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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 對談-「고려 태조 王建」의 작가 金聲翰옹

정순태   |   2003-05-27 | hit 4410

편집자 注 金聲翰(김성한)翁(옹)은 1980년대 초 「고려 태조 王建(왕건)」을 동아일보에 3년간 연재하고, 이를 다시 全 5권의 장편소설로 묶어 내놓아 일반독자뿐만 아니라 학계에서도 호평을 받은 역사소설의 大家이다. 金옹은 일제 때 東京大 법과에 재학중 학병으로 징집되어 일본군에서 복무했다. 해방 후 귀환하여 대학 강사를 거쳐 언론계에 재직하던 중이던 1960년대에 英國으로 유학하여 맨체스터대학 대학원에서 영국 근대 사회사를 전공하여 M.A 학위를 받았다.

장편소설 「李成桂(이성계)」 「遼河(요하)」 「壬辰倭亂(임진왜란)」, 단편집 「暗夜行(암야행)」 「5분간」 「개구리」, 수상록 「일본 속의 한국」 「길 따라 발 따라」 등을 발표했고, 제1회 東仁문학상, 제5회 자유문학상, 제3회 仁村賞(인촌상)을 수상했다. 동아일보 논설위원, 출판국장, 편집국장, 논설주간을 역임한 언론계 원로이며 현직 藝術院(예술원) 회원이다.

金옹은 10여년 전부터 보라매공원의 숲이 내려다 보이는 서울 동작구 신대방동의 아파트 17층에서 부인과 함께 조촐하게 살고 있다. 팔십하나의 연세지만, 3시간의 인터뷰(2000년 11월29일)에도 비상한 기억력으로 古今의 일들을 종횡무진 말하는 등 정정하다.

요즘은 6년 전에 일본어로 저술하여 일본 光文社(코분샤)에서 출판한 자신의 작품 「秀吉(히데요시)-朝鮮의 亂」 상-하권을 우리말로 다시 번역하는 작업을 진행하고 있다. 이런 金옹을 기자가 찾아간 것은 최근 인기를 모으고 있는 KBS-TV의 史劇(사극) 「태조 王建」이 계기가 되었다. 金옹이야말로 王建이란 영웅에 관한 역사의 누락 부분을 史實과 충돌하지 아니하면서도 가장 재미있게 복원해 낸 최초의 작가이기 때문이다.


『역사소설을 작가의 상상력으로 쓰던 시대는 지나갔다』


―요즘 TV 史劇 「태조 王建」이 시청률 1~2위를 다툴 만큼 온 나라 안의 화제가 되고 있습니다. 두어 주일 전에 제가 어느 부부동반 등산 모임에 나갔더니 역사 인물과 관련한 글을 몇 편 썼다고 해서 그런지, 많은 질문을 받았습니다. 특히 여성들은 왕건의 둘째부인(莊和王后)이 그렇게 兵法에 뛰어난 여자였는지, 弓裔(궁예)가 北原(북원:原州)장군 梁吉(양길)의 딸을 아내로 맞은 사실이 있는지, 朴述熙(박술희:왕건의 副將)가 甄萱(견훤)의 여동생을 그렇게도 애틋하게 연모했는지, 궁예 王의 妃(비)가 처녀시절에 왕건의 첫사랑이었는지, 궁금해서 못 견디겠다는 투로 질문을 제게 쏟아 붓습디다.


또한 남성들은 종간이란 이름의 策士(책사)와 청주 호족 출신의 阿志泰(아지태)가 궁예 王의 신임을 얻기 위해 그렇게 권력암투를 벌였는지, 궁예와 견훤이 과연 황제의 號(호)를 사용했는지 물었습니다. 저 나름으로 대충대충 설명하기는 했습니다만, 별로 정확한 대답은 아니었을 것입니다.

제가 오늘 金선생님을 찾아뵌 것은 王建이란 인물의 인생과 處世學(처세학), 그리고 그의 리더십, 그가 오늘의 우리에게 남긴 교훈 등에 대한 선생님의 高見(고견)도 듣고, 또한 평소 저의 의문도 좀 풀어보려는 것입니다. 우선 TV드라마 중에서 어떤 것이 역사적 사실이고 어떤 것이 픽션입니까.

『鄭위원이 앞에서 지적한 부분은 물론 모두 역사적 사실이 아니거나 확인할 수 없는 일들입니다. 견훤과 궁예가 황제의 칭호는 사용하지 않았습니다. 다만 그들은 스스로를 朕(짐)이라 일컫고, 신하들은 陛下(폐하)라고 불렀습니다. 원래 역사소설이나 역사드라마는 역사라는 밑둥과 줄기에다 가지나 잎을 붙임으로써 생명을 불어넣는 것입니다. 역사적 흐름과 충돌하지 않는 한 작가의 역량에 따라 픽션이 들어갈 여지는 많지요. 우선 史書를 보면 대화라든지, 등장 인물의 표정 같은 것은 잘 기록되어 있지 않아 딱딱하게 마련인데, 소설에선 그런 것들을 보완함으로써 독자들에게 읽을 맛을 주는 겁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역사적 인물의 행위를 터무니없이 픽션화해 놓으면 史實(사실)을 오도할 우려가 있지 않을까요. 예컨대 장화왕후 羅州吳氏(나주오씨)의 행적은 史書에 엄연하게 기록되어 있는데, 이와 전혀 다르게 극화한다면 재미만을 위해 시청자들의 역사인식을 그르치게 만들어버릴 우려가 있는 것입니다. 이런 경향은 시청률을 의식해서인지 모르지만, 요즘 방영되고 있는 TV드라마 「태조 王建」에서 좀 심한 편입니다.

『제가 일본 작가들과 좌담을 하다가 이런 말을 들은 적이 있습니다. 「요시카와 에이지(吉川英治) 선생이 역사소설을 집필할 당시에는 서재에 펜과 원고지뿐이었지만, 시바 료타로(司馬遼太郞:1998년 作故) 선생은 트럭 하나 분의 자료를 가지고 글을 썼다. 일본의 역사는 시바 선생이 가르친다」. 무슨 말이냐 하면 옛날에는 작가의 상상력으로 역사소설을 썼지만, 오늘날에는 史料(사료)에 바탕한 팩트(사실)를 그만큼 중시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역사소설에서는 특히 디테일(세부묘사)이 매우 중요하다는 말씀이시지요.

『그렇습니다. 이런 일도 있었습니다. 일본 에도(江戶)시대 때는 게이샤(한국의 기생)집에 손님이 놀러가 방에 들면 반드시 촛불부터 밝혔다고 합니다. 어느 일본 작가는 여러 기록을 섭렵하여 기어이 그 이유를 밝혀냈습디다. 그것은 멋이나 운치를 위해서가 아니라 당시에는 초 한 자루가 탔는지, 두 자루가 탔는지에 따라 花代(화대)가 계산되었다는 겁니다. 이런 사실을 통해 독자는 그 시절의 생활이나 풍속을 이해할 수 있는 것입니다』

―그런 면에서 일본 작가들은 상당히 철저하지요. 이런 사례도 있습니다. 일본의 戰國時代를 거의 평정한 오다 노부나가(織田信長)를 기습하여 자결케 한 아케치 미쓰히데(明智光秀)라는 인물이 있었지요. 한 일본 작가는 아케치를 토벌하러 갔던 도요토미 히데요시(豊臣秀吉) 軍의 행군속도가 史書에 너무 빠르게 기록된 데 의문을 품었습니다. 그 작가는 실제로 육상선수들을 동원하여 당시의 行軍路(행군로)를 그대로 답사하도록 했습니다.

