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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보기행(19) 완벽한 인프라와 美를 구비했던 白馬江邊의 백제 古都 扶餘

정순태   |   2003-08-07 | hit 8112

아침 안개가 자욱할 무렵의 定林寺址(정림사지) 5층석탑이 보기에 좋았었다. 그런 행운을 다시 기대하며 초여름의 이른 아침 정림사터로 찾아갔지만, 출입문은 짐작대로 아직 잠겨 있었다. 백제시대의 대표적인 절터인 이곳은 扶餘邑(부여읍) 버스터미널에서 도보로 5분 거리인 동남리에 있다.

정림사터 주위는 기와 지붕의 높은 흙담을 둘렀다. 여기서 북쪽으로는 부소산성과 낙화암, 남쪽으로 宮南池(궁남지), 바로 동쪽엔 錦城山(금성산), 서쪽으로는 백마강이 읍내를 팽팽히 당긴 활처럼 에워싸고 흐른다. 정림사가 문 열기를 기다리며 읍내 이곳저곳을 기웃거렸다. 1400년 전의 국제도시 泗(사비)가 이제는 인구 3만 명이 채 못 되는 부여읍이다. 古都 부여의 이른 아침은 고요했다.

백제의 마지막 임금 의자왕이 豪遊(호유)했던 宮南池로 내려가다 부여군청 앞 네거리에서 발길을 딱 멈추었다. 階伯(계백) 장군의 騎馬像(기마상)이 우뚝 서 있는 것이다. 부여라면 悲運(비운)의 名將 계백이 먼저 연상된다. 부여는 그가 온몸을 던져 死守(사수)하려 했던 그의 임이기 때문이다.

서기 660년 7월, 羅唐(나당) 연합군이 사비성을 향해 진격해 오는 가운데 계백은 5000결사대를 거느리고 황산벌(지금 논산시 연산면)로 나아갔다. 계백은 출전에 앞서 참으로 悲壯(비장)했다.

『일국의 장수로서 新羅(신라)와 唐(당)의 대군과 싸우게 되었으니 국가의 존망을 알 수 없다. 우리가 패하여 내 처자가 적의 노비가 되어 그들에게 욕을 당함은 차라리 죽는 것만 같지 못하다』

그는 떨리는 손으로 아내와 자식을 벤 다음, 결전에 나선다. 신라군은 국경의 요충 大田 남방의 숯고개(炭峴)를 넘어 이미 평야지대로 돌입하고 있었다. 계백은 지금의 논산시 부적면 논산저수지 후방 180고지(月明山)에 5000결사대를 3개 부대로 나누어 포진, 신라군을 맞았다.

『옛적 越王 勾踐(월왕 구천)은 병사 5000으로 吳王 夫差(오왕 부차)의 70만 대군을 격파했다. 오늘 각자는 분전하여 승리를 거둠으로써 국은에 보답하라』

7월9일 계백의 5000결사대와 金庾信(김유신)의 5만 精兵(정병)이 황산벌에서 격돌했다. 초전에서 계백 軍은 김유신 軍과 네 번 싸워 네 번 이겼다. 만약 이때 백제 義慈王(의자왕)이 예비대를 투입할 수만 있었다면 승패는 전혀 달라졌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방심하고 있던 의자왕의 백제엔 그런 기동방어가 불가능했다.

10대 1의 싸움에서 기적은 일어나지 않았다. 계백과 5000결사대는 황산벌의 벌건 황토를 더욱 붉게 물들이며 장엄하게 전몰했다. 전투의 결과가 어찌 그의 책임이었겠는가? 계백의 충성심, 武人(무인)으로서의 자존심은 靑史(청사)에 冠絶(관절)한다. 계백의 전몰지엔 지금 그의 묘소와 기념관이 조성되어 있다.






국보 제9호 정림사지 5층석탑

계백의 패전 후 백제는 이렇다 할 방어전 한번 전개하지 못하고 패망했다. 필자가 답사하려는 정림사터는 唐나라 점령군에게 처절하게 능멸당한 곳이다. 거기엔 백제의 눈물이 배어 있다. 정림사터 길 건너편 콩나물 해장국집에 앉아 정림사터 문이 열리기를 기다렸다. 오전 9시 문이 열렸다.

국보 제9호 정림사지 5층석탑은 익산 미륵사지석탑과 함께 백제가 남긴 단 두 개의 석탑 중 하나이다. 둘 모두 목조탑의 架構(가구)를 충실히 따른 찬란했던 백제예술의 징표이다. 익산 미륵사지석탑은 장대·장쾌하지만, 정교하지는 않다. 정림사지 5층석탑도 높이 8.33m로 거탑의 반열에 끼지만, 8등신의 미인처럼 날렵하다.

정림사지 5층석탑은 기단부가 1단으로 튼실하기보다 좀 얕고 허약하게 보인다. 이와 관련, 사학자 申瀅植(신형식) 이화女大 교수는 다음과 같이 말한다.

