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金庾信과 그의 시대(13)

정순태   |   2005-11-26 | hit 4962

金庾信과 그의 시대(13)

정순태


金春秋인가, 金庾信인가

삼국 통일의 원훈을 한 사람만 들라면 김춘추일까, 김유신일까? 그 해답은 매우 어렵다. 김춘추와 김유신은 우리 민족사의 비스마르크와 몰트게다. 비스마르크와 몰트게는 1860년대로부터 1870년대에 걸쳐 독일 통일을 완수한 프로이센 왕국의 수상과 軍(군)참모총장이었다.
각자의 역할을 정확히 인식하고, 그 지위에 있는 자가 충분히 수완을 발휘했던 조직이라면 서양 근대사에선 수상 비스마르크와 참모총장 몰트게가 리더십을 발휘했던 시기의 프로이센 왕국의 지도부가 대표적 존재로 손꼽힌다. 이때의 국왕은 빌헬름 1세였다. 독일 통일을 위해 프로이센이 對(대) 덴마크, 對 오스트리아, 對 프랑스 전쟁을 감행할 당시에 빌헬름 1세와 비스마르크는 전선에서 전개되는 작전에 관한 한 일체 간섭을 하지 않고 몰트게에게 일임했다.
그 대신에 비스마르크는 탁월한 외교력을 발휘하여 미리 전쟁의 판을 짰다. 즉, 오스트리아와 개전할 때는 프랑스가 개입하지 못하도록 나폴레옹 3세의 허영심을 만족시켜 주었고, 프랑스와 싸울 때는 나폴레옹 3세가 프랑스의 승전을 자신하고 먼저 선전포고를 하는 상황을 유도하여 역시 주변 열강의 개입을 원천 봉쇄했다.
독일군 참모본부의 기능과 지휘관의 능력을 정예화하고 철도 수송에 의한 병력 투입의 스피드화로 근대적 속도전을 감행한 몰트게의 전술은 탁월했다. 그러나 프로이센 軍의 교전 상대를 항상 1개국으로만 한정시켜 놓은 비스마르크의 탁월한 외교력이 없었다면 빛나는 전공은 이뤄지기 어려웠을 것이다. 바로 이 점에서 독일 통일에서 비스마르크의 비중은 몰트게보다 컸다고 할 수 있다.
독일 역사상 최강의 리더십이 비스마르크-몰트게의 콤비라면, 우리 민족 사상의 그것은 김춘추-김유신 동맹으로 형성되었다. 다만 야성적 품성의 비스마르크와 학자형 군인이었던 몰트게의 경우, 서로가 서로의 인간성만은 과소평가하거나 경멸했다.
반면 김춘추와 김유신은 인간적으로도 서로 믿고 의지하는 문자 그대로 혈맹이었으며, 이것이 삼국 통일을 견인했던 기관차였다. 그렇다면 이 혈맹을 주도한 쪽은 누구인가? 그것은 김춘추라기보다는 김유신이었다. 바로 이 점에서 신라의 삼국 통일을 이룬 원훈을 굳이 한 사람만 들라고 한다면 나는 김유신을 지목할 수밖에 없다.
낭비성 전투(629) 이후 김용춘-김춘추 부자와 김서현-김유신 부자의 신흥 귀족 세력이 크게 대두했던 것은 사실이지만, 아직 신라 정계의 주류는 舊귀족세력이었다. 이것은 「삼국사기」 선덕여왕 원년(632) 2월 條에 「大臣 乙祭(을제)로 하여금 국정을 총괄하게 했다」고 기록된 사실 등으로 확인할 수 있다.
여왕이 왕위에 오르자, 백제 무왕의 신라에 대한 공세가 더욱 활발해진다. 선덕여왕 2년(633)에 백제군은 신라의 西谷城(서곡성·충북 괴산군 청안면)을 공격하여 13일 만에 함락시킨다. 선덕여왕 5년(636)에는 백제의 특공대 5백명이 女根谷(여근곡, 혹은 옥문곡)까지 침입했다. 옥문곡이라면 바로 지금의 경주시 서면 신평2리 玉門谷(옥문곡)이다.
경부고속도로를 하행하다가 경주터널을 통과하자마자 오른쪽을 바라보면 女根谷 혹은 玉門谷이라는 지명이 꼭 맞아떨어질 만큼 오목 볼록한 모습의 산세가 펼쳐져 있다. 건천읍에서 3㎞ 떨어진 곳이다. 백제군이 여기까지 침투했다는 것은 1968년 청와대 기습을 노린 북한의 124軍부대 소속 김신조 일당이 경복궁 서쪽 자하문까지 침투한 것과 비슷한 상황이다.