그 결과를 밝힌 글을 제가 수년 전에 읽은 적이 있었습니다. 보병이 그만한 무장과 길양식을 휴대하고 그런 거리를 5~6일 만에 주파하기가 불가능하지만, 군량을 휴대하지 않을 경우에는 가능하다는 결론을 얻었답디다. 그러니까 노회한 히데요시는 자신의 부대를 기동시키기 전에 미리 행군로 연도의 부락에 흥정 잘하는 사람을 급파하여 돈을 주고 후속할 부대의 식사를 해결해 주도록 예약을 했다는 것입니다. 그런 연후에 경무장을 한 보병들을 주야로 달리도록 하여 방심하고 있던 아케치의 虛(허)를 찔러 패망시키고 히데요시가 일본 천하를 차지했다는 겁니다.

『그건 세계적 경향입니다. 우리 작가들도 역사의 누락 부분을 복원해야 할 경우 사전 조사나 연구가 없다면 앞으로 독자들을 만족시키기 어려울 것입니다』


漢高祖와 宋太祖를 웃도는 德의 인물


―王建은 어떤 품성의 사람이라고 생각하십니까. 왜 하필이면 후삼국의 혼란을 평정한 인물이 궁예나 견훤이 아니고 王建이었겠습니까.

『천재성에 있어서 王建은 궁예에 미치지 못했습니다. 궁예는 知的 능력이 발군이었던 당대의 經世家(경세가)였습니다. 또 야전사령관으로서의 王建은 견훤에 비교할 바가 못되었습니다. 특히 견훤은 騎兵戰(기병전)에 관한 한 당대의 누구도 대적하기 어려운 勇將(용장)이었습니다. 그러나 王建은 궁예와 견훤에게 부족한 德(덕)이 있었던 인물입니다』

―흔히 德將(덕장)을 智將(지장), 勇將(용장)의 윗길에 두고 있습니다만, 도대체 德이란 무엇입니까.

『꼭 찍어서 말하라면 매우 어렵지 않겠습니까. 나도 德이 무엇인지 몇 권의 사전과 古書를 뒤적이며 곰곰 생각해 본 적이 있는데, 대충 다음과 같이 설명할 수 있으리라고 봅니다. 즉, 德이란 선천적으로 타고날 수도 있지만, 수양을 쌓음으로써 체득할 수 있는 정신적 품격입니다.

이런 품격을 갖춘 사람은 항상 자기성찰을 게을리하지 않고, 남의 어려운 사정에 동정하고, 남의 의견을 존중합니다. 따라서 주위 사람들을 感化(감화)할 수 있는 것입니다. 한국 역사에 등장하는 숱한 인물들 가운데 고려 태조 王建만한 德人은 찾기 어렵습니다. 왕건은 중국사에서 덕망 있는 창업군주로 손꼽는 漢高祖(한고조) 劉邦(유방)이나 宋太祖(송태조) 趙匡胤(조광윤)보다 월등한 인물이었습니다』

―먹지 않으면 먹히는 亂世에 德을 내세워 주먹을 압도한 王建의 處世學이 어떻게 통할 수 있었는지 궁금하군요.

『去頭截尾(거두절미)하고 단순하게 생각하면 德이란 남에게 호감을 살 수 있고, 남에게 믿음을 줄 수 있는 능력이라고 하면 그다지 틀리지 않을 겁니다. 德이 있으면 본인이 움직이지 않아도 사람들이 따라오게 되어 있습니다. 王建은 천성으로 이같은 장점을 갖추고 있는 데다 민심을 잡기 위해 능동적으로 움직인 인물이었습니다. 이런 사람은 출세하게 마련입니다』


80여 명의 將軍들이 할거, 피바다를 이루던 시대


王建은 서기 877년 1월 바다상인 王隆(왕륭)과 부인 韓씨 사이에 맏아들로 태어났다. 결혼한 지 얼마 되지 않은 王隆에게 풍수지리의 대가 道詵(도선)이 찾아와 三韓을 再통합할 영웅이 탄생할 집터를 가르쳐 주었다는 등의 설화는 王建의 탄생을 미화하기 위한 後人의 픽션일 가능성이 높다. 王建은 3代祖 이상 先代의 世系를 추적할 수 없는 평민 출신이었다. 다만 부친 王隆은 예성강 하구항을 근거지로 삼아 해상무역에 종사하여 巨萬의 富를 축적함으로써 신흥 豪族(호족)의 반열에 올라 있었다.

―왕건의 출생지 永安村(영안촌)의 위치에 대해 견해가 좀 엇갈리고 있습니다.

『지도를 보면 開城(개성) 서쪽, 예성강이 서해로 흘러 들어가는 지점에 포구 마을이 하나 있었습니다. 지금의 開豊邑(개풍읍) 昌陵洞, 바로 그곳의 옛 이름이 永安村입니다』

―閔漬(민지:고려 肅宗代의 문신 학자)의 「本國編年綱目(본국편년강목)」에 따르면 王建 나이 17세 때 도선 대사가 또다시 송악산을 찾아와 王建에게 군대를 지휘하고 陣(진) 치는 법, 유리한 지형과 적당한 시기를 택하는 법, 산천의 형세를 보고 이치를 헤아리는 법 등을 가르쳐 준 것으로 되어 있습니다. 도선이 당대의 高僧(고승)이었던 만큼 도선의 위신을 이용하여 王建을 올리려 한 것 아니겠습니까.

『王建의 소년 시절을 기록한 사료는 매우 빈약합니다. 나는 이렇게 짐작합니다. 그도 마을의 다른 아이들과 마찬가지로 부친을 따라 바다에 나가 부친의 일을 거드는 소년이었을 것입니다. 평화시대였다면 王建도 다른 사람이 하는 대로 家業(가업)을 이어 뱃사람으로 일생을 마쳤겠지요』

도선과 얽힌 기록 이외에 왕건의 어린 시절에 관한 얘기는 더 이상 찾아볼 수 없다. 다만 高麗史(고려사) 太祖 條(조)에 그에 대해 다음과 같이 기록하고 있다.

<태조는 어려서부터 총명하여 지혜가 있고, 용의 얼굴에 이마의 뼈는 해와 같이 둥글며, 턱은 모나고 안면은 널찍하였으며, 기상이 탁월하고 음성이 웅장하여 세상을 건질 만한 도량이 있었다>

王建의 모습이 이러하다면 멜로드라마나 청춘물에 어울리는 탤런트 최수종으로서는 뛰어난 연기력과 노력에도 불구하고 왕건 役이 아무래도 무리인 것 같다.

―여기서 王建이 소년 시절에 마주친 시대적 환경을 짚어보아야 할 것 같군요.

『그의 소년 시절은 천년왕국 新羅의 말기증세가 곪아터지던 시대였습니다. 80여명에 달하는 豪族(호족)들이 들고 일어나 저마다 將軍, 城主라고 칭하면서 군사를 양성하고 서로 강토를 뺏고 뺏기는 전쟁을 일삼았습니다. 살생이 멎을 날이 없어 피의 바다를 이룬 겁니다. 임명장을 받은 일이 없는데도 이들은 세력범위 내에 사는 백성들을 높은 세금으로 쥐어짜는 등 中世 유럽의 봉건영주처럼 행세했습니다. 그런데도 신라왕은 이들을 평정할 능력이 없었고, 그의 힘이 미치는 범위는 수도인 경주 일원에 불과했습니다』

―豪族이라면 뭔가 그럴 듯하지만 실은 그다지 거룩한 존재는 아니더군요. 그들 중에는 지방관료나 토호 출신도 없지 않았지만, 힘깨나 쓰던 깡패나 일자무식의 群盜(군도) 출신도 수두룩합니다. 한반도에 百家爭鳴(백가쟁명), 春秋戰國(춘추전국)의 시대가 펼쳐진 셈이군요.

『백성들의 생명, 재산을 보호할 국가권력이 무너지니 살아 남으려면 스스로 지키는 수밖에 없었습니다. 永安村 사람들도 바다에 나가면 해적과 싸우고, 육지에 오르면 산적과 싸워야 했습니다. 무시로 쳐들어오는 떼도둑을 막기 위해서는 마을 주변에 성을 쌓고 경비를 서야 했습니다』


운명을 바꿔놓은 궁예와의 만남


―역사기록으로는 왕륭-왕건 父子가 궁예에게 歸附(귀부)하자마자 각각 금성태수와 철원태수로 임명되었습니다. 왕륭이야 그런 벼슬을 받을 만도 하겠지만, 약관 20세의 王建으로선 좀 과한 벼락감투를 쓴 것이 아니겠습니까. 어떻게 그런 발탁인사가 가능했을까요.

