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료실

국보기행 (15) - 文殊신앙의 중심 五臺山을 가다

정순태   |   2003-04-03 | hit 8210

2월27일 오전 7시, 짙은 안개를 뚫고 東서울 인터체인지(IC)를 통해 중부고속국도로 접어들었다. 이천 휴게소 부근을 지날 때 진눈깨비 비슷한 눈발이 잠깐 비치긴 했지만, 봄이 오는 大勢(대세)는 막을 수 없는가 보다. 겨우내 메말랐던 나뭇가지에 제법 윤기가 흐르고 있다.

호법 IC를 통해 이번에는 영동고속국도로 접어들어 여주-문막-원주-횡성 구간을 거치면 平昌郡(평창군) 경내로 들어선다. 여기서부터 산세가 한결 험해져 둔내터널·봉평터널을 잇달아 만난다.

봉평이라면 李孝石(이효석)의 단편소설 「메밀꽃 필 무렵」의 무대가 아닌가. 이틀 후가 바로 춘삼월인데, 아직도 이곳엔 눈이 많이 쌓여 있다―이런 생각을 하는 중 필자를 실은 승용차는 다시 터널로 돌입한다. 이곳 珍富(진부) 1, 2, 3터널을 빠져나오면 곧 진부IC다.

진부IC에서 6번 국도가 연결된다. 그 들머리길에 「오대산 월정사 10km」라는 표지판이 세워져 있다. 6번국도를 따라 15리쯤 북상하면 간평리의 월정삼거리를 만난다. 하얀 雪原(설원)이 五臺山(오대산)의 뭉텅한 자락을 감고 돌아가며 끝도 없이 펼쳐 있다. 이곳의 눈은 3월 말이 되어야 풀린다고 한다. 평창―과연 2010년 겨울 올림픽의 개최 후보지로 손꼽힐 만한 곳이다.

월정삼거리에서 강릉-주문진으로 가는 6번 국도를 버리고 서쪽편 446번 지방도로로 접어들어 10리쯤 달리면 강원도 평창군 진부면 東山里(동산리) 「五臺山 月精寺」(오대산 월정사)다. 월정사를 품고 있는 오대산은 풍광이 장엄할 뿐 아니라 예로부터 五萬(5만) 보살이 상주하는 聖地(성지)로 신성시되어 왔다.

東서울IC에서 월정사 일주문까지 승용차로 2시간30분 거리다. 쭉쭉 뻗은 아름드리 전나무의 숲을 뒤로 한 일주문에는 「月精大伽藍」(월정대가람)이라 쓰인 현판이 높직하게 걸려 있다. 1981년 입적한 학승 呑虛(탄허) 스님의 글씨다. 월정사는 대한불교 조계종 제4교구 本寺다.

수령 수백 년에 이르는 전나무들의 사잇길 800m를 빠져나가면 金剛淵(금강연)을 만난다. 이 못에는 냉수성 어류인 열목어가 서식하고 있다. 월정사라면 신라시대의 慈裝律師(자장율사)로부터 근대의 漢岩(한암) 스님에 이르기까지 이름난 고승들이 머물렀던 곳이다.


積雪 뒤집어쓴 月精寺 8각9층 석탑의 美學

오전 10시, 국보 제48호 월정사 8각9층 석탑 앞에 섰다. 9층탑의 옥개석(지붕돌)들 모두가 눈을 소복하게 이고 있다. 날씨는 잔득 흐려 어둡고, 간간이 옅은 눈발까지 휘날린다. 9층 석탑을 바로 앞에 둔 寂光殿(적광전)을 비롯한 모든 殿閣(전각)들의 지붕도, 또 그 뒤쪽 전나무 숲도 하얀 積雪(적설)을 뒤집어쓰고 있다.

동행한 李五峰 사진부장은 잔뜩 흐린 날씨 때문에 『사진이 안 되겠다』고 몹시 걱정했지만, 肉眼(육안)으로 보는 월정사의 베스트는 역시 이런 겨울 山寺의 모습이다. 중창한 지 얼마 되지 않은 전각들의 울긋불긋함과 신축 중인 요사채의 요란스러움을 하얀 눈이 일거에 감춰 주기 때문이다. 석탑 주위의 적설만 대충 치워 놓고 있었다.

이 석탑은 고려시대의 특수형 석탑의 대표적인 존재로서 여러 차례의 화재 등으로 손상된 곳이 많으나 대체로 원형을 유지하고 있다. 석탑의 구성을 보면 일반형 석탑과 같이 基壇部(기단부) 위에 塔身(탑신)과 相輪部(상륜부)를 올렸으나 그 평면은 전체가 8角을 이루고 있어 특이하다.