善德女王과 義慈王

이때 백제 장군 宇召(우소)가 이끈 특공대 5백명을 포착하여 전멸시킨 신라의 장군이 閼川(알천)이다. 이 사태를 전하는 「삼국유사」의 기록이 매우 노골적이다.
「한겨울인데 靈廟寺(영묘사) 玉門池(옥문지)의 개구리 떼가 모여 사나흘 동안 울었다. 나라 사람들이 괴이하게 여겨 여왕에게 아뢰었더니, 왕이 급히 각간(제1위의 관등) 閼川과 弼呑(필탄) 등에게 명했다.
『정병 2천을 뽑아 빨리 서쪽 교외로 가 보라. 女根谷을 물어 찾아가면 반드시 적병이 있을 테니, 습격하여 죽이라』
두 각간이 명을 받고 각기 1천명씩 거느리고 서쪽 교외에 가서 물었더니, 富山(부산) 밑에 과연 백제 군사 5백명이 와서 숨어 있었기에 모두 잡아 죽였다. 백제 장군 우소라는 자가 남산 고개 바위 위에 숨어 있으므로, 또 에워싸고 활로 쏘아 죽였다. 또한 後陣(후진) 1천2백명이 따라오는 것도 역시 쳐서 죽였는데, 하나도 남기지 않았다」
위의 인용문까지라면 「삼국사기」의 관련 기록도 비슷하다. 그러나 「삼국유사」에는 백제 특공대의 침투를 어떻게 짐작했는지를 묻는 신하들에 대해 선덕여왕 스스로가 설명하는 대목의 기사가 더 추가되어 있다. 이 대목은 유교적 엄숙주의의 필법으로는 흉내 내기조차 어려운 표현이어서 「삼국유사」를 읽는 맛을 한층 높여 준다.
「개구리는 (눈이 불거져 나와) 성난 모습을 지녔으니, 이는 병사의 상징이다. 玉門은 女根이며, 여인은 陰(음)이므로 그 빛이 희고, 흰 것은 서쪽 빛이므로 적병이 서쪽에 있는 것을 알았다. 男根(남근)이 女根 속으로 들어가면 반드시 죽으므로, 이로써 쉽게 잡을 것을 알았노라」
「삼국유사」에는 「이에 신하들이 선덕(여)왕의 성스런 지혜에 감복했다」고 기록되어 있지만, 나는 섹스와 관련한 담론을 자유자재로 구사한 여왕의 대담성에 더욱 감탄하고, 이런 전후 사정을 그대로 후세에 전달한 「삼국유사」의 저자 一然(일연)에게 감사한다.
어떻든 선덕여왕 즉위 초에 행정권을 장악한 인물이 乙祭라면 병권을 장악한 인물은 閼川이었다. 문무 양쪽의 실력자 모두가 舊귀족을 대표하는 인물이다. 여근곡에 침투한 백제 특공대를 섬멸한 알천은 그 다음해인 선덕여왕 6년(637)에 대장군으로 임명되었다. 알천은 호랑이 꼬리를 붙잡아 메쳐 죽일 만큼 용력을 지닌 장수였다. 그럼에도 이웃 나라들은 여왕이 다스리는 신라를 얕잡아 본 것은 사실이었다.
선덕여왕 7년(638)에 고구려 軍은 신라의 북쪽 임진강변의 七重城(칠중성·지금의 경기도 파주군 적성면)을 공격했다. 이때 대장군 알천이 출전하여 고구려 軍을 물리쳤다.
642년 7월과 8월에 걸친 백제군의 총공세는 신라를 최대의 위기 상황으로 몰아갔다. 신라 선덕여왕 11년, 백제 義慈王(의자왕) 2년의 일이다. 백제 무왕이 신라 진평왕의 사위라는 「삼국유사」의 기록이 옳다면, 선덕여왕은 의자왕의 姨母(이모)다. 「삼국사기」는 의자왕의 품성을 다음과 같이 전하고 있다.
「의자왕은 무왕의 맏아들로서 용감하고 대담하며 결단성이 있었다. 무왕 33년(632)에 태자가 되었다. 부모에게 효도하고, 형제간에 우애가 있어서 당시에 海東曾子(해동증자)라고 불렸다」
曾子라면 孔子(공자)의 문하에서 孝를 가장 잘 실천한 제자다. 의자왕은 무왕이 재위 42년 만인 641년에 죽자, 왕위에 올랐다. 唐 太宗(당 태종)은 祠部郎中(사부낭중) 鄭文表(정문표)를 보내 의자왕을 柱國帶方郡公百濟王(주국대방군공백제왕)으로 책봉했다. 이에 641년 가을 9월, 의자왕은 당에 사신을 보내 토산물을 바쳐 사의를 표했고, 이어 642년 봄 정월에도 사신을 파견하여 당에 조공했다.

