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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月刊朝鮮 답사] 한국 天主敎의 발상지 天眞庵에서 생각난 것

정순태   |   2003-06-04 | hit 2837

「바바방- 바바방- 밤바방- 바바방」―베토벤의 심포니 제5번 「運命(운명)」의 모티브다. 한국천주교의 창립은 바로 「運命」 교향곡처럼 전개되었다. 서기 1779년 겨울날 밤, 눈보라를 헤치고 李檗(이벽)이란 26세의 청년이 두물머리(兩水里) 밑 마재(지금의 경기도 남양주시 조안면 능내리)에서 漢江을 건넌 다음 앵자산을 넘어 조그마한 불교의 암자 天眞庵에 등장한다. 그가 바로 이 암자에서 한국천주교회를 世界傳敎史上 유일무이하게 聖職者(성직자) 없이 自生시킨 인물인데, 오늘날 한국천주교는 그를 創立聖祖(창립성조)로 받들고 있다.

당시 천진암에는 權哲身(권철신), 權日身(권일신), 李承薰(이승훈), 丁若銓(정약전), 丁若鍾(정약종), 丁若鏞(정약용) 등 畿湖南人系(기호남인계)의 쟁쟁한 엘리트들이 모여 講學會(강학회)를 열고 있었다. 정약용의 기록(鹿菴 墓誌銘)에 따르면 밤중에 이벽이(천진암에) 도착하여 모두들 촛불을 (자신들 앞에 켜서) 벌여 놓고 나라가 나아가야 할 방향에 대해 (밤새워) 토론했다(李檗夜至 張燭談經). 당시 南人들은 정계의 非主流(비주류)로서 조선왕조의 통치이념인 性理學 유일사상만으로는 국가의 장래가 無望(무망)하다고 판단하고 經世(경세)의 학문인 實學(실학)을 중시하고 있었다.

유교의 經典(경전)과 經世의 학문을 연구한 천진암 講學會의 講長은 당시 44세의 權哲身이었지만, 그 멤버들은 대부분 10代 후반에서 20代 초반에 걸친 젊은이들이었다. 후일 朝鮮實學을 집대성한 茶山 정약용은 그때 나이 불과 18세였다. 그들은 모두 선구적 실학자 星湖 李瀷(성호 이익·1681∼1763)의 學統을 잇는 제자들로서 조선왕조의 낡은 체제를 更張(경장)하려는 동지들이었다.

한국천주교회 創立史(창립사) 연구원 원장 卞基榮 신부는 『젊은 선비들의 불타는 애국심과 진리탐구의 열정이 한국천주교회를 自生시켰다』고 말했다. 卞신부는 이어 훗날(1845년) 우리나라 최초의 神父가 된 金大建 신부도 불과 나이 15세 때 같은 또래의 崔良業(최양업)·崔方濟(최방제)와 함께 압록강을 건넌 다음 걸어서 中國 대륙을 종단하여 6개월 만에 廣東에 도착, 神學(신학) 수업을 받았다』면서 『이렇게 한국천주교회는 세계인들이 놀라워하는 영파워 信心과 자기 희생에 의해 성립되었다』고 강조했다.

초창기 한국천주교를 이해하려면 李檗이란 인물부터 살펴야 한다. 여러분들이 중부고속도로 톨게이트로 들기 전에 통과했던 터널이 바로 曠菴(광암)터널인데, 曠菴이 바로 이벽의 雅號(아호)다.

이벽의 6대조는 병자호란(1636~ 1637) 때 淸軍에 의해 볼모로 瀋陽(심양)에 붙잡혀간 昭顯世子(소현세자)를 수행했던 李慶相(이경상)이다. 소현세자는 이경상을 시켜 독일인 선교사 아담 샬과 접촉토록 했다. 소현세자로서는 北京에다 南堂을 지어 놓고 천문학·수학 등 선진학문과 대포 제조기술로 淸國 조정에 상당한 영향력을 발휘했던 아담 샬 등 선교사들을 상대로 多邊外交(다변외교)를 시도했던 셈이다.


판도라의 상자를 열고 만 李檗

소현세자는 8년 만에 볼모생활에서 풀려나 귀국하면서 조선왕조에 傳敎를 노린 선교사들의 권유로 천주교 서적과 西學 관련 서적을 휴대한데다 중국인 천주교 신자까지 몇 명을 데리고 왔다. 다음 왕위를 계승할 世子가 천주교와 西學에 관심이 깊었다는 것은 당시의 정계·학계의 풍토하에선 결코 예사로운 일이 아니었다.

