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료실

金庾信과 그의 시대(7)

정순태   |   2005-11-23 | hit 5461

金庾信과 그의 시대(7)

정순태



메시아 미륵불에 비유된 청년

<삼국유사> 제4 塔像(탑상) 편을 보면 흥륜사의 중 眞慈(진자)가 未尸郞(미시랑)이란 동자를 미륵의 化身(화신)으로 믿고 왕에게 천거하여 화랑으로 세우는 기록도 나온다. 위기의 신라는 이럴 만큼 미륵의 출현을 대망했다. 화랑=미륵이기를 염원했다는 얘기다.
金庾信이 화랑도의 제2인자로 뛰어오른 경과를 살펴보면 어떤 운명성을 느끼게 한다. 필사본 <화랑세기>에 따르면 당초 副弟의 지위를 놓고 金庾信과 경합했던 인물은 美室 宮主(미실 궁주)의 막내 아들 寶宗(보종)이었다.
미실은 파워게임에 능숙하고 文才(문재)도 뛰어난 데다 섹스어필에 관한 한 신라 제1의 여성이었다. 그녀는 진흥왕-진지왕-진평왕으로 이어지는 3代 임금의 침실에서 총애를 받으며 화랑 정치에 막강한 영향력을 발휘했다.
처녀 시절의 미실은 5세 풍월주로서 요절한 斯多含(사다함)의 연인이었고, 6세 풍월주이며 出將入相(출장입상)의 인물인 世宗(세종)은 그녀의 남편이었다. 또 7세 풍월주 薛原郞(설원랑)은 그녀의 情夫(정부)였고, 10세 풍월주 美生(미생)은 그녀의 동생이었으며, 11세 풍월주 夏宗(하종)은 그녀와 世宗 사이의 아들이었다.
미실의 일생을 추적하는 것이야말로 近親婚(근친혼)과 私通(사통) 관계로 얽히고 설킨 화랑의 인맥을 꿰뚫어 볼 수 있는 지름길이지만, 이미 <月刊朝鮮> 1999년 4월호의 졸고 <화랑세기의 정체>에서 상술했으므로 여기선 생략한다.
다만 寶宗의 출생을 둘러싼 비화만은 이 글의 진행상 간단히 짚고 넘어갈 필요가 있을 것 같다. 이것은 프리섹스를 누리던 신라 귀족 여성의 모습을 적나라하게 드러내는 대표적 사례이기도 하다. 다음은 필사본 <화랑세기>의 관련 기록이다.
<弘濟(홍제) 8년에 (중략) 미실 궁주는 璽主(새주·宮中의 직책인 듯함)가 되어 政堂(정당)에서 책을 보고 있었다. 그러다 대낮에 흰 양이 품 속으로 들어오는 꿈을 꾸고 난 후, 이것이 길몽임을 깨닫고 서둘러 임금을 이끌고 침실로 들어갔다. 그러나 그때 임금이 아직 어려서 雲雨(운우)의 정을 도울 수 없었다. 이에 미실 궁주는 다시 衿荷(금하) 薛原郞에게 침소로 들어와 자신을 모시게 했다. 그리하여 보종 公을 낳았다>
홍제 8년은 진평왕 원년(579)이다. 홍제는 진흥왕 33년(572)에서 진평왕 5년(583)까지 사용된 연호다. 그러니까 위의 記事(기사)에서 여자를 몰랐던 어린 임금은 진평왕이다.
설원랑은 엄격한 骨品制(골품제)가 지배하던 신분사회의 높은 장벽을 한 줄기 봄바람과 같이 부드럽게 넘어간 멋쟁이였다. 그의 성씨인 薛(설) 씨에서 짐작할 수 있듯 그의 신분은 六頭品(6두품)이다. 6두품이라면 제 아무리 재주가 있다고 하더라도 신라의 17官等(관등) 중 제6위에 해당하는 阿(아찬)까지만 오를 수 있는 신분이다.
그런데 위의 기사를 보면 설원랑의 관직은 衿荷臣(금하신)에 이르고 있다. 금하신은 位和府(위화부)의 令(영=장관)이다. 위화부는 진평왕 3년(581)에 창설되어 나라의 법제와 관리의 선발 및 인사를 맡은 관청이다.
고위 官等(관등)의 귀족이 맡던 금하신의 지위를 제6위의 관등인 설원랑이 차지했다는 것은 대단히 예외적인 일이었다. 설원랑은 대단한 미남자였는데다 피리의 달인이었으며, 仙道(선도)에 해박하여 미실의 천거에 의해 제7세 풍월주에 오른 데 이어 신라 조정의 핵심 요직을 맡았던 것이다.
미실과 설원랑의 私通(사통)에 의해 태어난 보종은 어린 시절에 멋모르고 진평왕을 아버지라고 불렀다. 그러나 보종은 자랄수록 설원랑의 모습을 닮아갔다. 결국 보종은 그의 生父(생부)인 설원랑에게 돌아갔으나, 진평왕은 보종을 아들같이 여기고 자주 상을 내리는 등 애지중지했다.
요즘 사람들이 들으면 해괴망칙한 얘기지만, 신라 남성은 그가 왕이든 귀족이든 이처럼 바람 피우는 아내나 애인에 대해 處容歌(처용가)의 처용처럼 관대했다. 진평왕에게 보종의 존재는 摩腹子(마복자)였다. 신라에서는 자기의 情婦(정부)가 다른 남자와 관계하여 낳은 아들을 마복자라고 불렀다. 신라 21대 소지왕의 경우 이런 마복자 7명을 寵臣(총신)으로 삼기도 했다.

