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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보기행(17) - 安東과 義城의 신라·고려·조선시대 국보들

정순태   |   2003-06-04 | hit 6557

오전 6시15분에 李五峰 부장이 운전하는 승용차로 東서울 톨게이트를 통과하여 중부고속도로와 중앙고속도로를 차례로 거쳐 西安東 톨게이트를 빠져나온 다음 국도(34번)와 지방도로를 10km쯤 달려 天燈山 鳳停寺(천등산 봉정사)에 도착했다. 매표소에서 1인당 1300원짜리 입장료를 사고 나서 시계를 보니 오전 9시 정각이었다. 오던 도중 휴게소에 잠시 들러 요기를 한 시간을 제외한다면 2시간30분에 도달할 수 있는 行路(행로)이다. 이제 봉정사는 世俗(세속)과 훨씬 가까워졌다.





매표소 직원은 필자에게 표를 팔면서 『지금 봉정사의 大雄殿(대웅전)과 極樂殿(극락전)이 보수공사 중인데, 그래도 괜찮겠소?』라고 오금을 박았다. 나중에 행여 봉정사의 알짜를 보지 못했다며 입장료를 반환해 달라고 할까 봐 미리 다짐을 받아 두려는 「조심성」이라고 생각하니 매표원의 투박함이 은근히 살갑다. 「봉황이 머무는 절」(鳳停寺)에 들어가 사바세계에 찌든 때를 벗기려는데 공동목욕탕 요금보다 싼 입장료를 내는 게 뭐 그리 아깝겠는가.

경북 안동시 西後面 台庄里(서후면 태장리)에 있는 대한불교조계종 제16교구 天燈山 鳳停寺. 그 이름만으로도 필시 어떤 깊은 내력이나 神話(신화)가 배어 있을 듯한 느낌을 준다. 천등산의 짙푸른 등줄기로 둘러싸인 봉정사는 신라 문무왕 12년(672) 海東華嚴(해동화엄)의 開祖 義相法師(의상법사)의 제자인 能仁(능인) 스님이 창건하여 그동안 여섯 차례의 重修(중수)를 거쳐 오늘에 이르렀다.

천등산은 원래 大望山(대망산)이라 불렸다는데, 能仁 스님이 이곳 바위굴에서 수행을 할 때 그의 法力(법력)에 감복한 天上의 선녀가 하늘에서 등불을 내려 굴 안을 환하게 밝혔다고 하여 하늘 천(天), 등불 등(燈)이란 이름으로 바뀌었다고 한다.

새 봉(鳳), 머물을 정(停)으로 된 절 이름도 절묘하다. 能仁 스님이 道力(도력)으로 종이 봉황을 접어서 하늘에 날리니 그 후로부터 이곳에 봉황이 찾아와 머물렀다고 해서 이런 이름이 붙었다는 것이다.




속에 배어 있는 수수한 세련미

봉정사는 크지 않지만, 우리나라 最古의 목조건물인 국보 제15호 極樂殿으로 유명하다. 1999년 4월, 英國 여왕 엘리자베스 2세가 방문한 이래 관광객들의 명소가 되었다. 高麗 태조와 공민왕도 다녀간 山寺다.

봉정사가 좋은 것은 겉으로 드러나는 화려함보다는 속에 배어 있는 수수한 세련미 때문이다. 축대 같은 것을 보면 규모는 작지만, 알뜰하고 음전한 모습이다. 시대의 풍조를 타고 점차 번지르르하게 치장하고 있는 다른 사찰과는 달리 조용하게 山寺의 참모습을 은근히 지키고 있어 사색하고 싶은 나그네들에게는 더없이 좋은 순례지가 되고 있다.

봉정사의 大雄殿과 極樂殿을 보기 위해서는 萬歲樓(만세루)라는 中門을 지나야 한다. 만세루는 2층 樓閣式(누각식) 건물로서 자연석 基壇(기단) 위에 주춧돌과 기둥을 세웠다. 1층은 통로이고, 2층은 누마루다. 누마루에는 法鼓(법고: 불교의 북)와 木魚(목어)가 있다. 木魚는 나무를 깎아 속을 비게 만든 잉어 모양인데, 經(경)을 읽을 때 막대기로 두들겨서 소리를 내게 한다. 산중턱에 서 있는 만세루에 올라 아래로 굽어보면 別世界(별세계)를 딛고 있는 듯한 느낌이 든다.

만세루를 지나면 마주보이는 건물이 대웅전이다. 대웅전 외부에는 온통 비계(공사현장의 발판)가 설치되어 있다. 3년 전에 해체 수리된 이 목조 건물은 腐蝕(부식)과 蟲害(충해) 방지를 위해 방제회사 직원들이 약품처리 작업을 진행 중이었다.

보물 제55호 봉정사 대웅전은 조선 초기의 木造 건물로서 초기 多包系(다포계) 양식의 출발점이자 표본이다. ♥包(공포)의 구성이 단순하여 오히려 힘차다. 축대를 높게 쌓고 그 위에 정면과 측면이 모두 세 칸으로 된 단층이다. 前面 기둥 앞으로 툇마루를 깔았는데, 창건 당초의 것인지, 그 후의 구조물인지 확실하지 않다. 本殿(본전)에 이와 같은 툇마루를 깐 것은 이곳이 유일한 예이다. 隅柱(우주: 모서리기둥)는 平柱(평주)보다 약간 올려 귀솟음을 주었다.