기단부는 4매로 結構(결구)된 地帶石(지대석) 위에 놓였는데, 하층 기단의 面石도 4매의 돌로 짜여졌으며, 8角의 각 面에는 2구씩의 眼象(안상)이 음각되고, 하층 기단의 甲石(갑석: 돌 위에 올려 놓은 납작한 돌) 또한 4매의 돌로 이뤄졌는데, 위에는 여러 잎의 仰蓮(앙련: 솟은 연꽃)이 조각되었다.

그 위에는 상층 기단의 中石 사이에 別石을 끼어넣었고, 별석 윗면에는 괴임이 얕게 마련되었다. 상층 기단의 中石에는 각 모서리마다 隅柱(우주: 갓기둥)가 새겨 있고, 甲石 밑에는 얕은 받침이 있다. 상층 기단의 갑석 위에도 1매의 별석 받침을 집어 넣었다.

탑신부는 위층으로 올라갈수록 조금씩 줄어드나 급격하지는 않다. 屋身石(옥신석) 또는 屋蓋石(옥개석)의 크기에 따라 2개 내지 3개의 석재를 사용하였고, 상층부는 1石씩이다.

상륜부는 露盤(노반: 드러난 반석)·覆鉢(복발: 엎어 놓은 발우)·仰花(앙화: 솟은 꽃장식)까지가 石材다. 그 이상의 擦柱(찰주: 꽂을 쇠)·寶蓋(보개: 덮개)·水煙(수연: 물안개)·龍車(용차: 구슬)·寶珠(보주: 구슬) 등은 금동제인데, 창건 당시의 것이 아니다(월정사 8각9층석탑 세부 명칭도 참조).

1970년 해체 복원 때, 5층 옥개석과 1층 옥신석의 윗면에서 많은 舍利莊嚴具(사리장엄구)와 銀製鍍金如來立像(은제도금여래입상)·香盒(향합)·四龍文銅鏡(사룡문동경) 등이 발견되었다. 건립연대는 고려 초기인 서기 1000년 전후로 추정되었다. 전체 높이 15.15m.

8각9층 석탑 바로 앞에 정중하게 왼쪽 무릎을 세우고 앉은 모습의 石造 보살좌상(보물 제139호)이 있었는데, 현장에 없었다. 작년 말, 딴 곳으로 옮겨 보수작업을 했다고 하는데, 지금은 臺座(대좌) 부분의 결빙으로 인해 4월에나 제자리에 복원할 것이라고 한다.

석조 보살상은 현장에 없어도 이미 월정사를 여러 번 방문했던 필자의 눈에는 선하다. 부처님의 사리가 봉안된 석탑을 향해 오른쪽 무릎을 꿇고 두 손을 가슴께에 모아 공양을 드리는 모습이다. 입에 미소를 머금은 보살은 턱이 약간 길고, 뺨은 도톰하여 매우 부드럽다. 조금 아래로 내려놓은 오른쪽 팔꿈치 밑에는 받침을 괴었는데, 익살스럽게도 이 받침은 童子像(동자상)이다.

이 보살상은 藥王(약왕)보살을 묘사한 것이다. 약왕보살은 부처님의 사리를 수습하여 팔만사천의 사리탑을 세우고 탑마다 보배로 만든 깃발과 풍경을 매달아 장엄했다고 한다. 그래도 모자라 사리탑 앞에서 자신의 두 팔을 태우며 칠만이천世 동안 공양했다는 것이다.

월정사는 오대산이 문수보살이 머무는 성지라고 생각했던 慈藏律師(자장율사)가 신라 善德女王 12년(643) 唐나라에서 귀국하여 임시로 초가를 짓고 문수보살의 眞身(진신)을 親見(친견)하고자 함으로써 비롯된 유서깊은 절이다. 문수보살이라면 지혜의 으뜸 보살로서 석가여래를 모시는 대웅전 등에 가보면 여래 왼쪽의 挾侍佛(협시불)로 봉안되어 있다.

慈藏은 월정사 창건 후 서라벌 분황사에 머물면서 신라 최고의 승직인 大國統(대국통)에 추대되어 황룡사에 삼국통일을 기원하는 9층탑을 세울 것을 여왕에게 진언했다. 황룡사 9층탑 완공 후인 선덕여왕 15년(646)에는 양산 통도사에 金剛戒壇(금강계단)을 지었으며, 불교 교단의 기강을 바로 세운는 데 진력했다. 그렇다면 慈藏이 어떤 행로를 거쳐 오대산의 開山祖(개산조)가 되었을까.