『백제 문화는 그 전반에 걸쳐 세련미는 찾을 수 있지만, 안정과 여유미가 부족한 느낌이 듭니다. 그것은 정림사지 5층석탑에서 보이는 취약한 기단부가 장중하고 튼튼한 불국사 석가탑의 그것과 비교할 때 느낄 수 있는 현상입니다』

필자가 이런 申교수의 평가를 국립부여박물관의 金鍾萬(김종만) 학예연구실장에게 전했더니 다음과 같은 반론을 폈다.

『거꾸로 생각하면 그만큼 백제 장인들의 솜씨가 좋다는 얘기가 되지 않겠습니까. 정림사 5층석탑은 기단을 그렇게 간단하게 처리했습니다만, 1400년의 세월 동안 한 번의 해체 보수 없이 원형을 거의 그대로 유지해 왔습니다. 탑이 서 있는 자리는 금성산과 남영공원 사이에 형성된 계곡 하단부의 늪지대였습니다. 백제인들은 탑을 세우기 위해 떡시루처럼 층층이 땅을 다지는 版築技法(판축기법)으로 기초를 다져 탑이 지금도 전혀 기울어지지 않는 것입니다』


「요망한 大夫人」은 의자왕의 왕비

정림사라고 하지만 백제 시대에도 그런 이름으로 불렸는지는 의문이다. 1942년 일본인 후지자와 이치오(藤澤一夫)에 의해 실시된 절터 조사에서 「太平八年戊辰定林寺大藏當草」(태평8년무진정림사대장당초)라 새겨진 銘文(명문) 암키와가 출토되어 「定林寺」라는 절 이름이 처음 등장했다. 「太平 8년」이라면 고려 현종 19년(1028년)에 해당된다. 정림사는 고려 때의 寺名인 만큼 백제 시대의 이름은 달랐을 것이다.

정림사는 中門·탑·金堂(금당)·講堂(강당)을 남북 일직선상에 배치한 「1탑 1금당」식이며, 중문 앞에 네모진(方形) 연못 자리가 확인되었다. 출토 유물은 납석제 삼존불·소조불·도용·기와 등이었다. 국보 제9호 5층석탑 뒤편 강당지에 위치한 보물 제108호 석불좌상은 중창 당시(고려 시대)에 제작된 비로자나불상으로 보인다. 강당과 연못은 최근 복원되었다.

5층석탑은 지붕돌 부분이 압권이다. 좀 떨어진 위치에서 시선의 초점을 지붕돌의 모서리 부분에 맞추면 날개가 유달리 크고 넓은 스텔스機 다섯 대가 편대를 지어 창공을 훨훨 나는 모습을 방불케 한다.

그러나 5층석탑은 서럽다. 만약 탑 1층 몸돌(높이 136.4cm, 폭 218.2cm)에 唐나라 장수 蘇定方(소정방)의 紀功文(기공문)만 새겨지지 않았던들 5층석탑은 그렇지 않을 것이다. 바로 이 기공문 때문에 5층석탑은 오랫동안 「平濟塔(평제탑)」이라는 억울한 누명을 써 왔다. 필자가 초등학교 때 배운 1950년대의 교과서에도 이 탑은 「평제탑」이라고 기술되어 있었다.

660년 8월15일에 새긴 기공문은 제1면 24행, 제2면 29행, 제3면 28행, 제4면 36행 등 총 117행이며, 각 행은 16字 또는 18字이다. 글 크기(字徑)는 4.5cm, 서체는 楷書體(해서체)이다. 제목은 「大唐平百濟國碑銘」(대당평백제국비명)의 8字인데, 2행의 篆書體(전서체)로 쓰여 있다.

『요해처에 있는 九夷(구이)가 만리에 뚝 떨어져 있어서 지세의 험함을 믿고 감히 天倫(천륜)을 어지럽혀 동쪽으로는 가까운 이웃(신라)을 쳐서 중국의 詔勅(조칙)을 어기며, 북쪽으로는 逆♥(역수: 고구려)와 연계하여 멀리 梟聲(효성: 반역의 소리)에 응했다. 하물며 밖으로 곧은 신하를 버리고 안으로 요망한 계집을 믿어 오직 충성되고 어진 사람에게만 형벌이 미치며, 아첨하고 간사한 사람이 먼저 총애와 신임을 받아…』

이른바 백제 必敗論(필패론)이다. 의자왕이 밖으로는 唐나라 황제의 말을 어겨 신라를 치고, 안으로는 요망한 계집의 말을 믿어 나라를 그르쳤다는 말이다. 의자왕 때 백제가 20여 차례에 걸쳐 신라를 선제 공격한 것은 역사적 사실이다. 그렇다면 백제의 내정을 병들게 한 「요망한 계집」은 누구일까. 「日本書紀」(일본서기)는 「君大夫人 恩古」(군대부인 은고)라고 적고 있다. 恩古는 의자왕의 어머니라는 일부의 주장이 있지만, 실은 의자왕의 왕비이다. 왜냐하면 君大夫人 또는 夫人은 모두 삼국시대 왕비의 칭호이기 때문이다. .