대웅전 내부에는 釋迦牟尼佛(석가모니불)을 본존으로 모시고, 그 좌우에 普賢(보현)보살과 文殊(문수)보살이 挾侍(협시)하고 있다. 내부의 단청은 색깔이 한참 바랬지만 高麗시대적 요소를 지녀 중요한 회화자료로 주목되고 있다.

특히 대웅전 내부의 後佛壁畵(후불벽화)는 우리나라에서 가장 오래되고 큰 벽화다. 문화재청은 대웅전을 해체 수리하던 2000년, 『지붕 속 종보 받침 長舌(장혀)에서 세종 10년(1428)에 미륵하생도를 그렸다는 墨書銘(묵서명)을 발견했다』고 밝히고 『따라서 이 후불벽화는 현존하는 우리나라 最古의 後佛벽화』라고 발표한 바 있다.

그때까지 우리 학계에서는 조선 성종 7년(1476)에 조성된 전남 강진군 무위사 극락전(국보 제13호) 후불벽화가 가장 오래된 것으로 지목했었다.

가로 387.5cm, 세로 380cm 크기의 후불벽화를 조사한 김창균 문화재전문위원은 『봉정사 대웅전 후불벽화는 석가삼존상을 중심으로 화면을 상·중·하로 구분한 3단 구성법의 구도상 특징을 보여 주는 석가영산회상도이며, 고려시대 양식과 기법을 잘 간직한 우리나라 최고의 국보급 벽화』라고 평가한 바 있다.


共産軍이 宿食했던 極樂殿 내부

대웅전을 나와 3층 석탑을 서쪽으로 돌아서면 곧 국보 제15호 봉정사 極樂殿이다. 극락전이라면 西方淨土(서방정토)의 부처인 아미타불을 모시는 불당이다. 봉정사 극락전은 우리나라에서 가장 오래된 목조 건물이다.

1972년에 문화재청이 극락전을 해체 수리할 때 그 중앙칸 宗道里(종도리: 기둥 위에 건너 질러 위를 받치는 나무 가운데 가장 으뜸 되는 것) 밑에서 墨書銘이 발견되었다. 이 묵서명에 고려 말기인 恭愍王(공민왕) 12년(1363)에 屋蓋(옥개) 부분을 重修(중수)했다고 기록되어 있는데, 이로 미루어 보아 창건은 그보다 100년 정도 앞섰으리라고 짐작되는 것이다.

건물의 前面에만 다듬어진 基壇(기단)을 쌓고, 그 위에 자연석 초석을 배열하여 柱座(주좌)만을 조각하였으며, 초석 위에는 중배(가운데 부분)가 볼록한 배흘림(엔타시스) 기둥을 세웠다. 정면 3칸, 측면 4칸의 단층이다. 극락전 전면과 측면 중앙칸에 板門(판문)을 달고 前面 兩夾間(양협간)에는 살창을 달았다.

오색 문양의 기와지붕은 책을 엎어 놓 듯 단촐한 맛배지붕으로서 柱心包系(주심포계)의 소박한 ♥包가 떠받치고 있는데, 솔직·간결한 것이 그 특징으로 단순히 오래되었다는 데 그치지 않고, 國寶에 값할 만한 格調(격조) 높은 기법을 갖추고 있는 것이다.

극락전 주위에는 임시로 나무 울타리를 돌리고, 그 입구는 열쇠로 잠겨 있었다. 宗務所(종무소)에 들러서 총무 담당 眞弘(진홍) 스님을 만났더니 스님이 현장으로 동행해서 문을 따 주었다. 비계를 타고 올라가서 극락전 내부의 천장과 대들보 등 부재들을 살펴보니 온통 거무죽죽하다.

『6·25 전쟁 때 인민군들이 이곳에 들어와 숙식을 했대요. 그들이 미군기의 공습을 겁내 극락전 안에서 불을 피워 밥을 지어 먹었다는데, 그을음이 내부 목재에 무지하게 엉겨 붙은 겁니다. 그 그을음을 제거하려면 앞으로도 몇 년이 걸린대요. 그때 불타거나 폭파되지 않은 것만 해도 다행이라 해야 할까요』

문화재청이 2001년 9월부터 시행하고 있는 극락전 보수공사는 금년 6월에 끝날 예정으로 되어 있지만 벌여 놓은 규모로 보아서 工期(공기)가 지켜지기 어려울 것 같다.

