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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대한 세대의 증언(1) - 1928년생 朴南植의 戰中과 戰後

정순태   |   2003-11-04 | hit 6251

오전 10시에 서울역을 출발한 새마을호는 오후 1시50분 경남 密陽驛(밀양역)에 닿았다. 철로 위를 가로지르는 통로를 건너면서 먼저 驛舍(역사) 출구 쪽을 흘끗 쳐다보았다. 푸른색 셔츠에 베이지색 바지를 입은 분이 보였다. 그분일 것이다. 그래도 너무 젊지 않은가? 기자가 만나려는 분은 1928년생으로 금년 76세이다.

하루 전 기자는 生面不知(생면부지)의 朴南植(박남식)씨에게 전화를 넣어 「용건」을 밝히면서 『댁으로 찾아가 뵙겠다』고 했다. 그는 『밀양역에서 60리가 넘는 산골인데, 찾아오기가 만만찮을 것』이라면서 『푸른색 셔츠… 차림으로 차를 몰고 나가 픽업하겠다』고 대답했다.

필자가 왜 朴南植씨를 만나려 했는지, 이것부터 먼저 설명해야 할 것 같다. 1개월 전, 月刊朝鮮 편집회의에서는 『오늘의 대한민국이 우리 民族史(민족사)에서 과연 무엇인지』가 話頭(화두)로 올랐다. 그 결과, 광복 이후 50년이야말로 우리 民族史에서 가장 역동적인 시기였던 동시에 민족적 위기 속에서도 未曾有(미증유)의 成就(성취)를 기록한 시대로 자리매김되었다.

『太平盛世(태평성세)였다는 世宗大王 때도 흉년이 들면 굶어 죽는 백성들이 수두룩했어』

『언제부터 우리 민족이 하루 밥 세 끼를 챙겨 먹을 수 있게 되었는가? 하루 두 끼로 대충 견뎌 내고 농삿일 하는 사람들만 중간에 참을 먹었는데…』

토론의 主題(주제)는 좁혀졌다.

『그렇다면 오늘날 한국인이 이만큼이라도 밥 숟가락을 들게 하는 데 공헌한 世代는 누구인가?』

『연령적으로는 대략 1920년대生들일 거야. 범위를 조금 넓히면 1930년대 초반에 태어난 분도 非常(비상)한 시대를 체험하면서 인생의 굽이굽이를 헤쳐 왔던 분들이지』

『맞다, 맞어. 그분들이야말로 우리 민족사상 最强(최강)의 에너지를 발휘했던 世代야! 지난 1000년의 세월 동안 한국인이 언제 한번 지난 50년처럼 세계를 향한 민족적 러시를 실현한 적이 있었는가? 1920년대생이야말로 웬만하면 자서전 하나씩을 남겨도 좋을 만큼 치열하게 살아왔던 世代가 아니겠는가』

『확실히 그들은 그 어느 世代의 한국인보다 파란만장한 시대를 살아왔어. 1945년 8·15 광복 이전엔 괄시받는 식민지 청년인 데다 日帝에 의해 「징용」으로 끌려가기도 했고, 6·25 전쟁 때는 징집 해당 연령이었으며, 「잘 살아보세」가 悲願(비원)이었던 1960년대와 1970년대엔 일만 열심히 했던 우리 사회의 中堅(중견)이었어. 當代에 농업사회에서 산업화사회로의 전환이라는 엄청난 물결을 숨가쁘게 헤쳐오니 어느덧 도래한 정보화사회―이제 그들은 엄청난 天地開闢(천지개벽)의 변화 속에서 인생의 황혼길을 걷고 있거나 잊혀진 故人이 되지 않았는가』

편집회의는 다음과 같은 결론을 얻었다.

『그 하나하나의 인생궤적이 비록 보통사람의 個人史(개인사)일지라도 그것들을 일정하게 모으기만 하면 民族史에서 가장 빛나는 힘을 발휘했던 時代의 精神과 지혜를 담은 寶庫(보고)가 될 것이다. 이제 人生의 황혼길을 걷는 세대, 늦기 전에 그분들의 증언들을 기록해 두어야 한다』

그러나, 기획특집 「위대한 세대의 증언」에 등장시킬 사람의 選定(선정)은 그렇게 쉽지는 않았다. 나라가 멸망의 위기에 처한 6·25 전쟁 때 그가 어디서 무엇을 했는가, 우리 민족이 먹고 사는 문제를 해결하려고 有史 이래 가장 분발했던 개발연대에 그가 어떻게 일했는가― 이것을 최소한의 人選(인선)기준으로 삼았기 때문이다.

취재대상을 이리저리 찾고 있던 중 생각지도 않던 곳에서 전화가 왔다. 『내가 6·25 동란 참전 4년간 쓴 일기를 아직도 갖고 있는데, 月刊朝鮮에서 출판이 가능할는지 검토해 주지 않겠느냐』는 제의였다. 제의를 해 온 분이 바로 朴南植옹이었다.


땀으로 가꾼 작은 樂園

필자는 朴선생이 모는 지프를 타고 그의 집이 있는 山內面으로 향했다. 嶺南樓(영남루)를 끼고 흐르는 밀양강을 건너면 시가지의 번잡함에서 벗어나 완전한 시골풍경이다. 여기서 24번 국도를 따라 산내면 면사무소 소재지 松柏里(송백리)를 지나 10리쯤 달리면 큰 계곡을 틀어막은 저수지의 높다란 石築(석축)이 유별나게 눈길을 끈다. 이 저수지 아랫동네가 朴선생이 사는 밀양시 산내면 가인3동 仁谷(인곡)마을이다. 仁谷마을은 구만산 자락에 아늑하게 안겨 있다. 구만산의 동쪽 기슭 뒤로 높이 1000m가 넘는 운문산·가지산 등 「嶺南알프스」의 연봉이 병풍처럼 어우러져 있다. 仁谷에서 表忠寺(표충사)까지가 15리, 한여름에도 고드름이 돋는 「천황산 얼음골」까지는 25리 거리다.

인곡은 30여 가구쯤 모여 사는 한적한 마을이다. 지프가 대문 옆 공터까지 쑥 들어갔다. 진입로가 시골마을의 안길답지 않게 꽤 널찍하다. 『논밭을 사들여 私道(사도)를 좀 냈어요』

朴선생의 집은 너른 들과 한 가닥의 개천이 내려다보이는 南向받이 양옥이다. 대지 200여 평, 담쟁이덩굴과 실장미로 은근하게 멋을 낸 돌담, 그 안에 들어선 본채(25평)와 별채(10평)가 수채화처럼 산뜻하다. 정원에는 희귀한 金松(금송)과 향나무가 깔끔하게 손질되어 있고, 꽃밭은 맨드라미·능소화·수국·국화 등이 철 따라 피고 진다.

돌담 옆에 붙어 있는 과수원은 자그만해도 옹골차다. 사과·감·호두·살구·자두·무화과 나무가 저마다 튼실하고, 콩·참깨·산나물 등의 작물도 풋풋하다.

―과수원, 참 멋지네요.

『450평 짜리니까, 과수원이라 할 건 아니고, 그저 집사람과 내가 소일하는 텃밭이오. 나무는 10여 년 전에 내가 전부 심은 건데, 이제는 이런 일 힘들어 못 할 거요. 수확한 것, 아이(자녀)들이나 친구들에게 조금씩 보내주고 있지요』

내외가 얼마나 정성을 들였든지 텃밭엔 잡초 하나 보이지 않았다. 도회지 생활에 젖어 온 필자 같은 사람은 흉내도 못 낼 老부부의 부지런함으로 이룩된 하나의 「작은 樂園(낙원)」이었다.

『제초제를 뿌리면 땅이 산성화하니까 집사람과 내가 호미로 잡초를 일일이 캐냅니다』

텃밭 구경에 정신을 팔고 있는데, 어느 틈에 몸뻬를 입은 부인이 나와서 필자를 맞았다. 老부부는 필자를 별채로 안내했다. 별채는 朴선생의 서재와 침실이다.

『여기서 며칠이고 그냥 묵으세요. 송백리로 나가봐도 여관 같은 건 없어요』

서재엔 수천 권의 책들이 꽂혀 있었다. 장서를 보면 책 주인의 성향을 대충 짐작할 수 있는 것 아닌가. 朴선생은 東西의 역사와 철학에 관심이 많은 분인 것 같다.

서재의 벽면에는 대통령, 중앙정보부장, 내무장관, 울산시장 등으로부터 받은 참전용사사증서, 위촉장, 감사장 등이 빼곡하게 나붙어 있었다. 기자의 눈길을 먼저 끈 것은 다음 내용의 감사장이었다.


<感謝狀

强電社 대표 朴南植

귀하는 本洞民이 熱望하던 電化사업에 있어서 本동민의 경제적 어려움을 감안하여 工事費의 대폭 삭감 등 희생적인 노력의 결과로 오늘 우리들에게 光明을 주는 點燈式을 맞이하여 洞民 일동은 衷心으로 感謝의 뜻을 전합니다.

서기 1967년 8월5일

尾浦洞전화추진위원회 위원장 崔正植>


―1960년대에 벌써 농어촌 電化사업을 하셨더군요.

『그때가 농어촌 전화사업법 시행 전인데, 일찌감치 제가 미포동·매암동·태화동 등 20여 개 마을의 電化사업에 참여하여 무보수의 일을 좀 했습니다. 외선공사의 자재는 울산시가 공급하고, 소액의 내선공사 비용은 수익자가 부담했어요. 저는 기술과 인력(전공·인부)만 제공했습니다』

감사장은 뭐든 남에게 베풀어야 받을 수 있는 것 아닌가. 그런 감사장을 수십 장이나 받으며 살아온 사람의 인생궤적은 어떤 것일까.


北侵說의 조작을 自白한 平壤방송

―6·25 전쟁이 터진 날, 어디서 무슨 일을 하고 계셨습니까.

『울산정유공장 건설 요원으로 일하고 있었어요. 저는 정유공장 送配電設備(송배전설비) 공사를 맡은 기사였거든요. 6월25일은 일요일이었지만, 정유공장 준공식을 하루 앞두고 중앙에서 내려오는 시찰단을 맞이하기 위해 현장에 나가 있었습니다』

―전쟁이 터졌다는 소식은 언제, 어디서 들으셨습니까.

