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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 民族史에 딱 두 번 있었던 통일大王 - 新羅 문무왕 金法敏과 高麗 태조 王建 이야기

정순태   |   2003-04-17 | hit 2186

金法敏의 등장

三國史記(삼국사기)에 따르면 문무왕 金法敏(김법민)은 매우 야성적이면서도 지략이 풍부한 군주였다. 그런 그는 구중궁궐에서 金枝玉葉(금지옥엽)으로 떠받들어지면서 성장한 인물이 아니었다. 만약 그가 왕자로 태어나 세상 물정을 모르고 자랐다면 문무를 겸비한 그의 탁월한 리더십은 형성되기 어려웠을지 모른다.

원래 궁중은 성장 환경이 매우 열악한 곳이다. 기름진 음식을 섭취하면서 운동량이 적은데다 酒色(주색)을 가까이 하게 되면 건강을 해쳐 멍청한 인간이 되게 마련이다. 이런 인물이 王位(왕위)에 오르면 우유부단하여 국가의 위기 때 힘을 발휘하기 어렵다.

그러나 金法敏의 출생과 성장 배경은 전혀 딴판이었다. 훗날의 치적으로 입증되지만, 결단의 군주 文武王(문무왕)이 통일전쟁과 羅唐(나·당) 7년 전쟁을 지도했다는 것은 우리 민족으로서는 대단한 행운이었다. 만약 문무왕의 리더십이 없었다면 백제, 고구려에 이어 신라까지 세계제국 唐에 먹혀버려 우리 민족의 판도에 唐三郡(당3군: 고구려군, 백제군, 신라군)이 들어섰을 가능성이 높았다.

金法敏은 金春秋(김춘추)와 文姬(김문희) 사이에서 태어난 長男(장남)이다. 金春秋는 『정치가 어지럽고 荒淫(황음)하다』고 하여 재위 4년 만에 귀족들의 궁정 쿠데타에 의해 축출된 眞智王(진지왕)의 손자이며, 文姬는 신라에 멸망당한 가야 王家의 후예 金庾信(김유신)의 여동생이다. 그러니까 金法敏은 가문의 再起(재기)에 대한 욕망이 그 누구보다 강렬했던 부모 밑에서 성장했다.

그가 역사의 전면에 등장한 시기는 진덕여왕 4년(650), 그의 나이 25세 때이다. 金法敏은 진덕여왕이 지은 太平頌(태평송)이란 五言詩(5언시)를 唐 고종 李治(이치)에게 증정하는 사신의 역할을 수행했다. 이렇게 그는 20대 중반에 슈퍼파워 당의 황제를 상대로 한 請兵(청병) 외교의 일익을 담당했다.

그로부터 4년 후, 후사를 두지 못한 진덕여왕의 병몰에 따라 聖骨(성골) 후계자의 代가 끊어진 가운데 그의 아버지 金春秋가 당대 최고의 무장 金庾信(김유신)의 지원을 받아 舊귀족을 대표하는 上大等(상대등: 수상) 閼川公(알천공)을 물리치고 王位에 올랐다. 태종 무열왕 원년(654)에 金法敏은 파진찬(관등 제4위)으로서 兵部令(병부령: 국방장관)이 되었다가 바로 다음해에 태자로 책봉되었다. 金法敏의 병부령 취임은 아직 불안했던 즉위 초기 무열왕 정권의 강화를 위한 특단의 조치에 다름 아니었다.

金法敏은 군사외교뿐만 아니라 군략에도 능숙했다. 660년 7월, 태자 金法敏은 병부령으로서 병선 100척을 거느리고 남양만의 덕물도로 나가 唐의 원정군을 접응한 뒤 唐將(당장) 蘇定方(소정방)과 더불어 백제 정벌을 위한 전략을 확정했다.

7월18일 사비성 함락 직후, 그는 백제 왕자 夫餘隆(부여융)을 말 앞에 꿇어앉혀 놓고 『너의 아비가 내 누이 부부를 죽였다. 너의 목숨은 이제 내 손에 달렸다』고 질타하는 야성을 드러냄으로써 부여융의 氣를 완전히 꺾어 놓았다. 이때 당한 두려움 탓인지, 나중에 부여융은 唐의 괴뢰로서 熊津都督(웅진도독)의 직위를 받았지만, 문무왕에 대해서는 한 번도 기를 펴지 못하게 된다.

백제는 羅唐 연합군의 압도적 병력 집중으로 도성을 함락당했지만, 지방군은 건재했다. 백제의 잔존 세력은 부흥군을 조직하여 나·당군에 항전했다. 金法敏은 10월9일 父王(부왕)과 함께 이례성을 공격하여 백제부흥군을 제압하고, 이어 20여 城으로부터 항복을 받았다. 10월30일에는 사비성 南嶺(남령)의 전투에 출전하여 부흥군 1500명을 참살하는 등 武名(무명)을 날렸다.


文武王 시대의 개막


문무왕의 시대는 예상보다 빨리 도래했다. 천하의 대세가 아직 유동적이던 661년 6월, 무열왕이 59세의 나이로 急死했다. 그 무렵은 백제부흥군뿐만 아니라 고구려도 신라에 대해 공세를 벌이던 시기였다. 金法敏은 이른바 馬上(마상)에서 신라 30代 왕으로 등극한 것이다. 그의 나이 36세 때였다.

661년 8월, 문무왕은 喪中(상중)임에도 金庾信을 대장군으로 삼아 고구려 親征(친정)의 길에 올랐다. 進軍(진군) 도중 지금 대전의 회덕 부근에서 신라군은 백제부흥군에 의해 進路(진로)를 차단당했다. 문무왕은 矢石(시석)이 빗발치는 전장에서 말을 달리는 야전사령관 型(형)의 君主였다. 이때 문무왕은 백제부흥군의 옹산성을 攻破(공파)하고 백제부흥군 수천의 목을 베었다.

그러나 문무왕의 親征(친정)은 백제부흥군에 대한 진압 작전으로 시일을 끌었기 때문에 차질을 빚었다. 고구려로 진격하려면 병력의 손실이 불가피하며 병참선 확보가 어려운 겨울 작전을 감행해야 할 상황이었다. 여기서 문무왕은 일단 신라군을 재정비하면서 唐軍의 상황을 살폈다. 이때 蘇定方의 唐軍은 평양성 외곽에 진출했지만, 병참 실패로 궤멸의 위기를 맞고 있었다.

唐將 소정방은 急使(급사)를 달려 문무왕에게 군량 지원을 호소했다. 그러나 輜重(치중)부대를 이끌고 고구려 영토 깊숙이 진입하여 唐軍을 구원하는 일은 대단히 위험한 작전이었다. 이 작전의 지휘를 자원한 인물이 68세의 대장군 金庾信이었다. 문무왕의 命을 받은 金庾信은 662년 2월 적진을 종단하여 쌀 4000석, 벼 2만2000석을 소정방에게 전달하여 餓死(아사) 직전의 唐軍을 살렸다. 이후 고구려에 대한 나·당 양군의 겨울 작전이 가능해지게 되었다.

663년, 문무왕은 대장군 金庾信 등 28將을 거느리고 唐軍과 합세, 백제부흥군을 강타하여 豆陵尹城(두릉윤성), 周留城(주류성) 등을 함락시켰고, 백강구 전투에서는 백제부흥군을 지원한 왜선 400척을 불태웠다. 왜국에서 귀국하여 백제부흥군의 王으로 옹립되었던 夫餘豊(부여풍)은 백강구 전투의 패배 직후에 고구려로 망명했다.