『내 차라리 하루라도 戒를 지키고 죽을지언정…』

慈藏은 신라 진평왕 12년(590) 진골 金武林(김무림)의 외아들로 태어났다. 어린 나이에 부모를 여읜 뒤로 인생무상을 깨닫고 수도의 길로 들어섰다. 조정에서는 그가 현명하다는 평판을 듣고 여러 차례 불렀으나 나아가지 않았다. 드디어 선덕여왕이 사자를 보내 『出仕(출사·벼슬하여 관아에 나감)하지 않으면 목을 베리라』고 통보했다. 자장은 이렇게 맞섰다.

『내 차라리 하루라도 戒(계)를 지키고 죽을지언정, 백년을 살기를 원치 않는다』

마침내 선덕여왕도 그의 出家(승려가 됨)를 허락했다. 그는 선덕여왕 5년(636)에 唐(당)나라로 건너가 불법을 익혔다. 어느 날, 老스님으로 화한 문수보살이 나타나 자장에게 가사와 발우, 부처님의 頂骨舍利(정골사리) 등을 주면서 이렇게 일렀다고 한다.

『이것은 부처님의 도구이니 잘 간직하라. 당신 나라 동북방 溟州(명주) 땅에 오대산이 있는데, 그곳에 一萬 문수보살이 거주하시니 가서 뵙도록 하라』

월정사는 그후 성덕왕(재위 702∼736) 때 중창되어 오늘날의 터전이 되었다. 사찰 측의 기록에 의하면 조선 숙종 10년(1684), 영조 28년(1752), 순조 32년(1832)에도 중창되었다.

현재 남아 있는 월정사의 건물들은 6·25의 전화로 완전히 불탄 후 새로 건립된 것으로 그 이전의 가람배치는 자세히 알 수 없으나 金堂(금당)인 寂光殿 바로 앞에 8각9층 석탑을 놓고 그 옆에 講堂(강당)과 僧堂(승당)을 배치한 것으로 보인다. 이렇게 월정사의 가람배치는 금당 뒤쪽이 산이라는 조건 때문에 특수한 형태를 이루고 있다. 신라시대 사찰은 中門-탑-金堂-강당의 순서로 南北子午線上(남북자오선상)에 일직선으로 놓이는 것이 일반적인 형태다.

이른 아침부터 설쳤던 바람인지 정오가 되기도 전에 배가 고팠다. 낯선 나그네로서 절집에서 점심 공양을 받을 염치가 아니어서 월정사를 빠져나와 간평리까지 10리 길을 내려왔다.

매표소 인근에도 식당들이 많지만, 굳이 월정삼거리 조금 못미친 곳에 있는 「오대산농원 산채전문식당」을 찾아갔다. 2년 전 늦가을, 가족과 함께 이 식당에 들러 산채정식을 맛본 다음에 고랭지 배추 10여 포기를 사서 이른 김장까지 담궜던 인상깊은 추억 때문이다. 산채정식의 값은 8000원에서 1만원으로 올랐지만, 오대산 산채는 여전히 정갈하고 개운했다.


最古·最美의 상원사 銅鐘

점심을 끝낸 후 다시 월정사 매표소를 통과, 월정사 옆을 지나는 비포장도로 9km를 거쳐 上院寺(상원사) 주차장에 승용차를 세워 놓았다. 주차장에서 상원사까지 미끄러운 오르막길 300m. 하얀 눈 위에 발자국을 찍으면서 조심조심 오르는 재미가 알뜰하다.

곧장 宗主室(종주실)로 찾아갔다. 이곳 논지 스님의 허락이 없이는 상원사에 있는 국보 3점에 대한 사진취재를 할 수 없기 때문이다. 다른 곳에 나가 있던 논지 스님이 연락을 받고 얼마 후 종주실로 돌아왔다.

논지 스님은 절 마당 남쪽 끝에 있는 動靜閣(동정각)의 자물쇠를 따주었다. 동정각 들보에는 한국 범종을 대표하는 국보 제36호 상원사 銅鐘(동종)이 걸려 있다.

상원사 銅鐘은 현존하는 우리나라 범종 가운데 가장 오래되고 제일 아름다운 것으로 통일신라 시대 전성기의 작품이다. 높이 167cm, 구경 91cm. 봉덕사 성덕왕 신종(높이 333cm, 구경 227cm)보다 작으나 제작연대는 46년 빠르다.

조성 당시 어느 사찰에 있었는지는 失傳(실전)되었다. 불교가 박해를 받던 조선왕조 태종 때 安東都護府(안동도호부)의 문루에 옮겨져 있다가 好佛(호불)의 군주인 世祖의 유지에 따라 예종 원년(1469)에 상원사로 옮겨졌다고 한다.