『6월24일, 평소 습관대로 심야 평양방송을 듣기 위해 밤 11시쯤 라디오 다이얼을 돌리는데, 잡음이 심해 아나운서의 말소리가 똑똑히 들리지는 않았지만, 뭔가 심상찮았어요. 그렇게 느낀 것은 「밤 12시 이후에 중대 방송이 있을 것이니 자지 말고 꼭 들으시오」라는 대목 때문이었습니다. 「중대 방송」이 뭘까 궁금했죠. 평양방송에 다이얼을 고정시켜 놓고 신문을 뒤적이다가 정전으로 라디오(전기 專用)가 꺼지는 바람에 깜박 잠이 들었습니다. 그런데 잠든 사이에 전기가 다시 들어와 라디오가 저절로 켜졌던 겁니다.

잠결에 얼핏 들으니 평양방송 아나운서의 흥분한 말소리가 흘러나와요. 「남조선 리승만 괴뢰군이 오늘 0시를 기해 38도선 전역에서 北侵(북침)을 자행하였다. 그러나 영용한 우리 인민군은 총반격을 개시하여 적을 38도선 이남으로 격퇴 중이다」라는 거예요. 그 시각이 6월25일 이른 새벽이었어요』

―그것, 이상하군요. 평양방송의 「北侵」 주장을 곧이곧대로 따른다고 하더라도 北侵을 예상하여 예고방송까지 하다니…. 그들이야말로 점쟁이가 아닙니까.

『그러니까 북침설이 조작인 것을 평양방송이 스스로 고백했던 셈입니다. 「국군이 0시에 북침한 것을 격퇴시키고 새벽 4시에 반격을 개시했다」는 억지 시나리오를 만든 것입니다』

―평양방송 청취를 「평소의 습관」이라고 하셨는데, 당시 朴선생의 생각이 왼쪽으로 좀 기울어져 있었던 것 아닙니까.

『제가 원래 프롤레타리아 가정 출신인 데다 그 시대의 유행병처럼 번졌던 좌익 풍조에 휩쓸려 의식적으로는 벌건 물이 좀 들어 있었고…』

―그 얘긴 일단 뒤로 미루고, 평양방송 청취 후에 우리 방송도 들으셨습니까.

『곧 바로 서울방송을 들었어요. 「북한 괴뢰군은 오늘 未明(미명) 4시경부터 38도선 全전선에 걸쳐 일제히 南侵(남침)을 개시하였다. 그러나 무적을 자랑하는 정예 국군은 즉시 적을 반격 중에 있다. 휴가나 외출 중인 장병은 즉시 원대 복귀하라」― 아나운서의 다급한 목소리가 떨리고 있었습니다』

―어느 쪽이 진실이고, 어느 쪽이 거짓인지 분간하지 못했습니까.

『이제는 「흐루시초프 회고록」 등에 의해 남침이 명명백백한 역사적 사실이 되었습니다만, 그땐 솔직히 말해 뭐가 뭔지 잘 모르겠습디다』


울산정유공장 복구공사의 現場

―그날 아침에 현장에 출근해 보니 분위기는 어떻습디까.

『중앙에서 내려오는 시찰단을 맞이하기 위해 출근한 각 분야별 건설요원들이 삼삼오오 서성거리며 전쟁 발발 뉴스를 놓고 이런저런 얘기를 했는데, 대부분 당혹스런 표정입디다』

―시찰단이 예정대로 오기는 했습니까.

『高官들을 실은 버스가 내려오기는 했어요. 시찰단은 최순주 재무부 장관을 단장으로 하여 김훈 상공부 장관, 백두진 외자청장, 미국의 원조기관인 ECA 관계자 등 30여 명이었습니다. 그들은 한결같이 입을 꾹 다문 채 시찰을 하는 둥 마는 둥 하더니 서둘러 돌아가버리더군요. 그날은 태풍 「엘시」의 영향으로 강풍을 동반한 비가 나흘째 계속 내리고 있었지요』

―다음날 준공식은 예정대로 열렸습니까.

『발전기 사이클 조정작업을 하고 있는데, 「전원 집합」의 통보를 받고 기사들이 모두 기술부에 모였습니다. 기술부장 羅씨가 비장한 목소리로 「전쟁 발발로 준공식을 무기 연기한다. 별도 지시가 있을 때까지 공장을 폐쇄한다」고 발표합디다. 우리는 기약도 없이 헤어지고 말았습니다』

울산정유공장은 태평양전쟁 말기 조선석유회사 元山공장을 모체로 울산군 대현면 고사리에 건설되다가 日帝의 패전으로 인해 공사가 중단된 것으로, 美 군정 이후 한국석유저장주식회사(KOSCO)의 저유소로 사용되었다. KOSCO는 해외에서 이미 精製(정제)한 석유류를 선박으로 싣고 와서 이곳 기존의 탱크에 저장해 놓고 전국 각 지역에 육송 또는 해송으로 공급하는 업체였다.

1948년 8월15일 출범한 정부는 국가기간산업체의 첫 재건사업으로서 울산정유공장의 복구공사에 착수했다. 그러나 이 복구공사는 추진된 지 2년 만에 준공을 하루 앞두고 6·25 전쟁이 발발함으로써 다시 중단되고 말았던 것이다.



[電機技士로 立身하기까지]

아버지의 獄死

―朴선생은 스스로를 「프롤레타리아 가정 출신」이라고 하셨는데, 어떤 과정을 거쳐 국가기간산업체의 전기기계 공사를 책임지는 技士로 입신할 수 있었습니까.

『저의 선친은 원래 고향 포항에서 韓醫(한의)로 일하셨어요. 일제시대의 韓醫라면 요즘처럼 인기직업이 아니라 藥種商(약종상) 정도의 직종이었어요. 할아버지는 「新학문 하면 일본사람 된다」며 아버지에게 漢學(한학)공부만 시켰고, 아버지는 워낙 强骨(강골)이라 創氏改名(창씨개명)을 끝까지 거부하셨다고 합디다. 그런 아버지가 제가 열한 살 때인 1938년 대구형무소에 수감된 지 2년 만에 42세를 일기로 옥사하셨습니다』

―혹시, 독립운동을 하신 것 아닙니까.

『아버지가 무슨 主義者로서 조직활동을 하신 것으로 생각되지는 않습니다만, 고집스럽게 흰 한복만 입으셨습니다. 당시, 흰 한복을 입고 다니는 사람만 보면 순사나 邑서기 같은 작자들이 먹물을 넣은 대나무 물총을 쏘아댔어요. 아버지는 그런 먹물 봉변을 당해 옷이 시커멓게 얼룩지면 곧장 귀가하여 다른 한복으로 갈아입고 여봐란듯 다시 바깥출입을 하셨어요』

―선친을 마지막으로 뵌 때가 언제였습니까 .

『내 나이 아홉, 소학교(초등학교) 2학년 때였어요. 무슨 사건 때문인지 모르지만, 아버지가 검거되지 않으려고 어딘가로 도피하셨어요. 1936년이니 日帝가 中日전쟁을 도발하면서 사상통제, 예비검속 등을 강행하던 시기였죠. 순사가 우리 집을 덮쳐 아버지 대신에 나를 인질로 경찰서로 데려갔습니다.

어린 소견에도 「이건 부당하다」고 느꼈어요. 유치장 문을 발길질하면서 막 반항했지요. 유치장 벽에는 몽당연필로 「×××× 순사 나쁜 놈 개새끼」 등의 낙서를 마구 썼어요. 내가 든 유치장에는 어른 두 사람도 갇혀 있었는데, 내가 고래고래 고함치기만 하면 「잘 하는 일」이라고 응원했어요. 옆방에 갇힌 어른들도 판자벽을 사이에 두고 우리 방 어른과 통방을 하다가 「저 아이가 즈그 아부지 대신에 붙들려 왔다」는 말을 듣고 「그놈, 참 효자다」, 「포항에 인물 났다」고들 하면서 칭찬합디다.

내가 더욱 길길이 날뛰어도 일본 순사들은 저들이 당초 무리한 짓을 했던 까닭에 감히 나무라지 못해요. 내 깐으로도 이제 곧 풀려날 판인데, 아버지께서 내가 갇혔다는 말을 듣고 당신 스스로 경찰서로 찾아와 자수하시고 말았습니다. 나는 아버지의 뒷모습만 얼핏 보고 경찰서 정문을 벗어났는데, 그것이 살아 생전 父子간의 마지막 만남이었어요』

―아홉 살 나이에 유치장에서 日帝의 순사들에게 저항했다는 말씀을 들으니 그때 벌써 의식화했던 것 아닙니까.

『제가 좀 조숙했죠. 소학교 입학 전인 다섯 살 때부터 근 3년간 서당에 다녔는데, 漢字 2000字와 童蒙先習(동몽선습), 明心寶鑑(명심보감)을 떼고, 馬上逢寒食 途中日暮春이란 漢詩 같은 것들을 좔좔 외고, 通鑑(통감) 3권을 읽은 뒤 四書三經까지 공부하다가 신식학교에 입학했어요. 그만한 일로 눈물이나 질질 흘릴 아이의 수준은 이미 넘어섰던 거죠』


35리 길을 짚신 신고 달리며 通學

―어이구, 대단한 수재였군요. 그런 조기교육을 받았으니 소학교 공부는 싱거웠겠습니다.

『신식공부는 또 그것대로 흥미 있었어요. 특히 산수가 재미있었어요』

―선친의 옥사 후 가정형편은 어떠했습니까.

『몹시 가난했어요. 제가 소학교 5학년 때 포항 기계면의 깊은 산골마을 덕동으로 이사를 갔습니다. 거기서 매일 35리 거리의 기계심상소학교로 통학했습니다』

―왕복 70리 길의 통학을 어린 소년이 어떻게 감당했습니까.

『짚신 신고 달려서 등교하는 데 두 시간쯤 걸렸습니다. 짚신은 하루만 신어도 헤져서 하교 후 매일 밤에 내 손으로 한 켤레씩 삼았습니다. 학교에 오가려면 큰 재 하나를 넘어야 했는데, 날이 어둑어둑해지면 짐승이라도 달려들까 봐 머리칼이 쭈뼛쭈뼛했습니다. 영양상태도 불량하고 하도 배가 고파 간혹 길가에 한참 주저앉았다가 겨우 정신을 가다듬고 일어나 이를 악물고 다시 달려서 귀가했습니다』

―겨울에는 등·하교가 더욱 어려웠겠습니다.