大耶城 함락

의자왕 2년(642) 2월, 왕은 주군을 순행하면서 백성들을 위무하고, 죄수들을 재심하여 사형수를 제외하고는 모두 방면했다. 이같이 즉위 초의 의자왕은 신라와의 開戰(개전)을 염두에 두고 외정과 내정을 챙긴 이른바 「준비된 집권자」였다.
드디어 이 해(642) 가을 7월에 의자왕은 직접 군사를 거느리고 신라를 침공하여 (미후·충남 금산군 진산면) 등 40여 성을 함락시켰다. 이때 의자왕의 대공세는 나-제 간의 세력 균형을 일거에 깨뜨릴 만큼 장쾌한 것이었지만, 아쉽게도 그 전투 상보는 역사의 기록에서 누락되어 있다.
의자왕은 숨돌릴 틈도 없이 신라를 몰아붙였다. 이어 642년 8월, 의자왕은 장군 允充(윤충)에게 군사 1만을 주어 신라의 大耶城(대야성·경남 합천)을 공격했다. 대야성이 떨어지면 낙동강 西岸(서안) 영토를 잃게 될 뿐만 아니라 신라의 王都(왕도) 서라벌이 위험하다. 그런데도 대야성은 윤충 軍에게 함락되고 만다. 대야성 전투의 상보는 「삼국사기」 竹竹(죽죽) 傳을 통해 살펴볼 수 있다.
「선덕여왕 11년 가을 8월에 백제 장군 윤충이 군사를 거느리고 와서 대야성을 공격했다. 이에 앞서 도독 品釋(품석)이 자기의 幕客(막객=裨將)인 舍知(사지· 관등 제13위) 黔日(검일)의 아내가 아름다워 그녀를 빼앗은 일이 있다. 검일은 이를 한스럽게 여기고 있던 참이었다. 윤충 軍이 성을 공략하자, 검일은 적과 內應(내응)하여 창고에 불을 질렀다. 성 안의 민심이 흉흉하고 두려워하여 성을 굳게 지킬 수 없었다. 품석의 보좌관인 아찬(관등 제6위) 西川(서천)이 성 위에 올라 윤충에게 말했다.
『만약 장군이 우리를 죽이지 않으면 성을 바치고 항복하겠습니다』
윤충이 응대한다.
『만약 그렇게 하고도 公과 내가 함께 만족하지 못하는 일이 있다면, 그때는 밝은 태양이 있으니 태양을 두고 맹세합시다』
西川이 품석과 여러 장병들에게 권고하여 성 밖으로 나가고자 했다. 그러나 사지 竹竹이 이들을 제지하며 말한다.
『백제는 말을 번복하는 나라이므로 믿을 수 없소. 윤충의 말이 달콤한 것은 필시 우리를 유인하려는 것이오. 만약 성 밖으로 나간다면 틀림없이 적의 포로가 될 것이오. 쥐새끼처럼 숨어서 사는 것보다는 차라리 호랑이처럼 용감하게 싸우다 죽는 편이 더 낫소』
그러나 품석은 이 말을 듣지 않고 성문을 열었다. 사졸이 먼저 나가자 백제가 복병을 일으켜 모조리 죽였다. 품석이 나가려다가 장병들이 죽었다는 말을 듣고 먼저 자기의 처자를 죽인 다음 자신의 목을 찔러 자살했다. 竹竹이 남은 군사를 간신히 수습하여 성문을 닫고 방위하고 있는데, 사지 龍石(용석)이 죽죽에게 말한다.
『지금 戰勢(전세)가 이러하니 필경 城(성)을 보전할 수 없을 것이오. 차라리 항복하고 살아서 후일의 공적을 도모하는 것이 낫겠소』
죽죽이 대답한다.
『그대의 말도 합당하지만, 나의 아버지가 나를 竹竹이라고 이름 지은 것은 날씨가 추워도 시들지 말며, 꺾일지언정 굽히지 말라는 것이니, 어찌 죽기가 두려워서 항복하여 살겠소?』
죽죽은 힘껏 싸우다가 드디어 城이 함락되자 용석과 함께 전사했다」
대야성의 패전은 守城將(수성장)의 용렬함이 자초한 것이었다. 왜냐하면 성주인 이찬(제2위의 관등) 품석에게 미모의 아내를 뺏긴 검일이 이미 백제군에 투항했던 옛 동료 毛尺(모척)과 짜고 백제군의 공격에 호응하여 군량 창고에 방화를 해버렸던 것이다. 이로써 守城軍(수성군)은 양식이 떨어져 농성을 하지도 못했다.
오늘날 합천은 행정구역상으로는 경남에 소속되어 있지만, 생활권상으론 완전히 대구-경북권이다. 예컨대 합천 사람들은 대구에서 전파를 발사하는 방송을 청취하고, 대구 일원의 시장에서 물건(상품)을 떼어간다.
대야성에 오르면 達句伐(달구벌·대구)을 내려다보면서 공격할 수 있다. 달구벌을 지나 경산과 영천을 거치면 바로 서라벌이다. 대야성이 백제군의 수중에 들어간 이후 신라의 수뇌부는 결코 두 다리를 편히 뻗고 잠들 수 없었다.