경쟁자까지 추종자로 만든 품성

그런데도 金庾信이 미실의 아들인 寶宗을 앞질렀다는 것은 얼른 이해하기가 어렵다. 다음은 그 배경을 짐작게 하는 필사본 <화랑세기>의 관련 기록이다.
<보종공은 (中略) 유신공이 여러 사람들에게 명망이 있다고 하여 그 자리를 양보하니 대개 미실 궁주가 萬呼 太后(만호 태후·진평왕의 母后)를 위로하고자 하여 명한 것이다>
金庾信이 만호 태후로부터 『참으로 내 손자』라는 인정을 받았다는 얘기는 앞에서 썼다. 그러나 만호 태후의 핏줄 인정만으로 金庾信이 두각을 나타낸 것은 결코 아니다. 신라 귀족 사회에선 그 이상의 혈통을 가진 청년들이 수두룩했다. 그렇다면 그 이유는 무엇일까?
소싯적부터 金庾信은 남을 심복시키는 비상한 품성을 지닌 인물이었던 것 같다. 예컨대 그에게 부제의 지위를 양보한 보종 公도 다섯 살 아래의 그를 따랐다. 다시 필사본 <화랑세기>의 기록을 인용한다.
<보종 공은 (중략) 아침에 일어나면 정원에 가득한 고목을 바라보았고, 물고기와 학을 기르며 그 가운데를 거닐었다. 특히 유신 공을 아버지나 형처럼 외경했다. 유신 공이 말한다.
『형은 어찌하여 아우를 두려워하십니까?』
『공께서는 하늘의 해와 달이고 저는 인간 세상의 작은 티끌이니, 어찌 감히 두려워하고 공경하지 않겠습니까?』
(中略) 이에 유신 공이 낭도들에게 호령한다.
『너희들 중에서 仙道를 배우려거든 보종 형을 따르고, 나라를 지켜 공을 세우려거든 나를 따르라』>
보종은 문장을 좋아하고 성품이 온순하여 마치 여성과 같았다. 음주나 여색을 꺼리고, 항상 작은 당나귀를 타고 피리를 불며 다니니 사람들은 그를 가르켜 「眞仙公子」(진선공자)라고 불렀다. 그는 金庾信이 병에 걸리기라도 하면 치료하는 데 온 정성을 기울였다고 한다.
『公께서는 나라의 보배이니 저의 의술을 숨길 수 없습니다』
보종은 창 칼과는 거리가 먼 文士(문사)이며 과학자였다. 이런 보종의 장래를 염려한 미실은 金庾信에게 가만히 부탁한다.
『내 아들은 어리석고 나약하니 도와 주기 바라오』
金庾信의 대답이 매우 사려깊다.
『제가 진실로 어리석습니다. 형(보종)은 비록 나약하지만, 仙道가 원대하니 염려하지 마십시오』
훗날의 얘기지만, 金庾信은 나라에 큰 일이 있으면 반드시 보종 공을 먼저 만나 물어보았다고 한다. 그만큼 보종의 견해를 중시했다는 얘기다. 金庾信과 보종의 관계는 文武(문무)의 절묘한 하모니라고 할 수 있다.