『그래서 6학년 때 석 달간 학교 옆에다 자취방을 얻어 놓고 혼자서 밥을 끓여 먹고 등교했습니다만, 방바닥이 냉골이라 잠을 잘 수가 없었어요. 하루는 이러다간 얼어 죽겠다 싶어 산에 가서 나무를 좀 하다가 일본 순사에게 들키고 말았습니다. 그땐 나무를 하다가 걸리면 처벌이 가혹했습니다. 내가 먼저 순사에 다가가서 나의 형편을 말하고 이해를 구했더니 순사가 오히려 「열심히 공부해라」고 격려까지 합디다. 각반을 풀어서 솔잎다발을 묶어 등에 지고 자취방으로 돌아왔습니다』

―당시는 밥만 먹기도 어려웠던 시절 아니었습니까.

『우리 가족들은 풀죽을 쑤어 먹었습니다. 그래도 어머니는 배급쌀을 아끼고 아껴 내게는 쌀 몇 되를 넣은 보따리를 쥐어주셨습니다. 반찬은 된장과 간장이 전부였습니다. 괜찮게 사는 주인집 식구들이 끼니 때마다 먹는 김치가 그렇게 그리울 수가 없었어요. 어느 날 밤에 담벼락 밑에 파묻은 주인집 김칫독을 가만히 열고 김치 한 포기를 훔쳤어요. 그 맛, 이날 이때까지 잊을 수가 없어요』


전기회사 技士로 修習中에 맞이한 8·15

박남식 소년은 소학교 졸업 후 포항에서 중학교에 다녔다. 그러나 중학교 6년을 마치고 대학에 진학하여 의사가 되고 싶은 꿈은 일찌감치 접을 수밖에 없었다. 집안 형편이 갈수록 기울었기 때문이었다.

『1943년 중학 3학년을 자퇴하고 부산으로 갔어요. 부산 초량에 야스가와(安川)전기회사가 있었는데, 그 회사 附設(부설) 전기학교(2년제)에서 전기기사를 양성하고 있었거든요. 기술자가 되어 빨리 돈을 벌기로 작심했습니다. 1945년 3월, 전기학교를 졸업하고 현장에서 실무를 익히던 중에 8·15 광복을 맞았습니다』

일본인이 물러나간 후 우리나라에서 전기·기계·화학·토목 등 기술분야에서 이론과 실무를 겸비한 기술자는 매우 귀한 상태였다. 이제 그의 능력이 빛을 발하는 시대가 전개되기 시작한다.

『부산에서 포항을 거쳐 울산에 온 나는 정유공장 복구사업에서 전기기계를 맡아 일하고 있던 중 백상렬이란 분의 권유를 받아들여 그와 50대 50의 지분으로 (주)三相電機공업사라는 회사를 차렸습니다. 그분이 자본을 대고, 내가 기술을 제공하는 형태로서 공동경영을 했어요. 그런데 전쟁이 터진 겁니다』

―뒤숭숭했을 터인데, 일은 손에 잡힙디까.

『할 일도 그만그만하여 (안강에 있던) 집에라도 다녀올까 망설이고 있는데, 학산동 고무공장에서 주동력인 100마력짜리 고압 전동기가 돌지 않는다고 급히 수리를 의뢰해 왔어요. 검사 결과, 코일의 절연 파괴로 현장에서 부분 수리가 불가능해서 우리 공장으로 가져와 코일 해체작업에 착수했습니다』

학산동 고무공장은 동해안 지방에서 유일한 고무신 제조업체로서 여자공원이 100명에 이르는 규모였는데, 예비 전동기가 없어 작업장 全라인이 올스톱되었다. 고무공장 측은 늦으면 이미 배합해 놓은 원료를 못 쓰게 된다면서 수리를 성화같이 독촉하고 있었다.

『木型을 만들고 코일을 감는 일을 야간에도 강행했으나 잦은 停電(정전)으로 일의 진척이 더뎠습니다. 그래도 밤샘작업을 한 결과, 열흘 만에 100마력 전동기가 거의 완성되었어요. 6600V(볼트)의 高전압으로 절연 내압시험을 한 후에 결선을 마무리하니 회전시험에도 문제가 없었습니다. 새로 대체한 코일 외부에 절연 니스를 침투시킨 후 전동기 스테터는 건조실에 들어갔어요. 숯불을 피워 건조시키는 데 24시간 소요되는 것이었습니다. 마지막 공정이었죠』

―징집영장은 아직 날아들지 않았습니까.

『마지막 공정의 뒷일을 조수 崔군에게 맡기고 공장 맞은편 이발관에 갔습니다. 평소 틈만 나면 들러서 신문을 읽거나 음악을 듣고 이런저런 얘기를 나누던 사랑방이었어요. 주인 金씨는 상당한 지식인이었는데, 내 머리를 깎으면서 「20대 남자는 모두 軍에 징집될 것 같다. 내가 옥교동 民保團長(민보단장)을 맡았는데, 당신이 적당한 간부직에 보임되도록 힘쓸 테니 (軍에 가지 말고) 끝까지 버텨보라」고 권합디다. 나는 그저 「며칠 말미를 달라」고만 대답했어요』

7월6일, 고무공장에서 전동기 시운전이 실시되었다.

『3300V 차단기 손잡이를 밀어 넣는 순간, 심장이 뛰고 손이 떨려요. 가슴 조이던 起動(기동) 끝에 경쾌하게 회전을 시작합디다. 전류와 소음을 측정한 결과, 正常(정상)이었습니다. 우리 기술자는 이럴 때 짜릿한 희열을 느낍니다』


비겁자가 되지 않으려고 入隊

그는 울산역으로 나가 경주行 열차에 몸을 실었다. 그의 가족은 일제 말 기계면 덕동 산골에서 피란생활을 하다가 광복된 그해 10월 안강읍으로 나와 그곳에서 5년째 머물고 있었다. 가족은 어머니, 형님 내외와 어린 조카, 그리고 초등학교와 중학교에 다니는 남동생과 여동생을 합쳐 모두 일곱 명이었다. 그의 누님 두 분은 시집을 갔고, 열두 살 위의 형님은 그때 돈 벌러 외지에 나가 있었다고 한다.

『평소보다 몇 곱절 많은 돈을 어머니 앞에 내놓았습니다. 정유공장과 고무공장 공사로 번 돈이 짭짤했기 때문이에요. 빚 갚고 남은 돈은 쌀을 구입하시라고 권유했습니다』

이튿날 울산으로 되돌아가던 중 그는 열차 안에서 사복경찰관의 불심검문을 받았다. 그가 소지하고 있던 손가방 속에 머큐로크롬, 다이아진, 붕대, 반창고 등 구급약이 들어 있었는데, 그것들로 인해 「산손님」(빨치산)으로 오해받아 울산경찰서로 연행되었다. 그는 이틀 동안 몇 차례 손찌검까지 당한 후 무혐의로 풀려났다.

―그때 전황은 어떠했습니까.

『7월18일 아침 뉴스를 들으니 금강 방어선의 붕괴로 大田이 함락되어 정부가 大邱로 이전했다고 합디다. 20∼30代 장정 앞으로 징집영장이 발부되고, 기피자의 단속은 가두검문에서 심야 가택수색으로 이어지고 있었어요. 나는 서둘러 이발관의 金씨를 만나 민보단 입단수속을 마치고 옥교동 단부 제1반 차장으로 보임되었습니다』

―민보단에서 무슨 일을 했습니까.

『며칠 후 비상동원령이 떨어졌어요. 신원을 알 수 없는 사람의 인솔下에 30여 명의 단원이 삽과 곡괭이를 들고 단본부를 출발했습니다. 내가 종종 올라갔던 含月山(함월산)에 갔어요. 산줄기 사이의 후미진 곳에서 상당히 넓고 깊은 구덩이를 팠습니다. 처음 우리는 국군의 방어진지를 만드는 것으로 짐작했습니다…』

―그런데요.

『이윽고 밑에서 인기척이 나더니 점차 많은 사람들의 발소리가 들려왔습니다. 총을 든 사람들이 앞뒤에서 감시하는 가운데 철사로 두 손이 꽁꽁 묶인 사람들이 끌려왔어요. 그들은 흙더미 위에 세워지고 우리는 모두 비켜서서 잔뜩 긴장했습니다』

좌익죄수에 대한 총살집행이었다.

『탕! 탕! 갑자기 터지는 총소리가 산골을 흔들었습니다. 지휘자의 호령 소리에 화들짝 놀란 우리들은 허둥지둥 시체를 구덩이에 밀어 넣고 흙을 퍼부었어요』

그의 본적지는 포항이고, 그때까지 울산읍에 寄留屆(기류계) 수속을 하지 않아 아직 징집영장을 발부받지는 않았다. 그러나 가두검문에 걸리기만 하면 불문곡직 장정수용소로 끌려가야 하는 연령이었다. 마음의 방황 속에서 그는 평소 「형님 대접」을 했던 민보단의 박장표 부장을 찾아가 그의 속마음을 털어놓았다.

『나는 군인이 되어 동포의 가슴에 총을 겨눌 생각이 없습니다』

그러자 朴부장은 이렇게 충고했다고 한다.

『조국이 죽느냐 사느냐 하는 갈림길에서 전쟁을 치르고 있는데, 20代의 젊은이가 어떤 핑계로든 국토방위의 의무를 회피한다는 것은 자기기만이다. 자네가 우리 사회의 부정부패를 미워해서 그러겠다는데, 그러려면 우선 자네 자신부터 한 점 부끄러움 없이 행동해야 그런 말을 할 자격이 있는 것 아닌가. 훗날 누군가가 「국난을 당했을 때 당신은 무엇을 했느냐」고 물으면 떳떳이 대답할 수 있어야 하지 않겠나. 비겁하게 살면 살아도 죽은 거나 마찬가지야. 사람의 목숨은 하늘에 달린 것, 난 朴군은 살아서 돌아올 것으로 믿네』

그는 겁은 났지만, 비겁한 사람이 되지 않으려고 자진입대할 것을 결심했다. 입대 후 그는 야전(이동외과)병원 소속의 군수담당계로서 만 4년간 동서남북의 전선을 전전했다. 특이한 것은 그가 軍 복무기간에 꾸준히 일기를 썼고, 그것을 지금도 소중하게 보존하고 있다는 점이다.

그 일기는 A4 용지로 무려 300장의 분량에 달한다. 朴옹은 자신의 6·25 전쟁 체험일기의 출판계획에 대한 필자의 의견을 듣기 위해 그것을 e메일로 필자에게 보냈다. 필자는 전날 저녁부터 그의 일기를 읽기 시작하여 밀양역에 도착하기까지의 이동간에도 거기에 푹 빠져 헤어나지 못했다. 다음은 필자가 그의 일기를 발췌 요약한 것이다.