비밀협약의 일방적 폐기


백제 멸망 12년 전인 진덕여왕 2년(648), 唐 태종 李世民(이세민)과 신라의 宰相 김춘추는 백제와 고구려 평정 후 영토분할에 대한 원칙에 합의한 바 있었다. 이 비밀 협정의 골자는 戰後에 백제 영토의 전부와 대동강 이남의 고구려 땅을 신라가 차지한다는 것이었다.

그러나 660년 백제 멸망 직후부터 비밀 협정을 깨려는 唐의 의도가 명확히 드러나기 시작했다. 唐將(당장) 소정방은 사비 언덕에 軍營(군영)을 세우고 신라군에 대한 선제 공격을 기도했다. 이런 기미를 눈치챈 신라 지도부는 一戰不辭(일전불사)를 외치며 대비했다. 이에 소정방은 신라에 대한 침공을 감행하지 못하고 서둘러 귀국했다. 그 바람에 소정방은 唐 고종에게 신라까지 먹지 못한 이유에 대해 추궁당하기도 했다.

唐은 백제의 故土(고토)에 웅진도독부를 설치했다. 신라로서는 배신감을 느낄 수밖에 없었다. 兩國(양국)은 다만 고구려 정벌이라는 공동의 목표 때문에 서로 정면 대결을 자제하고 있을 따름이었다. 그러던 663년 4월, 唐은 신라를 鷄林都督府(계림도독부)로, 문무왕을 鷄林州大都督(계림주대도독)으로 삼는 조치를 감행했다. 이는 신라까지 屬邦(속방)으로 삼으려는 야욕을 노골화한 것이었다.

이어 664년, 唐 고종은 의자왕의 王子 夫餘隆을 웅진도독으로 파견하여 식민정권을 수립하고, 그 다음해에는 문무왕과 부여융으로 하여금 웅진 북방 就利山(취리산)에서 會盟(회맹)을 하도록 강요했다. 문무왕으로서는 굴욕적이었지만, 감수할 수밖에 없었다.

666년, 고구려의 독재자 淵蓋蘇文(연개소문)이 병사했다. 곧 그의 세 아들이 아버지의 유언을 받들지 않고 권력 다툼을 벌였는데, 실각한 장남 男生(남생)이 唐에 투항하는 사태가 빚어졌다. 이 해에 李勣(이적)의 唐軍이 고구려의 만주 영토를 휩쓸었다. 고구려의 대신 淵淨土(연정토: 연개소문의 동생)는 조카들의 骨肉相爭(골육상쟁)에 실망하여 12성, 763호, 인구 3500여 명을 데리고 신라에 투항했다.

667년 문무왕은 南進(남진)하는 唐軍에 호응하여 야전군을 이끌고 漢城停(한성정)까지 북상하여 고구려군을 견제했다. 이어 668년, 평양성 공략을 위한 나·당 연합군이 결성되었다. 이때 大幢大總管(대당대총관) 金庾信이 신병을 앓자, 문무왕은 金庾信에게 서라벌을 지키게 하고 직접 全軍(전군)을 지휘하여 한성정에 진출한 다음, 김인문과 김흠순에 야전 지휘권을 주어 평양성 공위전에 참전하도록 했다. 668년 9월21일 평양성이 떨어졌다. 이로써 고구려는 705년 만에 멸망했다.

唐은 고구려 故土를 9도독부 42주 100 현으로 나누고, 평양에 안동도호부를 설치했다. 薛仁貴(설인귀)를 檢校安東都護(검교안동도호)로 삼았는데, 그는 군사 2만을 거느리고 평양성에 진주했다. 669년 여름 5월, 문무왕은 金欽純(김흠순)과 金良圖(김양도)를 파견하여 唐 고종에게 사죄했다. 謝罪使(사죄사)의 파견 이유는 문무왕이 백제의 故土와 유민을 취해 唐 고종이 격노했기 때문이었다. 唐 고종은 흠순과 양도를 감금했다. 그러나 당초의 영토 분할 약정에 따르면 잘못은 唐측에 있었다.


일면 평화공세, 일면 전쟁준비


문무왕은 이렇게 평화 공세를 벌이면서도 唐과의 전쟁이 불가피한 것으로 판단했다. 「日本書紀(일본서기)」에 의하면 신라는 평양성 함락 직전인 668년 9월12일에 왜국에 사신을 파견하는 등 향후 對唐 전쟁에 대비한 주변 외교에 적극성을 보였다. 이것은 동방을 향한 唐의 팽창 정책을 견제하려는 목적에서 추진된 신라·왜국 간의 관계 개선이었다.

신라와 당의 전쟁은 670년 음력 1월, 金良圖가 당의 옥중에서 죽은 직후부터 본격화되었다. 이 해 3월, 사찬(관등 제8위) 薛烏儒(설오유)가 이끄는 신라군 1만과 高延武(고연무)가 거느린 고구려부흥군 1만이 압록강 건너 지금의 만주 鳳凰城(봉황성) 지역에서 합동 작전을 전개하여 唐에 붙은 말갈군을 대파했다. 이와 같은 압록강 이북의 캠페인은 唐軍의 한반도 진입을 차단하고 고구려 유민들의 反唐(반당) 봉기를 촉진하는 효과를 노린 것이었다.

이 해 6월, 고구려 故土에서 大兄(대형: 고구려의 관등 제2위) 劒牟岑(검모잠)과 왕족 安勝(안승)이 차례로 일어나 무리를 모으고 唐에 반기를 들자, 문무왕은 이들을 對唐 전쟁을 유리하게 전개하기 위한 우익으로 삼았다. 특히 안승에 대해서 金馬渚(금마저: 익산)에다 위성국 報德國(보덕국)을 세우게 하여 唐軍을 견제했다. 이어 백제 고지에 대한 토벌에 나선 신라군은 적군 9천명을 베고 전라도 지방의 82개 城을 공취했다.

671년 唐軍이 말갈군과 연합하여 백제 고토로 남하했다. 이에 문무왕은 義福(의복), 春長(춘장) 부대 등을 보내 唐軍을 격퇴하고, 竹旨(죽지) 부대를 파견하여 加林城(가림성) 지역에 있던 唐軍의 식량 공급원인 屯田(둔전)을 짓밟아버렸다. 이렇게 문무왕은 백제 고토에 주둔한 唐軍을 완전히 쓸어버린 다음, 古都(고도) 부여 지역에 所夫里州(소부리주)를 설치했다.

이에 唐 고종은 총관 薛仁貴에게 신라 정벌의 책임을 맡겼다. 671년 가을 7월26일, 설인귀는 문무왕에게 唐의 압도적 군세를 들먹이며 굴복할 것을 요구하는 서한을 보냈는데, 거기에는 다음과 같은 협박의 내용이 담겨 있었다.

『高(고: 高侃)장군이 거느린 漢兵(한병: 唐兵)이나 李謹行(이근행)이 거느린 蕃兵(번병: 글안병과 말갈병), 吳楚(오초: 남방)의 용감한 수군과 幽幷(유병: 유주와 병주, 즉 북방)의 사나운 군사들이 사방에서 운집하여, 병선을 열지어 내려가서, 험한 곳에 의지하여 陣地(진지)를 쌓고, 그들이 貴國(귀국)의 땅을 개간하여 耕田(경전)을 한다면, 이는 王에게 치유될 수 없는 큰 병이 될 것입니다』


名文의 開戰 외교 문서


이에 문무왕은 즉각 唐의 과욕을 비판하고 신라의 정당성을 천하에 천명하는 답장을 보냈는데, 이것이 바로 三國史記 문무왕 11년(671) 條에 실린 「答薛仁貴書(답설인귀서)」이다. 開戰(개전) 외교 문서의 白眉(백미)로 회자되는 이 장문의 답서에서 문무왕은 신라군이 唐軍을 공격할 수밖에 없는 이유를 조목조목 당당하게 밝히고 있다. 신라가 외세에 기대어 삼국 통일을 했다고 잘못 생각하는 사람들이나 나·당 7년 전쟁의 개전 원인을 신라의 배신적 행위 때문이라고 주장하는 일부 일본인 학자들은 「답설인귀서」를 다시 읽어볼 필요가 있다.