『그 왕 扶餘義慈(부여의자) 및 태자 隆(융) 이외 왕자 13人, 大佐平(대좌평: 수상) 사탁천복, 國辯成(국변성) 이하 700여 명과 함께 궁궐에 들어가 있다가 모두 사로잡히니 우차에 실어다가 司勳(사훈: 상훈을 관장하는 관청)에 올리고 淸廟(청묘: 종묘)에 고했다』

의자왕 비롯하여 태자 부여隆과 여러 왕자들, 그리고 고관대작들이 포로로 잡혀 唐나라에 붙들려 갔다는 얘기다. 좀 혼란스런 대목은 백제 멸망 당시의 인구 등에 관한 언급이다.

『5都督(도독) 37州 250縣을 두고 戶 24만, 人口(인구) 620만을 각 編戶(편호)로 정리하여 모두 오랑캐의 풍속을 바꾸게 했다』

「三國史記」 백제본기 의자왕 20년 條에 따르면 백제국은 멸망 당시의 국세는 5部 37郡 200城 76만戶였다. 唐은 전승 후에 웅진·마한·동명·金漣(금련)·德安의 5도독부를 설치하여 각기 州·縣을 통괄하게 했던 것이다. 5도독부는 백제 부흥군이 궐기하자 곧 웅진도독부 하나로 통합되었다.

문제는 「戶 24만 口 620만」라는 碑銘(비명)의 기록이다. 학계에서는 三國史記의 기록 「76만 호」가 옳을 것으로 본다. 그렇다면 멸망 당시 백제의 인구는 620만 명이 아닌 350만 명 정도인 것으로 추정된다.


사비 遷都 후 英主 성왕의 중흥정치

부여는 백제의 마지막 왕도 사비다. 표고 106m 부소산의 山城(산성)과 백마강이 왕도의 북·서·남쪽을 에워싸고, 개활지인 동쪽에는 8km의 羅城(나성)으로 보완했다. 또한 적의 예상 접근로인 탄천면에 청마산성, 가림면에 성흥산성을 쌓아 관방시설을 강화했다.

百濟史는 수도의 이동에 따라 漢城시대(B.C. 18∼475년의 493년간), 熊津 시대(475∼538년의 63년간), 사비 시대(538∼660년의 122년간)로 나눠진다. 사비시대의 백제는 바다를 통한 국력의 팽창과 왕권의 전제화를 이루었다.

사비 천도는 聖王 16년(538년)의 일이다. 수도를 좁은 분지인 웅진(지금의 공주)에서 사비로 옮기는 계획은 동성왕 때부터 추진되었으나 웅진지역의 토착귀족 (백)씨 세력 등의 반대로 이뤄지지 못했으며, 그런 암투의 과정에서 동성왕이 좌평 加(백가)에 의해 피살되었다. 천도는 동성왕-무령왕에 이은 성왕의 결단과 사비지역에 기반을 둔 沙(사)씨 세력의 지지로 실현되었다.

사비 천도 이후 성왕은 국호를 南扶餘(남부여)로 개칭하고 왕권강화를 위한 체제정비에 착수했다. 부국강병책과 동맹외교는 결실을 거두기 시작했다. 王都의 면모도 장엄하게 조영되고, 佛事(불사)도 활발하게 추진되었다.

長壽王代(장수왕대)의 평양 천도 이래 고구려의 西守南進(서수남진) 정책에 고전하던 백제와 신라가 반격으로 돌아선 것은 서기 551년이었다. 551년이라면 백제의 성왕 29년과 신라의 진흥왕 12년이다. 이 해에 나·제 동맹군은 지금의 忠州 지역까지 뻗어 왔던 고구려의 南進勢(남진세)를 꺾었다. 백제로선 개로왕의 敗死(475년)와 漢城 함락 이래 처음으로 고구려에 설욕하면서 漢城 시대의 수도권을 회복했다.


『너희 나라의 背信이 골수에 사무쳤다』

고구려가 북쪽으로 물러난 뒤 한강 상류 지역 10개 郡은 신라가 차지하고, 한강 하류 지역 6개 郡은 백제의 영토가 되었다. 그러나 강 하나의 유역을 사이좋게 나누어 가진다는 것은 신라나 백제라는 두 고대 정복국가의 속성과는 전혀 어울리지 않은 개념이었다. 더구나 백제가 탈환한 한강 하류 유역은 신라가 탈취한 한강 상류 유역보다 전략적·경제적 가치가 월등했다.

서기 433년 이래 120년간이나 계속되어 오던 나·제 동맹을 먼저 파기한 쪽은 신라였다. 그 무렵 백제의 성왕은 守勢(수세)에 몰린 고구려에 결정타를 가하기 위한 연합군 형성을 제의했으나 신라 진흥왕의 반응은 거부였다. 따라서 백제-신라의 격돌은 예정된 수순이었다. 성왕은 왜국에 불교를 전하는 등의 노력으로 백제-왜국의 동맹관계를 굳히고 있었다.