『이번 보수공사에서는 사용 가능한 部材(부재)는 그대로 두고 꼭 교체할 것만 바꾼다고 합디다. 1972년 보수 때는 예산이 부족해 外來松(외래송)과 人工顔料(인공안료)를 사용했는데, 우리나라 소나무와 天然 안료를 써야만 문화재로서의 품위와 보존이 가능해지는 거죠. 이번에는 잘 하겠다는데, 두고봐야죠』

극락전의 특징 중 하나는 二重木保(이중보: 2중으로 된 들보) 구조로 지은 것인데, 中宗木保는 화분을 거꾸로 놓은 모습(覆花盤形·복화반형)의 包臺工(포대공) 위에 종도리를 받친다. 불당 중앙 뒤쪽에 두 개의 기둥을 세워 불단의 벽을 만들고 그 앞에 불단을 모셨다.


우리나라 木造건물의 競艶場

불단 위에는 높은 모서리 기둥을 가진 多包系의 宮殿形 닫집(玉座나 佛像이 놓인 자리를 莊嚴하는 架構)이 있으며, 이 공포의 기둥머리나 소로(접시 모양의 받침)는 모두 본건물 양식과 같은 5出目의 包作이다. 닫집 부근의 창방(장여 밑에 다는 넓적한 도리)의 단청이 이 건물의 오랜 내력을 말해 주듯 古色蒼然(고색창연)하다.

극락전과 대웅전 사이에는 보물 제448호 華嚴講堂(화엄강당)이 있다. 화엄강당은 막 출가한 스님들이 일정 기간에 걸쳐 부처님의 말씀을 배우고, 수행자로서 갖춰야 할 기율 등을 배우는 장소인데, 이런 건물로선 매우 드문 온돌방 구조이다.

정면 3칸, 측면 2칸의 柱心包系 맞배지붕 건물로, 1969년 해체 복원할 때 나타난 上樑文(상량문)에 의하면 조선 宣祖 21년(1588)에 중수되었다. 이 건물은 長臺石(장대석) 댓돌 위에 두꺼운 널판을 쪽마루처럼 깔았고, 四分閤(사분합)의 띠살문을 달았으며, 공포와 공포 사이의 包壁(포벽)에는 花盤(화반) 같은 것을 배치하지 않고 벽만 쳤다.

강당으로 사용한 건물이므로 불당에 비해 낮은 기둥을 사용했다. 측면에는 중앙에 네모기둥 1개를 세워 대들보를 받치도록 했으며, 그 사이에 창을 냈다.

소나무 숲을 병풍처럼 두른 대웅전, 극락전, 화엄강당은 서로 처마가 맞대어 있을 만큼 오밀조밀하다. 극락전 앞뜰에는 보물 제449호 古今堂(고금당)까지 동향하고 있다. 古今堂은 참선을 수행하는 禪室(선실)로서 정면 3칸, 측면 2칸의 맞배지붕의 소규모 건물인데, 조선 초기에서 중기로 넘어가던 시기의 木造양식으로서 주목되고 있다. 1616년에 크게 중수되고, 1969년에 보수되었다.

이렇게 촘촘하게 국보·보물로 지정된 건물 네 채가 한 곳에 몰려 있는 곳으로는 여기가 우리나라에서 유일하다. 그렇다면 이 一廓(일곽)이야말로 우리 전통 木造건물의 박물관, 아니 競艶場(경염장)이라 할 만하다.

대웅전 뜰에서 200m쯤 떨어진 동쪽 언덕 위 숲 속으로 암자 하나가 눈에 들어온다. 이곳이 봉정사의 靈山庵(영산암)이다. 영산암의 初入(초입)에 30계단 정도의 돌 층층다리가 놓여 있지만 경사가 급하지 않아 마치 이웃집에 놀러가는 기분으로 가볍게 오를 수 있다.

영산암의 구조는 가장자리를 빙 돌아가며 건물을 세운 입 구(口)字 形인데, 그 가운데엔 18세 처녀의 젖무덤처럼 예쁜 정원이 조성되어 있다. 장난감 같은 동산과 연못을 아기자기하게 다듬어 놓은데다 조그마한 기암괴석, 휘영청 휘어진 향나무 등이 제자리를 잡아 하나의 작은 樂園(낙원)을 이루고 있다. 건물의 벽·기둥·문틀에는 모두 검은색으로 칠해져 있는데, 봄날의 陽光(양광)을 받아 어둡지 않고 오히려 풋풋하다. 알고 보니 이곳이 「달마가 동쪽으로 간 까닭」을 비롯하여 「아제 아제 바라아제」, 「산산이 무너진 이름이여」, 「童僧(동승)」 네 편의 영화가 촬영된 무대였다.


安東의 불탑은 벽돌탑이 主流

봉정사를 뒤돌아보며 물러나 국보 제16호 安東 新世洞(신세동) 7층 塼塔(전탑)을 취재하기 위해 安東市 法興洞(법흥동)으로 이동했다. 전탑이란 우리나라에서는 매우 드문 존재인 벽돌로 쌓아 올린 불탑을 말한다.

불탑은 불교에서 법당과 함께 가장 신성시되는 조형물이다. 절에는 반드시 불당이 있고, 부처님의 사리등이 들어 있는 불탑도 있다. 불탑이 바로 부처님인 까닭에 사부중생이 불탑 앞에서 두 손을 모아 간절히 기도하는 것이다.