能小能大한 외교


672년 고간과 이근행이 지휘하는 唐의 육상군이 임진강 계선까지 밀고 내려왔다. 唐軍의 총공세로 전황이 급박하게 돌아가자 문무왕은 唐 고종에게 「저는 죽을 죄를 지어 삼가 말씀드립니다」로 시작되는 表文(표문)을 올리는 등 자세를 잔뜩 낮추었다. 문무왕의 외교는 이처럼 能小能大(능소능대)했다.

이런 가운데 다시 신라에게 유리한 국제 정세가 전개된다. 土蕃(토번: 티베트)의 공세로 唐의 安西都護府(안서도호부)가 몰리고 있었다. 또한 거란족과 말갈족의 반란도 잇달아 일어나 唐의 동방정책이 곤경에 빠지게 되었다. 이제는 신라가 전략적 우위에 서서 對唐 전쟁을 전개하게 된다.

673년 7월1일, 삼국 통일의 원훈 金庾信이 79세를 일기로 병사했다. 문무왕에게 金庾信은 私的으로는 외삼촌이었지만 君臣간의 위계는 엄정했던 것 같다. 문무왕이 임종을 앞둔 金庾信을 私家(사가)로 찾아가 병문안하는 장면은 매우 인상적이다. 문무왕은 金庾信에게 『과인에게 경이 있음은 물고기에 물이 있는 것과 같소』라고 위로했다. 이에 金庾信은 『王께서 의심 없이 등용하여 의심 없이 임무를 맡기셨기에 어리석은 소신이지만 마디만한 功을 세웠습니다』라고 화답했다. 金庾信의 충성심과 문무왕의 용인술이 잘 드러나는 대목이다.

문무왕의 용인술은 그와 金仁問(김인문)의 관계에서도 느낄 수 있다. 金仁問은 문무왕의 세 살 밑 동생으로 『유가, 노자, 장자, 불교 서적을 섭렵하고 활쏘기, 말타기에 능숙하면서 식견과 도량이 넓어 사람의 추앙을 받았다』고 三國史記에 기록되어 있다. 金仁問은 전후 7차례 20여년간에 걸쳐 입당 숙위 외교를 전개한 관계로 唐에서 절대적으로 선호한 인물이었다. 이런 金仁問을 唐이 이용하려 하지 않을 리가 없었지만, 문무왕은 끝까지 아우를 의심하지 않았고, 金仁問도 형왕에 대한 의리를 저버리지 않았다.

674년 唐 고종은 조서로써 문무왕의 관작을 삭탈하고 입당해 있던 金仁問을 억지로 신라국왕으로 책봉하고 유인궤를 계림도대총관으로 삼아 신라를 공격하려 했다. 신라국왕 형제간의 골육상잔을 유도한 毒手(독수)로서 이른바 天子를 자처하는 군주로서는 부끄러운 짓이었다.

이때 문무왕은 또다시 사죄사를 파견하여 조공하고 請罪(청죄)했다. 명분에 밀린 唐 고종도 이를 받아들여 문무왕의 관작을 복구시켰으므로 귀국중의 金仁問도 唐京(당경)으로 돌아갔다. 이처럼 문무왕은 唐과 전쟁을 치르면서도 외교 관계만은 결코 단절하지 않았다. 세계제국 唐을 물리치고 한반도를 통일한 문무왕의 리더십은 이처럼 유연하고 기민했다.

675년에는 신라가 다시 고구려 고토의 南境(남경)을 쳐서 州郡(주군)을 설치했다. 唐將 李謹行은 글안병과 말갈병 20만명을 이끌고 買肖城(매소성: 경기도 양주)으로 진출하여 신라군과 대진했다. 매소성 전투에서 신라군은 대승하여 戰馬(전마) 3만여 필과 많은 병기를 노획했다. 이만한 전리품을 획득했다면 당측의 사상자수도 상당했겠지만, 역사의 기록에서는 누락되어 있다. 三國史記 신라본기 문무왕 15~16년(675~676) 조를 보면 2년 동안 唐軍은 고구려 고토에서 대소 18회 도발하여 왔으나 신라는 이를 모두 격퇴했다.


해양의 중요성 인식한 선각자


나·당 7년전쟁에서 육상의 결전이 매소성 전투였다면 해상의 결전은 伎伐浦(기벌포: 장항) 전투였다. 676년 11월, 설인귀의 함대는 금강 어구로 침입하여 사찬 施得(시득)이 지휘하는 신라의 함대와 격돌했다. 신라의 水軍(수군)은 첫 전투에서 패배했으나, 곧장 전투 서열을 수습하여 무려 22차례의 파상적 공격전을 감행해 당의 함대에 치명적 타격을 가하면서 唐軍 4천 명의 목을 베었다.

기벌포 전투의 결과는 대단한 역사적 의미를 지니고 있다. 이후 唐의 水軍은 압록강 남쪽 해역으로 진출하지 못해 신라가 황해의 제해권을 장악했다. 제해권을 상실한 唐은 한반도에 대규모 원정군을 파견하기 어려웠다. 왜냐하면 兵站線(병참선)을 유지할 수 없었기 때문이다.

唐이 원정군 파견을 중지했기 때문에 기벌포 전투 이후 나·당 7년전쟁은 신라의 승리로 끝났다. 그 결과 신라의 영토가 대동강 以南까지 북상하게 되었고, 대동강 以北에서 압록강 以南까지의 지역은 나·당 양국의 완충지대가 되었다. 안동도호부는 만주 新城(신성: 요령성 무순)으로 물러났다. 또한 웅진도독 대방군왕으로 임명된 부여융은 백제 고토로 들어오지 못하고 遼河(요하) 방면의 建安城(건안성)에서 잠시 以夷制夷(이이제이)를 위한 괴뢰로 이용되다가 곧 역사의 무대에서 퇴장당했다.

기벌포 전투 2년 후인 678년, 문무왕은 그때까지 兵部(병부: 국방부)에 예속되어 있던 船府署(선부서), 즉 해군-해운-조선 부문을 독립시켜 병부와 동격인 船府(선부)를 창설했다. 三國史記 제38권 직관지의 「船府」 조에는 「옛날에는 병부의 大監(대감), 弟監(제감)에게 사무를 맡게 했으나, 문무왕 18년(678)에 별도로 설치했고, 令(영: 장관)은 1인이며 관등은 대아찬으로부터 각간까지로 하였다」라고 기록되어 있다. 이것은 해상 세력의 우위를 통해서 나라의 안보와 발전을 누리겠다는 문무왕의 大구상이었다고 해도 좋다. 그렇다면 문무왕은 해양의 중요성을 인식한 선각자였다.


兵器 녹여 농기구를 만들어


경주에는 首都(수도) 방위를 위한 외곽 산성은 있지만, 신라왕이 거처했던 반월성에서조차 石造(석조)의 성벽이 없다. 문무왕은 그의 재위 마지막 해인 681년 都城을 보강하기 위해 石城을 쌓으려고 했다. 이때 義相(의상) 법사가 소식을 듣고 서한을 보내 간언한다.

『왕의 정치와 교화가 밝으면, 비록 풀 언덕에 땅을 그어서 城으로 삼더라도 백성들이 감히 타고 넘지 않을 것이요, 재앙을 물리치고 福이 들어오도록 할 것이로되, 만약 政敎(정교)가 밝지 못하면 비록 만리장성이 있더라도 재해를 막을 수 없을 것입니다』

문무왕은 義相 법사의 간언을 받아들여 축성공사를 즉각 중지시켰다. 이것이 바로 爲民政治(위민정치)의 실천이었다. 그때 만약 도성 공사를 강행했더라면 삼국통일 전쟁과 對唐 7년전쟁에서 겨우 살아 남은 사회적 弱者(약자)들을 부역에 동원하는 등 큰 부담을 주었을 것이다.