이런 상황에서 진흥왕 14년(553년) 가을 7월, 신라는 백제로부터 한강 하류 6개 郡을 횡탈하여 新州(신주)를 설치했다. 故土(고토)를 빼앗긴 백제로서는 참을 수 없는 상황이었다. 그러나 성왕의 책략도 녹록치 않았다. 삼국사기 성왕 31년(553년) 겨울 10월 條를 보면 성왕은 그의 딸을 진흥왕의 小妃(소비)로 시집을 보내고 있다. 이와 같은 정략결혼의 추진은 성왕의 위장 평화 공세였다.

그러는 동안 백제를 지원하기 위한 왜국의 원병과 전쟁물자가 속속 내도했다. 신라에게 합병의 압박을 받고 있던 대가야(경북 고령) 중심의 後期(후기) 가야연맹 국가들도 백제 진영에 가담했다.

백제로서는 불운했다. 백제의 원정군을 지휘한 왕자 餘昌(여창)이 진중에서 병을 얻었다. 성왕은 맏아들 餘昌의 급작스런 병을 걱정하여 불과 50騎만 거느리고 전선사령부가 소재한 管山城(관산성: 지금의 충북 옥천군)으로 달려가던 중 大田 동남부 식장산에서 신라의 복병에 걸려 생포되었다. 일본서기 欽明 15년(554) 12월 條에는 성왕의 최후를 다음과 같이 기록하고 있다.

<얼마 후 都刀(도도)가 明王(명왕=성왕)을 사로잡았다. 두 번 절하고 왕의 머리를 베려 하니 明王이 꾸짖어 가로되 「종놈이 감히 왕의 목을 베려 하느냐」고 꾸짖었다. 都刀가 말하기를 「우리나라 법은 맹세를 위배하면 왕이라도 종놈의 손에 죽습니다」고 했다. 明王이 탄식하여 가로되 「과인은 매양 너희 나라의 배신이 골수에 사무쳤다」 하고 마침내 斬首(참수)당했다>

都刀는 新州의 軍主(군주: 군관구사령관) 金武力(김무력)의 부하였다. 이어 벌어진 관산성 전투에서 新州兵을 주력으로 하는 신라군은 백제-가야-왜국 연합군 2만9800명을 참살했다. 왕자 餘昌은 한 가닥 血路(혈로)를 뚫고 겨우 전장에서 이탈할 수 있었다. 관산성 전투에서 죽을 목숨을 건진 왕자 餘昌이 전사한 성왕을 승계했다. 그가 백제 25代 임금 威德王(위덕왕)이다.

사비 천도 이후의 중흥정치는 성왕의 전사 이후에도 이어졌다. 위덕왕은 內政 개혁을 꾀하는 한편, 외교적으로 위기를 타개하기 위해 중국 북조의 北周, 남조의 陳, 통일왕조인 隋(수)에 조공하고, 신라와도 대체로 우호관계를 유지했다. 위덕왕은 사비 백제의 정치적 안정을 이룩하고 재위 45년(598년)에 죽었다.


부여박물관 야외 유물전시관

정림사를 나와 금성산 기슭에 위치한 국립부여박물관으로 직행했다. 1993년에 신축된 부여박물관은 약 2만 평의 면적에 4개 대형 전시실을 갖추고 있다. 우선 石造 박물관 건물의 위용이 압도적이다. 소장 유물이 9000여 점에 달하는, 백제권 문화재의 宗家(종가)다운 모습이다.

박물관의 앞·뒤뜰에도 만만찮은 石造 유물들이 전시되어 있다. 보물 제21호 劉仁願 紀功碑(유인원 기공비)와 보물 제194호 扶餘 石槽(부여 석조) 등이 그것들이다.

기공비에는 唐의 郎將(낭장)으로서 백제부흥군을 진압한 유인원의 전공이 새겨져 있다. 건립연대는 白江(백강: 지금의 금강) 전투에서 백제부흥군-왜 연합군이 羅-唐 연합군에 패한 663년이다.

높이 335cm이며 비신(몸돌)과 이수(머릿돌)가 한 개의 花崗片磨巖(화강편마암)으로 되어 있다. 이 것이 중국 碑(비)의 특징이다. 여의주를 받쳐들고 있는 여섯 마리의 蟠龍(반룡) 조각의 모습이 매우 힘차다. 해서체의 글자는 風雨에 지워져 잘 보이지 않는 부분이 많지만, 뛰어난 달필이다.

부여 석조는 상·중·하대의 형식을 갖춘 工자 모양의 물 담는 돌그릇이다. 이 대형 돌그릇에 정림사터 5층석탑의 기공문과 똑같은 문장의 소정방 기공문 일부가 새겨져 있다. 소정방은 자신의 공적을 金石에 새겨 길이 남기려고 남의 나라 문화유산 여기저기를 기웃거리며 제멋대로 훼손했던 것이다.

부여박물관 야외 전시 유물을 둘러보고 박물관 안으로 입장했다. 박물관에는 백제금동향로(국보 제287호), 창왕명 석조 사리감(국보 제288호), 금동 관음보살입상(국보 제293호) 등 세 점의 국보를 비롯한 백제시대의 유물 900여 점이 전시되어 있다.