花郞徒는 全人 교육기관

화랑 제도의 특징은 문무의 균형적 배합에 있다. 그것은 단순한 무관 양성 학교가 아니라 국가와 시대가 요구하는 文武兼全(문무겸전)의 엘리트를 양성하는 全人(전인) 교육기관이었다. <삼국사기>에는 「金大問(김대문·화랑세기의 저자)이 말하기를, 여기서(花郞徒) 현명한 재상과 충성스런 신하가 선발되었고, 뛰어난 장수와 용감한 병사가 나왔다고 했다」고 기록되어 있다.
그렇다면 화랑 조직의 체제와 기능을 살펴볼 필요가 있다. 화랑 조직을 보면 풍월주-부제의 지도 체제 아래 3인의 大花郞(대화랑)이 병립해 있었다.
左方(좌방)대화랑 밑에는 左화랑 2인, 小화랑 3인, 妙(묘)화랑 7인이 있고, 그 아래 3部를 두어 道義(도의), 文事(문사), 武事(무사)를 관장했다.
右方(우방)대화랑 밑에는 右화랑 2인, 小화랑 3인, 妙화랑 7인이 있고, 그 아래 3部를 두어 玄妙(현묘), 樂事(악사), 藝事(예사)를 관장했다.
前方(전방)대화랑 휘하에도 역시 3部를 두어 遊花(유화), 祭事(제사), 供事(공사)를 관장했다. 이밖에 眞骨(진골)화랑, 別門(별문)화랑, 別方(별방)화랑 등을 두어 12, 13세의 귀족, 巨門(거문) 출신의 자제들이 참여토록 했다.
<삼국사기> 진흥왕 37년(576)條의 기사를 보면 신라가 어떤 방식으로 인재를 뽑아 썼는지에 대한 해답이 나온다.
<진흥왕 초기에 임금과 신하들이 인재를 알아볼 수 없는 것을 문제로 여겼다. 이에 여럿이 모여 서로 어울리도록 하고, 그들의 행동거지를 살펴 본 후에 적절한 자를 천거하여 임용하기로 했다.>
여러 청년들을 모아놓고 단체로 수련 생활을 시키면 자연히 각자의 능력과 개성이 드러나게 마련이다. 그러면 그들은 과연 어떻게 수련을 했던 것일까. 다음은 이어지는 <삼국사기>의 기록이다.
<(前略) 그들은 더러는 도의로써 서로 연마하고(相磨以道義), 더러는 노래와 춤으로 서로 즐기면서(相悅以歌樂) 산수를 찾아 노닐어(遊娛山水), 먼 곳이라도 그들의 발길이 닿지 않은 곳이 없었다(無遠不至)>
경주국립박물관에 가서 壬申誓記石(임신서기석) 앞에 서기만 하면 「도의로써 서로 연마했다」는 말이 무엇을 뜻하는지 대번에 가슴에 와닿는다. 임신서기석은 壬申年(임신년·552년 혹은 612년으로 추정됨)에 화랑 둘이서 하늘에 굳게 맹세하는 글을 새겨넣은 높이 34cm 짜리 냇돌이다. 이 냇돌에 담긴 74자의 吏讀(이두)문자를 풀이하면 다음과 같은 내용이다.
<임신년 6월16일 두 사람이 함께 하늘에 맹세한다. 지금부터 3년 뒤에는 忠道(충도)를 굳게 지녀 허물이 없기를 맹세한다. 만약 이 서약에 어긋남이 있으면 하늘로부터 큰 죄를 받을 것을 다짐한다. 만약에 나라가 편안치 못하고 크게 어지러워지면 나라를 위해 충성할 것을 맹세한다.>
위의 인용문에서 알 수 있듯 신라 화랑의 이상과 염원과 포부는 忠(충) 사상의 실현이었다. 圓光 法師(원광 법사)가 說(설)한 世俗五戒(세속오계)의 제1항도 忠이었다. 바로 이 점에서 花郞道(화랑도)는 유교가 추구하는 가치 체계와 다르다.
유교에서는 孝(효)가 근본 가치이며, 君臣(군신) 간에는 義理(의리) 관계가 소멸되면 벼슬을 버리고 물러가더라도 선비로서 부끄러울 바가 없다. 반면 花郞道는 忠을 실현함으로써 孝도 동시에 실현할 수 있다는 사상 체계다. 충과 효의 우선순위가 다른 것이다. <삼국사기> 列傳(열전)은 바로 이런 사상으로 단련된 화랑 출신 戰士(전사)들의 희생 정신과 용맹으로 가득 채워져 있다.
花郞徒(화랑도)는 상고시대로부터 유래된 청년집회나 戰士(전사)집단에 그 뿌리를 두고 있었다. 그런 만큼 가장 중시한 것은 외적을 제압할 수 있는 무술의 수련이었을 것이다. 그러나 신라 화랑의 수련은 거기에 그치지 않았다. 이어지는 임신서기석의 내용이 그것을 증명하고 있다.
<앞서 辛未年(신미년) 7월22일에 크게 다짐한 바 있는 詩(시=詩經), 尙書(상서), 禮(예=禮記), 傳(전=春秋左氏傳)을 3년 동안 모두 익힐 것을 맹세한다>
위의 인용문에서는 두 신라 젊은이가 임신년의 한 해 전인 신미년에 학문을 익혀 盡忠報國(진충보국)을 서로 맹세한 바 있었음을 알 수 있다. 신라 사회는 화랑에게 臨戰無退(임전무퇴)의 勇猛(용맹)한 장교뿐만 아니라 한 시대를 짊어지고 나갈 將帥(장수)와 經綸家(경륜가)를 기대했던 것이다.