백성들의 눈물을 닦아 주었던 문무왕은 이 해 7월1일, 56세의 나이로 병사했다. 문무왕의 유언은 그의 「답설인귀서」와 더불어 신라의 삼국통일과 7년 對唐 전쟁을 이해할 수 있는 매우 중요한 역사적 문건이다.

<과인은 어지러운 때에 태어난 운명이어서 자주 전쟁에 당면했다. 서쪽을 치고 북쪽을 정벌하여 강토를 평정하였으며, 반란자를 토벌하고 화해를 원하는 자와 손을 잡아, 원근을 안정시켰다. 위로는 선조의 遺訓(유훈)을 받들고 아래로는 父子(부자)의 원수를 갚았으며, 전쟁중에 죽은 자와 산 자에게 공평하게 賞을 주었고, 안팎으로 고르게 관작을 주었다. 兵器(병기)를 녹여 농기구를 만들었고, 백성들로 하여금 天壽(천수)를 다하도록 하였으며, 납세와 부역을 줄여 집집마다 넉넉하고 사람마다 풍족하여 백성들은 제 집을 편안히 여기고, 나라에는 근심이 없어졌다. 창고에는 산처럼 곡식이 쌓이고 감옥에는 풀밭이 우거졌으니, 가히 先祖(선조)에게 부끄러울 것이 없고, 백성들에게 짐진 것이 없다고 할 만하다>

우리 민족사상 최장의 난세를 평화의 시대로 전환시킨 문무왕은 위의 遺言에서처럼 역사 앞에 당당하다. 특히 民生(민생)을 위한 休養政治(휴양정치)가 성과를 거둔 점에 관한 한 문무왕의 자부심은 대단했다. 다시 이어지는 문무왕의 유언이다.

<내가 풍상을 겪어 드디어 병이 생겼고, 政事(정사)에 힘이 들어 더욱 병이 중하게 되었다. 운명이 다하면 이름만 남는 것은 고금에 동일하니, 홀연 죽음의 길로 되돌아감에 무슨 여한이 있으랴! 세월이 가면 산과 계곡도 변하고 세대 또한 흐름에 따라 변하는 것이니, (중략) 魏主(위주: 曹操)의 西陵(서릉)에는 銅雀(동작)이란 이름만 들릴 뿐이로다. 옛날에 萬機(만기)를 처리하던 영웅도 마지막에는 한 무더기 흙이 되어, 나무꾼과 목동들이 그 위에서 노래하고, 여우와 토끼는 그 옆에 굴을 팔 것이다. 그러므로 헛되이 재물을 낭비하는 것은 역사서의 비방거리가 될 것이요, 헛되이 사람을 수고롭게 하더라도 혼백을 구제할 수 없을 것이며 (중략) 이는 내가 즐기는 바가 아니다. 숨을 거둔 열흘 후, 外庭(외정) 창고 앞에서 나의 시체를 불교의 법식으로 火葬(화장)하라. 상복의 輕重(경중)은 규정대로 하되 장례의 절차는 철저히 검소하게 해야 할 것이다>

문무왕의 유언은 다시 한번 爲民政治를 강조하면서 끝을 맺고 있다.

<변경의 城과 요새, 그리고 州와 郡의 과세 중에 절대적으로 필요하지 않은 것은 잘 살펴 모두 폐지할 것이요, 律令(율령)과 格式(격식)에 불편한 것이 있으면 즉시 바꾸어 알릴 것이며, 원근에 선포하여 이 뜻을 알게 하라. 태자가 왕이 되어 이를 시행하라!>

三國遺事 王曆(왕력) 문무왕 조에는 「유언에 따라 동해의 큰 바위 위에 장사지냈다」고 기록되어 있다. 경주시 양북면 봉길리 앞바다에는 문무왕의 水中陵(수중릉)으로 전해지는 大王岩(대왕암)이 있다. 三國遺事가 전하는 수중릉의 내력을 생각하면 문무왕의 존재는 더욱 크게 떠오른다. 문무왕은 평소에 智義(지의) 법사와 다음과 같은 대화를 나눈 것으로 기록되어 있다.

『나는 죽은 뒤에 護國(호국)의 大龍(대룡)이 되어 佛法(불법)을 받들어서 나라를 지키려고 하오』

『용은 짐승의 應報(응보)이니 (임금께서) 어찌 용이 되겠습니까?』

『나는 세간의 榮華(영화)를 싫어한 지 오래요. 만약 추한 응보로서 짐승이 된다면 나의 뜻에 맞지 않겠소』



민족의 재통일 이룩한 태조 王建


弓裔 타도하고 고려 創業


王建의 리더십에서 가장 돋보이는 대목은 유혈을 최소화하면서 민족의 再통일을 이룩했다는 대목이다. 이 점 하나만으로 그의 리더십은 가장 경제적인 동시에 도덕적 우위를 차지할 수 있었다.

후삼국 통일의 견인차는 王建의 豪族(호족) 연합 정책에서 찾는 것이 상식이다. 王建, 그 자신도 바로 호족 출신이다. 호족이라면 뭔가 그럴 듯해 보이지만, 별로 거룩한 존재는 아니었다. 신라 중앙정부의 통치력이 경주 一圓(일원)밖에 미치지 못하니까 지방에서 힘께나 쓰던 자들이 장군 또는 城主(성주)를 자처하면서 자립했던 것이다.

이런 성주나 장군들 중에는 지방관이나 在地(재지) 세력 출신들이 많았지만, 群盜(군도) 출신들도 적지 않았다. 이들의 군사적 기반은 私兵(사병)이었고, 경제적 기반은 주로 농장 경영이었다. 통일신라가 기울어지면서 이런 건달 장군이나 성주의 수가 한때는 무려 80人에 이르렀다.

王建은 그의 3대조 이상 先代의 世系를 추적할 수 없는 평민 출신이다. 다만 왕건의 아버지 王隆(왕륭)은 예성강의 하구항을 근거지로 삼아 해상무역에 종사하여 거만의 富를 축적한 신흥 商人(상인) 호족이었다. 이런 왕륭은 弓裔(궁예)의 세력 범위가 대동강 일대로까지 뻗어오자, 상당한 재물을 헌납하고 아들 王建과 함께 궁예에게 귀부했다. 난세에 살아남는 생존 방식이었다. 이때(895) 王建의 나이 19세였다.

王建은 처음부터 궁예의 신임을 받아 20세의 나이로 鐵原(철원) 태수에 임명되었다가 그 이듬해 다시 궁예의 命을 받들어 그의 고향인 松岳(송악) 남쪽에 勃禦塹城(발어참성: 개성)을 쌓고 그 성주가 되었다. 궁예는 한때 도읍을 송악으로 옮겼다가 다시 철원으로 돌아가는 변덕을 부렸다.

弱冠(약관)의 王建이 이렇게 승승장구한 이유는 그의 집안이 지닌 財力(재력) 때문이기도 했지만, 그의 資品(자품)이 뛰어났던 사실도 빼놓을 수 없다. 王建은 나이 22세에 精騎大監(정기대감)이 되어 양주, 광주, 충주, 청주, 괴산 등지를 공략하여 큰 공을 세웠다.

특히 후백제의 해상세력을 꺾고 그 배후를 견제하려는 王建의 羅州(나주) 경략은 일대 성공을 거두었다. 王建은 903년 이후 여러 차례 水軍을 이끌고 서남해안으로 진격하여 羅州(나주) 등 10여 郡을 공략했다. 이와 같은 수륙 양면에 걸친 전공에 따라 913년, 王建은 36세의 나이로 시중(국무총리)의 지위에 올랐다.