『그건 궁예와 왕건 간에 남다른 인연이 없었다면 가능한 일이 아닙니다. 王建의 삶에서 일대 轉機(전기)가 된 것은 궁예와의 만남이었습니다. 궁예는 신라 제48대 景文王(경문왕)의 아들로 태어났으나 왕실의 내분으로 태어나자마자 그를 해치려는 무리들이 들이닥치지요.

유모가 안고 도망치는 바람에 죽음을 모면했고, 유모의 등에 업혀 여기저기로 흘러다니는 사이에 젖먹이를 지나 소년으로 성장해가지요. 철은 들었으나 갈 곳이 없고 살 길이 막연했겠지요. 머리를 깎고 중으로 정착한 곳이 世達寺(세달사)였습니다. 이 무렵에 소년 王建이 궁예와 만난 것 같습니다』

―둘은 소싯적에 만났고, 그때부터 궁예는 王建의 자질을 높게 평가하고 있었다는 말씀이군요. 그렇다면 世達寺의 위치가 중요해집니다.

『훗날의 행적으로 보아 두 사람은 어려서부터 서로 아는 사이 정도가 아니라 매우 친한 사이였다고 보아야 하겠지요. 떠돌이 중과 부잣집 소년이 만나 서로 가깝게 지냈다면 피차 가까운 거리에서 살지 않았겠습니까? 따라서 世達寺는 개성 주변의 어느 지역에 있었다고 해야 앞뒤가 맞습니다.

그래서 옛날 기록과 학자들의 논문을 찾아보았으나 世達寺의 위치는 나오지 않더군요. 다만 法寶院(법보원)에서 발간한 불교사전에 世逵寺(세규사)라는 절이 나오고, 위치가 강원도라고 되어 있을 뿐 구체적 소재지는 명시되어 있지 않습디다. 이에 덧붙여서 「혹 세달사라고도 함」이라는 異說도 소개하고 있어요. 異說은 逵와 達의 글자 모양이 비슷한 데서 나온 착오 때문이 아닐까 하고 생각되더군요.

그런데 영안촌의 소년(왕건)과 멀리 떨어진 강원도의 청년(궁예)이라고 해서 서로 만나지 못한다는 법은 없지만, 지금과는 달리 교통이 불편하던 시대에는 희귀한 일이고, 더구나 무시로 만나 친해진다는 것은 아무래도 부자연스러운 일이 아니겠습니까』

―국내 학자들 중에는 世達寺가 영월에 있다고 주장하는 분도 있습니다.

『영월엔 世達寺가 아니라 세달암이라는 작은 암자가 있었다고 합디다. 아무래도 의문이 풀리지 않고 있던 차에 일본 쪽에 부탁한 자료들이 제 손에 들어왔습니다. 그 중에서 우리 고대사 연구로 유명한 東京大學 교수 이케우치 히로시(池內宏:1878-1952)의 논문을 접하게 되었습니다. 그는 이 논문에서 世達寺를 경기도 개풍군 흥교면 흥교리에 있는 興敎寺로 比定(비정)하고 있습디다. 즉 흥교사의 옛 이름이 世達寺라는 겁니다. 이 절은 王建의 고향인 영안촌과는 불과 10km 안팎의 가까운 거립니다. 그렇다면 독실한 불교신자인 王建 일가와 무시로 내왕이 가능했을 것입니다』

―궁예가 雲水僧(운수승)으로서 탁발을 하러 돌아다니다가 그의 절집과 가까운 거리의 부잣집에 자주 들렀는데, 거기서 소년 王建을 만났다고 해야 아귀가 맞아들어가겠군요.

『궁예는 왕위 계승문제에 얽혀 젖먹이 시절부터 쫓기는 신세가 된 인물이었습니다. 붙잡히기만 하면 어김없이 목이 달아났을 겁니다. 이런 형편이라면 경주와 가까운 강원도보다 훨씬 거리가 먼 개성 방면이 더 안심이 되지 않았을까요? 당시 신라는 중국, 일본 등 이웃나라에 문호가 개방되어 있었고, 더구나 개성 상인들은 무역선을 타고 중국과 자주 내왕하고 있었어요.

궁예의 보호자들은 만일의 경우 무역선에 편승하여 대륙으로 망명하는 수단도 상정하고 있었을지 모릅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내륙 깊숙이 숨어 지내는 것보다 바다 가까이에 있는 편이 유리하지 않았을까요? 1100년도 더 흘러간 옛 일을 단정할 수 있는 사람은 아무도 없습니다. 다만 이런저런 측면을 생각한 결과 불교사전을 따르지 않고 합리적이라고 판단되는 이케우치의 說을 따르게 된 것입니다』


입체적이고 다이나믹했던 천하 쟁패전


―궁예와 王建이 언제 어디서 처음 만났느냐는 우리 민족사의 누락 부분을 보완한다는 점에서 그 의의가 매우 크다고 생각합니다. 그런데 궁예는 어떤 품성의 인물이라고 생각하십니까.

『궁예는 출중한 지도자로서 이르는 곳마다 백성들의 마음을 사로잡고, 그들을 규합하여 강력한 무장세력을 육성했습니다. 그는 이들을 이끌고 불과 수년 만에 한반도의 北半(북반)을 점령하여 독립왕국을 개창했습니다. 또한 그는 넓은 안목을 가진 전략가였습니다. 특히 건국 직후 해군을 건설했고, 王建으로 하여금 해군을 이끌고 西海를 우회하여 견훤의 배후 羅州(나주)를 치도록 했습니다.

한 번 치는 데 그치지 않고 지금의 나주 지방 일대를 항구적으로 점령하여 눌러앉도록 했는데, 당시로서는 아무도 감히 생각하지 못한 웅대한 전략이었습니다. 궁예는 일찌감치 主敵(주적)을 견훤이라고 판단하고 그를 남북 양면에서 치는 전략을 실천에 옮긴 것입니다. 요즘의 군사용어로 말하면 二正面作戰(2정면작전)의 강요로서, 후백제군은 北으로 진격하려면 남쪽 나주의 견제를 받고, 나주를 탈환하려고 들면 北에서 쳐내려오는 적의 군세를 등 뒤에서 받아내야 했습니다』

―궁예 기획, 王建 연출의 羅州 경영이야말로 후삼국시대의 천하쟁패전을 매우 입체적이고 다이나믹하게 전개시킨 역사상의 하이라이트라고 할 수 있습니다.

『천하대세는 결국 궁예냐, 견훤이냐의 양자대결로 압축되고 있었습니다. 만약 궁예가 꺾이지만 않았다면 50년의 난세를 평정하고 천하를 통일한 것은 궁예였을 것입니다. 그러나 궁예는 자기가 건설한 것을 고스란히 王建에게 빼앗기고 역사의 무대에서 사라졌습니다. 궁예의 기반이 없었다면 王建은 후삼국 통일을 바라보지 못했을 것입니다』

―궁예는 정신착란증을 일으켜 스스로 몰락한 셈인데, 왜 그런 질환을 앓게 되었을까요.

『궁예는 心身(심신)을 너무 혹사한 인물입니다. 그는 마지널 맨(限界人間)으로서 어릴 적부터 고생을 많이 했고, 성장 이후에도 국사에 매달린 인물입니다. 그것이 病因(병인)이 아닌가 생각됩니다』

―국호를 後高句麗(후고구려)-摩震(마진)-泰封(태봉)으로 바꾸는가 하면 수도를 鐵原(철원)에서 개성으로 옮겼다가 다시 철원으로 되돌아가는 변덕을 부린 이유가 과연 무엇이었을까요.