불탑의 재료는 나라마다 다르다. 중국에서는 塼搭, 일본에는 木塔(목탑), 우리 나라에선 石塔(석탑)이 탑의 主流(주류)를 이루고 있다. 이것이 우리나라를 「석탑의 나라」라고 부르는 까닭이다. 그러나 安東 지역만은 그렇지 않다. 벽돌을 쌓아올려 만든 塼搭이 主流를 이루고 있다. 그렇다면 우리나라의 전탑은 왜 安東을 중심으로 집중되어 있는 것일까?

중국 陝西省(섬서성) 西安에 가면 大雁塔(대안탑)과 小雁塔(소안탑)이라 불리는 전탑이 우뚝 솟아 지금도 이방인들에게는 길 안내의 역할을 하고 있다. 지금의 西安은 팍스 시니카를 실현했던 세계제국 唐(당)나라의 수도인 長安이다.

그 옛날 長安은 東西 교역과 문화의 중심에 있던 메트로폴리스였다. 이곳에는 외국인들의 행렬이 줄을 이었는데, 그 속에는 신라에서 건너간 승려와 학자도 끼어 있었다. 나중에 통일신라의 海東華嚴宗(해동화엄종)을 개창한 義相(의상) 스님도 그들 중 한 사람이었다. 전탑과 義相 스님의 깊은 인연은 이런 만남으로 비롯되지만, 그 자세한 설명은 뒤에 다시 거론하기로 한다.

대안탑은 높이가 무려 64.5m에 달한다. 탑이라기보다는 빌딩처럼 보인다. 탑 안엔 계단이 있어 관광객이 7층 꼭대기까지 오를 수 있다. 각 층마다 불상이 봉안되어 있다. 이 전탑은 印度(인도)에서 귀국한 현장법사가 則天武后(측천무후)의 지원을 받아 세운 것이다.


선진문물에 대한 新羅人들의 憧憬

신라의 入唐 유학승들도 이런 大雁塔과 小雁塔을 주목했을 터이다. 이 두 탑 이외에도 당시 唐에서는 수많은 전탑들이 세워졌다. 唐 이전에는 중국에서도 나무로 만든 목탑이 대부분이었다. 그러나 목탑은 전란이나 화재에 취약했다. 이 때문에 벽돌이 탑의 새로운 소재로 주목받게 된 것이다. 전탑은 목탑이나 석탑보다 높고 웅장하게 쌓을 수 있었다. 중국에서 전탑이 빠른 속도로 번져 나간 까닭이다.

수년 전, 필자는 義相 스님이 중국 화엄의 제2조 智儼(지엄) 스님 문하에서 수도하던 西安 남방의 終南山(종남산)을 답사하러 가는 길에 중국의 「전국 제1 중점문물 보호단위」인 興敎寺(흥교사)라는 큰 사찰에 들렀다. 이 절에서 신라 모량부(지금의 경주시 건천읍) 출신으로 의상 스님의 유학 선배인 圓測(원측)이 唯識學(유식학)을 연구했다.

흥교사 경내에는 전탑 세 개가 우뚝 솟아 있다. 중앙의 전탑이 「西遊記(서유기)」로 소설화하여 더욱 유명해진 求法僧(구법승) 현장 법사의 사리탑이고, 그 왼쪽이 현장 법사의 애제자인 窺基(규기) 스님, 오른쪽이 바로 圓測 스님의 사리탑이다. 이것은 원측 스님의 중국 불교에서의 위상을 말해 준다.

원측 스님은 漢文(한문) 불교권 최고의 唯識學者(유식학자)로서 현장 법사가 印度에서 가져온 華嚴經(화엄경) 등 산스크리트語 경전의 한문 번역에 큰 공적을 세웠다. 원측은 정통을 자처하던 窺基의 慈恩派(자은파)와 경전의 해석을 두고 대립하기도 했으나, 자은파의 해석보다 정확했다고 평가되었다.

그 시절, 신라 유학승의 활약은 대단했다. 10여 명에 이르는 신라 스님이 흥교사에서 공부했다는 기록이 남아 있다. 흥교사 경내의 거대한 전탑을 목격한 신라 승려들의 가슴속에는 선진문화에 대한 동경과 호기심이 가득했을 터이다. 전탑은 이들 유학승들의 귀국과 함께 이 땅에 전해지게 된다.

그 첫 작품이 경주의 분황사 模塼石塔(모전석탑)이었다. 분황사의 모전석탑은 중국 전탑을 충실하게 모방한 것이지만, 재료가 벽돌이 아니라 벽돌처럼 잘라 낸 돌을 재료로 만든 탑이다. 벽돌을 만들기 어려웠던 시절이어서 벽돌의 흉내를 낸 것이다. 당시 선진문화를 상징이었던 전탑에 대한 신라인들의 동경이 그만큼 강렬했던 것이다.

삼국유사는 삼국통일 이전 신라의 서라벌에 이미 전탑이 축조되었던 것으로 전한다. 경주시 건천읍 등에서 전탑의 部材인 연화무늬 벽돌 등이 발견되었는데, 경주의 전탑은 그 파편 등으로 미루어 보아 규모가 크고 화려했던 것으로 보인다. 그러한 전탑의 축조는 유학승들이 귀족 신분이었기에 가능했을 것이다. 그러나 바로 이 때문에 값비싼 전탑은 경주 이외의 다른 곳으로 확산되지 못한 것 같다.