만약 소현세자가 왕위에 올랐다면 조선사회는 어떤 변화를 겪게 되었을까? 그러나 소현세자는 귀국 후 곧 암살되었다. 조선왕조실록에는 病死(병사)로 되어 있지만, 오늘날 다수의 연구자들은 소현세자 사망 직전의 증세와 검시기록 등으로 미루어 보아 毒殺(독살)이라는 심증을 굳히고 있는 것이다.

소현세자를 따라온 중국인 궁녀와 환관 등의 천주교도들은 자기 손가락으로 이마와 가슴을 찌르는 해괴한 짓을 밥 먹듯 하고(성호를 긋고) 십자가에 매단 벌거숭이 남자(예수)의 像에 경배했다. 그런 모습을 본 당시 지도층은 『西洋雜鬼(서양잡귀)가 붙었다』고 기겁을 했다. 더욱이 시의심이 유별나게 많았던 仁祖는 淸나라의 朝野에 인맥이 두터웠던 소현세자를 王權의 도전자로 간주하여, 부자지간이면서도 政敵(정적)으로 증오했다.

소현세자가 急死(급사)하자 이경상도 향리 포천으로 물러나 은거했다. 이경상은 淸國에서 가져온 궤짝을 개봉하면 滅門之禍(멸문지화)를 당한다는 유언을 하고 죽었는데, 그의 후손 李檗이 판도라의 상자, 즉 그 家傳(가전)의 궤짝을 운명적으로 열고 말았다. 李檗은 궤짝 속에서 끄집어 낸 한문본 西學·西敎 관련서적들을 가지고 깊이 연구했다.

드디어 李檗이 그의 선·후배들에게 서학과 천주교를 전교하기로 결심했다. 그는 서울 수표동 자택을 출발하여 100리 길을 걸어 지금의 팔당 호수변 마재에 있는 茶山 정약용의 집으로 왔다가 다시 물을 건너고 산을 넘는 14km의 길을 걸어 천진암에 당도했던 것이다. 李檗은 茶山의 큰자형이었다.

천주교 측은 강학회에서 李檗의 주도적 역할을 강조한다. 즉 李檗이 천문, 지리, 철학, 수학 등 實學을 강의하면서 天主學을 논증하고 함께 실천케 하여 신앙의 싹이 움트게 했다는 것이다. 그리고 당시에는 曜日(요일)이 없던 때라 음력으로 매월 7, 14, 21, 28일을 휴일, 즉 主日로 정했으며, 天主恭敬歌(천주공경가), 십계명가, 聖敎要旨(성교요지)를 지어 불렀다고 한다. 경세학을 탐구하던 강학회가 종교적 신앙의 수련회로 바뀐 것이다.

이후 천진암 講學 멤버들을 중심으로 한 신앙공동체가 형성되고, 1784년에는 한국천주교회로 발전한다. 즉, 1783년 늦가을 李檗은 李承薰을 北京에 보내 세례를 받게 했다. 이듬해 봄, 이승훈은 北京의 北堂에서 프랑스 신부 그라몽에 의해 한국천주교 최초의 세례교인이 되어 聖經과 聖物 등을 갖고 귀국했다. 이에 李檗은 자신의 서울 水標洞(수표동) 집을 임시 성당으로 정하고 성직자 없이 傳敎 활동에 나섰다.


한국천주교의 恩人이자 背敎者인 茶山

한국천주교회에서 茶山 정약용은 背敎者(배교자) 또는 冷淡信者(냉담신자)가 분명하지만, 절대로 지워 버릴 수 없는 특이한 존재다. 茶山이 기록 또는 편집한 이벽·李家煥·이승훈·권철신·정약전의 묘지명, 遺稿集(유고집) 등이 아니면 초기 한국천주교회사는 미궁에 빠질 수밖에 없다. 프랑스 신부 달레의 명저 「한국천주교회사」도 바로 茶山의 기록에 의해 쓰였다. 그렇다면 茶山의 신앙생활과 背敎(배교)에 이르는 행적을 추적해 볼 필요가 있다.

茶山은 영조 38년(1762) 경기도 남양주시 조안면 능내리에서 나중에 晉州牧使(진주목사) 등을 역임하는 丁載遠(정재원)의 넷째 아들로 태어났다. 천진암에서 강학한 지 4년 뒤인 정조 7년(1783)에 정약용은 22세의 나이로 會試에 합격하여 생원이 되었다.