당시는 견훤의 후백제와 궁예의 泰封(태봉)이 2强으로서 우뚝한 가운데 다수의 群小(군소) 건달 장군들이 생존을 위해 어느 편에 붙어야 유리할지 눈치를 보고 있던 상황이었다. 그런데 궁예는 그의 말년에 이르러 정신분열의 증세를 보였다. 그의 왕비에게 간음했다는 누명을 뒤집어씌워 그녀의 음부 안에 불에 달군 쇠뭉치를 집어넣어 죽이는가 하면 아들과 신하들에 대해서는 역모를 했다는 등 괜한 트집을 부려 잔인하게 살해했다.


혼인 동맹


궁예의 광태가 날로 심해지던 918년, 洪儒(홍유), 裵玄慶(배현경), 申崇謙(신숭겸), 卜智謙(복지겸) 등 4人의 장군이 짜고 王建을 새 임금으로 추대했다. 王建이 깃발를 들자, 대번에 1만여 명의 사람들이 호응했다. 궁예는 微服(미복)으로 변장을 하여 도망을 치다가 평강에서 백성들에게 피살당했다. 王建의 나이 42세 때였다. 그는 국호를 고려로 고치고 연호를 세워 天授(천수)라고 일컬었다. 王建은 즉위한 이듬해에 도읍을 철원으로부터 그의 고향인 송악으로 옮기고 궁궐과 관아를 비롯하여 市廛(시전)을 세우고 법왕사, 왕륜사 등 10寺를 세워 새 首都로서의 면목을 갖추었다.

王建은 궁예를 치고 새 왕조를 세웠으나 내외의 정세는 실로 복잡다단했다. 안으로는 궁예의 옛 신하 가운데 반역을 꾀하는 자들이 잇달아 나타났다. 변두리 지역의 群盜들은 다시 준동했고, 泰封을 섬기던 靑州(청주: 淸州), 熊州(웅주: 공주), 運州(운주: 홍성) 등이 후백제로 넘어갔다.

王建의 창업은 그가 세운 戰功(전공), 그리고 인심을 모으는 탁월한 능력에 힘입은 바라고 할 수 있지만, 경쟁자의 눈에는 결코 곱게 보일 리가 없었다. 王建은 견훤이나 궁예와 달리 천하 쟁탈의 본선 무대로 바로 뛰어올랐기 때문이었다. 지역에 할거를 하면서 저마다 한 가락씩 해오던 건달 장군들이 王建의 수직 상승에 시큰둥한 반응을 보인 것이다.

이런 어려운 상황에서 王建 특유의 장기가 발휘되었다. 이에 대해 高麗史(고려사)에서는 태조의 重幣卑辭(중폐비사)라고 표현하고 있다. 쉽게 풀이하면 호족들에게 사절을 파견하여 두툼한 선물을 주고 겸손한 언사로 설득하여 환심을 샀다는 뜻이다. 호족들의 협조 없이는 사회의 혼란이 수습될 수 없다고 판단했던 것이다.

王建은 호족 연합의 명수였을 뿐만 아니라 婚姻(혼인) 동맹의 달인이었다. 그는 무려 29명에 달하는 后妃(후비)를 거느렸다. 이것은 高麗史에 이름이 오른 왕비와 부인만의 숫자다. 후비들은 거의 대부분 지방 호족들의 딸이다. 王建은 호족들을 자신과 운명공동체로 엮었던 것이다.


서로 人質을 죽이고


고려와 후백제의 충돌은 후백제에 침공당하는 신라를 고려가 구원하는 데서 발단되었다. 천수 3년(920) 10월 견훤이 신라의 大耶城(대야성: 합천)을 빼앗고 進禮(진례: 김해 서쪽) 지방으로 쳐 나오자 신라는 급거 고려에 구원을 청했다. 王建은 원군을 신라에 급파했는데, 이후 王建과 견훤이란 兩雄(양웅)의 쟁패전이 전개되었다. 이런 상황에서 溟州(명주: 강릉), 眞寶(진보: 청송), 京山(경산: 성주), 永鬱府(영울부: 영천)의 장군들이 잇달아 고려에 귀부했다.

천수 7년(924)에 견훤은 군사를 보내 曹物城(조물성: 안동 부근)을 쳤다. 王建은 장군 哀宣(애선)과 王忠(왕충)을 보내 구원했다. 애선은 전사했으나 조물성은 함락의 위기를 모면했다. 925년 견훤은 다시 3천 기를 거느리고 스스로 조물성으로 진격했다. 王建 또한 군사를 이끌고 와서 견훤과 맞섰다.

해를 넘겨 925년, 라이벌 견훤과의 전투에서 판세가 별로 유리하게 돌아가지 않자, 王建은 화의를 요청하고 그의 4촌동생 王信(왕신)을 인질로 후백제에 보냈다. 이에 견훤 또한 그의 생질인 眞虎(진호)를 볼모로 고려에 보냈다. 이때 王建은 10세 연상인 견훤을 대뜸 尙父(상보)라고 불렀다. 이처럼 王建은 예성강 商人의 후예답게 립서비스에 능란했다.

그러나 평화는 반년도 채 지나지 않아 깨어지고 말았다. 후백제의 質子(질자) 眞虎(진호)가 고려에서 갑자기 죽었기 때문이다. 견훤은 고려측에서 眞虎를 고의로 독살했다고 하여 고려의 質子 왕신을 죽인 다음 웅진 방면으로 진격했다. 고려는 대번에 수세에 몰렸다. 그러나 927년 고려는 공세로 전환하여 龍州(용주: 龍宮), 運州(운주: 洪城) 등을 함락시켰으며, 고려의 해군은 康州(강주: 진주)와 그 근해의 섬들을 경략했다. 이어 후백제의 군사거점 대야성을 쳐 파괴했다. 이때 신라는 원군을 보내 고려와 연합작전을 벌였다.


신라 왕비 강간한 甄萱의 惡手


927년 9월, 견훤은 나·려 연합전선을 깨기 위해 스스로 대군을 거느리고 근품성(상주의 속현인 山陽)을 불태우고, 高鬱府(고울부: 영천)를 엄습했다. 이어 견훤의 기병부대는 서라벌로 진격했다. 신라의 景哀王(경애왕)은 急使(급사)를 달려 원군을 청했고, 王建은 公萱(공훤) 등에게 군사 1만을 주어 신라를 구원하게 했다.

그러나 고려의 원군이 도착하기도 전인 11월, 견훤의 후백제군은 서라벌을 휩쓸었다. 이때 마침 경애왕은 妃嬪(비빈)과 宗戚(종척)들을 데리고 포석정에서 잔치를 베풀던 중이었다. 신라의 君臣은 아무런 저항도 하지 못하고 사방으로 흩어져 몸을 숨겼다.

견훤은 경애왕을 찾아내 자살케 하고 왕비를 강간했다. 이것은 천하 쟁패전에 나선 견훤으로서는 결정적 惡手(악수)였다. 그리고 경애왕의 戚弟(척제)인 金傅(김부)를 세우니, 이가 곧 신라의 마지막 임금인 56대 敬順王(경순왕)이다. 견훤은 인질과 전리품을 챙겨 회군했다.

한편 王建은 경애왕이 살해당했다는 급보을 듣고, 스스로 輕騎(경기) 5천을 거느리고 견훤의 귀로를 추격했다. 고려군은 公山桐藪(공산동수:팔공산 서쪽 기슭)에서 후백제군을 따라잡았다. 그러나 이 전투에서 고려군은 대패하여 대장 申崇謙(신숭겸), 金樂(김락) 등이 전사하고, 王建은 겨우 전장에서 탈출하여 죽음을 모면했다.