『미쳤기 때문이었다고밖에 설명할 수 없습니다. 물류에 유리한 개성을 버리고 교통이 불편한 내륙의 철원으로 되돌아간 것은 맨 정신의 궁예로서는 생각할 수 없었던 일입니다. 세계 문명국의 수도들 모두가 水運에 편리한 큰 강을 끼고 있거나 바다 가까이에 위치하고 있지 않습니까』

「고려사」에 따르면 궁예는 철원 천도 전후에 이미 사람의 마음을 읽는 비상한 재주가 있다고 떠벌리곤 했다. 터무니없는 독심술을 내세운 그는 수백 명의 장수와 신하들을 역모로 몰아 죽였다. 궁예의 처벌은 가혹하고 기괴했다. 여자의 경우엔 음부를 불에 달군 쇠방망이로 찔러 연기가 입과 코로 나오도록 하는 지독한 사디즘의 형벌을 가했다. 심지어 그의 妃도 간통을 했다는 누명을 뒤집어쓰고 그런 형벌을 받고 목숨을 잃었다. 뿐만 아니라 두 태자(당시엔 왕자를 태자로 호칭함)도 음란한 여자의 소생이라 하여 철퇴로 뒤통수를 얻어맞고 뇌수를 쏟으며 즉사했다.

시중(수상) 벼슬의 王建도 시도하지도 않았던 모반의 죄목으로 목숨이 떨어질 뻔했다. 마침 궁예 王 곁에 있던 문신 崔凝(최응)의 도움으로 위기를 간신히 모면했다. 최응은 王建에게 『굽히지 않으면 위험하다』고 귀띔했고, 王建은 그의 그 말에 따름으로써 독심술을 과시하던 궁예를 만족시켰던 것이다.

이런 상황에서 궁예 휘하의 舊將(구장)들인 洪儒(홍유), 裵玄慶(배현경), 申崇謙(신숭겸), 卜智謙(복지겸) 등이 王建을 찾아와 쿠데타를 일으키자고 했다. 王建은 처음엔 망설였지만, 부인 柳씨의 「仁으로 不仁을 치는 것」이라는 권유에 설득되었다. 그는 柳씨가 챙겨준 갑옷을 입고 마침내 군사를 이끌고 왕궁을 들이쳤다.

王建이 반란군을 몰고 왕궁을 쳐들어온다는 급보를 받은 궁예는 이미 대세가 기울었다고 판단하고 變服(변복)을 하고 왕성 밖으로 도주했다. 산야를 헤매던 그는 강원도 평강에서 허기를 이기지 못해 남의 보리 이삭을 잘라 먹다가 들켜 농민에게 살해되었다.


고려 건국에 반대한 인물들


918년 6월 병진일, 王建은 드디어 왕으로 등극하여 국호를 高麗로 정하고, 天授(천수)라는 연호를 반포했다. 그때 그의 나이 42세였다. 고려의 건국에 반대한 사람들도 적지 않았다. 王建은 고려를 건국한 지 4일 만에 반란이 일어나 죽을 고비를 넘긴다. 馬軍大將 환선길이 50여 명의 군사를 이끌고 內殿(내전)을 덮쳐 王建에게 칼을 겨누었다. 그러나 소수의 반란군은 王建의 태연한 태도를 보고 복병을 깔아둔지도 모른다고 생각하여 겁을 집어먹고 재빨리 下手하지 못하고 머뭇거렸다. 타이밍을 놓친 이들은 끝내 근위병의 추격을 받고 붙잡혀 모두 처형당했다.

환선길의 반란 이외에도 淸州 출신 순군 임춘길 등도 작당하여 쿠데타를 도모하다가 복지겸의 정보망에 걸려들자 도주했다. 임춘길의 반란집단도 역시 붙들려 모두 처형되었다.

王建을 위협한 또 한 사람은 雍州(옹주:공주)성주 이흔암이었다. 이흔암은 王建이 궁예를 내쫓고 왕이 되자 성주 자리를 버리고 철원으로 上京했다. 이 때문에 공주는 다시 후백제의 영토로 넘어가고 만다. 이흔암의 태도에 불만을 품고 있던 王建은 때마침 역모와 관련한 고변이 들어오자 이흔암을 잡아들여 시장바닥에서 목을 베게 했다.

이렇게 王建은 즉위 초 서너 달 만에 세 차례에 걸친 역모사건에 시달렸다. 이것은 철원 일대의 지역정서가 王建에 대해 거부감을 가지고 있었음을 의미한다. 드디어 王建은 고려를 세운 지 6개월 만인 919년 1월 서둘러 도성을 송악(개성)으로 옮겼다.

『즉위 초 王建의 입지는 그다지 탄탄하지 못했습니다. 절대강자 궁예가 사라지면서 자연히 지방 호족들에 대한 구심력이 약화되었거든요. 이 때문에 王建은 호족들의 눈치를 살펴야 하는 처지였습니다. 그러나 王建은 특유의 유화적인 성품을 앞세워 신흥 고려가 당면한 대내외적인 문제들을 능숙하게 해결해 나갑니다』

호족들을 포섭하기 위해 王建은 각 지역의 유력 인물들에게 많은 선물을 보내고 겸손한 언사로 다독거리는가 하면 그들의 딸들을 아내로 맞이하는 혼인동맹을 결성한다. 「고려사」에 따르면 이렇게 해서 王建이 后妃(후비)로 맞은 여성들은 자그마치 29명에 이르게 된다.

『태조 王建의 혼인은 민족의 大통합을 달성하기 위한 정치행위였습니다. 王建이 맞이한 后妃의 출신지를 보면 전국 곳곳에 분포되어 있거든요. 심지어 발해 출신의 여성도 포함되어 있었습니다. 이것은 당시의 사회구조 속에서 호족세력 규합과 민심 획득의 가장 효과적인 방법이었을 것입니다』

―궁예가 몰락한 후 천하의 대세는 견훤이냐, 王建이냐로 압축되었습니다. 견훤의 호족정책은 어떠했습니까.

『우선 견훤은 각 지방의 호족들을 기회주의자라고 보고 멸시했습니다. 일이 있으면 앉아서 불러들였고, 안 오면 군대를 끌고 가서 짓밟아 버렸지요. 마음에 들면 편애하고 안 들면 침을 뱉고 면박을 주었습니다. 견훤의 눈으로 보면 이들은 걸레 같은 물건들로, 王建만 밟으면 그날로 흩어져 사라질 것이었습니다.

심지어 그는 경주까지 쳐들어가서 신라왕실을 쑥밭으로 만들어 버리고 돌아오지 않았습니까. 그는 항상 主敵(주적)인 王建에게 초점을 맞추고 있었고, 다른 자들은 안중에도 없었던 것입니다』


후삼국 통일전쟁의 序幕


―王建과는 정반대의 시각을 갖고 있었군요.

『王建은 견훤과 달랐지요. 인간은 80세에 이르러서도 칭찬을 하면 좋아하고 비판을 하면 싫어하는 법이에요. 사소한 것이라도 뺏으면 화를 내고 주면 좋아하지요. 이같은 인정의 기미를 통찰한 王建은 신라왕뿐만 아니라 고을의 하찮은 장군에게도 머리를 숙이고 비위를 건드리는 일이 없었습니다. 항복만 하면 땅도 빼앗지 않고 그들이 가지고 있던 지위와 이권을 그대로 보장해 준 것입니다』

王建은 견훤에 대해서도 유화정책을 구사했다. 견훤도 호전적인 궁예보다는 王建이 상대하기 편하다는 판단 때문이었던 지 고려의 건국을 축하하는 사절단을 보내기도 했고, 몇 번에 걸친 신하들 간의 교류를 추진하기도 했다.

신라 왕실도 王建의 유화정책에 호의를 보였다. 신라는 신라의 裨將(비장) 출신인 견훤을 역적으로 인식하고 있었던 반면 호족 출신인 王建을 믿을 만한 존재로 보고 고려에 의존하려는 경향을 드러냈다.