그러나 거의 한 세기 뒤 신라의 변방인 安東에서 전탑은 다시 그 모습을 드러냈다. 安東 전탑들의 재료는 경주에서 발견되는 화려한 무늬 벽돌과는 대조적이다. 安東에 오면 무늬가 단순해지면서 규모는 거대해진다.

安東 新世洞 7층 전탑은 중심가를 조금 벗어나 낙동강 줄기를 끼고 안동댐 쪽으로 올라가다 보면 도로와 병행하는 기차길 왼쪽에 우뚝 솟아 있다. 도로보다 높은 중앙선의 철길에 가려 자칫 지나쳐 버리기 쉽다. 높이 16.8m, 기단 폭 7.75m로서 우리나라에서 最古·最大의 전탑이다. 단층 기단에 7층의 몸돌(塔身)을 차츰 크기를 줄여 가며 쌓았다.

安東의 향토지인 「永嘉誌(영가지)」에는 7층 전탑이 8세기 통일신라시대의 건조물로서 조선 成宗 18년(1487)에 개축되었는데, 당시까지 法興寺가 세 칸 정도 남아 있었다고 기록되어 있다. 현재 전탑이 있는 동네 이름 역시 法興洞이다. 전탑 이외의 유물은 남아 있지 않다. 현재 이 터에는 固城李氏 塔洞派 宗宅(고성이씨 탑동파 종택)이 들어서 있다.

신세동 7층 전탑은 기단부·탑신부·상륜부로 되어 있으나 현재 상륜부는 露盤(노반)만 얹혀 있고, 나머지는 모두 유실되었다. 기단은 方形으로서 그 面石에 八部衆生(팔부중생)과 四天王像(사천왕상)이 돋을새김(陽刻)되었는데, 그 기법이 매우 정교하다. 기단의 네 개 面石은 각각 6개 板石으로 이어져 있다.

塔身部(탑신부)는 흑회색의 無紋塼(무문전: 무늬 없는 밋밋한 벽돌)으로 축조되었다. 각 층 지붕돌(屋蓋石)에는 곳곳에 기와를 입힌 흔적이 있는데, 지금은 대부분 떨어져 나가고 몇 조각만 남아 있을 뿐이다. 이것은 목탑이 전탑보다 앞서 만들어졌다는 사실뿐만 아니라 이 탑을 쌓을 때까지도 당시 사람들이 前 시대에 유행했던 木塔에 대한 미련을 버리지 못하고 있었다는 사실을 입증해 주는 것이기도 하다.


벽돌 7만 개로 축조된 전탑

현존하는 국내의 전탑은 모두 5개인데, 그 중 3개가 安東에 있다. 安東에 있는 전탑은 신세동 7층 전탑과 더불어 안동역 구내에 위치한 동부동 전탑과 조탑동 전탑이 그것들이다. 고려 때 축조한 경기도 여주 신륵사의 전탑을 제외하면 신라 전탑 네 개 중 세 개가 안동에 집중되어 있는 것이다.

전탑 축조는 당시로는 첨단 공법이었다. 그러면 그 대표적인 신세동 7층 전탑은 어떻게 만들어진 것일까?

벽돌 크기는 길이 28cm, 너비 14cm, 두께 6cm 정도다. 이런 벽돌들을 벽면에 평평하게가 아니라 길이쌓기와 마구리쌓기를 섞어 가며 들쭉날쭉 쌓았다. 이렇게 지그재그로 쌓아야 위에서 누르는 힘이 균등하게 전달되어 탑이 안전하다는 것이다. 모서리 부분에는 바닥 벽돌과 같은 정사각형 벽돌을 따로 사용했다.

처마인 옥개 부분의 하단은 조금씩 내쌓기를 하고, 상단은 들여쌓기를 했다. 하단의 층수보다 상단의 층수를 한 단씩 더 많게 만들어 落水面(낙수면)의 기울기를 높였다.

신세동 7층 전탑은 치밀한 사전설계에 따라 만들어진 것이었다. 벽돌 하나하나를 만드는 데서부터 상당한 공력이 들었을 것이다. 한 대학 토목학과 연구팀은 다음과 같이 추산한 적이 있다.

전탑에서 가장 폭이 넓은 1층에만 1만 개의 벽돌이 사용되었다(전탑의 내부도 벽돌로 채워져 있다고 가정할 경우). 벽돌 하나의 무게는 4kg. 그렇다면 벽돌수를 곱한 1층의 무게는 40t이다. 탑은 위층으로 갈수록 부피가 조금씩 줄어들지만, 이를 무시하고 환산하면 전탑 전체의 벽돌수는 7만 장. 그 전체 무게는 280t이나 된다.