銅鐘 꼭대기에는 굳센 발톱의 네 발로 종을 낚아채고 등허리를 동그랗게 구부린 한 마리의 龍(용)이 아가리를 사납게 벌리며 약동하고 있다(상원사 동종 세부 명칭도 참조). 이것은 용을 새긴 쇠붙이 꼭지로서 들보에 매다는 고리라고 해서 龍♥(용뉴)라고 불린다. 용뉴 좌우에는 銘文(명문)이 새겨져(陰刻), 이 종의 제작 연대와 연유를 밝히고 있다.

용뉴 옆에는 연꽃과 덩굴 무늬로 장식된 音筒(음통)이 붙어 있는데, 소리의 울림을 도와준다. 우리나라 범종에서 가장 특징적인 것은 바로 음통이다. 파이프 모양의 음통이 鐘身(종신)의 내부와 그 윗부분의 바깥면인 천판을 맞뚫고 있다. 중국이나 일본 종에는 음통이 없다.

용뉴 아래의 鐘身은 나팔꽃처럼 약간 길죽하게 배(鐘腹)를 불리다가 밑자락에서 안으로 살짝 오므라든 모습이다. 알맞은 비례감과 안정감으로 조화미의 극치를 이룬다. 종신에는 肩帶(견대=上帶)와 下帶(하대), 乳廓(유곽), 乳頭(유두), 撞座(당좌:종을 치는 부분), 飛天像(비천상)을 갖추고 있다.

견대와 하대, 그리고 유곽 4개의 문양은 모두 唐草紋(당초문)을 돋을새김(陽刻)했다. 특이한 것은 네 곳의 유곽 중 한 군데에 鐘乳(종유: 젖꼭지 모습의 장식) 하나가 없다. 이와 관련하여 다음과 같은 이야기가 전해진다.

<세조 때 상원사에 봉안할 종을 8도에서 찾던 중 安東都護府 문루에 걸려 있던 동종이 선정되었다. 안동에서 상원사로 옮겨오던 중에 3379근이나 되는 큰 종이 죽령을 넘으려 하는데 움직이지 않았다. 그래서 36개의 종유 중 하나를 떼내니 비로소 움직였다>

종신 가운데 부분엔 2∼4인의 飛天像(비천상)이 양각되어 있고, 비천상과 교대로 있는 당좌에는 8잎 蓮花紋(연화문)을 새겼다.

특히 鐘腹의 대칭되는 두 곳에 양각된 비천상은 구름 위에서 天衣(천의) 자락을 휘날리며 (공후)를 켜고 笙(생)을 부는 天人의 모습인데, 섬세한 손, 볼록한 두 뺨, 늘씬한 몸의 곡선 등이 매우 사실적이며 경쾌하다.

용뉴 좌우에 해서체 명문의 첫머리에 「開元十三年乙丑三月八日鐘成記之」라고 새겨져 있어 聖德王 24년(725)에 조성되었음을 알 수 있다. 開元은 唐玄宗(당현종)의 연호다. 종을 제작하는 데 참가한 승려와 감독자의 이름, 관직명, 그리고 「都合鍮」(도합유)의 都合 등 이두문도 적혀 있어 귀중한 연구자료가 되고 있다.


요즘 佛事가 성행하는 까닭

상원사 동종의 취재를 마친 시간이 오후 2시. 이제는 경내의 淸凉禪院(청량선원)에 들어가 국보 제221호 木造 문수동자 坐像을 취재해야 할 판인데, 갑자기 들어가지 못할 상황이 벌어졌다. 오후 2시부터 청량선원에서 법회가 열려 오후 4시에 끝날 예정이라고 했다.

오전 중에 잔뜩 흐렸던 날씨가 이 무렵 쾌청으로 돌아섰다. 李부장은 월정사 8각9층 석탑에 대한 사진취재를 보충하겠다고 내려갔다. 필자는 논지 스님에게 차 한 잔 대접하겠다고 제의, 함께 상원사 경내 찻집으로 모셨다. 작설차를 마시며 2시간 동안 상원사의 사적과 관련한 얘기를 나눴다. 평소 필자가 궁금해 하던 다음과 같은 질문도 했다.

─요즘 사찰에 가면 거의 모두 重創(중창)이니 蓋金(개금)이니 飜瓦(번와)니 하는 佛事(불사)를 크게 벌이고 있습니다. 왜 그렇습니까?

『시대가 변했기 때문입니다. 옛날에 승려들은 승방 하나에 여러 명이 거쳐했습니다만, 요즘은 1인 1실을 원합니다. 승려라고 군대 내무반 식의 생활을 하라고 할 수는 없지요. 그래서 요사채가 부족해서 공사를 하는 겁니다. 또 신도들을 위한 시설도 증축할 수밖에 없는 형편입니다. 옛날 같으면 눈이나 비가 와도 신도들이 밖에서 점심공양을 받았습니다만, 오늘날 이런 불편을 감수할 신도가 과연 몇 명이나 되겠습니까. 앞으로도 佛事는 계속될 수밖에 없는 겁니다』

─상원사는 지혜의 보살인 문수보살을 모시는 사찰이라서 그런지 입시 시즌에 학부모들로 붐빕디다. 입시 합격을 비는 100일 기도 같은 것은 불교를 祈福化(기복화)하지 않겠습니까. 입시에선 남의 불행이 나의 행복이 되거든요.