국보 제287호 百濟 금동 대향로

백제 금동 대향로는 1993년 12월, 부여의 나성과 능산리 고분군 사이에 있는 능산리 절터 서쪽 회랑 북단에 있는 공방터에서 출토되었다.

이 향로는 용틀임하는 큰 용(향로의 臺足 부분)이 이제 막 開花(개화)하려는 연꽃봉오리 모습의 몸체(爐身: 노신)를 받들고 있으며, 뚜껑 꼭대기에는 봉황 한 마리가 양 날개를 활짝 펴고 웅비하려는 모습을 나타낸 백제 공예품의 대표적 존재다. 그 규모는 높이 62.5cm, 몸통 최대 지름 19cm, 무게 11.8kg으로서 유례가 드문 대작이다.

뚜껑 위의 봉황은 높이 12cm인데, 그 꼬리도 깃발처럼 나부껴 매우 율동적이다. 뚜껑은 높이 18cm로서 횡으로 돌아가며 4∼5단의 문양대로 꾸며져 있다. 三山形(삼산형)의 둘레는 선으로, 그 내부엔 빗금무늬가 장식되어 있다.

제일 윗단에는 阮咸(완함), 排簫(배소), 長笛(장적), 거문고, 북을 연주하는 5인의 奏樂仙人(주악선인)을 배치하였는데, 모두 머리 오른쪽으로 머리카락을 묶었다.

그 아래에는 다섯 개의 山을 돌리고, 산꼭대기마다 기러기가 한 마리씩 앉아 있다. 다시 그 아래엔 다시 뾰죽뾰죽한 三山이 돌출한 가운데 16인의 인물상, 호랑이·사슴·코끼리·원숭이·맷돼지 등 39마리의 동물상들이 어우러져 있다. 이 밖에도 6군데의 나무, 12군데의 바위, 산중턱을 가르는 산길, 산 사이로 흐르는 시냇물, 입체적인 폭포 등이 있어 뚜껑部는 갖 가지 장식들로 빼곡하다.

뚜껑과 몸체(爐身)의 口緣部(구연부)에는 각각 음각된 流雲文(유운문) 띠가 둘러져 있다. 몸체는 높이 12cm로서 뚜껑보다 낮다. 여기엔 연꽃잎이 3단으로 되어 있고, 각 연꽃잎의 중앙 및 사이에는 신선, 날개 달린 물고기 등 수중생물, 사슴, 학 등이 양각되어 있다.

몸체를 떠받치고 있는 다리(臺足)부분, 즉 한 마리의 용은 높이가 22cm이다. 용의 머리, 뿔, 다리, 비늘 등의 표현이 매우 역동적이다. 한쪽 발을 치켜든 힘찬 모습을 나타내면서도 나머지 세 다리와 꼬리로 둥근 원을 형성하여 안정된 포즈를 취하고 있다.

부여박물관 金鍾萬 학예연구실장은 이 금동향로를 다음과 같이 평가했다.

『이 향로는 도교사상과 불교사상 등 동양의 근본원리를 백제사상으로 융합하여 완벽한 조형예술로 표현했을 뿐만 아니라 금속공예 기술면에서도 완숙한 주조기술과 精緻(정치)한 도금술이 어우러진 최대의 걸작품이다』

신형식 교수는 이렇게 말했다.

『봉황과 용, 신선이 사는 봉래산의 모습을 새긴 금동용봉봉래산향로에는 전제왕권의 멋과 백제만의 이상이 반영되어 있습니다. 다만 백제미술을 「貴公子然(귀공자연)」하다고 평가하는 先學의 견해에도 주목하고 싶습니다』


국보 제288호 昌王銘石造사리감

昌王銘石造砂利龕(창왕명석조사리감)은 昌王이란 글자(銘文: 명문)가 새긴, 돌로 만든 사리감이란 뜻이다. 창왕은 백제 제26대 위덕왕이다. 이 사리감은 1995년 목탑 터의 심초석에서 출토되었다. 그 규모는 높이 74cm, 가로 세로 각각 50cm로서 윗부분을 아치형으로 처리하여 마치 오늘날의 우체통과 같은 모습이다.

전면의 양쪽 면에 각각 10자씩의 글씨가 새겨져 있다. 글씨는 중국 北朝시대에 유행하던 서체다. 그 내용은 다음과 같다.

百濟昌王十三年太歲在(백제창왕십삼년태세재)

丁亥妹兄公主供養舍利(정해매형공주공양사리)

위의 한문 문장은 『백제 창왕 13년에 매형 공주가 사리를 공양했다』는 뜻이다. 昌은 威德王(위덕왕)의 이름(諱)이며, 昌王(威德王) 13년이라면 서기 567년이다. 위덕왕은 554년 管山城(관산성: 지금의 충북 옥천) 싸움에서 신라군의 매복작전에 걸려 敗死(패사)한 백제 중흥의 영주 聖王(성왕)의 아들이며, 매형 공주는 성왕의 딸이다. 공주가 父王(부왕)의 위업을 기려 사리감을 공양했던 것이다.