이 많은 벽돌을 어디서 만들었을까? 근처에선 벽돌을 굽던 가마터가 발견되지 않았다. 어른이 혼자 운반할 수 있는 무게가 50kg이라면 5600명이 동원되어야 나를 수 있는 규모이다. 어떻든 이런 공사는 사찰 경제력이 뒷받침되지 않고는 가능하지 않다. 安東은 조선왕조 이후 「儒林(유림)의 고장」이라고 불리게 되지만, 안동의 향토지 「永嘉誌」에 따르면 신라·고려시대까지만 해도 경주에 버금가는 불교의 중심지였다.

그렇다면 王京 서라벌에서 비교적 멀리 떨어진 安東 지역이 어떻게 새로운 불교 중심지가 될 수 있었을까? 여기서 주목되는 사실은 안동의 전탑 건립시기와 義相 스님을 祖宗으로 하는 화엄종이 번성하던 시기가 일치하고 있다는 점이다.

의상 스님이 唐나라에서 귀국한 연도는 문무왕 12년(671). 安東에 전탑이 세워진 시기는 그 직후인 8세기였다. 8세기는 의상 스님의 귀국으로 선덕여왕 이후 다시 도래한 불교의 중흥기였다.

의상은 당시의 첨단사상인 화엄종을 깨치고 귀국했지만, 처음엔 신라의 王京 경주에서는 자리를 잡지 못했다. 기득권 세력의 반발 때문이었을 것이다.

의상 스님은 변방인 강원도 양양의 낙산사에서 기도하다가 다시 남하하여 태백산 기슭에 浮石寺(부석사)를 창건하고, 해동화엄종의 문호를 열었다. 화엄은 개인과 사회 간 조화의 철학, 절대和解의 윤리라는 점에서 통일신라의 새로운 시대정신에 부합하는 사상체계였다.

기존의 불교가 귀족 중심의 불교, 三國의 國系(국계)의식에 사로잡힌 불교였다면 화엄종은 일반 백성을 두루 포섭할 수 있는 대중적 불교였다. 화엄철학의 궁극은 존재하는 모든 생명이 본래 부여받은 부처의 광명을 남김없이 발할 수 있게 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화엄종이 변방 安東圈(안동권)을 중심으로 번성할 수 있었던 까닭이었다.


화려하고 발랄한 模塼石塔

塼塔을 답사한 김에 여기서 100리 안팎의 義城郡 塔里面(의성군 탑리면)에 있는 模塼石塔을 보지 않고 그냥 돌아설 수는 없었다. 모전석탑이란 돌을 벽돌처럼 다듬어서 쌓아올린 탑이다. 거의 벗은 몸으로 무대를 휘젓는 가수 마돈나의 노래 중에서 「라이크 어 버진(Like a Virgin·처녀처럼)」이 있다. 그 뜻이 「처녀가 아니면서 처녀인 체하는 것」이라면 모전석탑은 벽돌탑이 아니면서 벽돌탑인 체하는 석탑이다. 義城 탑리 5층 석탑은 통일신라시대인 7세기 말의 작품이다. 경주 芬皇寺(분황사) 모전석탑 다음으로 오래 된 석탑으로 한국 석탑양식을 연구하는 데 매우 중요한 존재다.

안동역에서 5번 국도로 접어들어 의성읍내까지 70리, 여기서 다시 28번 국도를 따라 20리를 더 달리면 동네 한 가운데에 발랄한 모전석탑 하나가 얌전한 체하며 숨어 있다. 이것이 국보 제77호 義城 塔里 5층 석탑이다.

탑리 5층 석탑의 基壇은 단층이지만, 그 기단 밑을 3∼4m 높이의 작은 동산이 떠받치고 있어 2층 기단 이상의 늘씬한 효과를 내고 있다. 단층 기단에는 隅柱(우주: 모서리 기둥) 네 개를 진짜 기둥인 것처럼 模刻(모각)했다. 다만 基壇의 각 面에 2개씩의 탱주(중심부의 버팀돌)를 甲石과의 사이에 別石으로 끼워 넣었다.


국보에 새겨진 낙서

1층 塔身은 남쪽 面에만 감실(이 안에 佛像 등을 모신다)을 조성했는데, 지금 이 안에는 이끼만 소복한 채 아무것도 없고, 누군가가 버린 소주병·담배꽁초·라면 봉지가 흩어져 있다. 그 안쪽 벽면에는 남자 누구와 여자 누구의 이름 사이에 ♡(하트표)가 그려진 낙서까지 새겨져 있다.

남쪽 面 이외의 1층 탑신에도 우주와 탱주가 模刻되어 있다. 특히 주목되는 것은 1층 탑신의 모서리 기둥을 別石으로 하였으며, 이것이 엔타시스(배흘림) 양식을 나타내고, 그 기둥 위에는 목조건물의 柱頭(주두)받침을 模刻하여 木造架構(목조가구)인 것처럼 했다는 점이다. 이러한 양식은 탑리 5층 석탑이 목탑과 전탑의 형식을 복합적으로 반영하고 있는, 목탑에서 석탑으로 넘어가는 과도적인 모전석탑임을 말해 주는 것이다.