930년, 王建은 古昌郡(고창군: 안동)의 甁山(병산)에, 견훤은 石山(석산)에 진주하여 대진했다. 양군이 격돌한 결과, 고려군은 후백제군을 대파하여 8천명의 목을 베었다. 이 싸움은 兩雄의 세력 판도에 결정적 영향을 주었다. 永安(영안: 풍산), 河曲(하곡: 안동 부근), 直明(직명: 안동 부근), 松生(송생: 청송) 등 30여 郡縣(군현)이 고려에 복속했고, 동부 연안지방에서는 溟州(명주: 강릉)로부터 興禮(흥례: 울산)에 이르기까지 110여 城이 고려에 붙게 되었다.

경순왕이 승전한 王建과의 회견을 요청했다. 931년 王建은 불과 50기를 거느리고 서라벌을 방문했다. 경순왕은 태조 王建을 극진히 대접하여 臨海殿(임해전)에서 잔치를 베풀고 主客(주객)이 취하도록 마셨다. 임해전이라면 문무왕이 삼국통일을 기념하기 위해 안압지 경내에 세운 유서 깊은 건물이다. 서라벌 사람들은 王建을 치하했다.

『옛날 甄氏(견씨)가 올 때에는 이리와 범을 만난 것 같더니 지금 王公(왕공)이 오니 부모를 보는 듯하다』

견훤은 민심을 잃고 있었다. 王建에 대한 견훤의 복수전은 水軍을 동원하여 전개되었다. 932년 9월, 견훤은 일길찬(관등 제7위) 相貴(상귀)를 시켜 水軍으로써 예성강을 침입하여 3일 동안 鹽州(염주: 연안), 白州(백주: 배천), 貞州(정주: 풍덕) 등지의 선박 100척을 불사르고 猪山島(저산도)의 목마 300필을 탈취했다. 王建의 강점인 고려 水軍의 해상작전을 무색하게 만든 셈이었다.


王建에게 항복한 견훤


934년 9월, 王建과 견훤은 運州(운주: 홍성)에서 만나 결전을 벌였다. 兩雄의 최후 대결이었는데, 전투는 王建의 일방적 승리로 끝났다. 양군 사이에 휴전 얘기가 오가는 바람에 후백제군이 방심하던 사이 고려군에게 급습을 당했던 것이다.

후백제에서는 운주 전투 다음해인 935년 3월, 견훤이 그의 장남 神劒(신검)에 의해 김제 金山寺(금산사)에 유폐되는 쿠데타가 일어났다. 견훤은 10여 명의 아들을 두었는데, 그 가운데 자질이 뛰어난 제4자 金剛(금강)을 사랑하여 후계자로 삼으려 했다. 이에 신검은 차남 良劒(양검), 삼남 龍劒(용검)과 이찬(관등 제2위) 能奐(능환) 등과 짜고 금강을 죽이고 왕위를 찬탈했다.

견훤은 금산사에서 3개월간 연금 생활을 하다가 울분을 이기지 못해 그해 6월 금산사를 탈출하여 고려의 屬領(속령)이던 錦城(금성: 나주)으로 도망쳐 王建과의 면담을 청했다. 王建은 즉각 고려 최고의 명장 庾黔弼(유금필) 등을 파견, 海路(해로)로 견훤을 맞이하여 다시 尙父(상보)로 우대하고 楊州(양주)를 식읍으로 주었다.

견훤이 귀부한 상황에서 신라는 더 이상 버틸 수 없었다. 935년 11월, 신라 경순왕 金傅도 나라를 들어 고려에 항복하기로 결정했다. 경순왕은 항복을 한사코 반대하는 麻衣太子(마의태자)에게 『나라의 형세가 외롭고 위태로워 지탱할 수 없는지라, 죄 없는 백성의 피를 흘리게 하는 짓은 차마 못할 일이다』라고 항복의 이유를 설명했다.


60세에 통일 성취


王建은 그의 장녀 樂浪公主(낙랑공주)를 金傅에게 시집 보내고, 金傅를 政丞公(정승공)에 봉하여 그 位階(위계)를 태자 위에 두었으며, 世祿(세록) 1천 석을 지급했다. 또 金傅의 隨員(수원)들도 모두 등용하여 태조의 건국공신들과 더불어 고려의 귀족층을 형성하게 함으로써 신라의 제도, 문물이 고려로 자연스레 옮겨지도록 했다. 이어 신라의 古都(고도)를 경주라 하고, 그곳을 金傅의 食邑(식읍)으로 삼게 했다. 王建은 또한 舊신라 왕실과의 관계를 더욱 두터이 하기 위해 김부의 백부 億廉(억렴)의 딸을 왕후(神成王后)로 맞아들였다.

王建의 능소능대함은 이에서 그치지 않았다. 고려와 후백제 간 최후의 결전이었던 一利川(일리천: 경북 구미시) 전투 직전, 견훤의 사위인 朴英規(박영규)가 內應(내응)을 하겠다고 밀사를 파견하자, 王建은 즉각 박영규를 형님으로 모시겠다고 약속했다. 그후 王建은 박영규에게 呼兄(호형)함은 물론 그의 妻에 대해서도 누님이라고 불렀다.

견훤의 딸인 박영규의 妻가 절대로 王建보다 나이가 많을 수 없다. 왜냐하면 견훤은 王建의 10세 연상이었기 때문이다. 제왕의 신분에서 연하의 여자를 누님이라고 존대하는 일은 아무나 흉내내기 어려운 짓이다. 어떻든 王建은 싸우기도 전에 천리 밖에서 신검의 후백제를 이겨놓고 있었다. 견훤 또한 逆子(역자) 신검을 속히 쳐 멸할 것을 권유했다.

王建은 10만 대군을 이끌고 남하했다. 신검도 대군을 이끌고 동진했다. 양군은 일리천에서 격돌했는데, 견훤이 고려 陣營에 가세한 모습을 본 후백제군은 대오도 이루지 못하고 패주했다. 고려군은 추격에 나서 黃山郡(황산군: 논산)에 이르니 신검, 용검, 양검은 문무백관을 이끌고 왕건의 軍門(군문)에 나아가 항복하고 말았다.

견훤은 자기 손으로 길렀던 후백제군이 무참히 궤멸되는 것을 보고 번뇌와 고심 끝에 논산의 山寺(산사)에서 등창이 터져 죽고 말았다. 후백제는 견훤이 자립한 지 45년, 그가 完山(완산: 전주)에 도읍하고 국호를 후백제라 칭한 지 36년 만에 멸망했다.

그때 王建의 나이 60세이며 고려를 건국한 지 19년 만이었다. 태조는 통일의 大業(대업)을 길이 지키고 자손과 臣民(신민)에게 治道(치도)와 도의를 권장하기 위해 손수 「政誡(정계)」 1권과 「誡百僚書(계백료서)」 8편을 지어 반포했다.


태조 왕건의 治績


王建의 성공은 뭐니 뭐니 해도 그가 同時代(동시대) 인물 가운데 가장 탁월한 전망을 제시한 결과였다. 그는 궁예의 태봉을 멸하고 고려라는 국호를 정함으로써 명분과 실리를 동시에 챙겼다. 우선 고려라는 이름은 고구려의 고토를 회복하겠다는 北進 정책의 의지가 물씬하다.