『사찰이라고 해서 속세와 절연할 수는 없는 것이죠』


世祖가 文殊童子를 친견했다는 설화

상원사는 조선왕조 7대 임금 世祖와 매우 인연이 깊은 사찰이다. 세조는 쿠데타(癸酉靖亂)를 일으켜 어린 조카 端宗(단종)을 上王으로 밀어내고 즉위했으며, 그 후 많은 충신들을 도륙하고 끝내는 魯山君(노산군)-庶人(서인)으로 강등된 단종마저 죽임으로써 유교적 대의명분에 어긋난 정권을 세웠다.

세조도 인간인 만큼 단종을 죽인 죄책감에서 쉽게 벗어날 수 없었던 것 같다. 특히 만년에는 단종의 母后(모후)인 현덕왕후의 혼백이 꿈에 자주 나타나 세조를 괴롭혔다. 세조의 장남 의경세자가 죽자 세조는 현덕왕후의 저주 때문이었다는 구실로 그녀의 무덤을 파헤치는 등 해괴한 패륜까지 범했었다.

이어 꿈에서 현덕왕후가 세조에게 침을 뱉고 난 뒤에 세조는 온 몸에 종기가 돋고 고름이 나는 문둥병에 걸렸다. 세조는 백약이 효험이 없자 오대산으로 친행, 부처님께 기도를 올려 병이 낫도록 발원했다.

상원사에서 기도하던 어느 날 세조는 오대천의 맑은 물에 목욕을 하고 있었다. 그때 마침 옆을 지나던 동자승에게 세조는 등을 밀어줄 것을 부탁했다. 동자승이 등을 밀자 몸이 한결 개운해졌다. 세조는 동자승에게 『그대는 누구에게든 임금의 옥체를 씻어 주었다고 말하지 말라』고 했다.

이에 동자승이 미소를 지으며 이렇게 응수했다.

『대왕은 누구에게든 문수보살을 친견했다고 말하지 마십시오』

그리고는 동자승이 홀연히 사라졌다. 세조가 놀라 주위를 살피니 동자승은 간 곳 없고 종기는 씻은 듯이 낳았다고 한다. 세조는 감격하여 畵員을 불러 그 때 만난 동자승의 화상을 그리게 했다. 그러나 畵員들은 세조가 친견한 문수동자상을 제대로 그리지 못했다. 그러던 어느 날, 한 노승이 찾아와 그려보겠다고 자임했다. 세조가 이런저런 모습을 설명했으나 노승은 듣지도 않았다. 노승이 그린 그림은 세조가 친견했던 문수동자와 똑같았다. 세조가 기뻐하며 물었다.

『스님은 어디서 오셨습니까』

『나는 靈山會(영산회)에서 왔습니다』

그리고는 곧 구름을 타고 하늘로 올라갔다는 얘기가 전해 온다. 그것이 사실이라면 세조는 문수보살을 두 번이나 친견한 셈이다. 영산회는 석가모니가 제자들에게 설법했던 영취산의 모임이다.

하지만 위의 설화는 非신자가 믿기에 좀 황당하다. 세조는 기왕에 유교적 도덕관으로는 결코 용납될 수 없는 찬탈의 죄를 범한 임금이다. 그가 好佛의 군주가 된 것은 今上(금상)을 부처로 보는 불교를 이용하여 민심을 수습하려고 했는지도 모른다. 그런 정략의 일환으로 문수보살을 두 번 친견했다는 시나리오가 창작된 것이 아닐까?

세조는 조선왕조의 지배 이데올로기인 성리학자들의 반대를 무시하고 지금의 서울 탑골공원 자리에 원각사를 세우고, 많은 불서를 간행했다. 상원사와 그 本寺인 월정사는 당시 1000만 평이 넘는 토지를 보유했다. 상원사 논지 스님은 이렇게 말했다.

『세조 임금이 상원사 위의 비로봉에 올라 거기서 눈에 보이는 땅은 모두 상원사의 땅으로 삼으라는 특지를 내렸다』

세조가 상원사를 처음 찾은 시기는 그의 재위 10년(1464) 무렵이었다. 그가 그로부터 4년 뒤인 재위 14년(1468) 9월에 사망한 것을 보면 앞에 쓴 일화와는 달리 그의 숙환이 더욱 악화되어 갔음을 알 수 있다.