이듬해 正祖가 신료들에게 「中庸(중용)」의 해석에 관한 숙제를 냈는데, 정약용이 제출한 中庸講義가 조선조 최고의 君師(군사: 군주 겸 스승)로 손꼽히는 正祖의 마음에 쏙 들었다. 이 註解(주해)에 대해 후일 정약용은 『이것은 曠菴의 說』이라고 밝힌 바 있다.

이벽은 茶山의 스승이었다. 이벽의 死後에도 茶山은 그의 학문적 연구가 막힐 때마다 「質問無處」(질문할 데가 없다)라고 아쉬움을 짙게 토로한다.

처음 정약용은 民生을 위한 經世의 학문에 뜻을 두고 西學을 받아들였다. 자연히 그는 李檗으로부터 받은 천주교 책도 탐독하게 되었다. 그로부터 정약용은 약 5년간 「매우 열심히 마음을 기울여」 천주교를 믿었다.


순교자 제1호 金範禹

그러던 정조 9년(1785) 을사년에 성직자 없이 갓 태어난 한국천주교회에 대한 박해가 시작된다. 秋曹(추조: 刑曹)의 禁吏(금리: 수사관)들이, 李檗의 주재로 明禮坊(명례방: 지금의 명동성당 자리)의 金範禹(김범우: 譯官과 醫員을 겸업한 中人) 집에서 진행 중이던 미사현장을 덮친 것이다. 참석자들은 정약용과 그의 형들인 약전·약종, 그리고 이승훈·권일신 등 한국천주교회 창립멤버들이었다.

이때 김범우는 혹심한 매를 맞고 경상도 密陽에 귀양 가서 죽음으로써 한국천주교 순교자 제1호가 되었다. 형조에서는 이벽, 이승훈, 권일신, 정약용 등 명문 양반 출신에 대해선 공권력을 행사하지 않았다. 그 대신에 정약용의 아버지는 押海丁氏(압해정씨) 종친회에, 그리고 이승훈의 아버지는 平昌이씨의 종친회에 불려나가 크게 추궁당했다.

李檗의 아버지 이부만은 경주李氏 문중회의에 여러 번 호출되어 「오랑캐의 법도를 가르치는 斯文亂賊(사문난적)을 족보에서 삭제하겠다」는 공박을 받았다. 족보에서 삭제되면 양반의 지위를 잃고 관직에서도 추방되던 시절이었다. 李檗의 부친은 황해도병마절도사를 지냈고, 李檗의 형과 아우도 武科에 급제하여 무관직에 올라 있었다.

이부만은 드디어 대들보에 노끈을 걸어 목을 매달았다. 李檗은 아버지의 죽음을 살리기 위해 『그럼 안 나가겠습니다』라고 한발 물러섰다. 그리고는 식음을 전폐하고 자신의 방 안에서 15일간 기도와 명상을 하다가 탈진해 죽었다. 1785년 음력 6월14일의 일로 향년 32세였다.

乙巳迫害(을사박해)의 회오리가 불긴 했지만 천주교와 좀 거리를 둔 정약용 일가에는 별다른 타격이 없이 넘어갔다. 정조 13년(1789) 정약용은 文科에 2등으로 급제하고 그 후 엘리트 관료로서 한강에 舟橋(주교: 배다리)를 놓는 規制(규제)를 만들어 올림으로써 「正祖스쿨(抄啓文臣·초계문신)의 최우등생」이 되었다.


피바람 속에서 산 者와 죽은 者

正祖 15년(1791) 珍山사건으로 進士 尹持忠(윤지충) 등이 효수되고 권일신이 모진 고문을 받고 귀양 가서 병사하는, 천주교도에 대한 辛亥迫害(신해박해)가 벌어졌지만, 正祖의 총애를 받은 정약용은 출세의 길을 달렸다. 珍山사건으로 순교한 윤지충은 외사촌 정약용의 권유로 천주교 신자가 되었는데, 모친상을 당하자 神主(신주)를 불태우고 천주교 의식에 따라 장례를 지냈다는 이유로 全州에서 체포되었다. 신해박해 이후 정약용은 천주교와의 관계를 청산했다.

正祖 16년(1792) 정약용은 王命을 받들어 華城城制(화성성제)를 지어 올렸다. 수년 전에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으로 지정된 華城(화성: 수원성)의 설계도를 완성한 것이었다. 華城의 건설은 단순한 축성이 아니라 당시 정계의 主流를 형성했던 老論 세력의 삭감을 위한 正祖의 숙원사업이었다.