궁예도 처음엔 국호를 후고구려라고 지었다. 그러나 궁예는 변덕이 심해 국호를 摩震(마진)으로 고쳤다가 다시 泰封(태봉)으로 변경했다. 마진과 태봉도 의미 있는 국호이긴 하지만, 고구려 혹은 고려에 비해 소구력과 선동성이 미약했다. 더욱이 궁예의 라이벌 견훤은 『의자왕의 원수를 갚겠다』면서 한 발 앞서 국호를 후백제라고 칭하고 있던 상황이었다. 신라가 말기 증세를 드러낸 상황이었으니까 백제 또는 고려 운운하기만 해도 지역감정에 불을 질러 한반도판 天下三分之計(천하삼분지계)를 기대해볼 수 있는 상황이었다.

고려가 고구려의 계승을 명분으로 내걸었던 만큼 古都 西京(서경: 평양)을 중시한 것은 자연스런 흐름이었다. 王建은 후백제와의 패권전이 계속되던 기간에도 뻔질나게 西京을 순행했다.

그렇다면 王建이 西京을 중시한 진짜 이유는 무엇이었을까? 글안족이 흥기하여 발해와 중국에 공세를 취하던 상황이었으니까 북쪽 변경의 수비를 든든히 한다는 복안이 없지는 않았을 것이다. 그러나 창업 초기의 고려에게는 발해라는 범퍼가 있어 글안과의 직접 충돌 가능성은 거의 없었다.

이런 맥락에서 보면 王建의 西京 경영엔 경제적 목적이 더 컸던 것 같다. 태조는 즉위 초부터 평양으로의 인구 이동 정책을 강행했다. 당시의 인구는 군사력뿐만 아니라 경제력의 원천이었다. 王建으로서는 그의 홈그라운드인 개경과 맞먹는 직할지 하나를 더 건설했던 것이다.

태조 王建은 탁월한 민심 수습책을 구사함으로써 귀부, 투항 등에 의한 인구 확대에 성공했다. 그 가운데서도 결정적 인구(경제력) 확보는 발해의 멸망에 의해 가능했다. 연구자들은 10만명의 발해 유민이 고려에 유입된 것으로 추정하고 있다. 王建은 후백제와 19년 동안 大小 수십 차례의 전투를 벌였다. 이와 같은 장기전에서의 승리는 인력과 경제력의 뒷받침 없이는 불가능하다. 더구나 전쟁 상대는 한반도 최고의 곡창 지대를 장악한 후백제였다.

王建은 매우 다이내믹한 전략가였다. 왜냐하면 王建은 해군력을 이용하여 후백제의 배후를 찌르곤 했기 때문이다. 王建의 羅州 경영은 후삼국 통일의 결정적 전략으로 손꼽을 수 있다. 첫째, 견훤군의 北上을 견제했고, 둘째 호남의 양대 평야 중 한 곳을 삭감함으로써 후백제의 경제력 우위를 허용하지 않았다.

특히 王建은 조세를 什一制(십일제), 즉 세율을 10%로 낮추는 개혁을 단행했다. 종래 태봉에서 통용되던 세율은 30~50%에 달하는 高率(고율)이었다. 王建은 그의 즉위 교서에서 궁예의 失政(실정)에 대해 부역을 많이 시키고 조세가 과다한 점이라고 지적했다.

이어 즉위 2개월 후 태조는 기아, 질병, 물가高 때문에 負債奴婢(부채노비)로 전락하는 사례가 많음을 통탄하며 그 사례를 조사하라는 조서를 내린다. 그 결과로서 파악된 노비 1천명에 대해 태조는 內庫(내고)의 布帛(포백)을 贖錢(속전)으로 풀어 양민화했다. 이것이 뒷날 光宗(광종) 때 奴婢按檢法(노비안검법)이라는 획기적 노비 해방 정책을 낳게 했다.

민생에 대한 王建의 관심은 즉위 직후의 일시적인 것이 아니었다. 후삼국 통일 2년 전인 934년에도 王建은 관리들의 苛斂誅求(가렴주구)와 부정을 엄격히 금지하는 조서를 내렸다. 이렇게 꾸준히 시행된 인심 수습 정책을 보면 王建은 대단한 개혁적 君主였음을 알 수 있다.

高麗史 등에 기록된 태조의 語法(어법)이나 古典(고전)의 인용 등을 보면 그는 매우 박학한 인물이었다. 王建은 그 자신이 好學했던 만큼 교육정책에도 적극적이었다. 예컨대 930년 西京에 순행하여 學寶(학보)를 만들어 학교 운영의 기금을 삼게 했다. 930년이라면 후삼국이 통일되기 6년 전으로 아직 전란의 시대였다.


「訓要十條」 속에 숨겨진 고도의 帝王學


태조는 943년 4월 임종을 한 달 앞두고 후계 왕들의 헌법에 해당하는 訓要十條(훈요십조)를 남겼다. 「훈요십조」에서는 불교를 존숭할 것(제1조), 사원을 마구 짓지 말 것(제2조), 唐風(당풍; 중국 풍속)에 맹종하거나 禽獸(금수)의 나라인 거란의 제도나 의관을 본받지 말 것(제4조), 西京을 중시할 것(제5조)을 강조하고 있다. 또한 燃燈(연등)과 八關(팔관)의 행사를 加減(가감)하지 말 것(제6조), 부역과 賦稅(부세)를 가볍게 할 것(제7조), 經史(경사)를 열심히 익힐 것(제10조) 등을 당부하고 있다. 이밖에 왕위 계승 원칙(제3조)과 祿俸(녹봉)의 변경을 금지하는 조항(제9조)도 포함되어 있다. 이렇게 태조 王建은 불교와 유학, 그리고 도참지리설을 새 왕조의 정치이념과 실천윤리로 삼았다.

「훈요십조」에는 고도의 통치술이 압축되어 있다. 문제는 제8항이다. 바로 이 조항 때문에 「훈요십조」의 僞作(위작) 시비가 끊이지 않고 있는데, 그 내용은 다음과 같다.

<車峴(차현) 이남 公州江(공주강) 밖은 山形(산형)과 地勢(지세)가 모두 거슬리게 달리고 있으니 인심 또한 그러할 것이다. 저 아랫골 사람들이 조정에 참여하고 王侯國戚(왕후국척)과 혼인하여 國政(국정)을 잡게 되면 혹은 국가를 변란케 하고 혹은 통합의 원한을 품어 국왕을 범하여 난을 일으킬 것이다.(후략)>

차현은 현재의 차령으로 천안과 공주 사이의 고개이며, 공주강은 현재의 금강이다. 제8조의 문면 대로라면 해당 지역에는 전라도뿐만 아니라 충청도의 일부 지역도 포함되어 있다. 제8조는 지리풍수설을 교묘하게 악용하여 후백제 지역 출신 인물의 등용을 막고 있다. 그러나 고려 태조 王建의 측근 인물과 공신 등의 면면을 보면 호남 인맥이 상당한 숫자를 점하고 있다.

예컨대 태조의 후계자인 惠宗(혜종)이 羅州吳氏(나주오씨: 莊和왕후)의 소생이다. 王建이 흠모했던 풍수지리설의 원조 道詵(도선)과 王建의 후삼국 통일을 예견했던 崔知夢(최지몽)도 전남 영암 출신이다. 대구 팔공산 전투에서 견훤의 후백제군에 포위된 王建의 전장 이탈을 돕고 전사한 최고의 공신 申崇謙의 출신지도 전남 곡성이다. 태조 이후에도 전라도 출신들이 다수 요직에 등용되었으며 과거 급제자도 많이 배출되었다.

이런 사실이 「훈요십조」 위작설의 근거로 제시되고 있다. 그러나 8조 이외의 항목들을 보면 「훈요십조」가 후대의 위작이라는 설은 설득력이 미약하다. 특히 국가경제를 위해 풍수지리설을 빙자하여 사찰의 난립을 방지한 제2조 등은 帝王學(제왕학)의 압권이라고 할 만하다. 따라서 제8조의 해당지역은 王建의 후삼국 통일 전쟁에서 가장 위협적이었던 충청도의 공주, 청주, 홍성 지역과 전라도의 전주, 광주 지역으로 한정되어야 한다는 연구자도 있다. 아무튼 통일의 君主로서 특정 지역의 차별을 유훈으로 남긴 것은 흠결로서 지적받을 수밖에 없을 것 같다.