이 사리감의 명문에 의해 능산리 陵寺의 축조연대(567년)와 조성 이유가 확실히 밝혀졌으며, 삼국사기 기록의 정확성도 입증되었다. 이것은 백제사의 기록 빈곤을 보완해 주는 귀중한 금석문이다.


국보 제293호 金銅관음보살立像

부여박물관에는 부여 부소산 출토 금동삼존불입상(보물 제196호), 부여 신리 출토 금동보살입상, 부여 현북리 출토 금동보살입상 등 손바닥 안에 들어갈 만큼 작은 금동불상을 여럿 전시하고 있지만, 부여 규암면에서 출토된 국보 제293호 금동관음보살입상이 압권이다. 7세기 작품으로 높이 21.1cm다.

금동관음보살입상은 그 표정이 부드럽고 세련된 조형성을 자랑한다. 고구려의 역동적인 감각, 신라의 묵직한 조형기법과는 다르다. 그 名號(명호)만 불러도 구원의 손길을 뻗쳐 주는 大慈大悲(대자대비)의 보살 觀音(관음)은 연화받침 위에 상큼하게 올라 있다.

얼굴의 표정은 자상하고 입가엔 「백제의 미소」가 흐른다. 오른손 엄지와 인지로 寶珠(보주)를 집어 눈높이로 들고 있다. 갸름하고 우아한 몸, 무릎까지 늘어뜨린 화려한 영락, 도톰한 엉덩이, 벗은 발 등이 사실적이며 육감적이다.

天衣(천의)가 별로 드러나지 않는다. 설사 입었다 해도 몸의 곡선이 그대로 드러나는 시스루일 것 같다. 부처를 장엄하게 장식하는 光背(광배)는 없다. 중국 수·당의 영향이 느껴지는 이런 기법은 통일신라시대로 계승된다.


국보 두 점 발굴된 陵山里 절터

부여박물관 내 사진촬영은 금지되어 있다. 金鍾萬 학예연구실장에게 협조를 요청했더니 박물관에 보관 중인 필름을 복사해 月刊朝鮮으로 우송하겠다고 말했다. 李五峰 사진부장과 필자는 박물관을 나와 국보 두 점이 발굴된 陵山里(능산리) 고분군으로 출발했다.

백제금동대향로와 昌王銘石造사리감 등 두 점의 국보가 발굴된 부여 능산리 절터는 사비의 외곽을 둘러싼 羅城(나성: 사적 제58호)과 능산리 고분군(사적 제14호) 사이의 계곡에 위치해 있다. 절터에 대한 遺構(유구)조사 결과, 이 陵寺(능사)는 중문·목탑·금당·강당이 남북 일직선상으로 배치된 일탑일금당 식의 가람배치를 하고 있었음이 판명되었다. 이곳에서 두 점의 국보가 발굴된 과정은 한 편의 드라마였다.

1993년 12월12일 저녁, 부여의 羅城과 능산리 고분군 사이의 골짜기에 있던 유적지 중 하나인 工房(공방)터의 水槽(수조) 구덩이에서 백제왕실에서 사용했을 것으로 보이는 향로 하나가 발견되었다. 한국일보 최성자 기자의 「국보 중 국보 금동용봉봉래산향로(백제 금동대향로-편집자) 취재기」는 다음과 같이 전개된다.

<(前略)당일 발굴현장에서 인부 10여명과 함께 작업하던 부여박물관 신광식 관장은 공방터의 구덩이에서 향로의 뚜껑이 드러나는 순간 「보통 것이 아니구나」라고 직감했다. 향로가 발견된 구덩이는 본래 공방에 필요한 물을 저장하는 구유형 木製(목제) 수조가 놓여 있던 것으로 향로는 칠기함에 넣어져 이곳에 매답되었음이 뒤에 밝혀졌다.

그는 즉시 작업을 중단하고, 인부들이 퇴근한 저녁 8시께 김정완 학예연구실장, 김종만 학예연구사 등 연구원 네 명과 함께 다시 현장으로 돌아와 불을 밝히고 야간작업에 들어갔다. 그렇게 향로 주변의 흙을 제거하기 30여 분, 향로가 온전한 형태로 전모를 드러내자 발굴팀은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야!」 하는 탄성을 질렀다.

신관장은 직접 향로를 안고 서둘러 3km쯤 떨어진 부여박물관으로 달려갔다. 박물관에 도착하여 향로를 자세히 살펴본 발굴팀은 중국의 어떤 향로와 견주어도 손색이 없는 걸작 중의 걸작이라는 것을 알고 다시 한 번 놀라움을 금치 못했다고 한다. 밤새 뜬눈으로 지낸 발굴팀은 이튿날인 13일 문화체육부와 국립중앙박물관에 보고하였다…>

그렇다면 왜 백제금동대향로는 水槽(수조) 웅덩이 속에 처박혀 있었을까? 水槽는 길이 135cm, 폭 90cm, 깊이 50cm의 규모인데, 향로는 겹겹이 쌓인 기와조각 밑에 숨겨져 있었다. 이에 대해 서정록씨는 그의 연구서 「백제금동대향로」에서 매우 드라마틱한 풀이를 했다.