[야전병원 軍需담당 병사의 6·25 체험일기]

엉터리 신체검사에서 甲種합격

8월25일(금)

곧 비가 올 듯 흐리다.

그저께 밤에는 마음이 상해서, 어제는 송별연이라서 너무 많이 술을 마셨다. 장정대기소는 과거 일본군의 건빵창고였다고 해서 「건빵중학교」라는 별명으로 통하는 울산중학교였다. 접수처에서 입소신고를 하고 지시대로 제5반에 합류했다.

8월26일(토)

운동장에서 신체검사를 받았다. 검사관이 각자에게 이상유무를 물어보는 정도였다. 「없다」고 하면 갑종합격이었고, 「있다」고 하면 별도의 검진을 받아야 했다. 나는 갑종합격이었다. 신체검사에 합격한 장정은 하루에 소금으로 간을 맞춘 주먹밥 두 개씩을 얻어먹고 입영을 기다려야 한다.

8월27일(일), 흐림.

아침부터 운동장에서 제식훈련을 받고 있었다. 정오쯤 현역장교가 대열 앞에 나서서 『본관은 육군 야전의무단의 모병관이다. 중학교 5학년 이상의 학력을 갖춘 사람은 우측으로 나와라』고 말했다. 우측대열에 합류했다. 우리들 200여 명은 울산역에서 기차를 타고 영천역에서 내렸다. 의무단 본부에 도착하니 수백 명이 먼저 와 대기 중이었다. 다시 신체검사를 받은 후 간단한 영어시험을 치렀다. 불합격자 200여 명은 되돌아갔다.

8월28일(월), 구름 한 점 없이 맑음.

우리 동기생 360명은 군복으로 갈아입고 운동장에 집합했다. 나는 육군 제1야전의무단 교육대 제1중대 제2구대 제3반에 소속된 이등병으로서 군번 0350161을 받았다. 박동균 단장의 훈시를 듣는 것으로 교육훈련이 시작되었다.

8월29일(화), 맑음.

오전 9시 정각, 우리들은 개인장구를 소지하고 연병장에 집합했다. 주번사관이 『永川에 대한 적의 압력이 가중되어 本 교육대는 후방으로 이동한다』는 명령을 하달했다. 우리는 영천-경주 간 국도를 따라 임포를 거쳐 아화국민(초등)학교 교정에 도착했다. 아화에서 우리는 비로소 교육일과표를 받았다. 각 학과목 담당교관은 임상경험이 풍부한 40代 군의관들이었다. 전술훈련은 육사 출신 장교들이 맡았다.

9월4일(월), 흐림.

아화에서 겨우 교육훈련의 틀이 잡히려고 하는데, 또 「이동」이라고 한다. 행선지는 비밀이었는데, 우리가 알 수 있는 것은 「작전상 후퇴」라는 것뿐이었다. 도보로 건천을 거쳐 경주역에 도착했다. 경주역은 피란민들로 아수라장을 이루고 있었는데, 미군 헌병들은 『이곳이 최후의 방어선』이라면서 교육대의 남하를 저지했다. 여기서 점심을 거른 채 무작정 대기하고 있다가 한밤중에야 겨우 울산行 기차를 탈 수 있었다. 우리 교육대는 울산군 온산면 온산국민학교 교정에 도착했다.

훈련기간 중 가장 고통스러운 것은 배고픔이었다. 의학교육은 유익했다. 인체에 대한 흥미진진한 강의를 듣다 보면 신비, 그 자체였다.


金庾信을 몰랐던 부끄러움



9월16일(토)

연 사흘째 비가 내린다. 강의실 흑판에 「역사의 교훈―삼국통일」이라는 강의 제목이 크게 쓰여 있었다. 강사로 나선 부단장은 『어제 9월15일 유엔군이 드디어 인천에 상륙, 교두보를 구축했으며 낙동강전선에서도 총반격을 개시할 것』이라고 전황부터 알려 주었다.

이어 부단장은 『삼국통일을 완성한 신라인의 슬기를 배워 남북통일을 이룩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강의 중 특히 金庾信(김유신) 장군의 滅私奉公(멸사봉공)과 화랑들의 臨戰無退(임전무퇴) 정신은 감동적이었다. 내가 처음 알게 된 史實 아닌가. 유년시절 서당에서 春秋戰國 시대의 중국 역사를 배웠고, 日帝의 식민지학교에서 「皇國臣民化」 교육을 받으며 소위 萬歲一系의 皇統을 암기하고 敎育勅語를 막힘 없이 외웠으면서도 우리나라 역사 공부를 등한히 해온 것이 부끄럽다.

9월25일(월), 흐림.

우리는 단 한 사람의 낙오 없이 4주간의 교육훈련을 이수하고, 일등병(지금의 일병)으로 진급했다. 계급장을 구할 수 없어 빛이 바랜 작업모 정면에 잉크로 갈매기(∨) 한 개씩 그려 넣었다. 9월23일 치른 필기시험의 성적이 발표되었다. 나는 평균 90점 이상자여서 10월1일부로 한 계급 더 특진하여 하사(지금의 상병)가 되는 영예를 차지했다.

9월27일(수)

잔뜩 흐린 날씨에 간간이 비를 뿌리니 조금 쌀쌀했다. 부대배치 명령이 하달되었다. 나는 동부전선 제1군단을 지원하는 제1야전병원에 배치되었다.

9월28일, 맑음.

나를 포함해 제1병원에 배치받은 동기 30명은 趙중위의 인솔 아래 트럭의 화물적재함에 탑승했다. 격전지 永川을 지나 폐허로 변한 신령과 義城을 지나 北으로 달렸다. 길가에는 수많은 인민군의 시체가 널브러져 있었다. 보지 않으려고 시선을 하늘로 고정시켰다. 점심을 거르고 저녁식사는 건빵으로 때웠다.

9월30일(토)

태백산맥 남부에서 가장 높은 일월산 준령을 겨우 넘어 저녁 무렵이 되어서야 春陽에 닿았다. 소속 부대에서 처음으로 저녁을 먹었는데, 밥의 양이 조금 많았지만 부식은 여전히 소금을 넣어 간을 맞춘 콩나물국뿐이었다.

10월1일, 맑음.

삼동산 너머 동쪽에 태백산의 정상이 보인다. 『이곳은 일찍이 북한 게릴라의 본거지였고, 지금도 미처 탈출하지 못한 북한 정규군이 유격전을 펼치고 있는 곳』이라고 동승한 고참 상사가 주의를 환기시켰다. 영월에 이르렀을 때는 저녁이었다. 남한에서 최대의 발전시설을 갖춘 영월 화력발전소는 멈춰 있었다. 패잔병의 기습으로 어수선한 이곳을 빠져 나와 평창에 도착하니 하늘 가득히 별이 총총하다.


동해안을 따라 北進 또 北進



10월3일, 흐림.

일조점호 때 인사발령이 하달되었다. 동기 姜晉求(강진구: 후일 삼성전자 회장 역임)와 나는 교육 성적 우수자로서 예정대로 일계급 특진하여 하사가 되었다. 나는 군수과 발령을 받고 보직신고를 했는데, 지난 닷새간 우리를 인솔하면서 좋은 인상을 심어 준 趙중위가 과장이었다. 선임하사관은 나이가 지긋한 한태규 이등상사(중사)였다.

10월6일, 맑음.

高城邑에서 4km만 가면 해금강이라는데, 계속 北進한다. 통상 군단사령부와 같은 위치에 있어야 할 야전병원이 지난 밤 간성에서 사단CP를 추월하여 이곳에 와 있는데도 차량들은 짐을 풀지 않은 채 대기상태에 있다가 곧장 달려 장전항에 도착했다. 연도에는 주민들이 나와 환영했다. 거리의 담벼락이나 건물의 외벽에는 北의 각종 선전벽보가 나붙어 있었다. 흑인과 백인 병사가 부녀자를 폭행하고 어린이를 죽이는 따위의 反美 포스터였다.

10월15일, 한때 비.

오후에 군단 민사처에서 「포도주를 나눠 준다」는 연락을 받았다. 거리는 국군의 元山 입성을 환영하는 시민대회에 참가하고 돌아가는 시민들로 붐비고 있었다.

콘크리트 건물 1층에 민사처가 있었는데, 2층에는 「대한청년단 결성주비위원회」라고 한문으로 쓴 간판이 붙어 있었다. 불과 며칠 전 시가전을 벌였던 이곳에서 민간조직이 결성되고, 시민대회를 개최하는 등 규모가 큰 활동을 하는 데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민사처의 분위기는 기쁨에 들떠 있었다. 사흘 전 신성모 국방장관이 來元하여 金白一 군단장의 소장 진급을 축하하고, 대통령 각하의 특명으로 1군단장 예하 全병사에게 일계급 특진의 은전을 베풀었다. 술이 귀한 이곳에서 포도주 세 드럼을 얻어 귀대하니 모두가 환호했다.

10월 16일, 흐리고 비.

일조점호 후 이례적으로 부원장 이준호 중령이 훈시를 하였다.

『내가 어제 원산형무소에서 본 참상은 말로는 이루 다 표현할 수 없다. 어떻게 동족을 그토록 무참하게 죽일 수 있다는 말인가. 百聞이 不如一見, 시간 나는 대로 현장을 확인하라』

안경 너머로 굵은 눈망울을 굴리며 그는 분노했다.

나는 아침식사를 마치고 급히 형무소로 달려갔다. 정문 기둥에 「원산교화소」라는 간판이 그대로 붙어 있었다. 사무실에서 몇 사람을 만나 사연을 물었다.

『원산교화소에 9월 하순부터 반동으로 몰린 정치범들이 무더기로 수감되었다. 수감자 900여 명 중 600명 가량의 정치범은 국군이 입성하기 며칠 전에 저 신풍리 뒷산 반공호에 가두어 놓고 모두 죽였다. 우리 일반 죄수들은 국군이 옥문을 열어 주어 풀려났다』

교화소에서 서남쪽으로 약 300m 떨어진 산기슭을 찾았다. 송장 썩는 냄새로 숨이 막히고 사람들의 곡성이 산골을 흔들었다. 방공호 안에는 두 손을 뒤로 하여 철사로 묶인 채 여러 사람을 엮어 놓은 시체더미가 아직도 남아 있었다.