2층 이상의 탑신은 그 크기가 급격히 축소되어 시원한 비례감이 돋보이는데, 각 面 모두 우주와 탱주 1주씩을 모각했다. 이들 기둥은 한결같이 엔타시스 양식을 따랐다.

屋蓋石(지붕돌)은 각 층 모두 5단 받침을 지녔고, 落水面(낙수면)의 층단은 6단으로 되어 있으며, 그 추녀는 反轉(반전: 하늘을 향해 들리는 형태)이 거의 없이 수평에 가깝다.

相輪部에는 좀 손상된 露盤(노반)만 남아 있다. 이슬을 받는 그릇이라는 글자 의미의 露盤은 옥개석 위에 놓이는 方形의 部材로서 탑이 佛家의 神聖한 조형물임을 상징하는 것이다.

이렇게 아름답고 생기발랄한 석탑이 관리면에서는 영(0)점에 가까운 푸대접을 받고 있었다. 주위엔 내버린 휴지와 쓰레기 같은 것들이 봄바람에 흩날리고 있었다.

1층 탑신의 북쪽 面에는 「大正 十五年 六月 石塔保存會 重修紀念」이란 제목 옆에다 有村○○, 李○ 등 8명의 이름이 여봐란 듯 나열되어 새겨져 있다. 大正 15년이라면 日帝 때인 1926년. 그때 이 석탑이 기울어져 마을의 有志(유지)들이 돈을 내 중수했던 사실을 기념한 셈인데, 모처럼 좋은 일을 해놓고도 마무리 단계에서 공명심 때문에 두고두고 욕먹게 되었다고 생각하니 쓴웃음이 절로 나왔다.

백제의 古都 부여의 定林寺址(정림사지)에 가도 이런 따위의 낙서를 볼 수 있다. 羅唐연합군이 660년 백제를 멸망시킨 뒤 唐將 蘇烈(소열: 널리 알려진 定方은 그의 字임)은 국보 제9호 5층 석탑 塔身에다 그의 공적을 장황하게 새겨 놓았다. 이른바 紀功文(기공문)인데, 참으로 염치없는 落書(낙서)의 원조인 셈이다.

필자는 좀 떨어진 풀밭의 바위 위에 앉아 탑리 5층 석탑의 주위를 살펴보았다. 탑이 있으까 절도 있어야 하는데, 그 흔적은 없다. 언뜻 필자가 앉은 바윗돌이 바로 이름 모를 절집의 柱礎石(주초석)이 아닌가 하는 느낌이 왔다. 그러고 보니 주변에 柱礎石 같은 것이 여기저기 널려 있다.

참으로 맵시 있는 탑이다. 네모 반듯한 塔身과 문틀의 모습, 塔身部의 기막힌 遞減(체감)의 比例가 형성한 안도감, 오랜 세월 속에 누렇고 거슴츠레하게 변색되어 그것이 오히려 기품을 더하는 2차색의 절묘한 魔力(마력) ―이런 것들이 단연 돋보였다. 다만 오랜 세월의 風雨(풍우)와 제대로 돌보는 이 없는 무관심 속에 탑은 도둑을 맞고 벗은 채로 강간을 당한 느낌이 들었다.

『그래도 너의 육체는 황홀하게 아름다워. 너의 貴骨(귀골)만은 그 누구도 얕잡아보지 못할 거야』


河回탈의 발상지

필자 일행은 다시 의성 읍내와 안동 도심을 거쳐 하회마을로 북상했다. 국보 제121호 河回(하회)탈 및 屛山(병산: 河回마을 바로 이웃 마을)탈을 취재하기 위한 이동이었다. 진품은 현재 국립중앙박물관에 소장되어 있지만, 국보를 만들어 낸 현장을 어찌 그냥 지날 수 있겠는가.

경북 安東市 豊山面 하회마을은 산과 물이 조화를 이룬 「살아 있는 민속마을」이다. 花山, 南山, 그리고 遠志山(원지산)과 芙蓉臺(부용대)가 감싸고 있는 사이로 낙동강의 큰 줄기가 S형으로 흐르고 있다. 그래서 河回, 즉 「물돌이 마을」이란 이름을 얻은 것 같다. 1984년, 정부에서는 하회마을을 중심으로 주위 160만 평을 묶어서 「중요민속자료 제122호」로 지정했다.

하회는 대대로 豊山柳氏(풍산류씨) 가문이 살아온 동족 마을로 임진왜란 당시의 名재상으로서 懲毖錄(징비록: 국보 제132호·月刊朝鮮 5월호 참조)의 저자인 西厓 柳成龍의 고향이다. 서애의 6代祖가 이곳에 입향하기 전에, 이 마을에는 이미 許씨와 安씨가 먼저 정착하고 있었다고 한다.

河回탈은 高麗 때, 이 마을의 許도령이 제작한 것으로 전해진다. 그것은 우리나라의 수많은 탈 중에서도 가장 오래되었고, 유일하게 국보로 지정되었다. 고려말 또는 조선 초기의 작품으로 보인다. 假面 미술 분야에서 세계적으로 높이 평가된다.