그것은 노론 벽파의 謀害(묘해)로 죽임을 당한 아버지 思悼世子(사도세자)를 伸寃(신원)함으로써 그 자신의 정통성을 확보하려 했던 苦心의 役事였던 것이다. 正祖는 華城을 웅장하게 지어 기득권 세력을 견제하기 위해 정예 친위부대를 배치시키는가 하면 사도세자의 무덤도 華城 가까이로 이장하여 顯隆園(현륭원)으로 격상시켜 놓고 한강에 배다리를 가설하여 陵幸(능행)을 거듭했던 것이다.

1796년 華城이 준공되었는데, 거중기(크레인) 등의 이용으로 국고금 4만 냥이 절감된 것으로 평가받았다. 그 공로로 茶山은 36세 때 좌부승지에 올랐으나 또다시 천주교 신자로 지목되어 반대파(攻西派)의 탄핵을 받았다. 그래서 그는 천주교와의 관계를 해명하는 辨謗疏(변방소)를 올리고 사직했다.

그런 茶山은 바로 몇 개월 뒤 谷山府使로 기용되었다. 목민관으로 뛰어난 자질을 보인 그는 때마침 전국적으로 천연두가 창궐하자 「麻科會通(마과회통)」 12권을 지어 우리 역사상 처음으로 종두법을 소개했다. 正祖 23년(1799) 그는 또다시 內職(내직)으로 돌아와 형조참의를 제수받았으나 반대파의 공세로 곧 물러나고 만다.

1800년 6월, 정약용을 「미래의 재상」으로 지목했던 正祖가 급사했다. 老論 ♥派(노론 벽파)를 견제하기 위해 南人 時派를 옹호했던 正祖의 死因(사인)에 대해선 毒殺說(독살설)이 끊임없이 거론되어 왔다. 어떻든 正祖의 急死로 英祖의 繼妃(계비)이며 골수 노론 벽파 가문 출신인 대왕대비 경주김씨 貞純王后(정순왕후)가 12세의 純祖를 섭정하면서 垂簾聽政(수렴청정)을 폈다.

이런 판에 정약용의 셋째 형 若鍾이 신유년(1801) 1월19일 敎理書·聖具 등을 담은 책롱을 은밀한 곳으로 운반하려다가 漢城府의 捕校(포교)에게 적발되었다. 이로써 2월9일, 이가환(前 공조판서), 이승훈(前 천안현감), 정약용을 국문하라는 司憲府(사헌부)의 臺啓(대계:공소장)가 올라갔다.

<오호, 애통하옵니다. 이가환, 이승훈, 정약용의 죄악은 죽이기만 하고 말겠습니까. 정약용은 본래 두 醜物(추물: 이가환·이승훈)과 한 뱃속이 되어 협력했습니다. 그의 자취가 이미 탄로되었을 때는 상소하여 다시는 믿지 않겠다고 입이 닳도록 맹세하였습니다. 그러나 몰래 요물을 맞아들이며 예전보다 더 심해졌으니 임금을 속였고…>

숙질 간인 이가환과 이승훈(다산의 매부)은 죽임을 당했다. 정약용과 그의 둘째형 약전은 천주교와 관계를 청산한 정황이 참작되어 각각 멀리 귀양을 갔다. 정약용은 경상도 장기와 전라도 강진에서 18년간 귀양을 살면서 대작 「牧民心書」, 「經世遺表」 등을 완성했다. 정약전은 유배지에서 玆山魚譜(현산어보)를 저술하고 귀양 17년째에 不歸(불귀)의 客이 되었다. 정약전이 물고기의 생태를 관찰한 기록인 「玆山魚譜」는 과학적이고 실증적인 내용을 담고 있다. 정약용이 설계한 수원성 축조공사도 과학적이어서 경비절감을 많이 했다. 이는 천주교를 받아들인 선비들이 합리적이고 과학적인 근대정신을 갖게 되었다는 의미가 될 것이다. 정약종은 그의 장남 鐵相(철상)과 함께 西小門 밖(지금의 서소문공원 자리)에서 처형되었다. 淸國人 신부 周文模(주문모)도 이때 자수하여 사형을 받았다. 이른바 신도 수천 명의 피가 내를 이룬 辛酉迫害(신유박해)였다.