<羅唐 연합군이 몰려오는 긴급한 상황에서 황급히 숨겨 놓은 것이 역력했다. 가지고 피신할 곳조차 없어 물구덩이 속에 넣고 훗날을 기약하며 묻은 것이다. 그렇게 진흙 속에서 형체를 드러낸 백제대향로의 모습은 그 당시 백제인의 절망과 비극의 역사를 오늘에 전하기에 충분했다>

백제대향로 출토지인 공방터(제3건물지)를 거쳐 昌王銘석조사리감이 발굴된 木塔址(목탑지)도 둘러보았다(능산리 陵寺 건물배치도 참조). 목탑지의 심초석에는 예리한 도끼 자국이 나 있다. 이는 백제왕실의 陵寺가 침략군에게 무자비하게 파괴된 상황을 말해 준다.

陵寺터에서 능산리 고분군으로 넘어가는 고갯길 위쪽 비탈에서 최근 축조된 의자왕과 태자 扶餘隆(부여융)의 假墓(가묘)를 만났다. 수년 전 부여읍 사람들은 1995년 중국 洛陽(낙양)의 공동묘지 北邙山(북망산)에 의자왕이 묻혀 있다는 기록에 의거하여 그 무덤을 찾기 위해 현지에 조사단을 파견했고, 1996년 8월에 부여군과 낙양시가 자매결연을 맺는 등 활발한 움직임을 보였으나 아직 성과를 거두지는 못했다. 패망 후 당나라에 포로로 끌려간 의자왕은 어떤 행로를 걸었을까.

일본서기에 따르면 왜국의 遣唐使(견당사) 이키노무라지 하카도코(伊吉連博德)는 660년 11월1일(음력) 평생 뇌리에서 지워지지 않는 광경을 목격했다. 백제 의자왕 이하 태자 隆, 여타 왕자 13인, 대좌평 사택천복과 國辯成 이하 37인 등 모두 50여 명이 朝堂(조당)에 나가 황제(高宗)에게 무릎을 꿇고 請罪(청죄)한 다음, 사면되었다. 그때 의자왕의 심경은 어떠했을까. 그 후 그가 곧 客死(객사)했던 것으로 보아 심한 마음의 병을 앓았던 것 같다.

의자왕 부자의 가묘 동쪽 구릉에는 7기의 무덤이 모여 있는데, 이곳이 史蹟(사적) 제14호 부여 陵山里 고분군이다. 이 고분들은 사비시대 백제 왕릉으로 추정된다. 일제 때 발굴조사되었는데, 棺(관)못·금종 등이 수습되었다. 7기의 무덤 중 하나는 장방형 石室(석실)무덤으로 四神圖(사신도)를 그린 벽화고분이다. 사비시대를 열었던 聖王의 무덤으로 추정된다.


銅像 하나에도 시대적 이데올로기 반영

귀로에 한국전통문화학교에 들러 백제사 전공 李道學(이도학) 교수를 만났다.

―최근 「천년의 恨」이란 TV드라마가 방영되어 높은 시청률을 기록했습니다. 부여 지역 반응은 어떠합디까.

『원래 충청도 사람의 반응은 겉으론 「그런 갑뉴」 정도의 무덤덤한 것 아닙니까. 드라마 중의 계백 장군이 전라도 말을 했는데, 왜 충청도 말을 안 하느냐는 얘긴 잠시 나돌았던 것 같습니다』

―부여군청 앞 계백 장군 騎馬像(기마상)을 보니 동쪽을 향해 오른손을 머리 위로 들고 있습디다. 경주 황성공원에 가서 김유신 장군의 기마상을 보니 그의 칼 끝이 正北을 향하고 있습니다. 김유신 기마상은 사실상 박정희 대통령이 만든 겁니다. 남북통일을 이룩하겠다는 의지의 표현 아니겠어요.

『武將(무장)이 오른손을 들었다면 그건 「싸우지 말자」는 화해의 제스처 아니겠습니까. 부여군청 앞에 원래 있었던 계백 장군의 騎馬像은 용맹한 장수의 모습인데, 지금 부여초등학교 교정에 옮겨져 있습니다』

―나라를 지키기 위해 장렬하게 전몰한 계백 장군이 굳이 화해 제스처를 취할 필요는 없는 거죠. 그건 억지로 역사왜곡을 한 것 아닙니까(웃음).

『銅像(동상) 하나에도 시대적 이데올로기가 깔려 있는 거죠(웃음)』

―참, JP의 선친이 부여면장 할 때 만든 김유신 장군 찬양비는 지금도 남아 있습니까.

