 흉노족에게 몸을 의탁하고 있다가 죽고 만다.
그래도 현명했던 공신은 유방 막하 제1의 軍師(군사)였던 張良(장량)이었다. 그는 功臣田(공신전)의 3분의 2를 국가에 반납하는 등 몸을 잔뜩 낮추다가 끝내는 神仙術(신선술)을 배운다며 세상을 등져버렸다.
대공을 세운 뒤 미련 없이 종적을 감춘 대표적 인물로는 越王 句踐(구천)을 도와 吳王 夫差(부차)를 敗死(패사)시킨 데 이어 구천을 전국시대의 覇者(패자)로 끌어올린 越의 명재상 范`(범려)가 손꼽힌다. 그는 『월왕은 患亂(환란)은 함께 해도 榮華(영화)는 같이 할 수 없는 사람』이라는 명언을 남기고 야반도주, 이름을 감추고 변신하여 천하의 巨商(거상)으로 성공했다.
천하를 잡은 군주들은 으레 공신들에게 피의 숙청을 감행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삼국 통일의 元勳(원훈) 김유신은 살아서는 太大角干으로 부귀와 권세를 누리다 臥席終身(와석종신)했고, 죽어서는 人臣의 몸으로 우리 역사상 전무후무하게 興武大王(흥무대왕)에 추존되었다.
전두환의 5·17 쿠데타니, YS의 문민정부니,IMF 사태니, 또는 DJP의 공동 집권이니 하는 정치적 변환기의 굽이굽이에서 표적 사정을 당하거나 제 밥그릇 하나 챙기지 못하고 쫓겨난 요즘 사람들의 눈에 비치는 김유신은 「시대의 옷을 잘 입은 경이적 인물」일 것이다. 이제는 김유신의 다이내믹한 일생을 출생부터 추적할 차례다.

<5편에서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