『王建의 2(고려+신라) 對 1(후백제) 전략이 기막히게 성공한 것이었습니다. 신라가 비록 망해가는 나라이긴 했지만, 당시의 백성들은 견훤이나 王建을 하루살이 나라의 지배자라고 평가하는 한편으로 신라왕이야말로 천년의 정통성을 지닌 임금이라는 생각을 가지고 있었거든요. 천하쟁패전에서 신라를 포섭하는 것은 민심을 잡는 데 매우 중요한 일이었습니다』

―여기서 잠깐 이야기를 되돌려 견훤의 출신 성분을 따져볼 필요가 있겠습니다.

『견훤은 두메산골에서 농가의 아들로 태어나 농사를 짓다가 병정으로 뽑혀 핫바지를 입고 해적 토벌군에 끼어 목포 방면으로 갔습니다. 高麗史의 기록에 따르면 그의 아버지 阿慈蓋(아자개)가 以農自活(이농자활)했고, 나중에 자립하여 尙州將軍(상주장군)을 자칭했으니까 적어도 中農(중농) 출신으로 볼 수 있습니다』

―견훤이 상대한 해적의 정체는 무엇이라고 생각하십니까.

『張保皐(장보고)가 암살당한 것이 서기 846년, 그로부터 40여년 동안 서남해안 지방은 거의 무방비로 방치되어 있었습니다. 張保皐 생전에는 숨을 죽이고 있던 해적들이 또다시 출몰하여 온갖 약탈을 감행했습니다. 三國史記 장보고傳(전)을 보면 신라 말기에 우리 서해안을 침범한 것은 중국 해적이었습니다. 그러니까 견훤이 상대한 것 역시 山東반도에 근거지를 둔 중국 해적이었습니다.

그들은 배를 타고 바다에 나오면 우리 서해안의 백령도로 직행했습니다. 180km 거리로, 한반도와 중국대륙을 잇는 최단거리의 항로입니다. 여기서 인구 밀집지역인 서해안을 따라 내려오며 노략질을 했던 것입니다』


중국 해적에 시달리는 民草


―당시 우리나라 서해안 지방은 가난한 농촌이나 어촌이 있었을 것으로 짐작되는데, 중국 해적들이 무엇을 노리고 이곳을 침범했을까요.

『가축을 잡아갔다느니 양식을 뺏어갔다느니 하는 것은 지나가는 길에 덤으로 한 것이고, 그들이 주로 노린 것은 사람이었습니다. 육지에 올라오면 촌락을 습격했고, 짐승을 사냥하듯이 도망치는 남녀 주민들을 추격하고, 포위하여 닥치는 대로 잡아 뒷짐으로 묶었습니다. 묶은 사람들을 해적선으로 휘몰고 가서 선창에 몰아넣었고, 목표로 하는 숫자가 차면 본국으로 귀항했습니다.

그들 본국에는 언제나 노예 상인이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해적들은 잡아온 사람들을 이 상인에게 팔아 넘겼고, 그동안에 들어간 비용을 빼고도 엄청난 이문을 남겼습니다. 인구가 희박하던 시대여서 노동력이 부족했습니다. 신라 노예는 중국인 노예보다 값이 싼지라 매우 환영을 받았습니다. 중국 해적들의 배후에는 산동 지방의 토호들이 있었습니다』

―견훤은 산골에서 성장한 인물인데도 해적토벌부대에서 대번에 두각을 나타냅니다. 그런데 기록을 보면 견훤은 기골이 장대하고 전투에 능숙하지만, 水軍과는 별로 인연이 없는 모습입니다.

『예로부터 육군에 복무할 병정은 농촌에서 모집하고 水軍에 종사할 병정은 바닷가의 어촌에서 모집했습니다. 水兵은 바다에 익숙해서 물을 무서워하지 않아야 하고, 헤엄도 잘 쳐야 하고, 배를 부릴 줄도 알아야 하기 때문이지요. 바다에서 먼 농촌에서 자란 사람은 이런 재주가 없고, 더욱이 열이면 아홉은 배멀미를 해서 水兵으로서는 쓸모가 없는 것입니다. 그런데 신라 조정은 서남해의 해적을 친다면서 산골에서 성장한 청년들을 끌고 갔습니다』

―그래 놓으니 견훤 같은 경상도 출신 인물이 「의자왕의 원수를 갚겠다」는 좀 뜬금 없는 명분을 내걸고 일어나 후백제를 세운 것 아닙니까.

『지방의 힘으로는 감당할 수 없어 중앙에서 병력을 파견했다면 상당히 큰 부대였을 겁니다. 또한 그들이 토벌해야 했던 해적도 상당한 세력이었다고 짐작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견훤이 여러 번 전공을 세워 裨將으로 출세했다는 기록은 있지만, 水戰을 했다는 기록은 찾을 수 없습니다.

『해적이라고 하지만 쪽배 몇 척으로 침입했던 것이 아닙니다. 높은 파도에 견디고, 장거리 항해도 가능한 크고 튼튼한 배라야 했고, 토벌군과 마주쳤을 때 대적하여 싸울 병력도 상당수 있어야 했을 겁니다. 또 어지간히 인원과 장비를 갖춘 배라도 한 척으로는 안 되었을 겁니다. 만일의 경우 협동작전을 할 友軍, 즉 함께 싸워 줄 배들이 있어야 했습니다. 이 때문에 해적들은 수 척, 때로는 수십 척의 大船團(대선단)을 이루어 쳐들어 왔던 것으로 생각됩니다』

―그렇다면 당시 신라의 해군력으로는 대적하기 어려운 해적이었군요.

『바다에서 오는 적은 바다에서 막는 것이 상책이고, 일단 상륙을 허용하면 이들을 쓸어내기가 여간 어려운 일이 아니지요. 당시 사람들이라고 이런 이치를 모를 까닭이 없었으나 水軍이 없으니 육전으로 막을 수밖에 없었습니다. 장보고를 암살한 신라조정은 해군기지였던 淸海鎭(청해진:완도)을 폐쇄하고 그곳 일대의 주민들도 모두 전라북도 김제의 만경평야 지역으로 이주를 시켜 농민으로 만들어버렸습니다. 함대도 해군의 기반도 철저히 파괴된 것입니다. 견훤이 소속했던 부대가 水戰으로 해적과 맞서지 못하고 육지에서 싸울 수밖에 없었던 까닭입니다』


甄萱의 전략적 실책


―견훤이 全州에 도읍을 정하고 정식으로 後百濟王(후백제왕)을 칭한 것은 서기 900년. 궁예가 철원에서 후고구려의 건국을 선언하기보다 1년 전의 일입니다. 王建이 궁예의 명령으로 서해를 남하하여 견훤의 배후를 친 것은 그로부터 불과 3년 후인 903년이었습니다. 견훤이라면 일찍이 해적과 싸웠음에도 불구하고 해군의 중요성을 몰랐던 것 아닙니까.

『全州의 견훤은 고려 水軍의 남하를 눈치도 채지 못했고, 목포지역에 상륙한 후에야 겨우 보고를 받는 형편이었지요. 이 때문에 王建은 羅州 일대의 10여 고을을 싸우지도 않고 점령할 수 있었습니다. 견훤이 큰 함대는 차치하고, 소규모의 초계정 몇 척만 만들어 해안의 요소에 배치했던들 이런 일은 없었을 겁니다』

―王建의 羅州 경영은 후백제의 등 뒤에서 비수를 들이댄 형국입니다. 천하쟁패전에 나선 견훤으로선 결정적인 실책을 범했던 것입니다.

『王建과 견훤 사이에는 근본부터 차이가 있었습니다. 王建은 서해를 바라보고 자란 바다 사나이였고, 견훤은 문경의 두메산골에서 자란 山 사나이였습니다. 王建은 바다를 알고 水軍의 역할을 중시했으나 견훤은 水軍을 대수롭게 보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견훤도 바다에 대한 인식이 좀 달라지기 시작하지요.