처음에는 각시, 양반, 선비, 중, 이매, 초랭이, 부네(기생), 백정, 총각, 별채, 떡다리, 住持(주지) 한 쌍 등 모두 14개 탈이 있었으나 총각, 별채, 떡다리는 언젠가 없어지고 지금은 9개의 가면과 주지 한 쌍이 남아 있다.

하회마을에는 현재 木刻 하회탈을 재현하여 제작하는 工房(공방)이 여러 군데에 있다. 그 만드는 과정을 살펴보면 오리나무를 깎아 한지를 입히고 채색한 다음에 옻칠을 하여 완성한다. 코를 중심으로 좌우 非대칭형을 이뤄 희로애락의 표정변화가 풍부하다. 특히 양반·선비·중·백정의 탈은 턱을 따로 만들어 노끈으로 달아서 놀이를 할 때 움직임이 생생하다. 그 중에서도 양반과 백정의 탈은 세련된 입체감을 주는 뛰어난 예술품이다.

다음은 탈의 제작과 관련한 전설이다.

<어느 날 이 마을에 사는 許도령의 꿈에 산신령이 나타나서 「지금 마을에 퍼지고 있는 재앙은 이 마을을 지켜 주는 地神의 노여움을 샀기 때문」이라며 「탈을 만들어 춤을 추면 神의 노여움이 풀릴 것이나 탈을 만드는 너를 누군가가 엿보면 네가 그 자리에서 피를 토하고 죽을 것」이라고 일러 주었다.

그러나 마을에는 許도령을 사모하는 처녀가 있는데, 도무지 그가 보이지 않자 그녀는 사모의 격정 때문에 움막에서 탈을 만드는 그를 엿보고 말았다. 許도령은 뇌성벽력 속에 탈을 완성시키면서 피를 토하고 죽었다. 죄의식에 사로잡힌 처녀도 뒤따라 자결했다>


엘리자베스 女王도 발로 박자를 맞춘 탈춤

800년간 전승되어 온 중요무형문화재 제69호 「하회별신굿탈놀이」는 당시 소외된 백성들이 지배계급인 양반과 선비의 허구성을 폭로·야유할 수 있는 무대다. 그래서 「탈의 세계는 민주주의」라고 定義라는 분도 있지만, 필자가 생각하기엔 적어도 民本主義의 발로이다.

그렇다면 累代(누대)에 걸친 토호세력인 豊山柳氏의 集姓村(집성촌)에서 어떻게 양반과 선비의 행태를 비판·풍자하는 하회탈과 하회탈놀이가 제작·연희되어 정착되었는지 궁금하다.

하회의 주민 구성이 옛날과 좀 차이가 있을지 모르지만, 지금과 전혀 다르지는 않았을 터이다. 현재 하회마을에는 풍산류씨가 80%를 차지하고 있고, 他姓氏(타성씨)는 20%에 불과하다.

河回탈놀이는 지배계층인 양반의 묵인, 아니 오히려 경제적 지원 속에서 연희되어 왔다고 보인다. 만약 그런 하층계급의 놀이를 보고 양반들이 경을 쳤다면 그것이 오늘날까지 전승되어 올 리가 만무하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공동체 내부에 내재해 있던 계급 간의 모순과 갈등을 탈놀이를 통해 해소하려는 양반계급의 遠謀深慮(원모심려)로 그것이 가능하지 않았겠는가?

하회별신굿탈놀이는 매주 일요일 오후 3시부터 한 시간 동안 마을 입구 상설 전수관에서 공연된다. 필자는 날짜가 맞지 않아 공연관람을 놓친 대신에 그 공연 비디오를 구해 보았다. 총 여덟 마당으로 구성된 이 탈놀이 중 핵심 대목은 이렇다.

<백정이 소 불알을 꺼내어 관중들에게 일장의 해학을 부린다(제3마당). 이어 할미가 베 짜는 시늉을 하며 民生苦를 탄식하며 신세타령을 읊는다(제4마당). 이런 보리흉년에 욕정을 참지 못한 승려가 妓生 부네를 낚아 채는 破戒(파계)를 범한다(제5마당). 양반과 선비도 부네를 서로 차지하려고 학식과 문벌을 내세워 한바탕 싸움을 벌이고, 백정이 지닌 소 불알을 서로 차지하려다 할미에게 핀잔까지 받는다(제6마당). 날이 저물면 농밀한 新房이 차려진다(제8마당)>

하회마을은 최근 몇 년 사이에 무척 많이 변했다. 1999년 4월21일 영국여왕 엘리자베스 2세가 하회마을을 방문하여 「원더풀」 하며 감탄을 연발했다. 여왕은 특히 하회별신굿탈놀이를 관람할 때 자신의 발로 리듬을 맞추며 흥겨워했다고 한다. 이후 하회마을은 「한국 속에서도 가장 한국적인 곳」이란 명성을 얻어 관광객이 몰려들었다.

관광객이 몰리니 대형 주차장을 만들어 주차요금을 징수하고, 관리사무소를 세워 입장료를 따로 받는 일은 불가피한 일인지 모른다. 다만 온 동네가 너무 상업화하여 전통마을의 본질을 잃어 버릴 우려도 없지 않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