신유박해는 이 정도로 끝나지 않았다. 그해 가을에 黃嗣永(황사영)의 帛書(백서)사건이 일어났다. 백서사건이란 도피중이던 황사영이 중국에 있던 프랑스 선교사에게 흰 비단에 써서 보내려던 密書(밀서)가 적발되어 빚어진 사건이다.

편지의 내용은 청국황제가 조선 국왕에게 천주교도 박해 중지의 압력을 가하도록 선교사들이 개입해 달라는 청원이었다. 황사영은 즉각 체포되어 능지처참을 당했다. 황사영이라면 16세에 진사시에 장원급제한 秀才로서 정약용의 조카사위다.


천진암 일대 30만 평에 들어설 聖堂

광주-천진암 인터체인지를 빠져나가 45번 국도를 따라 3km쯤 가다 「윗도마치」 삼거리에서 308번 지방도로로 접어들면 팔당호의 남쪽 호면 위에 걸려 있는 광동교를 만나게 된다. 광동교를 건너면 퇴촌우체국이며 여기서 광주산맥의 한복판 앵자봉의 품 속으로 파고드는 외가닥 길을 25리쯤 달리면 천진암이다.

천진암은 조그마한 암자였지만, 본래 한국천주교가 그 일대에 성지로 잡아 놓은 면적은 약 200만 평에 달한다. 변기영 신부는 『성역內에 17만 평의 터에 가톨릭 신앙의 한국토착화 대성당을 지어 세계적인 순례지로 만들 것』이라고 말했다. 한국천주교 창립 300주년인 2079년에 맞춰 준공 예정인 천진암 大聖堂은 일시에 3만 명을 수용할 수 있는 기념비적인 건물이 되리라고 한다.

대성당 부지 위쪽으로 난 講學路로 접어들면 한국천주교 200주년 기념비가 세워져 있다. 기념비에는 茶山이 지은 권철신과 정약전의 묘지명을 발췌·인용하여 한국천주교의 창립을 설명한 글이 새겨져 있다.

여기서 산길 小路(소로)를 20분쯤 오르면 옛 천진암 터가 있다. 천진암 터 위에는 이벽, 이승훈, 권철신, 권일신, 정약종 등 「한국천주교의 창립선조」 5人의 묘역이 조성되어 있다. 묘역 동쪽으로는 李檗이 7년간 머물었던 집터가 있고, 묘지 바로 아래쪽엔 1789년 강학회 멤버들이 아침마다 세수를 했다는 氷泉(빙천)이 있다.

대성당 부지 동쪽 앵자봉 기슭에는 「조선교구 설립자 묘역」이 있는데, 정약용 집안의 가족묘지를 방불케 한다. 그곳에는 가톨릭 朝鮮敎區(조선교구)의 설립자이자 茶山의 조카인 丁夏祥(정하상: 1795~1839)의 묘가 있다. 정하상은 서소문 밖에서 참수당한 정약종의 둘째 아들로서 그 역시 38년 후 같은 장소에서 순교했다. 정하상 묘 바로 밑에는 정약용의 조부모·부모·정약전의 묘 그리고 李檗의 부모·동생부부·누이의 묘가 있다. 이런 의미에서 한국 초기 교회사는 정약용 가문의 가족사를 방불케 한다.


고독이 大作의 배경

茶山의 묘는 그의 마재 옛집 뒤편 언덕 위에 있다. 그는 18년의 유배생활에서 풀려 마재로 돌아와서도 17년을 살고 憲宗 2년(1836) 75세의 나이로 별세했다. 당시의 내로라하던 사람들은 그의 집 앞을 지나면서도 茶山을 외면했다.

그는 외로웠다. 그는 고독 속에서 「欽欽新書(흠흠신서)」 30권, 「雅言覺非(아언각비)」 3권 등의 대작을 완성했다. 茶山의 유배지 康津(강진)과 고향 마재야 말로 조선실학의 대표적 학자이며 最多作 저술가를 위한 天賦(천부)의 産室(산실)이었다.

한국천주교야말로 앙상레짐(舊制度)을 개혁하여 새로운 세상을 만들려고 했던 신진학자들에 의해 自生하였지만, 선진학문에 바탕한 그들의 更張(경장: 개혁)사상이 당시의 국가 이데올로기에 용납되지 못함으로써 그 후 興宣大院君(흥선대원군) 집권 시기까지의 거듭된 박해로 교인 수만 명이 참수되는 피의 역사를 기록했다. 진정한 更張에 실패한 조선왕조는 끝내 外敵에게 나라를 뺏기고 말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