조선 최고의 예술품― 木造 문수동자 좌상

그야 아무튼 상원사 木造 문수동자 좌상은 오대산에 문수보살이 常住(상주)한다고 믿는 불자들에겐 그 징표의 하나가 되고 있다. 오후 4시, 청량선원에 들어가 문수동자 좌상을 배관했다. 왕실의 발원으로 지은 불상에 값할 만큼 최고 수준의 예술품이다.

동자상인 만큼 寶冠(보관)을 쓰지 않고 긴 머리카락을 양쪽으로 땋아 묶어 올리고 앞머리는 자연스럽게 내려 이마를 가렸다. 원래 문수동자는 육계(상투)가 다섯 개이지만, 그렇게 하기엔 조형상 매우 까다롭고 효과도 없기 때문에 쌍뿔머리로 만든 것으로 보인다.

얼굴은 양볼이 통통하고 입가에 보조개를 깊이 파서 동자상으로서의 천진성을 나타내고 있다. 이목구비의 표현은 온화하고, 적당히 가는 목에는 三道가 뚜렷하다. 구슬 등을 꿴 목걸이를 걸쳤는데, 그 사이로 드러나는 오른쪽 젖꼭지가 앙증맞을 정도로 깜찍하다.

通肩(통견)의 天衣를 걸치고, 가슴 밑으로 띠를 둘렀는데, 옷주름이 매우 입체적이다. 팔에는 팔찌를 끼고, 手印(수인)은 九品印(구품인)을 나타냈다. 오른손을 어깨 높이로 들어 엄지와 중지를 맞대었고, 왼손은 수평으로 들었다. 앉은 자세는 半가부좌이다. 총 높이 98cm.

상원사 문수동자상은 1984년 7월, 그 腹臟(복장)에서 발견된 23점의 유물 중 造成發願文(조성발원문)에 의해 세조 12년(1464)에 지은 것임이 확인되었다. 조성발원문에는 세조의 외동딸인 懿淑(의숙) 공주가 남편과 함께 세조·貞憙王后(정희왕후)·왕세자의 壽福(수복)과 자기들의 득남을 위해 문수동자상 등 8구의 불상과 16구의 羅漢像(나한상)을 조성했다고 기록되어 있다. 심청색 명주에 朱砂(주사)로 筆寫(필사)한 것이다. 크기 23.3×31.3cm. 문수동자상의 복장에서 나온 유물(보물 제793호)은 월정사 성보박물관에서 전시되고 있다.

重修(중수)발원문도 함께 발견되었는데, 이에 의해 문수동자상이 선조 32년(1599)에 다시 손을 대어 고쳤음을 알 수 있었다. 또한 발원문 두 개와 함께 나온 조선시대 초기 의상과 다수의 불경 등은 조선복식사 및 불교사 연구에 귀중한 자료가 되고 있다. 문수동자상 옆에는 문수보살상이 봉안되어 있다.


초기 한글 연구의 寶庫 상원사 중창권선문



이 권선문은 세조의 왕사인 慧覺尊者 信眉(혜각존자 신미)가 왕의 복을 빌기 위해 상원사를 중수하려 한다는 말을 듣고 세조가 彩色(채색)·쌀·무명·베와 鐵材(철재) 등을 보내면서 그 취지를 적은 글이다. 세조가 大시주자로 앞장서자 왕비를 비롯한 궁인, 종실, 조정 신료와 전국의 수령 방백들의 시주도 무더기로 뒤따랐다.

두 책자로 되어 있는데, 한 책에는 한문으로 원문을 쓰고, 세조와 세자의 手決(수결: 사인)과 인장을 찍었고, 이어 孝寧大君(효령대군) 이하 여러 宗室(종실)과 신하들의 이름과 수결이 적혀 있다.

또 다른 한 책에는 권선문을 한문으로 쓴 다음에 다시 한글로 번역한 것을 붙이고 그 뒤에 「佛弟子承天體道烈文英武朝鮮國王 李」(불제자승천체도열문영무조선국왕 이유)라는 수결을 하고 「體天之寶」(체천지보)라고 새겨진 옥쇄를 눌렀다.

그리고 다음 줄에 「慈聖王妃 尹氏」(자성왕비 윤씨=정희왕후)라고 쓴 아래 「慈聖王妃之寶」라고 새겨진 王妃印을 누르고, 이어 왕세자·세자빈 韓씨 이하 궁인들의 인장을 찍었다. 또 끝에는 信眉 등의 수결이 있는 「天順八年臘月十八日」이란 발문이 붙어 있어 세조 10년(1464) 12월18일에 쓰여진 것임을 알 수 있다. 이 책의 겉 표지는 붉은 바탕에 唐草紋(당초문)이 들어 있는 비단으로 되어 있다.