새로운 통일 리더십의 待望


삼국 통일과 후삼국 통일의 對比


신라는 외세를 활용하여 삼국 통일을 이룩했고, 고려는 외세의 개입 없이 自力(자력)으로 후삼국을 통일했다. 이는 통일 시기의 신라와 고려가 처한 국제적 상황이 서로 달랐기 때문이다.

신라의 삼국 통일전쟁 시기에는 중국에서 세계제국 唐이 등장하여 동방을 향해 강력한 팽창 정책을 구사했다. 따라서 신라의 통일전쟁은 동아시아의 질서가 재편되는 과정에서 발생한 국제전이었고, 뒤이어 전개된 나·당 7년전쟁은 세계제국 唐의 팽창정책에 대한 우리 한민족의 생존 투쟁이었다. 문무왕은 이와 같은 국제정세의 안팍을 정확히 읽고 强穩(강온) 양면 정책을 능숙하게 구사하여 민족 최초의 통일 大業을 이룩했다.

반면 후삼국 통일전쟁 당시의 동아시아에는 한반도에 실질적인 영향력을 발휘할 만한 슈퍼파워가 존재하지 않았다. 세계제국 唐의 멸망 후 中原(중원)에서는 약 50년간에 걸쳐 後粱(후량), 後唐(후당), 後晋(후진), 後漢(후한), 後周(후주) 등 5개의 왕조가 차례로 부침했고, 각 지방에는 吳越(오월), 南唐(남당) 등 10개의 정권이 난립했다. 이른바 五代十國(5대10국)의 시대였다. 바로 이런 국제적 조건 아래 고려 태조 王建은 仁政(인정)과 관용으로 난세의 민심을 쓸어안아 민족의 再통일에 성공했다.

위와 같이 신라 문무왕과 고려 태조가 처한 시대와 무대는 달랐지만, 두 리더십 사이에는 상이점보다 유사점이 많다. 두 통일대왕은 亂世(난세)를 治世(치세)로 전환시키는 역사적 사명과 의미를 깨닫고 동시대의 경쟁자들에 비해 탁월한 전망과 정책을 제시했다.

문무왕은 백제계 인물에게 그때까지 신라의 眞骨들만 차지하던 總管(총관: 장군)의 직책을 주었고, 고구려 왕족 安勝의 경우 報德國王으로 옹립하는 등 우대했다. 특히 減稅(감세) 정책에 의한 爲民(위민)정치는 문무왕 최대의 업적이었다. 여기서 우리는 삼국인을 하나로 뭉쳐 唐의 팽창주의를 저지하겠다는 문무왕의 강렬한 의지를 엿볼 수 있다.

고려 태조의 민심수습책 역시 발군이었다. 후백제의 견훤은 『의자왕의 원수를 갚겠다』고 외쳤고, 태봉의 궁예는 浮石寺(부석사)에 걸려 있던 신라 국왕의 영정에 칼질을 했다. 이렇게 견훤과 궁예는 지역감정과 증오심을 이용하여 정권을 유지하려 했지만, 궁예를 대신한 고려 태조는 분열의 시대를 주도해온 호족들에 대해 적극적인 화해의 정책을 구사함으로써 민족의 재통일에 있어 유혈을 최소화했다.

문무왕과 고려 태조는 민심에 강력한 영향력을 지니고 있던 불교 또는 그 세력을 포섭하여 통일 대업에 복무시키는 정책에서도 탁월한 솜씨를 보였다. 문무왕은 나·당 7년전쟁의 와중에도 호국사찰 사천왕사를 건립했고, 고려 태조 역시 불교에 의해 국가의 안정을 이룸으로써 대업을 지킬 것임을 선포하면서 도성 안에 10 寺를 창건했다.

문무왕과 고려 태조의 통일 전략에서 간과할 수 없는 것은 해군의 활용이었다. 문무왕은 기벌포 해전의 압승으로 황해의 제해권을 장악함으로써 이후 唐軍의 한반도 공격을 원천 봉쇄했다. 고려 태조는 후백제의 배후에서 나주를 경략함으로써 후삼국 통일전쟁에서 전략적 우위를 누릴 수 있었다. 두 통일 대왕의 해양 중시 사상은 오늘날 우리 민족의 발전 방향과도 일치하고 있다.


문무왕과 고려 태조가 제시한 노하우


우리 민족사의 흐름이 이러한데도 불구하고 북한에서는 신라의 삼국통일을 인정하지 않고 「 국토의 남부 통합」이라고 폄하하고 있다. 당시 동아시아 세계의 실제상황 속에서 고구려에 의한 삼국통일의 가능성은 無望했으며 문무왕의 리더십이 아니었다면 한반도는 唐의 식민지가 되었을 가능성도 적지 않았다.

북한 사학계나 남한의 일부 사학자들은 신라와 발해의 병존 시기를 민족사의 남북국시대로 설정하고 있다. 민족사 최초의 통일은 신라가 아니라 고려에 의해 이룩되었다는 주장인 것이다. 물론 고려의 후삼국 통일이 지니는 역사적 의미는 막중하다. 후삼국을 통일하여 45년에 걸친 분열의 시대를 마감했을 뿐만 아니라 거란에게 멸망당한 발해의 유민을 받아들여 민족의 융합에 큰 계기를 마련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민족 再통일을 이룩한 고려의 위상을 강조하기 위해 신라의 삼국통일이 갖는 역사적 의미를 평가절하할 수는 없다. 원래 삼국은 사방 수십리도 되지 않았던 城邑國家(성읍국가)에서 출발하여 주변의 고만고만한 나라들을 합병해온 정복국가였다. 이런 삼국이 국경을 개이빨처럼 서로 맞댄 이후 피를 피로 씻는 전국시대를 300년 가까이 지속시켜 오다가 민족사상 초유의 통일을 이룩했다는 것은 대단히 획기적이고 위대한 역사 발전이었다.

따지고 보면 통일신라와 고려의 판도는 거의 비슷했고, 고려에 유입된 발해 유민은 10만명 정도에 불과했다. 고려의 영토와 주민, 그리고 문화는 그 대부분이 신라를 계승한 것이었다. 이런 의미에서 신라와 고려의 통일을 차별적으로 평가한다는 것은 민족의 主流(주류)에 대한 自害(자해) 행위일 뿐만 아니라 전혀 논리적이지도 못하다.

제2차 세계대전 후 분단되었던 독일, 베트남, 예멘은 민족의 再통일을 이룩했지만, 유독 한반도에서만은 남북의 첨예한 분열 대치 상태가 계속되어 오고 있다. 이것은 외세에 의한 남북 분단의 모순을 스스로의 힘으로 해결하지 못했을 뿐만 아니라 민족 내부적 갈등 요인에 의해 분단구조를 더욱 고착시켜 왔다는 얘기이다.

통일신라에서 분열된 후삼국은 45년 만에 하나로 통합되었지만, 남북한은 분단 이후 55년의 세월을 보내고도 아직 통일의 전망이 불투명하다. 그 이유에 대해 정치학자들은 한반도의 분단이 국제형 분단이면서도 內爭型(내쟁형)이 겹쳐진 복합구조여서 그만큼 그 모순의 해소가 어렵기 때문이라고 지적하고 있다. 우리 민족사의 세 번째 통일을 추동하는 제3의 리더십은 신라 문무왕과 고려 태조가 이미 제시했던 통일 전략에서 교훈을 얻어야 할 것 같다.●