二人三脚의 血盟

대야성 함락 후 신라에서는 대번에 두 가지 중요한 흐름이 나타났다. 그것은 백제의 고립을 겨냥한 김춘추가 주변 외교에 身命(신명)을 걸었다는 점이고, 김유신이 대야성까지 점령한 백제군으로부터 신라의 수도권을 방위하는 押梁州(압량주·지금의 경산)의 軍主로 떠올랐다는 것이었다.
대야성의 성주 품석은 김춘추의 사위였다. 품석의 아내 古陀炤(고타소)가 바로 김춘추와 그의 전처 寶羅(보라) 사이의 소생이었던 것이다. 「삼국사기」 선덕여왕 11년 條에선 고타소가 죽었다는 소식을 접한 김춘추의 분노를 다음과 같이 전하고 있다.
「춘추가 이 소식을 듣자 기둥에 온종일 기대 서서 눈도 깜박이지 않은 채 사람이나 물건이 앞을 지나쳐도 이를 알아보지 못했다. 얼마 후에, 『아아! 대장부가 어찌 백제를 꺾을 수 없으랴』 하고는 왕에게 나아가, 『명령을 내려 주신다면 제가 고구려에 가서 군사를 청하여 백제에 대한 원한을 갚기를 원하나이다』 말하니, 왕이 이를 허락하였다」
고구려로 떠나기 직전, 김춘추와 김유신은 血盟(혈맹)을 맺는다. 다음은 「삼국사기」 김유신 傳의 관련 기록이다.
「춘추가 유신에게 말한다.
『나와 公은 일심동체로서 나라의 기둥이오. 이번에 내가 만약 고구려에 들어가 불행한 일을 당한다면 公이 무심할 수 있겠소?』
유신이 대답한다.
『公이 만약 돌아오지 못한다면 저의 말발굽이 반드시 고구려, 백제의 궁정을 짓밟을 것이오. 만약 이렇게 하지 못한다면 무슨 면목으로 백성들을 대하겠소』
춘추가 감격하여 公과 함께 손가락을 깨물어 서로의 피를 나눠 마시며 맹세했다.
『내가 60일이면 돌아올 것이오. 만일 이 기한이 지나도록 오지 않는다면 다시 만날 기약이 없을 것이오』
둘은 작별했다. 곧 유신은 압량주 軍主가 되었다」
위의 인용문을 보면 대야성 함락 전후부터 김춘추와 김유신은 신라 조정의 實勢(실세)로 부각되고 있었음을 알 수 있다. 김춘추의 義父(의부) 용춘과 김유신의 부친 서현은 이 무렵의 역사 기록에 나타나지 않는 점으로 미루어 이미 일선에서 은퇴했거나 故人이 된 것으로 보인다.
이후 김춘추와 김유신의 혈맹이 전개하는 二人三脚(2인3각)의 행보는 갈수록 힘을 발휘한다. 또한 이것은 바로 김유신이 혈통상의 약점을 뚫고 신라의 병권을 장악하는 단초가 되었다. 김유신의 중용은 신라 사회가 이제는 핏줄보다 능력이 중요하다고 느낄 만큼 위기에 봉착했다는 것을 의미한다. 이젠 平壤城(평양성)으로 들어간 김춘추의 활동을 살펴볼 차례다.