요행히 살아남은 사람과 유가족들에 의해 시신이 수습되고 있었는데, 해골처럼 야윈 몸에 남루한 옷을 걸친 시체의 얼굴에 피가 말라 붙었다. 교복을 입은 학생과 부녀자의 시체도 있었다. 아들의 시체를 끌어안고 통곡하는 어머니의 모습이 너무나 애처롭다.

10월17일, 비.

내가 차고 있던 손목시계를 수리한다는 이유로 외출허가를 얻었다. 길거리에는 아주머니들이 옥수수·감·밤·사과·감자 같은 먹거리를 팔고 있었는데, 값이 비싸다. 싸전이나 떡판은 보이지 않았는데, 쌀이 매우 귀한가 보다. 비 오는 거리를 한참 걸어 부두에 이르렀다. 사람들이 빙 둘러서서 웅성거리고 있어 그 사이를 헤집고 들어가 보니 아주머니들의 호곡 속에 퉁퉁 불은 시체들이 열을 지어 눕혀져 있었다. 인민군이 후퇴하면서 피란가지 않는 청·장년들을 붙잡아 바닷물에 처넣어 죽였다고 한다.

10월18일, 비 오고 흐림.

군수과가 들어 있는 집 주인 할머니가 오늘 따라 매우 명랑하다. 시골에서 피신해 있던 아들이 돌아왔다고 한다. 원산시내에서 교사로 근무한다는 할머니의 아들을 만나 이것저것 물어보고 싶었지만, 저녁 때가 되어 다음 기회로 미루었다.

10월19일, 흐린 후 비.

부관부에 들러 병력일보를 챙기고 취사반으로 가는데 치료실이 매우 소란하다. 지뢰를 밟아 발목이 달아난 환자의 다리를 절단하는 수술이 이제 막 끝났는데, 환자는 땀을 뻘뻘 흘리며 『내 다리 내놓으라!』며 울부짖고 있었다.

10월20일, 비.

저녁에 2층(군수과)에서 집주인 아들(현직교사)과 취사장에서 얻어 온 쇠고기 장조림을 안주로 하여 귀한 미제 포도주를 얼큰하게 마시며 대화했다.

―공산당의 선전을 들으면 북한의 교육환경이 매우 좋다던데요.

『인민공화국 수립(1948년) 후부터 각급학교가 증설되었으나 혹심한 교원 부족에 빠졌어요. 실력 있는 교원은 하나 둘 남으로 넘어가버린데다 「사회주의적 인간으로의 개조」라는 그들의 교육목적에 복무할 수 없다고 지목받은 교원은 학원에서 추방되었기 때문이죠. 작년부터는 「남반부를 해방하자」는 구호 아래 군사훈련에 동원되었고, 전쟁이 터지자 中3 이상의 학생과 젊은 교원이 인민군에 징집되어 사실상 휴교상태로 들어갔지요』

―광복 후 진주한 소련군에 대한 평판은 어떠했습니까.

『하룻밤 사이에 이리떼로 돌변했습니다. 행인을 붙잡아 시계를 강탈하여 손목에서 어깨 짬까지 차고 다녔어요. 시계가 멎으면 태엽을 감을 줄 모르고 물로 씻거나 상욕을 해대며 밟아 버리기도 했어요. 밤이 되면 소련군 병사들이 서너 명씩 짝을 지어다니면서 길 가는 부녀자를 강간하고 금품을 약탈했어요. 심지어는 가정집을 덮쳐 할머니, 며느리, 손녀를 가족들 앞에서 윤간했습니다』

―저항은 없었습니까.

『가만히 앉아서 당할 수 없었지요. 조직적으로 가장 격렬하게 대항한 단체는 養虎團(양호단)이었습니다. 밤길에 골목에 숨어 있다가 그들이 나타나면 몽둥이로 기습하여 머리통을 쳤습니다. 양호단은 인근의 송전·고저·덕원·문평의 보안서를 습격하여 무기를 빼앗아 무장하고 테러로 저항하였지요』


竹馬故友 주민영의 기구한 운명

10월23일, 맑음.

부관부의 일보계를 거쳐 수용부에 들렀다. 텅 비어 있는 병실 가운데쯤에 환자 셋이 침대 위에서 앉아 점심을 먹고 있었다. 낯익은 모습. 다가가 진료카드를 살펴보았더니 「제3야전병원 소속 일등병 주민영」이다.

떨리는 목소리로 그의 본명을 불렀더니 깜짝 놀란다. 명찰에서 내 이름을 확인하고는 몹시 당황해했다. 주민영(가명)을 포함한 환자 셋은 제3야전병원에서 근무중 인민군 낙오병들의 기습을 받아 포로가 되었다가 탈출하여 어젯밤에 우리 병원에 찾아왔다고 한다.

「수재」로 이름났던 주민영은 일제 때 서당과 소학교에서 나와 동문수학한 竹馬故友(죽마고우)다. 그는 광복 후 포항중학교(지금의 중·고교 과정) 재학 중 좌익 학생연맹에 가담하여 열성적으로 활동한 남로당원이었다. 1948년 제헌의원을 선출하기 위한 5·10 총선거가 예정되어 있었는데, 남로당의 지령에 의해 이를 저지하려는 소위 2·7 사태가 일어났다. 그 와중에 민영은 당원동지 두 명과 함께 대동청년단 面단장을 살해하고 피신 중 체포되어 김천형무소에서 복역 중이라는 소식만 듣고 있었는데, 뜻밖에 원산에서 다시 만나게 되었다. 그가 어떻게 살아서 여기까지 왔는지 궁금하다.

10월24일, 맑음.

중형 스리쿼터에 민영을 태우고 갈마반도로 향했다. 이곳 명사십리는 그와 내가 어울려 놀던 고향(포항) 형산강 하구 송정리와 빼닮은 곳이다.

―老스승에게서 君子道(군자도)를 배운 네가 살인을 했다는 소식을 듣고 나는 몹시 놀랐었다.

『내가 변한 것은 중학교 시절부터였다. 좌익서클에 가입하여 선배들이 권하는 좌익서적을 탐독했다. 마르크스, 엥겔스, 레닌의 저서들은 나에게 계시와 지적 환희를 주었다. 나는 까다로운 심사과정을 거쳐 남로당 당원이 되었다.

어느 날 黨조직으로부터 나와 李, 金 셋에게 「대동청년단 대송면 단장을 제거하라」는 지령이 떨어졌다. 우리는 黨命을 수행하기 위해 남성동에 있는 단장 집의 담을 넘었다. 나는 마당에서 망을 보고 둘은 내실에 침입하여 일을 저질렀다. 셋이 함께 도주하여 송정동의 가톨릭수녀원 천장 속에 숨어 있다가 경찰에 체포되었다. 나는 징역 8년을 선고받고 김천형무소에서 복역 중 6·25 전쟁을 맞았다』

2·7 투쟁은 4·3 제주도 폭동으로 어어졌고, 5월14일 북한은 남한으로의 송전을 중단했다. 그리고 10월19일 국군 제14연대에 의한 여수·순천반란이 일어났다.

―조직의 규칙이 뭐기에 살인명령을 무조건 받는단 말인가.

『나는 이미 자연인이 아니라 공산당원이 되어 있었다. 당 이외의 세계는 일단 파괴해 놓고 프롤레타리아가 권력을 잡은 다음에 다시 건설하면 된다는 신념을 가졌었다』

―현실에 절망한 나머지 그 대안으로 공산주의를 선택한 것이 과연 옳았냐? 북녘에 머무는 동안 너와 내가 함께 인민공화국의 實相에서 그 해답을 찾아보기로 하자. 그건 그렇고 네가 어떻게 형무소를 탈출하여 의무병으로 제3야전병원에서 복무할 수 있었는가.

『7월 중순경 어느 날 밤이었다. 간수들의 지시로 수십 명의 좌익수들이 화물차에 짐짝처럼 실려갔다. 어느 산기슭에 파놓은 구덩이 언저리에 세워졌는데, 갑자기 총소리가 났다. 모두 쓰러졌다. 얼마가 지났는지 의식이 돌아오더군. 나는 다행인지 불행인지 총을 맞지 않았다. 죄수복에다 까까머리로 세상에 나가면 대번에 붙들릴 것이라는 생각이 들어 민간인(보도연맹원으로 추정됨) 시체로부터 진흙이 묻은 바지와 남방셔츠를 벗겨 갈아입었다. 그리고 피란민들로 북적거리는 김천역에서 기차를 타고 대구로 내려왔다』

―그런데 어떻게 입대하게 되었나.

『8월 중순, 여인숙 등지를 전전하다가 징병기피자 단속에 걸려 장정대기소에 수용되었다. 그러던 어느 날 야전의무단의 징모관이 왔다. 영어시험과 신체검사에서 합격하여 8월27일 영천 의무단 본부에 도착했다』

(둘은 교육대의 동기생이었다. 박남식은 1중대, 주민영은 2중대에서 교육을 받았기 때문에 교육대에서 서로 만나지 못했던 것이다)

―등의 상처가 심한데….

『제3야전병원은 강원도 평강읍 결핵요양원 건물에 들어 있었는데, 10월22일 새벽 연대 규모 인민군 패잔병의 기습을 받았지. 포로가 되어 4열횡대로 정렬하고 있는 우리 앞에 군관 하나가 나서더니만 「우리 인민군은 겨울철을 앞두고 피복이 필요하다. 동무들이 입고 있는 군복을 모두 벗어 놓아라!」고 하는 거야.

맨발에 팬티만 걸치고 있는 우리들을 향해 군관은 「여러분 중에 남로당에서 활동한 동지는 앞으로 나오라」고 하는 거야. 나는 그때 「혁명대열에 가담할 수 있는 좋은 기회」로 생각하며 앞으로 나갔지. 부화뇌동해서 나선 사람들도 있었는데, 그 군관은 「너희들은 적이 되어 전선에 나타났으므로 이제는 배신자」라고 맹렬하게 성토하더군.

그는 「총알이 아깝다」며 刺殺(척살)하라고 명령해. 어딘가 골짜기로 끌려가서 총검으로 등허리를 찔렸는데, 어찌 된 판인지 이번에도 죽지 않았어. 심한 아픔을 느끼며 까무러졌거든. 얼마나 지났는지, 시체들 가운데서 세 사람만 깨어나더군』

10월26일, 맑음.