『사람의 고정관념은 고치기 어려운 것이어서 견훤이 생각을 달리하여 水軍을 육성하기까지는 20여년의 세월이 걸렸습니다. 그러나 水軍의 건설은 하루아침에 되는 것이 아니지요. 왕명으로 하면 함선의 건조는 어려운 일이 아니지만, 水戰을 지휘할 장수와 장교들은 단시일에 양성되는 것은 아닙니다. 水兵들도 戰技(전기)에 숙달하려면 시일이 필요한 겁니다』

―견훤은 909년 수륙 양면작전으로 나주 탈환전을 감행했지만, 王建은 德津浦(덕진포) 전투에서 풍향을 이용한 化工(화공)작전으로 후백제의 함대를 괴멸시켰습니다. 王建은 914년에도 수군을 증강하여 후백제와 중국 해적들에게 시달리던 나주 지역을 구원하여 방어태세를 굳혔습니다.

『견훤이 水軍을 건설하여 반격에 나선 것은 王建에게 나주를 빼앗긴 지 28년의 세월이 흐른 932년의 일이었습니다. 그러나 때는 이미 늦었고, 성공하지 못했습니다. 水軍에 대한 인식의 차이는 이렇게 두 인물의 운명에 엄청난 작용을 하게 되는 것입니다』

―王建이 해전의 명수라면 견훤은 육상전의 명수가 아니었습니까.

『견훤은 項羽(항우) 같은 인물이었지요. 王建이 참고 견디는 守城戰(수성전)에 능했다면 견훤은 野戰의 王者였습니다』


大勢 역전시킨 安東會戰


918년 고려 건국 이후 2년 동안은 지속되던 무장평화 상태는 920년 견훤이 신라의 합천을 침범함으로써 깨지고 말았다. 大耶城(대야성:경남 합천)이 무너지자 신라는 경상도 서부와 북부 지역을 포기할 수밖에 없었다. 이런 정세에서 경북지역 호족들은 견훤의 통일정책에 위기감을 느끼고 속속 고려에 투항을 하고 만다.

드디어 925년 후백제군과 고려군은 경북 북부지역인 曹物城(조물성)에서 만나 충돌했다. 조물성 전투는 팽팽하게 전개되어 좀처럼 승패를 결할 수 없었다. 이에 양군은 휴전을 교섭, 화의를 맺었다. 화의조건은 서로 인질을 교환. 王建이 6촌동생 王信을 후백제에 보내니 견훤은 생질 眞虎(진호)를 고려에 보냈다.

―조물성 전투는 무승부로 끝났지만, 어느 쪽이 우위를 차지했다고 보십니까.

『그야 王建이 불과 10세 연상인 견훤을 尙父(상보)라고 높여 부르기로 했으니까 후백제가 조금 유리했던 상황이 아니겠습니까. 尙父라고 부르겠다는 것은 아버지로 대접을 하겠다는 뜻입니다』

다시 후백제와 고려는 휴전 상태로 들어갔다. 그러나 이듬해 고려에 볼모로 가 있던 眞虎가 급사함으로써 평화는 깨지고 만다. 견훤은 眞虎의 죽음을 독살로 규정하고 인질로 잡고 있던 王信을 죽인 후, 공주성을 공략했다. 본격적인 통일전쟁에 돌입한 것이었다. 이후 한동안 후백제의 공세 속에 고려는 守勢(수세)에 몰렸다. 그래도 신라는 고려를 응원했다.

927년 견훤은 경북 북부지역을 공략하다가 갑자기 말머리를 돌려 경주를 급습했다. 견훤은 포석정에서 놀다가 붙들린 景哀王(경애왕)을 윽박질러 자살하도록 하고 왕비를 강간했다. 그리고는 제멋대로 진골 金傅(김부:敬順王)를 왕위에 올렸다.

『나는 요즘 나라의 운명이라는 것을 생각하고 있습니다. 돈을 풍덩풍덩 쓰면서 질펀하게 놀자고만 해서는 나라가 안 됩니다. 敵이 70리 밖에 와 있는데도 불구하고 고려에 원병만 청해 놓고 신라의 임금과 귀족들이 酒池肉林(주지육림) 속에서 연회를 벌인 것입니다. 나는 요즘 나라의 운명이라는 것을 생각하고 있습니다.

고양시 주택가에 러브호텔 짓는다고 소동을 벌인 것은 포석정 놀이와 별반 다르지 않습니다. 또 요즘 낭비적인 이벤트가 왜 이렇게 많습니까. 부산에서 국제영화제를 좀 괜찮게 했다니까 전국 여기저기서 비슷비슷한 이벤트가 줄을 잇는 판입니다. 대통령이나 지방자치단체장이 비전은 제시하지 못하고 이벤트로 국가적 위기를 호도하고 있는 것입니다』

견훤이 경주를 급습하여 신라왕을 죽이고 새 신라왕을 임명했다는 것은 그가 천하쟁패전의 최강자임을 대내외에 과시한 것에 다름 아니었다. 후백제의 라이벌이며 신라와 동맹관계에 있던 고려로서는 결코 좌시할 수 없는 사태였다. 王建은 정예 기병 5000기를 이끌고 경주로 달려갔다.

그러나 그는 公山(공산:대구 팔공산) 기슭에서 후백제군에게 포위되어 절체절명의 위기에 빠졌다가 主君만은 보호하려 했던 부하 장졸들의 분전으로 혼자만 간신히 戰場을 이탈하여 單騎(단기)로 산을 넘어 도주했다. 공산전투에서 王建의 좌우 용장이었던 申崇謙과 金樂(김락)은 전사했다. 그가 이끌고 간 5000기병도 모두 함몰했다.


매복작전에 걸려든 王建


『공산전투는 견훤의 埋伏計(매복계)에 王建이 걸려든 것입니다. 王建이 자꾸 결전을 회피하니까 견훤이 경주로 쳐들어가 쑥밭을 만들어 王建 스스로 나서도록 격동시킨 것입니다. 王建이 직접 구원군을 이끌고 남하하자 견훤은 재빨리 병을 물려 길목인 팔공산을 선점하여 숨어 있다가 王建이 함정에 빠지도록 유도한 것이지요』


▲ 왕건, 견훤의 주요 군사활동도

공산전투 이후 고려는 힘의 열세에 놓이게 되고, 경상도 서부 일대가 완전히 견훤의 영향권 아래 들어가게 된다. 그러나 견훤 軍의 노략질에 분노한 경상도 북부지역의 민심은 王建에게 기울어진다.

―후백제와 고려 간의 힘 관계가 역전되는 시기를 언제로 잡아야 할까요.

『역시 古昌(고창:경북 안동)의 甁山(병산)싸움이 전환점이었습니다』

王建은 병산싸움에서 공산전투의 패전을 만회하고도 남을 만한 대승을 거두었다. 이 전투에서 견훤은 병력 8000명을 잃고 도주했다. 안동지방의 유력자들이 고려군과 교전 중이던 후백제군의 배후를 침으로써 팽팽했던 균형을 깨뜨렸다. 이 전투로 王建은 경상도 북부지역에 대한 주도권을 완전히 장악하게 된다.

승전 후 王建은 50명의 근위병만 데리고 곧 경주를 방문하여 경순왕과 진골귀족들로부터 대단한 환영을 받았다. 고려의 위신이 더욱 높아져 강릉과 울산 등 110여 성이 고려에 투항했다.

이후 후백제군은 계속 守勢에 몰린다. 934년 運州(운주:충남 홍성)전투에서는 조물성전투와 뒤바뀐 양상이 나타난다. 勢 불리를 직감한 견훤이 먼저 화의를 제의했다. 그러나 王建은 견훤이 진영을 채 갖추기도 전에 공격을 감행, 후백제군을 대파했다. 王建의 나이 57세, 견훤은 67세였다. 이때부터 견훤은 전투의욕을 상실했다. 그리고 이것이 후백제의 후계문제와 맞물려 견훤과 그 자식들이 다투는 말기현상을 빚어내고 만다.