평양성에서 淵蓋蘇文과 대면한 金春秋

「김춘추가 고구려 영내로 들어가니 고구려 왕(보장왕)이 객관을 정해 주고 太大對盧(태대대로=수상) 淵蓋蘇文(연개소문)으로 하여금 연회를 열어 우대했다. 어떤 사람이 고구려 왕에게 진언한다.
『신라 사신은 보통 사람이 아닙니다. 이번에 그가 온 것은 우리의 형세를 정탐하려는 것 같으니 왕께서는 잘 처리하시어 후환이 없게 하소서』
왕은 춘추를 곤혹스럽게 하려고 그가 답변하기 어려운 요구를 제시하면서 위협했다.
『麻木峴(마목현)과 죽령(竹嶺)은 본래 우리나라 땅이니 만약 이를 우리에게 돌려 주지 않는다면 돌아가지 못하리라』
춘추가 대답했다.
『국가의 영토는 신하가 마음대로 할 수 있는 것이 아니므로 신이 감히 명을 따를 수 없습니다』
왕이 분노하여 그를 죽이려 하다가 미처 죽이지 않고 가두어 두고 있었다.」
김춘추가 고구려로 들어간 시점은 연개소문의 쿠데타 직후인 보장왕 원년(642) 겨울이었다. 당시 고구려의 절대 권력자는 보장왕이 아니라 淵蓋蘇文이었다. 따라서 김춘추의 請兵(청병)에 대해 죽령 이북의 한강 유역을 먼저 반환하라고 요구한 고구려의 강경 방침은 연개소문의 복안이었다고 해도 좋다.
평양성에 들어간 김춘추가 먼저 협상을 벌인 인물은 그를 맞이하여 연회를 베푼 연개소문이었다. 김춘추는 연개소문과 마주앉아 양국간의 상쟁을 중단하고 새로운 관계를 모색키 위한 협상을 시도했을 것이다.
金-淵 협상은 민족적 대의를 앞세워 나-려 양국, 나아가 삼국간의 전쟁 상태를 종식시키고 평화를 정착하자거나, 중원의 통일제국 唐이 호시탐탐 동방을 노리고 있는데 동족간에 대동 단결하여 대처하자는 얘기가 주제가 되지는 않았을 터이다. 그때 삼국간에는 언어가 비슷한 데 따른 親緣性(친연성)이야 없지 않았겠지만, 그런 대의를 앞세울 만한 같은 민족이나 동족이라는 의식을 공유했을 리가 없었다.
다시 말하지만, 당시의 3국 관계는 서로 먹느냐 먹히느냐 하는 생존의 문제와 직결된 상쟁의 관계였다. 자기의 보존을 위해서는 친선과 대립이 교차될 수밖에 없었고, 그 외교적 실행 프로그램은 遠交近攻(원교근공)이거나 셋 중 하나를 술레로 만드는 오드맨 아웃(Odd-man Out) 게임에서의 2대 1 전략이었다.
김춘추는 백제와의 전쟁을 유리하게 진행시키기 위해 우선 고구려와 휴전을 요청했을 것이다. 둘의 협상이 순조롭게 진전되어 對 백제 戰에 고구려가 참전할 의사가 감지되었을 경우, 김춘추는 백제의 땅을 분할하는 戰後(전후) 처리안을 제시했을 터이다.
그러나 연개소문은 신라의 제의를 거부하는 것이 고구려의 국익에 부합되고, 독재자인 자신의 정치적 입지를 강화하는 데 유리하다고 판단했음이 분명하다. 결과론이지만, 김춘추의 제의를 거부한 연개소문의 판단은 고구려의 국익에 치명적인 타격을 초래한 오판이었다.
어떻든 김춘추로서는 섶을 지고 불 속에 뛰어든 셈이었다. 위기에 처한 그는 출국 때 미리 준비해 간 靑布(푸른 베) 3백 步(보)를 보장왕의 寵臣(총신) 先道解(선도해)에게 뇌물로 바치고 苟命徒生(구명도생)을 기도했다. 바로 여기서 당시로서는 기상천외한 脫身(탈신)의 妙計(묘계)를 얻게 된다.
<14편에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