오늘 새벽 함흥교화소 우물에서 건져낸 시체들 가운데 원장(함흥 출신) 형님의 시신이 발견되었다고 한다. 나는 병실에 들러 민영을 데리고 교화소로 갔다. 마당에는 세 곳의 우물에서 건져낸 수백 구의 시체들이 널려 있었다. 통곡하는 유가족들의 모습이 너무나 애처로워 견딜 수 없었다. 민영의 눈에도 이슬이 맺혔다.

10월27일, 맑음.

(군수)과장은 나에게 새로운 임무를 맡겼다. 『반쯤 침몰한 어선을 인양하여 병원선으로 수리 중인데, 서호진(함흥의 외항)에 가서 10월30일까지 완공하도록 감독하라』는 명령이었다. 나는 서호진으로 차를 몰았다. 목조선박의 船體를 흰 페인트로 칠하고 붉은색으로 적십자 마크를 그리게 했다. 내가 기관실로 내려가 물에 젖은 발전기를 분해 수리하고 축전기와 전기시설을 점검하는데, 곁에서 金선장이 신기한 표정으로 지켜보았다.

저녁에 선장이 상견례를 겸하여 술집에서 주연을 베풀었다. 선장에게 미리 부탁한 이 지방 공장노동자 세 명이 합석했다. 질 나쁜 카바이드 술이었으나 안주는 해산물로 푸짐했다. 나와 민영이 옆에는 예쁜 아가씨 두 명이 앉았다.

―사회주의 북조선에도 접대부가 있습니까.

『여기선 「연락원」이라 부릅니다. 연락원은 술 마시는 손님의 신분과 언동을 일일이 당국에 보고해야 하니까 사실은 밀고자인 셈입니다』

―북조선은 노동자·농민의 나라라고 선전해 왔습니다. 나라의 주인인 노동자에 대한 처우는 어떠했습니까.

『노동법에는 「하루 8시간 노동」으로 되어 있지만, 매일 12시간씩 일하지 않으면 안 되었습니다』

―마르크스는 「자본론」에서 잉여노동에서 생산되는 재화는 노동자의 몫이라고 했는데, 4시간 초과근로에 대한 잔업수당 같은 건 없습니까(주민영의 질문).

『우린 그런 말의 의미를 모릅니다』

―그래도 노동자들이 열심히 일합니까.

『기업소(공장)의 통제구조가 관리계통과 黨세포조직으로 2원화되어 있는 만큼 怠業(태업) 등의 집단행동은 불가능하지만, 개인적으로 요령껏 게으름을 피우지요』

우리는 밤이 깊도록 술잔을 돌리고 노래를 부르면서 그동안 쌓인 회포를 풀고 헤어졌다. 민영과 함께 부두의 넓은 길을 거닐었는데, 그는 이렇게 중얼거렸다.

『잉여가치설과 유물사관은 마르크스가 이룩한 두 가지 큰 발견이며, 이로 말미암아 「사회주의는 과학화되었다」는 말을 귀가 아프게 들어왔는데, 북한에서는 모든 것이 거꾸로 가고 있다』

10월29일, 맑음.

주번사관이 전황을 알려 주었다.

『수도사단 제1기갑연대가 성진市에 돌입했고, 백골부대(제18연대)는 적 2개 연대를 격파하고 부전호까지 육박했다. 우리 병원도 군단사령부와 위치를 같이하는 정상상태로 돌아왔다』

나는 환자 후송차량에 편승하여 서호진으로 달렸다. 선창에는 어제의 어선이 병원선으로 탈바꿈하여 산뜻한 모습으로 정박해 있었다.


첫사랑 수련과의 만남

10월30일, 맑음.

오후에 모처럼 여가를 얻어 좁은 마당 구석에서 세탁을 시작했다. 대야에 작업복과 속옷을 담궈 놓고 치대는데, 중년부인이 비누를 갖고 나와 익숙한 솜씨로 거들었다.

내가 취사반에서 얻어온 쌀과 쇠고기로 보답했더니 할머니가 저녁식사에 초대했다. 빨래를 거들어준 부인의 딸 「수련」도 합석했다. 수련은 매력 있는 미인이었다. 생애 처음으로 연정을 느꼈다. 모녀를 배웅할 때 할머니는 진지하게 『전쟁이 끝나면 수련이와 백년해로하라』고 말했다.

11월1일, 맑음.

오늘부로 우리 병원은 제1군단 예하부대로 편입되었다. 김백일 군단장 각하가 여러 참모를 대동하고 병원을 방문하였으므로 全부대원이 정원에 도열하여 환영했다. 참모들 가운데 이종형인 최문기 중령이 보였다. 지프 운전병에게 물었더니 군단 법무부장이라고 한다. 형은 만주에서 살다가 광복 이듬해 서울로 돌아와 변호사 개업을 했었다.

11월4일, 흐림.

일조점호를 마치고 돌아오니 과장이 지시를 내렸다.

『우리 병원도 내일 아침에 新浦로 이동한다』

11월5일, 흐림.

이른 아침부터 부대이동을 지켜보는 수련 모녀의 모습이 애잔하다. 어젯밤에 만나지 못한 까닭을 설명하고 사과했다. 수련에게 내가 쓰던 만년필을 선물하고 재회를 약속했다.

11월6일, 맑음.

병원선은 동북 방향으로 꺾어 신포항에 정박했다. 신포엔 3사단 23연대가 주둔하고 있는데, 곧 北進할 예정이라고 한다.

11월7일, 맑음.

저녁에 민영이가 달려와 소원대로 제1야전병원 근무의 발령을 받았다고 알렸다.

11월10일, 맑은 후 흐림.

일조점호에 나가지 않고 선실에서 도쿄 발 라디오 뉴스를 들었다. 중공군이 개입하고 유엔 공군기 600여 대가 출동하여 신의주와 압록강 철교를 폭파했다고 한다.

11월12일, 첫눈.

『야아, 눈이다!』 선원들이 떠드는 소리에 일어나 갑판으로 나왔다. 온 천지에 솜 같은 눈이 펑펑 쏟아지고 있었다.

11월21일, 맑은 후 흐림.

병실에서 근무하게 된 민영이를 만나러 갔다. 『동상환자가 많아 진료부서에 비상이 걸렸다』며 걱정했다.

11월25일, 맑은 후 흐림.

오후에 군단사령부에 간 김에 법무부로 찾아가 형님을 만났다. 형님은 『요즘 戰局이 심상찮다. 금명간에 중공군의 병력규모와 전투 능력이 드러날 것으로 보인다』고 말했다.

11월26일, 흐린 후 눈.

육로이동은 한 달 만에 처음이었다. 金상사 인솔하에 아홉 명의 선발대는 GMC를 타고 북행길에 올랐다. 목적지인 朱乙에 도착하니 민간인은 드문데, 수도사단 지원부대들로 만원을 이루고 있었다.


中共軍 개입으로 후퇴

11월30일, 흐림.

아침을 먹고 편을 갈라 눈싸움을 벌이고 있는데, 수도사단 작전부 전령이 한 통의 통신문을 전달하고 돌아갔다. 『지금 즉시 주을을 출발하여 원대복귀하라!』는 명령이었다. 중공군의 개입으로 전황이 급변하고 있음을 직감했다.

12월1일, 맑음.

오전 9시 병원본부로 올라갔다. 원장님은 부대원 전원을 집합시켜 놓고 다음과 같이 말했다.

『중공군 대부대가 침입함으로써 서부전선이 무너졌다. 분하지만 후퇴명령에 따른다. 오늘밤 열차편으로 출발하니 이동준비에 만전을 다하라!』


『인간의 本能과 권력의 屬性 때문에 공산주의는 실패할 수밖에 없다』

일기에는 이후 興南철수 때의 참상, 휴전 후 지리산 게릴라 토벌부대를 지원하는 야전병원에서 근무 중 자신의 피를 빨치산 거물 曺秉夏(조병하)에게 輸血(수혈)해 주었던 일 등 숱한 증언이 기록되어 있지만, 紙面 관계상 생략한다(박남식씨는 자신의 체험일기를 단행본으로 출간할 예정이다).

―일기를 보면 朴선생께서는 북진 중에도 병영생활을 했다기보다 民泊(민박)만 하셨더군요.

『제가 야전병원의 軍需係(군수계)인데 북진 중 군수과나 창고가 야전병원 인근 民家에 설치되었기 때문에 당시 병사로선 흔치않은 행동의 자유를 누렸지요. 저는 만 4년 동안 전선을 누비긴 했지만 총 한 방 쏘아볼 기회가 없었습니다』

―북한 지역의 교사·목사·기술인·농민·노동자, 심지어 술집 여자종업원 등 다양한 계층 사람들과 만나 끊임없이 대화를 하셨더군요.

『저는 사회주의를 겪은 사람들이 사회주의를 과연 어떻게 생각하는지 궁금해서 내 마음대로 돌아다니며 열심히 취재했던 것입니다. 그 결과, 사회주의가 얼마나 허망한 것인가를 깨닫고 스스로 사상을 정리하게 되었습니다』

―사회주의는 왜 허망한 것이라고 판단하셨습니까.

『인간의 본능과 권력의 속성 때문에 사회주의는 안 되는 겁니다. 이익을 추구하는 인간의 본능은 사회주의식 교양 세례로는 결코 억제될 수 없고, 1인독재는 우상화를 불러 반드시 부패하게 마련입니다』

―부패라면 자본주의의 부산물 정도로 여기는 것이 당시의 상식 아니었습니까.

『당 간부와 군 간부 등의 새로운 계급이 등장하여 권력을 남용하는 북한은 그때 벌써 모든 것이 뇌물로 움직이는 부패왕국이었습니다. 권력 남용에 의한 부패와 착취가 극심하게 된 요인은 그것에 대한 야당과 언론의 비판 기능, 즉 체제적 견제장치가 전혀 없기 때문이었습니다. 공산주의 이데올로기는 권력 유지를 위한 방패막이로 악용될 뿐, 현실에선 아무 소용없는 겉치레에 불과했습니다』

―평등을 추구한다는 점에서 공산주의의 理想(이상)과 기독교 정신은 비슷한 면도 있다고 하던데, 왜 북한에선 기독교를 그렇게 증오합디까.

『예수 그리스도는 대중을 위해 자신을 희생했지만, 북한에선 한 사람을 위해 모든 인민을 희생시켜 왔습니다. 金日成이나 金正日은 도덕적으로 열등한 만큼 기독교에 대해 질투심·적대감을 가질 수밖에 없는 겁니다』

―주민영은 사회주의자의 迷夢(미몽)에서 깨어났습니까(박남식의 竹馬故友인 주민영은 남로당원에 입당, 우익인사를 살해한 범행에 가담하여 복역 중 6·25의 혼란 중에 탈옥, 배회하다 變姓名하여 국군에 입대, 醫務兵으로 복무했다).