이 책들은 왕가에서 사찰의 중창을 위해 물자를 보조한 사실을 적은 고문서로서 귀중할 뿐만 아니라 당시의 學問僧(학문승)으로서 유명했던 信眉·學悅(학열)·學祖(학조)와 세조의 관계를 살필 수 있는 자료로서 중요하다. 또한 여기에 한글로 된 기록은 訓民正音(훈민정음) 제정 이후 가장 오래된 필사본으로서 초기 한글의 서체를 살피는 데 있어서도 매우 중요한 자료이다.

세로 45.5cm, 가로 29.5cm로서 접혀 있는데, 펼친 총 너비는 810.5cm이다. 보물 제140호로 지정되어 오다가 1996년 국보 제292호로 승격되었다.


政敎의 共同 코뮈니케와 漢岩 스님의 길

世祖는 信眉에게 명하여 重創記를 짓도록 하고, 御製 功德疏(어제 공덕소)까지 지어 친필로 써 주었다. 그것은 정치와 종교가 서로를 치켜세우는 공동 코뮈니케(성명서)를 방불케 한다. 그 내용을 요약하면 다음과 같다.


<重創記>

우리 聖上(성상)께서 天命(천명)을 받아 다시 우리나라를 창조하시어 억조의 백성들이 편안하고 온 누리가 안녕하여 크고 작은 것이 모두 천지의 은혜를 얻으니, 어리석은 중생과 僧(승)인들 그 누가 은혜에 보답하려는 뜻이 없겠습니까.

(중략)오대산은 천하명산으로서 문수보살께서 상주하는 곳이며 영험 있는 현신이 자주 있어 왔으며 상원사는 더더욱 훌륭한 곳입니다. 저희는 衣鉢(의발)에 담긴 것을 모두 털어 상원사를 중창하여 聖上의 만수무강을 빌 곳으로 삼으려 하는데, 兩位 전하께서 이 소식을 들으시고 특별히 御命(어명)을 내려 다음과 같이 말씀하셨습니다.

『스님들이 나를 위하여 가람을 창건하려 하니, 내 마땅히 그들을 도와 나라 백성들에게 널리 이익을 줄 것이다』

이에 御衣(어의) 몇 벌을 하사하시고, 이어 쌀과 무명과 토목의 비용을 보내 주어 (중략) 위로는 성상의 만수무강을 빌고 아래로는 억만년의 큰 복이 전하여 한량없는 복으로 현재와 미래에 모두 유익함이 있기를 원합니다.


<御製 공덕소>

(전략) 나는 世弟가 된 이후 우리 혜각존자(신미)를 만나 道가 부합되었다. 존자는 항상 마음을 다하여 세속의 나를 찾아와 나로 하여금 청정한 뜻을 품게 하고 욕심의 구렁텅이에 빠지지 않도록 해 주었다.

(중략) 얼마 전 나의 몸이 불편하다는 소식을 듣고서 병든 몸을 이끌고 法床(법상)에서 내려와 주야로 수백 리 길을 달려왔다. (중략) 이는 중생을 제도하는 자비심이다. 나는 그 말을 듣고 깜짝 놀라 감격의 눈물을 하염없이 흘렸다. 듣자니 혜각 스님과 학열 스님이 나를 위하여 옷과 재물을 모조리 팔아 가람을 중창한다고 한다. (중략) 나는 이 때문에 스님들을 위하여 기쁜 마음으로 조금이나마 중창비를 究竟(구경)의 正因(정인)을 삼고자 하니, 이른바 直心菩提(직심보리)라 하겠다. (후략)

6·25 전쟁 때 상원사는 국군에 의해 불탈 뻔했다. 그때 대한 조계종 초대 종정을 역임한 뒤 상원사에 머물면서 禪風(선풍)을 중흥시키고 있던 漢岩 스님만 피난을 가지 않고 법당을 지키고 있었다. 오늘날 상원사의 국보와 보물이 남은 것은 오로지 漢岩 스님의 덕이었음이 다음 일화로 전해지고 있다.

<1·4 후퇴 무렵, 국군이 공비들의 소굴로 변한 월정사를 불태운 다음에 상원사로 올라와 소각하려고 했다.