견훤에게는 장남 神劒(신검)을 비롯하여 良劒(양검), 龍劒(용검), 金剛(금강) 등 10여 명의 아들을 두었다. 이 가운데 견훤이 후계자로 점찍은 것은 그를 닮은 제4子 金剛이었다. 이를 시기한 세 형들은 935년 3월 반란을 일으켜 金剛을 죽이고 父王 견훤을 金山寺(금산사)에 유폐시켰다. 장남 神劒이 왕위에 올랐고 양검, 용검은 實權(실권)을 잡았다.

금산사에 갇혀 있던 견훤은 그해 6월 탈출하여 羅州의 고려 진영으로 망명했다. 王建은 上將 유금필을 羅州로 급파하여 견훤을 개경으로 모셔 올리고 尙父의 대접을 하면서 지금의 서울인 양주지역을 食邑(식읍)으로 삼게 했다.

大勢의 국면이 이렇게 급변하자 신라의 敬順王은 그해 11월 나라를 들어 고려에 귀부함으로써 신라의 천년왕국도 종막을 고했다. 견훤의 사위였던 朴英規(박영규)도 고려가 후백제를 공격하면 내응하겠다는 밀서를 王建에게 보냈다.

『王建은 남들도 포용했지만 견훤은 자기 자식들에까지 배반을 당하고 말았습니다. 이것이 고려와 후백제의 운명을 결정지은 핵심이었습니다』

―후백제는 지배 엘리트의 분열로 멸망의 길로 들어섰습니다. 요즘 우리 정계가 反面敎師(반면교사)로 삼아야 할 대목이 아닙니까. 집권 민주당과 한나라당은 지금 선의의 정책 대결이 아니라 심각한 이데올로기 대립을 보이고 있습니다.

『이런 사례가 있습니다. 北宋과 南宋은 경제도 발전하고 100만명의 상비군을 보유하고 있었지만 북방 유목민족인 거란족, 여진족, 몽골족에 대해 매년 銀(은) 30만 냥, 비단 30만 필을 바치며 온갖 수모를 당한 중국 역사상 최약체의 漢族(한족)왕조였습니다. 그런데도 宋 조정은 북방민족에 대해 항전을 할 것이냐, 화친을 할 것이냐는 문제를 놓고 편을 갈라 싸우다 나라를 망하게 하고 말았습니다. 역사는 돈을 주고 평화를 살 수 없다는 점을 가르치고 있습니다』

천하대세는 사실상 결정되었다. 그럼에도 王建은 좀처럼 動兵(동병)을 하지 않고 백제의 내분을 주시하고 있었다. 다만 태자 王武(왕무)와 朴述熙에게 步騎(보기) 1만을 주어 천안 방면으로 진출시킨다. 후백제왕 神劒은 남하하는 고려군을 맞아 錦江(금강) 계선에 방어선을 굳힌다. 그로부터 3개월 후인 936년 9월 王建은 드디어 10만 대군을 일으켜 천안으로 내려갔다. 고려군에는 견훤도 종군하고 있었다. 금강 계선에 진을 치고 있던 후백제군은 여기서 결전을 벌일 작정이었다.


천리 밖에서 이겨 놓은 최후의 결전


그러나 王建은 敵의 의표를 찔렀다. 王建은 고려군의 主力을 一利川(일리천:경북 구미시)으로 우회시켜 후백제 영토의 옆구리를 찌르려고 했다. 공격군의 이점을 최대한 활용한 것이었다. 이 바람에 금강 계선에서 방어진지를 형성하고 있던 후백제군의 主力도 뒤늦게 南下하여 迎敵(영적)할 수밖에 없었다. 王建이 決戰場으로 정해 놓고 후백제군을 끌어들인 곳은 지금은 「어갱이들」 또는 「어견」이라고 불리는 낙동강변이다. 그때 모래바람을 일으켰던 江 양안에 걸쳐 펼쳐진 60만 평의 이 古戰場은 지금 비옥한 농토로 변해 있다.

一利川 싸움에서 신검의 후백제군은 참패하고 편제를 이루지도 못하고 수천의 전사자를 남긴 채 뿔뿔이 흩어져 도망쳤다. 후백제군의 많은 將領(장령)들과 병졸들은 싸우지도 않고 귀순해버리기도 했다. 고려의 추격군이 黃山(황산:충남 논산)에 이르자, 절망한 신검은 양검, 용검과 문무백관들을 거느리고 王建의 軍門으로 나와 항복했다. 이로써 50년에 걸친 亂世는 막을 내렸다. 王建의 나이 60세, 그가 고려를 창건한 지 18년째인 서기 936년 9월의 일이었다.

一利川 싸움 직후, 견훤은 등창을 앓아 논산의 한 山寺에 누웠다가 곧 칠순의 일생을 마감했다. 그는 역사의 패배자였음은 분명하지만 시대모순을 해결하려고 분투했다는 점에서는 승자인 王建과 다를 바 없었다. 세계관이나 국가전략은 달랐지만 궁예, 견훤, 王建의 3人 모두 파란만장한 한 시대를 헤쳐 온 동반자이며 영웅이었다.

―「一利川싸움」에서 나타난 王建의 전략을 어떻게 평가하십니까.

『一利川싸움은 최후의 결전이기는 했지만 사실상 싸우기도 전에 이겨 놓은 전쟁였습니다. 견훤 스스로가 대왕기를 앞세우고 고려군의 선봉에 서서 반역한 아들들을 징치하려 했으니까 후백제군으로서는 사기가 죽을 수밖에 없었던 겁니다.

더구나 王建은 그가 동원할 수 있는 병력 10만을 집중시켜 분산된 후백제군을 쳤기 때문에 후백제로서는 어찌해볼 도리가 없었던 것입니다. 이 대목에서 전략가로서 王建의 탁월성이 나타났습니다. 압도적인 대군으로 밀어붙이면서 후백제군의 퇴로를 열어 두어 무익한 流血(유혈)을 최소화했기 때문입니다』

―그러니까 王建은 천리밖 개경에서 이미 전승을 굳혀놓고 一利川에 가서는 승리을 확인하는 手順만 밟은 셈이군요. 그럼 이제는 金春秋(김춘추:태종무열왕)-金庾信(김유신)-金法敏(김법민:문무왕)이 주도한 삼국 통일과 王建이 주도한 후삼국 통일의 의미를 비교해 볼 차례군요.


정복통일과 흡수통일


『단순비교는 어렵지요. 金春秋-金庾信-金法敏은 우리 민족사상 최초의 통일을 이룩했고, 王建은 신라 말 이후 50년여 간에 걸친 亂世를 평정하여 민족 再통일을 이루었습니다. 또한 통일기의 신라와 고려가 처한 국제정세도 달랐습니다. 삼국 통일의 시기에는 중국대륙에 唐(당)이라는 세계제국이 등장하여 주변국들에 대한 압력을 가중시키고 있었습니다.

한편 王建의 후삼국 통일시기에는 중국대륙이 분열하여 이른바 「하루살이 정권」이 부침하던 5代10國의 혼란기여서 한반도의 헤게모니 쟁탈전에 개입할 여지가 전혀 없었습니다. 신라와 고려의 통일전략이 서로 다를 수밖에 없었습니다』

―신라의 삼국통일은 슈퍼파워 唐제국의 세력을 한반도에서 몰아내면서 완성되었지요. 백제, 고구려의 멸망 후 戰後처리 문제를 둘러싸고 전개된 신라-당의 8년전쟁의 양상을 보면 文武王과 金庾信의 전쟁 수행능력과 외교력은 탁월하고 또한 능수능란했습니다. 그 결과 신라는 對唐 8년전쟁에서 승리했고, 전후에 펼쳐진 팍스 시니카 시대를 활용하여 민족문화를 한 계단 올리면서 우리 민족의 原型을 형성했습니다.

王建의 리더십에서 가장 돋보이는 대목은 역시 流血을 최소화하면서 민족의 再통일을 달성했다는 점이 아니겠습니까. 이것 하나만으로도 그의 리더십은 가장 경제적인 동시에 도덕적 우위를 점할 수 있었습니다.