『민영이는 「총기 오발사고」로 입원 중에 국산 혈장(plasma) 주사를 맞고 부작용을 일으켜 죽었습니다. 집도의의 소견은 自害(자해)일 가능성이 높다는 거예요. 變姓名으로 복무하던 민영이는 本名으로 사회에 나가려 해도 갈 곳이 없었습니다. 철없던 10代 후반에 공산주의의 理想사회를 동경하다가 드디어 그 實相에 짙은 배신감을 느낀데다 제대 후 無籍者(무적자)가 되고, 피해자와 그 가족에게 결코 용서받을 수 없는 범행을 저질렀다는 데 절망했던 것 같습니다. 1954년 3월26일, 그는 며칠을 끙끙 앓다가 눈에 충혈이 심해지고 점점 의식을 잃어가더니 더듬더듬 「엄마… 용서」 하더니 끝내 숨을 거두었습니다』

―함흥에서 다시 북진하면서 헤어진 선생님의 첫사랑 수련씨와는 재회하셨습니까.

『흥남 철수 때 그녀의 가족을 모두 남하시키려고 그녀의 집으로 찾아갔으나 어디로 피란을 갔는지 그 집엔 아무도 없었어요. 마누라 들으면 큰일 날 소린데, 지금도 어쩌다 한 번씩 꿈 속에서 그녀와 재회하거든요…』



[除隊 후 蔚山공업도시 건설에 참여]

서른한 살에 强電社 창업

박남식 일등중사는 1954년 9월1일 스물일곱의 나이로 제대했다. 사회로 나온 그는 입대 전에 동업했던 백상렬씨의 요청으로 三相電機공업사에 복귀했다. 이듬해 5월엔 당시 스물두 살의 처녀 洪枝順(홍지순)씨와 결혼했다.

―부인은 어떻게 만나셨습니까.

『평소 사업상 알고 지내던 분이 자기의 친척동생이라며 중매를 섰으니 요즘 젊은이들의 로맨스 같은 건 없었어요. 처는 원래 일본 나고야에서 태어나 자랐는데, 장인이 그곳에서 미군기의 공습으로 별세한 뒤 처가가 고향 鎭海로 귀향했다가 다시 울산 삼산동으로 이사해 살고 있었습니다』

1958년 3월, 그는 백상렬씨와의 동업관계를 청산하고 「强電社(강전사)」를 따로 창업했다. 强電社는 전기기계 제작·수리·배전공사 전문업체였다. 상공부 장관으로부터 한전(당시엔 南電) 지정공사업체의 면허를 받았으며, (주)삼양사 울산제당공장 협약업체로 지정되었다.

―서른한 살에 창업하셨는데, 그때 밑천은 좀 있으셨습니까.

『내 기술 하나로 먹고 사는 구멍가게였지요』

마침 곁에 있던 부인이 끼어들어 말했다.

『저이(朴옹)가 자금에 쪼들린다고 해서 결혼반지까지 팔아 보태 주었어요. 단칸 셋방에서 신혼살림을 차렸는데, 너무 좁아서 저이는요, 발을 뻗지 못하고 무릎을 굽힌 채 잠을 잤어요』

―그 시절은 다들 어려울 때 아닙니까. 사업은 잘 돌아갑디까.

『그 시절, 사람들은 자기비하에 젖어 활기를 잃고 침체상태에 빠져 있었어요. 自由黨 정권의 무능과 부패, 폭력배의 횡포, 상이군경의 불만 폭발 등으로 사회 질서가 붕괴된데다 인플레, 밀수, 가짜상품 범람으로 경제가 악화일로였거든요. 그래도 强電社는 당시엔 흔치 않게 기술력을 인정받았던 덕택에 일거리가 꾸준해 그런대로 버틸 수 있었어요』

―4·19 학생의거(1960년) 이후 들어선 民主黨 정부 때는 어떠했습니까.

『데모로 날이 새고 저물던 시기 아닙니까. 가난과 무지의 악순환이 지속되는 사회에선 민주주의가 뿌리 내릴 수 없다는 점을 뼈저리게 느꼈습니다』


『新羅 천년의 영광을 재현하기 위해 삽을 들었다』

―5·16 군사혁명(1961년) 이후 朴正熙 정권 때는 울산에 국내 최대 규모의 공업단지가 건설되었습니다. 울산을 사업 근거지로 삼았던 朴선생으로선 찬스를 맞았던 것 아닙니까.

『나는 1962년 2월3일 울산공업센터 기공식에서 들은 朴正熙 최고회의 의장의 치사를 아직도 잊지 못합니다. 朴의장은 「新羅 천년의 영광을 再現하기 위해 삽을 들었다」면서 「울산공업도시의 건설이야말로 혁명정부의 총력을 다할 상징적 雄圖(웅도)이며, 그 成敗는 민족 貧富(빈부)의 판가름이 될 것」이라고 연설했습니다. 그 연설에 깊은 감명을 받고, 나는 나라와 나 자신을 위해 뼈빠지게 일하겠다는 결심을 했습니다』

―그런데 朴正熙는 왜 하필 울산에다 대규모 공업시설을 건설했다고 생각하십니까.

『우리가 바다로 나가야 먹고 살겠는데, 울산이 세계의 해양국 미국과 일본과 가까운데다 간만의 차가 심하지 않는 등 良港의 조건을 갖추고 있지 않습니까. 더욱이 일제 말기, 이미 오버로드에 걸린 부산항을 보조하기 위해 울산항을 제2의 항만으로서 개발에 착수했지요. 1·2부두에 철도시설 같은 것은 이미 해놓았던 상태였거든요』

정부는 건설부 직할의 울산특별건설국을 설치, 도로·항만·공업용수 등 인프라 건설에 박차를 가했다. 정부는 파격적인 조건을 제시하여 정유공장·제3비료 등 외자기업을 유치했고, 이어 제5비료(삼성의 한국비료)·현대조선·현대자동차·석유화학단지 등을 건설했다.

『그때 우리 정부가 무슨 돈이 있었습니까. 외자를 도입하기 위해 파격적인 인센티브를 줄 수밖에 없었던 어려운 시절이었지요. 예컨대 생산된 석유나 비료에 대해 1개월 이상 在庫(재고)로 두지 않겠다, 정부가 원리금 상환을 보장한다는 등의 유인책을 쓸 수밖에 없었거든요』

―울산 공업단지야말로 공업한국의 토대가 되었습니다.

『南·北 어느 쪽이 국민을 인간답게 살게 하느냐는 민족적 숙제를 놓고 朴正熙와 金日成이 역사적 경쟁을 벌였던 것입니다. 저는 이런 시대적 배경 속에서 나름으로는 열심히 일했습니다. 전기 기계·배전설비 공사 등의 일감이 폭주했어요』

그의 실적은 참으로 화려하다. 强電社는 울산정유공장·동양나일론·동양폴리에스터·한국석유·동양나일론 언양공장·중앙시장·방어진어협·방어진철공(주) 울산시청사 내외선 공사 등을 도맡았다. 한전 발주의 승압공사도 수주하여 울산시 무거동-범서면-언양읍-삼남면-양산군 상동면의 전압을 6.6kv에서 22kv로 끌어올렸다.

『제가 시공한 동양폴리에스터의 시설 하나만 해도 4만kw 규모입니다. 대한민국, 정말로 천지개벽을 이룩한 나라입니다. 1948년 5·10 총선거를 앞두고 북한은 남한에 보내 오던 전기를 갑자기 끊어 버렸습니다. 그때 (남한에 대한) 북한의 送電量이 얼만지 아십니까. 겨우 6만kw였습니다. 북한의 斷電(단전)으로 남한에선 공장들이 제대로 가동하지 못했고, 밤엔 정전으로 암흑천지가 되었어요』


북한은 남한의 高品質 전기를 받을 능력 없어

―그러던 북한이 이제 남한에 전기를 달라고 하는 逆轉(역전)의 시대가 되지 않았습니까. 「사람 팔자 시간문제」라더니 나라의 형편도 바로 그러한 것 같습니다.

『1945년 8·15 당시 북한지역에서는 압록강의 수풍발전소를 비롯한 장전강발전소·부전강발전소 등에서 모두 172만kw의 전력을 생산했습니다. 지금은 北韓의 전력생산이 오히려 줄어들어 常時 전력량은 150만kw 이하로 추정되고 있습니다. 당시 南韓의 전력 생산량은 고작 19만kw였어요. 지금 대한민국은 어떻습니까. 2002년 말 현재 총 발전설비량은 5200만kw이고 絶頂負荷(peak load)는 4500만kw입니다』

―북한에 전기를 보낸다면 기술적으론 문제가 없습니까.

『있지요. 세계 제1의 高품질을 자랑하는 남한의 전기를 준다 해도 북한의 시설이 최악의 상태여서 받을 수가 없어요. 잘못하면 우리 송·배전 시설까지 망가져요. 우리가 전기를 꼭 보내려면 북한의 송·배전 시설을 우리가 모두 새로 건설해 주어야 합니다』

―대한민국의 전기가 세계 제1의 高품질이라고 하셨는데, 왜 그렇습니까.

『가정용 전기의 경우 미국에서는 120V, 일본에서는 100V, 대한민국에서는 200V를 사용합니다. 전력은 전압 곱하기(×) 전류 아닙니까. 전압이 한국보다 절반 수준인 미국이나 일본에서 우리처럼 양질의 전기를 보내려면 전선의 굵기를 지금보다 두 배로 늘려야 가능한 것입니다. 그렇다고 家電제품 모두가 이미 100∼120V짜리로 보급된 일본이나 미국에서 어느 날 갑자기 200V짜리 가전제품으로 바꾸라고 할 수 있겠습니까. 우리나라 가정에서 200V의 전기를 쓴다는 것, 이거 대단한 자랑이에요. 한국의 정보화시대가 세계 첨단을 걷고 있는 토대는 양질의 전기입니다. 우리나라에서는 인터넷 접속이 초고속 아닙니까. 그래서 세계의 일류기업들이 새로 개발한 첨단제품을 가지고 한국에 들어와 시험도 하고, 또 우리 기업들과 합작하려는 거예요』

―우리나라가 인프라 후발국으로서의 메리트를 누리게 된 거군요.