한암 스님은 잠깐 기다리라고 이르고 방에 들어가 가사와 장삼을 입고 법당에 들어가 불상 앞에 정좌한 후 불을 지르라고 했다. 국군 장교가 『스님, 이러시면 어떡합니까?』라고 만류하자 한암 스님은 『부처의 제자로서 법당을 지키는 것이 도리가 아니겠소』라며 자세를 흐트리지 않았다. 감명을 받은 장교가 법당의 문짝만을 뜯어내 마당에서 불을 지르고 떠났다>


고양이의 도움까지 받은 世祖

세조가 願堂(원당)으로 삼은 상원사는 그의 체취가 배인 유물들이 많다. 상원사 법당 앞에 있는 고양이 石像(석상)까지 세조와 관련이 있는 유물이다. 다음과 같은 전설도 있다.

<어느 날 세조가 기도하러 상원사 법당에 들어가려 하자 고양이가 나타나 세조의 옷소매를 물고 들어가지 못하게 하는 몸짓을 했다. 이상하게 여긴 세조는 법당 안팎을 샅샅이 뒤진 끝에 불상이 좌정한 좌대 밑에 칼을 품은 자객을 찾아냈다.

고양이의 도움으로 목숨을 건진 세조는 은혜에 보답하기 위해 상원사의 고양이를 잘 보살피라는 뜻에서 猫田(묘전)까지 하사했다. 그로부터 상원사는 사찰 사방 80리의 땅을 보유하게 되었다>

상원사 밑 300m 거리의 주차장 건너편에는 돌로 만든 冠帶(관대)걸이가 보인다. 세조가 여기에 어의를 걸어두고 아래편 개울에서 목욕을 하다가 문수동자를 만났다는 전설과 얽혀 있는 유물이다.

상원사를 내려오니 날이 저물었다. 「30년 전통」을 자랑하는 진부면 하진부리 부일식당으로 직행했다. 진부IC 진입로에서 시내 쪽으로 800m 쯤 되는 곳에 있다. 오대산의 산채정식은 역시 일품이다. 진부면의 여관에서 일박하고 다음날 다시 월정사로 향했다.


정치와 종교, 둘 모두의 체통을 위해

오대산은 올망졸망하거나 삐죽삐죽하지 않고, 선이 굵고 힘차다. 산자락까지 뭉텅한 채로 끝날 만큼 덤덤하다. 춥고, 눈 많고 바람도 세차지만 깊은 정을 베푸는 미덥고 편안한 산이다.

월정사 성보박물관에 다시 들렀다. 이곳에는 월정사 8각9층 석탑 사리구, 상원사 문수동자 좌상의 복장유물인 상원사 중창 권선문(국보 제292호), 부처님 진신사리(보물 제793-21호)를 비롯, 漢岩·呑虛 스님의 유품에 이르기까지 500여 점을 전시하고 있다. 세조 4년(1459)에 간행된 月印釋譜(보물 제292호), 世祖御衣(보물 제793-16호) 등 세조와 관련된 유물이 많다. 이곳의 부처님의 진신사리도 世祖가 문수동자를 친견하고 그 영험을 체험한 후 그것을 구해 납입했다고 한다.

월정사·상원사 답사를 끝내고 귀경하면서 世祖와 불교의 밀착 배경을 곰곰이 생각해 보지 않을 수 없었다. 세조는 儒學(유학)의 입장에서는 결코 용납될 수 없는 임금이었음은 앞에서도 지적했다. 그는 사육신 등 유학적 사상체계의 관료들을 대거 숙청하면서 손에 엄청난 피를 묻혔다. 이런 약점 때문에 그는 유학에 대한 자신감을 상실했다.

세조는 유학자들의 집현전과 경연을 폐지하는 대신 불교를 숭상하는 정책을 구사했다. 도성 출입을 엄금당했던 승려들에게 도첩(승려의 신분증)을 발급하고 刊經都監(강경도감)을 설치하여 여러 불경의 諺解本(언해본)을 발간하는가 하면 많은 물력을 기울여 상원사를 중창하고, 원각사를 창건했다.

상징조작도 서슴지 않았다. 세조가 상원사에서 문수동자를 두 번 친견했다고 하는가 하면, 원각사의 창건 중 부처님의 사리가 여러 개로 변하는 상서로운 분신 사리의 기적이 일어났다는 등의 소문이 나돈 것이다. 그런 이적의 眞僞(진위)야 어떻든 그것은 세조 정권의 정당성을 확보해 보려는 정략에 이용되었음은 틀림없다.

東·西洋을 막론하고 종교와 정치는 野合(야합)의 역사를 지니고 있다. 가까이는 작년 연말 大選을 앞두고 거대한 금동불상을 값비싼 金으로 입힌 후 개최된 어느 사찰의 무슨 낙성식에 불교와는 전혀 인연이 없거나 다른 종교를 가진 여·야 大選주자들이 앞다퉈 참석해 합장하던 모습도 그러한 사례의 하나로 보였다. 이제, 이런 일들은 정치와 종교, 둘 모두의 체통을 위해서라도 지양되어야 하지 않겠는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