『논산 가는 길에 사비 羅城(나성)이 있는데, 그 부근에 옮겨져 있습니다』

―부여에 오니까 아직도 頒詔原(반조원)이니 釣龍臺(조룡대)니 하는 自己卑下的(자기비하적) 지명들이 남아 있는데, 이제 이런 것들은 바꾸는 것이 좋지 않겠습니까(반조원은 唐將 소정방이 사비로 진격하던 도중에 휘하 군병을 집합시킨 가운데 「백제 정벌의 정당성」을 대내외에 밝히는 唐高宗(당고종)의 詔勅(조칙)을 반포했다고 해선 생긴 지명이며, 조룡대는 소정방이 「白馬를 미끼로 삼아 龍을 낚은 곳」이라고 해서 후인들이 붙인 이름이다).

『우리에게 유쾌하지 못하더라도 역사 또는 口傳(구전)이니까 굳이 바꿔야 할지, 나로선 아직 판단유보예요』


東아시아의 扶餘系 국가 통합의지의 표현

―聖王이 사비로 천도한 후 국호를 南扶餘(남부여)로 고쳤는데, 그 이유는 무엇입니까.

『성왕은 무령왕대부터 고구려를 累破(누파)했던 기세를 타고 동북아의 名門 부여 왕국으로부터 이어지는 역사적 법통을 천명할 필요에서 「남부여」로 고친 것 같아요. 고구려와 연원을 함께하는 백제의 임금이 이제는 백제 중심으로 東아시아의 扶餘系(부여계) 국가를 통합하겠다는 강력한 의지와 자신감의 표현인 겁니다』

―사비도성 한복판에 소재한 定林寺는 백제 왕실의 願刹(원찰)이 아니겠습니까.

『사비의 정림사가 北魏(북위)의 洛陽城(낙양성)에 소재한 永寧寺(영녕사)의 위상과 비슷할 것입니다. 사비성의 구조가 낙양성과 유사함은 결코 우연한 일이 아닙니다』

―사비는 어떤 인프라를 갖춘 왕도였습니까.

『사비는 크게 5부로 구분되고, 그것을 세분하여 25개 巷(항)으로 구획되었는데, 종횡으로 시가지를 관통하는 도로망을 갖추고 있었습니다. 예컨대 현재 부여군청 앞 로터리에서 부여박물관까지 이어지는 도로의 원형은 백제 당시의 것으로 추정되고 있어요. 이러한 도로 유적의 좌우에는 배수로까지 갖춰져 있었음이 밝혀졌고, 금성산 서쪽에서는 시가지를 구획한 조방제의 흔적이 확인되었습니다. 또한 上部·前部와 같은 部 이름을 새긴 標石(표석)도 발견되어 백제의 王都로서 정연했던 모습을 드러내고 있습니다』

―사비 인구는 얼마나 되었을까요.

『사비에 1만 호가 거주했다니까 상주인구가 5만여 명은 되었을 겁니다. 여기에 호구에 편제되지 않았던 노비와 왕궁 경호 병력도 있었고, 중국인·왜인·고구려인·신라인 등도 많이 들어온 국제도시였던 만큼 최소한 6만 명은 넘었을 겁니다. 백제는 개방적인 국가였습니다. 수도권인 지금 논산의 州知事가 왜인 모노베(物部)라는 기록도 있지 않습니까』

―삼국 중 경제가 가장 번영한 백제죠. 인구도 제일 많았고….

『농업생산량이 가장 많았으니 인구도 많았죠. 고구려는 멸망 당시 인구가 69만7000호였던 데 비해 백제는 76만 호였습니다』

―능산리 고분군에 가 보니 의자왕과 부여융의 假墓(가묘)와 제단을 새로 만들어 놓았습니다. 의자왕과 太子 부여융에 대한 추모 열기가 대단한 것 아닙니까.

『이역땅에서 病死했으니 누가 유택을 찾아가 香火(향화)나 올렸겠습니까. 亡者의 恨을 풀어 주겠다는 것입니다』

―太子 부여융도 기구한 삶을 살았죠. 포로로 唐나라에 끌려 갔다가 웅진도독부의 괴뢰왕이 되어 그와 형제간인 백제부흥군의 왕인 扶餘豊과 서로 칼을 겨누어야 했고…. 삼국사기를 보면 의자왕의 太子로 扶餘孝(부여효)가 되어 있다가 별다른 설명도 없이 슬그머니 부여융으로 바뀌는데, 왜 그렇다고 보십니까.

『부여융이 의자왕의 맏아들이에요. 그런데 의자왕이 후처인 思古를 총애하여 太子의 자리가 그녀의 소생인 부여효에게 넘어갔다가 의자왕이 당군에 항복할 때 또 바뀌었던 것 같아요. 당나라는 그런 부여융에게 인망이 있는 것을 알고 괴뢰로 이용했던 것 같습니다. 왕조의 종말은 그렇게 비극적이게 마련이죠』

부여에는 1340년의 세월이 흐른 오늘에도 아직 서러운 被征服(피정복)의 상처가 남아 있다. 그러나 王都 사비는 백제왕실의 성씨 「扶餘」라는 이름으로 아직 건재하다. 또한 그곳에선 백제인의 理想(이상)이 아로새겨진 우리 정신문화의 眞髓(진수)와 만날 수 있다. 그래 그런지 부여는 역사를 생각하는 나그네가 마음속에 담아 가고 싶은 古都인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