『王建은 호족연합정책으로 후삼국을 통일했기 때문에 나중에 그를 승계한 惠宗(혜종)의 시대에 王規(왕규)의 반란이 일어나는 등 상당기간 호족들의 발호로 국정이 불안해집니다. 그야 어떻든 王建은 거란에 멸망당한 渤海(발해)의 유민들을 포용하고 꾸준한 북진정책으로 민족의 판도를 대동강까지 확대했습니다. 고려의 서북 국경은 成宗 때 압록강에 이르게 됩니다』

―王建의 死後 고려의 북진정책은 때마침 북방 초원지대에서 거란족이 흥기하는 바람에 시련을 겪게 되지요. 당시 東아시아의 최강국인 거란족 국가 遼의 남진정책과 고려의 북진정책이 충돌한 것이지요.

『고려 태조 25년(942) 10월, 거란 사신이 고려를 방문했지만, 사신 일행 38명 전원을 섬에 귀양보내고, 예물로 가져온 낙타 50마리를 개경의 萬夫橋(만부교) 아래에 매어 굶어 죽게 했지요. 발해를 멸망시킨 거란을 매우 괘씸하게 생각한 겁니다. 이로써 고려-거란의 외교관계는 단절되고 맙니다. 태조 王建은 고려를 북방 유목민족에게 굴하지 않는 씩씩한 나라로 만드는 데 틀을 잡은 것입니다. 부드러운 리더십을 구사한 王建이었지만, 국가이익 확보를 위한 원칙에는 철저했던 것입니다』

―그건 좀 심했던 것 아닙니까. 태조 王建의 對북방 강경정책이 나중에 거란이 고려를 침략하는 구실이 되었으니까요(고려는 성종 10년(993), 현종 원년(1010), 현종 9년(1018)의 세 차례에 걸쳐 거란의 침입을 받았다).

『그래도 고려는 거란의 침략을 훌륭하게 극복했습니다. 특히 제3차 침입 때는 거란군 10만명을 함몰시켜 거란이 다시는 고려를 넘보지 못하게 했지요. 이런 국난 극복은 역시 태조 王建이 국가의 틀을 잘 짜 놓았기 때문에 가능했다고 봅니다. 고려는 유라라시아 대륙을 휩쓴 몽골군에 대해 30여 년간이나 저항한 나라입니다』


고려 태조와 조선 태조의 역사적 평가


―선생님께서는 「고려 태조 王建」의 저술에 앞서 1970년대에 장편소설 「李成桂」를 출간하여 군사쿠데타를 일으킨 경험을 共有한 당시의 집권자 朴正熙 대통령을 열렬한 독자로 만든 적이 있으십니다. 고려 태조 王建과 조선 태조 李成桂를 비교하면 인물의 크기가 어떠합니까.

『李成桂는 창업과정에서 손에 너무 많은 피를 묻혔습니다. 우왕, 창왕, 공양왕을 비롯한 王씨들이 얼마나 많이 학살되었습니까. 王建은 귀순한 견훤과 경순왕을 우대하고, 심지어는 신검도 용서하는 넓은 襟度(금도)를 보였습니다. 王建은 세계사에서도 유례가 드문 아주 특별한 인물입니다.

또한 이성계의 위화도 回軍(회군)은 대륙을 향한 우리 민족의 비전을 좌절시키는 행위였습니다. 그때 만약 고려군이 압록강을 건너 만주로 진격했다면 요동은 회복할 수 있었습니다. 건국 초기의 明은 아직 허약했고, 元은 막 북으로 쫓겨가 요동은 사실상 無主物이었습니다』

―고려는 소수의 귀족들이 산과 강을 경계로 할 정도의 토지를 겸병하는 등 이미 말기증세를 드러낸 만큼 토지개혁에서 일정한 성과를 올린 조선왕조의 개창은 역사발전이라는 측면도 있습니다.

『그러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李成桂는 朱子學(주자학) 유일사상으로 나라의 틀을 짜버림으로써 조선왕조가 文弱에 흐르고 사대주의에 물들게 했습니다. 통일신라나 고려시대에도 中原을 차지한 나라와 조공책봉 관계에 있었습니다만, 그것은 어디까지나 국가이익을 확보하기 위한 수단이었습니다.

중국의 황제는 당시 東아시아 세계에서 중세 유럽의 로마법황과 같은 존재인 동시에 오늘날의 유엔 총회 의장과 같은 위치였습니다. 당시 東아시아 세계는 중국을 중심으로 외교관계가 돌아가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또 주변국들이 중국에 조공을 했다지만, 그것은 국가 간 무역의 한 형태였습니다. 더구나 황제의 回賜品(회사품)이 오히려 조공품보다 많았습니다. 그러니까 조공이 불평등 교역이 아니었다는 말입니다』

―고려는 매우 개방적인 왕조였지 않습니까. 세계에 코리아를 알린 왕조이기도 하지요.

『그렇습니다. 宋나라 사신으로 고려를 다녀간 徐兢(서긍)이 지은 「高麗圖經(고려도경)」을 보면 고려에선 儒(유) 彿(불) 仙(선)을 마음대로 믿고, 남녀가 같은 자리에 앉아 술을 마시고 연애하고, 과부의 改嫁(개가)도 자유롭다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이런 열린 사회에서만 개인의 재능이 발휘되는 것입니다. 세계적 명품인 고려청자가 나올 수 있는 사회적 밑바탕이 깔려 있었던 것입니다』

―이런 개방사회가 조선왕조로 들어가면서 폐쇄사회로 바뀌었던 이유는 무엇일까요.

『조선왕조가 朱子學에 빠져들면서 그 지배층의 사상이 이상하게 변질됩니다. 조선의 지배층은 明이 멸망하고 200년의 세월이 흘러도 尊明思想(존명사상)을 버리지 못했습니다. 朱子學은 원래 외세의 핍박을 받던 宋나라 때 만들어진 漢族(한족)의 민족주의적 학문이기 때문입니다. 물론 주자학의 철학체계는 당시 東아시아 세계에선 가장 선진적인 측면도 없지 않았습니다. 문제는 조선조가 주자학을 유일사상 체계로 고수했다는 데 있습니다.

조선조의 사대부들은 같은 유교의 갈래인 陽明學(양명학)을 연구하는 사람들까지도 斯文亂賊(사문난적)으로 몰아 숙청을 했습니다. 宣祖(선조) 때의 名臣 李恒福(이항복)은 임진왜란이란 미증유의 전란 직후 「이번 전쟁에서 朱子學은 아무 소용이 없었다」고 말했습니다. 이것은 국가가 신봉했던 유일 사상체계에 대한 회의였습니다. 만약 이때 조선조가 국가 이데올로기를 바꾸었다면 우리 역사는 한 단계 도약할 수 있었을 것입니다』


방법이 없다면 기다리는 것도 방법이다


―사회발전의 원동력인 多樣性(다양성)의 싹을 잘라버린 것이군요. 마치 오늘의 북한을 보는 느낌입니다. 이산가족이 50년 만에 만나서도 『이건 장군님의 은덕』이라고 한 목소리로 말하고 있는 판이니까요. 金大中 대통령의 평양 방문 때 연도에 늘어선 시민들이 일사불란하게 조화다발을 흔들고 발을 구르며 金正日 위원장의 행차에 환호하는 모습을 보면 「아직도 지구상에 저런 곳이 있나」고 할 만큼 이질감을 느끼게 됩니다.

『지금 남한과 북한은 너무 다릅니다. 그렇다고 정복통일을 하려면 우리 민족이 함께 망하는 전쟁을 해야 하니까 불가능하고, 흡수통일을 하려고 해도 그럴 만한 경제력이 없습니다. 방법이 없다면 기다리는 것도 좋은 방법입니다. 방법이 없는데 서두르면 위험합니다. 세월이 흐르면 北도 변하고 남도 변합니다. 서두르면 될 일도 안 됩니다. 서둘지 말았으면 좋겠습니다』

―오랜 시간 좋은 말씀을 해주셔서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