화랑도의 경쟁력

앞에서 거론했던 수련 방식 가운데 「歌樂(가악)으로 서로 즐겼다」는 대목도 신라 화랑을 이해하는 데 결코 놓칠 수 없는 대목이다. 화랑 집회와 歌舞遊娛(가무유오)의 상관 관계에 대해서는 이미 일본인 학자 미시나 아키히데(三品彰英·1902-1971)가 그의 명저 <신라 화랑의 연구>에서 문화인류학적으로 설파한 바 있지만, 원래 歌舞를 통한 놀이는 개인과 단체를 결속시키는 데 결정적 역할을 한다.
집회의 성원으로서 노래와 춤을 배운다는 것은 한 사람의 집회 성원으로서의 자격 구비였고, 특정 가무는 집회 성원이 갖는 가장 중요한 공동적 재산이었으며, 조합원으로서의 특권은 그것을 주고 받음에 의해 결정되었다. 미시나의 논리다.
미시나의 얘기를 쉽게 이해하려면 오늘의 한국 사회에서 왜 하필이면 고등학교 동창 조직이 가장 끈끈한 동류의식을 공유하고 있는지를 생각해보면 된다. 그것은 바로 고교 시절 조회 때나 학교 대항 운동경기 같은 데서 뻔질나게 교가를 합창하고 응원의 몸짓(춤)을 함께 했기 때문이다.
歌樂과 군사는 불가분의 관계에 있다.
<삼국사기>를 보면, 적국에 대한 공격을 앞두고 가무로써 흥을 일으키는 기사(예컨대 진흥왕 12년 3월 條)가 더러 눈에 띄는데, 이것은 가악이 당시의 중요한 전투 준비 행위였다는 얘기다.
삼국 통일 전까지 신라에는 고구려의 太學(태학=국립대학)이나 堂(경당=사립학교)과 같은 상설 교실에서 교육하는 기관이 없었다. 花郞徒의 성원들은 단체로 「산수를 유람하여, 먼 곳이라도 그들의 발길이 닿지 않은 곳이 없었다」는 얘기는 앞에서 썼지만, 이런 야외 교육이 오히려 화랑의 강점이 되었다. 그 이유가 무엇일까?
개발 연대 한국의 主力(주력)은 누가 뭐라고 해도 지금은 名退(명퇴)를 당하거나 「찬밥」을 먹고 있는 50대 후반으로부터 60대에 걸친 세대다. 이 연령의 세대는 6·25 전쟁의 혼란중 교실과 책걸상이 불타버리거나 군에 징발되어 山野(산야)를 헤매면서 수업을 받은 경험을 공유하고 있다.
이런 세대는 생존력이 강렬하다. 그래서 그들이 일선에서 일했던 시기에 한국은 세계사에서 유례 없는 압축성장의 신화를 창조할 수 있었던 것이다.
花郞徒는 도의와 가악을 대자연 속에서 수련했다. 「遊娛山水」(유오산수)는 성지 순례, 地理(지리) 습득, 국토 사랑, 체력 단련이었다. 대자연 속으로 들어가려면 우선 멀리 걸어야 한다. 이것은 매우 눈여겨 볼 대목이다. 軍團(군단) 전투력의 우열은 行軍(행군)의 능력에서 결정되기 때문이다.
예컨대 나폴레옹의 步兵(보병) 부대는 당시 유럽 각국의 보병에 비해 2배 빠른 속도로 이동했다. 빠른 기동력으로 병력의 수적 열세를 극복했던 것이다. 1805년 아우스터리츠 三帝會戰(3제회전)에서 나폴레옹 휘하의 다부 軍은 이틀 동안 1백40km나 강행군하여 나폴레옹의 본대에 합류한 뒤 바로 전투에 참가했다. 이것이 바로 병법에서 말하는 集中(집중)에 의한 各個擊破(각개격파)다.
화랑도의 산천유람은 바로 놀이를 통한 전투 훈련이었다. 물론 신라 시대의 명승지에 유스호스텔이나 여관 같은 숙박 시설이 있었을 리가 없다. 화랑도는 野營(야영)을 하며 한솥밥을 먹었다. 이것이 野戰(야전)에서의 생존 능력과 협동 정신을 몸에 배게 했던 것이다. <8편에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