『우리의 일반가정에서 家電제품을 몇 개 가지고 있지 않았던 1990년대 중반에 좀 무리해서 200V로 승압한 것은 굉장히 앞서간 정책이었어요』


기업가 朴南植의 原則

―朴선생의 사업은 번창했겠네요.

『1970년엔 울산토건(전기 포함 종합건설)을 창립했고, 1972년에는 옥교동 사옥(지하 1층, 지상 4층)을 신축했습니다. 선박용 기계를 제작하는 삼양기계공업도 창업해서 운영해 보았습니다』

―돈은 얼마나 버셨습니까.

『못 벌었다고 할 수는 없지만, 가업가로 성공하지는 못했습니다. 저는 첫째 사채를 쓰더라도 노임지불을 미루지 않는다, 둘째 내가 맡은 공사엔 不實이 없다는 원칙을 가지고 일을 했습니다. 수지균형을 위해서는 1인3역을 할 수밖에 없더군요. 전기설계·현장감독·복식부기 회계를 스스로 감당하여 인건비를 절약했던 겁니다. 그러니 별나게 바쁘게 일했지요』

이때 부인 洪씨가 한마디 했다.

『저이(朴옹)가 사업을 할 때 저는 식모살이를 했습니다. 회사 직원 7∼8명을 항상 집에 데리고 있었는데, 제가 처녀 하나 데리고 밥 짓고 빨래 하는 뒤치다꺼리를 다 했어요. 어느 날, 몸뻬 차림으로 부엌에서 한참 바쁘게 일하고 있던 저더러 저이가 갑자기 「입은 그대로 빨리 사무실로 올라오라」는 전갈이 와서 얼른 갔더니… 부끄러워서 혼났어요』

다시 朴옹이 말했다.

『그때 내가 가정형편이 어려운 울산여상 학생 몇 명에게 매년 장학금 5만원씩을 지급했거든요. 그 전달식에 몸뻬 차림의 집사람을 갑자기 불러올린 것은 내가 호사하면서 장학금을 지급하는 것이 아니라는 점을 보여야 장학생들이 분발할 것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이었습니다』

―장학사업 이외에도 교육 관련 활동을 많이 하셨더군요.

『저의 장녀가 울산여고에 재학할 때 육성회장을 3년간(1974∼1977년) 맡는 바람에 울산 교육의 문제점을 알게 되었어요. 울산시가 공업도시로서 급격하게 팽창하는 데 비해 교육 인프라는 크게 뒤처져 있었습니다. 예컨대 당시 유일한 인문여고인 울산여고에 조명시설조차 없었어요.

제가 외선 보강공사로 전압 강하를 해소하고 각 교실과 복도에 형광등을, 교내 통학로와 정문 근처까지 수은등을 가설해 주었어요. 도시규모에 비해 교육의 질적 발전도 뒤따르지 못했습니다. 울산의 인문계 고등학교는 진주·마산의 학교보다 학력이 떨어지는 상황이어서 여러 회사의 40∼50代 임직원들이 울산의 직장에 단신 부임함으로써 가정적·회사적 문제가 적지않게 일어났어요. 울산여고 교장의 경우 부산∼울산 간을 출·퇴근했어요』

―그렇게 먼 거리를 매일 출·퇴근해서는 학교일에 집중하기 어려웠겠군요.

『제가 경남교육감을 찾아가서 울산 교육의 어려움을 설명하고 선처를 부탁했어요. 그랬더니 「다음 인사 때 열성적인 교장을 배치하겠다」고 약속합디다. 새로 오신 교장은 과연 학교 숙직실에서 라면을 끓여 먹고 기거하면서 울산여고를 일류로 만들었습니다』

―鄭周永 회장이 한국사회학교후원회 중앙회장일 때 朴선생은 울산지역사회학교후원회 회장(1976∼1978년)을 맡았습디다. 그때 朴선생께서 울산의 교육실태에 대해 문제를 제기하셨다던데….

『1977년 鄭周永 회장이 현대조선 영빈관에다 주요 기관장과 각 학교 교장들을 초빙하여 울산의 교육문제를 논의했습니다. 나는 그 해결방안으로 고교평준화를 상당기간 계속 유보할 것, 우수한 교장·교사를 배치할 것, 울산공대를 종합대학으로 발전시킬 것 등을 제안했습니다.

특히 울산공대는 鄭周永 회장이 초대 이사장을 맡아 설립되었는데, 곧 李厚洛씨에게 이사장 자리가 넘어가 그 이후 투자 중단으로 학생들의 불만이 표출되고 있다는 사실을 들어 鄭周永씨의 이사장 再취임을 요청했습니다』

―결과는 어찌 되었습니까.

『한 달 후 鄭周永 회장이 「오늘 대통령의 지시에 의해 李厚洛씨한테서 울산공대 이사장직을 인수했다. 학장의 상황설명에 의하면 약 50억∼60억원을 투자해야 한다는데, 그렇게 할 것이다」고 말합디다. 영빈관 회의에 참석했던 정보부 울산분실장의 보고서가 계통을 타고 대통령에게 올라가 그 문제가 그렇게 신속하게 처리될 수 있었다고 합니다. 울산공대는 1980년대 후반에 종합대학교로 승격했고, 울산여고와 학성고교는 지방 명문교로 발전했습니다』

―울산 사람에게 들은 얘기지만, 민방위교육 강사로서 인기를 모으셨습디다.

『내무부 장관이 경남 민방위대원 정신교육 강사(1976∼1978년)로 위촉해서 산업체를 두루 돌아보면서 강단에 서게 되었어요. 제가 6·25 때 북한에서 보고 겪은 일들을 회고하는 식의 강의를 했는데, 의외로 재미있어 하더군요』

―대중을 휘어잡는 솜씨가 대단하셨는데, 혹시 정치해 볼 생각은 없으셨습니까.

『무슨 선거에 출마해 보라는 권유를 받긴 했지만, 정치적 야심 같은 것이 전혀 없어 거절했습니다』


『나처럼 가슴 뜨거우면 기업할 수 없어요』

―64세에 사업에서 은퇴하셨는데, 좀 빨랐던 것 아닙니까.

『기업가는 머리가 차가워야 해요. 나처럼 가슴이 뜨거우면 기업할 수 없어요』

―말씀이 너무 어렵습니다.

『노동자 착취하지 않고 내가 해놓은 일에는 절대로 흠이 있어선 안 된다는 것이 내 원칙이고 내 자존심이었소. 나는 부실공사를 했다는 소리, 단 한 번도 들어본 적 없어요. 업계에서는 날 보고 「면도칼」, 「대쪽」이라고 불렀어요. 그러니 기업가로 성공하지 못하고 돈도 벌 수 없었습니다. 그래서 일찌감치 산골에 들어와 책이나 보고 있는 것 아닙니까』

―이렇게 山水 좋은 곳에 그림 같은 집을 짓고 독서삼매를 누리시니 참으로 대단한 성공 아닙니까.

『가진 것 별로 없어요』

―울산 옥교동에 4층 빌딩이 있다고 하시지 않았습니까.

『건평 200평 짜리입니다. 울산의 상권이 江南으로 옮겨가는 바람에 이제는 원매자도 없어요. 임대료도 지난 10여 년 사이에 세 차례나 내려 이제 한 달 수입이 세금 떼고 나면 300만원도 되지 않습니다. 의과대학 교수로 재직하던 셋째 딸이 최근에 개업을 했는데도 조금도 도와주지 못해서 여간 마음이 쓰이는 것 아닙니다』

朴南植옹 부처는 1남3녀를 두었다. 금년 48세의 장남 철수씨는 부산大 기계설계학과를 졸업하고 대우정밀 근무를 거쳐 스테인리스 표면을 가공처리하는 기업을 경영하다가 최근에 정리하고 다른 사업을 구상하고 있으며, 그 부인 조현희씨는 중학교 교사로 재직하고 있다. 박철수씨에게 전화를 넣어 그가 아버지를 어떻게 생각하는지 물었다.

『아버지는 매우 어려운 시대를 살아오셨지만, 당신의 원칙에 매우 충실하면서도 사회적으로나 가정적으로 할 바를 다 하신 분입니다. 저는 항상 「아버지의 기대에 못 미처 죄송스럽다」는 생각을 가지고 있습니다』

장녀는 수양씨는 영남大 문화인류학과를 나와 현재 학습지 회사 교재 편집인으로 근무하고 있는데, 미혼이다.

2녀 채영씨는 연세大 철학과를 졸업하고 독일 쾰른大 독문학 박사과정을 수료했는데, 현재 변리사로 일하고 있다. 그 夫君은 상명大 교수 정영근 박사(교육철학)다.


朴옹의 아들과 딸들

3녀 지원씨는 가톨릭의대 졸업 후 이 대학에서 심장내과 교수로 재직하다가 현재 부천에서 개업하고 있다. 그 夫君은 인천에 있는 김성태 정형외과의 원장이다.

손자와 손녀는 모두 여섯이다. 본채 거실의 벽면은 온통 자녀들의 가족사진, 손녀가 그린 수채화·유화 등으로 장식되어 있다. 방학 때마다 손자와 손녀들이 이곳에 와서 며칠씩 묵고 간다고 한다.

필자는 당초 朴옹댁에서 1박2일만 신세질 생각이었지만, 대하소설 같은 朴옹의 얘기를 듣다 보니 2박3일 머물면서 모두 여섯 끼의 밥을 얻어 먹었다. 2박3일간 머물며 朴옹과 함께 나들이도 세 번 했다.

첫날엔 저녁에 구만산에 올라가 저수지 주위를 걸었다. 둘째 날엔 담배가 떨어져 필자 혼자서 面소재지인 송백리까지 10리 길을 걸어나가려고 했는데, 마침 朴옹 부부가 『쌀 사러 장에 간다』고 하여 지프로 동행하게 되었다. 朴옹은 단골 행상으로부터 쌀 한 말을 샀고, 부인은 정육점에서 쇠고기 몇 근을 샀으며, 기자는 담배 두 갑을 샀다. 셋째 날에는 朴옹과 함께 천황산 「얼음골」에 올라갔다.

얼음골에 다녀오니 부인은 불고기 요리를 점심으로 대접했다. 떡 벌어진 밥상을 받고 보니 황감했다. 그 새, 온갖 問答을 다했던 老부부와 情이 든 것 같다. 朴옹이 모는 지프를 타고 밀양역에 가서 기차를 타고 上京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